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29장

이 장의 자리 · 26–29장 · 예언자가 겪은 고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지금 살아가기

예레미야 29장은 한 통의 편지로 시작합니다.

편지를 쓴 사람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예레미야이고, 받는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향을 잃었고, 왕과 귀족들마저 포로가 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듣고 싶은 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포로 생활이 곧 끝난다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의 지배가 무너지고, 자신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서 다시 예배할 수 있다는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에는 전혀 다른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들을 포로로 끌고 온 나라에서 집을 짓고 살아야 합니다. 그곳에서 자녀를 낳고 다음 세대를 길러야 합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방 성읍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포로들이 생각하던 신앙의 지리 자체를 바꾸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떠나온 곳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바벨론에 있는 그들에게도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미래를 약속하셨다면, 왜 그 미래가 오기 전에 낯선 땅에서 긴 세월을 살아가라고 하십니까?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29장 본문 읽기 →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건너간 편지

예레미야 29:1–3 본문 →

성전에서 선포하던 말씀이 편지가 되다

앞 장에서는 예레미야와 하나냐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서로 다른 미래를 선포했습니다. 이제 장면은 멀리 떨어진 바벨론으로 확장됩니다.

예레미야는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해야 할 말씀은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에는 종교 지도자들도 있고, 공동체를 이끌던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뿐 아니라 유다 사회의 여러 계층이 바벨론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고니야 왕과 왕대비, 고관들,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뒤였습니다. 이는 열왕기하 24:10–16에 기록된 기원전 597년의 포로 사건과 연결됩니다.

바벨론은 단순히 왕과 귀족들만 끌고 간 것이 아닙니다. 건축과 금속 가공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도 데려갔습니다. 이는 유다의 사회적·경제적 역량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편지를 받는 공동체는 나라를 떠난 몇몇 개인의 집단이 아닙니다. 고향에서 살아가던 사회의 일부가 통째로 다른 땅으로 옮겨진 공동체입니다.

왕의 사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다

3절에는 편지를 전달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입니다. 이들은 시드기야 왕이 느부갓네살에게 보낸 사절들이었습니다.

앞서 예레미야 26:24에서는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보호했습니다. 열왕기하 22:8–14에서 사반은 요시야 시대에 발견된 율법책을 왕에게 읽어 준 서기관입니다.

이 편지의 전달자인 엘라사가 그 사반의 아들이라면, 예레미야를 보호했던 아히감과 같은 가문에 속합니다. 본문은 그 관계를 특별히 설명하지 않지만, 사반의 가문이 예레미야 시대의 중요한 사건들에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호와야훼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찾아갑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멀어졌지만,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그들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포로 생활을 임시 대기실로 만들지 마라

예레미야 29:4–7 본문 →

누가 그들을 바벨론으로 보냈는가?

편지의 첫머리는 뜻밖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보낸 모든 이들아,」예레미야 29:4 · 본디새김

1절에서 이야기하는 이는 느부갓네살이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그들을 사로잡아 보냈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사건을 두 주어가 설명합니다.

역사적으로 그들을 끌고 간 사람은 느부갓네살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사건이 자신의 통치 밖에서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밝히십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폭력과 정복을 모두 정당화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25:12는 때가 이르면 바벨론의 죄에 대해서도 심판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있다는 사실이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잊으셨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살아갈 방법을 명령하십니다.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자녀를 길러라

5–6절에는 전쟁의 전략도, 특별한 종교의식도 나오지 않습니다.

「집들을 지어 그 안에서 살아라. 정원들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어라.」예레미야 29:5 · 본디새김
「아내를 맞아 아들딸을 낳아라. 너희 아들들에게 아내를 맞아 주고, 너희 딸들을 남편들에게 주어 아들딸을 낳게 하여라. 그곳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마라.」예레미야 29:6 · 본디새김

곧 떠날 생각이라면 집을 짓기보다 임시 거처에 머물 것입니다. 정원을 가꾸어 열매를 기다릴 이유도 적습니다. 자녀들이 자라서 가정을 이루는 일까지 생각할 필요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한 세대를 넘어서는 삶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포로들의 삶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멈추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고, 일하고, 집을 짓고, 자녀를 기르며 공동체를 이어 가야 합니다.

