창세기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세상과 사람의 시작

무지개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과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바라본 아들

창세기 9장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시작하지만, 인간의 저주로 끝나 갑니다.

홍수로 생명이 사라졌던 땅에 다시 사람들이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동물들을 포함한 모든 생물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무지개가 그 언약의 표징이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말씀이 끝난 뒤,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노아는 포도원을 심고 포도주에 취해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습니다. 아들 함은 그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립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몸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덮어 줍니다.

그리고 노아는 깨어나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하나님은 구름 속의 무지개를 바라보시고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9:16).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밖에 알립니다(9:22). 반대로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몸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립니다(9:23).

무엇을 보고, 본 것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이 장의 두 이야기를 연결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질문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라고 말씀하신 직후, 왜 노아의 입에서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종이 되라는 저주가 나옵니까?

창세기 9장은 이 긴장을 해결해 주는 설명을 곧바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행동을 나란히 놓아 독자가 그 차이를 보게 합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9장 본문 읽기 →

두려워하게 된 짐승들, 먹을 수 있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생명

창세기 9:1–4 본문 →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고 그들에게 말했다. 「번식하고 많아져라. 땅을 채워라.」창세기 9:1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창세기 1:28의 창조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도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수 이후에도 그 명령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녀를 낳고 살아가며 땅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 때문에 홍수 심판을 내리셨지만, 인간에게 처음 주신 번성의 복을 거두지는 않으십니다.

그런데 두 장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다른 생물들을 다스릴 책임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9장에서는 그 관계가 한층 거칠어진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땅의 모든 들짐승과 하늘의 모든 날짐승, 땅바닥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에게 너희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깃들 것이다. 그것들은 너희 손에 넘겨졌다.」창세기 9:2 · 본디새김

창세기 1장의 다스림에 관한 말씀에는 동물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공포를 느낀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가 더 이상 단순히 창조 세계의 조화로운 질서만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너희 손에 넘겨졌다」라는 표현에는 인간이 동물들을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이 권한은 구체적으로 확대되는 동시에 제한됩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푸른 풀을 주었듯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다.」창세기 9:3 · 본디새김

창세기 1:29–30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먹거리로 식물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도 인간의 먹거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그 변화가 왜 필요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허용은 아무런 제한 없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고기를 그 생명인 피와 함께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기 9:4 · 본디새김

고기를 먹어도 생명을 마음대로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구절은 고기, 생명, 피라는 세 낱말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피는 그 동물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피가 있는 채 살아 있는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라는 금지로 이해할 수도 있고, 고기를 먹을 때 피를 함께 먹지 말라는 일반적인 금지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장의 구체적인 적용 방식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피와 생명의 특별한 관계를 근거로 제한이 주어진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레위기 17:11–14에서는 이 관계가 더욱 명시적으로 설명됩니다. 생명이 피에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피를 먹는 일이 금지됩니다.

동물이 인간의 손에 넘겨졌다고 해서 그 생명이 아무런 제한 없이 인간의 소유가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물을 먹거리로 허락하시면서도, 그 생명을 가리키는 피에는 제한을 두십니다.

먹을 수 있다는 허락은 생명을 마음대로 대할 수 있다는 허락과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제한은 곧바로 인간의 생명에 관한 더 엄중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의 피를 흘리면 왜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시는가

창세기 9:5–7 본문 →

「또 너희 생명의 피에 대해서는 내가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 모든 짐승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는 사람에게도, 곧 그 사람의 형제에게 책임을 묻겠다.」창세기 9:5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제 동물의 피에서 사람의 피로 말씀을 옮기십니다.

