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악인은 왜 늙어 가는가

악인은 결국 망합니다. 그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가 쌓아 올린 집은 무너지며, 그의 자손도 그가 저지른 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 질서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악인의 삶은 반드시 그렇게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고도 오래 살며, 자녀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재산을 누리다가 평온하게 죽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앞에서 초파르는 악인의 환호가 짧고 불경한 자의 기쁨은 한순간이라고 선언했습니다(20:5). 욥의 대답은 그 선언을 정면으로 뒤집는 질문, 「어찌 악인들은 살아서 늙어 가고, 힘마저 강해지는가?」(21:7)에서 시작됩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탄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믿음과 눈앞의 현실이 서로 맞지 않을 때, 신앙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욥은 악인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을 누구보다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번영을 부정해야만 하나님의 정의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진실한 믿음일까요?

21장은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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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려면 먼저 들으라

욥기 21:1–6 본문 →

욥은 친구들에게 새로운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기 말을 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자네들은 내 말을 귀 기울여 듣게. 그것을 자네들이 건네는 위로로 삼게.」욥기 21:2 · 본디새김

이 말에는 날카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2:11). 그러나 그들이 건넨 설명들은 욥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위로의 역할이 뒤바뀝니다. 일반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위로를 받지만, 욥은 위로하러 온 사람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3절의 말은 더욱 씁쓸합니다.

「자네들은 내가 말하도록 나를 참아 주게. 내가 말을 마친 뒤에는 자네가 비웃어도 좋네.」욥기 21:3 · 본디새김

욥은 친구들이 자기 말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끝까지 말할 기회만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욥이 이토록 절박하게 말하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절에서 그는 자기 탄식이 사람을 향한 것이냐고 묻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뒤따르는 조건 표현의 일부가 생략되어 있어 정확한 연결이 쉽지 않습니다. 본디새김은 그 탄식이 단순히 사람들을 향한 불평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욥의 조급함이 이해됩니다. 친구들이 자신을 오해하는 것도 괴롭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왜 이런 모습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에게 자신을 바라보고 놀라며 입에 손을 얹으라고 합니다(21:5). 손을 입에 얹는 행동은 말을 멈추고 침묵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욥은 자신이 제시하려는 현실 앞에서 친구들이 경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절에 따르면 그 현실을 떠올리는 욥 자신도 전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냉정한 논쟁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욥은 자기 주장이 이기기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있는 세상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제 그 두려움의 내용이 펼쳐집니다.

악인의 집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랫소리

욥기 21:7–13 본문 →

욥은 악인의 번영을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집 안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어찌 악인들은 살아서 늙어 가고, 힘마저 강해지는가?」욥기 21:7 · 본디새김

이것은 초파르의 말과 정확히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초파르는 악인이 아무리 높아져도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했습니다(20:5–9). 욥은 실제로는 악인들이 장수하고 세력까지 더 커진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자손은 그들 앞에서 굳게 자리 잡아 그들과 함께 있고, 그들의 후손은 그들의 눈앞에 있네.」욥기 21:8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자손의 번영은 한 개인의 성공을 넘어 가문이 안정적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욥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악인들이 그 모습을 직접 본다는 점입니다. 악인들은 자기 집안의 미래를 눈앞에서 확인합니다. 빌닷은 악인에게 자손도 후손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8:19). 욥은 그 단정과 정반대되는 광경을 보여 줍니다.

9절에는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여기서 ‘매’는 징계나 재앙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집은 두려움 없이 평안합니다. 이어서 수소와 암소가 등장합니다(21:10). 가축의 번식이 안정적이라는 것은 재산과 생계가 계속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욥이 가장 오래 머무는 것은 재산보다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을 양 떼처럼 내보내고, 그들의 아이들은 춤추네.」욥기 21:11 · 본디새김
「그들은 소고와 수금에 맞추어 소리 높여 노래하고, 피리 소리에 기뻐하네.」욥기 21:12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악인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와 거리가 멉니다. 악인의 집에서 들리는 것은 울음이나 비명이 아니라 아이들의 웃음과 음악입니다.

욥의 자녀들도 함께 모여 잔치를 벌였습니다(1:4). 그러나 그들은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습니다(1:18–19). 이제 모든 자녀를 잃은 욥이 친구들에게 악인들의 아이들은 춤추며 자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 둘을 명시적으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의 사정을 아는 독자에게는 피하기 어려운 대조입니다.

문제는 악인에게 기쁨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경건한 사람의 삶에는 닥친 재앙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의 집에는 닥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13절은 이 풍경을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 갑니다.

