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나를 아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욥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은 고통이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23장에서 그가 먼저 구하는 것은 고통의 종식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아, 그를 찾을 길을 알 수 있다면. 그가 자리 잡은 곳까지 찾아갈 텐데.」욥기 23:3 · 본디새김

욥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면서 동시에 그분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의 억울함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결정하셨는지 알 수 없기에 전율합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와중에도 「하지만 그는 내가 가는 길을 아네」라고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과, 하나님은 자신을 아신다는 확신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합니다.

이것이 욥기 23장을 관통하는 긴장입니다.

앞 장에서 엘리파즈는 욥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했습니다(22:21–23). 그러나 욥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 싫은 것이 아니라, 그분께 나아갈 길을 알 수 없어 괴로운 것입니다.

23장은 이 답답한 상황을 세 번의 움직임으로 펼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정을 말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지 상상합니다. 이어서 사방으로 하나님을 찾지만 만나지 못하는 현실을 토로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아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그 과정에서 욥은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기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더욱 깊은 질문에 붙잡힌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23장 본문 읽기 →

하나님께 하소연할 수 있는 자리만 있다면

욥기 23:1–5 본문 →

욥의 첫마디에는 지친 마음이 묻어납니다.

「오늘도 내 하소연은 반항이라네. 내 손이 내 신음 위에 무겁게 놓여 있네.」욥기 23:2 · 본디새김

여기서 ‘반항’은 거스름이나 거역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문맥에서는 욥의 하소연 자체가 반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욥이 자신의 항의를 거두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욥이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내 손이 내 신음 위에 무겁게 놓여 있다’는 표현도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욥이 자신의 고통과 항의를 더 이상 억누르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는 곧장 친구들을 향해 말을 쏟아 내지 않습니다. 시선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 앞에 내 송사를 펼쳐 놓고, 내 입을 논거들로 가득 채우겠네.」욥기 23:4 · 본디새김

여기서 ‘송사’는 재판이나 판결을 뜻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법정에 제시하는 사건과 주장을 가리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을 법정에서 자신의 사건을 진술하는 모습으로 상상합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을 만나 위로받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난이 왜 일어났는지,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는 것인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시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친구들은 욥이 겪는 고난을 보고 그의 죄를 추정했습니다. 욥은 그 판단에 맞서 자신이 실제로 살아온 삶을 하나님 앞에 제시하고 싶어 합니다. 그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은 단순한 감정적 위로를 넘어, 자신의 삶이 진실하게 판단받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5절에 이르면 욥의 바람은 단지 자기 말을 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가 내게 대답할 말들을 알아보고, 내게 무슨 말을 할지 헤아려 보겠네.」욥기 23:5 · 본디새김

욥은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그의 소송이 단순히 무죄 판결을 받아 내는 절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욥은 하나님의 판단을 알고, 그 판단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물론 자신이 결백하다는 확신도 강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상관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대답을 들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길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욥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불리한 말씀을 하시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실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논쟁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논쟁이 시작되려면 먼저 서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내 손’은 히브리어 본문의 읽기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역인 칠십인역 등에는 하나님의 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읽기가 나타나며, 그에 따라 하나님이 가하시는 고통이 욥의 탄식보다 무겁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본디새김처럼 ‘내 손’을 유지하면 욥이 자신의 신음을 누르려 하지만 그 무게가 여전히 크다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손이 신음 위에 무겁게 놓였다는 표현의 구체적인 뜻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으로 욥을 짓누르실까?

욥기 23:6–7 본문 →

욥이 하나님과의 재판을 상상한다는 것은 뜻밖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욥은 고통받는 인간입니다. 두 존재 사이에 힘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을 만나도 자신의 주장을 펼칠 기회가 있을까요? 욥은 그 가능성을 스스로 묻습니다.

「그가 큰 힘을 앞세워 나와 다투겠는가? 아니네. 그는 오히려 내게 주의를 기울일 것이네.」욥기 23:6 · 본디새김

욥은 하나님이 자신보다 훨씬 강하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힘을 사용하여 자신을 일방적으로 압도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한 힘을 갖추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욥기 9장에서 욥이 했던 말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는 그때 하나님이 자신을 폭풍으로 치시며 까닭 없이 상처를 더하신다고 호소했고(9:17), 하나님과 논쟁하려면 그분이 자신의 매를 거두시고 두려움을 주지 않으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9:34–35).

