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하박국의 기도

세상이 무너져도 발을 딛게 하시는 하나님

하박국서는 뜻밖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처음에 하박국은 세상에 가득한 폭력을 보며 하나님이 왜 침묵하시는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셨지만, 그 대답은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이르러 하박국은 더 이상 하나님께 항변하지 않습니다. 대신 노래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요?

하박국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그의 몸은 떨립니다. 앞으로 닥칠 고난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고,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가축마저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하박국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고난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3장은 하박국이 하나님의 행동을 기억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어떻게 나타나셨고, 무엇을 위해 싸우셨으며, 누구를 구하셨는지를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는 그의 태도를 바꿉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83장 본문 읽기 →

진노 가운데서도 자비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박국 3:1–2 본문 →

예언자 하박국의 기도. 시기오놋에 맞추어.하박국 3:1 · 본디새김

3장은 예언자의 기도라는 표제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일반적인 산문이 아니라 노래의 형태를 지닙니다.

「시기오놋」이라는 말은 정확한 뜻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시편 7편의 표제에도 비슷한 형태인 「시가욘」이 등장합니다. 음악이나 낭송의 방식과 관련된 표현일 가능성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가락이나 연주법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 장에는 「셀라」라는 표지가 세 차례 등장하며(3:3, 9, 13), 마지막에는 「지휘자에게. 내 음악에 맞추어」라는 지시도 붙어 있습니다. 정확한 연주 방식은 알 수 없지만, 이 기도가 노래로 불릴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 노래는 두려움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 저는 당신에 관한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여호와야훼, 세월 한가운데서 당신의 일을 되살려 주십시오. 세월 한가운데서 그것을 알려 주십시오. 진노 가운데서도 자비를 기억해 주십시오.」하박국 3:2 · 본디새김

여기서 하박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바벨론의 군사력이 아닙니다. 그는 「당신에 관한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하나님께 심판을 중단해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일이 다시 살아 움직이고,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게 되기를 구합니다. 이는 앞 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해진 때를 향해 나아간다고 선언하신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지만 그 성취를 아직 보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드러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이 요청을 「세월 한가운데서」 두 번 반복합니다. 아직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간, 고난과 기다림이 계속되는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의 행동을 보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심판할 만한 악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노만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되지 않기를 구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흔히 하나님이 자신의 뜻과 약속에 따라 행동해 주시기를 구하는 방식입니다. 하박국은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바로 그분의 자비를 근거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4:6–7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지만, 죄를 무조건 없던 일로 여기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박국은 이 두 측면 가운데 하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정의롭게 심판하시기를 바라면서도, 그 심판 가운데 생명을 구하시는 자비가 드러나기를 구합니다. 이어지는 장대한 노래는 그 기도에 담긴 믿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광야에서 오시는 하나님 —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걸음

하박국 3:3–7 본문 →

하나님이 데만에서 왔고, 거룩한 이가 바란 산에서 왔다. 셀라. 그의 위엄이 하늘을 덮었고, 그를 향한 찬양이 땅을 가득 채웠다.하박국 3:3 · 본디새김

하박국이 위협을 느끼는 세계에서는 강대한 제국들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는 하나님이 그 제국들의 권력을 빌려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광야에서부터 위엄을 드러내며 오십니다.

이것은 2:14에서 온 땅이 여호와야훼의 영광에 대한 앎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선언한 말씀을 시적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제 그 영광이 하나님의 출현이라는 생생한 장면으로 표현됩니다.

그 광채는 햇빛 같았다. 그의 손에서 두 빛줄기가 뻗어 나왔고, 거기에 그의 힘이 숨겨져 있었다.하박국 3:4 · 본디새김

우리는 보통 빛이 밝게 드러나면 모든 것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눈부신 광채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감추는 자리입니다. 사람이 볼 수 있는 영광은 그분의 힘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 앞에서 역병이 걸어갔고, 그의 발 뒤를 따라 불꽃이 나아갔다.하박국 3:5 · 본디새김

역병과 불꽃이 마치 하나님의 앞뒤에서 움직이는 수행자들처럼 묘사됩니다. 사람에게 재앙이 될 수 있는 힘들조차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움직이는 존재들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모든 질병이나 재난이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벌이라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현현이 인간에게 익숙한 안전한 세계의 질서를 압도할 만큼 두렵고 강력하다는 시적 묘사입니다.

그가 멈춰 서서 땅을 뒤흔들었고, 바라보아 민족들을 소스라치게 했다. 태고의 산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오랜 언덕들이 몸을 낮추었다. 그의 걸음은 영원하다.하박국 3:6 · 본디새김

하나님이 거대한 전투를 벌이거나 온 힘을 쏟으셔야만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서시고 바라보시는 것만으로도 땅과 민족들이 반응합니다.

