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하나님의 훈계로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가
엘리파즈는 욥에게 놀라운 미래를 약속합니다.
「자네의 자손들이 땅의 풀과 같음을 알 것이네」(25절). 자녀들이 번성하고, 집안에는 평안이 깃들며,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삶을 누리다가 때가 되면 무덤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욥은 이미 열 명의 자녀를 잃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욥기 5장의 아픈 역설이 있습니다. 엘리파즈가 그려 주는 미래는 분명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구하시고, 슬픔에 잠긴 이를 높이시며, 상처 입은 사람을 고치신다는 그의 말에도 구약의 지혜와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욥이 겪는 고난을 하나님의 훈계로 이해하고, 그 훈계를 받아들이면 회복될 것이라고 권합니다. 그에게 고난은 바로잡아야 할 잘못을 알려 주는 과정이며, 회복은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엘리파즈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온전함을 인정하셨으며, 그의 재난에 정당한 까닭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
따라서 엘리파즈의 말은 독자에게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말은 참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진리를 근거로 지금 고통받는 욥에게 하나님이 그를 꾸짖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욥기 5장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과, 그 지식을 한 사람의 고난에 적용하는 판단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엘리파즈의 말이 끝나는 방식도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찬양한 뒤, 자신의 설명이 옳다는 사실을 충분히 살펴보았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작 욥에게 일어난 일은 이미 이해한 듯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자식들은 안전에서 멀어지고」
욥에게 대답할 사람은 없는가
엘리파즈는 먼저 욥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한번 불러 보게. 자네에게 대답할 이가 있는가? 거룩한 이들 가운데 누구에게 향하겠는가?」욥기 5:1 · 본디새김
‘거룩한 이들’은 문맥상 하늘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엘리파즈는 하나님의 종들과 천사들을 언급했습니다(4:18). 그러므로 여기서도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하늘의 존재들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이 말을 단순히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주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파즈는 곧이어 하나님을 찾으라고 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절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욥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자신을 지지해 줄 존재를 찾는 일이 무익하다는 취지의 도전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욥은 아직 누구에게도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앞 장에서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탄식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엘리파즈는 욥이 마치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이나 하늘의 존재들과 다투려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합니다.
욥의 탄식이 엘리파즈에게는 위험한 항의처럼 들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표현하는 일과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워 하나님을 부당하게 고발하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엘리파즈의 첫 질문은 앞으로 이어질 말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는 욥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보다, 욥이 그 고난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분노가 어리석은 사람을 죽인다는 말
「분노가 어리석은 이를 죽이고, 시기가 분별없는 이를 죽이기 때문이네.」욥기 5:2 · 본디새김
엘리파즈는 분노와 시기를 위험한 감정으로 봅니다. 분노가 사람을 망가뜨리고, 시기가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잠언 14:30과 같은 지혜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욥은 앞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깊은 절망과 고통이 담겨 있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런 욥에게 분노와 시기가 어리석은 사람을 죽인다고 경고합니다.
그가 욥의 탄식을 어떤 종류의 분노로 받아들였는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엘리파즈는 욥이 느끼는 격렬한 감정을 신중하게 다루기보다,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파멸부터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경고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고통이 실제로 분노나 시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이것이 엘리파즈의 말에서 점차 드러나는 문제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옳은 경고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지금 욥에게 해당하는지 충분히 확인하지 않습니다.
뿌리내린 어리석은 사람과 무너진 자녀들
「나는 어리석은 이가 뿌리내리는 것을 보았고, 갑자기 그의 거처를 저주했네.」욥기 5:3 · 본디새김
‘뿌리내리다’는 식물이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안정되게 자라는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처음에는 번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집은 견고해 보이고,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
여기서 저주하는 주체는 엘리파즈 자신입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의 번영을 보고 그 거처를 저주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어떤 말을 했다는 뜻인지, 그 집이 결국 파멸할 것이라는 판단을 표현한 것인지는 더 분명히 알기 어렵습니다.
