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하나님의 훈계로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가
엘리파즈는 욥에게 놀라운 미래를 약속합니다.
「네 후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25절). 자손들이 많아지고, 집안에는 평안이 깃들며,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삶을 누리다가 때가 되면 무덤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욥은 이미 열 명의 자녀를 잃었습니다.
엘리파즈가 그려 주는 미래는 분명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구하시고, 슬픔에 잠긴 이를 높이시며, 상처 입은 사람을 고치신다는 그의 말에도 구약의 지혜와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약속이 지금 욥에게는 어떤 의미로 들릴까요?
엘리파즈는 욥이 겪는 고난을 하나님이 바로잡으시는 일로 이해하고, 그 일을 받아들이면 회복될 것이라고 권합니다. 그에게 고난은 바로잡아야 할 잘못을 알려 주는 과정이며, 회복은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엘리파즈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온전함을 인정하셨으며, 그의 재난에 정당한 까닭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
따라서 엘리파즈의 말은 독자에게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사람을 가르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말은 참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진리를 근거로 지금 고통받는 욥에게 하나님이 그를 꾸짖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욥기 5장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과, 그 지식을 한 사람의 고난에 적용하는 판단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그의 자녀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욥에게 대답할 사람은 없는가
엘리파즈는 먼저 욥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엘리파즈가 말을 이었습니다. 「한번 불러 봐. 네게 대답할 사람이 있니? 거룩한 이들 가운데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겠니?」욥기 5:1 · 두루새김
「거룩한 이들」은 문맥상 하늘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엘리파즈는 하나님의 종들과 천사들을 언급했습니다(4:18). 다만 그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이 말을 단순히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주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파즈는 곧이어 하나님을 찾으라고 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절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욥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자신을 지지해 줄 존재를 찾는 일이 소용없다는 취지의 도전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욥은 아직 누구에게도 자신이 옳다고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앞 장에서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탄식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엘리파즈는 욥이 마치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이나 하늘의 존재들과 다투려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합니다.
욥의 탄식이 엘리파즈에게는 위험한 항의처럼 들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표현하는 일과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워 하나님을 부당하게 고발하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엘리파즈의 첫 질문은 앞으로 이어질 말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는 욥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보다, 욥이 그 고난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분노가 어리석은 사람을 죽인다는 말
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을 죽이고, 질투는 분별없는 사람을 죽이거든.」욥기 5:2 · 두루새김
분노가 사람을 망가뜨리고, 질투가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잠언 14:30과 같은 지혜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놓인 자리입니다.
욥은 앞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깊은 절망과 고통이 담겨 있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런 욥에게 분노와 질투가 어리석고 분별없는 사람을 죽인다고 경고합니다.
그가 욥의 탄식을 어떤 종류의 분노로 받아들였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엘리파즈는 욥이 느끼는 격렬한 감정을 신중하게 다루기보다,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파멸부터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경고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고통이 실제로 분노나 질투에서 비롯되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이것이 엘리파즈의 말에서 점차 드러나는 문제입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옳은 경고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지금 욥에게 해당하는지 충분히 확인하지 않습니다.
뿌리내린 어리석은 사람과 무너진 자녀들
3절에서 엘리파즈는 자신이 보았다는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뿌리내리는 모습을 보았어. 갑자기 그가 사는 곳을 저주했지.」욥기 5:3 · 두루새김
「뿌리내리는」 모습은 식물이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안정되게 자라는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도 처음에는 잘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집은 튼튼해 보이고,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
여기서 저주하는 사람은 엘리파즈 자신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어떤 말을 했다는 뜻인지, 그 집이 결국 무너질 것이라는 판단을 표현한 것인지는 더 분명히 알기 어렵습니다.
이어서 그 집안이 어떻게 되는지가 묘사됩니다.
「그의 자녀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성문에서 짓밟혀도 구해 줄 사람이 없어.」욥기 5:4 · 두루새김
고대 도시의 성문은 사람들이 모이고 재판과 공적인 판단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문에서 짓밟혀도」라는 표현은 단순히 성문 아래에서 몸이 짓밟히는 일보다 넓게, 공적인 자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보호받지 못하는 처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어서 5절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거둔 곡식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굶주린 사람이 그의 곡식을 먹고, 가시덤불 속에 있는 곡식까지 가져갑니다. 재산을 노리는 또 다른 위협도 등장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동안 뿌리를 내리고 잘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녀들의 안전과 재산을 모두 잃게 됩니다.
