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다가오는 심판의 날

심판의 날에도 열려 있는 길

요엘 2장에는 뿔나팔을 불라는 명령이 두 번 나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나팔을 붑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해야 할 일이 다릅니다.

첫 번째 나팔은 다가오는 재앙을 알립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대비해야 하는 경보입니다. 두 번째 나팔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불러 모읍니다. 금식하고 기도하기 위한 소집입니다.

이 두 나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명령이 바뀌었을까요?

요엘 2장의 가장 큰 반전은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시던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앞둔 사람들에게 여전히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92장 본문 읽기 →

에덴의 동산을 광야로 만드는 군대

요엘 2:1–6 본문 →

「시온에서 뿔나팔을 불어라. 내 거룩한 산에서 경보를 울려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이가 떨지어다. 여호와야훼의 날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날이 가깝다.」요엘 2:1 · 본디새김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짙은 먹구름의 날이다. 수가 많고 강한 한 민족이 새벽빛처럼 산들 위에 펼쳐져 있다. 그와 같은 민족은 아득한 옛날부터 없었고, 그 뒤에도 대대로 이어지는 세월 동안 다시는 없을 것이다.요엘 2:2 · 본디새김

요엘이 묘사하는 여호와야훼의 날은 어둠으로 시작합니다.

「어둠과 암흑」, 「구름과 짙은 먹구름」이라는 표현이 겹치면서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새벽빛은 일반적으로 어둠이 물러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것이 희망의 빛이 아닙니다. 강력한 무리가 산등성이를 따라 넓게 퍼지는 모습에 비유됩니다.

재앙은 어느 한구석에서 조용히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산맥을 가로질러 넓게 펼쳐지며 다가옵니다.

그 앞에서는 불이 먹어 치웠고, 그 뒤에서는 불꽃이 태운다. 그 앞의 땅은 에덴의 동산 같지만, 그 뒤는 황폐한 광야다. 그것을 피해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요엘 2:3 · 본디새김

에덴은 창세기 2:8–15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두시고 살게 하신 동산입니다. 그곳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있으며, 강물이 흘러 동산을 적십니다. 그런데 요엘은 그와 같은 풍요로운 땅이 한순간에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운 광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마치 창조 세계의 풍요가 거꾸로 되돌아가는 듯합니다.

단지 열매가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땅이 생명을 기르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 듯합니다.

그 모습은 말들의 모습 같고, 그들은 준마들처럼 달린다.요엘 2:4 · 본디새김
그들이 산꼭대기들 위에서 뛰어오르는 소리는 병거 소리 같고, 검불을 먹어 치우는 불꽃 소리 같다. 그들은 전투 대열을 갖춘 강한 민족 같다.요엘 2:5 · 본디새김

요엘은 이 무리를 전쟁터에서 볼 법한 이미지들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표현을 자세히 보면 「같고」, 「처럼」이라는 비교가 거듭 등장합니다. 본문은 그들이 실제 기병대라고 단정하기보다, 말처럼 달리고 병거처럼 소리를 내는 무리라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메뚜기 떼입니까, 실제 침략군입니까?

특히 요엘은 재앙을 묘사할 때 자연재해와 군사적 침략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겹쳐 놓습니다. 그 결과 독자는 메뚜기 떼를 보면서 군대를 떠올리고, 군대의 진격을 읽으면서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메뚜기의 파괴력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재앙은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세계가 더 이상 인간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새벽빛처럼」이라는 표현과 뒤따르는 「수가 많고 강한 한 민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지 다소 여지가 있습니다. 새벽빛이 산 위에 퍼지는 듯한 무리의 진격을 묘사한다고 읽을 수도 있고, 어두운 기운이 산들을 덮는 모습을 강조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메뚜기로 읽는 근거는 강합니다. 떼를 지어 전진하고, 식물을 먹어 치우며, 산과 성벽과 집들을 넘어 침입하는 모습은 메뚜기 재앙과 잘 맞습니다. 더욱이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네 종류의 메뚜기를 「내 큰 군대」라고 부르십니다. 반면 실제 군대의 침략을 가리킨다고 읽는 근거도 있습니다. 성벽을 오르고 성읍에 침입하는 모습, 민족들이 두려워하는 장면, 20절에 등장하는 「북쪽에서 온 자」라는 표현은 적군의 침략을 연상시킵니다. 따라서 요엘 2장의 묘사를 단순히 메뚜기의 생태를 설명하는 글로 축소할 수도 없고, 메뚜기와의 연결을 무시한 채 특정한 역사적 침략군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군대의 지휘자는 누구인가

