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1–12장 ·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향해
히브리서 12장은 달리기 경기의 한복판에서 시작합니다.
수많은 증인들이 둘러싸고 있고, 달리는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경기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완주하려면 견뎌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승선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계산하는 일이 아닙니다. 앞서 달리신 한 분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앞 장에는 믿음으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떠났고,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견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승리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믿음으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제 저자는 그 사람들을 하나씩 바라보던 독자의 시선을 예수님께 모읍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가장 훌륭한 믿음의 모범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여시고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2장을 끝까지 읽으면 이 달리기 비유는 더 거대한 장면으로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달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다음에는 아버지에게 훈육받는 자녀들이 나옵니다. 이어서 늘어진 손을 들어 올리고 힘이 풀린 무릎을 곧게 펴라는 권면이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산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하나는 불과 어둠과 폭풍이 뒤덮인 시내 산입니다. 다른 하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 하늘의 예루살렘이 있는 시온 산입니다.
마지막에는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 흔들립니다.
이 극적인 전개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릅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믿는 사람은 무엇을 붙들고,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까?
증인의 구름 가운데 예수님을 바라보다
12장 첫 문장에는 두 종류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증인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구름처럼 수많은 증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온갖 짐과 우리를 쉽게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참고 견디며 달립시다.히브리서 12:1 · 두루새김
「구름처럼 수많은 증인들」은 앞 장에 등장했던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말에서 고대 경기장에 관중들이 둘러앉아 선수들을 지켜보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구절을 하늘에서 옛 성도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맥에서는 다른 의미가 더욱 중요합니다.
원문에서는 11장의 옛 어른들이 믿음으로 증언을 받았다는 표현과, 여기서 그들을 「증인」(μάρτυς)이라고 부르는 말이 이어집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뒤따라 달리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가능성을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관중 이미지가 전혀 없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본문은 그들이 지금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음의 삶을 증언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문맥에서 확인되는 핵심입니다.
벗어야 할 것은 죄만이 아니다
저자는 달리는 사람들에게 「짐」과 「죄」 두 가지를 벗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죄는 분명히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달리기를 방해하는 것이 반드시 죄라고 불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달리는 사람에게는 그 자체로 나쁘지 않은 물건도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경기에 필요하지 않은 것을 계속 몸에 지니고 있다면 달리기가 어려워집니다.
저자는 어떤 짐을 말하는지 목록을 제시하지 않으므로, 이 표현을 특정한 생활 습관에 일률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편지의 독자들이 고난 속에서 믿음을 포기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의 달리기를 방해하는 온갖 부담과 죄의 유혹을 벗어 버리라는 권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달리기에서는 보통 속도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참고 견디며」 달리는 것이 강조됩니다. 이 말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인내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짧은 순간의 폭발적인 열정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고난 속에서도 신앙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견딤이었습니다.
믿음의 시작과 완성을 예수님께서 붙드신다
2절은 그 견딤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믿음의 길을 여시고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께서는 자신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리서 12:2 · 두루새김
「믿음의 길을 여시고」(ἀρχηγός)에 해당하는 말은 길을 앞서 열거나 어떤 일을 시작하는 선도자, 개척자라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0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여시는 분으로 소개되셨고, 이제 12:2에서는 믿음의 길을 여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믿으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길을 걸으셨고,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셨으며,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라고도 부릅니다. 앞 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아직 온전함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11:40). 옛 어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다리는 믿음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만 놓이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순종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결정적으로 이루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완성할 능력을 자기 안에서만 찾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을 여시고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신 기쁨
2절의 「자신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나 얻게 될 영광이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바라보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견디셨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기쁨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선택하셨다는 읽기입니다.
원문의 전치사가 대가나 교환, 대신함의 의미를 가질 수 있어 두 방향이 논의되며, 두루새김은 목적을 바라보는 읽기를 따릅니다. 어느 쪽을 택해도 저자의 핵심 논증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치를 견디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고통스럽게 죽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세계에서 그것은 극심한 수치와 굴욕을 함께 겪게 하는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수치가 자신의 길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랑곳하지 않고」는 고통이 없었다는 뜻도, 수치가 실제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 수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십자가와 왕좌가 한 문장 안에 들어 있습니다.