「그들은 풍요 속에서 제 나날을 마치고, 한순간에 스올로 내려가네.」욥기 21:13 · 본디새김

중요한 표현은 ‘한순간에’입니다. 갑작스러운 죽음 자체를 재앙으로 강조한다기보다, 앞에 묘사된 풍요로운 삶과 이어지는 대조 속에서 오래 쇠약해지거나 고통받는 과정 없이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욥이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악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재산이 많고 자녀들이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는 악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음 절이 그들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스올은 여기서 악인이 벌을 받는 지옥을 뜻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일반적인 용법에서 스올은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영역입니다. 욥기에서도 욥 자신이 스올로 내려가기를 말합니다(14:13). 예레미야 역시 비슷한 긴장을 경험합니다. 그는 여호와야훼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악인의 길이 어째서 형통한지 묻습니다(렘 12:1–2). 이 연결은 욥기와 예레미야서가 서로를 직접 인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과 현실의 불일치라는 같은 질문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사는 사람들

욥기 21:14–16 본문 →

욥은 그들이 하나님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말하네. 『우리에게서 떠나라. 우리는 네 길을 알고 싶지 않다.』」욥기 21:14 · 본디새김

그들은 단지 하나님을 모르거나 잊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려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전능자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겨야 하느냐? 그에게 간청하면 우리가 무슨 이득을 얻느냐?』」욥기 21:15 · 본디새김

그들의 질문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가를 묻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처음을 기억하면 이 질문은 뜻밖의 울림을 갖습니다. 1장 9절에서 사탄은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느냐고 묻습니다. 21장의 악인들도 비슷한 계산법으로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물론 두 장면의 발언자는 다르고 문맥도 다릅니다. 21장이 1장 9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장면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상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만납니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 사용하는 논리와도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재앙을 당한다고 가르칩니다. 악인들은 그 관계에서 충분한 이득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서로 결론은 다르지만, 둘 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손익으로 설명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욥은 16절에서 그들과 분명하게 거리를 둡니다.

「보게, 그들의 번영은 그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네. 악인들의 꾀는 내게서 멀리 있네.」욥기 21:16 · 본디새김

그는 악인들이 번영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좋은 것들을 전적으로 그들 자신이 통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이 잘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은 전혀 다릅니다.

욥은 악인의 번영을 인정하기 위해 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믿기 위해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이 두 태도를 동시에 유지하는 것이 욥의 논쟁을 어렵게 만듭니다.

악인의 등불은 실제로 얼마나 자주 꺼지는가?

욥기 21:17–22 본문 →

17절부터 욥은 친구들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악인의 몰락이라는 주제를 꺼냅니다.

「얼마나 자주 악인들의 등불이 꺼지고, 그들에게 재앙이 닥치며, 하나님이 분노하여 고통을 나누어 주고,」욥기 21:17 · 본디새김

빌닷은 악인의 빛이 꺼지고 그 등불이 빛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18:5–6). 욥은 바로 그 이미지를 가져와 묻습니다.

얼마나 자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납니까?

‘얼마나 자주’라는 물음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욥은 악인에게 재앙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보편적인 법칙처럼 제시하는 일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자주 확인되는지 묻습니다. 18절의 바람에 날리는 짚과 폭풍에 흩어지는 겨 역시 악인의 허무한 몰락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이미지입니다.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럴듯한 설명입니다. 욥이 요구하는 것은 그 설명이 현실에서도 성립하는지를 살피는 일입니다.

이어서 19절에는 또 하나의 논리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재앙을 그 악인의 아들들에게 내리려고 쌓아 두네.』 하나님이 악인 자신에게 갚아서 그가 알게 하기를 바라네.」욥기 21:19 · 본디새김

여기서 첫 문장을 친구들의 예상되는 반론으로 읽으면 논쟁의 흐름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악인이 살아 있는 동안 벌을 받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그 벌을 자녀들에게 남겨 두신다는 주장입니다. 다만 19절의 인용 범위는 히브리어 문장 자체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첫 문장을 친구들의 주장으로, 다음 문장을 욥의 반박이나 바람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만, 문장 전체를 욥의 논평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20–21절에서 욥이 당사자의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20절에서 욥이 요구하는 것은 악인 자신이 자기 불행을 보고 전능자의 분노를 마시는 일입니다. 욥은 악을 행한 당사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심판을 직접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21절에 나옵니다.

「그가 떠난 뒤의 자기 집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그의 달 수가 잘려 나갔는데?」욥기 21:21 · 본디새김

악인이 죽은 다음 자손이 불행해진다고 해서, 그 악인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욥이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악인의 자녀들이 벌을 받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당사자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죽었는데도 그것을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 사례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2절에서 욥은 갑자기 한 걸음 물러서는 듯한 말을 합니다.