요엘 2:7–11 본문 →

요엘은 이제 이 군대가 얼마나 강한지보다 얼마나 질서정연한지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용사들처럼 달리고, 전사들처럼 성벽을 오른다. 각자 제 길로 가며, 자기들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요엘 2:7 · 본디새김
서로 밀치지 않고, 각자 제 큰길로 간다. 무기 사이로 뛰어들어도, 갈라지지 않는다.요엘 2:8 · 본디새김

여기에는 인간이 기대하는 방어 수단이 무력해지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성문을 잠그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안전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창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들은 성읍으로 달려들고, 성벽 위를 달리며, 집들 위로 올라간다. 도둑처럼 창문으로 들어간다.요엘 2:9 · 본디새김

성벽과 집은 원래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사람을 지키기 위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경계가 더 이상 보호막으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요엘의 시선이 갑자기 땅과 하늘로 확대됩니다.

그 앞에서 땅이 떨었고, 하늘이 흔들렸다. 해와 달이 어두워졌고, 별들이 제 빛을 거두었다.요엘 2: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땅의 풍요가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하늘의 빛까지 사라집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군대 앞에서 목소리를 냈다. 그의 진영이 매우 크기 때문이며, 그의 말을 실행하는 이가 강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여호와야훼의 날은 크고도 매우 두렵다. 누가 그날을 견딜 수 있겠느냐?요엘 2:11 · 본디새김

앞부분을 읽는 동안 독자는 이 군대가 하나님과 그 백성을 위협하는 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그 군대를 「자기 군대」라고 부르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한다고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재앙을 단지 멀리서 관찰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요엘의 예언에서 이 재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다만 이 진술을 근거로 모든 자연재해나 인간의 불행을 하나님께서 특정한 죄를 처벌하려고 직접 보내셨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요엘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정한 재난을 하나님의 군대라는 예언적 이미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분이 심판하시는 날에 자신들이 그 심판에서 자동으로 제외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요엘은 여기서 어떤 강한 왕이나 지혜로운 사람의 이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 자신의 다음 말씀을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해와 달과 별들은 창세기 1:14–18에서 낮과 밤을 구별하고 시간을 나타내는 역할을 맡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의 안정된 질서에 속합니다. 예언서에서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이 세계의 기존 질서를 뒤흔들 만큼 크다는 사실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이사야 13:10–13에도 이와 가까운 이미지가 나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요엘 2:12–14 본문 →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너희 마음을 다하여, 금식과 울음과 애곡으로 내게 돌아오라.」요엘 2:12 · 본디새김

요엘서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 가운데 하나입니다.

11절에서 누구도 견디기 어려운 심판을 선포하신 하나님께서, 12절에서는 그 심판 앞에 선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심판을 피할 방법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내게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어떤 행동을 고치라고 구체적으로 나열하기보다 먼저 「내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아가야 할 목적지가 특정한 제도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돌아오라. 그는 은혜롭고 자비로우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고 사랑이 풍성하며, 재앙을 두고 뜻을 돌이키기 때문이다.요엘 2:13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옷을 찢는 행위는 깊은 슬픔과 충격을 나타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실제로 바로 앞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금식과 울음과 애곡을 명령하셨습니다. 외적으로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옷을 찢는 일이 마음을 돌이키는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는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마음은 이전과 같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재난에 대응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옷이 아니라 마음이 찢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마음을 찢으라는 명령은 더 강렬한 감정을 느끼라는 요구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정당화하던 태도가 무너지고, 삶의 방향이 실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제야 하나님이 자비로운 분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심판 앞에 선 백성에게도 돌아올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요엘은 그 자비를 손쉽게 얻어 낼 수 있는 보상처럼 취급하지 않습니다.

