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옳은 말이 잘못된 위로가 될 때

욥은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자신에게는 아무런 쉼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입을 여는 사람은 테만 사람 엘리파즈입니다.

그런데 엘리파즈는 처음부터 욥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이 과거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기억합니다. 「자네의 말은 비틀거리는 이를 일으켜 세웠고, 자네는 꺾이는 무릎들을 튼튼하게 해 주었네.」

그러나 몇 마디 뒤, 그의 말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죄 없는 이가 누구 하나 망한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은 얼핏 하나님의 공의를 확신하는 신앙의 표현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자신의 자녀와 재산을 잃고, 온몸이 병들어 고통받는 욥입니다. 더구나 독자는 이미 욥의 고난에 정당한 까닭이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엘리파즈의 문제는 하나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아는 진리를 가지고 자신이 모르는 욥의 고난까지 설명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지혜가 있고, 경험이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밤에 경험한 신비로운 환상까지 들려줍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쉽게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옳게 들리는 말들이 어떻게 한 사람의 현실을 잘못 해석하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까? 진실한 위로의 마음은 어디에서 상대를 판단하는 태도로 바뀝니까?

엘리파즈의 첫 번째 발언은 5장까지 이어집니다. 4장은 그 첫 부분으로, 욥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하여 삶의 경험을 거쳐 밤에 들은 신비로운 음성에 이릅니다. 그의 말이 점점 더 큰 권위를 얻어 가는 과정 자체가 이 장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54장 본문 읽기 →

남을 일으켜 세우던 사람이 쓰러졌을 때

욥기 4:1–6 본문 →

엘리파즈는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한다

엘리파즈의 첫마디에는 망설임이 담겨 있습니다.

「자네에게 말 한마디 건네 보면 자네는 지치겠는가? 하지만 누가 말을 억누를 수 있겠는가?」욥기 4:2 · 본디새김

그는 욥이 이미 지쳐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욥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병들어 있었고, 일곱 날과 일곱 밤을 함께 앉아 있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파즈는 자신이 말을 시작하는 일조차 욥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욥의 탄식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 표현을 처음부터 오만한 태도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친구가 절망적인 말을 쏟아 낼 때, 그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마음에서 말을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말을 해야 한다는 확신이 어떤 말이 필요한지를 아는 지혜와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엘리파즈는 욥을 돕기 위해 입을 열지만, 그의 말은 곧 욥의 고통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욥이 과거에 했던 일은 참으로 귀했다

3–4절에서 엘리파즈는 욥의 과거를 떠올립니다.

「보게, 자네는 많은 이를 타일렀고, 힘없이 늘어진 손들을 굳세게 해 주었네.」욥기 4:3 · 본디새김
「자네의 말은 비틀거리는 이를 일으켜 세웠고, 자네는 꺾이는 무릎들을 튼튼하게 해 주었네.」욥기 4:4 · 본디새김

여기에서 엘리파즈는 욥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에 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기억합니다. 욥은 약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던 사람이었습니다. 절망한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이들이 다시 설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힘없이 늘어진 손’과 ‘꺾이는 무릎’은 몸의 모습을 통해 내면의 절망을 나타냅니다. 손에 힘이 풀리고 무릎이 꺾이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일을 계속하거나 똑바로 서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욥의 말이 그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단지 올바른 원칙을 가르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은 비틀거리는 사람이 다시 일어서도록 실제로 도왔습니다.

이런 사람이 지금은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잃었습니다.

엘리파즈는 이 역전을 정확히 알아봅니다.

「하지만 이제」라는 말이 위로를 바꾼다

5절은 「하지만 이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제 고난이 자네에게 닥치니 자네는 지쳤고, 자네에게 닿으니 자네는 겁에 질렸네.」욥기 4:5 · 본디새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았을 때에는 그들을 격려할 수 있었지만, 막상 자신이 고난을 당하자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적어도 두 방향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격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잘 위로하던 자네가 아닌가? 지금도 자네가 가르쳤던 진리를 기억하고 용기를 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책망입니다. 남에게는 훌륭한 말을 하면서 정작 자신에게 고난이 오자 무너졌으니, 자네의 신앙이 말만큼 견고하지 못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입니다.

