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1–12장 ·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들

약속을 받지 못하고도 믿음으로 산 사람들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의 위인들이 등장하는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벨과 에녹, 노아와 아브라함, 모세와 라합, 그리고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장을 끝까지 읽으면 이상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놀라운 승리를 얻었습니다. 왕국을 이기고, 사자의 입을 막고, 불의 힘을 껐습니다. 죽었던 사람을 다시 돌려받기도 했습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똑같이 믿음으로 살았지만 끝내 죽임을 당했습니다. 돌에 맞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떠돌며 궁핍과 학대를 견뎠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두 무리를 구별해서 한쪽은 믿음이 강하고 다른 쪽은 약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두를 가리켜 「이들은 모두 믿음을 통해 증언을 받았으면서도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39절).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도, 믿음으로 고난을 겪은 사람들도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에게 아직 받지 못한 약속이 남아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는데도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할 수 있다면,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앞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뒤로 물러서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권했습니다. 이제 그는 믿음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를 통해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장은 단순히 본받을 만한 인물들을 모아 놓은 목록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야기를 배열하여 믿음에 대한 독자의 생각을 조금씩 바꾸어 놓습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행동한 사람들을, 이어서 약속을 받고도 나그네로 살았던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과 믿음으로 죽어 간 사람들을 나란히 놓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절에서 모든 이야기를 뒤집는 듯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장은 개인들의 영웅담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이 여러 세대의 사람들을 하나의 약속 안에 묶으시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읽는 시간 37분소단락 1111장 본문 읽기 →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

히브리서 11:1–3 본문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브리서 11:1 · 본디새김

이 구절을 믿음에 관한 철학적 정의처럼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11장의 문맥에서 저자는 믿음의 모든 측면을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아직 받지 못한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의 「바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말하듯, 믿음은 아직 자기 손에 들어오지 않은 것, 눈앞에 드러나지 않은 것과 관계됩니다.

믿음은 단지 강한 확신인가

「바탕」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는 기초가 되는 실재를 가리킬 수도 있고, 어떤 것에 대한 확신이나 확고한 태도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에서는 하나님의 본질 또는 실재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되지만, 3:14에서는 처음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붙드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래서 11:1도 두 방향으로 읽힙니다. 하나는 믿음이 바라는 것들을 현재의 삶에서 확실한 실재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읽기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바라는 것들을 굳게 붙들게 하는 확신이라는 읽기입니다. 「증거」에 해당하는 엘렝코스(ἔλεγχος) 역시 논증의 증거나 내적인 확신을 가리킬 수 있어, 객관적인 확실성과 주관적인 확신 중 어디에 무게를 둘 것인지가 논의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문맥은 적어도 한 가지 오해를 막아 줍니다.

믿음이란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강하게 바라면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정신적 능력이 아닙니다. 이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을 현실로 창조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신뢰했기 때문에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기준으로 행동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확실성은 믿는 사람의 심리적 강도 자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6절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보이는 세계보다 먼저 있었던 말씀

3절에서 저자는 첫 번째 믿음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아벨이나 아브라함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등장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시대들이 하나님의 말로 갖추어졌다는 것을, 그래서 보이는 것이 드러나 보이는 것들에서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히브리서 11:3 · 본디새김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기 전에 독자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는 그저 보이는 것들만으로 설명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갖추어진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말로 갖추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저자의 관심은 창조의 과학적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믿음의 가장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세계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곧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기초가 됩니다.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심판을 두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보지 못한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견뎠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는 능력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대들」은 그리스어 아이오네스로, 시간의 시대들을 가리킬 수 있지만 히브리서 1:2와 11:3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그 역사를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의 마지막 표현은 보이는 것이 「드러나 보이는 것들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창조의 근원이심을 강조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무로부터의 창조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모두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죽은 사람의 믿음이 아직 말한다

히브리서 11:4–7 본문 →

첫 번째 인물은 아벨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큰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의롭다는 증언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예물을 두고 증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그는 죽었으면서도 아직 말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1:4 · 본디새김

창세기 4장의 본문은 가인의 제물이 거절된 모든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벨이 양을 바쳤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고 가인이 땅의 소산을 바쳤기 때문에 거절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도 그가 어떤 종류의 제물을 바쳤는가보다,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께 바쳤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벨은 형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성공이나 승리로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가 여전히 말한다고 합니다.

