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30장

이 장의 자리 · 30–33장 · 회복의 약속

고칠 수 없는 상처를 고치시다

예레미야 30장은 회복을 약속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흩어진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조상들에게 주신 땅을 차지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곧이어 들리는 소리는 기쁨의 환호가 아닙니다.

「우리는 떨리는 소리를 들었다. 두려움뿐, 평안은 없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는 여자처럼 허리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얼굴마다 핏기가 사라졌습니다.

회복을 선포하는 장에서 왜 이런 장면이 먼저 등장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약속하시면서 그들이 겪은 파괴와 고통을 건너뛰지 않으십니다. 본문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파괴와, 그 파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회복을 차례로 보여 줍니다.

이 장은 그 약속이 어떻게 두려움에서 평온으로, 버림받음에서 회복으로, 이방의 지배에서 새로운 통치로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730장 본문 읽기 →

회복의 말씀을 두루마리에 기록하라

예레미야 30:1–3 본문 →

왜 이번에는 기록하라고 하시는가?

예레미야 29장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편지로 전달되었습니다.

30장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기록 명령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게 한 모든 말을 너를 위해 두루마리에 적어라.」예레미야 30:2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께서는 아직 눈앞에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날들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를 회복시키겠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그들을 돌아오게 하겠다.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예레미야 30:3 · 본디새김

따라서 이 말씀은 지금 듣는 사람들만을 위한 순간적인 위로에 머물지 않습니다. 약속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시간에도 보존되고 읽힐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흩어지고, 한 세대가 지나더라도 그 말씀을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기록 명령의 목적을 이처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회복을 선언하는 말씀과 기록 명령이 함께 놓였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보다 오래 지속될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함께 부르시다

3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회복의 대상을 「이스라엘과 유다」라고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갈라졌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무렵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고,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회복 약속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분열과 흩어짐으로 상처 입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향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3절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셨던 약속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12:7과 15:18–21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의 약속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회복의 미래는 과거와 단절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던 관계를 다시 세우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회복의 길을 설명하기 전에 본문은 백성이 겪을 고난을 보여 줍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남자들이 산고를 겪다

예레미야 30:4–11 본문 →

두려움이 사람의 몸에 나타나다

곧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떨리는 소리를 들었다. 두려움뿐, 평안은 없다.」예레미야 30:5 · 본디새김
「자, 남자가 아이를 낳는지 물어보고 살펴보아라. 어째서 남자마다 아이 낳는 여자처럼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있는 것이 내게 보이며, 모든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느냐?」예레미야 30:6 · 본디새김

정상적인 질서가 뒤집힌 듯한 장면입니다. 평소에는 힘과 권한을 가진 사람들도 이 고난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특히 아이를 낳는 고통의 이미지는 예언서에서 극심한 위기와 공포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이사야 13:8; 예레미야 6:24).

그런데 7절은 이 공포의 절정에서 갑자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아, 그날은 참으로 큰 날이다. 그와 같은 날이 없다. 야곱에게 고난의 때이지만, 그는 그 고난에서 구원받을 것이다.」예레미야 30:7 · 본디새김

하나님의 구원은 때로 고난이 오지 않게 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이미 닥친 고난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 내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실은 이어지는 멍에의 이미지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람은 멍에를 부러뜨리려 했지만, 이제 여호와야훼께서 부러뜨리신다

8절은 28장과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날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네 목 위에서 압제자의 멍에를 부수고, 네 결박을 끊어 버리겠다. 낯선 자들이 다시는 야곱을 종으로 부리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30:8 · 본디새김

28장에서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나무 멍에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대신 쇠 멍에가 놓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30장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멍에를 부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냐는 자신이 바라는 때에 멍에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실제 결정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앞 장의 멍에가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보여 주었다면, 여기서는 그 지배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선포됩니다.

모든 순간이 저항할 때는 아니며, 모든 순간이 굴복할 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정한 시간표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기들의 왕 다윗」은 누구인가?

