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9–10장 · 더 좋은 성소와 제사

더는 제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정해진 절차를 따라 제물을 바칩니다. 일 년이 지나면 다시 제물을 바칩니다. 또 일 년이 지나면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이 반복에서 뜻밖의 결론을 끌어냅니다.

제사가 계속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제사로는 이루지 못한 일이 남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2절의 「그렇지 않다면 그 제물들이 바쳐지기를 그치지 않았겠습니까?」라는 질문은 히브리서 10장 전체를 여는 열쇠입니다. 제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면, 왜 똑같은 제사를 계속 드려야 합니까? 율법에 정해진 제사는 이스라엘의 실제 예배였으며,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신 질서에 속했습니다. 저자가 묻는 것은 그 제사가 유효했느냐가 아니라, 그것만으로 죄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10절과 14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바치심을 통해 거룩해졌」고, 그분은 「한 바침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언제까지나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옛 제사는 계속되었지만 사람을 최종적으로 온전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단 한 번 이루어졌지만 영원한 효력을 가집니다.

그런데 19절부터 저자는 독자들을 직접 부르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의 피로 거리낌 없이 성소에 들어갈 자유가 있」으니, 나아가자고, 붙들자고, 서로를 눈여겨보자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완전하기 때문에 이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 아니라, 그 희생 때문에 비로소 어떤 삶이 가능해졌다는 결론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은 크게 네 움직임으로 전개됩니다. 1–18절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이 왜 반복될 필요가 없는지 밝힙니다. 19–25절에서는 그 희생이 열어 놓은 삶을 제시합니다. 26–31절에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이 왜 치명적인지 경고하고, 32–39절에서는 실제로 고난을 겪었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견디라고 권합니다.

이 네 부분을 연결하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1110장 본문 읽기 →

해마다 반복되는 죄의 기억

히브리서 10:1–4 본문 →

1절은 율법을 「앞으로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라고 부릅니다.

저자는 그림자와 「실물의 모습 자체」를 구별합니다. 그림자가 어떤 실재를 가리키면서도 그 실재의 충분한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하듯, 율법의 제사 제도 역시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실재를 지향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거짓이었다는 주장이 아니라, 제사 제도에 최종적인 구원의 능력을 부여하지 않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2절부터 저자는 이 문제를 인간의 양심과 연결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제물들이 바쳐지기를 그치지 않았겠습니까?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져 죄를 두고 더는 양심에 걸리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히브리서 10:2 · 본디새김

여기서 말하는 양심의 정결은 죄를 지었던 과거의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죄가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가로막지 않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제사가 예배자를 결정적으로 깨끗하게 했다면, 같은 목적을 위해 똑같은 제사를 계속 바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해마다 제사가 반복됩니다.

도리어 그 제물 안에 해마다 죄를 기억함이 있습니다.히브리서 10:3 · 본디새김

속죄일이 돌아올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다루어야 하는 자신의 현실과 다시 마주했습니다. 제사가 드려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다루는 길을 마련하셨다는 의미였지만, 동시에 죄의 문제가 아직 최종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이 죄를 전혀 용서하지 않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레위기 4:20, 26 등은 속죄 제사를 통해 용서가 주어진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히브리서가 부정하는 것은 그 제물 자체가 사람의 죄를 영구적으로 제거하는 능력을 가진다는 주장입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0:4 · 본디새김

짐승의 생명은 인간의 죄를 최종적으로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새로운 제사의 절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신 것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0:5–10 본문 →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세상에 들어오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물과 바침을 당신은 바라지 않으셨고, 도리어 나에게 몸을 갖추어 주셨습니다.」히브리서 10:5 · 본디새김

저자는 시편 40:6–8을 인용합니다.

제사보다 중요한 순종

시편 40편은 고난에서 건짐을 받은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겠다고 고백하는 노래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보다 자신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며 그 법이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고백합니다(시편 40:6–8).

이 고백은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상 15:22에서 사무엘이 순종을 제사보다 낫다고 말하고 호세아 6:6에서 하나님이 제사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예언자적 전통에 속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일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은 원래 분리될 수 없었지만, 사람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 40편은 바로 그 불일치를 드러냅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 시편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시편의 화자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고백했다면, 히브리서는 그 고백이 예수님의 삶과 희생에서 결정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봅니다.