「그의 자식들은 안전에서 멀어지고, 성문에서 짓눌리는데도 구해 줄 이가 없다네.」욥기 5:4 · 본디새김
고대 도시의 성문은 사람들이 모이고 재판과 공적인 판단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문에서 짓눌린다는 표현은 단순히 성문 아래에서 물리적으로 압박받는 일보다 넓게, 공적인 자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보호받지 못하는 처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어서 5절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수확물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굶주린 사람이 그의 수확물을 먹고, 가시 사이에 있는 것까지 가져갑니다. 재산을 노리는 또 다른 위협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장면의 전체적인 방향은 분명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동안 뿌리를 내리고 번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녀들의 안전과 재산을 모두 잃게 됩니다.
욥도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그의 가축과 재산도 빼앗겼습니다. 일꾼들은 죽임을 당했고, 집안은 무너졌습니다. 엘리파즈가 묘사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몰락은 욥에게 일어난 재난과 놀라울 만큼 닮았습니다.
그렇다고 엘리파즈가 3–5절에서 욥을 직접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선언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일반적인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욥이 겪은 재난과 닮은 일을 어리석은 사람의 운명으로 설명하는 순간, 엘리파즈의 말은 단순한 인생 교훈을 넘어 욥 자신에 대한 암시가 됩니다.
더욱 아픈 것은 자녀들에 관한 부분입니다. 욥의 자녀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엘리파즈는 어리석은 사람의 자녀들이 안전에서 멀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의 상실을 위로하기보다, 그 상실이 부모의 어리석음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엘리파즈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욥에게는 매우 고통스럽게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고생은 땅에서 저절로 돋아나지 않는다
6–7절에서 엘리파즈는 농사의 이미지를 이어 갑니다.
「괴로움은 티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고생은 땅에서 돋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네.」욥기 5:6 · 본디새김
「참으로 사람은 고생을 겪도록 태어나고, 불티들은 높이 날아오른다네.」욥기 5:7 · 본디새김
두 문장은 얼핏 긴장되어 보입니다. 고생이 저절로 돋아나는 것은 아니라면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생을 겪는 존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파즈의 논리에서는 두 문장이 서로 연결됩니다. 고난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외부의 우연한 현상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악을 행한 사람이 그 결과를 거둔다고 말한 점을 고려하면, 엘리파즈가 인간의 행동과 고난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7절 자체는 모든 고난이 개인의 특정한 죄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생이 인간에게 보편적인 현실임을 강조합니다. 고생이 인간의 삶에 피할 수 없이 찾아온다는 것과, 모든 고생이 특정한 잘못의 대가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엘리파즈는 그 차이를 충분히 구분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불을 피우면 불티가 위로 솟습니다. 그처럼 인간에게도 고생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욥의 탄식과 뜻밖의 만남이 생깁니다.
욥은 왜 자신이 태어났는지 물었습니다(3:11). 엘리파즈는 인간이 고생을 겪도록 태어난다고 답합니다. 욥이 묻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출생이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삶으로 이어졌느냐는 절박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그것을 인간 일반에 관한 진술로 바꿉니다.
그의 말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만큼 극심한 재난을 겪고 있는지는 여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엘리파즈는 이제 욥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권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5절 마지막의 ‘올무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해석이 어려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7절의 ‘불티들’은 히브리어로 브네 레셰프, 문자적으로는 ‘불꽃의 아들들’입니다. 불에서 불티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해석에서는 날아오르는 존재들과 관련된 이미지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처럼 불티들이 위로 날아오르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면 시의 대조가 잘 드러납니다.
「하지만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네」
욥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라고 말하다
8절은 발언의 방향이 바뀌는 지점입니다.
