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악을 삼킨 사람, 탐욕에 삼켜지다
욥기 20장에서 초파르는 악인이 어떻게 멸망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설명에는 뜻밖의 특징이 있습니다. 악인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삼킨다는 것입니다.
그는 악을 입에 넣고 달콤하게 즐깁니다. 재물을 삼키고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먹을 몫까지 없애 버립니다. 그러나 그가 삼킨 것은 몸속에서 독으로 변하고, 재물은 토해 내야 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분노가 그의 배를 채웁니다.
초파르는 악을 단순히 법을 어기는 행동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음식으로 그립니다. 악인이 다른 사람의 것을 집어삼키다가 마침내 자신이 삼킨 것 때문에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초파르가 악인의 삶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가 지금 누구를 악인으로 판단해야 하는지까지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은 이미 자녀와 재산을 잃었고, 몸이 무너졌으며, 모든 사람에게 외면받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 그는 자신을 되찾아 줄 이가 살아 있다고 선언하고 친구들에게 심판을 두려워하라고 경고했습니다(19:25–29). 초파르는 그 경고를 듣고 불쾌해합니다. 그리고 다시 악인이 얼마나 철저하게 멸망하는지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장의 긴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초파르의 말에는 불의와 탐욕에 대한 분명한 도덕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통찰이 욥을 향한 정당한 고발이 되려면, 욥이 실제로 그런 악을 행했다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20장은 초파르 자신의 조급한 마음(1–3절)에서 시작하여, 잠깐 번영하다 사라지는 악인(4–11절), 악을 삼켰다가 독에 중독되는 몸(12–18절), 가난한 사람을 착취한 탐욕과 그 대가(19–23절), 피할 수 없는 파멸과 최종적인 몫(24–29절)으로 나아갑니다. 그 흐름을 따라가면 초파르의 말이 왜 설득력 있으면서도 위험한지 드러납니다.
조급한 마음이 영원한 진리를 말하려 할 때
「그러니 내 뒤얽힌 생각들이 나를 대답하게 하네. 내 안에서 조급함이 일기 때문이네.」욥기 20:2 · 본디새김
초파르의 두 번째 발언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차분하게 논증을 준비한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뒤얽혀 있고, 마음속에 조급함이 일어나며,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3절에서는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나는 나를 모욕하는 훈계를 듣고 있네. 내 분별에서 나온 영이 내게 대답하네.」욥기 20:3 · 본디새김
욥의 말이 초파르에게는 자신을 모욕하는 훈계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초파르는 자신의 반응을 단순한 분노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내 분별에서 나온 영」이 대답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문맥에 따라 숨, 바람, 영, 내적인 기운 등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분별에서 나온」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므로,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초파르에게 계시를 주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근거는 없습니다. 자신의 이해력과 내적인 충동이 그를 말하게 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느끼면서도, 그 감정과 자신의 지혜를 충분히 구별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의 조급함이 분별 있는 대답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강한 감정이 언제나 잘못된 판단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가 실제 불의를 알아보는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파르는 지금 무엇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의 고통이나 욥이 당한 억울함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훈계가 모욕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곧이어 악에 관한 영원한 원칙을 선언합니다.
「예로부터, 사람이 땅 위에 놓인 때부터,」 「악인들의 환호는 짧고, 불경한 자의 기쁨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자네는 아는가?」욥기 20:4–5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자기 안에서 조급함이 일어난다고 말하던 사람이 이제는 인류의 시작부터 알려진 진리를 말합니다. 자신의 현재 감정에서 출발한 발언을 태초부터 변하지 않는 지혜의 권위 아래 놓는 것입니다.
「자네는 아는가?」라는 질문도 실제로 욥의 생각을 듣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욥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책망에 가깝습니다. 초파르는 욥에게 새로운 사실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욥도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는 악인이 오래 번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약의 시편 73편 역시 악인들이 평안하게 번영하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의를 심판하신다는 믿음과, 모든 악인이 현재의 삶에서 즉시 몰락한다는 주장은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연설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그는 악인의 삶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삶이 반드시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를 확신하며 이야기합니다.
하늘에 닿은 머리가 똥처럼 사라지다
「그의 위세가 하늘까지 치솟고, 그의 머리가 구름에 닿는다 해도,」 「그는 제 똥처럼 영원히 사라질 것이네. 그를 보던 이들은 『그가 어디 있지?』 하고 말할 것이네.」욥기 20:6–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의도적으로 거친 대조를 만들어 냅니다.