9절에서는 예속 관계가 끝난 뒤의 삶이 제시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와, 내가 그들을 위해 세울 자기들의 왕 다윗을 섬길 것이다.」예레미야 30:9 · 본디새김

여기서 다윗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왕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야훼께서 다윗을 다시 살려 왕으로 세우시겠다는 뜻입니까? 본문을 그렇게 문자적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구약의 왕권 약속을 고려하면 다윗의 계보에서 나올 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 그의 왕위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호세아 3:5 역시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 여호와야훼와 자기들의 왕 다윗을 찾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스겔 34:23–24와 37:24–25에서도 다윗은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목자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본문들과 함께 읽으면 예레미야 30:9의 다윗은 다윗 왕조의 회복, 곧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새로운 다윗 계열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30장 자체가 그 왕의 구체적인 신원이나 등장 시기를 모두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다윗 왕조의 통치가 끊어질 위기에 놓이면서 그 약속의 미래가 불확실해졌습니다. 예레미야 30장은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권과 관련된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이어지는 예레미야 33:14–17에서도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나와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기독교 정경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다윗 계열의 왕에 대한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누가복음 1:32–33). 이는 예레미야 30장을 신약에서 직접 인용하는 장면이라기보다, 구약의 다윗 왕권 약속이 신약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발전하는지를 보여 주는 신학적 연결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30장의 본래 문맥에서는 먼저 바벨론의 지배 아래 놓인 이스라엘과 유다의 정치적·언약적 회복을 가리킨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회복은 어떤 통치자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통치 질서가 회복되는 상태입니다.

심판은 있었지만 끝장은 아니다

10–11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야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너를 흩어 보낸 모든 민족을 완전히 멸하겠지만, 너만은 완전히 멸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를 합당하게 징계하겠으며, 결코 벌을 면하게 하지는 않겠다.」예레미야 30:11 · 본디새김

그들의 고난은 실제였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야곱을 완전히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서도, 죄에 대한 징계를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않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면서도, 자기 백성을 죄와 심판의 결과 속에 영원히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제 본문은 그 심판이 남긴 상처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에서는 누가 「우리는 떨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 안에 공동체의 목소리가 들어온 것일 수도 있고, 예언자가 두려움의 소리를 전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어서 6절에서는 「내게 보이며」라는 일인칭 표현이 등장합니다. 본문이 화자의 전환을 명시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어떤 문장을 발화하는지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8절의 본문의 히브리어에는 「그의 멍에」라는 표현이 사용되어, 멍에를 씌운 압제자의 멍에인지 야곱이 지고 있는 멍에인지 해석상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분명합니다. 야곱을 억누르던 예속 관계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고치시다

예레미야 30:12–17 본문 →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이 없다

12절부터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바뀝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네 부상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심하다.」예레미야 30:12 · 본디새김

본문의 히브리어에는 여성형 단수 표현들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혹은 시온이 상처 입은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때로 신실하지 못한 아내처럼, 때로 상처 입은 딸처럼 묘사됩니다. 여기서는 심각한 병을 앓는 환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13절은 단순히 의사가 없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네 상처를 두고 네 송사를 맡아 줄 이가 없다. 너에게는 낫게 할 약도 없다.」예레미야 30:13 · 본디새김

그는 법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성읍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뿐 아니라, 그들을 보호해 줄 관계와 제도까지 무너진 상태입니다.

「네 연인들은 모두 너를 잊었다」

14절은 그 외로움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네 연인들은 모두 너를 잊었다. 그들은 너를 찾지 않는다. 내가 너를 원수처럼 치고, 잔인하게 징벌했기 때문이다. 네 죄악이 크고, 네 죄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예레미야 30:14 · 본디새김

예레미야서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의지했던 이방 나라들이 연인의 이미지로 묘사되기도 합니다(예레미야 22:20–22). 따라서 이 구절도 유다가 의지했던 정치적 동맹국들이나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던 외부 세력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30장은 그 연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이 그들을 치셨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백성의 고통은 여호와야훼의 뜻과 무관하게 발생한 불행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 그 고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오늘날 모든 개인의 질병이나 불행이 그 사람의 특정한 죄 때문에 일어난다는 일반 원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유다와 이스라엘의 언약적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의 잔혹함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16절에서는 이스라엘을 약탈한 자들도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라는 뜻밖의 전환

15절까지의 논리를 따라가면 독자는 절망적인 결론을 예상하게 됩니다.

상처는 고칠 수 없습니다.

약도 없습니다.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멸망뿐입니까?

그런데 16절은 뜻밖의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너를 집어삼키는 자들은 모두 집어삼켜지고, 네 적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사로잡혀 갈 것이다. 너를 약탈하는 자들은 약탈물이 되고, 너를 노략하는 자들을 모두 내가 노략물로 내주겠다.」예레미야 30:16 · 본디새김

이 반전은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가 어떻게 함께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심판하셨지만, 그들을 해친 자들의 악까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17절에서 드러납니다.