귀가 몸이 되었다

히브리어 시편은 하나님이 시인의 「귀를 파셨다」고 말하지만, 히브리서 10:5는 「도리어 나에게 몸을 갖추어 주셨습니다」라는 그리스어 시편의 문면을 따릅니다. 귀는 듣고 순종하는 사람의 태도를 드러내고, 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준비된 존재 전체를 떠올리게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 예수님의 육체를 통한 순종과 자기희생을 읽어 냅니다.

5절에서 하나님이 갖추어 주신 몸이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바치심」의 몸이 됩니다. 예수님께 몸이 주어졌고, 예수님께서는 그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으며, 그 몸을 바치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희생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예수님의 순종이 실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자리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왔습니다」

「그때 내가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왔습니다(두루마리 책에 나를 두고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말입니다.』」히브리서 10:7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핵심은 「당신의 뜻」입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희생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는 순종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허락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순종이 완성되는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간의 폭력이나 고통 자체를 즐기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고통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과 자기희생입니다.

8–9절에서 저자는 시편의 두 부분을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이 제물과 바침을 바라지 않으셨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그 제물들이 「율법을 따라 바쳐지는 것들」임을 굳이 덧붙입니다. 율법이 명령한 제사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 목적의 최종적인 실현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보십시오, 내가 왔습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둘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째 것을 걷어 내십니다.히브리서 10:9 · 본디새김

직접적인 문맥에서 첫째 것은 율법을 따라 반복되는 제사 질서이고, 둘째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폐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이전 제사 질서의 목적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진 것은 누구의 뜻 때문인가

10절은 이 논증의 결론입니다.

그 뜻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바치심을 통해 거룩해졌습니다.히브리서 10:10 · 본디새김

「그 뜻」은 앞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고, 그 결과 우리가 거룩해집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수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에 거룩해졌다고 말합니다. 뒤에서 독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권면하지만(10:36), 그 권면은 예수님께서 먼저 이루신 일을 바탕으로 합니다.

순종과 희생은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바치신 일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고, 바로 그 순종의 희생을 통해 우리는 거룩해졌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40:6의 히브리어 본문은 「귀를 파셨다」는 표현을 쓰며,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주셨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어 시편 39:7은 이것을 「소마 데 카테르티소 모이」, 곧 「도리어 나에게 몸을 갖추어 주셨습니다」로 옮깁니다. 그리스어 시편에는 귀로 읽는 전승도 있지만, 히브리서 10:5는 몸으로 읽는 문면을 사용하며, 이 문면은 저자가 10절까지 이어서 펼치는 논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서 있는 제사장과 앉으신 예수님

히브리서 10:11–14 본문 →

11절과 12절은 한 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누구나 받들며 같은 제물을 자주 바치면서 날마다 서 있습니다. 그 제물은 죄를 결코 벗겨 낼 수 없습니다.히브리서 10:11 · 본디새김
그러나 이분은 죄를 위해 한 제물을 바치시고 언제까지나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히브리서 10:12 · 본디새김

제사장은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앉으셨습니다.

옛 제사장은 고생하고 예수님께서는 편안히 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 있음에는 날마다 똑같은 제물을 반복해서 바치는 직무가 놓여 있고, 앉으심에는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희생이 놓여 있습니다.

「언제까지나」라는 표현은 앞의 한 제물을 바치신 일에 연결할 수도 있고, 뒤의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신 일에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원문의 어순과 문맥은 두 가능성을 허용합니다. 본디새김 번역은 앉으신 일에 연결하지만, 다른 읽기는 제물의 영속적인 효력을 강조합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의 단번의 희생이 반복되는 제사와 다르다는 결론은 같습니다.

앉으셨지만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부터는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을 받칠 발판으로 놓일 때까지 기다리십니다.히브리서 10:13 · 본디새김

저자는 다시 시편 110:1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원수들이 굴복하게 될 최종적인 승리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예수님의 승리가 모든 것 위에 완전히 드러나는 일은 아직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지금 아무 고난도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독자들은 여전히 적대와 고난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이 연결은 마지막 단락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온전하게 하셨지만 여전히 거룩해지고 있습니다

한 바침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언제까지나 온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0:14 · 본디새김

「온전하게 하셨다」는 이루어진 행위의 결과가 계속 유효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거룩해지는 이들」은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묘사합니다. 완성된 일과 계속되는 일이 한 문장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죄 없는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여전히 죄의 유혹과 배교의 위험을 경고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희생이 불완전해서 인간의 노력으로 보충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온전하게 하셨다」는 그리스어 완료형 테텔레이오켄(τελειόω)이고, 「거룩해지는 이들」에는 현재분사 하기아조메누스(ἁγιάζω)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면

히브리서 10:15–18 본문 →

저자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 약속을 다시 인용합니다. 이번에는 앞서 인용했던 긴 예언 전체를 반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마음과 생각에 새기겠다는 말씀을 들려준 뒤 곧바로 한 문장을 선택합니다.