창세기 4:10에서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히브리서 12:24에서는 예수님의 피와 아벨의 피가 비교됩니다. 아벨이 아직 말한다는 표현은 그의 믿음과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증언이 그의 죽음 이후에도 의미를 지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가치는 그 사람의 생애가 얼마나 좋은 결과로 끝났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은 에녹

그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에녹입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는 사람들이 몇 년을 살았고 죽었다는 문장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에녹에 이르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으므로 그가 더 이상 있지 않았다는 다른 결말이 등장합니다(창세기 5:24). 히브리서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도록 옮겨졌고,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는 증언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히브리어 창세기와 그리스어 사이의 표현 차이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창세기는 에녹이 하나님과 걸었다고, 그리스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이 그리스어 표현을 이어받아 믿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정반대지만 둘 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과 고난을 피할 수 있다는 결론은 처음부터 차단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6절은 인물들의 이야기 사이에 들어 있는 설명입니다.

믿음 없이는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는 그분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을 찾는 이들에게 갚아 주시는 분이 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6 · 본디새김

믿음의 대상이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두 번째 요소, 곧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믿음을 단순히 종교적 보상에 대한 기대로 축소하면 안 됩니다. 이 장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생전에 눈에 보이는 보상을 받지 못한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믿음은 당장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는 기대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시며, 그들의 믿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신뢰입니다. 앞 장에서도 저자는 약속하신 분이 믿음직하시기 때문에 소망의 고백을 붙들라고 했습니다(10:23).

믿음의 중심은 바로 그분의 신실하심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

7절의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을 두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 말씀을 따라 방주를 만듭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던 때에는 아직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동할 수 있었던 근거는 눈앞의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 주신 미래를 신뢰하여 현재의 행동을 바꾸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믿음은 자기 한 사람의 내면적 확신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집안의 구원을 위해」 방주를 지었고, 그 믿음으로 「세상을 죄 있다고 판결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노아가 법정에 앉아 세상 사람들을 심판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신뢰하여 행동한 그의 삶이, 그 경고를 무시한 세상의 불신앙을 드러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세 사람의 행동은 다르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생존 여부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결과와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자는 믿음의 가장 긴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다

히브리서 11:8–12 본문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유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습니다.히브리서 11:8 · 본디새김

저자는 아브라함의 모험심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가 떠난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아무런 근거 없이 낯선 곳으로 뛰어드는 용기가 아니라, 부르시는 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착한 뒤에도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9절은 그가 약속의 땅에서 「남의 땅에서처럼」 나그네로 지냈다고 말합니다. 약속받은 땅에 도착했는데, 여전히 자기 땅이 아닌 것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장막은 이동할 수 있는 거처이지, 그 땅에 영구적으로 자리 잡은 사람의 집이 아닙니다.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막벨라 굴과 밭을 값을 주고 사는 장면은 이 상황을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땅을 약속받은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매장지를 확보하기 위해 소유자와 거래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때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계속 장막에서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가 터를 가진 도시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를 그려 세우신 이도 지으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히브리서 11:10 · 본디새김

이동할 수 있는 장막과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진 「터를 가진 도시」가 대비됩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그 도시의 규모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도시를 그려 세우시고 지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손으로 세울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도시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관한 창세기의 약속이 원래부터 구체적인 토지의 의미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땅은 실제로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주어진 중요한 약속이었습니다. 다만 히브리서는 약속의 땅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존중하면서도, 그 약속을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시는 궁극적인 거처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사라와 함께 기다린 자손

11절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사라 자신과 함께 나이가 지난 때에도 자손을 낳을 힘을 얻었습니다. 약속하신 분을 믿음직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11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실제로 중요한 원문 문제가 있어, 사라 자신이 믿음으로 임신할 능력을 얻었다는 읽기와 본문처럼 아브라함이 사라와 함께 자손을 낳을 힘을 얻었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어느 읽기를 선택하든 저자의 논증에서 중요한 점은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손을 얻기에 적절한 시기를 이미 지나 있었는데, 하나님은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신뢰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육체적 가능성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약속하신 분을 믿음직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10:23의 「약속하신 분은 믿음직하시기 때문입니다」와 직접 연결되며,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가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믿음은 자기 가능성을 끝없이 긍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능성이 다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12절은 그 결과를 보여 줍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저자는 아브라함의 상태를 죽음에 가까운 무력함으로 묘사하지만, 바로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생명이 이어집니다.