「곧 그 사람의 형제에게」라는 표현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 하나님께 했던 대답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가 제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4:9)

가인은 형제를 지킬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에 대해 그 사람의 형제에게도 책임을 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형제’는 문맥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곧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자가 같은 인간에게 행한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에 관해 무관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자의 피도 흘려질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가 흘려질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기 9:6 · 본디새김

히브리어 원문은 ‘사람의 피를 흘리다’와 ‘그의 피가 흘려지다’라는 표현이 앞뒤로 대응하는 짧은 시적 문장입니다. 본문은 사람에 의한 형벌을 말하므로, 생명을 빼앗는 행위에 상응하는 중대한 처벌을 선언하는 구절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누가 어떤 절차에 따라 그 처벌을 집행해야 하는지, 고의적인 살인과 우발적인 죽음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는 여기서 규정하지 않습니다. 뒤의 율법에서 나타나는 재판과 살인 사건의 구분을 이 짧은 문장에 모두 포함시켜 읽을 수는 없습니다.

홍수 이전에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악하다고 평가하셨습니다(6:5). 홍수 이후에도 인간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8:21).

그런데 이제 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부르십니다.

인간이 악하다는 평가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선언은 성경 안에서 함께 놓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존엄이 그 사람의 도덕적인 완전함에 달려 있지 않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창조적 지위가 여전히 인간 생명의 가치를 설명하는 근거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생명을 빼앗는 일입니다.

모든 생명을 향한 책임과 인간 생명의 특별한 지위

동물은 인간의 먹거리로 허락됩니다. 그렇지만 그 생명을 가리키는 피를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그 피를 흘리는 행위에 특별한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힘을 주시면서 그 힘이 다른 생명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에 폭력으로 가득 찼던 세계와도 분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다시 처음의 복으로 마무리하십니다.

「너희는 번식하고 많아져라. 땅에서 우글거리고 그곳에서 많아져라.」창세기 9:7 · 본디새김

처음과 끝에 번성의 명령이 놓이고, 그 사이에 생명과 피에 관한 제한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인간의 번성입니다. 그러나 그 번성은 다른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사람의 피를 함부로 흘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땅을 사람으로 채우라는 복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책임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맺은 언약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맺은 언약

창세기 9:8–11 본문 →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있는 그의 아들들에게 말했다. 「보아라. 나는 너희와 너희 뒤를 이을 자손과 내 언약을 세운다.」창세기 9:8–9 · 본디새김

창세기 6장에서 이미 하나님은 노아와 자신의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6:18). 이제 그 언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또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날짐승과 집짐승과 너희와 함께 있는 땅의 모든 들짐승과도 세운다.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에서 땅의 모든 짐승에 이르기까지다.」창세기 9:10 · 본디새김

언약을 언제나 두 사람이 서로 조건을 제시하고 합의하는 계약으로만 생각하면 이 본문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언약의 조건을 협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자신이 하실 일을 선언하시고, 그 약속의 범위 안에 살아 있는 존재들을 포함시키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나는 너희와 내 언약을 세우겠다. 모든 육체가 다시는 홍수의 물로 멸절되지 않을 것이며, 땅을 파괴하는 홍수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창세기 9:11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지구 어느 지역에도 홍수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앞서 있었던 것처럼 생명 전체를 멸절시키고 땅을 파괴하는 홍수를 다시 일으키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앞으로 완전히 선해질 경우에만 이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을 경우에만 홍수를 반복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언약의 선언에는 그런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피를 흘리는 일에 책임을 물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인 책임과 세계를 다시는 홍수로 멸절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은 구별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이 죄를 지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악함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럼에도 생명의 세계를 존속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이후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특별한 약속을 주시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창세기 9장에는 인간과 다른 생물들을 모두 포함하는 언약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세계는 특정한 민족이나 가족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살아갈 땅과 그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까지 포함됩니다.

무지개를 바라보시는 분은 누구인가

창세기 9:12–17 본문 →

하나님은 이제 언약의 표징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다. 그것이 나와 땅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창세기 9:13 · 본디새김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다는 것과 그것이 언약의 표징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땅 위에 구름을 일으키고 구름 속에 무지개가 나타날 때,」 「나는 나와 너희와 모든 육체에 속한 모든 생물 사이에 있는 내 언약을 기억하겠다. 물이 다시는 모든 육체를 멸망시키는 홍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창세기 9:14–15 · 본디새김

우리는 무지개를 사람이 바라보는 표징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무지개를 보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무지개를 보시고 기억하시겠다고 직접 말씀하시는 분은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입니다.