「하지만 나라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내 사정을 맡기겠네.」욥기 5: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파멸하는지 설명했습니다. 이때 히브리어는 ‘그러나 나’라는 전환과 화자의 강조를 담고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단순한 일반 원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욥의 처지라면 선택할 태도를 제안합니다.
이 권유 자체는 충분히 신앙적인 말입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자기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은 구약의 시편과 지혜 전통에서도 중요한 태도입니다. 시편 55:22에서는 자신의 짐을 여호와야훼께 맡기라고 권합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했던 말을 고려하면 이 권유에는 특별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의 바로잡으심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파즈의 권유가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찾으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욥의 잘못이나 어리석음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욥이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의 재난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온 것으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이 비를 내리신다
9절부터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큰 일들을, 셀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행한다네.」욥기 5:9 · 본디새김
엘리파즈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땅 위에 비를 주고, 들판 위에 물을 보내네.」욥기 5:10 · 본디새김
엘리파즈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기적이나 세상을 뒤흔드는 특별한 사건을 예로 들지 않습니다. 땅에 내리는 비를 이야기합니다.
비는 자연스럽게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가 부족한 땅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비가 내려야 씨앗이 자라고, 들판이 살아나며, 사람과 가축이 먹을 것을 얻습니다. 따라서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단순한 자연현상의 묘사가 아닙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은 반드시 인간의 눈에 초자연적인 사건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반복되는 비조차 하나님의 돌보심을 보여 주는 선물입니다.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은 낮은 사람을 높이신다
11절에서 하나님의 행동은 자연에서 인간 사회로 옮겨 갑니다.
「이는 낮은 이들을 높은 곳에 두려는 것이네. 슬픔에 잠긴 이들은 높이 올라 안전을 얻는다네.」욥기 5:11 · 본디새김
비가 내려 땅이 살아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낮은 사람을 일으키시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안전을 주십니다.
사무엘상 2:7–8에서 한나의 노래는 하나님이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켜 높은 자리에 앉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엘리파즈의 말도 이러한 신앙과 연결됩니다.
그가 묘사하는 하나님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 돌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을 높이시고, 안전을 잃은 이들에게 다시 설 자리를 마련하시는 분입니다.
이 대목에서 엘리파즈가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내용은 욥의 현실에 실제적인 희망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욥은 지금 낮아진 사람입니다. 가족과 재산을 잃었고, 몸은 병들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이전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의 발언은 곧바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향합니다.
지혜롭다는 사람이 자기 꾀에 붙잡힌다
12–14절은 하나님이 교활한 사람들의 계획을 무너뜨리시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는 교활한 이들의 계획을 깨뜨려, 그들의 손이 성과를 이루지 못하게 하네.」욥기 5:12 · 본디새김
「그는 지혜로운 이들을 그들 자신의 꾀로 붙잡고, 뒤틀린 이들의 계책은 성급해진다네.」욥기 5:13 · 본디새김
여기서 ‘지혜로운 이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꾀로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계획 자체가 그들을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 모습은 시편 7:15–16에 등장하는 악인의 운명과도 닮았습니다. 악인은 함정을 파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구덩이에 빠집니다. 이러한 역전은 14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들은 대낮에 어둠을 만나고, 한낮에도 밤처럼 더듬거린다네.」욥기 5:14 · 본디새김
대낮은 세상을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자기 지혜를 믿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사람들은 한낮에도 길을 찾지 못합니다. 빛이 충분히 있어도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악한 계략을 좌절시키시는 분이라는 중요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욥기의 독자에게 특별하게 들리는 점이 있습니다.
엘리파즈 자신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험을 가지고 있고, 삶의 원칙을 알고 있으며, 욥에게 어떤 길이 옳은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모르는 욥의 사정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혜롭다는 사람을 자기 꾀로 붙잡으신다는 말은 엘리파즈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경고처럼 들립니다. 이것은 엘리파즈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독자가 그 발언을 이야기 전체의 문맥에서 들을 때 생기는 역설입니다.
