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곡식 단을 나르면서도 굶주리는 사람들
한 사람이 곡식 단을 어깨에 메고 걸어갑니다. 그가 나르는 곡식은 다른 사람의 창고를 채울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굶주려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사람들이 포도즙 틀을 밟고 있습니다. 포도즙이 흘러나오지만 그들은 목이 마릅니다. 밤이 되면 몸을 덮을 옷도 없고, 비를 피할 집도 없습니다.
욥은 이런 사람들을 묘사한 뒤 「도성에서 사람들이 신음하고, 치명상을 입은 이들의 목숨이 도움을 외치는데도, 하나님은 그런 부당함을 문제 삼지 않네」(24:12) 하고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욥은 이제 자신의 고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바라봅니다. 땅을 빼앗는 사람들, 고아의 가축을 가져가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사람들, 어둠 속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악행은 숨겨진 일이 아닙니다. 피해자들이 있고, 빼앗긴 재산이 있으며,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십니까?
앞 장에서 욥은 하나님을 찾아 사방을 살폈지만 그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23:8–9). 24장에서 그 질문은 더 넓어집니다. 욥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정의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왜 보이지 않습니까?
욥이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이 악을 아시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시는 악이 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장은 그 질문을 추상적인 논증으로 풀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 주다가,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범죄자들을 따라가고, 마지막에는 악인의 몰락에 관한 복잡한 진술로 끝납니다. 그 흐름을 따라가면 욥이 왜 친구들의 확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날은 왜 보이지 않는가
욥은 시간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전능자에게 때들이 간직되어 있지 않으며, 그를 아는 이들은 그의 날들을 보지 못하는가?」욥기 24:1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표현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때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날들’입니다.
‘때들’은 정해진 시기나 특정한 때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간직되다(צָפַן)’에 해당하는 동사는 감추어 두거나 보관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를 정해 두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그때를 알고 계신데도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심판의 지연이 강조되고, 두 번째 읽기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시기를 인간이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어느 쪽이든 다음 문장이 질문의 방향을 분명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그분의 날들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날들’은 문맥상 하나님이 자신의 정의를 드러내어 악을 심판하시는 날들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본문에 ‘심판’이라는 낱말이 직접 적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욥의 질문은 악인이 언젠가 죽는다는 일반적인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불의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날을 볼 수 없다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 있다는 사실과, 사람이 그 심판을 실제로 목격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원칙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 원칙이 현실 속에서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이어지는 2–12절은 욥이 왜 그토록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지 보여 줍니다.
경계석을 옮기는 사람들
욥이 처음 고발하는 것은 토지와 재산을 빼앗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경계들을 옮기고, 양 떼를 빼앗아 풀을 먹이네.」욥기 24:2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토지의 경계는 오늘날처럼 정밀한 지적도만으로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경계석이나 지형의 표지가 땅의 소유 범위를 나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경계를 마음대로 옮긴다는 것은 남의 땅을 자기 땅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신명기 19:14는 이웃의 경계를 옮기지 말라고 명령하고, 신명기 27:17은 이웃의 경계를 옮기는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잠언 22:28도 옛 경계석을 옮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규정들은 토지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가문의 생계와 존속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경계석을 옮기는 것은 작은 절도가 아닙니다. 한 가문이 대대로 의지해 온 삶의 터전을 빼앗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경계를 옮기는 행위 다음에 양 떼를 훔치는 행위를 나란히 놓습니다. 그들은 양을 훔친 뒤 단지 숨겨 두는 것이 아닙니다. 훔친 양을 자기 소유인 것처럼 기르며 그로부터 계속 이익을 얻습니다. 빼앗는 행위가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빼앗은 재산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생활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3절에서는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고아들의 나귀를 몰아가고, 과부의 소를 담보로 잡네.」욥기 24:3 · 본디새김
나귀와 소는 농경사회에서 단순한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짐을 나르고 밭을 갈며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 수단이었습니다. 특히 보호자나 경제적 기반이 약한 가정에서 가축을 잃는 것은 생계의 중요한 수단을 잃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욥은 악인들이 얼마나 많은 재물을 차지하는지보다, 그들이 누구의 재물을 빼앗는지 강조합니다. 고아와 과부, 구약의 율법에서 반복적으로 보호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입니다(출 22:22–24; 신 24:17). 이들은 고대 사회에서 경제적·법적 보호를 충분히 받기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일은 단지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취약함을 이용하는 행위입니다.
4절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예 길에서 밀려납니다.