악인의 머리는 구름에 닿을 만큼 높아집니다. 그런데 그가 사라지는 모습은 인간이 배설한 더러운 것에 비유됩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로 급격히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똥」은 악인의 최후를 점잖게 완화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악한 권력의 교만을 폭로하는 강한 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높아져도 인간은 스스로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파르는 단지 몰락을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꿈처럼 날아가 사람들이 그를 찾지 못하고, 밤의 환영처럼 쫓겨날 것이네.」욥기 20:8 · 본디새김
「그를 보던 눈이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하고, 그가 있던 자리도 더는 그를 바라보지 못할 것이네.」욥기 20:9 · 본디새김
7–9절에서 초파르는 악인의 존재를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지워 버립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가 머물던 장소조차 그를 다시 보지 못합니다.
꿈은 경험하는 동안 생생할 수 있습니다. 꿈속에서는 그것이 실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면 그 세계는 사라집니다.
초파르에게 악인의 번영도 그렇습니다. 그가 누렸던 위세는 당시에는 견고해 보였지만, 지나고 나면 꿈처럼 실체 없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악의 번영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지혜의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 장과 나란히 읽으면 다른 의미도 떠오릅니다.
욥은 19:27에서 「그를 내가 나를 위해 볼 것이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눈이 볼 것이네」라고 선언했습니다. 초파르는 이제 악인은 아무도 다시 볼 수 없으며, 그를 보았던 눈조차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두 진술이 의도적으로 서로를 겨냥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화의 흐름에서 그 대조는 분명한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10절에서는 악인의 재산뿐 아니라 가족의 처지도 바뀝니다.
「그의 아들들은 가난한 이들의 호의를 구하고, 그의 손은 그의 재물을 돌려줄 것이네.」욥기 20:10 · 본디새김
악인은 한때 재물을 차지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자녀들이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도움이나 호의를 구해야 합니다. 재산도 다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권력과 부를 통해 다른 사람 위에 서 있던 가정이 그 의존 관계를 거꾸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1절은 그 몰락이 노년의 자연스러운 쇠퇴 때문만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의 뼈에는 젊은 기운이 가득하지만, 그 뼈는 그와 함께 흙 위에 누울 것이네.」욥기 20:11 · 본디새김
악인은 늙어서 힘이 다했기 때문에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힘이 남아 있고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초파르에게 악인의 번영은 두 가지 이유로 믿을 수 없습니다. 높이 올라가도 순식간에 사라지며, 젊고 강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초파르는 이제 악인이 무엇을 즐겼는지 보여 주기 위해 그의 입속으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에서 젊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표현에는 전승상의 형태 차이와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본디새김처럼 젊은 활력이 남아 있는 상태로 읽으면 뜻이 선명합니다.
악은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독이 된다
「악이 그의 입에서 달콤하여, 그가 그것을 혀 밑에 숨기고,」 「그것을 아껴 놓아주지 않고, 입천장 안에 붙들어 둔다 해도,」욥기 20:12–13 · 본디새김
이 장의 중심 이미지가 시작됩니다.
초파르는 악인이 단순히 악을 저지른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을 맛본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는 그 맛을 즐깁니다.
혀 밑에 숨기고, 아껴 놓아주지 않고, 입천장 안에 오래 붙들어 둡니다. 맛있는 음식을 급하게 삼키지 않고 그 맛을 충분히 느끼려는 행동과 닮았습니다. 악은 그에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즐거움을 주는 대상입니다.
그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도 괴로워하며 후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잘못에서 만족을 얻고, 그 만족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악이 달콤하다는 말은 악이 실제로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인이 그것을 선호하고 즐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초파르는 더 끔찍한 변화를 묘사합니다.
「그의 음식은 창자 속에서 변하여, 그의 몸속에서 독사의 독이 되네.」욥기 20:14 · 본디새김
앞에서는 악을 입에 넣는 사람이 맛을 결정했습니다. 이제 음식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간 뒤에는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달콤했던 것이 독이 됩니다.
악인은 자신의 선택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이 받아들인 것 안에 파괴적인 결과가 들어 있습니다. 초파르는 악이 밖에서 갑자기 들이닥치는 벌만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기는 사람의 내부에서부터 파괴를 시작한다고 묘사합니다.
15절에서 그 음식은 재물로 바뀝니다.
「그는 재물을 삼켰다가 토해 내네.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그것을 몰아내네.」욥기 20:15 · 본디새김
악인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듯 삼켰습니다. 그러나 그 재물은 끝내 그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더욱이 토해 내는 행위의 원인으로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십니다.