그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히브리서 10:17 · 본디새김

3절에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해마다 기억되던 죄가 더 이상 기억되지 않습니다.

옛 제사의 반복은 죄의 문제를 계속해서 드러냈지만, 새 언약의 약속은 죄가 다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과거에 벌어진 사실을 잊어버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죄를 다시 심판과 정죄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시겠다는 용서의 언어입니다.

저자는 이 약속을 「거룩한 영도 우리에게 증언하십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예레미야의 기록을 오래전 예언자의 말로만 취급하지 않고, 성령께서 지금 그 말씀을 통해 독자들에게 증언하신다고 이해합니다.

이것들이 용서받는 곳에서는 죄를 위한 바침이 더는 없습니다.히브리서 10:18 · 본디새김

이것이 제사에 관한 논증의 최종 결론입니다. 죄가 가벼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이 죄를 다루는 일을 결정적으로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제물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히브리서는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더 이상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휘장 앞에서 멈추지 말고 나아갑시다

히브리서 10:19–22 본문 →

19절은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는 예수의 피로 거리낌 없이 성소에 들어갈 자유가 있고,히브리서 10:19 · 본디새김

지금까지 저자는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권면합니다.

첫 번째 권면이 나오기 전에 저자는 두 가지 사실을 선언합니다. 우리에게는 성소에 들어갈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집을 맡은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두 사실 모두 우리가 만들어 낸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거리낌 없이」 들어간다는 것

「거리낌 없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파레시아(παρρησία)는 본래 공개적으로 거리낌 없이 말하는 자유와 담대함을 가리킬 수 있는데, 히브리서는 이 말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사용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도덕적 자격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사람이 갖는 자유입니다. 저자는 먼저 자기 자신이 충분히 깨끗한 사람임을 증명하라고 말하지 않고, 이미 깨끗하게 하는 희생을 이루신 예수님께 근거하여 「믿음의 온전한 확신」 가운데(22절)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새롭고 살아 있는 길

(그 들어가는 길은 그가 우리에게 새로 세워 주신, 휘장 곧 자기 육을 지나가는 새롭고 살아 있는 길입니다.)히브리서 10:20 · 본디새김

장막의 휘장과 예수님의 육, 두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휘장은 거룩한 장소를 구분하고 출입을 제한했는데, 저자는 예수님의 육과 연결하여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두고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는 「휘장 곧 자기 육」을 직접 동일시하여 예수님의 육이 휘장에 비유되었다고 읽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고 설명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육을 통과하는 길이라는 표현에 무게를 두어, 예수님의 육체적 희생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되었다고 이해합니다. 두 읽기 모두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중심에 둡니다. 다만 예수님의 육 자체가 본래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가로막던 장애물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을 지나치게 구체화하는 해석입니다.

그 길은 죽은 제물의 반복적인 희생으로 유지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바치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신 살아 계신 예수님과 연결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희생을 통해 열어 놓으셨고, 지금도 대제사장으로 계시기 때문에 유효한 「새롭고 살아 있는 길」입니다.

마음과 몸이 함께 등장합니다

참된 마음으로 믿음의 온전한 확신 가운데 나아갑시다.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에서 벗어난 채, 또 몸이 깨끗한 물로 씻긴 채로 말입니다.히브리서 10:22 · 본디새김

「마음에 뿌림을 받아」는 피를 뿌리는 제사 의식과, 「몸이 깨끗한 물로 씻긴」 모습은 정결 예식의 언어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정결의 대상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은 해석자는 이 물의 씻음을 그리스도인의 세례와 연결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세례가 몸을 씻는 행위였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읽기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세례 자체를 직접 명명하지는 않으므로, 세례만을 유일한 의미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음과 몸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은 내면에서 어떤 종교적 감정을 느끼는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된 존재 전체가 그분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나아갑시다, 붙듭시다, 눈여겨봅시다

히브리서 10:23–25 본문 →

19–21절이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근거를 제시한다면, 22–25절은 그 근거에서 세 가지 권면을 끌어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하고, 소망의 고백을 굳게 붙들라고 하고, 서로를 눈여겨보라고 합니다. 그리스어 문장에서도 이 세 표현은 중심적인 권면 동사들이며, 권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자기 고백을 거쳐 공동체의 삶으로 넓어집니다.

