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8장

이 장의 자리 · 26–29장 · 예언자가 겪은 고난

부러진 멍에와 무너진 진실

예레미야 28장에는 두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예레미야이고, 다른 사람은 하나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둘 다 유다 백성의 미래에 관해 예언합니다. 심지어 두 사람이 바라는 미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이 돌아오고, 빼앗긴 성전 기물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며, 유다가 더 이상 이방 왕의 지배를 받지 않는 미래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전하는 말씀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하나냐는 앞으로 두 해 안에 바벨론의 멍에가 부서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멍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독자는 이미 앞 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에게는 하나냐의 주장을 판단할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들 앞에는 모두 예언자로 불리는 두 사람이 서 있고, 서로 다른 미래를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희망을 전한다는 것이 언제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 되고, 언제 오히려 사람들을 거짓에 의지하게 만드는 일이 됩니까?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728장 본문 읽기 →

하나냐의 예언: 두 해 안에 모든 것이 돌아온다

예레미야 28:1–4 본문 →

공개된 장소에서 벌어진 충돌

이야기는 구체적인 날짜로 시작합니다.

그해, 곧 유다 왕 시드기야의 통치 초기인 사 년째 다섯째 달에, 기브온 출신인 아술의 아들 예언자 하나냐가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예레미야 28:1 · 본디새김

이는 공개적인 대결입니다.

앞 장에서 예레미야는 목에 멍에를 메고 바벨론을 섬겨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하나냐는 바로 그 상징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부러뜨렸다.』」예레미야 28:2 · 본디새김

이 호칭은 예레미야가 앞 장에서 사용한 호칭과 같습니다(27:4, 21). 그러므로 두 사람의 대립은 어느 신을 믿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아닙니다.

같은 여호와야훼께서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둘러싼 충돌입니다.

「부러뜨렸다」와 「부러뜨릴 것이다」

2절에서 그는 여호와야훼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이미 「부러뜨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부러뜨릴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미래의 일을 선언합니다.

아직 현실에서는 바벨론의 지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냐는 그 지배의 종말을 이미 결정된 일처럼 선포합니다.

두 해라는 기한

「『앞으로 만 이 년 안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곳에서 가져다가 바벨론으로 옮긴 여호와야훼의 집 기물들을 내가 모두 이곳으로 되돌려 놓겠다.』」예레미야 28:3 · 본디새김

하나냐의 예언은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두 해라는 기한이 있고, 돌아올 물건들이 있으며, 돌아올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4절에서 그는 여고니야 왕과 바벨론에 끌려간 모든 유다 포로가 돌아올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여고니야는 열왕기하 24:8–17에서 여호야긴으로 불리는 왕입니다. 그는 바벨론에 끌려갔고, 그 대신 시드기야가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특히 여고니야의 귀환은 현재 왕인 시드기야의 정치적 지위와도 관련되는 문제였습니다. 다만 하나냐가 여고니야의 복위를 구체적으로 주장했는지까지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성전 기물들이 돌아옵니다. 포로들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지배가 끝납니다.

이것은 유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거의 모두 되찾는 미래입니다.

그러나 이 장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말이 거짓이라고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보다 더 엄격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말은 과연 여호와야훼께서 보내신 말씀입니까?

조금 더 깊이

시드기야 사 년째는 통상적인 연대 계산으로 기원전 594–593년 무렵에 해당합니다. 본문은 「통치 초기」와 「사 년째」를 함께 기록합니다. 여기서 통치 초기라는 표현을 즉위 직후의 짧은 기간이 아니라 통치의 앞부분을 넓게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범위를 본문이 정확히 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어 완료형이 언제나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의 문맥에서는 확실한 미래를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2절을 하나냐가 바벨론의 지배가 현실적으로 이미 끝났다고 주장했다는 뜻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예레미야 29:8–10에서는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에게 거짓 예언과 꿈에 속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바벨론을 위한 정해진 기간이 차면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에서 실제로 약속되는 회복은 그보다 긴 기다림을 포함합니다.

「아멘」이라고 대답한 예레미야

예레미야 28:5–9 본문 →

적대적인 예언에 아멘이라고 말하다

예레미야의 첫 반응은 예상 밖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했다. 「아멘. 여호와야훼가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야훼가 당신이 예언한 말을 이루어, 여호와야훼의 집 기물들과 사로잡혀 간 모든 사람을 바벨론에서 이곳으로 되돌려 놓기를 바랍니다.」예레미야 28:6 · 본디새김

문제는 그 일이 지금, 하나냐가 말한 방식과 시기에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좋은 미래가 오기를 바라지만,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하나님의 확정된 말씀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회복을 소망하는 것과 회복의 시기를 하나님께서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구별합니다.

그 차이가 7절의 「그러나」에서 드러납니다.