여기에는 도덕적 결과와 하나님의 심판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악인이 삼킨 것이 독으로 변한다는 것은 악의 자기파괴적인 성격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배에서 몰아내신다는 것은 악인이 얻은 이익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판단하신다는 초파르의 확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파르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이야기의 서술자가 지금 욥에게 그런 심판이 일어났다고 확정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16절은 독의 이미지를 더욱 직접적으로 만듭니다.
「그는 독사의 독을 빨아 먹고, 살무사의 혀가 그를 죽일 것이네.」욥기 20:16 · 본디새김
악인이 즐긴 것은 음식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독사의 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악을 맛보는 즐거움과 악의 결과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하나의 신체적 경험으로 연결됩니다.
꿀과 엉긴 젖의 강을 보지 못하다
17절에서는 음식의 이미지가 전혀 다른 풍경으로 확대됩니다.
「그가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물줄기들, 곧 강과 시내들을 보지 못하기를 바라네.」욥기 20:17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한 사람의 입과 배가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땅을 흐르는 강과 시내가 등장합니다. 꿀과 엉긴 젖은 풍요로운 먹거리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초파르는 악인이 그 풍요를 보지 못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앞부분의 운명 예고와 조금 다른 어조를 만들어 냅니다.
초파르는 악인이 풍요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가 그것을 누리지 못하기를 바라는 듯이 말합니다. 그의 발언에는 악의 결과에 대한 판단뿐 아니라 악인의 몰락을 향한 강한 정서도 담겨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재물과 기쁨이 다시 분리됩니다.
「그는 수고로 얻은 것을 돌려주고 삼키지 못하네. 그의 재물만큼 되갚아야 하니 기뻐하지 못하네.」욥기 20:1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히브리어의 문장 연결이 어려워, 돌려주는 대상과 대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지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전체 흐름에서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악인이 차지한 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며, 결국 반환하거나 빼앗기는 상황이 묘사됩니다.
15절에서는 삼킨 재물을 토해 냈습니다. 18절에서는 그 재물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두 표현은 서로를 설명합니다.
탐욕의 목적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에서 악인은 자신이 차지한 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누리는 기쁨까지 잃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초파르는 왜 악인의 탐욕을 이렇게 강하게 비난합니까? 그가 구체적으로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잘못은 무엇입니까?
19절이 처음으로 그 답을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12–13절의 이미지는 잠언 20:17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속임수로 얻은 음식이 처음에는 달지만 나중에는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은 모두 불의로 얻는 만족이 자신의 기대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음식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17절의 꿀과 엉긴 젖은 실제 강이 꿀과 젖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먹을 것이 넘쳐나는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전승에서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됩니다(출애굽기 3:8). 17절과 표현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풍성한 먹거리를 통해 좋은 삶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17절의 히브리어 알 예레는 금지나 부정적인 소망을 표현할 수 있는 형태입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처럼 초파르의 바람을 드러내는 말로 옮기는 데 근거가 있습니다.
그가 먹어 치운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었다
「그가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버렸기 때문이네. 집을 빼앗았으나 그것을 세우지는 못할 것이네.」욥기 20:19 · 본디새김
초파르는 지금까지 악인의 번영과 멸망을 길게 묘사했지만,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분명한 행동을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집을 빼앗은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산이 많다는 비난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삶의 터전을 침해하여 부를 얻는 행동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의 발언에는 실제로 중요한 도덕적 통찰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집을 빼앗아 축적한 부는 정당하지 않으며, 그런 착취는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원칙이 잘못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초파르가 지금 이 원칙을 누구에게 적용하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욥에게 일어난 재앙이 그가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이라는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욥기의 서두에서 하나님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소개하셨습니다(1:8; 2:3). 나중에 욥 자신도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도왔던 삶을 이야기합니다(29:12–17). 욥의 그 자기 진술은 별도로 검토할 수 있지만, 적어도 초파르가 제기하는 착취의 혐의를 뒷받침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초파르의 말은 원칙적으로 옳을 수 있지만, 욥에게 적용되는 순간 근거 없는 고발이 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파르는 그 가능성을 검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의 내면으로 다시 들어가 탐욕의 끝을 설명합니다.
「그는 제 배 속의 평온을 알지 못했으므로, 자기가 탐내던 것을 건져 내지 못할 것이네.」욥기 20:2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악이 맛있는 음식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 그 음식을 삼킨 사람에게 평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재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습니다.