누가 알겠느냐? 그가 돌아서서 뜻을 돌이키고 자기 뒤에 복을 남겨 둘지도 모른다. 그 복은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술 제물이다.요엘 2:14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왜 「누가 알겠느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를 미리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엘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지만, 그분의 모든 결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금식과 애곡이 하나님께 원하는 결과를 반드시 받아 내는 방법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백성은 당장 먹을 것조차 부족합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남겨 주실 복을 말하면서, 그 복으로 하나님께 다시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상황을 떠올립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는 관계의 회복을 바라는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앞서 3절에서는 침략하는 무리의 뒤에 황폐한 광야가 남았다는 점입니다.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남기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황폐함을 남기는 재앙과 복을 남기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요엘은 아직 회복을 보장받지 못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남겨 주실 수 있는 복을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문장은 출애굽기 34:6–7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과 성품을 드러내실 때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심각하게 훼손했습니다(출애굽기 32장). 그 후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며 자비와 은혜, 오래 참으심과 풍성한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요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성품을 근거로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촉구합니다. 14절의 「누가 알겠느냐?」와 비슷한 표현이 요나 3:9에도 등장합니다. 니느웨 왕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셔서 자신들이 멸망하지 않을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합니다. 요엘과 니느웨 왕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도, 그 자비를 권리처럼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랑과 신부까지 불러 모으는 기도

요엘 2:15–17 본문 →

시온에서 뿔나팔을 불어라. 금식을 거룩히 구별하고, 집회를 소집하라.요엘 2:15 · 본디새김

그러나 앞서 전쟁과 심판을 알리던 나팔이 이제는 예배를 위한 소집의 신호가 됩니다.

뿔나팔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민수기 10:1–10의 나팔 규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에는 백성을 소집하는 일과 위험 앞에서 경보를 울리는 일이 모두 등장합니다.

백성을 모아라. 회중을 거룩히 구별하라.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아이들과 젖을 빠는 아기들을 모아라. 신랑은 제 방에서, 신부는 제 신방에서 나올지어다.요엘 2:16 · 본디새김

장로들은 공동체에서 경험과 권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젖을 빠는 아기들까지 모으라고 합니다.

그 아기들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거나 재난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새로운 가정이 시작되는 기쁜 시간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자신들의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매우 개인적이고 중요한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그들까지 나오라고 합니다.

평소라면 존중받아야 할 개인적인 기쁨과 중요한 일정까지 뒤로 미루고, 온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실제로 기도의 말을 맡는 사람들은 제사장들입니다.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울지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지어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당신의 소유를 치욕거리로 넘기지 마시고, 민족들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어찌하여 뭇 백성 가운데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까?」요엘 2:17 · 본디새김

현관과 제단 사이는 성전의 예배 공간입니다. 제사장들은 백성이 얼마나 선한 일을 많이 했는지 열거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자비를 구합니다. 「당신의 백성」, 「당신의 소유」라는 표현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다른 민족들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시편 79:10에도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수치를 당하는 상황에서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운명과 하나님의 이름 사이에 놓인 관계를 기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백성이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세울 수 없는 자리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의 백성인지를 붙들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민족들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에는 번역상 갈림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을 외국 민족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이스라엘이 민족들 사이에서 조롱거리나 속담거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의 초점은 조금 다릅니다. 하나는 실제 지배와 예속의 위험을, 다른 하나는 공개적인 수치와 조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관심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 앞에서 치욕을 당하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까지 모욕받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다

요엘 2:18–20 본문 →

여호와야훼는 자기 땅을 위해 열성을 냈고,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겼다.요엘 2:18 · 본디새김

요엘 2장의 또 다른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17절까지는 백성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령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18절부터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서술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움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땅과 백성의 운명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열성은 백성을 향한 긍휼과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만 구해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살아가던 땅의 회복까지 약속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에게 대답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햇포도주와 새 기름을 보낸다. 너희는 그것으로 배부를 것이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민족들 가운데서 치욕거리로 만들지 않겠다.」요엘 2:19 · 본디새김

이 장면은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배고픔을 아시고, 땅의 생산이 멈춘 현실을 아시며, 먹을 것이 다시 생겨야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민족들 가운데서 치욕거리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수치의 문제를 언급하십니다.

기도의 말과 응답의 말이 서로 맞물립니다.

