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죄를 만들어 낸 사람
엘리파즈는 욥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욥기 22장에 이르면 그는 마치 모든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합니다. 욥이 「까닭 없이 네 형제들의 물건을 담보로 잡고」,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주지 않았어」라고 말입니다.
이 죄목들은 이전 대화에서 확인된 적이 없습니다. 엘리파즈는 증인을 데려오지도 않고, 구체적인 사건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욥이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고 남편을 잃은 여자들과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학대했다고 단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엘리파즈에게는 이미 확고한 결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죄 없는 사람에게 이런 재앙을 내리실 리 없습니다. 욥은 엄청난 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에게도 엄청난 죄가 있어야 합니다.
엘리파즈는 욥의 죄를 발견하고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설명하기 위해 욥의 죄를 확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을 단순히 엘리파즈의 잘못된 비난으로만 읽으면 후반부의 변화를 놓칩니다. 그는 욥을 가혹하게 죄인으로 몰다가 갑자기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라고 권하고, 금보다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라고 말하며, 마침내 욥의 깨끗한 손을 통해 다른 사람까지 구원받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의 말에는 깊은 신앙적 통찰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통찰들이 잘못된 판단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된 말을 하면서도 사람을 그토록 잘못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욥기 22장은 이 불편한 질문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움에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않으신다
엘리파즈의 세 번째 발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이 될 수 있겠어? 지혜롭게 판단하는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될 뿐이야.」욥기 22:2 · 두루새김
「네가 올바르게 산다고 샤다이께 기쁨이 되겠어? 네가 흠 없이 살아간다고 그분께 무슨 이득이 되겠어?」욥기 22:3 · 두루새김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자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충족하시며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으시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주의해야 할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의로움에서 실제로 이익을 얻지 않으신다는 것과, 인간의 의로움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엘리파즈는 두 생각을 거의 구분하지 않은 채 말합니다. 3절에서 「기쁨」과 「이득」을 나란히 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서두에서 하나님은 욥을 가리켜 흠 없이 올바르게 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1:8; 2:3). 하나님이 욥의 의로움으로 어떤 이익을 얻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은 욥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엘리파즈는 이어서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너를 꾸짖으시겠어? 그것 때문에 너와 재판하려고 나오시겠어?」욥기 22:4 · 두루새김
하나님이 욥을 꾸짖고 계시다면, 그 이유가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엘리파즈가 아직 입증하지 않은 전제가 들어 있습니다. 욥이 겪는 모든 재앙이 하나님께서 욥의 죄를 심판하시는 행위라는 전제입니다.
그래서 5절은 질문의 형식을 취하지만 사실상 판결문입니다.
「네가 저지른 악이 크지 않아? 네 죄는 끝이 없잖아.」욥기 22:5 · 두루새김
엘리파즈는 욥이 저지른 죄를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의인을 벌하실 리 없다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욥이 저지른 악이 크고 그의 죄는 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확신이 인간의 죄를 판정할 권한까지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욥기의 독자는 엘리파즈가 모르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처음에서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으로 소개되었고, 그의 고난은 친구들이 생각하는 숨겨진 죄의 결과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믿지만, 그 정의가 반드시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설명에 맞지 않는 욥을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힘 있는 사람의 팔과 꺾인 아버지 없는 아이들의 팔
엘리파즈는 이제 욥이 저질렀다는 죄를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먼저 담보로 옷을 빼앗은 일을 고발합니다.
「너는 까닭 없이 네 형제들의 물건을 담보로 잡고, 입을 옷도 변변치 않은 사람들의 옷마저 벗겨 갔잖아.」욥기 22:6 · 두루새김
오늘날에는 옷을 담보로 잡는다는 말이 낯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이 몸에 걸친 겉옷은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그 옷은 추위를 피하는 데 필요했고, 밤에는 몸을 덮는 역할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옷을 빼앗는 것은 단순히 재산의 일부를 가져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보호마저 빼앗는 일입니다.
7절에서는 물과 빵이 등장합니다.