많이 소유하지 못해서 평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는 일 자체가 끝나지 않기 때문에 평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얻으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얻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충분히 가지고 있어도 남의 것을 탐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배를 가득 채워도 평온하지 않습니다.
21절은 그 욕망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그가 먹어 치우고 나면 남은 것이 없으니, 그의 풍요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네.」욥기 20:21 · 본디새김
이 문장을 단순히 악인이 너무 많이 먹었다는 뜻으로 읽으면 부족합니다. 먹는다는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몫을 없애는 행동으로 확장됩니다.
앞서 19절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빼앗았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면, 그가 무엇을 소비했는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그는 자신의 것을 누리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까지 삼켰습니다.
22절에서는 풍요가 절정에 이른 바로 그때 곤경이 시작됩니다.
「그의 넉넉함이 가득 찼을 때 그가 곤경에 빠지고, 고통받는 이들의 손이 모두 그에게 닥칠 것이네.」욥기 20:22 · 본디새김
왜 그럴까요? 초파르의 논리에서는 악인의 부가 정당하게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몫을 빼앗아 자신의 풍요를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풍요가 커질수록 그가 저지른 불의도 커집니다. 결국 그 풍요는 그의 안전을 보장하는 힘이 아니라 그를 무너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악인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그를 공격하는 모습일 수도 있고, 여러 재난이 사방에서 닥치는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악인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여 얻은 풍요 속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23절은 이 단락의 절정입니다.
「그의 배를 채우도록, 하나님이 불타는 분노를 그에게 보내고, 그의 창자에 그것을 비처럼 쏟기를 바라네.」욥기 20:23 · 본디새김
여기서는 12절부터 이어진 음식의 이미지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악인은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처음에는 악을 맛보았고, 다음에는 재물을 삼켰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배를 채우는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비처럼 쏟기를 바라네」라는 표현이 강렬합니다. 일반적으로 비는 메마른 땅을 적시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자연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처럼 쏟아지는 것이 불타는 분노입니다. 악인이 바라던 풍요로운 공급이 파괴적인 심판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절은 초파르가 일어날 일을 단정적으로 예고하는지 아니면 악인에게 그런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는지 해석이 갈립니다. 본디새김은 마지막 부분을 소원으로 옮겼습니다. 이 경우 초파르의 말은 단순한 악인의 운명 설명을 넘어 저주에 가까운 성격을 띱니다.
그는 불의를 미워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불의한 자에게 극심한 고통이 쏟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는 악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짓밟는 일을 비난하면서, 지금 고통받고 있는 욥에게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그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추상적인 윤리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는 이미 재산을 잃고 몸이 무너진 사람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말할 기회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공정하게 판단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최소한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초파르는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보다 악인의 멸망에 관한 말을 더욱 강하게 쏟아 내고 있습니다.
초파르는 가난한 사람의 집을 빼앗는 것은 잘못이라고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친구에게서 그의 정당한 목소리를 빼앗는 일은 제대로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것을 초파르가 가난한 사람을 실제로 착취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도덕적 판단과 대화 속 행동 사이에 불편한 간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 율법은 19절이 고발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출애굽기 22:21–27은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하며, 가난한 사람에게서 받은 담보를 다루는 일에도 자비를 요구합니다. 신명기 24:10–15는 가난한 채무자와 품꾼의 생존을 보호하도록 규정합니다. 이러한 법의 목적은 재산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의 생존을 함부로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아모스 2:6–7은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의로운 사람을 돈으로 파는 불의를 고발합니다. 미가 2:1–2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남의 밭과 집을 탐내어 빼앗는 행동을 비난합니다. 이 본문들은 초파르가 제기한 윤리적 문제 자체가 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23절의 히브리어에는 「그리 되기를」이라는 소망으로 읽을 수 있는 표현이 있어, 소원으로 옮기는 읽기의 근거가 됩니다.
쇠 무기를 피해도 청동 활을 피하지 못하다
「그가 쇠 무기를 피해 달아나도, 청동 활이 그를 꿰뚫을 것이네.」욥기 20:24 · 본디새김
초파르는 이제 악인을 추격하는 심판의 모습을 그립니다.
앞에서는 악인이 자신이 삼킨 것 때문에 몸속에서 파괴되었습니다. 이제는 바깥에서 무기가 날아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철과 청동의 대조는 서로 다른 종류의 무기를 나란히 놓아 피할 수 없는 공격을 강조합니다. 어떤 한 가지 위험에서 벗어나더라도 다른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5절에서는 그 공격의 결과가 몸속까지 드러납니다.
