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29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보호받고 다른 사람을 지키던 날들

욥이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한때 부유했습니다. 많은 자녀가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성읍의 지도자들도 그의 말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잃은 욥이 과거를 돌아봅니다.

그런데 그의 회상은 재산이나 명예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그리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키던 날들」(2절)입니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전처럼 하나님의 보호와 친밀함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회상은 여기서 예상 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 풍요와 권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를 길게 설명합니다.

욥이 그리워하는 과거는 자신이 보호받던 시절인 동시에, 자신도 다른 사람을 보호할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욥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자랑하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삶이 지금처럼 무너지기 전,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증언하려는 것일까요?

29장은 그 질문을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등불 아래 있던 천막에서 시작해 성읍의 성문으로 나아가고,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다음, 평안한 미래에 대한 욥의 기대를 보여 줍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 가운데 왕처럼 앉아 있으면서도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던 한 사람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729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던 날들

욥기 29:1–6 본문 →

욥이 다시 시를 읊으며 말했다.욥기 29:1 · 본디새김

29장의 도입은 27:1과 같은 형식입니다. 욥이 다시 자신의 마샬을 들어 올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샬은 단순한 잠언 하나라기보다 격조를 갖춘 시적 발언을 가리킵니다. 28장이 지혜의 길을 묻는 노래였다면, 29장은 욥 자신의 지나간 삶을 돌아보는 회상입니다.

그의 첫마디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아, 내가 지나간 달들에 살던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지키던 날들처럼,」욥기 29:2 · 본디새김

여기서 욥은 과거의 하루가 아니라 ‘지나간 달들’을 그리워합니다. 그 시절이 잠깐 스쳐 지나간 행운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진 삶이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지키다’라는 말은 단순히 좋은 일이 생기게 한다는 뜻보다 넓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관심을 기울여 돌본다는 의미를 담습니다.

욥은 과거의 평안을 자신의 능력만으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 전체를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 보호가 사라진 것처럼 느낍니다.

독자는 이 지점에서 욥기 1–2장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에게 닥친 재앙도 그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욥 자신은 그 장면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29:2는 하나님이 실제로 욥을 완전히 버리셨다는 선언이 아니라, 욥이 경험하는 상실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욥이 하나님의 보호를 잃은 것처럼 느끼는 경험을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 그 상실감은 실제입니다.

3절은 그 보호를 빛으로 묘사합니다.

「그의 등불이 내 머리 위에서 비추고, 그의 빛으로 내가 어둠 속을 걷던 때처럼,」욥기 29:3 · 본디새김

그는 하나님의 빛으로 ‘어둠 속을 걸었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삶에도 어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비추시는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등불은 먼 곳 전체를 한꺼번에 보여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걸어가는 사람의 앞을 비추어 길을 잃지 않게 합니다. 모든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평안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비추신다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빛을 추상적인 교훈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의 머리 위에서 비추던 등불로 기억합니다.

4절에서는 그 기억이 더욱 친밀해집니다.

「내가 무르익던 날들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내 천막 위에 머물던 때처럼,」욥기 29:4 · 본디새김

‘무르익던 날들’은 문맥에 따라 젊은 시절 또는 인생이 성숙하고 무르익은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욥이 정확히 몇 살 때를 회상하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삶이 한창 충실하고 풍성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סוֹד⁩)’으로 옮긴 말은 친밀한 모임, 은밀한 의논, 가까운 관계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뜻할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과 그런 가까운 관계 안에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그 친밀함이 머물던 곳은 ‘내 천막’, 곧 욥과 가족이 살아가는 집입니다. 욥은 자기 가족이 머무는 일상의 공간이 하나님의 친밀함 아래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5절은 그 기억을 가족의 모습으로 바꿉니다.

「전능자가 아직 나와 함께 있고, 내 아이들이 내 둘레에 있던 때처럼,」욥기 29:5 · 본디새김

욥은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워하는 장면에서 자녀들은 자신의 둘레에 있습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전능자가 자신과 함께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둘레에 있던 때입니다.

6절에서 비로소 물질적인 풍요가 등장합니다.

「내 발이 엉긴 젖에 씻기고, 바위가 내 곁에 기름 줄기를 쏟아 내던 때처럼 지낼 수 있다면.」욥기 29:6 · 본디새김

발을 엉긴 젖에 씻는다는 것은 젖과 유제품이 너무 풍성하여 물처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과장된 풍요의 표현입니다. 바위는 단단하고 메마른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바위에서 기름이 흘러나옵니다. 이러한 표현은 어려워 보이는 환경에서도 풍성한 공급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런데 2–6절의 배열을 보면 욥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기억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보호를 말했고, 하나님의 빛을 말했으며, 친밀함과 함께하심을 말했습니다. 가족이 가까이 있던 모습을 떠올린 다음에야 풍요를 이야기합니다.