「누가 하나님에게 지식을 가르치겠는가? 높은 이들을 심판하는 이가 바로 그인데.」욥기 21:22 · 본디새김

욥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잘 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이들까지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오히려 이 말에는 친구들을 향한 반문도 담겨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칠 수 없다면, 친구들 역시 하나님이 언제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심판하셔야 하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욥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친구들이 확신하는 단순한 보응의 법칙과 같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0:5는 죄의 영향이 세대를 넘어 이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반면 신명기 24:16과 에스겔 18:20은 각자가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같은 흙 아래 눕는 두 사람

욥기 21:23–26 본문 →

이제 욥은 두 사람의 죽음을 나란히 놓습니다.

「어떤 이는 기력이 한창일 때 죽네, 온전히 평온하고 편안한 채로.」욥기 21:23 · 본디새김
「그의 양동이들은 젖으로 가득하고, 그의 뼛속 골수는 흠뻑 젖어 있네.」욥기 21:24 · 본디새김

‘양동이들(⁨עֲטִין⁩)’로 옮긴 히브리어 명사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흔히 젖이 가득한 용기나 몸의 풍성함과 연결하여 읽지만, 특정한 신체 부위나 물건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골수의 이미지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뼈의 깊은 곳까지 생기와 건강함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또 어떤 이는 마음이 쓰라린 채 죽네, 좋은 것을 맛보지도 못한 채로.」욥기 21:25 · 본디새김

욥은 두 사람의 도덕적 성격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23절의 사람이 반드시 악인이라고도, 25절의 사람이 반드시 의인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앞 단락에서 악인의 번영을 다루었으므로 첫 번째 사람을 악인의 한 사례로 연결해 볼 수는 있지만, 욥은 이 두 사람을 선악의 단순한 대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26절에서 두 사람을 한 문장으로 묶습니다.

「그들은 함께 흙 위에 눕고, 구더기가 그들을 덮네.」욥기 21:26 · 본디새김

그러나 이 구절을 죽음이 결국 모든 것을 공평하게 만든다는 위안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은 두 사람의 마지막을 같게 만들지만, 그들이 살아온 날들을 같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평생 풍요를 누린 사람과 평생 쓰라림을 겪은 사람이 함께 흙 아래 눕는다고 해서, 살아 있는 동안 벌어졌던 차이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모두 죽는다는 사실만으로는 인간이 왜 그렇게 다르게 살다가 죽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죽음이 모두를 같게 만든다고 해도, 사람들의 기억과 사회적 대우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에는 전도서와 이어지는 통찰이 있습니다. 전도서 9:2는 의인과 악인에게 같은 일이 닥친다는 현실을 바라봅니다. 또한 전도서 8:14는 악인의 행실에 대한 보응이 의인에게, 의인의 행실에 대한 보응이 악인에게 돌아가는 듯한 현실을 문제 삼습니다. 이것은 욥기 21장의 직접 인용 관계가 아니라, 구약 지혜문학 안에서 반복되는 신학적 질문입니다. 시편 73편도 비슷한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형통하고 고통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흔들립니다(73:3–12). 그 시편은 이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다시 살피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73:16–17). 반면 욥기 21장은 아직 그와 같은 해결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

욥기 21:27–33 본문 →

욥은 다시 친구들을 향해 돌아섭니다.

「보게, 나는 자네들의 생각을 아네. 자네들이 나를 해치는 데 쓰는 꾀도 아네.」욥기 21:27 · 본디새김

욥은 그들이 어떤 논리로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네들은 이렇게 말하네. 『귀인의 집이 어디 있는가? 악인들이 사는 천막은 어디 있는가?』」욥기 21:28 · 본디새김

이 말은 악인의 집이 결국 사라진다는 주장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의 주장에 맞서 길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자네들은 길 가는 이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는가? 그들이 보인 증거를 자네들도 외면하지는 않겠지.」욥기 21:29 · 본디새김

길을 다니는 사람들은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접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증언은 한곳에 앉아 만들어 낸 법칙보다 넓은 현실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처음의 요청과 이어집니다. 욥은 자신을 들으라고 요구했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도 들으라고 합니다.

친구들의 문제는 단순히 욥을 오해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설명에 맞지 않는 증언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30절은 이 대목에서 중요한 해석의 갈림을 만듭니다.

「재앙의 날에 악한 자는 화를 면하고, 격노의 날에 악한 자들은 이끌려 나가네.」욥기 21:30 · 본디새김

히브리어의 ‘화를 면하다(⁨חָשַׂךְ⁩)’에 해당하는 동사는 ‘억제되다’, ‘남겨 두어지다’, ‘보존되다’라는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하나는 본디새김처럼 악인이 재앙의 날에도 보호받거나 화를 면한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악인이 장차 닥칠 재앙의 날을 위해 남겨져 있다는 읽기입니다. 이 경우 구절은 악인에게 아직 심판이 남아 있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뒤쪽의 ‘이끌려 나간다’는 표현도 목적지가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습니다.