믿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능력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이른 그리스어 사본의 같은 철자를 사라의 주격이나 여격으로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주격으로 읽으면 사라 자신이 믿음으로 임신할 능력을 얻었다는 뜻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따르는 읽기에서 아우테 사르라는 여격이며, 앞에서 이어지는 아브라함을 주어로 두고 사라와 함께 자손을 낳을 힘을 얻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손을 낳을 힘」에 해당하는 표현이 남성의 생식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 관련됩니다. 다만 여격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야 하는지와 실제 원문의 형태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있습니다.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더 나은 고향을 찾는다

히브리서 11:13–16 본문 →

13절에서 이야기가 갑자기 멈춥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순종과 후손의 탄생을 설명하던 저자가 그들의 생애 전체를 돌아보며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지만 도리어 멀리서 보고 반겨 맞으며, 자기들이 땅 위에서 나그네이고 떠도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면서 말입니다.히브리서 11:13 · 본디새김

여기서 「모두」는 바로 앞에서 다룬 아브라함과 사라 및 족장들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앞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았다고 했으므로, 13절을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는데, 멀리서 보고 반겨 맞았습니다. 아직 받지 못한 것을 어떻게 반겨 맞을 수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이 장이 말하는 믿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미래를 자기 손에 쥐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그 미래를 바라보고 환영했습니다. 믿음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미 다 얻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을 가능하게 합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브라함은 창세기 23:4에서 자신을 나그네이며 거류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본래 그 땅에서 소유권과 사회적 지위가 제한된 외국인이라는 현실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히브리서는 그 말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아직 자신들이 찾는 고향에 이르지 못했다는 더 깊은 의미를 읽어 냅니다.

그런데 15절은 한 가지 가능성을 검토합니다.

그들이 떠나온 그곳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돌아갈 틈이 있었을 것입니다.히브리서 11:15 · 본디새김

아브라함이 떠나온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그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심리적 묘사가 아니라, 그의 삶의 방향을 강조합니다.

그가 찾는 고향은 단순히 과거에 떠나온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16절은 그곳을 「더 나은 곳, 곧 하늘에 속한 곳」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죽은 뒤에 인간의 영혼이 가는 장소에 관한 지리적 설명으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그 고향이 인간의 힘으로 확보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궁극적인 거처라는 데 있고, 그러한 소망 때문에 그들은 눈앞의 불안정한 삶을 견뎠습니다.

하나님이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사람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더 나은 곳, 곧 하늘에 속한 곳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위해 도시를 마련해 두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16 · 본디새김

사람이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는 그들의 두려움과 속임수, 갈등과 실패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6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시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았지만, 그들의 신뢰 자체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들에게 약속하셨고, 그분은 그 약속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도시를 마련하십니다.

그들이 고향을 찾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그들의 믿음을 가능하게 한 약속의 깊이입니다.

약속의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

히브리서 11:17–19 본문 →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자는 다시 창세기 22장의 사건으로 돌아갑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이삭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그가 하나뿐인 아들을 바치고 있었습니다.히브리서 11:17 · 본디새김

이 장면의 어려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문제는 이삭이 바로 약속의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 기다린 자손이 이삭이었고, 하나님은 창세기 21:12에서 이삭을 통해 그의 후손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 사이에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삭이 죽는다면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표현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삭이 생물학적 의미에서 유일한 아들이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에서 「하나뿐인」은 특별하고 유일한 지위를 지닌 아들을 뜻하며,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이어지는 독특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바치라는 명령은 단순히 사랑하는 자녀를 잃는 고통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 갈 통로 자체가 사라질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생각했는가