독자들이 바라보아야 하는 분은 고난을 알지 못하시는 영광의 왕이 아니십니다.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지치지 않도록 그분을 헤아려 보라
예수는 죄인들이 예수 자신을 거슬러 벌인 그토록 심한 적대를 견뎌 내셨습니다. 여러분이 지쳐서 낙심하지 않도록 그분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히브리서 12:3 · 두루새김
믿음의 달리기에서 가장 큰 위험은 단지 넘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쳐서 더 이상 달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계속 채찍질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견딤이 자신들의 견딤을 이해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신자의 고난을 하찮게 만드는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견뎌야 하는지 보여 주는 근거입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에서 적대의 대상은 사본에 따라 표현이 다릅니다. 두루새김은 「예수 자신을 거슬러 벌인」이라고 하여 예수님 자신을 거슬렀다는 읽기를 따르지만, 죄인들이 스스로에게 거슬러 행동했다는 읽기도 전해집니다.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적대와 반대를 견디셨다는 의미가 중심입니다.
고난은 버림받았다는 증거인가
4절은 독자들의 상황을 직접 언급합니다.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리서 12:4 · 두루새김
그들은 이미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전에 공개적인 모욕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겼으며, 갇힌 이들과 고통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10:32–3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그들이 겪은 고난의 정도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비교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잠언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또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며 건네는 이 격려의 말씀을 잊었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꾸지람을 들을 때 낙심하지 마라.」히브리서 12:5 · 두루새김
저자는 독자들이 고난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로 해석할 가능성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잠언 3:11–12를 가져옵니다.
훈육은 사랑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잠언 3장은 지혜를 얻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가르치는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주님의 훈육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바로잡으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말씀을 독자들의 고난에 적용합니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증거로만 판단하지 말고, 자녀를 훈육하시는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며 건네는」이라는 말에서 보듯, 저자는 잠언을 단순히 과거의 교훈으로 인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독자들을 자녀로 대하여 말씀하시는 격려로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훈육은 단순히 잘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과 같습니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문맥에서 훈육은 죄를 바로잡기 위한 징계의 요소를 포함할 수 있지만, 자녀를 기르고 훈련하여 성숙하게 만드는 교육, 곧 어려움을 통해 인내와 거룩함을 배우게 하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런 교육에는 엄격한 교정과 체벌이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6절의 「채찍질하시기」라는 표현은 상당히 강하게 들립니다. 이 구절에는 당시의 아버지와 자녀 관계에 대한 교육적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 모든 폭력적 체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허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할 권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인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돌보심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질병과 사고, 학대가 특정한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형벌이라고 주장할 근거도 이 구절에는 없습니다. 저자의 관심은 고난의 모든 원인을 밝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길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라 훈육받는 자녀
고난을 훈육으로 여기며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훈육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히브리서 12:7 · 두루새김
「견디십시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휘포메네테(ὑπομένω)는 문법적으로 명령형과 직설법의 형태가 같습니다. 그래서 훈육을 위해 견디라는 권면으로도, 여러분이 견디는 것은 훈육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독자들에게 견딤을 요구하는 앞뒤 흐름에 맞추어 명령형을 택했습니다. 직설법으로 읽으면 독자들이 이미 겪고 있는 일을 하나님의 훈육이라고 설명하는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두 읽기 모두 고난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 안에서 이해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8절의 「정식 자녀가 아니라 혼인 밖에서 태어난 자녀」라는 표현은 고대의 가족과 상속 관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저자는 오늘날 혼인 밖에서 태어난 자녀의 가치가 낮다는 뜻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법적으로 인정된 자녀가 아버지의 교육과 상속 질서에 속한다는 생각을 비유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육이 향하는 목적
육신의 아버지들은 잠시 동안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우리를 훈육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롭도록,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심을 함께 나누도록 훈육하십니다.히브리서 12:10 · 두루새김
하나님은 단순히 자녀를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기 위해 훈육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녀들이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은 더 예의 바르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깊은 목표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사람답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훈육이든 당장에는 기쁘게 느껴지지 않고 괴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훈육으로 단련된 사람들에게 의로움이라는 평화로운 열매를 맺어 줍니다.히브리서 12:11 · 두루새김
저자는 고난이 실제로 괴롭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고난을 당해도 언제나 즐거워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고통 그 자체가 자동으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열매는 「그 훈육으로 단련된 사람들」에게 맺힙니다. 고난이 있다는 사실과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성숙해지는 일은 구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고난을 견디며 하나님께 속한 삶으로 빚어져 갑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거룩함이며, 그 결과는 「의로움이라는 평화로운 열매」입니다.