문장 자체는 두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둡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7–11절까지 읽으면 엘리파즈가 단순히 욥을 격려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5절의 「자네에게 닿으니」(⁨נָגַע⁩)는 앞서 고발자가 하나님께 욥의 소유와 몸에 손을 뻗어 치라고 요구할 때 쓰인 동사와 같습니다(1:11, 2:5). 독자는 욥에게 무엇이 닥쳤는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그 사정을 모릅니다.

그는 욥을 덮친 재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 재난에 욥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친구들의 말에서 반복해서 나타날 중요한 차이입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을 아는 것과 그 일이 일어난 이유를 아는 것은 다릅니다.

경외와 온전함은 이제 욥을 지탱할 수 없는가

6절에서 엘리파즈는 묻습니다.

「자네의 경외가 자네의 확신이요, 자네 길의 온전함이 자네의 희망이 아닌가?」욥기 4:6 · 본디새김

여기서 ‘경외’는 문맥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를 가리키고, ‘온전함’은 욥이 살아온 길의 올곧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두 표현은 독자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이미 책의 시작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파즈의 질문은 무엇을 뜻합니까?

첫째, 욥의 믿음과 올곧은 삶이 여전히 그를 지탱할 근거가 된다는 격려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자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왔으니 그 사실을 붙들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둘째, 욥이 절망하는 모습이 그의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자네의 경외와 온전함이 참된 것이었다면 이렇게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의미입니다.

이 두 의미는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엘리파즈는 진심으로 욥이 다시 확신을 얻기를 바라면서도, 욥의 절망을 신앙의 부족함처럼 바라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한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욥은 실제로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온전함을 확인하셨습니다(2:3).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출생을 저주할 만큼 깊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따라서 욥이 지금 두려워하고 탄식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경외심과 온전함이 거짓이었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엘리파즈의 질문은 욥이 잃어버린 확신을 회복하도록 돕는 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말에서 그는 더 위험한 추론으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3–4절의 표현은 이사야 35:3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약해진 손을 굳세게 하고 비틀거리는 무릎을 튼튼하게 하라고 권합니다. 두 본문은 비슷한 히브리어 표현을 사용하여 낙심한 사람을 격려하는 행동을 묘사합니다. 다만 한 본문이 다른 본문을 직접 인용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5절의 「자네에게 닿으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가, 곧 ‘닿다’, ‘손대다’, ‘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내가 본 바로는」 — 경험이 법칙이 될 때

욥기 4:7–11 본문 →

죄 없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는가

엘리파즈는 욥에게 기억해 보라고 권합니다.

「부디 기억해 보게. 죄 없는 이가 누구 하나 망한 적이 있는가? 곧은 이들이 어디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는가?」욥기 4:7 · 본디새김

엘리파즈는 죄 없는 사람과 올곧은 사람이 파멸하는 일은 없다는 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처음에는 희망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욥이 정말 죄 없고 올곧은 사람이라면, 지금 겪는 재난이 그의 최종적인 파멸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격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다음 절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본 바로는, 악을 일구고 괴로움을 뿌리는 이들은 그것을 거둔다네.」욥기 4:8 · 본디새김

엘리파즈는 자신의 경험에서 하나의 원칙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지혜 전통과 전혀 동떨어진 생각이 아닙니다. 잠언 22:8에서도 불의를 뿌리는 자가 재앙을 거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악한 행동에는 결과가 따르며, 하나님이 악을 영원히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은 구약에서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엘리파즈의 말에 진실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둘 수 있다는 말과, 재앙을 당한 사람은 반드시 악을 심은 사람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앞의 명제가 참이더라도 뒤의 명제가 자동으로 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파즈는 아직 욥이 구체적으로 어떤 악행을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은 망하지 않으며 악을 행한 사람은 재앙을 거둔다는 두 주장을 욥 앞에 나란히 제시함으로써, 그의 재난을 도덕적인 문제와 연결할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여기서 독자는 엘리파즈가 모르는 결정적인 사실을 기억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욥이 여전히 온전함을 붙들고 있으며, 그가 아무 까닭 없이 해를 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

