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1–12장 ·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들

약속을 받지 못하고도 믿음으로 산 사람들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의 위인들이 등장하는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벨과 에녹, 노아와 아브라함, 모세와 라합, 그리고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장을 끝까지 읽으면 이상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놀라운 승리를 얻었습니다. 나라들을 무찌르고, 사자들의 입을 막고, 맹렬한 불길을 껐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가족들을 맞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똑같이 믿음으로 살았지만 끝내 죽임을 당했습니다. 돌에 맞고, 톱으로 몸이 잘리고, 칼에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떠돌며 가난과 학대를 견뎠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두 무리를 구별해서 한쪽은 믿음이 강하고 다른 쪽은 약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두를 가리켜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39절)라고 선언합니다.

믿음이 있는데도 약속한 것을 받지 못할 수 있다면,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앞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뒤로 물러서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권했습니다. 이제 그는 믿음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를 통해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장은 단순히 본받을 만한 인물들을 모아 놓은 목록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행동한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이어서 약속을 받고도 나그네로 살았던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과 믿음으로 죽어 간 사람들을 나란히 놓습니다.

이 장은 개인들의 영웅담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이 여러 세대의 사람들을 하나의 약속 안에 묶으시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1111장 본문 읽기 →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

히브리서 11:1–3 본문 →

믿음은 바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참되다는 증거입니다.히브리서 11:1 · 두루새김

이 구절을 믿음에 관한 철학적 정의처럼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믿음의 모든 측면을 빠짐없이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아직 받지 못한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믿음은 아직 자기 손에 들어오지 않은 것, 눈앞에 드러나지 않은 것과 관계됩니다.

믿음은 단지 강한 확신인가

두루새김이 「확신」으로 옮긴 그리스어는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입니다. 이 낱말은 기초가 되는 실제 존재를 가리킬 수도 있고(1:3), 확신이나 확고한 태도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3:14). 그래서 11:1은 믿음이 바라는 것들을 현재의 삶에서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읽기와, 바라는 것들을 굳게 붙들게 하는 확신이라는 읽기가 모두 가능합니다. 뒤이은 「증거」도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나 마음속 확신을 가리킬 수 있어, 믿는 대상의 확실성과 믿는 사람의 확신 중 어디에 무게를 둘지가 논의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앞뒤 흐름은 적어도 한 가지 오해를 막아 줍니다. 믿음이란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강하게 바라면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정신적 능력이 아닙니다. 이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신뢰했기 때문에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기준으로 행동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확실성은 믿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서 나옵니다.

보이는 세계보다 먼저 있었던 말씀

3절의 첫 번째 믿음의 사례에는 아벨이나 아브라함이 아니라 「우리」가 등장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음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히브리서 11:3 · 두루새김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기 전에 독자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은 그저 보이는 것들만으로 설명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창세기 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자의 관심은 창조의 과학적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믿음의 가장 근본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이해는 곧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기초가 됩니다.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심판을 두고 방주를 지었고, 아브라함은 아직 보지 못한 땅을 향해 떠났으며,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견뎠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는 능력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온 세상」으로 옮긴 그리스어는 시간의 시대들을 가리킬 수 있지만, 1:2와 11:3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그 역사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창조의 근원이심을 강조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아무것도 없는 데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철학적 논의를 모두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죽은 사람의 믿음이 아직 말한다

히브리서 11:4–7 본문 →

첫 번째 인물은 아벨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을 두고 그렇게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1:4 · 두루새김

창세기 4장은 가인의 제물이 거절된 모든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벨이 양을 바쳤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고 가인이 땅에서 거둔 것을 바쳤기 때문에 거절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어떤 종류의 제물을 드렸는가보다 어떤 믿음으로 드렸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벨은 형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성공이나 승리로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가 지금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창세기 4:10에서는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히브리서 12:24에서는 예수님의 피와 아벨의 피가 비교됩니다. 그의 믿음과 그를 인정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죽음 이후에도 의미를 지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가치는 그 사람의 생애가 얼마나 좋은 결과로 끝났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은 에녹

아벨은 죽었지만 에녹은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는 사람들이 몇 년을 살았고 죽었다는 문장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에녹에 이르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으므로 그가 더 이상 있지 않았다는 다른 결말이 등장합니다(창세기 5:24). 히브리서는 그가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고, 에녹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정반대지만 둘 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과 고난을 피할 수 있다는 결론은 처음부터 차단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시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6 · 두루새김

믿음의 대상이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장에는 살아 있는 동안 눈에 보이는 보상을 받지 못한 이들이 많으므로, 상을 주신다는 믿음은 당장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는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시며 그들의 믿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신뢰입니다.