절뚝이는 다리가 낫도록 길을 내라
12절에서 장면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늘어진 손을 들어 올리고 힘이 풀린 무릎을 곧게 펴십시오.히브리서 12:12 · 두루새김
여기서 이사야 35:3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사야 35장은 광야가 기뻐하고 메마른 땅에 꽃이 피는 회복의 환상을 보여 주며, 그 가운데 손이 약한 사람들을 강하게 하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라고 권합니다.
그 말씀은 단순히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 더 노력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다는 소식 때문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라는 말씀입니다(이사야 35:4). 히브리서는 그 언어를 가져와 고난 속에서 지친 독자들에게 적용합니다.
절뚝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도록, 여러분의 발이 걸을 길을 곧게 만드십시오.히브리서 12:13 · 두루새김
여기에는 잠언 4:26의 길에 관한 지혜도 함께 반영되어 있습니다.
강한 사람만 달릴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끝까지 달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달리기에서 힘이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절뚝거리는 사람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낫도록 길을 곧게 만들라고 합니다.
「접질리지 않고」(ἐκτρέπομαι)로 옮긴 말은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할 수도 있고, 의학적인 문맥에서는 관절이 어긋나거나 빠지는 일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다리와 길, 낫는다는 표현이 함께 등장하므로 두 의미가 겹쳐 들립니다.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상처 입은 사람이 회복되도록 하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훈육하신다는 사실은 공동체가 약한 사람을 냉정하게 대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야 할 이유가 됩니다.
평화와 거룩함을 함께 추구하라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힘쓰고, 거룩해지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브리서 12:14 · 두루새김
「힘쓰고」와 「힘쓰십시오」는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평화와 거룩함을 함께 놓습니다. 평화만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해서도, 거룩함을 말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무너뜨려서도 안 됩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실제로 적대와 박해를 겪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도록 힘쓴다는 것은 쉬운 요구가 아니었겠지만, 저자는 그 어려움을 이유로 평화의 가치를 낮추지 않습니다.
한편 앞에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단번의 희생으로 우리가 거룩해졌다고 선언했습니다(10:10). 그런데 이제 거룩해지도록 힘쓰라고 명령합니다. 이미 거룩하게 된 사람에게 왜 여전히 거룩함을 추구하라고 할까요?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는 근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속하게 된 사람은 실제 삶에서도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은 예수님의 희생을 대신하는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그 희생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된 사람에게 요구되는 삶의 방향입니다.
쓴 뿌리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서로 살피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 여러분을 괴롭히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살피십시오.히브리서 12:15 · 두루새김
「서로 살피십시오」라는 권면은 공동체 전체를 향합니다. 「쓴 뿌리」는 신명기 29:18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가운데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돌아서 다른 신들을 섬기려는 사람이나 집단이 생기지 않도록 경고하며, 그런 사람을 독과 쓴 열매를 맺는 뿌리에 비유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개인적인 원망이나 마음의 상처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본래 문맥에서 쓴 뿌리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저버리는 위험과 관련되고, 그 위험은 공동체 전체를 더럽힐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을 함께 달리는 사람들은 서로의 상태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에서는 왜 한 끼의 음식을 선택했는가
아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잘못된 남녀 관계를 맺거나, 에서처럼 거룩한 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살피십시오. 그는 맏아들의 권리를 한 끼 음식에 팔아넘겼습니다.히브리서 12:16 · 두루새김
창세기 25:29–34에서 에서는 배고픈 상태로 돌아와 야곱이 끓이고 있던 음식을 요구합니다. 야곱은 그 대가로 맏아들의 권리를 팔라고 하고, 에서는 결국 자기 권리를 음식과 맞바꿉니다.
맏아들의 권리는 단순히 가족 안에서 나이가 많다는 명예만이 아니라, 가문의 상속과 지위에 관계되는 중요한 권리였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런 에서를 「거룩한 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소중하고 거룩하게 여겨야 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에서의 문제는 배고팠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배고픔이라는 현재의 필요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중요한 권리를 경솔하게 팔아넘겼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도 고난과 손실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당장의 안전과 편안함을 포기해야 하는 선택처럼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필요만을 기준으로 미래의 유산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에서는 회개할 수 없었던 사람인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에서는 나중에 복을 물려받고 싶어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 복을 구했어도, 돌이킬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2:17 · 두루새김
창세기 27장에서 에서가 울면서 구한 것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이미 야곱에게 중요한 축복을 주었고, 에서의 눈물은 그 결정을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돌이킬 기회」는 에서 자신이 이전 선택을 돌이킬 회개의 자리로 읽을 수도 있고, 이삭의 마음이나 이미 내려진 결정을 바꿀 기회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에서의 최종적인 영적 운명을 확정하거나, 진심으로 회개하려는 사람도 하나님께 영원히 거부당한다는 일반 원칙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경고는 더 구체적입니다. 소중한 것을 가볍게 여기는 선택에는 나중에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에서는 한 끼의 식사를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이 무엇을 잃게 했는지는 나중에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무엇과 바꾸려 합니까?