19절은 창세기 22장에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은 아브라함의 내면을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도 일으키실 수 있다고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유하자면 이삭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받은 셈입니다.히브리서 11:19 · 본디새김

저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막연한 낙관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헤아렸다」는 생각하고 계산하거나 숙고하여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생각을 멈추는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도 알고 있었고,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죽은 사람도 일으키실 수 있다고 헤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이삭을 죽였다가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세기 22장에는 그런 약속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히브리서 저자가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삭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받은 셈」이라는 말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셨기 때문에 이삭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을 바치려는 자리까지 나아갔고, 그곳에서 아들을 다시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떠났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약속이 이루어질지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믿음은 목적지를 완전히 아는 능력도 아니고, 약속의 실현 방식을 미리 계산하는 능력도 아닙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헤아렸다」의 그리스어는 로기사메노스입니다. 이삭을 되받은 일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유형론으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약속의 아들, 희생, 되돌려 받음이라는 요소들이 예수님의 사건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19 자체가 이삭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라고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이 우선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죽음까지 넘어서실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사실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앞날을 말한다

히브리서 11:20–22 본문 →

아브라함 다음에는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등장합니다.

저자는 그들의 삶 전체를 다루지 않고 생애의 마지막 장면들을 선택합니다. 이삭은 야곱과 에서에게 복을 줍니다. 야곱은 죽어 가면서 요셉의 아들들에게 복을 줍니다. 요셉은 삶을 마치면서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갈 일을 말하고 자기 뼈를 두고 명령합니다.

세 사람 모두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것은 자신들의 과거가 아니라, 자신이 죽은 뒤에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입니다.

이삭의 축복은 왜 믿음인가

창세기 27장의 이삭은 속임수에 휘말린 인물입니다. 야곱은 에서인 것처럼 꾸며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고, 이삭의 판단이 처음부터 완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삭이 앞으로 올 일을 두고 야곱과 에서에게 복을 준 사실을 믿음의 행위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실수 없이 행동하는 능력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제한된 이해와 복잡한 가족사의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야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는 야곱이 죽어 가면서 손자들에게 축복하고 지팡이 머리에 기대어 절한 모습을 기억합니다. 몸은 쇠약해졌지만 그는 다음 세대를 축복합니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요셉은 왜 자기 뼈를 이야기했는가

믿음으로 요셉은 삶을 마치면서 이스라엘 자손이 나갈 일을 말했고, 자기 뼈를 두고 명했습니다.히브리서 11:22 · 본디새김

요셉은 이집트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굶주림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족을 이집트로 불러들였고, 그곳에서 오랜 세월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자신의 뼈를 이집트에 영원히 두지 말라고 명령합니다(창세기 50:24–25). 하나님이 반드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죽을 때 출애굽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언제, 어떻게 이집트를 떠나게 될지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유해를 장차 그곳에서 옮기라고 명합니다.

요셉의 뼈는 죽은 사람이 남겨 놓은 약속의 표지처럼 됩니다. 그는 살아서 출애굽을 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자기 생애 안에서 모든 약속의 성취를 확인하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하나님이 신실하실 것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야곱이 지팡이 머리에 기대어 절했다는 표현은 창세기 47:31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전통적인 읽기는 야곱이 침상 머리에서 몸을 굽혔다고 하지만, 칠십인역은 지팡이 머리에 기대었다고 옮깁니다. 히브리어의 「침상」과 「지팡이」는 모음을 제외하면 같은 자음으로 적힐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며, 히브리서는 그리스어 성경의 표현을 따릅니다.

눈에 보이는 왕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히브리서 11:23–29 본문 →

이제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가족에서 출애굽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모세의 믿음은 모세 자신의 행동보다 먼저 그의 부모에게서 시작됩니다. 23절은 부모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기를 석 달 동안 숨겼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위대한 지도자의 초인적인 결단이 아니라, 한 아이를 살리려는 부모의 행동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아직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대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의 명령이 인간 생명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작은 행동에서 모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세는 무엇을 포기했는가

믿음으로 모세는 자라서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마다했습니다.히브리서 11:24 · 본디새김

그는 이집트 왕실과 연결된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저자는 모세가 단순히 가난을 부보다 좋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선택은 소속의 문제였습니다. 왕실의 특권을 누리는 삶입니까, 아니면 압제받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는 삶입니까.