「무지개가 구름 속에 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과 땅 위의 모든 육체에 속한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려고 그것을 바라보겠다.」창세기 9:16 · 본디새김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기 위한 표징인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은 어떤 사실을 잊지 않고 계시다는 인지적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 기억에 따라 행동하시거나, 자신이 맺으신 관계와 약속을 지속해서 지키시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8:1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생물들을 기억하셨다고 했을 때에도, 바로 뒤에서 물이 물러가도록 하시는 행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9장에서도 하나님의 기억은 언약에 따라 행동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무지개는 인간이 하나님께 약속을 잊지 말라고 요구하는 표징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선언하시면서 세우신 표징입니다.

언약의 상대가 점점 넓어지다

13절에서는 무지개가 「나와 땅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십니다.

15절에서는 「나와 너희와 모든 육체에 속한 모든 생물 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과 땅 위의 모든 육체에 속한 모든 생물 사이」라고 하십니다.

17절에서는 다시 「나와 땅 위의 모든 육체 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지개에 관한 설명이 끝날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육체가 언약의 대상으로 언급됩니다.

구름은 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홍수 이야기에서 하늘의 창이 열리고 비가 내렸을 때, 그 물은 심판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구름이 나타날 때마다 그 구름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리게 하는 표징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에 관한 말씀은 17절에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18절부터는 갑자기 노아의 가족에게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이제 독자는 하나님의 언약 아래에서 살아가게 된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무지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케셰트입니다. 이 낱말은 전쟁이나 사냥에서 사용하는 활을 뜻할 때에도 사용됩니다. 문맥에 따라 하늘에 나타나는 무지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활을 구름 속에 두셨다는 표현을, 무기를 내려놓은 전사가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홍수라는 심판 이후 하나님이 다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땅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문맥에도 잘 어울리는 해석입니다. 다만 본문은 하나님이 활을 내려놓으셨다거나 전쟁을 끝내셨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활의 방향이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시겠다는 동작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낱말의 의미와 문맥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상징적 읽기이지, 본문이 명시한 사건은 아닙니다.

새로 시작된 세상에서 다시 드러난 인간의 수치

창세기 9:18–23 본문 →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었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였다.창세기 9:18 · 본디새김

아직 가나안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록자는 그 이름을 미리 꺼내 놓습니다.

이 셋이 노아의 아들들이었다. 이들에게서 나온 사람들이 온 땅으로 퍼져 나갔다.창세기 9:1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으로 이어질 창세기 10장의 민족 계보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 넓은 인간 세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창세기는 다시 한 가족의 장막 안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포도원을 심은 노아

땅을 일구는 사람인 노아는 포도원을 심기 시작했다.창세기 9:20 · 본디새김

물이 온 땅을 덮었던 세계에서 이제 사람이 땅을 일구고 포도원을 심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사람에서 땅을 일구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아담은 땅에서 나왔고, 땅을 일구며 살아야 했습니다. 가인도 땅바닥을 일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노아가 다시 땅을 일굽니다.

하나님은 앞 장에서 씨 뿌림과 거둠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8:22). 이제 노아는 실제로 땅을 일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회복된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고,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있었다.창세기 9:21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앞서 노아가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은 사실과 대비됩니다(6:9). 방주를 만들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던 사람이 이제 술에 취해 취약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노아를 흠 없는 영웅으로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함은 보고 알렸고, 셈과 야벳은 덮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밖에서 자기 두 형제에게 알렸다.창세기 9:22 · 본디새김

본문은 함이 그 모습을 보고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조롱했는지, 놀랐는지, 악의를 품고 떠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두 형제의 행동과 비교하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져다가 둘의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었다. 그들의 얼굴은 뒤쪽을 향했고, 그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았다.창세기 9:23 · 본디새김

본문은 단지 두 형제가 아버지에게 옷을 덮어 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록자는 그들이 아버지의 몸을 보지 않으려고 어떻게 행동했는지까지 설명합니다.