자기 지혜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라는 진리가, 그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에게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의 희망과 입을 다문 불의
15–16절에서 하나님이 교활한 사람들을 무너뜨리시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궁핍한 이를 칼에서, 그들의 입에서, 또 힘센 자의 손에서 구해 내니,」욥기 5:15 · 본디새김
「가난한 이에게 희망이 생기고, 불의는 제 입을 다문다네.」욥기 5:16 · 본디새김
‘칼에서, 그들의 입에서’를 말이 칼과 같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읽든 두 가지 위험으로 읽든, 강한 자가 가난한 사람을 해치는 방식에는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말로 행하는 위협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기 힘으로 상황을 바꾸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불의한 사람들의 계획을 깨뜨리시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불의는 단순히 행동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정당화하며 자기 힘을 주장하던 입까지 닫힙니다. 이 장면은 1절에서 시작한 엘리파즈의 말과도 대조됩니다. 그는 욥에게 누가 대답하겠느냐고 물으며 말을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불의의 입을 닫으신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약자의 편에 서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이 진술을 읽는 독자는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욥은 어느 자리에 서 있는 사람입니까? 그는 다른 사람을 짓밟는 강한 자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입니까? 욥기의 앞선 장면들이 보여 준 욥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낮은 이를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구하신다는 엘리파즈의 말은 욥에게 적용될 수 있는 희망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욥의 고난을 그의 잘못에 대한 징벌로 해석할 근거는 아닙니다.
엘리파즈는 이제 하나님이 낮은 사람을 높이신다는 일반적인 고백에서, 하나님이 바로 욥을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지에 관한 판단으로 나아갑니다. 그 전환점이 17절입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은 이사야 59:10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 공동체가 대낮에도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더듬는다고 말하는 모습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13절의 「그는 지혜로운 이들을 그들 자신의 꾀로 붙잡고」라는 문장은 신약의 고린도전서 3:19에서도 직접 인용됩니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이 인용이 의미하는 것은 엘리파즈가 말한 해당 원칙이 성경의 다른 문맥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엘리파즈가 욥의 고난에 대해 내린 모든 판단을 승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15절의 ‘칼에서, 그들의 입에서’라는 표현에는 문법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칼과 같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읽을 수도 있고, 칼과 입이라는 두 가지 위험을 나란히 놓은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꾸짖는 사람은 행복하네」
가장 아름다운 말이 가장 위험한 판단이 되는 순간
17절은 엘리파즈의 발언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보게, 하나님이 꾸짖는 사람은 행복하네. 전능자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게.」욥기 5:17 · 본디새김
지금까지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는 욥이 자신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직접 가르칩니다.
잠언 3:11–12에서도 여호와야훼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꾸짖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엘리파즈가 말하는 원칙 자체를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가르치시고 바로잡으시는 분이라는 것은 구약의 중요한 신앙입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사람을 훈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 욥의 고난도 하나님의 훈계라는 증거가 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욥의 재난이 그가 저지른 어떤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본문이 말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욥이 온전함을 굳게 붙들고 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파즈의 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훈계의 가치를 인정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 훈계라는 개념을 욥이 겪는 재난에 적용하는 판단입니다. 그는 욥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고쳐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욥이 어떤 죄 때문에 자녀들을 잃고 몸이 병들었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미 한 가지 해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꾸짖고 계시며, 욥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고난의 의미는 욥이 경험한 현실에서 발견되기보다, 엘리파즈가 가지고 있던 설명의 틀에 따라 정해집니다.
이것이 그의 위로가 가진 가장 큰 한계입니다.
상처를 내는 손과 싸매는 손
18절은 하나님을 매우 인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그가 아프게도 하고 싸매기도 하며, 짓부수기도 하고 그의 두 손이 고치기도 하기 때문이네.」욥기 5:18 · 본디새김
엘리파즈는 하나님의 행동을 두 쌍의 동사로 표현합니다. 앞부분의 고통스러운 행동과 뒷부분의 치유하는 행동이 서로 대조됩니다. 그러나 행위자는 한 분입니다.