이것은 출애굽기 2장에 등장하는 모세의 삶을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이런 결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장면을 기록하지 않지만, 히브리서는 그의 행동 전체에서 그 선택의 의미를 읽어 냅니다.

그리스도의 욕이라는 낯선 표현

그리스도의 욕을 이집트의 보물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갚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26 · 본디새김

모세는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 나타나시기 오래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욕」을 감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선택했고, 히브리서 저자는 그 고난을 예수님께서 당하신 수치와 연결합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 방향이 제시됩니다. 모세가 장차 오실 분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을 위한 고난을 감당했다고 보는 견해,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백성과 함께 겪은 수치가 예수님의 수치와 연결된다고 보는 견해, 모세의 고난을 예수님의 고난을 미리 보여 주는 유형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모세가 역사적 예수님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표현의 특징은 히브리서 저자가 모세의 고난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욕」입니까? 앞 장에서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실제로 욕과 환난을 겪었습니다(10:33). 저자는 세상의 특권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수치를 선택한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의 처지를 다시 이해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일은 실패의 표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현재의 부와 명예보다 가치 있게 여기는 믿음의 행동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믿음으로 그는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굳게 버텼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27 · 본디새김

이 표현은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1절과 연결됩니다. 파라오는 눈에 보이는 왕이었습니다. 그의 명령은 실제였고 그의 분노도 위협적이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모세는 눈에 보이는 왕의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출발이 정확히 어느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는 출애굽기 2:14–15에서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일이 알려진 뒤 미디안으로 도망간 사건으로 읽는 견해입니다. 이 읽기는 28절의 유월절보다 앞에 놓인 순서와 잘 맞지만, 출애굽기 2:14는 모세가 두려워했다고 말하므로 히브리서의 「두려워하지 않고」와 어떻게 연결할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다른 견해는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 경우 왕의 분노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던 모세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설명되지만, 28절의 유월절보다 출애굽이 먼저 언급되는 순서를 해석해야 합니다.

두 해석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든 저자가 강조하는 점은 같습니다. 모세는 눈에 보이는 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같은 바다를 건넜지만 결과는 달랐다

28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경고를 신뢰하여 유월절과 피 바름을 행합니다. 아직 맏이들의 죽음이 일어나기 전이지만, 말씀하신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29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넙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마른 땅을 지나듯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그것을 해 보다가 삼켜졌습니다.히브리서 11:29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열어 주신 길을 따라 건넜고, 이집트 사람들은 그 길을 이용해 이스라엘을 추격했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한 행동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행동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같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위험한 일에 도전하는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그분의 뜻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같은 일을 시도한다고 해서 같은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벽을 무너뜨린 믿음과 낯선 사람을 맞아들인 믿음

히브리서 11:30–31 본문 →

이제 저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사건으로 넘어갑니다.

30절에서는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이레 동안 성벽을 둘러쌉니다. 성벽을 둘러싼다고 저절로 성벽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므로 일반적인 군사 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한 행동이지만, 여호수아 6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으로 행동하고, 히브리서는 이것을 믿음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여호수아나 군대의 지도자가 아닙니다.

라합입니다. 그것도 「창녀 라합」이라고 부르며, 당시 그의 사회적 신분을 감추지 않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고, 여리고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평화롭게 맞아들였습니다. 여호수아 2:9–11에서 라합은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분이 하늘 위와 땅 아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라합이 살고 있는 여리고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벽의 견고함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을 더 결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들을 맞아들입니다.