여기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마라」라는 말씀은 창세기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1:28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머물던 시기에도 그들은 번성하여 강해졌다고 기록됩니다(출애굽기 1:7).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번성은 반드시 자기 나라의 정치적 독립이나 익숙한 땅에만 묶여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포로 생활은 이집트 체류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유다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 24:6–7은 포로들을 다시 세우고 심으시며, 그들에게 여호와야훼를 아는 마음을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약속과 함께 보면 29장에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라는 명령은 단순한 생존 지침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시 세우시는 과정에서 그들도 삶을 이어 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고향을 잃었다고 해서 삶의 목적까지 잃은 것은 아닙니다.

원수의 성읍을 위해 기도하라

「내가 너희를 사로잡아 보낸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 성읍을 위해 여호와야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할 때 너희에게도 평안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9:7 · 본디새김

포로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나라의 멸망을 바라기 쉬웠을 것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지면 자신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포로들의 삶과 그들이 사는 성읍의 삶을 서로 연결합니다.

그들이 사는 곳에 전쟁과 혼란이 닥치면 포로들도 고통을 겪습니다. 반대로 그곳에 안정과 질서가 있다면 그들도 집을 짓고 자녀를 기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읍의 평안을 구하는 일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현재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전과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행동입니다. 포로들이 지금 기도해야 할 대상은 바벨론의 영원한 번영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가는 성읍의 평안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바벨론에서도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서의 삶과 여호와야훼를 향한 신앙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포로들이 돌아올 고향만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낯선 땅에서의 삶에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조금 더 깊이

평안은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공동체가 안전하고 온전하게 살아가는 상태를 포함합니다. 다니엘 6:10은 포로로 살아가는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니엘의 기도와 예레미야 29장의 명령은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장면 모두 여호와야훼께서 바벨론에 있는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신약에서는 베드로전서 2:11–17에서 신자들을 거류민과 나그네로 부르면서도 사람들 가운데 선한 행실을 보이고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도록 권고하는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이는 예레미야 29장의 직접적인 인용이라기보다, 자신이 완전히 소속되지 않은 세계 속에서도 책임 있게 살아간다는 신학적 주제가 발전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29장의 본래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바벨론에 끌려간 유다 포로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칠십 년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

예레미야 29:8–14 본문 →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

8–9절에서 여호와야훼는 포로들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과 점쟁이들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 있는 너희 예언자들과 점쟁이들이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여라. 너희 자신이 꾸는 꿈에도 귀를 기울이지 마라.」예레미야 29:8 · 본디새김

앞 장에서 하나냐는 두 해 안에 포로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비슷한 기대를 부추기는 예언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해당 동사 형태는 해석이 갈립니다. 포로들 자신이 꾸는 꿈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고, 예언자들이 꿈을 꾸게 하거나 꿈을 부추기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포로들 자신이 꾸는 꿈으로 옮겼습니다.

사람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거짓 예언자들의 말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품고 있는 강렬한 기대도 거짓된 확신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지배가 곧 끝날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그 믿음을 확증해 주는 말에 쉽게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전혀 다른 시간을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의 칠십 년이 차면」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바벨론의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겠다.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너희에게 한 나의 좋은 말을 이루겠다.」예레미야 29:10 · 본디새김

핵심은 회복이 당장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칠십 년은 한 사람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고도 남을 만큼 긴 세월입니다. 따라서 편지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직접 귀환을 경험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사람의 생애보다 긴 시간을 가로질러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약속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음 세대의 삶을 이어 가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내가 너희를 두고 세우는 계획들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두고 세우는 계획들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것은 평안을 위한 계획이며 재앙을 위한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앞날과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예레미야 29:11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께서는 포로 생활이 곧 끝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오래 계속될 것이라고 밝히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 뒤에 평안을 위한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평안은 고난이 즉시 사라지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고난 자체가 좋은 것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의 포로 생활이 그분의 백성을 향한 최종적인 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포로들은 나라를 잃었고, 고향을 떠났으며, 성전을 멀리 두고 살아갑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현재만으로 미래를 판단한다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미래를 자신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개인마다 원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증이 아닙니다. 원래의 수신자는 바벨론의 포로 공동체입니다. 약속의 중심은 그 공동체를 회복하고 다시 모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평안을 구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다

「너희는 나를 부르고 가서 내게 기도할 것이며, 나는 너희 말을 듣겠다.」예레미야 29:12 · 본디새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찾을 때, 너희는 나를 찾고 만나게 될 것이다.」예레미야 29:13 · 본디새김

7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포로들에게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13절에서는 포로들이 여호와야훼를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에서 두 구절은 같은 동사를 공유합니다.