조금 더 깊이
「돌이킬 기회」에 해당하는 원문은 회개의 자리라는 뜻으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에서 자신의 회개를 위한 기회로 읽는 견해는 그가 자신의 선택을 돌이킬 자리를 얻지 못했다고 이해합니다. 이삭의 마음이나 결정을 바꿀 기회로 읽는 견해는 눈물로 축복을 구했지만 아버지의 축복을 되돌리지 못했다는 창세기 이야기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또한 마지막에 구한 대상이 회개인지 축복인지도 문법과 문맥을 두고 논의가 있으며, 두루새김은 「그 복을 구했어도」라고 하여 축복을 구했다는 읽기를 따릅니다.
만질 수 있지만 다가갈 수 없는 산
18절에서 장면이 갑자기 바뀝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산에는 불이 타오르고 어둠과 캄캄함이 뒤덮였으며 폭풍이 몰아쳤습니다.히브리서 12:18 · 두루새김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 도착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산에 내려오시고, 산에는 연기와 불, 천둥과 나팔 소리가 가득합니다. 백성은 산의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되며, 20절은 「짐승이라도 산에 닿으면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라는 출애굽기 19:12–13의 명령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시내 산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 산에 임하신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에 함부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백성은 더 이상 직접 말씀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출애굽기 20:18–19; 신명기 5:23–27).
불과 어둠.
폭풍과 나팔 소리.
견딜 수 없는 명령.
심지어 모세도 두렵고 떨린다고 말합니다.
시내 산에서 무엇이 문제였는가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시내 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잘못된 분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내 산에서 불 가운데 말씀하신 분과 다음에 등장할 시온 산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 있는 인간이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고,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제 저자는 독자들이 다른 산에 나아왔다고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의 모세의 두려움은 신명기 9:19의 언어와 연결됩니다. 신명기에서 그 말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문맥에 놓여 있지만, 히브리서는 그 표현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신 두려운 광경을 묘사하는 데 사용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시온 산에 나아왔습니다
22절은 강한 대조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의 예루살렘에 나아왔습니다. 또 축제로 모인 수많은 천사들에게 나아왔으며,히브리서 12:22 · 두루새김
「나아왔습니다」(προσέρχομαι)는 원문에서 완료형입니다. 이미 나아왔으며 그 관계가 지금도 이어진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언젠가 시온 산에 이를 것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곳에 나아왔습니다.
물론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실제로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관계를 시온 산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는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앞 장의 아브라함은 기초가 있는 도시,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지으시는 도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11:10). 그 도시가 이제 독자들이 믿음으로 누리는 현실을 설명하는 데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나아왔다는 말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미래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삶도 함께 말합니다.
시온은 왜 특별한가
시온은 예루살렘과 그 안에서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고 함께 계시는 장소와 연결됩니다. 시편 48편에서는 시온이 위대한 왕의 도시로 찬양되고, 시편 132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시온을 자신의 거처로 택하셨다고 선언합니다.
히브리서는 그 시온을 하늘의 예루살렘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시온에 관한 모든 약속을 물질과 관계없는 하늘의 장소로 바꾸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사시고 다스리신다는 시온의 의미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현실에 적용한 것입니다.
두려운 산에서 큰 잔치 모임으로
22–24절에는 눈길을 끄는 목록이 이어집니다.
축제로 모인 수많은 천사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맏이들의 공동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온전하게 된 의로운 사람들의 영들.
그리고 마침내 새 언약의 중개자이신 예수님.