23장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욥은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기만 한다면 그분이 힘으로 자신을 제압하시기보다 자기 말에 주의를 기울이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렇다고 욥이 이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며 모든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욥은 다시 하나님의 압도적인 주권 앞에 두려워합니다. 6절은 확정된 미래의 묘사가 아니라 욥이 품고 있는 기대입니다.

「거기서는 올곧은 이가 그와 변론할 수 있고, 나는 나를 재판하는 이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것이네.」욥기 23:7 · 본디새김

‘올곧은 이’는 욥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과 연결됩니다. 욥기의 서두에서도 그는 하나님 앞에 올곧은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1:1, 1:8).

욥은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른 적 없는 완전무결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지금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정당화할 만한 숨겨진 범죄가 있다는 친구들의 고발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올곧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사정을 변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를 재판하는 이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것’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떠나겠다는 뜻보다, 재판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고발과 심판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나면 그분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야만 지금의 고통스러운 다툼이 끝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오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고통에서 자신을 온전히 풀어 주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다투려는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금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대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점에서 욥의 태도는 예레미야의 기도와도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야훼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분과 공의를 두고 논쟁하고 싶다고 말합니다(렘 12:1). 하나님의 의로움을 믿는 것과 그분이 하시는 일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두 본문은 만납니다.

사방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욥기 23:8–9 본문 →

여기서 욥의 발언은 갑자기 바뀝니다.

조금 전까지 그는 하나님을 만나면 어떻게 말할지,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실제로 하나님을 찾으려 하자 전혀 다른 현실과 마주합니다.

「보게, 앞쪽으로 가도 그가 없고, 뒤쪽에서도 그를 알아볼 수 없네.」욥기 23:8 · 본디새김
「그가 왼쪽에서 일할 때도 나는 그를 보지 못하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아서도 나는 보지 못하네.」욥기 23:9 · 본디새김

네 방향이 연속해서 등장합니다. 이 표현들은 몸을 기준으로 한 네 방향으로 읽을 수 있으며, 고대의 방향 감각을 고려하면 동서남북에 대응시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중요한 것은 모든 방향을 포괄한다는 점입니다.

욥은 한 방향에서만 하나님을 찾다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향할 수 있는 모든 방향을 살펴도 그분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왼쪽에서 ‘일할 때도’ 자신이 그분을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욥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분이 무엇을 하시는지 볼 수 없습니다.

욥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부재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시거나 일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자신이 확인할 수 없다는 경험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신다고 결론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분이 무엇을 하시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과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경험하는 일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습니다.

욥은 그 간격 안에 서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에서 하나님이 오른쪽으로 움직이시는 모습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동사는 구체적인 움직임을 확정하기 어려우나, 욥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전체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 장면은 시편 139편과 대조를 이룹니다. 시편 139:7–12에서 시인은 자신이 어느 곳에 가더라도 하나님의 영과 임재를 피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반대 방향에서 같은 문제와 마주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피하려 하지 않고 찾으려 합니다. 시편의 시인에게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은 자신을 붙드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욥에게는 어디에서든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이 깊은 고통의 원인이 되십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상황을 다루지만, 함께 읽으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 그분을 찾지 못해도, 그분은 내 길을 아신다

욥기 23:10–12 본문 →

「하지만 그는 내가 가는 길을 아네. 그가 나를 시험하면 나는 금처럼 나올 것이네.」욥기 23:10 · 본디새김

이 문장의 첫 부분은 앞의 두 절을 뒤집습니다.

욥에게는 하나님의 위치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욥이 걸어온 길이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삶에 감추어진 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욥의 고난을 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판단하려 합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이미 아신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욥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친구들의 추측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 삶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어서 금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가 나를 시험하면(⁨בָּחַן⁩)’은 시험하거나 검증한다는 의미의 동사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금속의 순도를 시험하는 행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금을 불에 넣으면 불순물이 드러나고 정련의 과정을 거쳐 순수한 금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욥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고난을 통해 자신이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문맥상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철저하게 검사하셔도 자신의 결백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금의 이미지를 모든 고난이 사람을 더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는 일반적인 공식으로 바꾸면 욥이 실제로 묻고 있는 질문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다음 두 절에 나타납니다.