이 장면은 앞의 노아 이야기와도 닮아 있습니다. 노아는 아직 오지 않은 심판을 믿고 방주를 지어 가족을 구했습니다. 라합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여리고에서 하나님의 일을 신뢰하여 정탐꾼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집안이 구원받을 길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배경은 전혀 다릅니다. 노아는 오래전 세계의 의로운 사람으로 소개되고, 라합은 이방 도시의 창녀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차이를 지우지 않고 두 사람을 같은 믿음의 이야기 안에 놓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특정한 출신이나 사회적 지위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이긴 사람들과 믿음으로 죽은 사람들

히브리서 11:32–38 본문 →

32절에서 저자는 마치 이야기를 더 이어 갈 시간이 없다는 듯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예언자들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시간이 모자라겠으니 말입니다.히브리서 11:32 · 본디새김

이 명단은 엄격한 역사적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 않고, 인물들이 모두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기드온은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드러냈고, 삼손의 삶에는 욕망과 실패가 있었습니다. 입다는 비극적인 서원과 관련된 인물이며, 다윗 역시 심각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그들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여 행동한 일들이 있었으며,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삶에 있던 모든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했다는 보증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

33–35절 전반부에는 승리의 목록이 이어집니다.

나라들을 이겼습니다.

의를 이루었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얻었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불의 힘을 껐습니다.

칼날을 피했습니다.

약함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싸움에서 강해졌습니다.

남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여기에는 다니엘 6장의 사자 굴과 다니엘 3장의 풀무불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들도 있지만, 각각의 표현이 정확히 어느 사건만을 가리키는지는 모두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인상은 분명합니다. 믿음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고,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강한 적들을 이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목록만 읽으면 믿음이란 결국 승리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바로 그 순간 이야기를 뒤집습니다.

믿음으로도 풀려나지 않은 사람들

여자들은 부활을 통해 자기 죽은 이들을 돌려받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얻으려고 풀려나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형틀에서 매를 맞았습니다.히브리서 11:35 · 본디새김

앞부분은 열왕기상 17:17–24에서 엘리야를 통해 아들을 돌려받은 과부와 열왕기하 4:18–37에서 엘리사를 통해 아들을 돌려받은 수넴 여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뒤에서는 살아날 수 있는 길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견뎠습니다.

같은 절 안에 정반대의 결과가 놓여 있습니다.

「더 나은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오는 일과 구별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린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으로 돌아왔지만, 그 삶도 언젠가는 끝나는 삶이었습니다. 반면 고난을 견디다 죽어 간 사람들은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더 나은 부활을 바라보았고, 즉각적인 구출을 거부할 만큼 그 미래를 신뢰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개념이 결정적으로 넓어집니다.

믿음은 언제나 위험에서 빠져나오는 능력이 아닙니다. 때로는 위험에서 빠져나갈 기회가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지 않는 능력입니다.

이 차이는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특별히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박해를 겪었고 재산을 잃기도 했으며, 어쩌면 믿음을 포기하거나 공동체에서 멀어지면 그런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그들에게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뿐 아니라 믿음으로 고난을 견딘 사람들도 보여 줍니다.

고난을 피하지 못했다고 해서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

36–37절에는 더 무거운 고난의 목록이 나옵니다.

조롱과 채찍.

사슬과 감옥.

돌에 맞고 칼에 죽는 일.

양가죽과 염소가죽을 걸치고 떠도는 궁핍한 삶.

저자가 이 명단의 모든 사건을 각각 누구에게 적용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고난을 길게 열거한 뒤 뜻밖의 평가를 내립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걸맞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히브리서 11:38 · 본디새김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거처가 없고, 재산이 없고, 보호받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세상이 그들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한 평가를 내립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제대로 된 자리를 얻지 못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가치는 낮아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 반드시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은 아닙니다.

믿음은 때로 세상에서 이기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세상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35절 후반은 기원전 2세기 유대인들의 박해와 순교 전승, 특히 마카베오기하 6–7장에 등장하는 엘르아살과 일곱 형제의 이야기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고문과 죽음을 감수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소망을 고백합니다. 히브리서가 특정 인물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으므로 그 사건들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표현과 내용의 관련성은 뚜렷합니다. 37절의 돌에 맞아 죽는 일은 역대하 24:20–22의 스가랴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톱질을 당했다는 표현은 이사야의 순교에 관한 후대 유대교·기독교 전승과 연결되어 왔지만, 구약 정경에는 이사야가 그런 방식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모두 증언을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했다

히브리서 11:39–40 본문 →

마지막 두 절은 11장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믿음을 통해 증언을 받았으면서도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히브리서 11:39 · 본디새김

