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나를 되찾아 줄 이를 기다리다

욥기 19장에서 가장 놀라운 말은 「나를 되찾아 줄 이가 살아 있고」(19:25)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욥이 무엇을 잃었는지 보아야 합니다.

욥은 재산과 자녀, 건강만 잃은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은 그를 멀리하고,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잊었으며, 종은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내조차 그의 입김을 역겨워하고, 어린아이들은 그를 업신여깁니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마저 돌아섰습니다.

이 모든 관계의 붕괴를 설명하는 말이 13–15절에 반복됩니다. 「나를 아는 이들은 내게 아주 낯선 이들이 되었네」(13절), 「그들의 눈에 나는 이방인이 되었네」(15절). 욥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났다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한때 자신을 알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을 낯선 사람처럼 대한다는 사실을 탄식합니다.

그런데 27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눈이 볼 것이네」라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זוּ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앞서 「낯선 이」를 표현할 때 사용된 낱말과 연결됩니다.

모두가 욥을 낯선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보게 될 날을 기대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하거나 자신의 삶을 멋대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욥이 바라는 구원은 단순히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마침내 온전히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 장의 흐름은 그 소망이 얼마나 절박한 자리에서 나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욥은 먼저 친구들의 말에 짓눌린다고 항의합니다(1–6절). 이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공격하시는 듯한 현실을 고발하고(7–12절), 모든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펼쳐 보입니다(13–22절). 그 뒤 자신의 말이 영원히 기록되기를 바라며, 자신을 되찾아 줄 이가 살아 있다고 선언합니다(23–27절). 마지막에는 자신을 계속 정죄하는 친구들도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28–29절).

이 장의 중심에는 하나의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셨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억울함을 끝내 밝혀 줄 가능성을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찾고 있습니다.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819장 본문 읽기 →

친구들의 말이 욥을 짓부수다

욥기 19:1–6 본문 →

「자네들은 언제까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겠는가?」욥기 19:2 · 본디새김

욥은 빌닷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대신, 먼저 그 말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짓부수겠는가」라는 표현은 단순히 말이 불쾌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동사는 짓눌러 부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친구들의 말이 그의 내면에 물리적인 폭력과 같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바로 앞 장에서 빌닷은 악인이 덫에 걸리고 몸이 파괴되며 후손과 이름까지 사라지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그런 운명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현실에 항의합니다.

「자네들이 나를 모욕한 것이 벌써 열 번이네. 나를 가혹하게 대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군.」욥기 19:3 · 본디새김

여기서 「열 번」은 실제로 모욕을 정확히 열 차례 받았다는 계산이라기보다 반복적이고 충분히 많은 모욕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욥이 더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은 반복 자체보다 친구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욥을 모욕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편에서 옳은 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욥은 그 확신이 어떻게 한 사람을 짓누르는 행동을 정당화하는지 보여 줍니다.

4절에서는 친구들의 판단을 잠시 받아들이는 듯한 말을 합니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 하더라도, 내 잘못은 나와 함께 머무네.」욥기 19:4 · 본디새김

이 말은 욥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잘못했다 하더라도」라는 가정으로 친구들의 주장을 잠시 받아들인 뒤, 설령 그 말이 맞는다 해도 친구들이 자신을 계속 짓누를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내 잘못은 나와 함께 머무네」라는 말은 자신의 책임이 우선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는 항변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그의 잘못을 입증하지도 못한 채 그것을 자신들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5절은 그 문제를 드러냅니다.