앞 장에서도 저자는 약속하신 분이 믿음직하시기 때문에 소망의 고백을 붙들라고 했습니다(10:23). 믿음의 중심은 바로 그분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

7절의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방주를 만듭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던 때에는 아직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 주신 미래를 신뢰하여 현재의 행동을 바꾸는 태도입니다.

노아의 믿음은 자기 한 사람의 마음속 확신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가족을 구하기 위해」 방주를 지었고, 그 믿음으로 「세상을 죄 있다고 판결했고」라고 합니다. 이것은 노아가 법정에 앉아 세상 사람들을 심판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신뢰하여 행동한 그의 삶이, 그 경고를 무시한 세상의 믿음 없음을 드러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세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드러냈습니다. 이제 저자는 믿음의 가장 긴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에녹에 관한 표현에는 히브리어 창세기와 그리스어 사이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창세기는 에녹이 하나님과 걸었다고,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이 그리스어 표현을 이어받아 믿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다

히브리서 11:8–12 본문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물려받을 땅으로 떠나라는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떠났습니다.히브리서 11:8 · 두루새김

저자는 아브라함의 모험심을 칭찬하지 않고, 그가 떠난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아무런 근거 없이 낯선 곳으로 뛰어드는 용기가 아니라, 부르시는 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마침내 약속받은 땅에 도착한 뒤에도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9절은 그가 약속받은 땅에서도 「남의 땅에 사는 나그네처럼」 지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막에서 살았습니다. 천막은 이동할 수 있는 거처이지, 그 땅에 영구적으로 자리 잡은 사람의 집이 아닙니다.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묻기 위해 막벨라 굴과 밭을 값을 주고 삽니다. 하나님께 땅을 약속받은 사람이 그 땅에서 무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땅 주인과 거래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때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계속 천막에서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기초가 있는 도시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를 계획하고 지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히브리서 11:10 · 두루새김

천막과 「기초가 있는 도시」가 대비됩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그 도시의 규모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도시를 계획하고 지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손으로 세울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도시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관한 창세기의 약속이 원래부터 구체적인 땅을 뜻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땅은 실제로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주어진 중요한 약속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역사적 현실을 존중하면서도, 그 약속을 하나님이 직접 마련하시는 최종적인 거처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사라와 함께 기다린 자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나이가 너무 많았지만 사라와 함께 자손을 낳을 힘을 얻었습니다. 약속하신 분을 믿을 만한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1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원문에서 아브라함을 주어로 읽을지, 사라 자신을 주어로 읽을지가 갈리는 자리입니다. 어느 읽기를 선택하든 중요한 점은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손을 얻기에 적절한 시기를 이미 지나 있었고, 그들이 신뢰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 지닌 가능성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약속하신 분을 믿을 만한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약속하신 분이 믿음직하시다는 10:23과 직접 연결됩니다. 믿음은 자기 가능성을 끝없이 긍정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이 다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12절에서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을 만큼 늙은 한 사람에게서」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이 태어납니다. 믿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능력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이른 그리스어 사본의 같은 철자를 사라가 주어인 형태로 읽으면, 사라 자신이 믿음으로 임신할 능력을 얻었다는 뜻이 자연스럽습니다. 두루새김이 따르는 읽기에서는 「사라」가 「사라와 함께」를 뜻하는 형태여서, 앞에서 이어지는 아브라함을 주어로 둡니다. 「자손을 낳을 힘」에 해당하는 표현이 남성의 생식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일 수 있다는 점이 이 읽기와 관련되지만, 실제 원문의 형태와 해석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있습니다.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더 나은 고향을 찾는다

히브리서 11:13–16 본문 →

13절에서 이야기가 갑자기 멈춥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지닌 채 죽었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자신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이며 잠시 머무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히브리서 11:13 · 두루새김

「이 사람들은 모두」는 바로 앞의 아브라함과 사라 및 족장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앞서 에녹은 죽음을 겪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지만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습니다. 아직 받지 못한 것을 어떻게 반길 수 있습니까? 그들은 약속된 미래를 손에 쥐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그 미래를 바라보고 환영했습니다.