이 장의 전반적인 논지와 31–33절의 묘사는 악인이 살아 있는 동안 벌을 받지 않는다는 읽기에 무게를 더합니다. 그러나 30절 자체의 언어적 모호함은 남겨 두어야 합니다.

「누가 그의 면전에서 그의 행실을 말하겠는가? 그가 저지른 일을 누가 그에게 갚겠는가?」욥기 21:31 · 본디새김

여기서 욥은 하나님의 심판만을 논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악인에게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악인이 번영하는 이유가 단지 자연적인 행운 때문만은 아닐 수 있음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의 침묵과 권력 앞의 무력함도 악인이 책임을 피하는 현실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욥은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사회적 원인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32절에서는 악인이 죽은 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는 묘지로 옮겨지고, 그의 무덤을 누군가 지키네.」욥기 21:32 · 본디새김

이것은 친구들이 묘사한 악인의 말로와 다릅니다. 빌닷은 악인의 기억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의 이름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8:17). 그런데 욥이 제시하는 악인은 죽은 뒤에도 무덤이 보살핌을 받습니다. 악인은 죽은 뒤에도 반드시 수치스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골짜기의 흙덩이들이 그에게 달콤하고, 모든 사람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그에 앞선 이들은 셀 수도 없네.」욥기 21:33 · 본디새김

죽은 자에게 흙덩이가 달콤하다는 표현은 시적인 역설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의 뒤를 따라간다’는 표현은 장례 행렬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보다 넓게 모든 사람이 결국 죽음을 따라간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그보다 앞서 간 사람들도 셀 수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욥이 말하는 것은 악인의 죽음이 언제나 공개적인 치욕이나 몰락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살아서 번영했고, 아무도 그의 면전에서 책임을 묻지 못했으며, 죽은 뒤에도 무덤으로 옮겨졌습니다.

악인이 반드시 망한다는 친구들의 설명은 그의 삶을 끝까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32절에서 ‘무덤’과 연결된 히브리어 낱말은 본래 곡식 단이나 곡식 더미와 관계되는 낱말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무덤 위에 쌓인 봉분이나 무덤의 구조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지킨다’는 동사의 주체도 명확하지 않으므로, 실제로 누군가가 묘지를 지키는 모습인지 다른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헛된 위로와 배신

욥기 21:34 본문 →

마지막 절에서 욥은 처음에 던졌던 위로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자네들이 어찌 헛된 것으로 나를 위로하는가? 자네들의 대답에는 배신만 남아 있네.」욥기 21:34 · 본디새김

이 장은 ‘위로’라는 말로 시작해 ‘위로’라는 말로 끝납니다.

처음에 욥은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이 그들의 위로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21:2). 마지막에는 그들이 실제로 건네는 위로가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려고 하나님의 정의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설명을 유지하기 위해 악인들의 실제 번영을 외면하고, 고통받는 욥에게 숨겨진 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욥은 그들의 답변을 ‘배신’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지적 오류보다 무겁습니다. 친구들의 설명은 고통받는 사람과의 관계까지 훼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통을 겪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욥이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하나님에 관해 바른 말을 하려는 열망이 고통받는 사람의 현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욥의 마지막 말에 담긴 심각한 문제입니다.

욥기 21장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정의

욥기 21:1–34 본문 →

욥기 21장을 읽고 나면 하나의 분명한 답보다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남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이 관찰하는 보응의 법칙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번영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삶이 정당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러나 악인의 삶이 반드시 곧 무너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 역시 이 장이 묘사하는 현실에 충실하지 않습니다.

욥기의 질문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생긴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믿음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는 세상에 정의가 없다고 편안하게 결론짓지 않습니다. 동시에 친구들이 제공하는 간단한 대답에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정의가 현실보다 작아져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난 앞에서 우리가 정말로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과,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에게 그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 차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욥기 21장은 아직 하나님이 이 모든 불일치를 어떻게 다루실지 보여 주지 않습니다. 대신 두 풍경을 독자의 눈앞에 오래 남겨 둡니다.

한쪽에서는 악인의 아이들이 소고와 수금에 맞추어 춤추고 있습니다. 그들의 집은 안전하고, 가축은 번성하며, 부모는 자녀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다른 한쪽에는 자기 자녀들을 모두 잃고, 몸과 삶이 무너진 욥이 앉아 있습니다.

친구들은 이 두 풍경이 어떻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준비한 답은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은 처음에 그들에게 부탁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경악하라고 합니다. 손을 입 위에 얹으라고 합니다.

욥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멈추는 침묵이 아니라, 그 질문을 성급하게 끝내 버리지 않는 침묵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