「자네들이 참으로 나보다 자신들을 높이고, 내 치욕을 들어 나를 논박한다면,」욥기 19:5 · 본디새김

친구들은 욥의 치욕을 보면서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무너진 만큼 자신들의 판단은 높아지는 셈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이 진짜 문제를 놓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부당하게 대했고, 그의 그물로 나를 에워쌌다는 것을 알게.」욥기 19:6 · 본디새김

빌닷의 질문에 욥이 같은 동사로 대답하다

빌닷은 처음 발언에서 「하나님이 정의를 굽히시겠는가? 전능자가 의를 굽히시겠는가?」(욥기 8:3의 의미)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19:6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부당하게 대했다」고 말합니다. 두 구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굽히다, 비틀다, 왜곡하다는 의미이며, 정의를 굽힌다는 표현에 쓰일 수 있습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정의를 굽히실 리 없다고 말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현실이 바로 정의가 굽혀진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라는 동일한 문제를 서로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는 충돌입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공정하시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여 욥의 고난에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욥은 자신이 겪은 일을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이렇게 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닷은 18:8–10에서 악인이 자신의 발로 그물에 들어가고 덫에 걸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그물을 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빌닷에게 그물은 악인 자신의 행위가 불러온 멸망을 상징합니다. 욥에게 그물은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현실입니다.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원인에 관한 판단은 정반대인 것입니다.

다만 욥의 말을 하나님께서 실제로 불의하시다는 서술자의 최종 판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욥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제기하는 고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이 부당한 처지에 놓였다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최소한 자신의 호소에 응답하고 공정하게 판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음 단락에서 욥은 바로 그 응답이 없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열 번」과 같은 표현은 창세기 31:7에서도 나옵니다. 야곱은 라반이 자신의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고발하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러한 긴장은 시편의 탄식과도 연결됩니다. 시편 22편에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절규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호소가 함께 나타납니다. 시편 35편에서는 억울하게 고발당한 사람이 여호와야훼께 자신을 위해 일어나 판단해 달라고 기도합니다(35:23–24). 욥기 19장은 이러한 구약의 탄식 전통 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욥의 경우 하나님 자신을 향한 고발이 훨씬 직접적이고 강렬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폭력을 외치지만 판결은 없다

욥기 19:7–12 본문 →

「보게, 내가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응답을 받지 못하고, 도움을 부르짖어도 판결이 없네.」욥기 19: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욥이 겪는 고통을 법정의 문제로 바꿉니다.

「폭력이다」라는 외침은 부당한 폭력이나 침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 번째 행의 「판결」은 공정한 판단이나 정의를 뜻합니다. 욥은 단순히 고통을 멈춰 달라고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건을 심리하고 판단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판결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욥이 겪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욥이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상황에 관여하신다고 강하게 느낍니다. 문제는 그렇게 관여하시는 하나님께서 정작 자신의 호소에는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그 상황이 길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그가 내 길을 막아 내가 지나갈 수 없네. 내가 다니는 길들 위에 그가 어둠을 드리우네.」욥기 19:8 · 본디새김

길이 막힌 것과 길이 어두워진 것은 서로 다른 고통입니다. 막힌 길은 움직일 수 없게 합니다. 어두운 길은 방향을 분별할 수 없게 합니다. 욥은 자신의 미래가 닫혀 있다고 느끼는 동시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9절에서는 삶의 지위가 사라집니다.

「그가 내게서 영예를 벗겨 내고, 내 머리의 관을 치워 버렸네.」욥기 19:9 · 본디새김

「영예」와 「관」은 그가 한때 누렸던 존경과 위엄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욥기의 서두에서는 그가 동방 사람들 가운데 큰 인물이었다고 소개됩니다(1:3). 이제 욥은 자신이 누렸던 모든 존경이 벗겨졌다고 말합니다.

10절에서는 희망의 상실이 나무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그가 나를 사방으로 허물어 나는 스러졌네. 그는 내 희망을 나무처럼 뽑아 버렸네.」욥기 19:10 · 본디새김

이 표현은 빌닷의 앞선 말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빌닷은 18:16에서 악인의 뿌리가 마르고 가지가 시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강조점은 다릅니다.

빌닷에게 마른 뿌리는 악인의 운명입니다. 욥에게 뽑힌 나무는 자신이 잃어버린 희망입니다. 욥이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희망이 저절로 시들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뽑아 버리셨다고 느낀다는 점입니다.

그다음에는 「그가 나를 향해 분노를 불태우고, 나를 자기 대적들처럼 여겼네」(11절) 하고 공격의 이미지가 더욱 커집니다.