2절은 옛 어른들이 믿음으로 증언을 받았다고 했고, 39절도 그들이 모두 믿음을 통해 증언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반복은 장 전체를 감싸는 구조를 만듭니다. 저자가 긴 명단을 제시한 이유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인정과 증언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라는 예상하지 못한 말이 붙습니다. 33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약속하신 것을 얻었고」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39절과 모순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33절은 그들이 생애 가운데 특정한 하나님의 약속을 실제로 경험한 일을 가리킬 수 있지만, 39절은 이 장 전체가 바라보는 궁극적인 약속의 완성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었지만, 그가 기다리던 도시와 하나님의 약속 전체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궁극적인 안식과 구원의 완성을 그때 모두 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11장의 모든 인물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성공한 사람들과 고난당한 사람들.

구출된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약속의 일부를 받은 사람들과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들.

모두가 아직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없이는」 온전하게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나은 것을 미리 마련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없이는 그들이 온전하게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히브리서 11:40 · 본디새김

지금까지 저자는 과거의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위해」, 「우리 없이는」이라는 말과 함께 「우리」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의 독자들이 하나의 이야기에 속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옛 어른들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준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읽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미 그들이 모두 믿음으로 하나님의 증언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완성이 그들의 생애 안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온전하게 되다」는 앞에서 제사와 구원의 목적을 설명할 때 사용한 표현과 연결됩니다. 단순히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보다,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목적에 이르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그 완성을 「우리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옛 언약의 믿음의 사람들과 예수님의 사역을 아는 현재의 독자들은 서로 무관한 두 종류의 구원 이야기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하나의 구원 계획 안에 놓여 있습니다.

더 나은 것은 무엇인가

40절의 「더 나은 것」의 정확한 범위를 두고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 견해는 예수님의 오심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새 언약의 현실, 곧 옛 어른들이 바라보았지만 경험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구원 사건을 강조합니다. 다른 견해는 예수님의 사역을 포함하면서도, 옛 어른들과 현재의 독자들이 함께 참여하게 될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에 무게를 둡니다.

두 읽기는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자체가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과 아직 기다리는 완성을 함께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과거와 현재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하나의 목적 안에서 함께 온전함에 이른다는 의미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강조점은 어느 시대의 신자들이 더 우월한가를 비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세대의 믿음의 사람들을 서로 분리된 채 완성시키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시는가

이 장은 믿음을 그토록 길게 설명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지 않습니다. 26절의 「그리스도의 욕」이 가장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은 앞에서 다루던 예수님의 대제사장직과 희생에서 벗어나 인간의 훌륭한 믿음을 칭찬하는 장입니까?

그렇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11장은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한 뒤에 나오는 권면의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고 말한 뒤 소망의 고백을 붙들고 끝까지 견디라고 권했고, 11장은 하나님을 믿고 약속을 기다리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그 답을 구약의 인물들에게서 찾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역사적 사역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신뢰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신뢰했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약속을 결정적으로 이루셨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라합이 신뢰한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예수님 안에서 이루십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은 인간의 믿음이 구원을 완성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약속에 우리가 들어 있다

히브리서 11:1–40 본문 →

그들이 기다리던 약속은 그들의 생애 안에서 다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있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살았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보여 줍니다. 이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있었던 것은 원하는 결과를 얻는 능력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면 믿음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했는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특정한 결과를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약속하신 것을 신뢰하는 일이며, 위험을 위험이 아니라고 말하는 태도가 아니라 위험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놓지 않는 태도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처음에는 아벨이 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아직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가면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로 장막에 살고, 요셉이 출애굽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뼈를 두고 명령합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견디고, 라합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여리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자의 입을 막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믿음으로 칼에 죽습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그 약속의 최종적인 완성을 자기 생애 안에서 모두 받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그 사실을 슬픈 실패로 기록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나은 것을 미리 마련해 두셨기 때문」이라고, 「우리 없이는 그들이 온전하게 되지 않도록」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제야 독자는 이 모든 이야기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먼저 믿음으로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알고 그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에 뒤늦게 나타난 구경꾼이 아닙니다. 아직 약속의 완성을 기다리는 그들의 이야기 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자리까지 마련해 두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