예언의 전통을 기억하라

예레미야는 먼저 과거의 예언자들을 언급합니다.

「먼 옛날부터 나와 당신보다 앞서 있었던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에 관해 전쟁과 재앙과 역병을 예언했습니다.」예레미야 28:8 · 본디새김

여기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이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에서 벗어난 이상한 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아모스 1–2장이나 이사야 13장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민족을 향한 심판 예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심판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강대한 왕국들도 하나님의 판단 아래 놓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다와 바벨론의 미래를 말하는 예레미야의 선포는 과거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레미야가 모든 참된 예언은 심판만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바로 다음 절에서 평화를 예언하는 경우를 따로 언급합니다.

평화를 말하는 예언은 어떻게 확인되는가?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때 여호와야훼가 참으로 보낸 예언자로 드러날 것입니다.」예레미야 28:9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신명기 18:21–22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냐는 구체적인 기한을 제시했으므로 그 예언은 실제 역사 속에서 검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예언의 참됨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 13:1–5는 어떤 표징이 실제로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이 여호와야훼를 떠나게 만드는 말씀이라면 따라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전쟁과 재앙을 선포하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불편합니다. 반면 평화를 약속하는 말씀은 듣는 사람들의 기대를 얻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정말 여호와야훼에게서 왔는지 신중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은 소망을 포기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소망이 크다는 이유로 확신을 앞당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하나냐는 말보다 훨씬 강렬한 방식으로 응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아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반어적인 표현으로 읽을 여지는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냐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의 말이 비꼬는 말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예레미야가 회복 자체를 바라고 있다는 읽기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냐가 멍에를 부러뜨리다

예레미야 28:10–11 본문 →

논증 대신 행동이 등장하다

예언자 하나냐가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 막대를 벗겨 내어 부러뜨렸다.예레미야 28:10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앞 장에서 여호와야훼의 명령으로 멍에를 만들어 목에 얹었습니다. 그 멍에는 바벨론 왕의 지배가 여러 나라의 목에 놓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의 예언은 말의 대결을 넘어 상징 행동의 충돌이 됩니다.

예레미야가 목에 멍에를 얹음으로써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여 주었다면, 하나냐는 그 멍에를 부러뜨림으로써 바벨론의 지배가 끝날 것이라고 보여 줍니다. 하나냐가 부러뜨린 것은 실제 바벨론의 지배가 아니라 그 지배를 나타내는 나무 막대였습니다.

상징을 없앴다고 해서 상징이 가리키는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하나냐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말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내가 앞으로 만 이 년 안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부러뜨려 모든 민족의 목에서 벗겨 내겠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기 길을 갔다.예레미야 28:11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선언했고, 구체적인 기한을 제시했으며, 이제 눈에 보이는 행동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이 장을 읽는 사람은 이미 하나냐의 예언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백성이 실제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왜 떠났을까?

예레미야는 반격하지 않습니다.

하나냐에게서 멍에를 빼앗아 다시 목에 얹지도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를 거짓 예언자라고 즉시 선고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기 길을 갑니다.

이 침묵의 이유는 본문에서 명시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충격을 받았는지, 더 이상의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여호와야훼의 새로운 말씀을 기다렸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다시 하나냐에게 말하는 것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뒤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상징 행동에 맞서 자신도 즉석에서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가 다음에 전하는 말씀은 하나냐의 행동이 있은 뒤 여호와야훼께서 새롭게 주신 말씀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은 하나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마지막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 멍에를 부러뜨렸지만 쇠 멍에를 만들다

예레미야 28:12–14 본문 →

부러진 멍에가 더 무거워지다

여호와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나냐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무 멍에 막대들을 부러뜨렸지만, 그 대신 쇠 멍에 막대들을 만들게 될 것이다.』」예레미야 28:13 · 본디새김

이 선언은 하나냐의 행동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나무로 만든 막대는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냐가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쇠로 만든 멍에는 그보다 훨씬 단단하고 부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멍에는 사라지지 않은 지배뿐 아니라 더욱 벗어나기 어려운 지배를 나타냅니다.

하나냐는 멍에를 없애고자 행동했지만, 여호와야훼의 선언에 따르면 그의 행동은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그가 실제로 쇠 멍에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아닙니다. 그의 행동이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밝히는 상징적인 선언입니다.

누가 멍에를 얹었는가?

1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민족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도록 내가 그들의 목에 쇠 멍에를 얹었다. 그들은 그를 섬길 것이다. 들짐승까지 내가 그에게 주었다.』」예레미야 28:14 · 본디새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내가」입니다.

하나냐가 멍에를 부러뜨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멍에를 얹으셨다면, 하나냐가 그 상징을 부러뜨리는 행위로 여호와야훼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14절의 마지막에는 들짐승까지 느부갓네살에게 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앞 장의 27:6에서도 나타났던 선언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여러 나라와 그 땅의 생명들까지 바벨론 왕의 지배 아래 두셨다는 뜻입니다.