「그의 부대들이 함께 몰려와, 나를 치러 오는 길을 쌓아 올리고, 내 천막 둘레에 진을 쳤네.」욥기 19:12 · 본디새김

12절은 성읍을 포위하는 군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적군이 성벽을 공격하기 위해 길이나 공격용 경사로를 쌓아 올리고, 성읍을 둘러싸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욥이 말하는 공격의 대상은 성읍이 아니라 자신의 천막입니다.

하나님의 부대가 한 사람의 천막을 포위하는 듯한 모습은 공격의 압도적인 크기와 욥의 무력함을 대조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저항할 능력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거대한 군대를 동원하신 것처럼 느낍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께서 욥을 공격하시는 듯한 경험을 그립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단락에서 더 아픈 사실이 드러납니다.

욥이 느끼는 하나님의 적대감은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폭력」이라는 말은 다른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응답과 얽혀 나옵니다. 창세기 6:11–13에서는 땅에 가득한 폭력이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하박국 1:2에서도 예언자는 폭력 때문에 부르짖지만 구원이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합니다.

형제에서 종까지, 모든 관계가 무너지다

욥기 19:13–20 본문 →

「그가 내 형제들을 내게서 멀리 떼어 놓았고, 나를 아는 이들은 내게 아주 낯선 이들이 되었네.」욥기 19:13 · 본디새김

이제 욥의 탄식은 매우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름으로 채워집니다. 형제, 친척, 가까운 사람들, 집에 머무는 사람들, 여종들, 종, 아내, 어린아이들, 내밀한 의논을 나누던 사람들, 사랑하던 사람들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욥의 천막을 군대로 둘러싸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천막 안팎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모두 욥에게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욥이 의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범위가 하나씩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13–14절에서는 가족과 친척, 가까운 친구들이 멀어집니다. 그들은 욥을 잊거나 낯선 사람처럼 대합니다. 15–16절에서는 집 안의 관계가 뒤집힙니다.

「내 집에 머무는 이들과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네. 그들의 눈에 나는 이방인이 되었네.」욥기 19:15 · 본디새김
「내 종을 불러도 그는 대답하지 않네. 내 입으로 직접 그에게 애원하네.」욥기 19:16 · 본디새김

고대의 큰 가정에서 주인과 종 사이에는 분명한 사회적 위계가 있었습니다. 욥은 한때 많은 종과 재산을 거느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종을 불러도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명령할 수 있었던 사람이 간청해야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내 입으로 직접 그에게 애원하네」라는 표현은 그 역전을 특히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욥은 자신이 종에게 직접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만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간청해도 응답받지 못할 만큼 관계가 무너졌다는 현실을 말합니다.

17절에서는 가장 가까운 관계가 등장합니다.

「내 입김은 내 아내에게 역겹고, 내 몸에서 난 자식들에게도 나는 역겨워졌네.」욥기 19:17 · 본디새김

욥의 고통은 아내와의 친밀한 관계마저 무너뜨렸습니다. 뒤쪽의 「내 몸에서 난 자식들」에는 원어상 어려움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욥이 가장 가까운 육친의 관계에서도 거부당한다고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18–19절에서는 그 고립이 더욱 넓어집니다.

「어린아이들마저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헐뜯네.」욥기 19:18 · 본디새김
「내밀한 의논을 함께하던 이들이 모두 나를 혐오하고, 내가 사랑하던 이들이 돌아서서 나를 대적하네.」욥기 19:19 · 본디새김

어린아이들은 고대의 사회적 위계에서 존경받는 어른에게 공손하게 대해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마저 욥을 업신여깁니다.

더욱 아픈 것은 「내밀한 의논을 함께하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단지 욥의 재산이나 지위를 보고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생각과 비밀을 나눌 만큼 신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그를 혐오합니다.

이 장면에서 욥이 잃은 것은 단순한 사회적 명예가 아닙니다. 자신을 알고 기억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자신이 스스로 아는 것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며,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욥은 그 모든 관계에서 낯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20절은 고립된 욥 자신의 몸을 보여 줍니다.