「북쪽에서 온 자를 내가 너희에게서 멀리 쫓아내고, 그를 메마르고 황폐한 땅으로 몰아내겠다. 그 앞부분은 동쪽 바다로, 그 뒷부분은 서쪽 바다로 몰아내겠다. 그의 악취가 올라오고, 그의 썩는 냄새가 올라올 것이다. 그가 큰일을 했기 때문이다.」요엘 2:20 · 본디새김

핵심은 침략하는 세력이 더 이상 땅에 머무르지 못하고 완전히 쫓겨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썩는 냄새가 올라온다는 말도 그 세력의 몰락을 강조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18절은 일반적인 과거 사건을 이어 서술할 때 사용되는 동사 형태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본디새김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자기 땅을 위해 열성을 내시고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 것으로 번역합니다. 요엘은 백성이 실제로 모두 모여 금식하고, 제사장들이 17절의 기도를 드렸다는 장면을 따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라는 명령 뒤에 곧바로 하나님의 응답을 전합니다. 이러한 서술을 실제로 기도가 드려지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예언자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자비를 마치 이미 일어난 사건처럼 선포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20절의 「북쪽에서 온 자」를 실제 침략군으로 읽는 경우, 북쪽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외국 군대가 진입하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14에서도 재앙이 북쪽에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반면 메뚜기 떼로 읽는 경우, 요엘이 재앙의 원천을 북쪽에서 오는 적군처럼 의인화하여 묘사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다른 부분들이 메뚜기와 군대의 이미지를 계속 겹쳐 놓기 때문에, 이 표현 하나만으로 둘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리에서 동쪽 바다는 사해, 서쪽 바다는 지중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큰일을 한 침략자보다 더 큰일을 하시는 하나님

요엘 2:21–23 본문 →

땅아, 두려워하지 마라.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여호와야훼가 큰일을 했기 때문이다.요엘 2:21 · 본디새김

20절에서는 「그가 큰일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2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큰일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같은 표현이 서로 정반대의 행동에 사용됩니다.

침략자의 큰일은 파괴입니다. 에덴 같은 땅을 황폐한 광야로 만들고, 사람들을 두렵게 하며, 생명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큰일은 회복입니다. 침략자를 물리치시고, 땅에 다시 생명이 자라게 하시며, 두려워하는 백성에게 기쁨을 되돌려 주시는 일입니다.

이전에는 재앙 앞에서 땅이 떨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땅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치 고통받던 땅 자체가 하나님의 위로를 듣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들의 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광야의 풀밭이 푸르게 돋아났기 때문이다. 나무가 제 열매를 맺었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제 소출을 냈기 때문이다.요엘 2:22 · 본디새김

들짐승들은 목초지가 사라지고 물이 말라 버리면서 생존을 위협받았습니다. 그들이 살아갈 환경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회복은 매우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습니다.

풀이 자랍니다.

포도나무가 포도를 생산합니다.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요엘의 이야기 속에서는 이러한 일상이 회복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그가 너희에게 의로움에 따라 이른 비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너희에게 비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예전처럼 내려 주었다.요엘 2:23 · 본디새김

기쁨의 명령은 땅에서 시작해 들짐승들을 거쳐 사람들에게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만 관심을 두고 나머지 세계를 단순한 배경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땅과 짐승들도 하나님의 회복을 누리는 대상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의 기쁨은 이렇게 회복된 세계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농업은 계절에 따라 내리는 비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이른 비는 건기를 지나 땅을 적시고 씨를 뿌릴 수 있게 하는 가을철의 비이고, 늦은 비는 곡식이 자라고 익어 가는 봄철에 중요한 비입니다. 신명기 11:14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백성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풍요와 하나님의 임재를 무조건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풍요롭다고 언제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거나 고난을 겪는다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도 아닙니다.

요엘서에서 회복된 풍요가 중요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특정한 재난을 겪은 백성에게 자신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보여 주시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3절은 단순히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기쁨의 중심에 하나님의 선물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계십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의 「의로움에 따라 이른 비」에서 「이른 비」로 옮긴 히브리어 모레(⁨מוֹרֶה⁩)는 「가르치는 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로움을 가르치는 이」로 이해하는 길도 있습니다. 비로 읽는 근거는 바로 다음에 「비」,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이어지고, 전체 문맥이 농업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 가르치는 이로 읽는 근거는 해당 낱말이 실제로 교사를 뜻할 수 있고, 「의로움에 따라」라는 말과 결합했을 때 의로운 가르침 또는 의로움을 가르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 표현만으로 특정한 교사나 구원자를 지목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의로움에 따라」가 정확히 어떤 기준이나 시간적 관계를 말하는지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은 이어지는 비의 묘사에 따라 이른 비로 옮기면서도, 남아 있는 불확실성을 번역 노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메뚜기가 먹어 치운 세월을 어떻게 되돌려 주는가