「지친 사람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않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주지 않았어.」욥기 22:7 · 두루새김
엘리파즈가 고발하는 죄는 적극적으로 남을 해치는 행동만이 아닙니다. 그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는 일을 죄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삶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에만 머물지 않고, 약한 사람의 생존과 존엄을 돌보는 일에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대접받는 사람이 거기 살았지.」욥기 22:8 · 두루새김
「너는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냈고, 아버지 없는 아이들의 팔은 꺾였어.」욥기 22:9 · 두루새김
8절의 「힘 있는 사람」은 낱말 그대로는 「팔의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권력이나 힘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9절에서는 아버지 없는 아이들의 「팔」이 나옵니다. 원문에서는 같은 「팔」(זְרוֹעַ)이라는 낱말이 반복됩니다.
한쪽에는 땅을 차지한 강한 사람의 팔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꺾인 아버지 없는 아이들의 팔이 있습니다.
팔은 행동할 수 있는 힘을 나타냅니다. 아이들의 팔이 꺾였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지킬 능력과 삶을 유지할 수단을 잃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권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살아가지만,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은 생계를 잃고 밀려나는 사회입니다.
8절의 힘 있는 사람을 욥 자신으로 볼 수도 있고, 욥이 우대했다는 유력자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문장의 주어가 앞뒤와 달라지므로 어느 쪽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엘리파즈가 욥을 이러한 불의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욥이 정말 이런 일을 했습니까?
본문에는 엘리파즈가 제시하는 증거가 없습니다. 욥은 나중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가난한 사람과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도왔고, 남편을 잃은 여자들의 마음을 기쁘게 했으며, 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살폈다고 말합니다(29:12–17). 또한 자신이 굶주린 사람이나 남편을 잃은 여자를 외면했다면, 옷이 없는 사람을 보면서도 보호하지 않았다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합니다(31:16–22).
물론 이것은 욥 자신의 진술이므로 그 자체만으로 모든 사실을 독립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책의 서두에 나오는 하나님의 평가와 함께 읽으면, 엘리파즈의 고발을 사실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습니다.
사람을 보호하도록 주어진 정의의 언어가, 아무런 증거 없이 사람을 죄인으로 모는 언어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엘리파즈가 열거한 행동들은 실제로 악합니다. 그의 잘못은 그 행동들을 악하다고 판단한 데 있지 않습니다. 그 행동들을 욥이 저질렀다고 단정한 데 있습니다.
10–11절에서 그 단정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네 둘레에 덫이 놓이고, 갑자기 닥친 공포가 너를 떨게 하는 거야.」욥기 22:10 · 두루새김
이때 「그래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의 논증에서 증명되지 않은 죄목들이 이미 확정된 사실이 되었고, 욥의 고통은 그에 합당한 처벌로 설명됩니다. 11절의 어둠과 넘치는 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전체 장면은 욥이 통제할 수 없는 재앙에 둘러싸여 있다는 모습입니다.
엘리파즈는 욥이 실제로 경험하는 두려움과 혼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자신이 이미 내린 유죄 판결의 증거로 사용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2:26–27은 이웃의 옷을 담보로 잡았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령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몸을 덮을 거의 유일한 옷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4:12–13도 가난한 사람에게서 받은 담보를 밤새 붙잡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 율법들은 욥기의 사건을 직접 설명하는 자료라기보다, 고대 이스라엘이 옷을 빼앗기는 일을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여겼는지 보여 줍니다. 또한 이사야 58:6–10은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삶이 억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며 헐벗은 사람을 입히는 일과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엘리파즈가 6–9절에서 제시한 윤리적 요구와 통하는 내용입니다. 사무엘상 16:7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겉모습을 보지만 자신은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엘리파즈를 직접 겨냥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보이는 상태와 하나님이 아시는 사람의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결을 이룹니다. 22장의 고발과 31장에서 욥이 자신을 변호하는 말은 옷과 음식, 남편을 잃은 여자들과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라는 구체적인 항목에서 맞닿습니다. 11절의 「어둠에 싸여 앞을 보지 못하고」는 원문에서 어둠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인지, 어둠 자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인지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름 너머에서 보지 못하신다고 누가 말했는가?