여기서 욥이 상상해야 할 하나님은 단순히 고통을 주시는 분도 아니고, 고통과 아무 관계 없이 치료만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상처를 허락하시거나 내실 수 있지만 그 상처를 싸매시고 고치실 능력도 있는 분입니다.
「그의 두 손」(יָד)에서 히브리어는 손을 나타내는 낱말의 쌍수형을 사용합니다. 인간이 상처를 싸맬 때 두 손으로 붕대를 감고 치료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하나님을 멀리서 명령만 내리시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직접 손을 사용하여 고치시는 분으로 그립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이 이미지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엘리파즈의 진단이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욥의 몸은 실제로 상처 입었습니다. 그는 지금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엘리파즈가 하나님이 고치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상처를 고치실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상처가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라는 판단 없이도 참될 수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한 문장 안에 결합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위로는 욥에게 하나의 조건을 제시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금의 고통을 하나님의 훈계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그 고통을 끝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그 회복이 얼마나 완전할 것인지 길게 묘사합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행복하다’는 시편 1:1에서 복 있는 사람을 소개할 때 사용되는 표현과 같은 낱말입니다. 어떤 사람의 처지가 참으로 복되다는 선언에 사용됩니다. 또한 ‘훈계’에 해당하는 낱말은 가르침과 교정, 징계를 포함합니다. 단순한 처벌보다 넓은 뜻을 가지며, 잘못된 길을 바로잡고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교육적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잠언은 일반적으로 지혜로운 삶이 가져오는 좋은 결과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전도서 8:14는 의로운 사람이 악인에게 돌아갈 일을 겪고, 악인이 의로운 사람에게 돌아갈 일을 겪는 현실을 관찰합니다. 구약은 인간의 삶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질서가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사건이 그 질서에 따라 즉시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18절의 표현은 신명기 32:39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고 고치기도 하시는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6:1에도 하나님이 찢으셨으나 다시 고치시고, 치셨으나 싸매실 것이라는 고백이 등장합니다.
여섯 가지 곤경에서, 일곱 가지에서도
일곱 가지 곤경은 무엇을 뜻하는가
19절에서 엘리파즈는 이렇게 약속합니다.
「여섯 가지 곤경에서 그가 자네를 건져 낼 것이고, 일곱 가지 곤경에서도 재앙이 자네에게 닿지 않을 것이네.」욥기 5:19 · 본디새김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는 정확히 여섯 번이나 일곱 번의 재난을 계산하는 숫자로 읽기보다, 많은 재난을 거쳐 마지막까지 보호받는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히브리어 시에서는 이러한 숫자의 증가를 통해 완전함이나 강조를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잠언 6:16에서도 여호와야훼가 미워하시는 여섯 가지, 곧 일곱 가지가 언급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행하시는 일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네를 건져 낼 것이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진술이 욥 개인의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파즈가 가진 확신을 보여 줍니다. 그는 욥이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면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서술자는 아직 그러한 약속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엘리파즈가 말하는 미래는 하나님이 이 장에서 욥에게 직접 주신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에 대한 엘리파즈 자신의 이해에서 나온 전망입니다.
굶주림과 전쟁과 혀의 채찍
20–22절은 하나님이 욥을 보호하실 구체적인 위험들을 나열합니다.
「굶주릴 때에는 죽음에서, 전쟁 때에는 칼의 손아귀에서 자네를 구해 낼 것이네.」욥기 5:20 · 본디새김
「혀의 채찍 앞에서 자네는 숨겨질 것이고, 파괴가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네.」욥기 5:21 · 본디새김
「자네는 파괴와 굶주림을 비웃을 것이네. 땅의 짐승들을 두려워하지 말게.」욥기 5:22 · 본디새김
굶주림은 생존에 필요한 양식이 사라지는 일입니다. 전쟁과 칼은 인간의 폭력입니다. 혀의 채찍은 말로 가해지는 공격이며, 파괴와 들짐승은 생활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들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목록은 이미 욥이 겪은 일들과 여러 면에서 닮았습니다.