믿음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미 다 얻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을 가능하게 합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브라함은 창세기 23:4에서 자신을 나그네이며 다른 사람의 땅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본래 그 땅에서 소유권과 사회적 지위가 제한된 외국인이라는 현실적인 의미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말에서 그들이 아직 자신들이 찾는 고향에 이르지 못했다는 더 깊은 의미를 읽어 냅니다.

그들이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히브리서 11:15 · 두루새김

아브라함이 떠나온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그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마음속 묘사가 아니라, 그의 삶의 방향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바라는 곳은 더 나은 고향, 곧 하늘에 있는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위해 도시를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16 · 두루새김

「하늘에 있는 고향」은 죽은 뒤 영혼이 가는 장소에 관한 지리적 설명으로 줄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그 고향이 인간의 힘으로 확보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최종적인 거처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두려움과 속임수, 갈등과 실패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출애굽기 3:6에서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십니다.

그들의 신뢰 자체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들에게 약속하셨고, 그분은 그 약속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천막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도시를 마련하십니다. 그들이 고향을 찾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약속의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

히브리서 11:17–19 본문 →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이삭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약속들을 받은 그가 하나뿐인 아들을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히브리서 11:17 · 두루새김

이 장면의 어려움은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 기다린 약속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은 창세기 21:12에서 이삭을 통해 그의 자손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삭이 죽는다면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표현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도 있었으므로, 이삭이 유일하게 태어난 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하나뿐인 아들」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이어지는 특별하고 유일한 지위를 지닌 아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를 바치라는 명령은 자녀를 잃는 고통을 넘어, 약속을 이어 갈 통로 자체가 사라질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생각했는가

19절은 창세기 22장에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은 아브라함의 마음속 생각을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유하자면 그는 이삭을 죽음에서 되돌려 받은 셈입니다.히브리서 11:19 · 두루새김

여기서 「생각했다」는 깊이 따져 생각하여 판단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믿음은 생각을 멈추는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도,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도 알고 있었고, 그 끝에 하나님이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였다가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세기 22장에는 그런 약속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아브라함의 행동을 해석하면서 그의 믿음 안에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을 바치려는 자리까지 나아갔고, 그곳에서 아들을 다시 얻었습니다.

이 장면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으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약속의 아들, 희생, 되돌려 받음이라는 요소들이 예수님의 사건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1:19 자체는 이삭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라고 선언하지 않으며, 우선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죽음까지 넘어서실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떠났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약속이 이루어질지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앞날을 말한다

히브리서 11:20–22 본문 →

아브라함 다음에는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등장합니다. 저자는 그들의 삶 전체가 아니라 생애의 마지막 장면들을 선택합니다. 이삭은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고,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며,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올 일과 자기 뼈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합니다.

세 사람 모두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자신이 죽은 뒤에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말합니다.

이삭의 축복은 왜 믿음인가

창세기 27장의 이삭은 속임수에 휘말린 인물입니다. 야곱은 에서인 것처럼 꾸며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삭이 앞으로 있을 일을 바라보며 축복한 사실을 믿음의 행위로 설명합니다. 믿음은 실수 없이 행동하는 능력이 아니라, 제한된 이해와 복잡한 가족사의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야곱 역시 죽음을 앞두고 손자들을 축복하고 자기 지팡이 끝에 기대어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몸은 쇠약해졌지만 그는 다음 세대를 축복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줄어들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요셉은 왜 자기 뼈를 이야기했는가

믿음으로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올 일을 말했으며, 자기 뼈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지시했습니다.히브리서 11:22 · 두루새김

요셉은 이집트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고, 굶주리던 가족을 불러들여 그곳에서 오랜 세월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뼈를 이집트에 영원히 두지 말라고 명령합니다(창세기 50:24–25). 하나님이 반드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죽을 때 출애굽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자손들이 언제, 어떻게 이집트를 떠나게 될지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뼈를 장차 옮기라고 지시합니다.