「내 뼈는 내 살갗과 살에 달라붙었고, 나는 내 이의 살갗으로 간신히 빠져나왔네.」욥기 19:20 · 본디새김

중요한 것은 욥이 거의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몸마저 겨우 남았다고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한 명씩 욥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뼈와 살갗에 가까운 쇠약한 몸입니다.

그런데 욥은 바로 그 몸을 지닌 채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합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히브리어 브네 비트니는 문자적으로 「내 배의 아들들」 또는 「내 몸에서 난 이들」이라는 표현입니다. 보통은 자녀를 떠올리게 하지만, 욥기의 서두에서는 욥의 자녀들이 모두 죽었습니다(1:18–19). 그래서 이 표현을 어머니의 같은 태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나 가까운 혈족으로 이해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도 명백하게 확정된 뜻은 아닙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욥에게 살아 있는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고 단정하거나, 이야기의 앞부분과 모순된다고 성급하게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20절의 마지막 표현은 히브리어에서도 매우 특이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내 이의 살갗」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간신히 살아남거나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이의 살갗으로 빠져나왔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이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어에서 이 표현이 정확히 어떤 신체 상태를 가리켰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잇몸을 뜻한다고 보거나, 피부와 살이 거의 사라질 만큼 쇠약해졌다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게

욥기 19:21–22 본문 →

「나를 불쌍히 여기게, 나를 불쌍히 여기게, 자네들, 내 친구들이여. 하나님의 손이 나를 쳤네.」욥기 19:21 · 본디새김

욥은 친구들에게 자기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라고 먼저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탁합니다.

「불쌍히 여기게」(⁨חָנַן⁩)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동사의 명령형을 반복한 표현입니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욥이 단순히 문장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적 장치가 아닙니다.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더 이상 친구들의 지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사람으로서 불쌍히 여겨 줄 수는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욥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그들을 「내 친구들이여」라고 부릅니다. 친구라는 관계에 걸맞은 행동을 해 달라는 마지막 호소로 들립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요청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쳤네」라고 말합니다. 친구들이라면 그 말을 듣고 욥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정반대의 반응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치셨으니, 자네들만이라도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차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이 욥에게 닿았다는 사실을 심판의 증거로 읽습니다. 욥은 그것을 자비가 필요한 이유로 제시합니다.

22절은 친구들의 잘못을 한층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왜 자네들은 하나님처럼 나를 뒤쫓으며, 내 살로도 배부르지 않은가?」욥기 19:22 · 본디새김

「뒤쫓으며」라는 말은 추격이나 박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내 살로도 배부르지 않은가」라는 표현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말을 마치 자기 몸을 먹어 치우는 행동처럼 묘사합니다.

그는 이미 몸이 심하게 쇠약해졌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삶에 남아 있는 정당성까지 빼앗으려 합니다.

이제 욥은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욥은 자신의 말을 사람들의 기억보다 더 오래 남을 곳에 기록하고 싶어 합니다.

사라지는 몸과 사라지지 않을 기록

욥기 19:23–24 본문 →

「내 말들이 부디 기록되면 좋겠네. 두루마리에 부디 새겨지면 좋겠네.」욥기 19:23 · 본디새김
「쇠필과 납으로, 영원히 바위에 새겨지면 좋겠네.」욥기 19:24 · 본디새김

지금까지 욥은 계속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자신의 말을 기록하고 싶어 합니다.