「궁핍한 이들을 길에서 밀어내니,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함께 몸을 숨기네.」욥기 24:4 · 본디새김
‘길에서 밀어낸다’는 표현은 실제 도로에서 쫓아내는 행위를 나타낼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살아갈 길에서 배제되는 모습을 넓게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상 안전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악인들은 빼앗은 양 떼를 드러내 놓고 기릅니다. 반면 피해자들은 자신을 감추어야 합니다. 땅을 빼앗은 사람은 그 땅을 차지하고 살아가지만, 땅에서 밀려난 사람은 자신이 살 곳을 찾아 숨어야 합니다.
욥은 불의를 단순히 나쁜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하는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권력이 다른 사람의 삶의 공간을 빼앗는 현실로 묘사합니다.
이제 그의 시선은 밀려난 사람들의 일상으로 옮겨 갑니다.
광야의 들나귀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5절에는 뜻밖의 동물이 등장합니다.
「보게, 그들은 광야의 들나귀처럼 먹이를 부지런히 찾아 제 일을 하러 나가네. 황무지가 그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내주네.」욥기 24:5 · 본디새김
이 장면의 ‘그들’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문장만으로 완전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땅과 생계 수단을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뒤이어 굶주림과 헐벗음이 묘사되므로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들나귀는 길들여진 가축처럼 사람의 보호 아래 먹이를 공급받지 않습니다. 광야를 돌아다니며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욥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그들이 야만적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안정적인 생활의 터전에서 밀려나, 먹을 것을 찾아 헤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먹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먹일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 장면에서 광야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장소가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찾아가는 공간입니다.
6절은 그들이 어떤 노동을 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들은 들에서 그의 꼴을 베고, 악인의 포도밭에서 뒤늦게 남은 것을 거두네.」욥기 24:6 · 본디새김
‘그의 꼴’이 누구의 것인지, 뒤늦게 남은 포도를 거두는 일이 수확 이후의 이삭줍기와 같은 활동인지, 아니면 포도밭에서 벌어지는 다른 형태의 노동이나 약탈을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5–8절 전체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들판과 포도밭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 줍니다.
이들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먹을 것을 찾고 노동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안전한 생활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7–8절에서 욥은 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옷도 없이 벌거벗은 채 밤을 지내며, 추위에도 덮을 것이 없」습니다(24:7).
「산에서 쏟아지는 비에 젖고, 피할 곳이 없어 바위를 껴안네.」욥기 24:8 · 본디새김
사람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껴안아야 할 것은 따뜻한 이불이나 보호받는 거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묘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돌이 마지막 피난처입니다. 바위는 비바람을 완전히 막아 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위뿐입니다.
이들은 게으르기 때문에 굶주리는 것이 아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 일하면서도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보호를 얻지 못합니다.
이 점에서 욥의 묘사는 앞서 친구들이 제시한 설명과 충돌합니다. 친구들의 논리에서는 사람의 형편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욥이 보여 주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굶주리고, 잘못을 저질렀다는 설명도 없이 재산과 삶의 터전을 빼앗깁니다.
그들의 가난을 곧바로 죄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곡식을 나르면서 굶주리고, 포도즙을 짜면서 목말라하다
9절에서 욥은 다시 어린아이와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람들은 젖가슴에서 고아를 빼앗고, 가난한 이에게서 담보를 잡네.」욥기 24:9 · 본디새김
‘젖가슴에서 고아를 빼앗는다’는 표현은 어린아이를 보호자의 품에서 강제로 떼어 놓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이나 채무를 이용해 아이를 빼앗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지만, 정확히 어떤 제도나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경계석을 옮기는 사람들은 땅을 빼앗았습니다. 가축을 몰아가는 사람들은 생계 수단을 빼앗았습니다. 이제 어린아이가 보호자의 품에서 빼앗깁니다.
불의는 단지 재산의 영역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과 가족관계까지 침범합니다.
이어지는 10–11절에는 이 장에서 가장 강렬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가난한 이들은 옷도 없이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고, 굶주린 채 곡식 단을 나르네.」욥기 24:10 · 본디새김
「그들의 나무 줄 사이에서 기름을 짜고, 포도즙 틀을 밟으면서도 목말라하네.」욥기 24:11 · 본디새김
이 사람들이 생산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입니다. 곡식은 배고픔을 해결합니다. 기름은 음식과 생활에 사용됩니다. 포도즙은 마실 것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생산하는 사람들은 그 풍요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불운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생산된 풍요와 그것을 생산한 사람의 삶이 분리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욥은 그 분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상세한 경제적 구조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의 강탈과 착취, 뒤의 굶주림을 한 장면 안에 놓아 그 불의한 현실을 독자가 직접 보게 합니다.