요셉의 뼈는 죽은 사람이 남겨 놓은 약속의 표지처럼 됩니다.

믿음은 자기 생애 안에서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이 죽은 뒤에도 하나님이 신실하실 것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야곱이 지팡이에 기대었다는 표현은 창세기 47:31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전통적인 읽기는 야곱이 침대 머리에서 몸을 굽혔다고 하지만, 칠십인역은 지팡이 머리에 기대었다고 옮깁니다. 히브리어에서 침대와 지팡이를 뜻하는 말은 모음을 빼면 같은 자음으로 적힐 수 있기 때문이며, 히브리서는 그리스어 성경의 표현을 따릅니다.

눈에 보이는 왕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히브리서 11:23–29 본문 →

이제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가족에서 출애굽으로 넘어갑니다.

모세의 믿음은 모세 자신의 행동보다 먼저 그의 부모에게서 시작됩니다. 23절은 부모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기를 석 달 동안 숨겼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위대한 지도자의 결단이 아니라 한 아이를 살리려는 부모의 행동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왕의 명령이 인간 생명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고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작은 행동에서 모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세는 무엇을 포기했는가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했습니다.히브리서 11:24 · 두루새김

그는 이집트 왕실과 연결된 신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저자는 모세가 단순히 가난을 부보다 좋아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선택은 왕실의 특권을 누릴 것인가, 억압받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할 것인가라는 소속의 문제였습니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이런 결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장면을 기록하지 않지만, 히브리서는 출애굽기 2장에 나오는 그의 행동 전체에서 그 선택의 의미를 읽어 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모욕이라는 낯선 표현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보물보다 더 값진 재산으로 여겼습니다. 앞으로 받을 보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26 · 두루새김

모세는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 나타나시기 오래전의 사람입니다. 이 표현은 모세가 장차 오실 분을 믿었다는 읽기,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백성과 함께 겪은 수치가 그리스도의 수치와 이어진다는 읽기, 모세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보여 준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본문만으로 모세가 역사적 예수님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모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하필 「모욕」입니까?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실제로 모욕과 고난을 겪었습니다(10:33). 저자는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일이 실패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현재의 부와 명예보다 가치 있게 여기는 믿음의 행동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음으로 모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견뎌 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27 · 두루새김

이 표현은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이 참되다는 증거라는 1절과 연결됩니다. 파라오는 눈에 보이는 왕이었고, 그의 분노는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눈에 보이는 왕의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이집트를 떠난 일이 어느 사건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는 출애굽기 2:14–15의 미디안 도피로 읽는 견해로, 28절의 유월절보다 앞에 놓인 순서와 잘 맞지만 출애굽기 2:14가 모세가 두려워했다고 말하는 점을 설명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 12장의 출애굽으로 읽는 견해로, 왕의 분노 앞에서 굽히지 않은 태도는 자연스럽게 설명되지만 유월절보다 출애굽이 먼저 언급되는 순서를 해석해야 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같은 바다를 건넜지만 결과는 달랐다

28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경고를 신뢰하여 유월절을 지킵니다. 아직 맏이들의 죽음이 일어나기 전이지만, 말씀하신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지나듯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은 똑같이 건너려다가 바닷물에 삼켜졌습니다.히브리서 11:29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열어 주신 길을 따라 건넜고, 이집트 사람들은 그 길을 이용해 이스라엘을 뒤쫓았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한 행동이지만, 그 행동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는 같지 않았습니다. 같은 일을 시도한다고 해서 같은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26절의 세 읽기에는 각각의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세가 장차 오실 분을 믿었기에 그분을 위한 고난을 감당했다고 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가 「기름부음받은 이」라는 뜻이라는 데서,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백성과 함께 겪은 수치가 그리스도의 수치와 이어진다고 봅니다. 셋째는 구약의 인물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히브리서의 해석 방식에 따라, 모세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보여 주는 모습으로 읽습니다.

