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메뚜기 떼의 재난

땅이 울기 시작할 때

요엘서는 이상한 재난으로 시작합니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아니고, 왕이 죄를 지었다는 고발도 아닙니다. 메뚜기들이 먹어 치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엘 1장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메뚜기가 얼마나 많이 먹었느냐가 아니라, 그 결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던 백성의 삶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엘은 이 모든 일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일어났다고 처음부터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지목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온 땅의 사람들에게 재난을 바라보라고, 울라고, 함께 모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왜 원인을 설명하기보다 먼저 울라고 하는 것일까요?

읽는 시간 15분소단락 71장 본문 읽기 →

기억해야 할 재난

요엘 1:1–4 본문 →

「장로들아, 이것을 들어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아, 귀를 기울여라. 너희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너희 조상들의 시대에라도 있었느냐?」요엘 1:2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재난의 규모를 강조합니다. 살아 있는 장로들도, 그들의 조상들에게서 전해 들은 기억 속에서도 좀처럼 찾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너희 자녀들에게 이야기하라. 너희 자녀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그 자녀들은 또 다른 세대에게 이야기하게 하라.」요엘 1:3 · 본디새김

여기에는 출애굽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역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0:1–2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에 내리신 표징들을 이스라엘의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이야기하게 하십니다. 이어지는 재앙이 바로 메뚜기 재앙입니다(출애굽기 10:12–15).

그때 메뚜기는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이집트를 무너뜨리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엘서에서는 메뚜기가 이스라엘의 땅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두 본문 사이에 의도적인 문학적 의존 관계가 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경 안에서 함께 읽을 때 드러나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이 구원받았던 이야기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땅에 닥친 재난도 기억해야 합니다.

「가잠 메뚜기가 남긴 것을 아르베 메뚜기가 먹어 치웠다. 아르베 메뚜기가 남긴 것을 옐레크 메뚜기가 먹어 치웠다. 옐레크 메뚜기가 남긴 것을 하실 메뚜기가 먹어 치웠다.」요엘 1:4 · 본디새김

핵심은 메뚜기가 네 종류라는 사실보다 반복되는 「남긴 것」에 있습니다.

보통 어떤 재난이 지나가면 살아남은 것을 가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남겨진 것조차 안전하지 않습니다. 거듭되는 재난 앞에서 회복의 밑천까지 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요엘은 자신을 「브두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지만, 어느 왕이 다스리던 때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요엘서에는 성전과 제사장들이 등장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예언의 정확한 연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네 가지 이름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서로 다른 메뚜기 종류인지, 성장 단계의 차이인지, 여러 차례 밀려온 무리를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를 침략한 군대

요엘 1:5–7 본문 →

「술 취한 자들아, 깨어서 울어라. 포도주를 마시는 모든 이들아, 달콤한 포도주를 두고 통곡하라. 그것이 너희 입에서 끊어졌기 때문이다.」요엘 1:5 · 본디새김

그런데 이들에게 술을 끊으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마시던 포도주가 더 이상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술 취함에 대한 일반적인 도덕적 훈계라기보다, 즐거움에 빠져 있던 사람들을 재난의 현실로 불러내는 외침에 가깝습니다.

요엘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는지 깨닫게 합니다.

「한 민족이 내 땅을 치러 올라왔기 때문이다. 강하고 그 수를 셀 수 없는 민족이다.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이고, 그것은 사자의 어금니를 지녔다.」요엘 1:6 · 본디새김

앞에서는 메뚜기라고 했는데, 이제는 「한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요엘은 메뚜기 떼를 침략하는 군대처럼 묘사하고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메뚜기에게 사자의 이빨이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생김새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물어뜯기 시작하면 막을 수 없는 파괴력을 드러내는 비유입니다.

「그것이 내 포도나무를 황폐하게 만들고, 내 무화과나무를 부러뜨렸다. 그 나무를 완전히 벗겨 내던졌고, 그 가지들은 하얗게 되었다.」요엘 1:7 · 본디새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단순한 식량 공급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는 모습은 전쟁과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을 나타내기도 합니다(열왕기상 4:25; 미가 4:4).

요엘은 평화를 상징할 수 있었던 나무들이 무방비 상태로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왕궁이 무너졌다는 말은 없지만, 백성이 안전하게 살아간다고 느끼게 해 주던 삶의 기반이 무너진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한 민족」이라는 표현을 실제 외국 군대의 침략까지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견해도 가능합니다. 특히 요엘 2장에서는 군대의 이미지가 더욱 강해집니다. 그러나 1장에서는 메뚜기의 식물 파괴 행위가 구체적으로 이어지므로, 우선 메뚜기 재앙을 군사적 침략의 언어로 묘사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6–7절에서는 「내 땅」, 「내 포도나무」, 「내 무화과나무」라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 25:23에서 하나님은 땅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요엘의 이 표현은 하나님 자신의 땅과 나무들이 황폐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됩니다. 반면 재난을 겪는 백성이나 그들을 대표하는 예언자의 탄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 앞에 새로운 발언자를 명시하는 표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이 재난이 단순히 익명의 농경지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가 맺어져 있는 땅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드러냅니다.