단순히 친구들이 오늘 자신의 말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말이 오랫동안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욥의 바람은 분명합니다. 그의 말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소망은 바로 앞의 신체 묘사와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욥의 살과 피부는 점점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과 기억을 잊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말만큼은 쇠필로 바위에 새겨져 영원히 남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몸은 사라져 가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욕망과 다릅니다. 욥에게 기록은 증언의 수단입니다. 현재의 친구들이 자기 말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말이 보존된다면 언젠가 누군가는 그 말을 읽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앞 장에서 빌닷은 악인의 이름과 기억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18:17). 그런데 욥은 자신의 말이 영원히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빌닷이 악인에게는 기억될 권리조차 남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지워지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욥의 말을 읽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말이 기록되기를 바랐고, 지금 독자는 그 말이 보존된 욥기를 읽고 있습니다. 물론 23–24절이 현재의 욥기라는 책의 집필 과정을 직접 설명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독자는 욥이 바라던 바로 그 일이 책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친구들이 듣지 않으려 했던 욥의 말이 독자의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말이 기록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기록을 통해 결국 밝혀져야 할 진실이 있으며, 그 진실을 밝혀 줄 이가 살아 있다고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에는 글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 재료가 사용되었습니다. 두루마리나 다른 기록 매체에 글을 쓰기도 했고, 돌이나 금속에 글자를 새기기도 했습니다. 「쇠필과 납」의 정확한 사용 방식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쇠붙이로 바위에 글자를 새기고 그 홈에 납을 채워 글자가 잘 드러나게 한다는 읽기가 가능하며, 납 자체를 글을 새기는 재료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납과 돌을 구별해 표현하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나를 되찾아 줄 이가 살아 있다

욥기 19:25–27 본문 →

「그러나 나는 아네, 나를 되찾아 줄 이가 살아 있고, 그가 마지막에 흙 위에 서리라는 것을.」욥기 19:2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욥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선언 가운데 하나이지만, 동시에 해석이 가장 많이 갈리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말을 부활에 대한 확신이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예고로 읽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본문을 그리스도의 구원과 부활에 비추어 후대의 신학적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 19:25가 역사적 문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가리키는 예언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욥기의 문맥에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욥이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되찾아 줄 이를 찾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되찾아 줄 이’는 누구인가

19:25의 「나를 되찾아 줄 이」는 히브리어 고알리(⁨גָּאַל⁩)입니다. 그 기본형인 고엘은 가까운 친족이 다른 가족의 권리와 생존을 위해 책임을 지는 역할과 관련됩니다. 고엘은 단순히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회복할 수 없게 된 권리나 형편을 위해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욥에게 필요한 고엘은 무엇을 되찾아 주어야 할까요? 욥은 이미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19장에서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재산의 회복이 아닙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밝혀 주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악인으로 취급할 때, 자신의 진실을 인정하고 정당한 판단을 이끌어 낼 이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디새김의 「나를 되찾아 줄 이」라는 번역은 중요한 뉘앙스를 드러냅니다. 욥에게서 빼앗긴 것은 소유물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진실과 존엄성까지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되찾아 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본문이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셨다고 느끼면서도, 자신의 진실을 완전히 아실 수 있는 분 역시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욥은 자신을 적대하시는 듯한 하나님께서 끝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위해 변론해 줄 하늘의 존재입니다. 욥은 이미 16:19에서 하늘에 자신을 위한 증인이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19:25의 고엘 역시 그와 연결되는 변호자나 중재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두 읽기는 서로 배타적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께 거는 기대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욥이 자기 자신 외에 자신의 억울함을 위해 나서 줄 존재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있다’는 선언이 중요한 이유

욥은 「나를 되찾아 줄 이가 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살아 있고」라고 말합니다. 이 한마디는 앞선 장면과 매우 강하게 대비됩니다. 욥 자신의 생명은 거의 소진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떠났고, 그의 몸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나설 이는 살아 있습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생명이 계속될 것이라고 먼저 선언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되찾아 줄 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소망은 욥 자신에게 남은 힘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누군가의 존재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욥은 그가 「마지막에 흙 위에 서리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에」가 반드시 세계 역사의 마지막 날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욥의 사건이 끝날 무렵을 가리킬 수도 있고, 욥의 죽음 이후까지 바라보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흙」은 땅의 먼지나 흙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땅 위에 일어서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고, 무덤의 먼지와 연결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시점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욥이 바라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신의 무죄를 위해 나설 이가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가 일어섭니다.

이는 지금 욥의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과 대조됩니다. 욥이 기대하는 것은 언젠가 자신의 억울함을 아는 이가 실제로 나서서 그 진실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내 살에서 하나님을 보겠다’는 말은 부활을 뜻하는가

이어지는 26절은 더 어렵습니다.