성벽을 무너뜨린 믿음과 낯선 사람을 맞아들인 믿음

히브리서 11:30–31 본문 →

이제 저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사건으로 넘어갑니다.

30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일곱 날 동안 여리고 성벽 둘레를 돕니다. 군사 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한 행동이지만, 여호수아 6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으로 행동하고, 히브리서는 이것을 믿음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여호수아나 군대의 지도자가 아닙니다. 「돈을 받고 몸을 팔던 라합」입니다.

이 표현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감추지 않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고 여리고 사람들 가운데 살았지만,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평화롭게 맞아들였습니다. 여호수아 2:9–11에서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분이 하늘 위와 땅 아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라합이 살고 있는 여리고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벽의 튼튼함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을 더 결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들을 맞아들입니다.

이 장면은 노아 이야기와 닮아 있습니다. 노아는 아직 오지 않은 심판을 믿고 방주를 지어 가족을 구했고, 라합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여리고에서 정탐꾼들을 보호하여 자신의 집안이 구원받을 길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오래전 세계의 의로운 사람으로, 라합은 이방 도시에서 돈을 받고 몸을 팔던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히브리서는 그 차이를 지우지 않고 두 사람을 같은 믿음의 이야기 안에 놓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특정한 출신이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이긴 사람들과 믿음으로 죽은 사람들

히브리서 11:32–38 본문 →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 다윗과 사무엘과 예언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히브리서 11:32 · 두루새김

이 명단은 엄격한 역사적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 않고, 인물들이 모두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기드온은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드러냈고, 삼손의 삶에는 욕망과 실패가 있었습니다. 입다는 비극적인 서원과 관련된 인물이며, 다윗은 심각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그들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여 행동한 일들이 있었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그 삶의 모든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맞았다는 보증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

33–35절 전반부에는 승리의 목록이 이어집니다. 나라들을 무찌르고, 옳은 일을 행하고, 약속하신 것을 받고, 사자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맹렬한 불길을 끄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 가운데서 힘을 얻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여기에는 다니엘 6장의 사자 굴과 다니엘 3장의 뜨거운 화덕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들도 있습니다. 이 목록만 읽으면 믿음이란 결국 승리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바로 그 순간 이야기를 뒤집습니다.

믿음으로도 풀려나지 않은 사람들

여자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기 가족들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매를 맞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나은 부활을 얻으려고 풀려나기를 거절했습니다.히브리서 11:35 · 두루새김

앞부분은 엘리야를 통해 아들을 돌려받은 과부(열왕기상 17:17–24)와 엘리사를 통해 아들을 돌려받은 수넴 여인(열왕기하 4:18–37)을 떠올리게 합니다. 같은 절 안에서, 앞에서는 죽은 사람을 돌려받고 뒤에서는 목숨을 구할 길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견딥니다.

「더 나은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오는 일과 구별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린 사람들은 언젠가 끝나는 이 세상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고난을 견디다 죽어 간 사람들은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더 나은 부활을 바라보았고, 당장 풀려날 기회를 거부할 만큼 그 미래를 신뢰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위험에서 빠져나오는 능력이 아닙니다. 때로는 빠져나갈 기회가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지 않는 능력입니다.

이 차이는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특별히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박해를 겪었고 재산을 잃기도 했으며, 믿음을 포기하거나 공동체에서 멀어지면 그런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난을 피하지 못했다고 해서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곁에 둘 자격이 없었던 사람들