더 넓게 보면 구약 자체에도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4:8에서 아벨은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고, 전도서 7:15는 의롭게 살아도 멸망하는 사람이 있으며 악하게 살아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다고 관찰합니다. 그러므로 삶에 나타나는 보응의 질서를 인정하는 것과 모든 개인의 고난을 그 질서로 즉시 설명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제한된 경험으로부터 모든 사람의 처지를 판정할 수 있는 확실한 법칙을 만들어 내는 데 있습니다.

밭을 가는 사람과 씨를 뿌리는 사람

8절의 「악을 일구고 괴로움을 뿌리는」 농사 비유는 엘리파즈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농부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뿌린 것에 해당하는 열매를 거둡니다. 엘리파즈는 인간의 행동과 그 결과 사이에도 이러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악은 갑작스럽게 생겨난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듯 의도적으로 행하는 행동으로 묘사됩니다. 이 비유는 악행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데 유용합니다. 자신이 행한 악이 타인과 사회에 고통을 가져오고,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욥의 삶에 적용하면 곧바로 어려움이 생깁니다.

욥은 어떤 악의 씨를 뿌렸습니까?

엘리파즈는 그것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욥의 삶을 조사하거나, 욥이 실제로 잘못한 행동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욥이 지금 겪는 재난과 자신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인과관계를 연결합니다.

독자에게는 이 질문에 답할 근거가 있습니다. 욥기의 서술자와 하나님 자신이 욥을 온전한 사람으로 소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파즈에게는 그런 정보가 없습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메우기 시작할 때, 지혜는 한 사람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판단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숨과 사자의 이빨

9절에서 엘리파즈는 악인의 파멸을 하나님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숨에 그들은 망하고, 그의 콧바람에 그들은 사라진다네.」욥기 4:9 · 본디새김

하나님이 어떤 무기를 사용하시거나 군대를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숨과 콧바람만으로 악인들이 사라집니다. 엘리파즈가 표현하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인의 힘이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점입니다.

이어서 그는 사자를 등장시킵니다.

「사자의 울부짖음도 사자의 목소리도 멎고, 젊은 사자들의 이빨도 부서진다네.」욥기 4:10 · 본디새김
「사자는 먹잇감이 없어 죽어 가고, 사자의 새끼들은 서로 흩어진다네.」욥기 4:11 · 본디새김

사자는 울부짖음과 목소리로 위력을 드러냅니다. 젊은 사자에게는 먹이를 찢을 이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멎고 이빨이 부서집니다. 먹잇감을 얻지 못한 사자는 죽어 가고, 새끼들은 흩어집니다.

강한 자가 약해지고, 위협하던 자가 무력해집니다.

이것은 악인의 권세가 영원하지 않다는 비유로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하지만 욥에게 이 이미지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그는 이미 모든 재산을 잃었고, 자녀들마저 죽었습니다. 강한 자가 몰락하고 그 새끼들이 흩어진다는 말은 욥 자신의 상실과도 불편하게 겹쳐 들릴 수 있습니다.