산들은 「태고의」 산들이고, 언덕들은 「오랜」 언덕들입니다. 인간의 삶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존재들입니다. 사람은 산을 바라보며 변하지 않는 견고함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그 산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언덕들이 몸을 낮춥니다.

오래되었다는 것과 영원하다는 것은 다릅니다. 태고부터 존재한 것처럼 보이는 산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흔들리지만, 하나님의 행하심은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지속적입니다.

나는 고난에 짓눌린 구산의 천막들을 보았다. 미디안 땅의 천막 휘장들이 떨었다.하박국 3:7 · 본디새김

하나님의 현현은 하늘과 산에만 영향을 미치는 장엄한 광경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까지 흔들어 놓습니다.

하박국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역사적 격변을 하나님의 더 큰 위엄 안에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위엄이 단지 세계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면, 두려움은 더욱 커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두려운 힘을 행사하시는가요?

조금 더 깊이

데만은 에돔과 관련된 남쪽 지역의 이름이고, 바란은 이스라엘의 광야 전승에 등장하는 지역입니다. 이 지명들은 하나님의 현현을 시나이와 남쪽 광야의 기억 속에 놓습니다. 신명기 33:2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시나이에서 오시고 세일과 바란에서 빛을 비추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사사기 5:4–5에서도 드보라의 노래는 여호와야훼가 세일과 에돔에서 행진하실 때 땅이 흔들리고 산들이 떨었다고 노래합니다. 하박국 3장은 바로 그와 같은 오래된 시적 표현을 이어받습니다. 구산이 정확히 어느 지역이나 집단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미디안과 나란히 등장하며 천막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남쪽 광야와 관련된 집단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강과 바다를 향한 분노인가, 백성을 위한 구원인가

하박국 3:8–11 본문 →

「여호와야훼, 당신이 당신의 말들을 타셨을 때, 강들을 향해 분노하셨습니까? 당신의 노여움이 강들을 향한 것이었습니까? 당신의 격노가 바다를 향한 것이었습니까? 당신의 병거들은 구원이었습니다.」하박국 3:8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노래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묘사했습니다. 이제 하박국은 하나님께 직접 질문합니다. 같은 질문이 형태를 바꾸어 세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강이나 바다가 미워서 싸우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강과 바다를 움직이시는 그 능력이 구원이라는 목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이스라엘은 앞에는 바다가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들에게 바다는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이었지만, 여호와야훼는 바닷물을 갈라 길을 여셨습니다. 여호수아 3:14–17에서도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강물이 멈추는 일이 나타납니다.

하박국의 노래가 두 사건만을 정확히 순서대로 재현한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출애굽과 광야, 가나안 진입을 비롯한 구원의 기억들이 하나님의 장대한 행진이라는 하나의 시적 광경 속에 겹쳐져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더 이상 길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길을 여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활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맹세들, 막대들, 말. 셀라. 당신은 강들로 땅을 가르셨습니다.」하박국 3:9 · 본디새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전사처럼 무장하신 모습과 그분이 강들로 땅을 가르시는 장면이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산들이 당신을 보고 몸부림쳤습니다. 쏟아지는 물이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깊은 물이 자기 소리를 내고, 자기 두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하박국 3:10 · 본디새김

물에는 실제로 손이 없지만, 시인은 물이 하나님 앞에서 반응하는 모습을 사람처럼 그립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깊은 물조차 하나님께 무관심한 채 남아 있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날아가는 당신의 화살 빛에, 당신의 창이 번쩍이는 광채에 해와 달이 거처에 멈춰 섰습니다.」하박국 3:11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행위는 해와 달의 일상적인 질서마저 압도하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연 세계 전체가 반응하도록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상대하시는가요?

조금 더 깊이

9절의 가운데 놓인 「맹세들, 막대들, 말」은 히브리어 문장 자체가 매우 압축적입니다. 세 낱말이 이어지지만 어떤 문법적 관계로 결합되어 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활과 연결된 무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맹세나 말씀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만으로 어느 해석이 확실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10절에서 손을 드는 행동을 항복이나 경배로 읽을 수도 있지만, 본문 자체는 어느 한 의미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시편 77:16–20에서도 물들이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바다를 통과하시면서 백성을 인도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하박국의 노래도 그와 같은 구원의 시적 전통과 깊이 연결됩니다. 11절 원문의 동사 관계는 다르게 분석될 여지가 있어, 해와 달이 화살의 빛에 멈추었다는 해석 외에도 다른 읽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의 문면을 따르면, 하나님의 광채 앞에서 해와 달의 움직임조차 멈춰서는 장면입니다. 여호수아 10:12–13에서 해와 달이 멈추는 사건과도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하박국이 그 사건만을 직접 묘사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구하기 위해 싸우시는가