이 대목에서 12절은 공간을 바꿉니다. 앞에서는 광야와 들판, 포도밭과 산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도성의 소리가 들립니다.
「도성에서 사람들이 신음하고, 치명상을 입은 이들의 목숨이 도움을 외치는데도, 하나님은 그런 부당함을 문제 삼지 않네.」욥기 24:12 · 본디새김
그들의 신음은 소리 없는 고통이 아닙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하나님이 피해자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그렇게 심각한 잘못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범죄로 다루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탄식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실제로 정의에 무관심한 분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관찰하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개입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면, 고통받는 사람들의 외침이 왜 이렇게 오래 지속됩니까?
조금 더 깊이
11절의 ‘그들의 나무 줄’에서 소유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올리브기름을 짜는 작업 공간이나 시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구조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신명기 24:19–22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본문은 밭에서 곡식을 거둔 뒤 남겨진 것을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몫으로 두라고 명령합니다. 포도밭과 올리브나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서 수확은 땅을 소유한 사람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욥이 묘사하는 현실은 그런 이상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12절의 ‘부당함’에 해당하는 티플라(תִּפְלָה)는 어리석음이나 그릇됨, 잘못된 일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문제 삼지 않는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 잘못을 고려하거나 귀속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같은 ‘잘못’이라는 명사는 욥기 1:22에도 나타납니다. 그곳에서는 욥이 재앙을 당하고도 하나님께 잘못을 돌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두 구절의 반복이 의도된 문학적 연결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책의 처음과 이 장에서 같은 표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용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점에서 욥의 질문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던졌던 질문과 통합니다. 하박국 1:2–4에서 예언자는 폭력과 불의를 보면서 여호와야훼께서 왜 듣지 않으시는지, 왜 악행을 그대로 두시는지 묻습니다. 이것은 욥기 24장이 하박국을 직접 인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믿음과 현실의 불의가 충돌할 때 생기는 같은 신학적 질문을 다룹니다. 시편 10편에도 비슷한 긴장이 있습니다. 악인은 가난한 사람을 괴롭히면서 하나님이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10:8–11). 시인은 그런 현실 속에서 여호와야훼께 일어나 손을 드시고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말아 달라고 호소합니다(10:12). 시인은 악인이 언제 심판받을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라는 믿음 때문에 지금의 불의를 그분께 가져갑니다.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
13절부터 장면이 다시 바뀝니다.
앞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낮과 밤을 보았습니다. 이제 욥은 어둠을 이용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빛에 반역하는 자들 가운데 있네. 빛의 길들을 인정하지 않고, 빛의 오솔길들에 머물지 않네.」욥기 24:13 · 본디새김
빛은 사람의 행동을 드러냅니다. 빛이 비치면 감추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빛에 반역한다는 말은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 표현을 추상적인 도덕적 판단으로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세 종류의 범죄자를 차례로 등장시킵니다. 먼저 「동틀 무렵 일어나 가난하고 궁핍한 이를 죽이」는 살인자입니다(24:14). 다음은 간음하는 사람입니다.
「간음하는 자의 눈은 황혼을 기다리며 『어떤 눈도 나를 보지 못하겠지』 하고, 그는 얼굴에 가리개를 두르네.」욥기 24:15 · 본디새김
마지막으로 「어둠 속에서 집들을 뚫고 들어가」는 도둑이 등장합니다(24:16).
욥은 하루의 시간이 바뀌는 순간들을 따라 범죄자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행동할 때를 계산하고, 남의 눈을 피할 방법을 찾습니다.
15절의 간음하는 사람의 말은 이 장의 처음과 연결됩니다. 욥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들을 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24:1). 이제 악인은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쪽에서는 정의가 드러나는 날을 기다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의 악이 드러나지 않기를 기다립니다.
같은 어둠이지만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유로 어둠을 경험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밤에 옷이 없어 추위에 떨고 바위를 껴안습니다(24:7–8). 범죄자들은 바로 그 어둠을 이용해 자신의 행동을 감춥니다.
한쪽은 어둠에서 보호받을 곳을 찾고, 다른 한쪽은 어둠에서 들키지 않을 곳을 찾습니다.