상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상징이 하나님의 뜻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보내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내보내시다

예레미야 28:15–16 본문 →

하나냐의 죄는 미래를 잘못 예측한 것뿐인가?

예레미야는 마침내 하나냐에게 직접 말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언자 하나냐에게 말했다. 「하나냐, 부디 들으십시오. 여호와야훼가 당신을 보내지 않았는데, 당신은 이 백성이 거짓을 믿게 했습니다.」예레미야 28:15 · 본디새김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미래를 잘못 예측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거짓에 의지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냐의 말을 믿게 되면, 그 말에 따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지배가 곧 끝난다고 믿는 왕은 저항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포로들이 두 해 안에 돌아온다고 확신하는 백성은 오랜 어려움에 대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실제로 주신 말씀을 따르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은 단지 미래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신뢰와 선택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끕니다.

본문은 하나냐가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예언이 참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가 정치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일부러 거짓 예언을 했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다만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의 예언이 여호와야훼께서 보내신 말씀이 아니었으며, 그 결과 백성이 거짓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보내지 않았다」와 「내보내겠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내가 너를 땅 위에서 내보내겠다. 올해 너는 죽을 것이다. 네가 여호와야훼를 거역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8:16 · 본디새김

거짓으로 주장했던 ‘보냄’이 심판의 ‘내보냄’으로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선언하시는 분은 그가 자기 권위의 근거로 내세웠던 바로 그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왜 이렇게 무거운 심판을 받는가?

그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여호와야훼께서 주시지 않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백성들이 거짓을 믿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합니다. 듣는 사람은 그 말을 단순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일은 매우 심각합니다.

하나냐는 여호와야훼를 공공연히 부정하거나 다른 신을 섬기라고 가르치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름을 사용하여 여호와야훼의 실제 말씀과 다른 것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확신 있게 사용하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충실하게 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8:20–22는 여호와야훼께서 명령하지 않으신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전하는 예언자를 경고합니다. 또한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여호와야훼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주장하는 일 자체가 문제라는 점입니다. 예레미야서 안에서는 23:16–22도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나온 환상을 말하는 예언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약속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마태복음 7:15–23). 특히 주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 구별된다는 점에서 관련성이 있습니다. 이는 예레미야 28장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행위와 하나님의 참된 뜻에 순종하는 삶을 구별하는 신학적 주제의 연결입니다.

두 해를 약속한 사람이 그해 일곱째 달에 죽다

예레미야 28:17 본문 →

마지막 절은 놀라울 만큼 짧습니다.

예언자 하나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예레미야 28:17 · 본디새김

여기에는 감정적인 묘사가 없습니다. 그가 어떤 병을 앓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죽었는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시드기야 사 년째 다섯째 달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 그가 올해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 전해진 뒤, 그해 일곱째 달에 실제로 죽었다고 기록됩니다.

앞서 예레미야는 평화를 예언하는 사람의 말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 그가 여호와야훼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원칙이 이야기 속에서 적용됩니다.

하나냐는 두 해 안에 바벨론의 멍에가 부서질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그해 죽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이 먼저 보여 주는 성취는 하나냐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여호와야훼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확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 절은 독자가 하나냐의 확신이나 상징 행동이 아니라 실제로 성취된 말씀을 바라보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 사이에는 달력상 두 달의 간격이 있습니다. 정확한 일자가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며칠이 지났는지까지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약속한 두 해가 지나기 훨씬 전에 죽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열왕기하 25장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성전이 불타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또한 여고니야는 하나냐가 말한 두 해 안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훨씬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바벨론에서 감금 상태를 벗어난 것으로 기록됩니다(열왕기하 25:27–30). 따라서 하나냐가 약속한 단기간의 전면적인 회복은 성경에 기록된 이후의 역사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두 해를 말한 예언자와 일곱째 달의 기록

예레미야 28:1–17 본문 →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자신이 바라는 미래와 여호와야훼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미래를 구별했느냐에 있습니다. 예레미야 28장에서 문제가 된 것은 희망 자체가 아니라, 근거 없는 확신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었습니다. 참된 소망은 언제나 듣기 좋은 말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통해 보존됩니다.

성전 뜰에서 부러진 나무 멍에는 사람들에게 해방이 가까웠다는 확신을 심어 주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실제로 무너진 것은 바벨론의 지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냐가 여호와야훼의 말씀이라고 주장한 약속의 신뢰성이었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더 이상 극적인 상징 행동도, 많은 사람 앞에서 외치는 선언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의 날짜와 한 사람의 죽음이 남습니다.

하나냐는 「앞으로 만 이 년 안에」라고 말했지만, 본문은 「그해 일곱째 달에」라고 기록합니다.

예레미야 28장은 그 짧고 냉정한 기록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