시내 산의 장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고, 가까이 다가가는 일도 제한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온의 장면에는 수많은 존재가 함께 모여 있습니다. 「축제로 모인」은 큰 축제나 공식적인 축하 모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없는 곳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맏아들의 권리를 판 에서와 하늘에 이름이 적힌 맏이들
에서는 맏아들의 권리를 한 끼 음식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도시에 「맏이들의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이것이 에서를 직접 겨냥한 의도적인 대조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같은 장 안에서 맏아들의 권리와 맏이들의 공동체가 등장한다는 점은 의미 있는 연결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맏이들」은 복수형이므로 예수님 한 분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속하여 유산을 물려받는 사람들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시민이며 그분의 나라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20에서도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낯선 장소에 허락 없이 들어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기록해 두신 백성입니다.
모든 이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그런데 이 축제의 장면 한가운데 무게 있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맏이들의 공동체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온전하게 된 의로운 사람들의 영들에게 나아왔습니다.히브리서 12:23 · 두루새김
시온에 나아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이제 독자들은 새 언약의 중개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그분께 나아갑니다.
시내 산에는 무서운 하나님이 계시고, 시온 산에는 거룩함이나 심판과 관계없는 온화한 하나님이 계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두 산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거룩함은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온전하게 된 의인들과 새 언약의 중개자
앞 장에서 옛 믿음의 사람들은 약속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11:39–40). 그런데 이제 하늘의 시온에 「온전하게 된 의로운 사람들의 영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을 앞서 언급된 믿음의 선조들과 연결해 읽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본문은 이름을 하나씩 밝히지 않으며,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으로 폭넓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계속해서 사용해 온 온전함의 말이 이제 하나님의 도시를 묘사하는 데 등장합니다.
또 새 언약의 중개자이신 예수와, 아벨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려진 피에 나아왔습니다.히브리서 12:24 · 두루새김
시온에 나아온 사람들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께 다가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에 그곳에 나아올 수 있습니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피
창세기 4:10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아벨의 피가 땅에서 자신에게 호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억울하게 죽은 아벨의 피는 그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2:24에는 또 다른 피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피입니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두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가가 아니라, 피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의 용서와 새 언약의 관계를 이루는 희생으로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가 말하는 더 나은 것은 죄를 씻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여 그분께 나아갈 길을 여는 힘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벨의 피는 하나님께 정의를 호소하는 피이므로, 저자가 그것을 단순한 복수심의 상징으로만 제시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더 낫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이 죄를 다루고 하나님의 백성을 그분께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힘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시내 산에서는 백성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시온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더 나은 것을 말합니다.
새 언약의 중심에는 침묵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주어지는 새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축제로 모인」이 앞의 천사들의 모임을 설명하는지, 뒤의 맏이들의 공동체와 함께 읽어야 하는지는 그리스어 문장의 구두점과 연결에 따라 달라집니다. 두 방식 모두 제시되어 왔으며, 천사들의 축제 모임으로 보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두루새김도 「축제로 모인 수많은 천사들」로 옮겼습니다.
시온에 나아왔다면 말씀하시는 분을 거부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분을 거절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땅에서 경고하시는 분을 거절한 사람들도 벌을 피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분께 등을 돌릴 경우에는 더더욱 벌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히브리서 12:25 · 두루새김
저자는 시온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여 준 직후에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가볍게 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시내 산의 사람들은 더는 자기들에게 말씀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25절에서는 독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거절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원문에서는 두 절에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다만 두 상황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시내 산의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두려움 때문에, 모세가 대신 듣고 전해 주면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신명기 5:27). 반면 25절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등을 돌리는 위험을 경고하며, 첫 장면을 통해 두 번째 경고의 엄중함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했습니다(1:1–2). 「벌을 피하지 못했다면」이라는 표현은 그토록 큰 구원을 소홀히 하고서 우리가 어떻게 벌을 피할 수 있겠느냐는 2:3의 질문과 연결됩니다. 편지의 처음에 등장한 질문이 거의 마지막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시온에 나아왔다는 사실은 단순히 안전한 신분을 얻었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할 더욱 깊은 이유가 됩니다.
하늘과 땅이 함께 흔들릴 때
26절은 다시 시내 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그분의 음성은 땅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한 번 더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 흔들겠다.」히브리서 12:26 · 두루새김
출애굽기 19:18에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내려오실 때 산이 크게 떨렸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제 학개 2:6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학개의 예언은 무엇을 말했는가
학개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이 성전을 다시 짓던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새로 세우는 성전이 이전 성전의 영광에 비해 보잘것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학개 2:3).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흔드시고 민족들을 흔드실 것이며, 이 성전에 영광을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학개 2:6–9).
흔들림은 단순히 세상의 종말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자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 말씀을 더 넓은 시야에서 읽습니다.
