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죄를 만들어 낸 사람
엘리파즈는 욥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욥기 22장에 이르면 그는 마치 모든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합니다. 「자네가 까닭 없이 형제들에게서 담보를 잡고, 헐벗은 이들의 옷을 벗겼기 때문이네.」 「자네는 지친 이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않았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지 않았네.」(22:6–7)
놀라운 것은 이 죄목들이 이전 대화에서 확인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엘리파즈는 증인을 데려오지도 않고, 구체적인 사건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욥이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고 과부와 고아를 학대했다고 단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엘리파즈에게는 이미 확고한 결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죄 없는 사람에게 이런 재앙을 내리실 리 없습니다. 욥은 엄청난 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에게도 엄청난 죄가 있어야 합니다.
엘리파즈는 욥의 죄를 발견하고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설명하기 위해 욥의 죄를 확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을 단순히 엘리파즈의 잘못된 비난으로만 읽으면 후반부의 놀라운 변화를 놓칩니다. 그는 욥을 가혹하게 정죄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라고 권하고, 금보다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라고 말하며, 마침내 욥의 깨끗한 손을 통해 다른 사람까지 구원받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의 말에는 깊은 신앙적 통찰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통찰들이 잘못된 판단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된 말을 하면서도 사람을 그토록 잘못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욥기 22장은 이 불편한 질문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움에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않으신다
엘리파즈의 세 번째 발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겠는가? 분별 있는 이는 자기 자신에게 이로움을 주네.」욥기 22:2 · 본디새김
「자네가 의롭다고 전능자에게 기쁨이 되겠는가? 자네의 길을 온전하게 한다고 그에게 이득이 되겠는가?」욥기 22:3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자체는 하나님의 자족성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주의해야 할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의로움에서 실질적인 이익을 얻지 않으신다는 것과, 인간의 의로움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엘리파즈는 두 생각을 거의 구분하지 않은 채 말합니다. 3절에서 ‘기쁨’과 ‘이득’을 나란히 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서두에서 하나님은 욥을 가리켜 흠 없고 올곧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1:8; 2:3). 하나님이 욥의 의로움으로 어떤 이익을 얻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은 욥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자네의 경외심 때문에 그가 자네를 책망하고, 자네와 재판하러 나오겠는가?」욥기 22:4 · 본디새김
하나님이 욥을 책망하고 계시다면, 그 이유가 욥의 경외심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엘리파즈가 아직 입증하지 않은 전제가 들어 있습니다. 욥이 겪는 모든 재앙이 하나님께서 욥의 죄를 심판하시는 행위라는 전제입니다.
엘리파즈는 그 전제를 검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책망하신다는 사실부터 확정한 뒤, 그에 맞는 죄를 찾습니다. 그래서 5절은 질문의 형식을 취하지만 사실상 판결문입니다.
「자네의 악이 크지 않은가? 자네의 죄악에는 끝이 없네.」욥기 22:5 · 본디새김
엘리파즈는 욥이 저지른 죄를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의인을 벌하실 리 없다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욥의 악이 크고 그의 죄악에 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확신이 인간의 죄를 판정할 권한까지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욥기의 독자는 엘리파즈가 모르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처음에서 욥은 경건한 사람으로 소개되었고, 그의 고난은 친구들이 생각하는 숨겨진 죄의 결과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믿지만, 그 정의가 반드시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설명에 맞지 않는 욥을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힘 있는 사람의 팔과 으스러진 고아의 팔
엘리파즈는 이제 욥이 저질렀다는 죄를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자네가 까닭 없이 형제들에게서 담보를 잡고, 헐벗은 이들의 옷을 벗겼기 때문이네.」욥기 22:6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이 몸에 걸친 겉옷은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그 옷은 추위를 피하는 데 필요했고, 밤에는 몸을 덮는 역할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옷을 빼앗는 것은 단순히 재산의 일부를 가져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보호마저 빼앗는 일입니다.