소망을 붙드는 근거는 누구에게 있는가

기울지 않는 소망의 고백을 굳게 붙듭시다. 약속하신 분은 믿음직하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0:23 · 본디새김

저자는 독자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붙드는 이유는 약속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소망이란 내가 바라기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태도가 아니라, 약속하신 분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서로를 눈여겨보라는 뜻

그리고 사랑과 좋은 일을 돋우도록 서로 눈여겨봅시다.히브리서 10:24 · 본디새김

「눈여겨봅시다」는 주의 깊게 살피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자신을 살피자」고 하지 않고 「서로」를 눈여겨보자고 합니다. 「돋우도록」에 해당하는 낱말은 강한 충돌을 나타낼 수도 있는데, 히브리서는 이 강한 표현을 사랑과 좋은 일에 연결합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행동을 감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무엇 때문에 지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사랑과 좋은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의 버릇처럼 우리가 함께 모이기를 저버리지 말고 서로 권합시다. 여러분이 그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렇게 합시다.히브리서 10:2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예배에 빠지지 말라는 명령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문맥상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출석보다 깊습니다. 서로를 사랑과 좋은 일로 돋우기 위해 만나고 격려하는 공동체의 관계를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함께 모이는 일은 그 자체로 목적을 다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날」은 앞뒤 문맥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의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날이 다가온다는 확신은 사람들을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서로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유는 혼자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함께 견디는 자유입니다.

이 권면이 얼마나 절박한지는 바로 다음의 경고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눈여겨봅시다」는 그리스어 카타노오멘(κατανοέω)이고, 「돋우도록」에 해당하는 파록쉬스모스(παροξυσμός)는 자극이나 격려를 뜻하며, 문맥에 따라 강한 충돌이나 격분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5:39에서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심한 다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제물이 더는 없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

히브리서 10:26–31 본문 →

26절부터 본문의 분위기가 갑자기 어두워집니다.

진리를 아는 데 이른 뒤에 우리가 일부러 죄를 짓고 있으면 죄를 위한 제물이 더는 남아 있지 않고,히브리서 10:26 · 본디새김

18절의 「죄를 위한 바침이 더는 없습니다」와 놀랍도록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상황을 가리킵니다. 18절에서는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제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26절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남아 있는 다른 제물이 없습니다.

하나의 완전한 제사가 있다는 사실은 가장 큰 위로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가장 엄중한 경고의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위한 결정적인 제물을 바치셨다면, 예수님을 거부한 뒤에 돌아갈 수 있는 또 다른 속죄의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죄를 짓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를 알게 된 뒤에 의도적으로 죄를 지으면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까? 29절이 그 죄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예사로운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영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특정한 죄에 넘어져 괴로워하는 사람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희생을 알면서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모독하는 태도를 가리키며, 히브리서 3:12와 6:4–6의 배교 경고와 연결해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경고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지는 갈립니다. 한 견해는 실제로 신앙에 참여했던 사람도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경고로 읽습니다. 다른 견해는 공동체 안에서 많은 은혜를 경험했더라도 참되고 최종적인 구원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불신앙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경고로 이해합니다. 본문은 이 두 체계 가운데 어느 하나를 모든 세부 사항까지 판정하려는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경고가 실제로 독자들에게 주어진 진지한 경고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예사로운 것으로 여긴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로 거룩해지고도 그 피를 예사로운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영을 모욕한 사람은 얼마나 더 나쁜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히브리서 10:29 · 본디새김

「예사로운 것」은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속된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하던 예수님의 피를, 아무 특별한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일입니다.

저자는 이것을 모세의 율법에 따른 처벌과 비교합니다. 28절의 두세 증인에 대한 언급은 신명기 17:2–7처럼 우상숭배 등의 중대한 언약 위반을 다루는 재판 규정과 관련되며, 모든 사소한 율법 위반에 사형이 적용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옛 언약 안에서도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역하는 중대한 행위는 엄중하게 다루어졌다면, 하나님의 아들과 그 희생을 거부하는 일은 얼마나 더 심각합니까?