포로들이 바벨론의 평안을 구하는 일과 여호와야훼를 찾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낯선 성읍의 평안을 위해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찾고 만나기를 바라십니다.

신명기 4:29–31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진 뒤에도 온 마음으로 여호와야훼를 찾으면 그분을 만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29장의 약속은 그 오래된 말씀과 깊이 연결됩니다. 또한 신명기 30:1–5는 이스라엘이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진 뒤에도 여호와야훼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여기서 회복은 단지 땅으로 돌아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14절은 그 두 가지를 함께 말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을 만나게 하실 것이며, 포로들을 다시 모아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원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에도 자신을 찾고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되찾아야 할 것은 땅만이 아닙니다. 그 땅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바벨론에 관한 기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를 포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정확히 칠십 년 동안 바벨론에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25:11–12에서도 칠십 년은 여러 민족이 바벨론 왕을 섬기는 기간과 연결됩니다. 그 기간이 차면 여호와야훼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정확히 어느 사건부터 어느 사건까지 계산해야 하는지는 해석상 갈림이 있습니다. 바벨론의 세력이 확립된 시점부터 쇠퇴와 멸망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고, 유다의 포로 생활과 귀환을 중심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기원전 539년의 바벨론 정복과 그 이후의 귀환 사건도 이 약속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됩니다.

뜻밖의 반전: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위험하다

예레미야 29:15–20 본문 →

누가 더 안전한 사람들인가?

15절부터 이야기는 다소 복잡하게 전환됩니다.

너희가 「여호와야훼가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해 예언자들을 세웠다.」라고 말했지만,예레미야 29:15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께서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은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땅에 살고 있습니다. 왕도 있고, 성전도 남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더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평가는 다릅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한 말은 이렇다. 「보아라, 내가 그들에게 칼과 굶주림과 역병을 보내겠다. 내가 그들을 너무 상해서 먹을 수 없는 역겨운 무화과처럼 만들겠다.」예레미야 29:17 · 본디새김

이 비유는 예레미야 24장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두 광주리의 무화과를 보여 주십니다. 한쪽에는 아주 좋은 무화과가 있고, 다른 쪽에는 먹을 수 없을 만큼 나쁜 무화과가 있습니다.

뜻밖에도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반면 나쁜 무화과는 시드기야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24:4–10).

포로로 끌려갔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는 아니며,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그들이 듣지 않았다」에서 「너희는 듣지 않았다」로

19절에는 작은 인칭 전환이 있습니다.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내 종 예언자들을 그들에게 거듭거듭 보냈지만, 너희는 듣지 않았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9:19 · 본디새김

이 전환은 책망의 범위를 넓힙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불순종을 말하다가, 바벨론에 있는 수신자들에게도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포로들이 하나님의 회복 약속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 책임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로 묘사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에게도 말씀을 들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내보낸 모든 포로들아,」예레미야 29:20 · 본디새김

그들에게 주어진 회복의 약속도 말씀을 거부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거짓 예언을 분별하고,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삶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여기서 시작된 연결을 매끄럽게 마무리하지 않고 다른 신탁으로 넘어갑니다. 15절의 발언을 16–20절과 연결할 수도 있고, 그 사이에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 끼어들었다가 21절에서 바벨론의 거짓 예언자 문제로 돌아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가능한 이유는 원문의 접속 구조가 현대 독자에게 기대되는 방식으로 완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합과 시드기야: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이웃을 해치는 사람들

예레미야 29:21–23 본문 →

이름까지 알려진 두 예언자

21절에는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등장합니다.

이 시드기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와 다른 인물입니다. 두 사람은 바벨론에서 포로들에게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다. 보아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겠다. 그가 너희 눈앞에서 그들을 쳐 죽일 것이다.」예레미야 29:21 · 본디새김

22절에서는 그들이 바벨론 왕에게 불에 구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심판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들의 죽음이 포로 공동체 안에서 저주의 예로 기억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두 사람의 경우는 앞 장의 하나냐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하나냐도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했고, 자신이 약속한 미래를 보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합과 시드기야에게는 추가적인 죄가 드러납니다.