「자네는 지친 이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않았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지 않았네.」욥기 22:7 · 본디새김
엘리파즈가 고발하는 죄는 적극적으로 남을 해치는 행동만이 아닙니다. 그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는 일을 죄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에만 머물지 않고, 약한 사람의 생존과 존엄을 돌보는 일에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에게는 땅이 속했고, 대우받는 사람은 그 안에 살았네.」욥기 22:8 · 본디새김
「자네는 과부들을 빈손으로 내보냈고, 고아들의 팔은 으스러졌네.」욥기 22:9 · 본디새김
8절의 ‘힘 있는 사람’은 문자적으로 ‘팔의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권력이나 힘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고아들의 ‘팔들’이 나옵니다. 같은 ‘팔’이라는 낱말이 반복됩니다.
한쪽에는 땅을 차지한 강한 사람의 팔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으스러진 고아들의 팔이 있습니다.
팔은 행동할 수 있는 힘을 나타냅니다. 고아들의 팔이 으스러졌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지킬 능력과 삶을 유지할 수단을 잃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권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살아가지만,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은 생계를 잃고 밀려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욥이 정말 이런 일을 했습니까?
본문에는 엘리파즈가 제시하는 증거가 없습니다. 욥은 나중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도왔고, 과부의 마음을 기쁘게 했으며, 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살폈다고 말합니다(29:12–17). 또한 자신이 굶주린 사람이나 과부를 외면했다면, 옷이 없는 사람을 보면서도 보호하지 않았다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합니다(31:16–22).
물론 이것은 욥 자신의 진술이므로 그 자체만으로 모든 사실을 독립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책의 서두에 나오는 하나님의 평가와 함께 읽으면, 엘리파즈의 고발을 사실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습니다.
사람을 보호하도록 주어진 정의의 언어가, 아무런 증거 없이 사람을 정죄하는 언어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엘리파즈가 열거한 행동들은 실제로 악합니다. 그의 잘못은 그 행동들을 악하다고 판단한 데 있지 않습니다. 그 행동들을 욥이 저질렀다고 단정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네 둘레에 덫들이 있고, 공포가 갑자기 자네를 놀라게 하네.」욥기 22:10 · 본디새김
이때 ‘그러므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의 논증에서 증명되지 않은 죄목들이 이미 확정된 사실이 되었고, 욥의 고통은 그에 합당한 처벌로 설명됩니다. 11절의 어둠과 넘치는 물도 욥이 통제할 수 없는 재앙에 둘러싸여 있다는 모습입니다.
엘리파즈는 욥이 실제로 경험하는 두려움과 혼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자신이 이미 내린 유죄 판결의 증거로 사용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2:26–27은 이웃의 옷을 담보로 잡았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령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몸을 덮을 거의 유일한 옷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4:12–13도 가난한 채무자의 담보를 밤새 붙잡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 율법들은 욥기의 사건을 직접 설명하는 자료라기보다, 고대 이스라엘이 옷을 빼앗기는 일을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여겼는지 보여 줍니다. 또한 이사야 58:6–10은 참된 경건이 억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며 헐벗은 사람을 입히는 일과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엘리파즈가 6–9절에서 제시한 윤리적 요구와 통하는 내용입니다. 8절의 힘 있는 사람을 욥 자신으로 볼 수도 있고, 욥이 우대했다는 유력자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문장의 주어가 앞뒤와 달라지므로 어느 쪽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엘리파즈가 욥을 이러한 불의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22장의 고발과 31장의 자기 변호는 구체적인 항목에서 맞닿습니다. 엘리파즈가 옷과 음식, 과부와 고아를 언급하자, 욥은 후에 바로 그러한 영역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설명합니다. 11절은 어둠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인지, 어둠 자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인지 문장에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름 너머에서 보지 못하신다고 누가 말했는가?