요엘 2:24–25 본문 →

타작마당들은 곡식으로 가득 차고, 즙통들은 햇포도주와 새 기름으로 넘칠 것이다.요엘 2:24 · 본디새김

이 표현들은 단순히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을 것을 얻게 된다는 약속보다 훨씬 풍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삶이 가까스로 유지되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 넉넉하게 먹을 수 있는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아르베 메뚜기와 옐레크 메뚜기, 하실 메뚜기와 가잠 메뚜기가 먹어 치운 세월을 내가 너희에게 되돌려 주겠다. 그것들은 내가 너희에게 보낸 내 큰 군대다.」요엘 2:25 · 본디새김

잃어버린 곡식을 다시 얻을 수는 있습니다. 새로운 포도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시간 자체를 다시 살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세월은 메뚜기의 피해를 입은 수확의 해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결실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농부에게 수확을 잃은 해는 단순히 소득이 적었던 한 해가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기다린 수고가 열매를 맺지 못한 시간입니다. 다음 해를 준비할 양식과 종자를 마련하기 어려워진 시간입니다. 가족을 먹이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이 흔들린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손실을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시간과 기회를 인생에서 반드시 같은 형태로 돌려받는다는 일반적인 법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요엘의 문맥에서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은 메뚜기 재앙으로 황폐해진 공동체의 수확과 생존 기반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군대를 통해 심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같은 하나님께서 그 군대가 먹어 치운 세월을 되돌려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분은 재앙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파괴된 삶을 다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는 서로 무관한 두 행동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네 메뚜기의 이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앞서 재앙의 전면적인 파괴를 묘사했던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름들은 더 이상 재앙의 규모를 알려 주기 위해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손실의 범위를 알려 줍니다.

백성이 잃어버린 것을 하나님께서 모르고 계시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르베가 먹은 것도, 옐레크가 먹은 것도, 하실과 가잠이 먹은 것도 하나님의 회복 약속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잃어버린 것을 잊으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 상실을 회복의 약속 속에 포함하십니다.

배부름보다 더 큰 회복

요엘 2:26–27 본문 →

「너희는 넉넉히 먹어 배부르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다. 내 백성은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요엘 2:26 · 본디새김

여기서 찬양은 굶주림과 상관없는 종교적 의무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실제로 누리는 삶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풍성해지는 것은 중요한 회복이지만, 요엘이 말하려는 마지막 회복은 그보다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내 백성은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이 다시 반복됩니다.

「내가 이스라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이며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내 백성은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요엘 2:27 · 본디새김

이 반복 사이에 요엘 2장 전체의 목적을 드러내는 선언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고, 곡식을 회복시키시고, 메뚜기의 피해를 보상하시는 데에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메뚜기 재앙으로 생활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집에 제물을 가져갈 수도 없었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신 것은 아닌지 두려워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을 수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응답이 바로 이 선언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한가운데 있다.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재앙의 군대 앞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시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같은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계신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백성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자비와 회복을 통해 그분의 임재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수치가 사라진다는 약속은 단순히 경제적 형편이 좋아져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게 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다시 굳게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알게 될 것이다」는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보다 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 인정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6:7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역에서 건져 내심으로 그들이 자신을 여호와야훼로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엘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는 행동을 통해 자신이 누구신지 알게 하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이가 없다」는 선언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야훼이시며, 그분 외에 다른 신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신명기 4:35, 39와 이사야 45:5–6에서 나타나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관한 선언과 연결됩니다.

「내가 이스라엘 한가운데 있다」

요엘 2:1–27 본문 →

요엘 2장은 처음에 「누가 그날을 견딜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회복시키셨습니다. 요엘 2장에서 가장 큰 회복은 사람들이 다시 먹을 것을 얻었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 백성인지를 다시 알게 됩니다.

황폐한 땅에는 비가 내립니다.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쌓이고, 즙통에는 포도주와 기름이 넘칩니다. 사람들은 오랜 굶주림 끝에 다시 배부르게 먹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비를 기다리고, 곡식을 거두고,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삶 한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