두 형제는 아버지를 덮어 주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시선도 돌립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노출된 상태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리고, 자신들도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취약한 상태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행동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을 모든 상황에서 타인의 잘못을 덮어 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폭력과 살인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치를 함부로 노출하지 않는 일과 잘못에 대한 정당한 책임을 묻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이 약해진 모습을 보는 것은 때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낼 것인지, 그 사람의 취약함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것인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술에서 깨어나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에서는 노아가 술에서 깨어나 「자기 막내아들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다는 사실보다 더 큰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만듭니다. 또한 레위기 18:7–8에서는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드러내는 표현이 근친 성관계의 금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창세기 9장에서도 함의 행동이 성적인 침해를 뜻하는 것이라고 읽는 해석들이 가능합니다. 아버지에게 직접 성적인 수치를 가하는 행동이 있었다거나, 아버지의 아내와 관계를 맺었다는 식의 해석도 제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9장 자체는 그런 행위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서술하는 것은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밖에 알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형제가 아버지의 몸을 보지 않고 덮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함이 단순히 아버지를 조롱했는지, 그보다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함이 행동했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받는가

창세기 9:24–27 본문 →

노아는 술에서 깨어나 자기 막내아들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았다.창세기 9:24 · 본디새김

그런데 노아가 깨어나 가장 먼저 하는 말은 매우 무겁습니다.

그가 말했다. 「가나안에게 저주가 있기를. 그가 자기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되기를.」창세기 9:25 · 본디새김

앞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밖에 알린 사람은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주받는 사람은 함이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저주의 대상은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다

가나안은 앞서 함의 아들로 소개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가나안 자신이 노아의 장막에서 어떤 일을 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가나안이 아버지 함의 행동에 직접 가담했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나안이 저주받나요?

이 질문에 대한 명시적인 답은 창세기 9장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가나안도 사건에 관여했을 것이라고 읽거나, 아버지 함에게 내려질 결과가 그의 아들 가나안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하거나,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이의 후대 관계를 설명하는 기능을 한다고 보는 여러 읽기가 가능합니다. 본문은 저주가 누구에게 향하는지는 분명하게 말하지만, 왜 함의 행동이 가나안에 대한 저주로 이어지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인가?

1절에서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25절에서 저주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노아입니다.

노아는 깨어나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저주를 명령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가나안을 저주하라고 지시하신 것도 아니고, 그 저주가 의로운 판결이라고 직접 선언하신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서 사람이 말하는 축복이나 저주가 이후의 역사와 연결되는 경우는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의 말이 전혀 의미 없는 분노의 외침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입에서 나온 말과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은 구별해야 합니다.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인간 생명의 가치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뒷부분에서 노아는 자기 후손 가운데 하나가 다른 형제들의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두 선언을 아무런 구분 없이 같은 종류의 하나님의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종들의 종」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종속의 상태를 강하게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을 돕거나 섬기는 선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아래에 놓이는 비천한 지위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가나안의 ‘형제들’을 구체적으로 누구로 보아야 하는지, 뒤의 26–27절과 어떤 관계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가나안이 다른 이들에게 종속되기를 바라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역사적으로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특히 이른바 ‘함의 저주’라는 이름 아래 특정 인종의 노예화를 정당화하는 해석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첫째, 노아가 저주한 사람은 함이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둘째, 본문에는 피부색이나 인종적 열등성에 관한 말이 없습니다.

셋째, 창세기 10:6은 함의 아들들을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으로 구별합니다. 가나안에게 내려진 말을 함의 모든 후손이나 특정 인종 전체에 적용할 근거는 없습니다. 넷째, 노아의 저주를 하나님이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다른 인간을 노예로 삼으라고 명령하신 말씀으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특정 인종이나 민족이 본래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종속되도록 창조되었다는 주장에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내용과 범위를 넘어섭니다. 더욱이 같은 장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무시한 채 노아의 저주만을 절대적인 인간 서열의 선언으로 사용하는 것은 창세기 9장 전체의 흐름과도 맞지 않습니다.