그의 가축과 재산은 약탈당했습니다. 일꾼들은 칼에 죽었습니다. 자녀들이 모여 있던 집은 무너졌습니다. 지금은 자기 몸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엘리파즈가 약속하는 안전은 욥이 이미 잃어버린 안전입니다.
그는 욥에게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그려 주지만, 욥이 겪은 위험이 왜 찾아왔는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혀의 채찍」에서 혀는 본래 말을 하는 기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채찍이 될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때리지 않아도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엘리파즈가 자신의 말을 염두에 두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욥을 비난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엘리파즈의 말이 욥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앞에서 엘리파즈는 어리석은 사람의 자녀가 안전을 잃고 그의 재산이 빼앗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훈계로 받아들이라고 권했습니다. 그 말들이 욥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엘리파즈가 의도적으로 욥을 공격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장면을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위로하려는 말도, 그 사람의 현실을 잘못 판단하면 상처를 내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들판의 돌들과 맺는 맹약
23절은 이 장에서 가장 독특한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자네는 들판의 돌들과 맹약을 맺은 사이가 될 것이고, 들짐승들은 자네와 평화롭게 지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네.」욥기 5:23 · 본디새김
돌들과 맹약을 맺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히브리어에는 실제로 ‘언약’ 또는 ‘맹약’을 뜻하는 낱말이 사용됩니다. 사람 사이에 맺는 언약을 나타낼 때에도 쓰이는 낱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돌들과 언약을 맺습니다.
돌은 사람과 말을 주고받거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계가 인간에게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를 시적으로 표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들판의 돌은 농사와 이동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들짐승도 가축과 사람에게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파즈가 그려 주는 회복의 세계에서는 이 모든 것이 더 이상 적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것보다 더 풍성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 전체가 욥에게 우호적인 환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의 재산은 다른 사람들에게 약탈당했고, 하늘에서 떨어진 불과 광야에서 불어온 바람으로 집안이 파괴되었습니다. 욥은 사람에게서도, 자연에서 일어난 사건들에서도 안전을 얻지 못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런 욥에게 모든 것이 다시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 약속은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재난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약속이라는 한계도 지닙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회복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욥이 잃어버린 삶의 중심으로 다가갑니다.
조금 더 깊이
호세아 2:18에서도 하나님이 들짐승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여 백성이 안전하게 눕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본문은 자연계와 인간 사이의 적대 관계가 사라지는 평화를 그린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평안한 천막, 많은 자녀, 제때의 죽음
집에 돌아가도 빠진 것이 없을 것이다
24절에서 엘리파즈는 욥에게 약속합니다.
「자네는 자네의 천막이 평안함을 알 것이고, 자네의 거처를 살필 때 빠진 것이 없을 것이네.」욥기 5:24 · 본디새김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자연계의 평화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이것은 풍요로운 생활뿐 아니라 일상의 안정을 나타냅니다.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평안함’은 단순히 전쟁이 없거나 다툼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삶이 온전하고 안전하며 잘 유지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낱말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 집안을 둘러보며 아무것도 빠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가축은 사라졌고, 일꾼들은 죽었으며, 자녀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빠진 것이 없다’는 말은 그에게 너무도 먼 현실입니다.
지금 욥이 자기 집안을 살핀다면 무엇을 발견할까요? 그가 잃은 것은 단순히 물건이 아닙니다.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녀가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
25절은 더욱 직접적으로 욥의 상실을 건드립니다.