「내 살갗이 이렇게 벗겨진 뒤에도, 나는 내 살에서 하나님을 보겠네.」욥기 19:26 · 본디새김

전통적으로 이 구절은 욥이 죽은 뒤 다시 살아나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부활의 소망으로 읽혀 왔습니다. 실제로 본문에는 그런 방향으로 읽을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27절에서는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리라고 강조합니다. 이 표현들을 연결하면 죽음이나 육체의 파괴를 넘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만으로 그 장면을 정확하게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살아 있는 몸으로 하나님을 보겠다는 뜻인지, 몸이 파괴된 이후에도 하나님을 보겠다는 뜻인지, 더 나아가 부활한 몸으로 하나님을 보겠다는 뜻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부활 신앙의 직접적인 교리 선언으로 확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 방향으로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욥의 소망이 오직 살아 있는 동안 명예를 회복하는 일만을 가리킨다고 제한하기에도 그의 표현은 강렬합니다.

욥은 자신의 육체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언제, 어떤 상태에서 이루어질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 눈이 볼 것이네’ — 낯선 사람이 된 욥의 마지막 소망

27절은 그 기대를 더욱 개인적인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를 내가 나를 위해 볼 것이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눈이 볼 것이네. 내 몸속에서 콩팥들이 쇠잔해졌네.」욥기 19:27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반복은 「내가」와 「내 눈」입니다. 욥은 다른 누군가가 하나님을 보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직접 보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낯선 사람이나 타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앞서 13절과 15절에서 욥이 사람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다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욥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끝까지 낯선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그 사건만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아니라」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이 대신 보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도, 하나님을 낯선 존재로 보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욥이 원하는 만남의 직접성은 분명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듣는 데 지쳤습니다. 친구들은 욥을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그를 이방인처럼 대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직접 서고 싶어 합니다.

마지막 문장 「내 몸속에서 콩팥들이 쇠잔해졌네」는 그 소망의 절박함을 드러냅니다. 히브리어에서 콩팥은 인간의 깊은 감정과 내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욥의 내장이 다할 만큼 간절하게 사모하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고, 그토록 절박한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소진되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기쁜 미래를 상상하며 감격하는 표현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병든 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기를 바라는 마음과 현재의 쇠약함이 한 문장에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되찾아 줄 이에 대한 선언이 있은 뒤에도, 그는 다시 친구들을 향해 돌아섭니다. 그 이유는 이 소망이 친구들의 행동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엘의 용례를 보면, 레위기 25:25에서는 가난해진 사람이 땅을 팔았을 경우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되찾는 일을 맡을 수 있습니다. 룻기 4장에서도 보아스가 친족의 권리와 책임을 맡아 나오미와 룻의 가정에 관여하는 일이 등장합니다. 또 민수기 35:19에서는 죽임당한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묻는 친족을 가리킬 때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을 되찾아 주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이사야 43:1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그를 되찾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4:22에서는 백성의 죄를 없애셨으니 돌아오라고 하시며 그들을 되찾으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같은 어근이 친족의 책임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동으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용례는 욥이 자신의 고엘을 말할 때 왜 하나님과 관련된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는지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다만 이사야서의 구절들이 욥기 19:25를 직접 해석하는 설명문은 아닙니다. 욥이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억울함이 밝혀지는 일이고,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와 죄와 상실에서 회복되는 일이 강조됩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이 더 분명하게 선포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신다는 사상은 고엘의 구원과 회복이라는 주제와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26–27절이 이미 신약의 부활 교리를 완전한 형태로 선포했다고 말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그 선언이 지닌 원래의 절박함을 먼저 이해해야 신약과의 연결도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26절의 해석이 갈리는 근거는 이렇습니다. 첫째, 「내 살갗이 이렇게 벗겨진 뒤에도」라는 구문에는 생략된 요소가 있고, 「이렇게」에 해당하는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둘째, 「내 살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브사리는 전치사 민이 사용된 표현입니다. 이 전치사는 출발점이나 분리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내 살에서」 또는 「내 육체로부터」라는 의미가 가능합니다. 문맥에 따라서는 육체를 떠난 상태를 뜻하는 방향으로 이해하려는 읽기도 있습니다. 셋째,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도 이 부분을 히브리어 본문과 상당히 다르게 표현합니다. 특히 25절에서는 욥을 풀어 줄 이가 영원하다는 의미를 전하며, 26절에서는 고통을 견디는 피부가 다시 일으켜지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의 「내 살에서 하나님을 보겠네」가 칠십인역에는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는 본문의 해석이 고대부터 간단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심판은 자네들에게도 있다