엘리파즈는 이제 욥의 행동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생각까지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은 곳에 계시지 않아? 가장 높은 별들을 봐. 얼마나 높이 솟아 있는지.」욥기 22:12 · 두루새김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그분의 위엄과 인간 세상을 넘어선 높으심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어서 욥이 했다는 말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너는 이렇게 말했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실까? 짙은 구름 너머에서 심판하실 수 있을까?』」욥기 22:13 · 두루새김
「『구름이 그분을 가려서 보지 못하시고, 하늘의 둥근 천장을 거니실 뿐이야.』」욥기 22:14 · 두루새김
고대 사람들이 이해한 우주의 모습에서 하늘은 인간이 사는 땅 위로 높이 펼쳐진 영역이었습니다. 여기서 구름은 땅과 하늘 사이를 가리는 장벽처럼 묘사됩니다. 엘리파즈가 욥에게 돌리는 생각은, 하나님이 너무 높은 곳에 계시므로 인간이 악을 행하더라도 그것을 보시거나 심판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악한 사람들의 생각으로 묘사되는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시편 10:11의 악한 사람은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며, 에스겔 8:12에서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이 실제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7장 17–20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시며, 왜 잠시도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지 묻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지 못하신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너무나 세밀하게 살피시는 것처럼 느껴져 괴로워합니다.
욥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이나 시선의 범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엘리파즈는 이 차이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는 욥이 실제로 한 말을 살피는 대신, 자신이 생각하는 악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할 법한 말을 욥의 입에 넣습니다.
처음에는 욥이 이웃을 해쳤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제 욥은 하나님이 인간을 보지 못하신다고 여기는 사람으로까지 몰립니다. 하지만 엘리파즈의 논리는 여전히 처음과 같습니다. 욥이 재앙을 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말과 행동을 해석하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욥의 말을 그대로 가져와 욥에게 되돌려 주다
엘리파즈는 욥에게 「악한 사람들이 걸었던 그 옛길」을 따르려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16절에서 그 악한 사람들은 제때가 되기도 전에 휩쓸려 가고, 그들이 서 있던 터도 강물에 쓸려 갑니다. 자연스러운 수명을 채우지 못한 갑작스러운 멸망과, 그들이 의지하던 기반이 무너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17절부터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우리에게서 떠나십시오』라고 말했어. 샤다이께서 자기들에게 무슨 일을 하시겠느냐는 거지.」욥기 22:17 · 두루새김
이 말은 바로 앞 장에서 욥이 소개한 악한 사람들의 말과 거의 같습니다. 욥은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떠나 달라고 말하면서도 번영한다고 지적했습니다(21:14–16). 엘리파즈는 바로 그 표현을 가져와 악한 사람들이 결국 멸망한다는 자신의 주장 속에 넣습니다.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그들의 집을 좋은 것으로 채워 주셨어. 악한 사람들의 꾀와 나는 거리가 멀어.」욥기 22:18 · 두루새김
마지막 문장은 원문에서 욥이 21장 16절에서 사용했던 말과 동일합니다. 이 반복은 우연한 유사성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이 두 사람의 입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합니다.
욥에게 이 말은 악한 사람들의 번영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의 생각을 따르지는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 표현을 악한 사람들의 멸망을 말하는 문맥 속에 배치합니다. 그도 하나님이 악한 사람들의 집을 좋은 것으로 채우셨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을 바꾸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엘리파즈는 욥의 말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말을 하게 만든 욥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그들의 몰락을 보고 기뻐하고, 죄 없는 사람은 그들을 비웃어.」욥기 22:19 · 두루새김
「『정말 우리에게 맞서던 자들이 사라졌구나! 그들에게 남은 것도 불이 삼켰구나!』 하고 말이야.」욥기 22:20 · 두루새김
16절에서는 물이 악한 사람들의 기반을 휩쓸고, 20절에서는 불이 남은 것까지 삼킵니다. 악한 세력이 무너지고 억압받던 사람들이 정의가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는 일 자체는 구약에서 낯선 주제가 아닙니다. 시편 107:42에서도 올바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를 보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엘리파즈의 발언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아직 욥의 죄를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엘리파즈는 올바른 사람들의 기쁨을 이야기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욥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더욱이 욥기 1장 16절에서 욥의 재산과 종들을 삼킨 재앙 가운데 하나도 불이었습니다.