본문은 엘리파즈가 욥을 사자에 직접 빗대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재난을 겪은 욥 앞에서 악인의 파멸을 묘사하는 이러한 말이 단순한 위로로만 들리기 어렵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엘리파즈는 악인의 운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욥은 바로 그 운명과 닮은 재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독자는 그 두 사실 사이에 생겨나는 긴장을 피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숨’은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2:7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자 인간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엘리파즈의 말에서는 하나님의 숨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파멸을 가져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악을 심판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구약의 신학적 언어와 연결됩니다. 다만 욥기 4:9는 창세기 2:7을 직접 인용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또 히브리어 본문은 10–11절에서 사자를 가리키는 여러 낱말을 연이어 사용합니다. 이 낱말들이 각각 엄격하게 구분되는 생물학적 종류를 나타낸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자의 다양한 모습을 겹쳐 보여 주면서 힘과 위세가 무너지는 장면을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밤에 들려온 속삭임

욥기 4:12–16 본문 →

경험의 지혜에서 비밀스러운 계시로

12절에서 엘리파즈의 말은 새로운 방향으로 바뀝니다.

「말 한마디가 내게 몰래 전해졌고, 내 귀가 그 속삭임을 붙잡았네.」욥기 4:12 · 본디새김

앞에서는 「내가 본 바로는」이라고 말했던 엘리파즈가 이제는 자신이 들은 비밀스러운 말을 소개합니다. 그는 단순히 오랫동안 세상을 관찰한 사람이 아닙니다. 특별한 경험을 통해 어떤 말을 전해 들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더 큰 권위를 얻게 됩니다.

다만 그 경험을 묘사하는 표현들은 처음부터 조심스럽습니다. 말은 공개적으로 선포된 것이 아니라 몰래 전해졌습니다. 귀는 명료하게 들려오는 선언 전체를 받은 것이 아니라 속삭임을 붙잡았습니다. ‘속삭임’은 아주 작은 소리나 일부만 들려오는 것을 나타내는 낱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경험이 거짓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꿈과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장면들이 실제로 등장합니다. 창세기 15:12에서는 아브람이 깊은 잠에 빠지는 장면이 나오며, 민수기 12:6에서도 환상과 꿈이 하나님의 계시 방식으로 언급됩니다.

따라서 엘리파즈가 밤에 어떤 환상을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처음부터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환상이나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해석하는 모든 내용이 옳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경험이 특별하다는 사실과 그 경험에 대한 해석이 정확하다는 사실은 서로 다릅니다.

엘리파즈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13–14절에서 엘리파즈는 당시의 분위기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밤의 환상들로 생각이 뒤숭숭하던 중에, 사람들 위로 깊은 잠이 내려앉을 때,」욥기 4:13 · 본디새김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닥쳐, 내 뼈들을 온통 공포에 몰아넣었네.」욥기 4:14 · 본디새김

주위가 조용해지고 사람들의 활동이 멈춘 시간에 엘리파즈는 무언가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 경험은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 두려움은 몸 깊숙이 파고들어 뼈들까지 흔듭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엘리파즈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는 평범한 생각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압도하는 어떤 존재와 마주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의 강도가 그 경험의 출처를 확증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엘리파즈가 실제로 무엇을 경험했는지에 관해 그의 설명을 전할 뿐, 그 환상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서술자가 직접 확인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 차이를 놓치면 엘리파즈의 말 전체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처럼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15절은 더욱 신비롭습니다.

「한 영이 내 얼굴 앞을 스쳐 지나가니, 내 살갗의 털이 곤두섰네.」욥기 4:15 · 본디새김

16절에서 엘리파즈는 자신의 경험을 더욱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것이 멈춰 섰으나 나는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네. 내 눈앞에 형체가 있었고, 고요 속에서 나는 목소리를 들었네.」욥기 4:16 · 본디새김

형체는 보았지만 정체는 알지 못한 것입니다.

마지막의 「고요 속에서 나는 목소리를 들었네」라는 표현도 고요한 가운데 목소리가 들렸다는 뜻으로도, 매우 낮고 잔잔한 목소리를 들었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이든 엘리파즈의 경험은 또렷한 시각적 인식보다 어렴풋한 형체와 소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독자가 놓치기 쉬운 역설이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자신의 경험을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두려움, 떨림, 곤두선 털, 눈앞에 멈춘 형체까지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엘리파즈는 자신이 경험한 현상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전한 존재의 정체를 확실하게 밝히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품게 됩니다. 엘리파즈가 들은 말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 말이 욥의 고난을 설명할 만큼 충분한 권위를 가진 것입니까?