거짓 예언과 간음이 함께 등장하는 이유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치욕스러운 짓을 하고, 이웃들의 아내들과 간음하고,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은 거짓말을 내 이름으로 했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이를 아는 자이며 증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29:23 · 본디새김

그들이 어떤 지위를 이용하여 간음했는지, 피해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권위를 이용한 구체적인 착취 방식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이웃의 관계를 파괴하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 이웃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종교적인 말을 잘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삶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예언을 들을 수는 있어도, 그들의 모든 행동을 알지는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의 말과 삶을 함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전하는 말뿐 아니라 이웃을 대하는 행동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한층 더 구체적인 갈등으로 들어갑니다. 바벨론에 있는 또 다른 예언자가 예레미야의 편지에 반발하여,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스마야의 반격: 집을 지으라는 말을 막아라

예레미야 29:24–29 본문 →

편지에 맞서는 또 다른 편지

24절부터 느헬람 사람 스마야가 등장합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스마야는 예레미야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에게 편지를 보내 예레미야를 제재하라고 요구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당신을 제사장 여호야다 대신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당신을 비롯한 감독자들이 미쳐서 예언하는 사람은 누구든 감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에게 차꼬와 목칼을 채워야 합니다.』」예레미야 29:26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내세우는 다른 사람에게는 미쳐서 예언하는 사람처럼 취급됩니다. 이것은 의견 차이를 넘어 예언자의 활동을 강제로 막으려는 시도입니다.

스마야가 문제 삼은 한 문장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오래 걸릴 것이다. 집들을 지어 그 안에서 살아라. 정원들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어라.」』」예레미야 29:28 · 본디새김

그 명령은 포로 생활이 오래 계속될 것임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곧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집을 지으라는 명령은 잘못된 미래를 받아들이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있는 곳에 정착하는 일이 아니라, 빨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스마야는 그러한 기대를 지키기 위해 예레미야의 말씀을 막으려 합니다. 그는 포로들이 긴 시간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어진 말씀을 오히려 위험한 가르침으로 취급합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멍에를 직접 부러뜨렸습니다. 스마야는 예레미야에게 차꼬와 목칼을 채우게 하려 합니다. 한 사람은 상징을 부수었고, 다른 사람은 그 상징을 전한 사람을 억압하려 합니다. 두 행동 모두 예레미야가 전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반응이라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스바냐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제사장 스바냐가 이 편지를 예언자 예레미야의 귀에 들리도록 읽었다.예레미야 29:29 · 본디새김

이 행동의 의도를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바냐가 예레미야를 지지했는지, 단지 상황을 알려 준 것인지, 아니면 예레미야의 반응을 확인하려 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차꼬와 목칼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스마야는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을 움직여 예레미야를 침묵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편지는 오히려 예레미야의 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희망을 거부한 사람은 그 좋은 일을 보지 못한다

예레미야 29:30–32 본문 →

스마야가 전한 말은 누구에게서 왔는가?

여호와야훼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모든 포로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모든 포로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여호와야훼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않았는데도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가 거짓을 믿게 했으므로,」예레미야 29:3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28:15에서 하나냐에게 주어진 책망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두 사람 모두 여호와야훼께서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백성이 거짓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맡기지 않으신 말씀을 그분의 권위로 선포하고, 사람들이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스마야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까지 막으려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자신의 잘못된 확신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까지 빼앗으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가 보지 못할 좋은 일

「그러므로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후손을 벌하겠다. 그에게는 이 백성 가운데 살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며, 그는 내가 내 백성에게 베푸는 좋은 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가 여호와야훼를 거역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9:32 · 본디새김

10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좋은 말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32절에서는 스마야가 여호와야훼께서 백성에게 베푸실 좋은 일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스마야는 좋은 미래를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말한 오랜 기다림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부한 바로 그 기다림의 끝에 여호와야훼께서 준비하신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스마야는 희망을 지키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실제로 주신 희망의 길을 거부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좋은 일’을 나타내는 표현이 10절과 32절에 나타납니다. 이 반복은 이 장의 시작과 끝을 연결합니다. 32절의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동사는 단수입니다. 따라서 스마야 자신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고, 그의 후손 가운데 살아남을 사람과 연결하여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지어지는 집들

예레미야 29:1–32 본문 →

하나님의 약속은 현재의 삶을 중단시키는 이유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이어 갈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희망은 단지 어려운 시간이 빨리 끝나리라는 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믿기 때문에, 아직 그 미래가 오지 않은 오늘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의 시간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집을 지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정원을 가꾸고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자라고, 그 아이가 다시 가정을 이루는 동안에도 포로 생활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잊으신 시간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에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어야 했습니다.

돌아갈 날이 아직 오지 않았어도,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은 이미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