하박국 3:12–15 본문 →

「당신은 격분하여 땅을 행진하셨고, 분노하여 민족들을 타작하셨습니다.」하박국 3:12 · 본디새김

타작은 곡식을 얻기 위해 수확한 이삭을 두드리거나 밟아 알곡을 분리하는 작업입니다. 여기서는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압도적인 심판을 묘사하는 비유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행동은 단순한 자연 현상의 격변이 아닙니다. 인간 세계의 폭력과 악을 심판하는 행동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백성을 구하러 나가셨습니다. 당신의 기름부음 받은 이와 함께 구하러 나가셨습니다. 당신은 악한 자의 집에서 머리를 짓부수셨고, 기초를 목까지 드러내셨습니다. 셀라.」하박국 3:13 · 본디새김

하박국은 진노 가운데서도 자비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구원이 하나의 행동 안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노래합니다.

압제하는 자에게는 심판이지만, 압제당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나타내는 머리와 목, 건물의 구조를 나타내는 집과 기초가 하나의 이미지 안에 겹쳐져 있습니다. 악한 권력의 겉모습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이 의지하던 토대까지 드러내어 무너뜨리는 심판입니다.

「당신은 그의 막대들로 그의 전사들의 머리를 꿰뚫으셨습니다. 그들은 저를 흩어 버리려고 폭풍처럼 몰려왔습니다. 그들의 환희는 은밀한 곳에서 가난한 이를 집어삼킬 때와 같았습니다.」하박국 3:14 · 본디새김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무력함이 공격할 기회가 되고, 그 공격의 성공이 기쁨이 됩니다.

이 표현은 하박국서 전체의 폭력 문제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신보다 힘이 약한 나라를 정복했다는 이유만으로 제국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짓밟고, 특히 약한 사람을 먹잇감처럼 취급하는 폭력에 맞서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강한 자들이 기뻐하던 일을 뒤집으십니다.

「당신의 말들로 바다를, 거대한 물더미를 밟으셨습니다.」하박국 3:15 · 본디새김

8절에서 바다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질문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이 바다를 밟고 지나가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출애굽 때 바다가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길을 내어 주었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바다를 지나가시는 분입니다.

이제 노래는 그 장엄한 광경에서 다시 예언자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신의 기름부음 받은 이」는 다윗 왕조의 왕을 가리킨다는 이해가 가능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에서 기름부음 받은 이의 신분이나 이름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또한 13절의 전치사 구조를 어떻게 분석하느냐에 따라 기름부음 받은 이와 함께 구원하러 나가신다는 뜻으로, 혹은 기름부음 받은 이를 구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길도 있습니다. 어느 쪽도 이 구절만으로 최종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후대에 이 표현을 메시아적 기대와 연결하여 읽을 수는 있지만, 하박국 본문에서 곧바로 특정한 미래 인물의 이름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14절의 대명사와 일부 명사는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전사들」에 해당하는 낱말의 뜻도 확실하지 않고, 전사들을 꿰뚫는 데 사용된 막대가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 역시 명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전투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완전히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기다리다

하박국 3:16 본문 →

나는 듣고 창자가 떨렸다. 그 소리에 내 입술이 떨렸다. 썩음이 내 뼛속으로 들어왔고, 나는 내 자리에서 떨었다. 나는 우리를 습격하는 백성에게 닥칠 고난의 날을 조용히 기다리겠다.하박국 3:16 · 본디새김

그는 하나님이 백성을 구하기 위해 싸우신다는 노래를 부른 뒤에도 몸을 떱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행위가 가진 압도적인 위엄과 앞으로 닥칠 고난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작용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썩음이 내 뼛속으로 들어왔고」라는 표현은 그의 두려움이 얼마나 깊은지를 강렬하게 보여 줍니다. 뼈는 몸을 지탱하는 단단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뼛속이 썩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가장 깊은 힘마저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워하지만 기다리기로 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마음이 평온하고 감정이 안정된 상태와 같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깊은 공포를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떨렸지만, 그가 의지하는 대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의 마지막 부분에는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문장 연결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예언자가 자신들을 침략한 민족에게 닥칠 고난의 날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침략자들이 쳐들어오는 고난의 날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앞의 해석을 따릅니다. 그 읽기에 따르면 하박국은 자신들을 습격하는 민족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믿으며 그날을 기다립니다.