욥기 19:28–29 본문 →

「자네들이 『우리가 그를 어떻게 몰아붙일까?』 하고 말하며, 일의 뿌리가 내게서 발견되었다고 한다면,」욥기 19:28 · 본디새김

욥은 친구들의 태도를 다시 문제 삼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을 욥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욥의 고통이 그의 잘못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일의 뿌리」라는 표현은 문제의 근본 원인이나 핵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를 어떻게 몰아붙일까」라는 인용과 「내게서 발견되었다」라는 일인칭 표현이 함께 등장합니다. 일인칭을 그대로 유지하면 친구들이 욥을 몰아붙이려고 하면서 그 일의 원인을 욥 자신에게서 찾는 상황이 됩니다. 반면 이를 친구들의 말속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읽으면 문장 연결을 달리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어려움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의 경고가 누구를 향하는지는 분명합니다.

「자네들은 칼을 두려워하게. 격노가 칼의 형벌을 불러오기 때문이네. 이는 자네들이 심판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네.」욥기 19:2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19장을 끝맺는 중요한 반전입니다.

앞 장에서 빌닷은 악인이 어떤 심판을 당하는지 길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집이 황폐해지고, 그 이름과 후손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제 친구들에게도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친구들은 욥을 심판받아야 할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 역시 자신이 내리는 판단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칼」은 심판의 위협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여기서 욥이 실제로 친구들을 칼로 공격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정당한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경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29절의 마지막 부분은 히브리어에서 문법과 전승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본디새김처럼 「심판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네」로 읽으면 이 장의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7절에서 욥은 도움을 부르짖어도 판결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29절에서는 친구들이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이루어지지 않는 판결을 호소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들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욥이 이미 최종적인 승리를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은 욥의 사건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심판의 대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욥은 자신에게만 정의가 적용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들 역시 같은 정의 앞에 서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욥의 소망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욥기 19:1–29 본문 →

욥기 19장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특징은 욥의 소망이 고난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셨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25절에서 욥은 「나는 아네」라고 말합니다. 그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고난이 왜 일어났는가에 관한 해답이 아닙니다. 자신을 되찾아 줄 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고난의 원인을 모두 이해했기 때문에 소망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위해 나설 이가 있다는 기대 때문에 소망을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셨다고 말했습니다(19:6). 동시에 자신을 되찾아 줄 이가 살아 있다고 선언했습니다(19:25). 이 두 진술을 곧바로 조화시키려고 하면 본문의 중요한 긴장이 사라집니다. 욥은 하나님을 적대자로 경험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마지막 가능성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찾습니다.

욥은 자신의 경험을 거짓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경험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욥은 자신의 말이 두루마리에 기록되고 바위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가 그렇게까지 바라는 까닭은 자신의 몸이 점점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잊었고, 가까운 이들은 그를 낯선 사람으로 대합니다. 그의 피부는 무너지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시간도 충분히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만큼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록의 한가운데에서 「나를 되찾아 줄 이가 살아 있고, 그가 마지막에 흙 위에 서리라는 것을」 안다고 선언합니다.

욥은 그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가 언제 일어설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상태에서 보게 될지도 확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눈이 볼 것이네」 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 눈은 친구들이 자신을 모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몸이 무너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언젠가 그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의 눈앞에서 아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병들었고, 여전히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여전히 자신의 억울함을 풀지 못했습니다.

몸이 사라져 가는 사람이 바위에 자신의 말을 새기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겠다고 말합니다.

그 눈은 아직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눈을 감고 자신의 억울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