시내 산에서 땅을 흔드셨던 하나님이 이제 하늘과 땅을 흔드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학개의 예언을 하나님이 마침내 이루실 질서와 그 앞에서 사라질 것들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사용합니다. 저자가 학개의 표현 가운데 일부를 골라 인용하면서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한 번 더」라는 말에서 저자가 발견한 것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이 지어진 것들이기에 치워진다는 뜻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남게 하려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2:27 · 두루새김
저자는 예언 전체를 다시 설명하지 않고 「한 번 더」라는 짧은 표현을 붙잡습니다. 한 번 더 흔드신다는 것은 이전보다 더 큰 지진이 발생한다는 뜻이 아니라, 흔들리고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 치워지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 남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가리킨다고 저자는 이해합니다.
「지어진 것들」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 전체가 가치 없으므로 모두 없어진다는 뜻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합니다. 저자는 지어진 것들이 흔들릴 수 있는 질서에 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것과 대비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을 제시합니다. 본문은 새로운 창조가 물질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나 우주의 마지막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가운데에는 흔들릴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세우실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고 있으니 감사합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립시다.히브리서 12:28 · 두루새김
달리는 사람들, 훈육받는 자녀들, 절뚝거리는 다리를 가진 사람들, 불과 폭풍의 시내 산과 축제의 시온을 지나 마침내 하늘과 땅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흔들리지 않는 것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고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 나라를 건설해서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나라를 받는 것입니다.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천막에서 살며 하나님이 세우실 도시를 기다렸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도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제 12장에서는 그 나라를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믿는 사람들의 능력이나 업적 위에 세워진 질서가 아닙니다.
「받고 있으니」(παραλαμβάνω)는 원문에서 현재형으로, 독자들이 그 나라를 받는 현실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이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시고(10:13), 신자들도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견뎌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달려야 합니다.
은혜를 지닙시다, 또는 감사합시다
「감사합시다」의 그리스어 표현 에코멘 카린은 글자 그대로 「은혜를 가지자」로 읽을 수 있지만, 감사를 표현하는 관용적인 말로도 쓰입니다. 첫 번째 읽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그 은혜로 예배한다는 의미를, 두 번째 읽기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자는 뜻을 강조합니다.
두루새김은 이어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두 번째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라는 읽기도 원문의 낱말과 문장 연결에 근거를 두며, 실제 번역들 사이에서도 두 방향이 모두 나타납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는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응답입니다. 자신이 그 나라를 이루었다는 자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예배를 드립시다」(λατρεύω)로 옮긴 말은 히브리서가 앞서 제사장들의 예배와 예수님의 희생으로 가능해진 하나님 섬김을 설명할 때 사용했던 낱말입니다. 이제 그 말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는 공동체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같은 제물을 반복해서 바쳐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사람들이 그분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섬깁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벌받을까 봐 움츠러드는 공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엄 앞에서 갖는 경외를 포함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그분이 덜 거룩한 분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개자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는 불이시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태워 없애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2:29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신명기 4:24를 인용합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하나님께서 태워 없애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거룩함과 언약 안에서 오직 그분만을 섬겨야 한다는 요구, 우상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성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시내 산에는 타오르는 불이 있었고, 백성은 두려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시온과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설명한 뒤에도 저자는 하나님을 태워 없애는 불이라고 부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약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경외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그 은혜를 주신 분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흔들리는 땅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믿는 사람이 붙드는 것은 자기 마음의 굳셈이 아닙니다. 믿음은 달리는 일, 고난을 견디는 일, 절뚝거리는 사람을 위해 길을 내는 일, 평화와 거룩함을 추구하며 서로 살피는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로 나타납니다. 그 모든 행동은 믿음의 길을 여시고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 위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이 완성하신 일을 근거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그 일이 반드시 어떤 죄에 대한 처벌이라고 단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 사람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절뚝거리는 다리가 낫도록 길을 내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땅이 흔들립니다.
하늘까지 흔들립니다.
그때 저자는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 도망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모든 것을 붙잡아 두려고 애쓰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고 있으니 감사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 나라를 스스로 지어 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나라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를 주시는 분은 시내 산에서 말씀하셨고, 아들을 통해 새 언약을 이루셨으며, 지금도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태워 없애는 불이시지만,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은 달리기를 멈춘 사람들의 평안한 휴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 달려야 할 길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그들이 무엇을 받고 있는지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땅은 흔들리고 하늘까지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