모든 먹을 것이 사라져도

하박국 3:17–18 본문 →

무화과나무가 싹을 틔우지 않고, 포도나무들에 소출이 없고, 올리브나무의 소출이 기대를 저버리고, 밭들이 먹을 것을 내지 않고, 우리에서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들에 소가 없더라도,하박국 3:17 · 본디새김

하박국은 이제 하나님의 장엄한 현현을 노래하던 세계에서 아주 평범한 농경 생활로 내려옵니다.

먼저 무화과나무가 싹을 틔우지 않습니다. 열매를 기대할 출발점부터 무너집니다. 포도나무에는 소출이 없습니다. 포도를 수확하여 먹거나 저장할 수 없습니다.

올리브나무의 소출도 기대를 저버립니다. 음식과 생활에 중요한 기름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밭들은 먹을 것을 내지 않습니다. 곡식과 같은 기본적인 양식조차 확보하기 어려워집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서는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습니다. 양과 소는 식량의 공급원일 뿐 아니라 가계의 중요한 재산이었고, 소는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으로도 쓰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박국이 묘사하는 상황은 단순히 한 해의 수확이 조금 나쁜 정도가 아닙니다. 농경 사회의 생계를 지탱하는 기반이 전반적으로 무너진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이 모든 가능성을 말한 뒤, 예상하지 못한 고백을 합니다.

나는 여호와야훼 안에서 환희하겠다. 내 구원의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겠다.하박국 3:18 · 본디새김

17절에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생계의 기반이 사라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18절에서는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한 분을 바라봅니다.

「무화과나무가 싹을 틔우지 않고」로 시작되는 말씀은 모든 상실 앞에서도 무조건 즐거운 감정을 만들어 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박국 자신이 그러한 상실과 고난의 가능성 앞에서 얼마나 심하게 떨었는지를 바로 앞에서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여호와야훼 안에서」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기쁨의 근거를 자신의 상황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금 당장 모든 물질적 손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예측과 다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하셨던 분이며 앞으로도 구원을 이루실 분이라는 믿음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는 아직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구원을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하박국의 기쁨은 충분히 소유했기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여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뻐하겠다고 말한 다음, 실제로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 누구에게서 오는지 고백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러한 재난의 이미지는 전쟁으로 농토와 가축이 파괴되는 상황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여섯 가지 상실이 어떤 특정한 전쟁이나 재난으로 실제 일어났다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상실을 가정하면서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지를 드러내는 시적 표현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암사슴의 발 —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걸을 수 있게 된 사람

하박국 3:19 본문 →

주 여호와야훼는 내 힘이다. 그가 내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만들었고, 나를 내 높은 곳들 위로 걷게 한다. 지휘자에게. 내 음악에 맞추어.하박국 3:19 · 본디새김

암사슴은 압도적인 힘으로 다른 동물을 제압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험한 지형에서도 민첩하게 움직이고 발을 안정적으로 디딜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제압하는 능력이 아니라, 어려운 길에서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걸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에 제자리에 서 있기조차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험한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그에게서 모든 위험을 없애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험한 길을 평지로 바꾸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대신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발을 주셨습니다.

「나를 내 높은 곳들 위로 걷게 한다」라는 표현도 이 이미지와 이어집니다. 높은 곳은 멀리서 보면 위험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사슴은 그런 지형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나타나시자 태고의 산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오랜 언덕들이 몸을 낮추었습니다(3:6). 이제 그 하나님이 하박국을 높은 곳들 위로 걷게 하십니다.

산을 무너뜨리는 힘과 한 사람을 걷게 하는 힘이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고백은 시편 18:32–33과도 가까이 연결됩니다. 그 시편에서는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만들어 높은 곳에 서게 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단순히 적을 압도하는 능력이 아니라, 위험한 곳에서도 서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능력으로 표현합니다.

떨리는 몸으로 시작해 걷는 발로 끝나는 노래

하박국 3:1–19 본문 →

하박국은 과거의 구원 경험을 기억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앞으로의 행동을 신뢰합니다. 지나간 사건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하나님의 성품을 중심으로 연결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알게 되어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에 노래합니다.

하박국은 그분을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가 걸어갈 길이 평탄해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포도나무가 회복되고, 양 떼가 돌아오고, 외양간에 소가 다시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 모든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에게는 이제 그 길을 걸을 힘이 있습니다.

그의 두려움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 여호와야훼가 그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끝나는 노래의 마지막에는 「지휘자에게. 내 음악에 맞추어」라는 말이 남아 있습니다. 두려워하던 한 예언자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다른 사람들도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남습니다.

험한 길 앞에서 떨리는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아직 무너진 삶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들도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노래하는 마지막 장면은 모든 고난이 사라진 평지가 아닙니다.

높고 험한 곳을 걷는 암사슴의 발입니다.

그리고 그 발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