36–37절에는 더 무거운 고난의 목록이 나옵니다. 조롱과 채찍질, 사슬과 감옥, 돌에 맞고 칼에 죽임을 당하는 일, 양가죽과 염소가죽을 걸치고 떠도는 가난한 삶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둘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히브리서 11:38 · 두루새김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살 곳도, 재산도, 보호도 없는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세상이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둘 자격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 반드시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33–34절의 각 표현이 정확히 어느 사건만을 가리키는지는 모두 확정할 수 없습니다. 35절 후반부는 기원전 2세기 유대인들의 박해와 순교 전승, 특히 마카베오기하 6–7장의 엘르아살과 일곱 형제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고문과 죽음을 감수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소망을 고백합니다. 히브리서가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사건들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표현과 내용의 관련성은 뚜렷합니다. 37절의 돌에 맞아 죽는 일은 역대하 24:20–22의 스가랴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톱으로 몸이 잘렸다는 표현은 이사야의 순교에 관한 후대 유대교·기독교 전승과 연결되어 왔지만, 구약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모두 인정을 받았지만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다

히브리서 11:39–40 본문 →

마지막 두 절은 11장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히브리서 11:39 · 두루새김

옛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2절의 표현이 되돌아와 장 전체를 감쌉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예상하지 못한 말이 붙습니다.

33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약속하신 것을 받고」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33절은 그들이 생애 가운데 특정한 하나님의 약속을 실제로 경험한 일을 가리킬 수 있고, 39절은 이 장 전체가 바라보는 약속의 최종적인 완성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었지만 그가 기다리던 도시를 보지 못했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최종적인 안식과 구원의 완성을 그때 모두 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과 고난당한 사람들, 구출된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약속의 일부를 받은 사람들과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들. 모두가 아직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없이 따로」 온전하게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나은 것을 미리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 없이 따로 온전하게 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히브리서 11:40 · 두루새김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등장하면서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의 독자들이 하나의 이야기에 속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옛사람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준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읽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미 그들이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완성이 그들의 생애 안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온전하게 되지 않도록」은 앞에서 제사와 구원의 목적을 설명할 때 쓴 표현과 연결되며,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것보다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목적에 이르는 뜻을 가집니다. 옛 언약의 믿음의 사람들과 예수님의 사역을 아는 현재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하나의 구원 계획 안에 놓여 있습니다.

더 나은 것은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의 범위를 두고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견해는 옛사람들이 바라보았지만 경험하지 못한 결정적인 구원 사건이 예수님의 오심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새 언약의 현실을 강조합니다. 다른 견해는 예수님의 사역을 포함하면서도, 옛사람들과 현재의 독자들이 함께 참여할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에 무게를 둡니다. 두 읽기는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자체가 이미 이루어진 일과 아직 기다리는 완성을 함께 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어느 시대의 신자들이 더 우월한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 세대의 믿음의 사람들을 서로 분리된 채 완성시키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1장은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지 않습니다. 26절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모욕」이 가장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과 희생을 설명한 뒤, 소망의 고백을 붙들고 끝까지 견디라는 권면의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11장은 그 권면에 대한 실제적인 설명입니다. 옛사람들은 예수님의 역사적 사역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모두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의 의미를 후대 그리스도인들처럼 명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신뢰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약속을 결정적으로 이루셨다는 히브리서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약속에 우리가 들어 있다

히브리서 11:1–40 본문 →

그들이 기다리던 약속은 그들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장의 처음 물음, 믿음이 있는데도 약속한 것을 받지 못할 수 있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여기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있었던 것은 원하는 결과를 얻는 능력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인간의 믿음이 구원을 완성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이 특정한 결과를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약속하신 것을 신뢰하는 일이며, 무엇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고 무엇이 내가 바라는 것인지 구별하는 일도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떠났고,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기 때문에 방주를 지었습니다.

믿음은 위험을 위험이 아니라고 말하는 태도가 아니라, 위험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놓지 않는 태도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뼈를 이집트에 남겨 두지 말라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자신이 시작한 일의 완성을 모두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생애보다 더 큰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1장의 처음에는 아벨이 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천막에 사는 나그네입니다. 요셉은 출애굽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뼈를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합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견디고, 라합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여리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자의 입을 막고, 다른 사람들은 믿음으로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약속의 최종적인 완성을 자기 생애 안에서 받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그 사실을 슬픈 실패로 기록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나은 것을 미리 마련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먼저 믿음으로 걸어갔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알고 그 길을 걷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에 뒤늦게 나타난 구경꾼이 아닙니다. 아직 약속의 완성을 기다리는 그들의 이야기 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자리까지 마련해 두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