이제 환상 속에서 들려온 것으로 제시되는 말이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입니다. 이 낱말은 문맥에 따라 바람, 숨, 영을 뜻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존재가 엘리파즈 앞을 지나가고, 이어서 형체와 목소리가 등장하므로 ‘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 같은 현상이 스쳐 지나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16절 끝에는 히브리어로 ‘고요함’과 ‘목소리’를 가리키는 낱말이 나란히 놓여 있어 두 가지 읽기가 생깁니다.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는가

욥기 4:17–21 본문 →

한 문장이 만들어 내는 두 가지 질문

엘리파즈가 전하는 첫 번째 말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는가? 사내가 자기를 만든 이보다 깨끗할 수 있겠는가?』」욥기 4:17 · 본디새김

‘하나님보다’와 ‘자기를 만든 이보다’라는 비교 표현에는 히브리어 전치사 민이 사용됩니다. 이 전치사는 비교를 나타낼 수 있지만, 문맥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의 상태나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첫째는 본디새김처럼 비교하는 읽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거나 깨끗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며, 당연히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이 기대됩니다. 둘째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거나 깨끗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경우 초점은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느냐에 놓입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의로움을 비교합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로움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욥의 상황에 곧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잘못도 범할 수 없는 완전한 존재라고 선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며 고통을 탄식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고통받는 특정한 사람에게 숨겨진 죄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종들도 믿지 않으신다면

18절은 인간의 연약함을 더 높은 존재들과 비교합니다.

「『보라, 그는 자기 종들도 믿지 않고, 자기 천사들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여긴다.』」욥기 4:18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종들’과 ‘천사들’은 병행되어 나타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종들은 하늘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자신을 섬기는 존재들까지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서 잘못을 발견하신다면, 하물며 연약한 인간은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은 앞에서 욥을 「내 종 욥」이라고 부르시며 그의 온전함을 인정하셨습니다(1:8, 2:3). 그런데 지금 엘리파즈가 전하는 말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종들조차 믿지 않으신다고 표현됩니다. 물론 두 본문의 ‘종’이 정확히 같은 범주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는 인간인 욥이고, 여기서는 천사들과 병행되는 하늘의 종들입니다.

그렇지만 독자의 관점에서는 의미 있는 긴장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욥의 온전함을 인정하셨다는 사실과, 엘리파즈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도 충분히 신뢰받을 수 없다는 방향으로 논증을 펼치는 모습이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엘리파즈의 말은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하는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연약하다는 사실은 욥이 부당한 일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 두 사실 사이의 거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일반적인 불완전함이 모든 개인적 재난을 설명하는 만능 열쇠처럼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진흙집에 사는 존재다

19절에서 메시지는 인간의 몸을 하나의 집에 비유합니다.

「『하물며 진흙집에 살며, 티끌 속에 터를 두고 좀벌레 앞에서 으스러지는 이들이야 어떻겠는가?』」욥기 4:19 · 본디새김

인간은 집에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는 집은 돌로 세운 견고한 궁전이 아니라 진흙집입니다. 그 기초는 티끌 속에 있습니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인간을 빚으셨습니다. 욥기 10:9에서도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진흙처럼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이 연결을 통해 인간의 몸이 땅에서 왔으며, 견고해 보이는 인간의 존재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엘리파즈는 여기에 좀벌레를 덧붙입니다. 좀벌레는 사람에게 위압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자처럼 울부짖거나 강한 이빨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작은 존재 앞에서도 으스러질 만큼 연약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욥의 현실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몸이 얼마나 연약한지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때 커다란 재산을 거느리던 사람이 이제 몸의 고통 때문에 질그릇 조각으로 피부를 긁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말이, 왜 특정한 인간에게 이런 고통이 닥쳤는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 둘은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인간의 죽음

20절은 인간의 짧은 생애를 묘사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은 짓부서지고, 눈여겨보는 이도 없이 영영 사라진다.』」욥기 4:20 · 본디새김

아침과 저녁은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를 나타냅니다. 인간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 사라짐을 주목하는 이조차 없습니다. 여기에는 인간 존재의 무력함뿐 아니라 무관심 속에서 사라지는 삶의 쓸쓸함까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욥기의 시작과 뜻밖의 대조를 이룹니다.