욥도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그의 가축과 재산도 빼앗겼습니다. 일꾼들은 죽임을 당했고, 집안은 무너졌습니다. 엘리파즈가 묘사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몰락은 욥에게 일어난 재난과 놀라울 만큼 닮았습니다.
그렇다고 엘리파즈가 3–5절에서 욥을 직접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선언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일반적인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겪은 재난과 닮은 일을 어리석은 사람의 운명으로 설명하는 순간, 엘리파즈의 말은 단순한 인생 교훈을 넘어 욥 자신을 가리키는 듯한 말이 됩니다.
더욱 아픈 것은 자녀들에 관한 부분입니다.
욥의 자녀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엘리파즈는 어리석은 사람의 자녀들이 보호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의 상실을 위로하기보다, 그 상실이 부모의 어리석음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엘리파즈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욥에게는 매우 고통스럽게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고생은 땅에서 저절로 돋아나지 않는다
6–7절에서 엘리파즈는 농사의 이미지를 이어 갑니다.
「재앙은 흙먼지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은 땅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거든.」욥기 5:6 · 두루새김
「오히려 사람은 고생을 겪도록 태어나지. 불티가 높이 날아오르듯이 말이야.」욥기 5:7 · 두루새김
두 문장은 얼핏 서로 어긋나 보입니다. 고통이 땅에서 저절로 싹트는 것은 아니라면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고생을 겪는 존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파즈의 논리에서는 두 문장이 서로 연결됩니다. 고난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외부의 우연한 현상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악을 행한 사람이 그 결과를 거둔다고 말한 점을 고려하면, 엘리파즈가 사람의 행동과 고난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7절 자체는 모든 고난이 개인의 특정한 죄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생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현실임을 강조합니다.
고생이 사람의 삶에 피할 수 없이 찾아온다는 것과, 모든 고생이 특정한 잘못의 대가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엘리파즈는 그 차이를 충분히 구분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불을 피우면 불티가 위로 솟습니다. 그처럼 사람에게도 고생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욥의 탄식과 뜻밖의 만남이 생깁니다.
욥은 왜 자신이 태어났는지 물었습니다(3:11). 엘리파즈는 사람이 고생을 겪도록 태어난다고 답합니다. 욥이 묻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출생이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삶으로 이어졌느냐는 절박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그것을 모든 사람에 관한 말로 바꿉니다.
그의 말은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만큼 극심한 재난을 겪고 있는지는 여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5절 마지막의 「올무들」에 해당하는 원어 표현은 해석이 어려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7절의 「불티」는 글자 그대로는 「불꽃의 아들들」입니다. 불에서 불티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해석에서는 날아오르는 존재들과 관련된 이미지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루새김의 「불티가 높이 날아오르듯이」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면 시의 대조가 잘 드러납니다.
「하지만 나라면 하나님을 찾고」
욥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라고 말하다
8절은 발언의 방향이 바뀌는 지점입니다.
「하지만 나라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내 사정을 맡기겠어.」욥기 5:8 · 두루새김
앞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설명했습니다. 이제 엘리파즈는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지 말합니다. 엘리파즈는 단순한 일반 원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욥의 처지라면 선택할 태도를 제안합니다.
이 권유 자체는 충분히 신앙적인 말입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자기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은 구약의 시편과 지혜 전통에서도 중요한 태도입니다. 시편 55:22에서는 자신의 짐을 여호와야훼께 맡기라고 권합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했던 말을 고려하면 이 권유에는 특별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이 바로잡으시는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파즈의 권유가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찾으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욥의 잘못이나 어리석음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이 비를 내리신다
9절부터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큰일을 하시고, 셀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하셔.」욥기 5:9 · 두루새김
엘리파즈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사람의 이해를 넘어선다고 고백합니다.
「땅에 비를 내리시고, 들판에 물을 보내 주셔.」욥기 5:10 · 두루새김
엘리파즈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기적이나 세상을 뒤흔드는 특별한 사건을 예로 들지 않습니다. 땅에 내리는 비를 이야기합니다.