엘리파즈는 이제 욥의 행동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생각까지 고발합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 있지 않은가? 별들의 높이를 보게, 얼마나 높이 솟았는지.」욥기 22:12 · 본디새김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그분의 위엄과 초월성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어서 욥이 했다는 말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자네는 말했네. 『하나님이 무엇을 아는가? 짙은 구름 너머에서 심판할 수 있겠는가?』」욥기 22:13 · 본디새김
「『구름이 그를 가려서 그는 보지 못하고, 하늘의 둥근 천장을 거닌다.』」욥기 22:14 · 본디새김
여기서 구름은 땅과 하늘 사이를 가리는 장벽처럼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너무 높은 곳에 계시므로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지 못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악을 행하더라도 그것을 보시거나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악인들의 생각으로 묘사되는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7장 17–20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시며, 왜 잠시도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지 묻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지 못하신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너무나 세밀하게 살피시는 것처럼 느껴져 괴로워합니다.
욥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이나 시선의 범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엘리파즈는 이 차이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는 욥이 실제로 한 말을 살피는 대신, 자신이 생각하는 악인이라면 마땅히 할 법한 말을 욥의 입에 넣습니다.
그리하여 고발은 더욱 커졌습니다.
처음에는 욥이 이웃을 해쳤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제 욥은 하나님이 인간을 보지 못하신다고 여기는 사람으로까지 몰립니다. 하지만 엘리파즈의 논리는 여전히 처음과 같습니다. 욥이 재앙을 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말과 행동을 해석하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욥의 말을 그대로 가져와 욥에게 되돌려 주다
엘리파즈는 욥에게 「악한 사람들이 밟았던 그 옛길을 자네도 따르려는가?」(22:15) 하고 묻습니다. 16절에서 그 악인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낚아채이고, 그들의 터는 강물처럼 쏟아집니다. 엘리파즈는 악인의 역사를 갑작스러운 심판의 역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7절부터 매우 흥미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우리에게서 떠나라』 하고 말했네. 전능자가 그들에게 무엇을 하겠는가?」욥기 22:17 · 본디새김
욥은 악인들이 하나님에게 떠나 달라고 말하면서도 번영한다고 지적했습니다(21:14–16). 엘리파즈는 바로 그 표현을 가져와 악인들이 결국 멸망한다는 자신의 주장 속에 넣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그들의 집을 좋은 것으로 채웠네. 악인들의 꾀는 내게서 멀리 있네.」욥기 22:18 · 본디새김
마지막 문장은 욥이 21장 16절에서 사용했던 말과 동일합니다. 이 반복은 우연한 유사성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이 두 사람의 입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합니다.
욥에게 이 말은 악인들의 번영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의 생각을 따르지는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 표현을 악인의 멸망을 말하는 문맥 속에 배치합니다. 그도 하나님이 악인들의 집을 좋은 것으로 채우셨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악인들의 종말을 바꾸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엘리파즈는 욥의 말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말을 하게 만든 욥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이들은 보고 기뻐하며, 결백한 이는 그들을 비웃네.」욥기 22:19 · 본디새김
「『참으로 우리의 대적이 멸망했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불이 삼켰네.』」욥기 22:20 · 본디새김
16절에서는 물이 악인의 기반을 휩쓸고, 20절에서는 불이 남은 것까지 삼킵니다. 악한 세력이 무너지고 억압받던 사람들이 정의의 실현을 기뻐하는 일 자체는 구약에서 낯선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욥의 죄를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욥에게 악인의 몰락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어느 쪽에 서 있는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의로운 사람들의 기쁨을 이야기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욥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더욱이 욥기 1장 16절에서 욥의 재산과 종들을 삼킨 재앙 가운데 하나도 불이었습니다. 엘리파즈가 20절의 불로 욥의 그 재앙을 직접 지목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같은 불의 이미지를 통해 엘리파즈가 말하는 악인의 멸망과 욥이 실제로 겪은 재앙이 겹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의 설명은 욥에게 위로가 되기보다, 욥이 당한 재앙을 죄의 심판으로 해석하도록 압박합니다.