「저 시온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내가 네게 새살이 돋게 하고, 네 상처들을 고쳐 주겠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사람들이 너를 두고 『쫓겨난 자다. 저 시온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다.』라고 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30:17 · 본디새김

이 말은 14절과 연결됩니다. 14절에서는 연인들이 시온을 잊었으며 더 이상 찾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같은 ‘찾다’라는 동사가 두 곳에서 반복됩니다.

14절에서는 아무도 시온을 찾지 않습니다.

17절에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을 고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시온을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여호와야훼께서도 시온을 버리셨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시온을 버림받은 존재라고 부르는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회복 선언이 울려 퍼집니다.

그 회복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무너진 삶의 자리까지 다시 세우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히브리어 원문의 문장 연결에는 해석상 여지가 있습니다. 상처를 가리키는 표현을 앞의 법정 언어와 연결할 수도 있고, 뒤의 치료 언어와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12–17절의 상처와 치료의 이미지는 예레미야서 안에서도 중요한 흐름을 이룹니다. 예레미야 8:21–22에서 예언자는 백성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며 길르앗에는 유향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곳에서는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는데 왜 백성이 낫지 않는가 하는 탄식이 들립니다. 호세아 6:1에도 비슷한 주제가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백성은 여호와야훼께서 치셨지만 다시 고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호세아서의 해당 발언은 앞뒤 문맥에서 이스라엘의 회개가 얼마나 진실한지를 질문하게 하므로, 두 본문을 단순히 같은 상황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30장에서 분명한 것은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치료를 약속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폐허 위에 다시 세워지는 성읍

예레미야 30:18–20 본문 →

천막에서 성읍으로

18절은 새로운 장면을 펼쳐 보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야곱의 천막들을 회복시키고, 그의 거처들을 가엾이 여기겠다. 성읍은 자기 폐허 언덕 위에 다시 세워지고, 궁궐은 제자리에 자리 잡을 것이다.」예레미야 30:18 · 본디새김

이제 회복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으로 확장됩니다. 무너진 공동체의 생활 기반과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회복은 과거의 파괴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파괴가 실제로 일어났던 자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웃음소리가 다시 들리다

19절에서는 성읍 안에서 새로운 소리가 들립니다.

「그곳들에서 감사와 즐겁게 노는 이들의 소리가 흘러나올 것이다. 내가 그들의 수를 늘리겠으며, 그들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영예롭게 하겠으며, 그들은 하찮아지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30:19 · 본디새김

5절에서는 떨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두려움뿐이고 평안은 없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다시 모여 감사하고 즐거워합니다.

공동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징표입니다.

특히 「그들의 수를 늘리겠으며, 그들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앞 장의 포로들에게 주어진 명령과도 연결됩니다(29:6).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30장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그들의 수를 늘리고 줄어들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포로들이 삶을 이어 가는 동안에도,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백성의 회복을 준비하십니다.

「그의 공동체는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다」

「그의 자손들은 예전과 같아지고, 그의 공동체는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다. 그를 억누르는 모든 자를 내가 벌하겠다.」예레미야 30:20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위기는 단순히 정치적 독립을 잃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거역했고, 그 결과 언약 관계가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회복은 성읍과 궁궐을 다시 세우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다시 여호와야훼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버림받은 공동체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그 관계는 공동체의 지도자에게까지 확장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근동의 성읍들은 같은 장소에 여러 차례 건설되고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무너진 건물과 퇴적층이 쌓여 언덕 모양의 유적지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18절의 성읍은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곳에 갑자기 등장하는 성읍이 아닙니다.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에 다시 세워지는 성읍입니다.

자기 백성에게서 나오는 지도자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예레미야 30:21–22 본문 →

지도자가 공동체 가운데서 나온다

21절은 회복된 공동체의 통치에 관해 말합니다.

「그의 지도자는 그에게서 나고, 그의 통치자는 그의 가운데서 나올 것이다.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겠으며, 그는 내게 다가올 것이다. 내게 다가오려고 자기 마음을 담보로 내놓은 자가 대체 누구냐?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0:2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앞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부수겠다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유다는 오랫동안 외국 왕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심지어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이 세운 왕이었습니다(열왕기하 24:17).