「그가 그것을 뽑아내고, 그것은 등에서 나오네. 번뜩이는 화살촉이 그의 쓸개에서 빠져나오고, 공포가 그에게 닥치네.」욥기 20:25 · 본디새김
무기는 단순히 피부를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몸을 관통하고 내부를 손상시킵니다. 「쓸개」는 앞서 음식이 독으로 바뀌던 장면의 신체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이 장에서 악인의 배와 창자는 탐욕이 들어가는 장소였고, 이제는 죽음의 무기가 파고드는 장소가 됩니다. 그가 온갖 재물을 집어삼키려고 했던 몸이 심판의 공격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26절에서는 어둠과 불이 등장합니다.
「그가 감춰 둔 것들에 닥치도록 온갖 어둠이 감춰져 있네. 입김으로 일으키지 않은 불이 그를 삼키고, 그의 천막에 살아남은 자는 떨 것이네.」욥기 20:26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두 종류의 숨김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감추어 둔 것들이 있고, 그에게 닥칠 어둠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숨긴 재산이나 보물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파르는 그 숨겨진 것들에도 파멸이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불을 피우려면 일반적으로 누군가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거나 연료를 공급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이 입김으로 일으키지 않은 불이 등장합니다. 이는 인간의 손으로 시작되지 않은 파괴적인 불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지만, 본문이 그 불의 구체적인 기원이나 작동 방식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욥기의 독자는 여기서 1:16의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욥에게 재난이 닥쳤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그의 양과 종들을 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것을 초파르가 그 사건을 직접 가리키는 말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악인을 태우는 불에 대한 묘사가 이미 욥이 겪은 재앙과 겹쳐 보입니다.
이것이 그토록 위험한 지점입니다.
초파르는 욥이 실제로 그런 악을 저질렀다는 증거 없이 악인의 운명을 욥의 현실과 겹쳐 놓습니다.
그는 악인의 번영이 짧다고 말합니다. 욥도 재산을 잃었습니다.
악인의 자녀들이 곤궁해진다고 말합니다. 욥은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악인의 몸이 독과 무기로 파괴된다고 말합니다. 욥의 몸은 병들어 있습니다.
악인의 집이 불타고 소출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욥의 재산도 큰 재난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런 유사성은 초파르의 말이 욥에게 가혹하게 들리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겪은 재난과 악인에게 내릴 심판의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해서, 그 재난이 실제로 하나님의 형벌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추론하는 위험을 보여 줍니다. 악행이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해서, 재앙을 겪는 모든 사람이 악을 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초파르는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의 연설은 개인의 몸과 집을 넘어 온 세상으로 확대됩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에서 정확히 누가 무기를 뽑는지와 동작의 연결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본디새김은 악인이 제 몸에 박힌 것을 스스로 뽑아내는 모습으로 옮겼습니다.
하늘과 땅이 모두 그를 고발하다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내고, 땅이 그에게 맞서 일어날 것이네.」욥기 20:2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20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적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초파르는 악인의 몸이 파괴되고, 재산이 사라지고, 집이 불타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온 세상이 악인을 고발합니다. 하늘과 땅이 단순한 자연환경이 아니라 증언하고 판단하는 존재들처럼 묘사됩니다.
구약에서 하늘과 땅이 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은 낯선 표현이 아닙니다. 초파르의 말도 그런 법정의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악인은 자신의 죄를 숨길 수 없습니다. 사람이 보지 못하더라도 하늘과 땅이 그를 고발할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독자에게 이 구절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욥이 증인을 요청했던 바로 그 하늘과 땅
욥은 16:18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땅아, 내 피를 덮지 말라. 내 부르짖음이 머물 자리가 없기를.」 그는 자신의 억울함이 땅에 묻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이어 16:19에서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지금도 보게, 내 증인은 하늘에 있고, 나를 위해 증언할 이는 높은 곳에 있네.」 욥에게 하늘과 땅은 자신의 진실을 보존하고 밝혀 줄 가능성이 있는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초파르는 바로 그 하늘과 땅이 악인의 죄악을 드러내고 그에게 맞서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욥은 하늘에서 자신을 위한 증언을 찾습니다.
초파르는 하늘이 악인의 죄를 고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땅이 자신의 억울함을 덮어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초파르는 땅이 악인에게 맞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하늘과 땅이 한 사람에게는 자신을 위한 증인의 자리이고, 다른 사람의 말에서는 자신을 고발하는 법정이 됩니다.