이제 엘리파즈는 그 압박을 회복의 약속으로 바꿉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에서 노아 시대의 홍수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창 6–7장). 악인들이 옛날에 살았고 물에 휩쓸려 멸망했다는 점이 그 이야기와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노아나 홍수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 사건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편 107:42에서도 올곧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를 보고 기뻐합니다.
금을 흙먼지 위에 놓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으라
21절부터 엘리파즈의 어조가 달라집니다.
「부디 그와 가까이 지내고 평안히 지내게. 그렇게 하면 자네에게 좋은 일이 올 것이네.」욥기 22:21 · 본디새김
엘리파즈는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의 의로움에서 이익을 얻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욥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21절의 권고 자체에는 진지한 신앙적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22절에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을 받아 마음에 두라고 합니다.
「자네가 전능자에게 돌아오면 다시 세워질 것이네. 자네 천막에서 불의를 멀리하게.」욥기 22:23 · 본디새김
욥은 집과 재산, 자녀와 건강을 잃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약속에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고, 자기 천막에서 불의를 멀리해야 합니다.
문제는 욥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도, 그의 천막에 불의가 있었다는 사실도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는 생명의 초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다가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한 사람에게, 그 재앙을 죄의 증거로 삼아 돌아오라고 말한다면 그 초대는 또 다른 정죄가 됩니다.
「귀한 광석을 흙먼지 위에 놓고, 오피르의 금을 개울 바위에 놓게.」욥기 22:24 · 본디새김
오피르는 구약에서 금의 산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여기에는 해석상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귀한 금을 마치 흙이나 돌처럼 여겨 버리라는 권고입니다. 다른 하나는 금이 먼지나 개울의 돌처럼 풍성해지는 모습을 나타낸다는 읽기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놓다’는 명령형이 사용되고, 이어지는 25절이 하나님 자신을 보화에 비유한다는 점에서는 첫 번째 읽기가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금의 풍요를 강조하는 읽기도 가능하므로 확정적으로 하나만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전능자가 자네의 귀한 광석이 되고, 자네에게 풍성한 은이 될 것이네.」욥기 22:25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은 재물을 주시는 분으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재물보다 더 귀한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말이 놓인 상황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욥은 이미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는 지금 재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파즈는 욥이 재물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욥은 이미 재물을 잃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하나님을 금보다 귀하게 여기라’는 말의 가치가 아닙니다. 그 말이 욥의 실제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진리라도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전제로 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릴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에서 ‘이로움을 주다’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는 사칸(סָכַן) 계열입니다. 21절의 ‘가까이 지내다’도 같은 동사 계열의 다른 형태인 하스켄입니다. 두 표현의 실제 용법은 다르므로 같은 뜻으로 단순하게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연설의 처음과 끝에서 유익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같은 어휘 계열로 연결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22절의 ‘가르침’은 반드시 이미 기록된 모세 율법 전체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침이나 지시를 넓게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9:28과 10:11에서도 오피르의 금이 언급됩니다.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이름이 귀중한 금과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24절의 첫 번째 읽기는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재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고, 두 번째 읽기는 하나님께 돌아온 뒤 다시 풍요를 얻게 된다는 약속과 연결됩니다.
고발당한 사람의 깨끗한 두 손
엘리파즈의 마지막 약속은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욥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있게 됩니다(22:26). 이어서 기도와 응답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자네는 그에게 간구하고 그는 자네 말을 들으며, 자네는 서원한 것을 이행할 것이네.」욥기 22:27 · 본디새김
욥은 이미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해 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부르짖음에 분명한 응답을 얻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19:7). 엘리파즈는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욥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전제에 묶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내리누를 때 자네는 『일어설 것이네』 하고 말하고, 그는 눈을 낮춘 이를 구할 것이네.」욥기 22:29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일어설 것이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와(גֵּוָה)는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본문의 번역처럼 낮아진 사람을 일으키는 선언으로 이해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욥이 다른 사람의 회복까지 말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반면 교만을 지적하는 말로 읽으면,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겸손한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대조가 강조됩니다. 두 읽기 모두 하나님의 구원이 낮아진 사람과 연결된다는 후반부의 방향과 어울립니다.