엘리파즈가 20절의 불로 욥의 그 재앙을 직접 지목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같은 불의 이미지를 통해 엘리파즈가 말하는 악한 사람들의 멸망과 욥이 실제로 겪은 재앙이 겹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의 설명은 욥에게 위로가 되기보다, 욥이 당한 재앙을 죄의 심판으로 해석하도록 압박합니다.
이제 엘리파즈는 그 압박을 회복의 약속으로 바꿉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의 장면에서 노아 시대의 홍수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창 6–7장). 악한 사람들이 옛날에 살았고 물에 휩쓸려 멸망했다는 점이 그 이야기와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노아나 홍수를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 사건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금덩이를 흙먼지 위에 내려놓고 하나님을 금덩이로 삼으라
21절부터 엘리파즈의 어조가 달라집니다.
그는 더 이상 욥의 죄를 열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라고 권합니다.
「부디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평안히 살아. 그렇게 하면 네게 좋은 일이 올 거야.」욥기 22:21 · 두루새김
엘리파즈는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의 의로움에서 이익을 얻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는 욥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좋은 일이 올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21절의 권고 자체에는 진지한 신앙적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22절에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라고 합니다.
「네가 샤다이께 돌아가고 네 천막에서 악한 일을 몰아내면, 너는 다시 일어설 거야.」욥기 22:23 · 두루새김
욥은 집과 재산, 자녀와 건강을 잃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약속에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자기 천막에서 악한 일을 몰아내야 합니다.
문제는 욥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도, 그의 천막에 악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는 생명의 초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다가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한 사람에게, 그 재앙을 죄의 증거로 삼아 돌아오라고 말한다면 그 초대는 또다시 그를 죄인으로 모는 말이 됩니다.
「금덩이를 흙먼지 위에 내려놓고, 오피르의 금을 개울 바위 위에 놓아.」욥기 22:24 · 두루새김
오피르는 구약에서 금이 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바로 그 금을 흙먼지 위에, 개울 바위 위에 놓으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해석상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귀한 금을 마치 흙이나 돌처럼 여겨 버리라는 권고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놓다」(שִׁית)는 명령형이 사용되고, 이어지는 25절이 하나님 자신을 금덩이에 비유한다는 점에서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다른 하나는 금이 먼지나 개울의 돌처럼 풍성해지는 모습을 나타낸다는 읽기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 돌아온 뒤 다시 풍요를 얻게 된다는 약속과 연결됩니다. 두루새김의 「내려놓고」는 첫 번째 읽기에 어울리지만, 확정적으로 하나만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샤다이께서 네 금덩이가 되시고, 네게 풍성한 은이 되실 거야.」욥기 22:25 · 두루새김
여기서 하나님은 재물을 주시는 분으로만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재물보다 더 귀한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욥은 이미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는 지금 재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파즈는 욥이 재물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욥은 이미 재물을 잃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하나님을 금보다 귀하게 여기라는 말의 가치가 아닙니다. 그 말이 욥의 실제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진리라도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전제로 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릴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에서 「도움이 될 수 있겠어」로 옮긴 히브리어 동사와 21절의 「가까이 지내며」는 같은 동사 계열의 다른 형태입니다. 두 표현이 실제로 쓰이는 방식은 다르므로 같은 뜻으로 단순하게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연설의 처음과 끝에서 도움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같은 어휘 계열로 연결됩니다. 22절의 「가르침」은 반드시 이미 기록된 모세 율법 전체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침이나 지시를 넓게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오피르의 금은 열왕기상 9:28과 10:11에서도 언급됩니다.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이름이 귀중한 금과 연결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고발당한 사람의 깨끗한 두 손
엘리파즈의 마지막 약속은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욥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을 더없이 기뻐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있게 됩니다(22:26). 이어서 기도와 응답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네가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면 그분께서 네 말을 들으시고, 너는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킬 거야.」욥기 22:27 · 두루새김
욥은 이미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해 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부르짖음에 분명한 응답을 얻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19:7). 엘리파즈는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욥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전제에 묶여 있습니다.