욥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족과 일상이 하나의 평안한 세계를 이루던 삶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8:28에서도 하나님은 어둠을 밝히시는 분으로 고백되고, 잠언 6:23에서는 명령과 가르침이 등불과 빛으로 묘사됩니다. ‘무르익던 날들(⁨חֹרֶף⁩)’에는 히브리어 호레프가 사용되는데, 계절과 수확의 이미지를 지닌 말입니다. ‘친밀함’은 히브리어 소드로, 잠언 3:32에서는 정직한 사람과 여호와야훼의 친밀한 관계를, 시편 25:14에서는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그분이 나누시는 친밀함을 가리킵니다. 5절의 ‘아이들’(네아라이)은 어린 자녀나 젊은 사람들, 종들을 가리킬 수 있어 반드시 자녀만을 뜻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욥이 자녀를 잃은 이야기의 맥락에서는 가족의 상실을 떠올리게 하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6절의 바위와 기름은 올리브나무가 자라는 돌 많은 땅에서 기름을 풍부하게 얻는 현실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신명기 32:13에도 하나님이 반석에서 꿀을, 단단한 바위에서 기름을 먹이시는 이미지가 나옵니다.

성읍의 성문에서 모두가 침묵하던 이유

욥기 29:7–11 본문 →

이제 장면이 바뀝니다.

「내가 성읍의 성문에 나가 광장에 내 자리를 마련할 때면,」욥기 29:7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거래하고, 지역의 문제를 의논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재판을 진행하던 공적인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욥이 성문에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은 그가 공동체의 공적인 일에 참여하며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본문이 욥의 정확한 관직이나 공식 직함을 밝히지는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나를 보고 몸을 숨겼고, 노인들은 일어나 서 있었네.」욥기 29:8 · 본디새김
「고관들은 말을 멈추고, 손바닥을 입에 대었네.」욥기 29:9 · 본디새김
「지도자들의 목소리는 숨어 버렸고, 그들의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었네.」욥기 29:10 · 본디새김

각기 다른 신분과 연령의 사람들이 모두 욥에게 반응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나이는 존중받는 중요한 근거였습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들까지 욥이 나타나면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욥의 권위가 단순히 나이나 재산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여기서 침묵은 공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문맥에서는 욥의 판단과 발언에 대한 존중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그 권위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귀는 듣고 나를 복되다 했으며, 눈은 보고 나를 위해 증언했네.」욥기 29:11 · 본디새김

‘증언했다’는 말에는 법정의 언어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감추어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실제로 살아온 삶을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그 증언은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듣고 본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행위가 무엇이었는지 밝혀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1:18–21에서는 장로들이 성문에서 사건을 다루고, 룻기 4:1–12에서도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장로들과 함께 법적 문제를 해결합니다. 물론 욥이 회상하는 사람들의 평가가 그의 모든 행동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욥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의로움이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났으며, 그것을 사람들이 확인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욥을 존경한 까닭

욥기 29:12–17 본문 →

「내가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가난한 이를 건져 주고, 도울 이 없는 고아를 건져 주었기 때문이네.」욥기 29:12 · 본디새김

사람들이 욥을 복되다고 하고 그를 위해 증언한 이유가 여기에서 제시됩니다. 욥은 자신의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존경받았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내세우는 것은 약한 사람들을 위해 행했던 일입니다.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은 자신의 곤경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경제적 보호뿐 아니라 사회적·법적 보호를 받기도 어려웠습니다. 욥은 그런 사람들을 ‘건져 주었다’고 말합니다. 위험이나 압박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뜻입니다.

「죽어 가는 이의 축복이 내게 이르렀고, 나는 과부의 마음이 기쁨으로 외치게 했네.」욥기 29:13 · 본디새김

‘죽어 가는 이’는 실제로 죽음을 앞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삶의 기반이 무너져 파멸 직전에 놓인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욥의 도움은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도달했습니다.

욥은 과부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를 묘사합니다.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마음에서 기쁨의 소리가 나오게 한 것입니다.