물론 초파르는 일반적인 악인의 운명을 말하고 있으며, 27절에서 욥을 직접 지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문맥에서 이 대조를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결과 욥의 법정 호소가 정반대 방향으로 되돌아오는 듯한 효과가 생깁니다.
28절에서는 재산의 파멸이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그의 집 소출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분노하는 날에 쓸려갈 것이네.」욥기 20:28 · 본디새김
앞에서 악인은 재물을 삼키고, 그것을 토해 내고,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집에서 생산되는 소출까지 사라집니다. 「쓸려갈 것이네」라는 표현은 무언가가 물처럼 흘러가 버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악인이 모아 둔 것은 남지 않습니다. 집 안의 재물도, 앞으로 얻을 소출도, 그의 생명을 지탱하던 모든 것도 사라집니다.
마침내 초파르는 이 모든 묘사를 한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이것이 악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받는 몫이며, 하나님이 말로 정해 준 유산이네.」욥기 20:29 · 본디새김
하나님의 유산이 아니라 심판의 몫
「몫」(חֵלֶק)과 「유산」(נַחֲלָה), 두 낱말은 구약에서 사람이 배분받는 몫이나 기업, 상속받는 소유를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땅 분배 전승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몫과 유산이 복의 의미를 가집니다. 민수기 18:20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아론에게 친히 그의 몫과 유산이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초파르는 이 좋은 말들을 악인의 최후에 적용합니다.
악인이 하나님에게서 받는 몫은 재물이 아닙니다.
멸망입니다.
그가 상속받는 유산은 안전한 땅이나 풍요로운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노로 이루어지는 파멸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역설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악인은 더 많은 몫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한 재산까지 삼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배분받는 몫은 바로 그가 피하고 싶었던 심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하나님이 말로 정해 준 유산」이라는 표현에는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그의 말」(אֵמֶר)은 하나님을 가리킬 수도 있고 악인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킨다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정하신 유산이라는 뜻이 됩니다. 악인을 가리킨다면 자신의 말이나 선언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유산이라는 방향으로도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이런 연결은 문법적으로 해석이 필요하므로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은 앞뒤에서 하나님이 언급되시는 문맥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해진 몫이라고 옮겼습니다. 이 읽기에 따르면 초파르의 연설은 강한 권위의 선언으로 끝납니다. 그는 악인의 삶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말할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운명이라고 선언합니다.
초파르는 어떻게 하나님의 판결을 알고 있습니까?
그는 악인에 대한 오래된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욥에 관하여 어떤 판결을 내리셨다는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20:29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발언이 아니라 초파르의 말입니다.
이 구별은 이 장 전체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초파르는 처음에 자신의 마음이 조급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유산을 선언합니다. 그 두 장면 사이에는 자신의 내적인 반응에서 출발한 말을 하나님의 확정적인 판결처럼 제시할 위험이 놓여 있습니다.
이 위험을 본다는 것은 신앙적 확신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확신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감정과 경험과 오래된 원칙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고 있는지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에 관한 확신뿐 아니라,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과 다를 수 있다는 자각입니다.
달콤한 말의 끝에 남는 독
욥기 20장은 악인의 입에서 시작된 달콤한 맛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길게 보여 줍니다. 초파르의 비유는 탐욕을 섬뜩할 만큼 정확하게 그려 냅니다. 초파르의 발언을 전부 틀린 말로 처리하면 본문의 깊이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이 끝날 때까지, 욥이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짓밟거나 집을 빼앗았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초파르의 문제는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사람의 죄까지 안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욥기 20장이 보여 주는 지혜의 실패입니다.
그러나 이 장을 끝까지 읽은 독자에게는 다른 질문이 남습니다. 초파르 자신이 지금 입에 담고 있는 말은 어떤 말입니까?
그는 악인의 죄와 파멸을 설명하며 자신의 지혜를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실제로 욥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충분히 돌아보지 않습니다. 악을 맛보는 사람의 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무게는 살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 20장의 가장 깊은 아이러니입니다.
초파르의 마지막 문장은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받는 몫이며, 하나님이 말로 정해 준 유산이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해진 결론을 선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실제로 들리고 있는 목소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판결이 아니라 초파르 자신의 목소리입니다.
그 말이 끝난 자리에는 여전히 욥이 앉아 있습니다. 같은 몸으로 고통받고, 같은 억울함을 품은 채,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판결을 아직 듣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