17절은 이들의 삶을 역설적인 표현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들 모두에게 아침은 죽음의 그늘이네. 그들은 죽음의 그늘이 주는 공포들을 잘 알기 때문이네.」욥기 24:17 · 본디새김
보통 아침은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찾아오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아침은 오히려 죽음의 그늘과 같습니다. 그들은 어둠에 익숙하고, 빛이 드러나는 순간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이 악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선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을 찾고, 얼굴을 가리며, 낮에는 자신을 감춥니다.
인간의 눈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욥은 이들의 죄가 하나님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알고 계실 악행이 왜 계속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악인은 결국 사라지는가?
18절에 이르면 욥의 말은 갑자기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악인들이 타인의 재산을 빼앗고 범죄를 감추며 살아가는 모습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몰락을 말하는 듯한 표현이 이어집니다.
「그는 물 위에서 가볍게 떠가네. 땅에 있는 그들의 밭은 저주를 받고, 그는 포도밭으로 가는 길로 발길을 돌리지 않네.」욥기 24:18 · 본디새김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빼앗듯, 스올은 죄지은 이들을 빼앗네.」욥기 24:19 · 본디새김
「태가 그를 잊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빨아먹으며, 그는 더 이상 기억되지 않네. 불의는 나무처럼 부러지네.」욥기 24:20 · 본디새김
이 세 구절은 악인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기억조차 남지 않는다는 그림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앞부분과 비교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욥은 줄곧 악인들이 처벌받지 않고 불의를 계속 저지르는 현실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악인이 반드시 멸망한다고 확언한다면, 친구들이 반복해 온 설명과 무엇이 다릅니까?
악인의 몰락은 선언인가, 소망인가, 반론인가
본문은 세 가지로 읽힙니다. 욥 자신의 선언(악인이 결국 사라지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악인에게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는 소망이나 저주, 친구들이 주장해 온 악인의 운명을 욥이 자신의 발언 속에 끌어들여 반박하는 흐름입니다. 세 읽기 모두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장의 연결과 주어의 변화가 쉽지 않아 하나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8–24절을 앞부분과 아무런 긴장 없이 하나의 단순한 교훈으로 정리하면, 이 장이 실제로 지닌 복잡함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8절에서 악인은 물 위에 가볍게 떠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물에 떠밀려 쉽게 사라지는 불안정한 존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비유의 대상과 의미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19절에서는 눈이 녹아 흐르던 물이 뜨거운 날씨 속에서 사라지듯 죄인들도 스올에 붙잡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올은 죽은 자들의 영역입니다. 이 구절 자체가 죽음 이후 악인에게 어떤 구체적인 형벌이 임하는지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20절에서는 악인의 기억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단순한 죽음보다 더 큰 상실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차지했던 지위와 그를 기억하는 관계까지 사라지는 것입니다.
‘태가 그를 잊는다’는 표현에는 강한 역설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시작된 가장 친밀한 자리조차 그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고아들이 보호자의 젖가슴에서 빼앗겼다는 장면(24:9)을 떠올리면, 한쪽에서는 약한 사람에게서 생명의 보호가 빼앗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불의한 사람의 기억이 생명의 근원에서조차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다만 이러한 이미지들이 악인에게 실제로 이미 일어나는 운명을 설명하는지, 앞으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심판을 표현하는지는 구별해 두어야 합니다.
불임 여인과 과부를 해치는 사람 (24:21)
21절에서는 갑자기 악인의 행동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 여인을 뜯어먹고, 과부에게 선을 베풀지 않네.」욥기 24:21 · 본디새김
‘뜯어먹다(רָעָה)’는 본래 가축이 풀을 뜯거나 먹는 행동과 연결되는 동사입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의 먹이처럼 취급하는 폭력적인 비유로 사용됩니다.