「나는 의로움을 입었고, 의로움은 나를 입었네. 나의 공정함은 겉옷과 두건 같았네.」욥기 29:14 · 본디새김

옷은 한순간 들었다가 내려놓는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움을 옷처럼 입는다는 것은 의로움이 욥의 공적인 삶과 행동을 특징짓는 것이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표현에서 뜻밖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욥이 의로움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로움이 욥을 입습니다. 욥은 자신이 필요할 때 의로운 행동을 몇 가지 선택했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이 자신이라는 사람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욥에게 의로움은 가끔 행하는 선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어지는 ‘공정함’은 법적인 판단, 정의, 공정한 처리를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27:2에서 욥이 하나님께 빼앗겼다고 호소한 자신의 ‘권리’와도 연결됩니다. 그는 평생 타인의 권리를 지키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고난당할 때에는 자신의 권리가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눈먼 이에게 눈이었고, 다리 저는 이에게 발이었네.」욥기 29:15 · 본디새김

눈먼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스스로 하기 어려운 일을 도와주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가진 힘은 다른 사람이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나는 궁핍한 이들에게 아버지였고, 내가 알지 못하는 송사도 살펴보았네.」욥기 29:16 · 본디새김

욥은 가족이 아닌 궁핍한 사람들에게도 아버지 같은 보호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문제만 다루지 않았습니다. ‘알지 못한다’는 말은 송사의 내용이나 사건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낯선 사람의 사건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본디새김처럼 송사 자체를 살펴보았다고 이해하면 욥이 자신의 판단을 형성하는 과정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는 사건을 모르기 때문에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르면서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친구들이 욥을 대하는 방식과도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재앙이 닥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욥의 죄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공정한 사람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는 불의한 자의 이빨을 부수고, 그의 이빨 사이에서 먹잇감을 내던졌네.」욥기 29:17 · 본디새김

불의한 사람은 맹수처럼 묘사됩니다. 그 먹잇감은 불의한 사람에게 빼앗기거나 억압받는 약한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욥이 실제로 사람의 턱을 부수었다는 기록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법적·사회적 맥락에서 보면 불의한 자의 압박을 저지하고 피해자를 구해 내는 행동을 강렬한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과 그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거나 억압하는 불의를 저지하는 것은 서로 연결되지만 같은 행동은 아닙니다. 욥은 두 가지를 모두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르짖는 사람을 건져 주었고, 그 사람을 붙잡고 있는 이빨도 부수었습니다.

특히 엘리파즈는 욥기 22:6–9에서 욥이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지 않았으며, 과부와 고아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29장의 욥은 정확히 반대되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29장의 회상은 단순한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친구들이 제기한 혐의에 대한 욥의 구체적인 반박입니다.

물론 그 설명은 욥 자신의 발언이므로, 모든 세부사항을 외부에서 독립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욥기 첫머리에서 하나님이 그를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다는 사실은 독자가 그의 증언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또한 7–10절에서는 사람들의 존경을 묘사하지만, 12–17절에서는 그가 약자를 위해 했던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사회적 지위보다 그 지위를 사용하는 방식이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아와 과부는 구약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신명기 10:18은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신명기 24:17은 그들의 권리를 굽게 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욥은 구약이 하나님의 정의와 연결하여 중요하게 다루는 일을 실제로 행했던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합니다. 14절의 히브리어 본문에서도 ‘입다’라는 동사가 두 번 사용되며, 두 번째에는 의로움이 욥을 입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공정함(⁨מִשְׁפָּט⁩)’은 히브리어 미슈파트이고, 16절의 ‘살펴보았네’(에흐케레후)는 조사하고 탐구한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나는 내 둥지에서 평안히 죽을 줄 알았다

욥기 29:18–20 본문 →

욥은 이제 자신이 과거에 품었던 미래의 기대를 들려줍니다.

「나는 말했네. 『나는 내 둥지에서 숨을 거두고, 모래처럼 내 날들을 늘려 가리라.』」욥기 29:18 · 본디새김

그는 지금 자신이 반드시 그렇게 살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회상합니다. 둥지는 새가 자신과 새끼들을 위해 마련하는 안전한 자리입니다. 자신이 속한 자리에서 가족과 함께 오래 살다가 평안히 생을 마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뒤의 ‘모래처럼 내 날들을 늘려 가리라’라는 표현에는 번역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홀(⁨חוֹל⁩)은 일반적으로 모래를 뜻하며, 이 문맥에서는 모래알처럼 수많은 날을 살아가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단어를 장수와 재생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새와 연결해 읽는 전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서 그러한 신화적 존재를 반드시 가리킨다고 확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 뿌리는 물을 향해 뻗어 있고, 이슬은 내 가지에서 밤을 지내리라.』」욥기 29:19 · 본디새김

뿌리에서는 물을 공급받고, 가지에는 이슬이 내립니다. 아래에서도 위에서도 생명을 유지할 조건이 마련됩니다. 욥은 자신이 그런 나무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영예는 내게 새롭고, 내 활은 내 손에서 새로워지리라.』」욥기 29:20 · 본디새김