이제 마지막 30절에 이르면 엘리파즈의 연설은 뜻밖의 곳에 도달합니다.
「그는 결백하지 않은 이도 건져 낼 것이며, 그 사람은 자네의 깨끗한 두 손 덕에 구원받을 것이네.」욥기 22:30 · 본디새김
‘결백하지 않은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 나키는 해석상 논의가 있는 표현입니다. 이를 부정의 의미로 읽으면 본디새김처럼 ‘결백하지 않은 이’가 됩니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분석하면 결백한 사람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본디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엘리파즈는 죄 없는 사람뿐 아니라 결백하지 않은 사람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구원의 통로는 욥의 깨끗한 두 손입니다.
여기서 ‘깨끗한 두 손’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죄악을 멀리하는 삶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시편 24:3–4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산에 오를 사람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순결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 장 전체에서 가장 깊은 역설이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처음에 욥의 악이 크고 그의 죄악에는 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22:5). 욥이 가난한 사람의 옷을 빼앗고, 과부를 내쫓고, 고아의 팔을 으스러뜨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욥의 손이 깨끗해지고, 그 손을 통해 다른 사람까지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파즈는 이것을 회개의 결과로 약속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욥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엘리파즈의 고발에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욥을 부당하게 정죄하면서, 바로 그 욥의 깨끗한 손을 통해 다른 사람이 건짐을 받는 미래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2장 7–9절에서 하나님은 엘리파즈와 두 친구를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는 22장 30절을 직접적으로 성취하는 예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엘리파즈가 미래에 자신이 욥의 중보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알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책 전체의 문학적 흐름에서 보면 뚜렷한 반전입니다.
욥을 죄인이라고 고발했던 엘리파즈 자신이, 결국 욥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29절의 게와는 높아짐이나 들어 올림을 나타내는 말로 읽을 수 있지만, 교만과 연결하여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욥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설 것이네’라고 말한다는 구체적인 장면은 첫 번째 읽기에 따른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언어가 왜 잘못된 위로가 되었는가
욥기 22장의 엘리파즈는 단순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 악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야 하며, 금과 은보다 하나님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의 연설 전체는 욥을 잘못 이해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는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 정의가 욥의 특정한 고난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것이 죄라고 압니다. 그러나 욥이 그런 죄를 지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엘리파즈의 잘못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전혀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 안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높이 계시며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욥의 과거를 다 아는 것처럼 판결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라는 명령은 참됩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근거로 아무런 증거 없이 특정한 사람을 가해자로 단정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는 욥의 상처를 보았지만, 그 상처를 죄의 증거로 읽었습니다. 욥의 질문을 들었지만, 그 질문을 불신앙의 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욥에게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라고 말했지만, 욥이 이미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람은 자네의 깨끗한 두 손 덕에 구원받을 것이네」 하고 말했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는 두 종류의 손이 남습니다.
엘리파즈가 고발한 욥의 손은 가난한 사람의 옷을 빼앗고 고아의 팔을 으스러뜨렸다는 손입니다. 그러나 엘리파즈가 마지막에 약속하는 욥의 손은 다른 사람을 건지는 데 쓰일 만큼 깨끗한 손입니다.
그는 자신이 고발하고 있는 사람의 손을 끝내 깨끗한 두 손이라고 부릅니다.
엘리파즈가 정말로 보아야 했던 것은 자신이 만들어 낸 욥의 죄가 아니라, 자기 앞에 있는 욥의 실제 삶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