「자네는 자네의 후손이 많고, 자네의 자손들이 땅의 풀과 같음을 알 것이네.」욥기 5:25 · 본디새김
후손이 땅의 풀처럼 많아진다는 말은 풍성한 생명과 번영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축복의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셨던 일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창세기 13:16). 물론 두 구절의 비유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자손을 하나님의 복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엘리파즈는 욥이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면 그에게 다시 많은 후손이 생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에게 앞으로도 가정과 미래가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쉽게 기뻐하기 어렵습니다. 욥에게 이미 자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녀를 한 명도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있었고, 그 자녀들이 함께 잔치를 벌이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이제 그 자녀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따라서 엘리파즈의 말을 단순히 자녀를 많이 얻으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설령 미래에 새로운 자녀들이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이미 죽은 자녀들과 동일한 사람은 아닙니다. 본문은 엘리파즈가 이런 차이를 얼마나 깊이 생각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다시 번영을 주실 수 있다는 희망일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것은 복일 수 있지만, 그것이 잃어버린 생명의 의미를 지우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욥기의 마지막 장면까지 염두에 두고 읽을 때에도 중요한 구별입니다. 미래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가 상실 자체를 가볍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엘리파즈의 약속에는 참된 희망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욥에게 닿으려면, 먼저 그가 잃어버린 사람들의 고유한 의미가 인정되어야 합니다.
곡식더미가 제때 쌓이듯이
26절에서 엘리파즈는 욥의 삶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까지 말합니다.
「자네는 기운이 왕성한 채 무덤에 이를 것이네. 곡식더미가 제때 쌓여 올라가듯이 말일세.」욥기 5:26 · 본디새김
곡식은 씨앗으로 시작해 자라고 익습니다. 수확할 때가 되면 거두어져 쌓입니다. 엘리파즈는 인간의 삶도 그와 같기를 바랍니다. 충분히 살고, 때가 무르익어, 생애의 결실을 이룬 뒤에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기운이 왕성한 채’를 신체적인 기력으로 읽든 원숙한 나이로 읽든, 곡식더미의 비유는 제때 이루어지는 완성된 삶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욥의 탄식과 정반대입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날 때 죽지 않았던 이유를 물었습니다(3:11).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했고, 죽음을 쉼으로 상상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런 욥에게 오래 살다가 때가 되면 죽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위치는 너무나 다릅니다. 욥은 지금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을 찾습니다. 엘리파즈는 고난을 극복한 뒤 완성된 생애의 끝에서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파즈의 말에는 땅과 농사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뿌리내립니다. 그의 수확물은 빼앗깁니다. 이어 괴로움은 땅에서 저절로 돋아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를 내려 땅을 적시십니다. 마지막에는 후손들이 땅의 풀처럼 많아지고, 사람의 생애는 때가 되어 거두는 곡식더미처럼 완성됩니다.
엘리파즈의 말은 황폐한 땅이 다시 풍요로워지는 하나의 긴 그림처럼 짜여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그림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파멸을 가져오고, 훈계를 받아들이면 풍요가 회복된다는 순서입니다.
바로 그 질서 안에 욥의 재난을 넣으려는 것이 엘리파즈의 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 마지막의 동사는 ‘죄짓다’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는 히브리어 하타에서 나왔습니다. 이 낱말에는 어떤 표적을 맞히지 못하거나 놓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거처를 살피는 문맥에 따라 빠진 것이 없다는 뜻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엘리파즈가 약속하는 평안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욥은 자신의 거처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입니다. 26절의 ‘기운이 왕성한 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켈라흐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낱말입니다. 신체적으로 기력이 왕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수확의 이미지와 연결하여 원숙한 나이나 생애의 완성된 시기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이니, 실로 그러하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던 사람
엘리파즈는 마지막에 자신의 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보게, 이것은 우리가 살펴본 것이니, 실로 그러하네. 이 말을 듣고 자네도 스스로 알아 두게.」욥기 5:27 · 본디새김
그가 말한 것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아닙니다. 충분히 살펴본 결과이며, 실제로 그렇다는 확신을 가진 지식입니다.