영예가 새롭다는 것은 존경과 명예가 낡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활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자신의 힘이 약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리라는 기대를 나타냅니다. 둥지는 안전한 삶의 자리입니다. 물을 향한 뿌리는 지속적인 생명력입니다. 새로워지는 활은 쇠하지 않는 힘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미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욕심을 부려 무리한 꿈을 꾸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평안하고 안정된 삶이 이어지리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욥의 의로움이 거짓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평안한 노년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삶이 반드시 그런 노년을 보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던 시절에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같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고난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풍요가 하나님의 동행을 나타내는 유일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고난이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29장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욥이 잃어버린 것은 지나간 행복만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다고 믿었던 미래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나무 이미지는 시편 1:3에서 물가에 심긴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모습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내 말을 비처럼 기다렸다

욥기 29:21–24 본문 →

18–20절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회상한 욥은 다시 성읍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사람들은 「내 조언을 들으려고 잠잠했네」(21절). 7–10절의 침묵이 다시 나타나지만, 이번에는 그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욥의 조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말한 뒤에는 그들이 다시 말하지 않았고, 내 말은 그들 위로 방울져 내렸네.」욥기 29:22 · 본디새김

욥의 말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묘사됩니다. 23절에서 그 이미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고, 봄비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렸네.」욥기 29:23 · 본디새김

봄비는 곡식이 자라고 익어 가는 시기에 필요한 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단순히 욥의 말솜씨가 뛰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말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구하고, 고아를 돕고, 과부를 위로하고, 알지 못하는 송사를 조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조언도 신뢰받았습니다. 욥의 권위는 말과 행동이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내가 그들에게 웃어 보이면 그들은 믿지 못했고, 그들은 내 얼굴의 빛을 흐리게 하지 않았네.」욥기 29:24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해석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문장은 욥이 워낙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친근한 미소가 뜻밖의 호의처럼 느껴졌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사람들이 절망하거나 불안해할 때 욥이 웃어 보이며 격려했지만, 그들이 처음에는 그런 낙관적인 반응을 믿기 어려워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문장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욥의 밝은 표정과 권위가 사람들에 의해 꺾이거나 무시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또는 그의 미소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었으며, 그 밝은 모습을 소중히 여겼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하나를 결정할 만큼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에게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거나 격려할 수 있는 얼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욥은 그 역할을 하나의 장면으로 묶습니다.

왕처럼 앉아 있었지만,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했다

욥기 29:25 본문 →

「나는 그들이 갈 길을 골라 주고 우두머리로 앉았네. 군대 가운데 있는 왕처럼 머물렀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 같았네.」욥기 29:25 · 본디새김

하나는 왕입니다.

다른 하나는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길을 고른다는 것은 실제 도로를 선택하는 일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왕이 군대 가운데 있으면 사람들은 그의 명령과 판단을 따릅니다.

그런데 구절의 마지막에서 전혀 다른 장면이 등장합니다.

왕은 명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위로자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들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높은 자리에서 내리는 판단을 떠올리게 하고, 다른 하나는 고통받는 사람 가까이 다가가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욥은 두 가지를 모두 자신의 모습으로 회상합니다.

이 지점에서 욥기 16:2의 말이 떠오릅니다. 욥은 친구들을 고통스러운 위로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욥의 곁에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한 말은 욥을 위로하기보다 더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72:12–14에서는 왕이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가난한 사람과 도울 이 없는 궁핍한 사람을 구하는 모습이 나오고, 욥기 29:12에서도 같은 행위가 등장했습니다. 두 본문 사이에 직접적인 문학적 의존 관계를 확정할 필요는 없지만, 권위를 가진 사람이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구약의 공통된 가치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던 사람의 기억

욥기 29:1–25 본문 →

욥기 29장은 하나님의 등불로 시작해서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처음에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지키셨다고 말합니다. 중간에서 욥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과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사람이 같은 인물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그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자신의 내적인 동기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자신만을 위한 울타리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29장은 그 단절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가까웠고, 가난한 사람을 도왔고, 공정하게 판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왜 이렇게 무너졌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본문은 그의 슬픔을 성급하게 교정하지 않습니다. 29장은 그 목소리를 길게 들려줍니다.

그 변화는 단순히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 존경받던 사람이 무시당하는 변화만이 아닙니다. 한때 다른 사람의 슬픔을 덜어 주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슬픔을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왕처럼 존경받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의 회상은 왕의 권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던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 그 사람 자신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