백성을 다스리는 권한이 더 이상 외부의 압제자에게만 종속되지 않고, 회복된 공동체 안에서 세워지는 통치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8–9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압제자의 멍에를 부수고 다윗 왕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1절은 그 회복된 통치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기서 매우 뜻밖의 내용을 덧붙입니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지도자

지도자가 여호와야훼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그의 접근이 여호와야훼께서 허락하신 접근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겠으며」라는 문장의 주어가 바로 여호와야훼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게 다가오려고 자기 마음을 담보로 내놓은 자가 대체 누구냐?」

자신의 마음, 곧 자신의 생명과 결단이 걸린 일처럼 묘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은 사람이 자신의 자격만으로 당연하게 요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야훼께서 세우시고, 여호와야훼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허락하신 사람입니다.

회복된 공동체의 통치는 사람을 지배하는 권한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지도자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모든 회복이 향하는 한 문장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예레미야 30:22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출애굽기 6:7, 레위기 26:12 등에서 나타나는 언약의 핵심 언어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30장에서는 이 말씀이 회복의 여러 장면 뒤에 나옵니다. 정치적 자유, 육체적 치료, 공동체의 재건, 올바른 통치가 모두 언약 관계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말로만 인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삶의 모든 영역이 다시 세워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놀라운 약속이 주어진 뒤에도 장은 끝나지 않습니다.

갑자기 폭풍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표현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를 좁힌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특히 성소와 제사장 직무를 다루는 문맥에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과 허락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민수기 16:5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택하신 사람을 자신에게 가까이 오게 하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30:21은 통치자의 정치적 권한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관계에도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이 새로운 왕에게 제사장 직무까지 부여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운 관계를 맺는 통치자를 묘사하는 것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그를 제사장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아라브는 보증하다, 담보를 맡다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을 담보로 내놓는다는 표현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이 가볍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정확히 어떤 관습이나 행위를 전제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를 특정한 의식이나 자발적인 희생의 공식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회복의 약속 끝에 다시 나타난 분노의 폭풍

예레미야 30:23–24 본문 →

왜 마지막에 심판이 등장하는가?

보아라, 분노에 찬 여호와야훼의 폭풍이 터져 나왔다. 몰아치는 폭풍이 악인들의 머리 위에서 소용돌이칠 것이다.예레미야 30:23 · 본디새김
그가 실행하기까지, 그가 자기 마음의 계획들을 이루기까지 여호와야훼의 타오르는 분노는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날들의 마지막에 너희는 그것을 깨달을 것이다.예레미야 30:24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지만, 그렇다고 악과 불의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치시지는 않으십니다. 16절에서 이미 이스라엘을 집어삼킨 자들이 집어삼켜지고, 약탈한 자들이 약탈당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23–24절의 폭풍은 그러한 심판의 엄중함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지배가 왜 허락되었는지, 왜 하나님께서 고난을 겪게 하셨는지, 왜 회복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훗날 그들이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정의를 버리는 자비가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백성을 향한 약속을 잊어버리는 심판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두 절은 예레미야 23:19–20과 매우 가깝게 대응합니다. 거기서는 같은 말씀이 거짓 예언자들과 악인들을 향한 여호와야훼의 심판을 선언하는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다만 이 두 절은 폭풍이 정확히 누구를 향하는지 특정한 민족이나 인물의 이름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악인들을 모두 바벨론 사람들로 한정하거나, 반대로 이스라엘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24절의 「날들의 마지막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아하리트 하야밈(⁨אַחֲרִית⁩)은 문자적으로 ‘날들의 뒤쪽에’, 곧 훗날이나 마지막 때에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반드시 세계의 종말이라는 특정한 종말론적 시점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앞으로 시간이 흐른 뒤 하나님의 계획과 심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도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아무도 찾지 않던 시온에 다시 들리는 소리

예레미야 30:1–24 본문 →

예레미야 30장의 회복은 고통이 가벼웠기 때문에 가능한 회복이 아닙니다. 인간이 고칠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하나님께서 직접 고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참된 회복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물론 이 장의 회복 약속을 오늘날 모든 개인의 질병이나 고난이 반드시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된다는 보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적·언약적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아무도 찾지 않던 시온에 다시 사람들이 모입니다. 폐허 위에 성읍이 세워지고, 그곳에서 감사와 즐거움의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상처가 없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입었던 자리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아무도 고칠 수 없다고 말하던 상처를 고치시고, 아무도 찾지 않던 시온에 다시 삶의 소리가 들리게 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