비는 자연스럽게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가 부족한 땅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비가 내려야 씨앗이 자라고, 들판이 살아나며, 사람과 가축이 먹을 것을 얻습니다. 따라서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단순한 자연현상의 묘사가 아닙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은 반드시 사람의 눈에 초자연적인 사건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반복되는 비조차 하나님의 돌보심을 보여 주는 선물입니다.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은 낮은 사람을 높이신다
11절에서 하나님의 행동은 자연에서 인간 사회로 옮겨 갑니다.
「그렇게 낮은 사람들을 높은 곳에 세우시려는 거야. 슬퍼하는 사람들은 높이 올라 안전하게 돼.」욥기 5:11 · 두루새김
비가 내려 땅이 살아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낮은 사람을 일으키시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다시 안전을 주십니다.
사무엘상 2:7–8에서 한나의 노래는 하나님이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켜 높은 자리에 앉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엘리파즈의 말도 이러한 신앙과 연결됩니다.
그가 묘사하는 하나님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 돌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을 높이시고, 안전을 잃은 이들에게 다시 설 자리를 마련하시는 분입니다.
이 대목에서 엘리파즈가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내용은 욥의 현실에 실제적인 희망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욥은 지금 낮아진 사람입니다. 가족과 재산을 잃었고, 몸은 병들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이전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의 발언은 곧바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향합니다.
지혜롭다는 사람이 자기 꾀에 붙잡힌다
12–14절은 하나님이 교활한 사람들의 계획을 무너뜨리시는 모습을 그립니다.
「교활한 사람들의 계획을 꺾으셔서, 그들이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셔.」욥기 5:12 · 두루새김
「지혜로운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꾀로 붙잡으시고, 비뚤어진 사람들의 계획은 금세 무너지고 말아.」욥기 5:13 · 두루새김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꾀로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을 빈틈없이 세웠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계획 자체가 그들을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 모습은 시편 7:15–16에 등장하는 악인의 운명과도 닮았습니다. 악인은 함정을 파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구덩이에 빠집니다.
이러한 뒤바뀜은 14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들은 대낮에 어둠을 만나고, 한낮에도 밤처럼 더듬거려.」욥기 5:14 · 두루새김
대낮은 세상을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자기 지혜를 믿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사람들은 한낮에도 길을 찾지 못합니다. 빛이 충분히 있어도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사람의 지혜를 뒤집으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계획이 아무리 빈틈없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엘리파즈 자신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험을 가지고 있고, 삶의 원칙을 알고 있으며, 욥에게 어떤 길이 옳은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모르는 욥의 사정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혜롭다는 사람을 자기 꾀로 붙잡으신다는 말은 엘리파즈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경고처럼 들립니다. 이것은 엘리파즈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독자가 그 발언을 이야기 전체의 문맥에서 들을 때 생기는 역설입니다.
자기 지혜를 지나치게 믿지 말라는 진리가, 그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에게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의 희망과 입을 다문 불의
15–16절에서 하나님이 교활한 사람들을 무너뜨리시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칼날에서, 교활한 사람들의 입에서, 또 힘센 사람의 손에서 구해 주셔.」욥기 5:15 · 두루새김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희망이 생기고, 불의는 입을 다물게 돼.」욥기 5:16 · 두루새김
15절에서 두루새김이 「칼날에서, 교활한 사람들의 입에서」로 옮긴 원문 표현에는 문법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칼과 같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읽을 수도 있고, 칼과 입이라는 두 가지 위험을 나란히 놓은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힘센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해치는 방식에는 몸에 가하는 폭력뿐 아니라 말로 하는 위협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상황을 바꾸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불의한 사람들의 계획을 깨뜨리시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불의는 단순히 행동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자기 행동을 옳다고 내세우며 자기 힘을 주장하던 입까지 닫힙니다.
이 장면은 1절에서 시작한 엘리파즈의 말과도 대조됩니다. 그는 욥에게 대답할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며 말을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불의의 입을 닫으신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약자의 편에 서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어느 자리에 서 있는 사람입니까?