「언약의 피로 거룩해지고도」라는 표현에도 해석상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문장 연결은 배교하는 사람이 그 피로 거룩해졌다고 읽는 것이며, 이 경우 그것을 실제 구원에 참여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언약 공동체에 구별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갈립니다. 일부 해석자는 거룩해진 대상을 예수님으로 읽기도 하지만, 이 해석은 가까운 주어와 연결하는 일반적인 읽기보다 문맥상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합니다. 어느 견해든 29절만으로 구원의 모든 신학적 문제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는데, 그 피를 거부한다면 무엇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것입니까? 저자는 다른 대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히브리서 10:31 · 본디새김

19–22절에서는 하나님께 거리낌 없이 나아가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일이 무섭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로우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본성이 달라지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희생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사람과 그것을 짓밟고 거부하는 사람이 놓인 관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참으로 행동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무서운 경고를 한 뒤에, 그들의 실패를 더 깊이 파헤치는 대신 과거에 그들이 보여 주었던 믿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26절의 「일부러 죄를 짓고 있으면」은 그리스어로 헤쿠시오스(ἑκουσίως) 하마르타논톤(ἁμαρτάνω)입니다. 「일부러」라는 부사와 현재분사 형태의 「죄를 짓다」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현재분사는 문맥에 따라 계속되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지만, 문법 형태만으로 반드시 일생 동안 반복되는 특정한 죄의 습관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 성격은 29절의 설명에서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날 견뎠던 일을 기억하십시오

히브리서 10:32–34 본문 →

32절은 갑자기 부드러운 권면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지난날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뎌 낸 그때 말입니다.히브리서 10:32 · 본디새김

좋은 시절을 추억하라는 말이 아니라, 독자들이 과거에 실제로 감당했던 믿음의 행동을 기억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욕과 환난으로 사람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고, 그런 고난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표현은 공개적인 모욕과 수치를 담고 있으며, 당시 사회에서 공개적인 비난은 개인의 명예와 공동체 안의 지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갇힌 이들과 함께 아파했고, 여러분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더 낫고 길이 남는 재산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0:34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독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 주는 드문 역사적 단서입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을 함께 나누었으며, 재산을 빼앗기는 경험도 했습니다. 그것이 국가의 공식적인 재산 몰수였는지, 지역 사회의 폭력적인 약탈이었는지, 다른 형태의 박탈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고, 어느 도시에서 언제 이런 일을 겪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 실제적인 사회적 손실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더 나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

그들은 재산을 빼앗기고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물질적인 재산을 잃는 일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눈앞의 소유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15에서 말한 「영원한 유산의 약속」과 주제적으로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미래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현재의 손실만으로 자기 삶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앞의 24절에서 서로를 사랑과 좋은 일로 돋우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독자들이 실제로 그런 사랑을 보여 주었던 과거가 등장합니다. 저자는 낯선 행동을 처음부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살아 냈던 믿음의 모습을 기억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지금 그 믿음을 계속 붙들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견뎠다. 이제도 견뎌야 한다

히브리서 10:35–36 본문 →

그러므로 여러분의 거리낌 없는 자유를 내버리지 마십시오. 그 자유에는 큰 갚음이 있습니다.히브리서 10:35 · 본디새김

19절에서 「거리낌 없이 성소에 들어갈 자유」라고 했던 바로 그 자유(파레시아)가 다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유였고, 이제는 고난 속에서도 내버려서는 안 되는 자유가 됩니다. 「내버리지 마십시오」라는 권면은 그들이 실제로 그 자유를 포기할 위험에 놓여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이미 한 번 고난을 견뎌 냈습니다. 그런데 고난은 한 번 견뎠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견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서 약속하신 것을 받도록 말입니다.히브리서 10:36 · 본디새김

견딤은 어려움 아래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버티는 인내를 가리킵니다. 이 구절을 7절의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말입니다」와 연결하면 특별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수준의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결정적인 희생이고, 독자들의 순종은 그 희생의 효력 안에서 약속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믿음의 응답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히브리서의 권면은 다시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는 요구로 바뀌고 맙니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마지막으로 하박국서를 펼칩니다.