28절에서는 욥이 하기로 정한 일이 이루어지고 그가 가는 길에 빛이 비칠 것이라고 합니다. 29절은 더 나아가 내리눌린 사람의 회복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내리눌릴 때 너는 『다시 일어설 거야』라고 말할 거야. 하나님께서는 눈을 낮춘 사람을 구하셔.」욥기 22:29 · 두루새김
이 구절의 「다시 일어설 거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와(גֵּוָה)는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의 번역처럼 높아짐이나 들어 올림을 나타내는 말로 읽어 내리눌린 사람을 일으키는 선언으로 이해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욥이 다른 사람의 회복까지 말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반면 교만을 지적하는 말로 읽으면, 교만한 사람은 낮아지고 겸손한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대조가 강조됩니다. 두 읽기 모두 하나님의 구원이 낮아진 사람과 연결된다는 후반부의 방향과 어울립니다.
이제 마지막 30절에 이르면 엘리파즈의 연설은 뜻밖의 곳에 도달합니다.
「그분께서는 죄 없는 사람이 아니어도 건져 내실 거야. 네 깨끗한 두 손 덕에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을 거야.」욥기 22:30 · 두루새김
「죄 없는 사람이 아니어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 나키는 해석상 논의가 있는 표현입니다. 이를 부정의 의미로 읽으면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되고,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랐습니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분석하면 죄 없는 사람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의 읽기를 따르면 엘리파즈는 죄 없는 사람뿐 아니라 죄가 있는 사람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구원의 통로는 욥의 깨끗한 두 손입니다. 「깨끗한 두 손」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악한 일을 멀리하는 삶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 장 전체에서 가장 깊은 역설이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처음에 욥이 저지른 악이 크고 그의 죄는 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22:5).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욥의 손이 깨끗해지고, 그 손을 통해 다른 사람까지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파즈는 이것을 회개의 결과로 약속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욥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엘리파즈의 고발에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욥을 부당하게 죄인으로 몰면서, 바로 그 욥의 깨끗한 손을 통해 다른 사람이 건짐을 받는 미래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2장 7–9절에서 하나님은 엘리파즈와 두 친구를 꾸짖으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는 22장 30절을 직접적으로 이루는 예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책 전체의 문학적 흐름에서 보면 뚜렷한 반전입니다.
욥을 죄인이라고 고발했던 엘리파즈 자신이, 결국 욥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24:3–4에서도 하나님의 산에 오를 사람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순결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언어가 왜 잘못된 위로가 되었는가
욥기 22장의 엘리파즈는 단순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 악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야 하며, 금과 은보다 하나님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 정의가 욥의 특정한 고난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엘리파즈의 잘못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전혀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 안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고 강조하는 사람이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데 이 연설의 비극이 있습니다. 올바른 윤리적 원칙을 아는 것과, 그 원칙으로 사람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기 앞에 앉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였습니다.
그는 욥의 상처를 보았지만, 그 상처를 죄의 증거로 읽었습니다. 욥의 질문을 들었지만, 그 질문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욥에게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라고 말했지만, 욥이 이미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깨끗한 두 손 덕에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는 두 종류의 손이 남습니다.
엘리파즈가 고발한 욥의 손은 가난한 사람의 옷을 빼앗고 아버지 없는 아이들의 팔을 꺾었다는 손입니다. 그러나 엘리파즈가 마지막에 약속하는 욥의 손은 다른 사람을 건지는 데 쓰일 만큼 깨끗한 손입니다.
그는 자신이 고발하고 있는 사람의 손을 끝내 깨끗한 두 손이라고 부릅니다.
엘리파즈가 정말로 보아야 했던 것은 자신이 만들어 낸 욥의 죄가 아니라, 자기 앞에 있는 욥의 실제 삶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