그는 다른 사람을 짓밟는 힘센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입니까? 욥기의 앞선 장면들이 보여 준 욥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낮은 사람을 일으키시고 가난한 사람을 구하신다는 엘리파즈의 말은 욥에게 적용될 수 있는 희망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욥의 고난을 그의 잘못에 대한 벌로 해석할 근거는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모습은 이사야 59:10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 공동체가 대낮에도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더듬는다고 말하는 모습과도 주제상 연결됩니다. 또 5:13의 「지혜로운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꾀로 붙잡으시고」라는 문장은 신약의 고린도전서 3:19에서도 직접 인용됩니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이 인용이 의미하는 것은 엘리파즈가 말한 해당 원칙이 성경의 다른 문맥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엘리파즈가 욥의 고난에 대해 내린 모든 판단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꾸지람을 듣는 사람은 행복해」
가장 아름다운 말이 가장 위험한 판단이 되는 순간
17절은 엘리파즈의 발언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하나님께 꾸지람을 듣는 사람은 행복해. 그러니 샤다이께서 바로잡으시는 일을 거부하지 마.」욥기 5:17 · 두루새김
지금까지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는 욥이 자신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직접 가르칩니다.
잠언 3:11–12에서도 여호와야훼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꾸짖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엘리파즈가 말하는 원칙 자체를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고 바로잡으시는 분이라는 것은 구약의 중요한 신앙입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사람을 바로잡으실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 욥의 고난도 하나님이 바로잡으시는 일이라는 증거가 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욥의 재난이 그가 저지른 어떤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본문이 말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욥이 온전함을 굳게 붙들고 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파즈의 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바로잡으시는 일의 가치를 인정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 생각을 욥이 겪는 재난에 적용하는 판단입니다.
그는 욥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고쳐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욥이 어떤 죄 때문에 자녀들을 잃고 몸이 병들었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미 한 가지 해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꾸짖고 계시며, 욥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고난의 의미는 욥이 경험한 현실에서 발견되기보다, 엘리파즈가 가지고 있던 설명의 틀에 따라 정해집니다.
이것이 그의 위로가 가진 가장 큰 한계입니다.
상처를 내는 손과 싸매는 손
18절은 하나님을 매우 인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그분은 아프게도 하시고 상처를 싸매기도 하셔. 짓부수기도 하시고 두 손으로 고치기도 하시거든.」욥기 5:18 · 두루새김
앞부분의 고통스러운 행동과 뒷부분의 상처를 고치는 행동이 서로 대조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한 분입니다. 여기서 욥이 상상해야 할 하나님은 단순히 고통을 주시는 분도 아니고, 고통과 아무 관계 없이 치료만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상처를 허락하시거나 내실 수 있지만 그 상처를 싸매시고 고치실 능력도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18절에서 놓치기 쉬운 표현은 「두 손으로」입니다.
히브리어는 손을 나타내는 낱말의 쌍수형을 사용합니다. 두 손을 가리키는 형태입니다. 사람이 상처를 싸맬 때 두 손으로 붕대를 감고 치료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하나님을 멀리서 명령만 내리시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직접 손을 사용하여 고치시는 분으로 그립니다.
욥의 몸은 실제로 상처 입었습니다. 그는 지금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엘리파즈가 하나님이 고치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욥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그 상처를 내셨다고 판단하려면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상처를 고치실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상처가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라는 판단 없이도 참될 수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한 문장 안에 연결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위로는 욥에게 하나의 조건을 제시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금의 고통을 하나님이 바로잡으시는 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그 고통을 끝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행복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슈레입니다. 시편 1:1에서 복 있는 사람을 소개할 때 사용되는 표현과 같은 낱말입니다. 또한 두루새김이 「바로잡으시는 일」로 옮긴 원어는 가르침과 잘못을 고치는 일, 징계를 포함하는 낱말입니다. 단순한 처벌보다 넓은 뜻을 가지며, 잘못된 길을 바로잡고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교육적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18절의 표현은 신명기 32:39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고 고치기도 하시는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6:1에도 하나님이 찢으셨으나 다시 고치시고, 치셨으나 싸매실 것이라는 고백이 등장합니다. 한편 잠언은 일반적으로 지혜로운 삶이 가져오는 좋은 결과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전도서 8:14는 의로운 사람이 악인에게 돌아갈 일을 겪고, 악인이 의로운 사람에게 돌아갈 일을 겪는 현실을 관찰합니다. 구약은 인간의 삶에 하나님의 공정하고 올바른 질서가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사건이 그 질서에 따라 곧바로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여섯 가지 어려움에서, 일곱 가지에서도
일곱 가지 어려움은 무엇을 뜻하는가
19절에서 엘리파즈는 이렇게 약속합니다.