그는 앞에서 자신이 보았던 일을 이야기했고, 자신이 경험한 밤의 환상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자신의 판단을 넘어 ‘우리가 살펴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복수형은 개인의 경험을 넘어 공유된 지혜나 전승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엘리파즈가 다른 두 친구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함께 조사했거나 합의했다는 뜻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말을 충분한 근거를 가진 지식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9절에서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헤아릴 수 없는 큰 일들」을 행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곳의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표현에는 찾아 살피고 탐구한다는 의미와 관련된 낱말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27절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이니」(חָקַר)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동사도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27절에서는 자신들이 충분히 살펴보았으며, 그 판단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문자 그대로 앞뒤가 모순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삶의 어떤 원칙을 충분히 탐구했다는 사실은 함께 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문맥에서는 이 반복이 특별한 질문을 일으킵니다. 엘리파즈가 살펴본 것은 무엇인가요? 그는 악인이 파멸한다는 사례를 관찰했습니다. 하나님이 낮은 사람을 높이시고 교활한 사람을 넘어뜨리신다는 지혜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복되다는 신앙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일어난 사건의 실제 원인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원칙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욥의 고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확정할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는 욥에게 자신의 가르침이 옳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헤아릴 수 없는 일을 행하신다고 믿으면서도, 지금 하나님이 욥에게 행하시는 일은 자신이 이미 헤아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엘리파즈는 겸손한 인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연약하며 지혜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욥을 대할 때에는 그 지혜의 한계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네도 스스로 알아 두게」라는 말에는 욥이 자신의 말을 단순히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진리를 자기 삶에 적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새로운 설명을 받아들이는 일만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엘리파즈가 제시한 원칙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질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빠진 것이 없는 천막을 약속받은 사람
엘리파즈는 욥에게 안전과 번영을 약속합니다. 집안이 평안해지고, 자녀가 많아지고, 장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듣는 욥에게는 그 좋은 것들을 다시 얻기 위한 조건처럼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훈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구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다는 희망과, 지금 겪는 고통이 반드시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판단은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하나의 묶음이 아닙니다. 회복을 바라보는 믿음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고백을 자신의 판단에도 적용했다면, 욥의 고통에 대해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다시 일으키실 수 있다고 말하되, 지금 그에게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그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엘리파즈의 말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끝나 갑니다.
들판의 돌들이 사람과 맹약을 맺고, 들짐승들이 평화롭게 지냅니다. 집안에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으며, 자손들은 땅의 풀처럼 많아집니다. 생애가 충분히 무르익으면 곡식더미가 제때 쌓이듯이 무덤에 이릅니다. 그곳에는 두려움도 없고, 굶주림도 없고, 상실도 없습니다.
엘리파즈는 욥이 그런 삶을 다시 얻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친 지금, 욥의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욥의 몸에는 여전히 종기가 있습니다. 빼앗긴 재산은 돌아오지 않았고, 죽은 자녀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엘리파즈는 「자네의 거처를 살필 때 빠진 것이 없을 것이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파즈는 미래의 천막을 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집, 자손들이 번성하는 집, 평화롭게 생애를 마칠 수 있는 집입니다.
그러나 욥이 지금 돌아볼 수 있는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먹고 마시던 집은 무너졌습니다. 그곳을 지키던 사람들도, 그 안에서 살던 자녀들도 이제 없습니다.
엘리파즈가 그려 주는 미래는 아름답지만, 아직 욥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은 확신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펴본 것이니, 실로 그러하네.」 엘리파즈는 욥에게 자신의 설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욥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제대로 헤아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욥 앞에는 두 가지 현실이 놓여 있습니다. 친구가 확신하는 하나님의 질서와, 그 질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자신의 고통입니다.
엘리파즈는 말을 마쳤습니다.
욥은 여전히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