「내 발은 그의 발자취를 굳게 따랐고, 나는 그의 길을 지켜 벗어나지 않았네.」욥기 23:11 · 본디새김
「나는 그의 입술에서 나온 명령을 떠나지 않았고, 내게 정해진 양식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더 소중히 간직했네.」욥기 23:12 · 본디새김

욥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8–12절 전체에 반복되는 ‘길’이라는 이미지가 중요해집니다. 욥은 사방을 돌아다녀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왔고 그분의 길을 지켜 왔다고 말합니다.

얼핏 모순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왔다면 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가요?

그러나 욥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르치신 삶의 길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하고 계시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욥은 자신이 따라야 할 하나님의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따라왔는데도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계시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겨 왔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정해진 양식보다’ 더 소중히 간직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내게 정해진 양식(⁨חֹק⁩)’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의 핵심 명사는 자신의 몫이나 정해진 분량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음식의 몫으로 이해하면, 욥은 생존에 필요한 양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귀하게 여겼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에 ‘음식’이라는 낱말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정해진 몫이나 규정된 것을 가리킨다는 보다 넓은 읽기도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적인 의무로만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소중히 간직했다’는 표현에는 보물을 저장하듯 지켜 두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 안에 귀하게 보존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앞 장에서 엘리파즈는 욥에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마음에 두라고 권했습니다(22:22). 그런데 욥의 대답은 자신이 이미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 장의 가장 불편한 전환이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는 시련을 통한 연단이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잠언 17:3은 은을 위한 도가니와 금을 위한 풀무를 말하면서 여호와야훼께서 마음을 시험하신다고 합니다. 말라기 3:2–3도 정련하는 불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욥기 23:10의 금은 우선 욥의 결백이 검증되어 드러나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은 내 길을 아시지만, 나는 그분의 뜻을 바꿀 수 없다

욥기 23:13–14 본문 →

10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아신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그는 그와 다른 방향의 생각에 붙잡힙니다.

「그러나 그는 뜻을 바꾸지 않으니 누가 그를 돌이키겠는가? 그의 마음이 바라는 것은 그가 행하네.」욥기 23:13 · 본디새김

이 문맥에서 욥이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기로 뜻하시면 누구도 그분을 강제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에게 이 사실은 위로보다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조금 전까지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정을 말할 수만 있다면 결백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어떤 일을 이루기로 정하셨고, 그 뜻을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요? 욥이 아무리 올곧게 살아왔고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정하신 일을 계속 이루신다면 어떻게 되는가요?

이것이 13절의 긴장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변덕스럽거나 불의한 분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확고하며 누구도 그 뜻을 좌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뜻의 내용을 욥이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14절은 그 두려움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그가 내게 정해진 몫을 다 이룰 것이며, 그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많이 있기 때문이네.」욥기 23:14 · 본디새김

‘내게 정해진 몫’에는 바로 12절에서 욥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덜 귀하게 여겼다고 말한 자신의 ‘정해진 양식’과 같은 명사가 사용됩니다. 12절에서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몫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간직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정해진 몫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낱말의 반복은 의미 있는 대조를 만듭니다.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에게 어떤 몫이 정해져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 몫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지켜 온 삶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정하신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고 해서 자기 삶에 주어진 모든 사건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욥에게 이 사실은 아직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가 아닙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정하신 일을 반드시 완수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앞으로 무엇이 더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그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많이 있다’는 말은 욥이 하나님의 계획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자신이 모르는 일들이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길을 아십니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정확히 아신다는 사실을 믿지만, 그 앎이 지금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10절의 확신과 13–14절의 두려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다른 하나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둘 다 지금 욥이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는 진실한 마음입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에서 ‘뜻을 바꾸지 않으니’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는 하나에 있다’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확고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한 관용적 의미를 확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12절과 14절의 ‘몫’이 정확히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12절에서는 양식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을, 14절에서는 하나님이 욥에게 정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두려워하다

욥기 23:15–16 본문 →

15절부터 욥은 자신의 두려움을 직접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앞에서 두려워 떠네. 곰곰이 생각하면 그가 두렵네.」욥기 23:15 · 본디새김

여기서 ‘그래서’는 앞의 하나님의 확고한 뜻과 연결됩니다. 욥은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막연히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자신의 삶에 정하신 일을 이루실 것이고, 누구도 그분을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욥의 두려움은 현실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막연한 감정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자신의 처지, 자신이 알 수 없는 계획을 깊이 생각한 끝에 두려워합니다.