「여섯 가지 어려움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건져 주실 거야. 일곱 가지 어려움이 닥쳐도 재앙이 네게 닿지 않을 거야.」욥기 5:19 · 두루새김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는 정확히 여섯 번이나 일곱 번의 재난을 계산하는 숫자로 읽기보다, 많은 재난을 거쳐 마지막까지 보호받는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히브리어 시에서는 이러한 숫자의 증가를 통해 완전함이나 강조를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잠언 6:16에서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여섯 가지, 곧 일곱 가지가 언급됩니다.
여기에서 그의 말투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행하시는 일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너를 건져 주실 거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관한 설명이 욥 개인의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파즈가 가진 확신을 보여 줍니다. 그는 욥이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시는 일을 받아들이면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아직 그러한 약속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엘리파즈가 말하는 미래는 하나님이 이 장에서 욥에게 직접 주신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에 대한 엘리파즈 자신의 이해에서 나온 예상입니다.
굶주림과 전쟁과 혀의 채찍
20–22절은 하나님이 욥을 보호하실 구체적인 위험들을 나열합니다.
「굶주릴 때에는 죽음에서, 전쟁 때에는 칼날에서 너를 구해 주실 거야.」욥기 5:20 · 두루새김
「너는 혀의 채찍으로부터 보호받고, 재앙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욥기 5:21 · 두루새김
「너는 재앙과 굶주림을 비웃게 될 거야. 들짐승도 두려워하지 마.」욥기 5:22 · 두루새김
이 위험들은 크게 몇 가지로 묶을 수 있습니다. 굶주림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먹을 것이 사라지는 일입니다. 전쟁과 칼날은 사람이 일으키는 폭력입니다. 혀의 채찍은 말로 가해지는 공격이며, 재앙과 들짐승은 생활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들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목록은 이미 욥이 겪은 일들과 여러 면에서 닮았습니다. 그의 가축과 재산은 빼앗겼습니다. 일꾼들은 칼에 죽었습니다. 자녀들이 모여 있던 집은 무너졌습니다. 지금은 자기 몸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엘리파즈가 약속하는 안전은 욥이 이미 잃어버린 안전입니다.
혀는 본래 말을 하는 기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채찍이 될 수 있습니다. 몸을 때리지 않아도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엘리파즈가 자신의 말을 염두에 두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욥을 비난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엘리파즈의 말이 욥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앞에서 엘리파즈는 어리석은 사람의 자녀가 보호받지 못하고 그의 재산이 빼앗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욥의 고난을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시는 일로 받아들이라고 권했습니다. 그 말들이 욥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엘리파즈가 일부러 욥을 공격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장면을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위로하려는 말도, 그 사람의 현실을 잘못 판단하면 상처를 내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들판의 돌들과 맺는 약속
23절은 이 장에서 가장 독특한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너는 들판의 돌들과 약속을 맺은 사이가 되고, 들짐승들도 너와 평화롭게 지낼 테니까.」욥기 5:23 · 두루새김
돌들과 약속을 맺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원문에는 실제로 ‘언약’ 또는 ‘맹약’을 뜻하는 낱말이 사용됩니다. 사람 사이에 맺는 언약을 나타낼 때에도 쓰이는 낱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돌들과 약속을 맺습니다. 돌은 사람과 말을 주고받거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이 사람에게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를 시적으로 표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들판의 돌은 농사와 이동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들짐승도 가축과 사람에게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파즈가 그려 주는 회복의 세계에서는 이 모든 것이 더 이상 사람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 전체가 욥에게 좋은 환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의 재산은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겼고, 하늘에서 떨어진 불과 광야에서 불어온 바람으로 집안이 무너졌습니다. 욥은 사람에게서도, 자연에서 일어난 사건들에서도 안전을 얻지 못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런 욥에게 모든 것이 다시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 약속은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재난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한 약속이라는 한계도 지닙니다.