오실 이가 오실 때까지

히브리서 10:37–39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오실 이가 오시고 늦추지 않으실 것이다.」히브리서 10:3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하박국 2:3–4를 바탕으로 합니다. 하박국은 악이 번성하고 폭력이 가득한 현실 앞에서 묻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왜 악인이 번영합니까? 왜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더 악한 민족을 사용하십니까?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이루어질 환상을 말씀하시며, 늦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 또는 신실함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박국 2:4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사람은 살 것이라는 뜻보다 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아직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기다리는 환상에서 오시는 분으로

하박국 2:3의 히브리어 문맥에서는 정해진 때에 이루어질 환상이 기다림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 표현을 「오실 이」가 오신다는 말씀으로 제시합니다. 그리스어 성경의 전승과 해석을 거치면서 기다림의 대상이 인격적으로 표현되고, 히브리서는 그것을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문맥에 놓습니다.

이것은 하박국의 본래 뜻과 히브리서의 사용을 구별해서 이해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하박국의 본래 문맥은 하나님의 정의가 역사 속에서 드러날 정해진 때를 기다리는 이야기이고, 히브리서는 그 기다림의 언어를 가져와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공동체에 적용합니다.

독자들은 이미 오래 기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난을 견뎌 냈지만, 약속된 구원의 완성은 아직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저자는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며 늦추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사람이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그가 뒤로 물러서면 내 목숨이 그를 기뻐하지 않는다.」히브리서 10:38 · 본디새김

로마서 1:17과 갈라디아서 3:11도 하박국 2:4를 인용하지만, 세 서신은 이 말씀을 각기 다른 논증 속에 배치합니다. 로마서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 갈라디아서는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대조하면서, 히브리서는 고난 속에서 끝까지 견디는 믿음을 권면하면서 인용합니다.

히브리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에서 멈추지 않고, 뒤로 물러서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경고까지 함께 가져옵니다. 믿음은 처음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완전히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기다립니다.

기다리기 때문에 견딥니다.

견딘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고, 소망의 고백을 붙들고, 서로를 사랑하며,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는 물러서는 사람들이 아니다

39절은 경고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섬에 속하여 멸망에 이르는 이들이 아니라, 믿음에 속하여 목숨을 얻는 이들입니다.히브리서 10:39 · 본디새김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권면하고 경고했던 저자가 「우리는」이라고 말하며 다시 자신을 그들과 함께 묶습니다. 자신만 안전한 곳에 서서 버티라고 말하지 않고, 함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자리에 섭니다.

이것을 독자들의 미래가 어떤 선택과 무관하게 자동으로 확정되어 있다는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에서 그는 물러서는 일을 엄중하게 경고했습니다. 오히려 이 문장은 독자들이 끝까지 믿음 안에 머물 것이라는 목회적 확신과 격려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무엇인지, 다음 장에서 저자는 오래전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 줄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하박국 2:4의 「믿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무나는 신실함, 충실함, 확고한 믿음의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하박국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그분을 신뢰하며 충실하게 서 있는 태도와 관련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어 성경의 문면을 사용하면서 기다림과 믿음의 관계를 자신의 독자들에게 새롭게 설명합니다.

내버리지 말아야 할 자유

히브리서 10:1–39 본문 →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히브리서의 대답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야말로 살아가야 할 삶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에(10:7–10) 독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약속을 기다리고(10:36), 예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기에(10:19–21) 그 길로 나아가며(10:22), 죄를 위한 제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에(10:18) 그 희생을 버리고 다른 길을 찾지 않고(10:26–29),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기다리시기에(10:12–13) 그들도 예수님을 기다리며 견딥니다(10:36–38). 예수님의 희생이 불완전해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기 때문에 그 약속의 완성을 확신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이 이미 완전하다는 사실은 어떤 삶을 살아도 상관없다는 허락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길을 따라 끝까지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

히브리서 10장의 처음에는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이 서 있습니다. 그는 올해도 제물을 바치고, 내년에도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기억합니다.

그런데 장의 중간에 이르면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바치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 희생으로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 저자의 시선은 그 길 앞에 서 있는 독자들에게 향합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아파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견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믿음이 흔들릴 위험에 놓였습니다. 그들에게 저자는 「여러분의 거리낌 없는 자유를 내버리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 길은 더 많은 제물을 바쳐야 열리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열어 놓으신 길이고, 「사랑과 좋은 일을 돋우도록 서로 눈여겨」보며 함께 걷는 길입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자신도 그들 가운데 서서 말합니다. 「우리는 물러섬에 속하여 멸망에 이르는 이들이 아니라, 믿음에 속하여 목숨을 얻는 이들입니다.」

제사장은 더 이상 반복해서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완성된 희생을 붙들고, 예수님을 기다리며 계속 걸어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