16절은 그 두려움의 근원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약하게 했고, 전능자가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네.」욥기 23:16 · 본디새김

‘마음을 약하게 했다’는 표현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거나 무르게 만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문맥에서는 용기와 힘이 무너져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원인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욥은 하나님을 자기 문제의 밖에 계신 관찰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겪는 고통과 두려움의 중심에 계신 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욥을 불의하게 대하셨다는 서술자의 확정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욥이 지금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발언입니다. 욥기의 독자는 1–2장에서 하나님이 욥을 의롭다고 평가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장면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욥의 눈으로 보면 상황은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자신의 삶이 올곧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아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가요?

욥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너무 쉽게 조화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욥은 6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가 신앙적으로 성장하여 모든 두려움을 떨쳐 버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대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갈망하면서, 바로 그 하나님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약해지는 사람입니다.

이 긴장은 본문 안에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신앙의 모습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어둠이 오기 전에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기에

욥기 23:17 본문 →

마지막 절은 욥기 23장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둠이 오기 전에 내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고, 그가 내 눈앞에서 짙은 어둠을 가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네.」욥기 23:17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어려움은 ‘어둠’과 ‘끊어지다’라는 표현의 관계에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욥이 어둠이 닥치기 전에 죽지 않았고, 하나님도 그 어둠을 욥의 눈앞에서 가려 주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욥의 탄식은 자신의 생존과 연결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계속 경험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고, 하나님이 어둠 자체를 없애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욥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거나 태어나자마자 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탄식했던 말과 연결됩니다(3:11–19).

그러나 17절의 히브리어는 다른 방식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니츠마티는 ‘끊어지다’ 또는 ‘잠잠해지다’라는 방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어둠 앞에서’를 시간적 표현인 ‘어둠이 오기 전에’로 볼지, ‘어둠 때문에’라는 원인적 표현으로 볼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욥이 어둠 때문에 잠잠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이 경우 마지막 절은 욥이 두려움과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하소연을 멈추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어집니다.

두 읽기는 이 장의 마지막 분위기를 다르게 만듭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욥이 고통스러운 삶을 계속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고통 속에서도 침묵하지 않는 욥의 항의가 강조됩니다. 원문의 문법과 문맥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장 전체의 흐름에서 중요한 공통점은 있습니다.

욥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재판을 상상했지만 실제로 그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길에 대해서는 확신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에게 정하신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분을 만나기를 바라면서도 그분을 두려워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절의 어둠은 단지 욥의 육체적 고통을 나타내는 이미지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볼 수 없는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어둠이 있다고 해서 욥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길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이 두 사실이 마지막까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사방은 막혀 있지만, 자신의 길은 알려져 있다

욥기 23:1–17 본문 →

욥기 23장에는 두 종류의 길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욥이 하나님을 찾으려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는 앞쪽과 뒤쪽, 왼쪽과 오른쪽을 살피지만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욥이 살아온 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왔고 그분의 말씀을 지켜 왔다고 고백합니다. 첫 번째 길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다고 확신합니다.

그 확신이 욥의 모든 질문을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은 여전히 알 수 없고, 앞으로 무엇이 닥칠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렵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왜 지금 자신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욥기 23장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실제로 하나님을 찾으려 합니다. 그분 앞에서 논거를 제시하려 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그는 설명을 구하는 일이 불경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이 원하는 절차에 묶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 때문에 욥은 그분을 만나고 싶으면서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은 단순히 욥을 안심시키는 교리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욥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과 충돌하는 현실로 경험됩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신뢰하는 사람은 그분이 자신을 아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도, 그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두려워할 수 있는가요?

욥기 23장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은 진실하게 살아가려 했는데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려 했는데도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신앙이 거짓되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자신이 살아온 길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지 고난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들으시고, 자신도 하나님의 대답을 듣는 것입니다.

장면은 끝내 바뀌지 않습니다.

욥은 사방을 살피지만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앞에도 뒤에도,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자신이 찾는 분의 모습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하지만 그는 내가 가는 길을 아네. 그가 나를 시험하면 나는 금처럼 나올 것이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한 사람이, 자신이 걸어온 길은 하나님께 알려져 있다고 고백합니다.

욥기 23장은 바로 그 확신과 두려움 사이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