조금 더 깊이
호세아 2:18에서도 하나님이 들짐승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전쟁의 위험을 없애 백성이 안전하게 눕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본문은 자연과 사람이 서로 적이 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평안한 천막, 많은 자녀, 제때의 죽음
집에 돌아가도 없어진 것이 없을 것이다
24절에서 엘리파즈는 욥에게 약속합니다.
「네 천막이 평안한 것을 알게 되고, 네가 사는 곳을 살펴보아도 없어진 것이 없을 거야.」욥기 5:24 · 두루새김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자연의 평화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이것은 풍요로운 생활뿐 아니라 일상의 안정을 나타냅니다.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평안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שָׁלוֹם)는 단순히 전쟁이 없거나 다툼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삶이 온전하고 안전하며 잘 유지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낱말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 집안을 둘러보며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가축은 사라졌고, 일꾼들은 죽었으며, 자녀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없어진 것이 없을 거야」라는 말은 그에게 너무도 먼 현실입니다. 그가 잃은 것은 단순히 물건이 아닙니다.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녀가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
25절은 더욱 직접적으로 욥의 상실을 건드립니다.
「네 후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네 자손이 땅의 풀처럼 많다는 것을 말이야.」욥기 5:25 · 두루새김
자손이 땅의 풀처럼 많다는 말은 풍성한 생명과 번영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축복의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일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창세기 13:16). 물론 두 구절의 비유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자손을 하나님의 복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이것은 욥에게 앞으로도 가정과 미래가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쉽게 기뻐하기 어렵습니다. 욥에게 이미 자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녀를 한 명도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일곱 아들과 세 딸이 있었고, 그 자녀들이 함께 잔치를 벌이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이제 그 자녀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설령 미래에 새로운 자녀들이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이미 죽은 자녀들과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본문은 엘리파즈가 이런 차이를 얼마나 깊이 생각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다시 번영을 주실 수 있다는 희망일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것은 복일 수 있지만, 그것이 잃어버린 생명의 의미를 지우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욥기의 마지막 장면까지 염두에 두고 읽을 때에도 중요한 구별입니다. 미래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가 상실 자체를 가볍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엘리파즈의 약속에는 참된 희망의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욥에게 닿으려면, 먼저 그가 잃어버린 사람들이 저마다 지닌 의미가 인정되어야 합니다.
곡식더미가 제때 쌓이듯이
26절에서 엘리파즈는 욥의 삶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까지 말합니다.
「너는 충분히 나이를 먹고 무덤에 들어갈 거야. 곡식더미가 제때 쌓이듯이 말이야.」욥기 5:26 · 두루새김
곡식은 씨앗으로 시작해 자라고 익습니다. 수확할 때가 되면 거두어져 쌓입니다. 엘리파즈는 사람의 삶도 그와 같기를 바랍니다. 충분히 살고, 때가 무르익어, 삶의 결실을 이룬 뒤에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욥의 탄식과 정반대입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날 때 죽지 않았던 이유를 물었습니다(3:11).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했고, 죽음을 쉼으로 상상했습니다. 엘리파즈는 그런 욥에게 오래 살다가 때가 되면 죽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위치는 너무나 다릅니다. 욥은 지금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을 찾습니다. 엘리파즈는 고난을 이겨 낸 뒤 완성된 삶의 끝에서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파즈의 말에는 땅과 농사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뿌리내립니다. 그가 거둔 곡식은 빼앗깁니다. 이어 고통은 땅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를 내려 땅을 적시십니다. 마지막에는 자손들이 땅의 풀처럼 많아지고, 사람의 삶은 제때 쌓이는 곡식더미처럼 완성됩니다.
엘리파즈의 말은 메마른 땅이 다시 풍요로워지는 하나의 긴 그림처럼 짜여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그림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파멸을 가져오고,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시는 일을 받아들이면 풍요가 회복된다는 순서입니다.