여호와야훼는 고발자에게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주목하셨습니다. 그의 인격을 알고 계셨으며, 그가 온전하고 올곧다는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물론 20절은 일반적인 인간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1:8은 특정한 사람인 욥에 관한 말씀입니다. 두 구절이 서로를 직접 반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엘리파즈가 말하는 인간은 작고 덧없으며 쉽게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그처럼 연약한 인간 한 사람을 하나님이 특별히 주목하고 계신다는 사실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줄이 뽑힌 집처럼

마지막 21절은 인간의 죽음을 또 다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그들 안의 줄이 뽑혀 나가지 않는가? 그들은 지혜도 없이 죽는다.』」욥기 4:21 · 본디새김

19절의 진흙집 이미지와 연결하면, 인간의 삶을 지탱하던 것이 뽑혀 나가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줄이 끊어지거나 뽑힌 장막은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그들은 지혜도 없이 죽는다」는 말은 더욱 쓸쓸합니다. 인간은 지혜를 얻고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 충분한 지혜에 이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습니다. 여기서 ‘지혜 없이’라는 표현이 모든 사람이 어리석다는 단순한 비난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엘리파즈 자신의 말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지금 욥에게 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환상에서 얻은 지식을 통해 욥의 고통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말의 끝에는 인간이 지혜 없이 죽는다는 고백이 놓여 있습니다.

인간이 그토록 연약하고 지혜가 제한된 존재라면, 엘리파즈 자신도 그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잘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홀라는 구약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되는 어려운 낱말입니다. 어리석음이나 잘못된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 정확한 의미를 지나치게 세밀하게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만으로 모든 천사가 실제로 어떤 구체적인 죄를 저질렀다는 교리를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19절의 ‘좀벌레 앞에서’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문법상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좀벌레보다 쉽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읽거나, 좀벌레에 의해 파괴되는 것처럼 이해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21절의 ‘줄’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예테르는 정확한 문맥적 의미에 논의가 있습니다. 장막을 지탱하는 줄처럼 이해하는 읽기가 가능하지만, 이 절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의 줄을 가리키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속삭임을 들은 사람과 말을 잃은 사람

욥기 4:1–21 본문 →

엘리파즈는 밤의 고요 속에서 들려온 속삭임을 기억합니다. 그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 그 결과를 거둔다는 지혜 전통을 알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연약하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식에는 빠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욥이 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정보입니다.

엘리파즈의 한계는 그가 아무런 지혜도 갖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혜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구별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말은 선의에서 시작했더라도 욥에게 상처를 줄 위험을 품게 됩니다. 욥기 마지막에서 여호와야훼는 엘리파즈와 두 친구가 자신에 관하여 욥처럼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42:7). 그렇다고 그들이 말한 모든 문장이 각각 거짓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명백한 거짓말은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원칙을 잘못된 대상에게 적용하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들은 지혜도 없이 죽는다.」 그것은 지금 재 속에 앉아 있는 욥에게도 해당하고, 욥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 엘리파즈에게도 해당합니다. 그는 자신을 떨게 만들었던 환상의 형체와 목소리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하지만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욥이 왜 그토록 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욥은 이 장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한때 다른 사람의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던 사람이 이제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를 도우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그의 고난을 설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밤에 들었던 작은 속삭임을 붙잡았지만,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고통받는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엘리파즈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그가 겪는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