불임 여인과 과부는 고대 사회에서 사회적·경제적 보호 기반이 약해질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특별히 의지할 가족이나 자손을 통한 보호가 취약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가해를 고발합니다. 악인이 피해자들을 단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약한 처지를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21절이 18–20절의 몰락 묘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악인이 그렇게 심판받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앞에서 이어진 악인의 행동 묘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욥이 말하는 악은 추상적인 도덕적 결함이 아닙니다.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힘 있는 사람도 안전하지 않다 (24:22–24)
22절에서는 권력의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강한 이들을 끌어가네. 그가 일어서면 사람은 제 목숨을 확신하지 못하네.」욥기 24:22 · 본디새김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는 논쟁적입니다. 앞에서 이어진 악한 사람을 가리킨다면, 이 구절은 악인이 자신의 힘으로 다른 강한 사람들까지 제압하며 누구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 하나님을 주어로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강한 사람들을 자신의 능력으로 끌어가시고 그들의 안전을 흔드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의 차이는 뒤따르는 23절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가 그에게 안전을 주어 그가 의지하게 되지만, 그의 눈은 그들의 길 위에 있네.」욥기 24:23 · 본디새김
하나님이 안전을 주시는 분이라고 읽으면, 악인이 일정 기간 안정적으로 살아가도록 허락하시면서도 그의 행실을 지켜보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 경우 욥의 질문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반대로 악인이 힘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안전을 보장하는 상황으로 읽으면 권력과 인간의 불안정한 삶이 강조됩니다. 히브리어에서 대명사의 지시 대상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가능성을 쉽게 판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앞부분의 논쟁과 연결하면, 하나님의 시선에 관한 읽기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욥은 24장 1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그분의 날들을 보지 못한다고 물었습니다. 23절을 하나님이 악인의 길을 보시는 것으로 읽으면 두 시선이 대조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길을 보고 계십니다.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이 정의로운 행동으로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24절은 악인의 마지막을 곡식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잠시 높아졌다가 없어지고, 낮아져 다른 모든 이들처럼 움츠러들며, 곡식 이삭의 머리처럼 시드네.」욥기 24:24 · 본디새김
하지만 여기서도 ‘다른 모든 이들처럼’이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습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악인에게만 특별히 임하는 형벌입니까, 아니면 모든 인간이 맞이하는 일반적인 운명입니까?
앞에서 욥은 풍요롭게 산 사람과 좋은 것을 누려 보지 못한 사람이 함께 흙 아래 눕는다고 말했습니다(21:23–26). 그 기억을 가지고 24절을 읽으면, 악인이 결국 죽는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눈앞에서 실현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문제가 다시 떠오릅니다.
곡식 이삭은 언젠가 시들고 잘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지금 굶주리는 사람이 정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18–24절에서 악인의 몰락을 실제적인 운명으로 읽더라도, 그것으로 이 장 처음의 질문이 모두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욥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악인도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불의가 일어나는 동안 하나님이 어떻게 정의를 행하시는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첫 번째 읽기는 악인이 지금 불의를 저지르고 번영하더라도 결국 사라지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욥은 악인의 현재 모습과 최종적인 몰락을 함께 인정하는 셈입니다. 두 번째 읽기는 18절의 ‘그들의 밭은 저주를 받고’라는 표현을 저주받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그러면 뒤따르는 멸망의 이미지도 악인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고대 그리스어 번역에서도 뒷받침됩니다. 칠십인역은 18절의 저주를 소망하는 형태로 나타내며,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히브리어 본문과 다른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세 번째 읽기는 친구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악인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의 재산은 저주받으며,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아야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반론의 흐름 속에서 읽는 방식입니다. 다만 본문에는 여기서부터 친구들의 말을 인용한다는 명시적인 표시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가능성을 확정된 사실처럼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내 말이 거짓이라고 입증하겠는가
욥은 매우 강한 도전으로 말을 마칩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누가 내가 거짓말한다고 입증하고, 내 말을 헛것으로 만들겠는가?」욥기 24:25 · 본디새김
이것은 욥이 자신의 모든 신학적 질문에 답을 얻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제시한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 말입니다.
그는 경계석을 옮기는 사람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고아의 가축을 빼앗는 사람들과 과부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굶주리면서 일하는 사람들과 포도즙을 짜면서도 목말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또한 빛을 피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친구들의 주장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욥이 구체적으로 18–24절의 어떤 읽기를 전제로 자신을 변호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도전의 힘은 그가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 대한 관찰을 제시했다는 데 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므로 악인은 벌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욥은 악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과 피해자들의 고통을 제대로 설명해야 합니다.
악인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선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욥기 24장에서 가장 무거운 질문은 12절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정의를 행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의가 계속되는 현실을 보며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을 하나님과 무관한 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 악을 알고 계시며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분께 책임 있는 대답을 요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악인의 범죄를 보지 못한 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확신한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신음을 덮어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다는 것은 불의를 설명해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불의를 하나님 앞에서도 불의라고 부를 수 있는 믿음을 포함합니다.
욥의 질문은 아직 열려 있습니다.
한쪽에는 곡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굶주린 사람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포도즙이 흐르고, 다른 한쪽에는 목마른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허기와 갈증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욥은 이 장면을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어찌하여 전능자에게 때들이 간직되어 있지 않으며, 그를 아는 이들은 그의 날들을 보지 못하는가?」
욥기 24장은 그날이 언제인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곡식 단을 나르는 사람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의 눈앞에 남겨 둡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