바로 그 질서 안에 욥의 재난을 넣으려는 것이 엘리파즈의 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 마지막의 동사는 ‘죄짓다’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는 히브리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낱말에는 어떤 표적을 맞히지 못하거나 놓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자기가 사는 곳을 살피는 문맥에 따라 「없어진 것이 없을 거야」로 옮겼습니다. 26절의 「충분히 나이를 먹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낱말입니다. 몸의 기운이 왕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수확의 이미지와 연결하여 충분히 나이 든 때나 삶이 완성되는 시기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충분히 나이를 먹고」로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곡식더미의 비유는 제때 이루어지는 완성된 삶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이고, 틀림없는 사실이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던 사람
엘리파즈는 마지막에 자신의 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펴본 것이고, 틀림없는 사실이야. 너도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알아 둬.」욥기 5:27 · 두루새김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앞에서 자신이 보았던 일을 이야기했고, 자신이 경험한 밤의 환상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자신의 판단을 넘어 「우리가 살펴본 것이고」라고 말합니다. 이 복수형은 개인의 경험을 넘어 함께 나누거나 전해 내려온 지혜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엘리파즈가 다른 두 친구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함께 조사했거나 뜻을 모았다는 의미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말을 충분한 근거를 가진 지식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9절에서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헤아릴 수 없는 큰일」을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곳의 「헤아릴 수 없는」이라는 표현에는 히브리어 헤케르(חֵקֶר)가 사용됩니다. 찾아 살피고 깊이 알아본다는 의미와 관련된 낱말입니다. 그런데 27절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이고」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동사는 같은 어근 하카르(חָקַר)에서 나옵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27절에서는 자신들이 충분히 살펴보았으며, 그 판단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말 그대로 앞뒤가 모순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삶의 어떤 원칙을 충분히 살펴보았다는 사실은 함께 참일 수 있습니다.
엘리파즈가 살펴본 것은 무엇인가요? 그는 악인이 파멸한다는 사례를 관찰했습니다. 하나님이 낮은 사람들을 높이시고 교활한 사람들을 넘어뜨리신다는 지혜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꾸지람을 듣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일어난 사건의 실제 원인은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는 욥에게 자신의 가르침이 옳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헤아릴 수 없는 일을 하신다고 믿으면서도, 지금 하나님이 욥에게 하시는 일은 자신이 이미 헤아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새로운 설명을 받아들이는 일만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엘리파즈가 제시한 원칙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질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없어진 것이 없는 천막을 약속받은 사람
엘리파즈의 말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끝나 갑니다.
들판의 돌들이 사람과 약속을 맺고, 들짐승들이 평화롭게 지냅니다. 집안에는 없어진 것이 없으며, 자손들은 땅의 풀처럼 많아집니다. 충분히 나이를 먹으면 곡식더미가 제때 쌓이듯이 무덤에 들어갑니다. 그곳에는 두려움도 없고, 굶주림도 없고, 상실도 없습니다.
엘리파즈는 욥이 그런 삶을 다시 얻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욥기 5장을 읽으며 엘리파즈의 말을 모두 거짓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시고, 교활한 사람의 계획을 꺾으시며, 상처를 싸매고 고치시는 분입니다. 그의 설명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명은 욥의 현실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중요한 사실은, 신앙의 진리가 잘못된 판단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기 5장에서 엘리파즈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고백을 자신의 판단에도 적용했다면, 욥의 고통에 대해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다시 일으키실 수 있다고 말하되, 지금 그에게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다는 희망과, 지금 겪는 고통이 반드시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판단은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하나의 묶음이 아닙니다. 회복을 바라보는 믿음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친 지금, 욥의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욥의 몸에는 여전히 종기가 있습니다. 빼앗긴 재산은 돌아오지 않았고, 죽은 자녀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엘리파즈는 「네 천막이 평안한 것을 알게 되고, 네가 사는 곳을 살펴보아도 없어진 것이 없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엘리파즈는 미래의 천막을 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집, 자손들이 많아지는 집, 평화롭게 삶을 마칠 수 있는 집입니다.
그러나 욥이 지금 돌아볼 수 있는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먹고 마시던 집은 무너졌습니다. 그곳을 지키던 사람들도, 그 안에서 살던 자녀들도 이제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은 확신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펴본 것이고, 틀림없는 사실이야.」 엘리파즈는 욥에게 자신의 설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욥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제대로 헤아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욥 앞에는 두 가지 현실이 놓여 있습니다.
친구가 확신하는 하나님의 질서와, 그 질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자신의 고통입니다.
엘리파즈는 말을 마쳤습니다.
욥은 여전히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