셈을 축복하는 대신 셈의 하나님을 찬양하다

노아의 말은 저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또 말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는 찬양받으시기를. 가나안은 그들의 종이 되기를.」창세기 9:26 · 본디새김

이것은 축복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말만으로 셈의 모든 후손이 언제나 의롭고 다른 후손들은 악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도덕적 구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에게 넓은 터를 주시기를. 셈의 장막들에 머물기를. 가나안은 그들의 종이 되기를.」창세기 9:27 · 본디새김

더욱이 셈과 야벳에 관한 말의 사이사이에는 가나안의 종속에 대한 선언이 반복됩니다. 홍수에서 살아남은 한 가족의 장막에서 다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구분하고 종속을 선언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 장면은 독자에게 불편함을 남깁니다.

조금 더 깊이

‘막내아들’은 가장 어린 아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다른 아들들에 비해 어린 아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문맥에서는 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이 표현만으로 세 아들의 정확한 출생 순서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이의 후대 관계를 설명하는 기능을 한다는 읽기에는 창세기 전체의 흐름에서 근거가 있습니다. 다음 장은 노아의 후손들이 어떻게 여러 민족으로 퍼져 나갔는지를 보여 주고, 창세기 뒤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과 가나안 땅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대의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관계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왜 무고하게 보이는 가나안에게 저주가 내려지는지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터를 주다’는 표현에는 히브리어의 소리놀이가 있습니다. ‘넓히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야프트이고, ‘야벳’이라는 이름은 예페트입니다. 두 낱말의 소리가 가까워서, 야벳에게 넓은 터를 주시라는 축복의 말 안에 그의 이름이 되울립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셈의 장막들에 머물기를」은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앞에 등장한 야벳이 셈의 장막들에 머물기를 바라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셈과 야벳 사이의 공존이나 거주 관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셈의 장막들에 머무시기를 바라는 말로 읽는 길도 있습니다. 이 경우 셈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에 대한 앞선 찬양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어의 동사 형태만으로는 이 두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특정 민족의 영토 확장이나 후대의 종교적 사건에 관한 정확한 예언이라고 곧바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시작하여 사람의 저주를 거쳐 죽음으로 끝나다

창세기 9:28–29 본문 →

노아는 홍수 뒤에 삼백쉰 해를 살았다. 노아는 평생 구백쉰 해를 살았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창세기 9:28–29 · 본디새김

창세기 9장의 마지막은 짧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창세기 5장의 계보 형식으로 돌아갑니다. 홍수에서 살아남은 사람,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고 기록된 사람, 방주를 만들고 생물들을 보존한 사람도 결국 죽습니다.

창세기 8장과 9장은 홍수 직후의 사건들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지만, 그 뒤의 오랜 세월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포도원 사건 이후 아들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가나안을 향한 저주의 말이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시간이 단 한 문장으로 지나갑니다.

이 결말은 노아의 이야기를 영웅의 완전한 승리담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홍수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수치와 가족의 갈등을 경험했고, 마침내 죽었습니다.

인간의 손에 맡겨진 생명, 하나님의 기억에 맡겨진 세계

창세기 9:1–29 본문 →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존중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받은 인간이 언제나 생명을 존중하며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기 위해 바라보십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바라보지 않습니다. 노아의 가족 안에 수치와 갈등이 나타났지만,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다시는 홍수로 멸절시키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노아의 수치와 가족의 갈등을 보여 준 뒤, 마지막으로 노아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지개를 바라보시며 노아뿐 아니라 그의 후손과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라는 한 사람의 긴 생애는 끝났지만, 그 언약은 한 사람의 수명에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름 속에 두신 무지개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을 향한 약속의 표징으로 남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