땅이 말라 가자 사람들의 기쁨도 말라 버렸다

요엘 1:8–12 본문 →

「너는 울부짖어라. 젊은 날의 남편을 두고 자루천을 두른 처녀처럼.」요엘 1:8 · 본디새김

이제 요엘은 재난을 농업의 손실이나 군사적 파괴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여인의 애도로 표현합니다.

남편을 잃은 젊은 여인의 슬픔은 단지 재산이나 생활 수단을 잃은 슬픔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갈 미래가 끊어진 슬픔입니다. 메뚜기로 인한 황폐함도 이와 같이 묘사됩니다. 올해의 수확만이 아니라 내일의 삶까지 위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슬픔의 중심이 성전으로 옮겨 갑니다.

「곡식 제물과 술 제물이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끊어졌다. 여호와야훼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애도했다.」요엘 1:9 · 본디새김

곡식 제물과 술 제물은 이스라엘의 제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민수기 28:3–8에 나오는 날마다 드리는 제사에는 고운 밀가루와 기름, 술 제물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밭에서 곡식이 사라지고 포도밭에서 포도가 사라졌으니, 예배에 필요한 것조차 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도 드릴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예배가 인간의 마음과 결심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곡식과 포도주도 먼저 땅에서 얻어야 합니다. 백성의 일상과 성전의 예배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들이 황폐해졌고, 땅이 애도했다. 곡식이 황폐해지고, 햇포도주가 말라 버리고, 새 기름이 쇠잔해졌기 때문이다.」요엘 1:10 · 본디새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이스라엘의 농경 생활을 대표하는 세 가지 산물입니다. 신명기 7:13에서도 이들이 땅에서 누리는 복의 일부로 등장합니다. 곡식은 일상의 식량이고, 포도주는 식탁과 잔치의 즐거움에 쓰이며, 기름은 음식과 여러 생활 용도 및 예배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요엘은 그 상황을 「땅이 애도했다」라고 표현합니다.

사람이 땅을 잃고 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땅 자체가 우는 존재처럼 그려집니다.

「농부들아, 부끄러워하라. 포도밭을 가꾸는 이들아, 밀과 보리를 두고 통곡하라. 들의 수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요엘 1:11 · 본디새김

농부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뜻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들의 구체적인 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수고와 기대가 무너지는 상황 앞에서 느끼는 참담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말라 버렸고, 무화과나무가 쇠잔해졌다. 석류나무도 대추야자나무도 사과나무도, 들의 모든 나무가 말라 버렸다. 참으로 사람들에게서 기쁨이 말라 버렸다.」요엘 1:12 · 본디새김

사람들의 기쁨이 사라졌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나무들처럼 「말라 버렸다」고 합니다. 땅에서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상황이 사람들의 마음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바깥의 황폐함과 안쪽의 슬픔이 하나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울부짖어라」(⁨אָלָה⁩)는 여성 단수 명령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명령하는지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시온이나 땅을 한 여인으로 의인화한 것일 수 있고, 공동체 전체를 여성의 모습으로 부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특정한 청자를 상정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제물을 드릴 수 없을 때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요엘 1:13–14 본문 →

「제사장들아, 자루천을 두르고 애곡하라. 제단을 섬기는 이들아, 통곡하라. 내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아, 와서 자루천을 입고 밤을 지새워라. 곡식 제물과 술 제물이 너희 하나님의 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요엘 1:13 · 본디새김

자루천은 슬픔과 애도를 나타내는 거친 옷이었습니다. 밤을 지새우라는 명령은 제사장들의 애도가 잠깐의 의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제물을 드릴 수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까지 막힌 것은 아닙니다.

「금식을 거룩히 구별하고, 집회를 소집하라. 장로들과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모으고, 여호와야훼에게 부르짖어라.」요엘 1:14 · 본디새김

앞에서 먹을 것이 끊어졌다는 사실이 재난의 징표였다면, 이제 공동체는 자발적인 금식을 통해 그 현실을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는 온 공동체가 재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2절에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듣고 귀를 기울이라고 했던 명령이, 14절에서는 함께 모여 부르짖으라는 명령으로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재난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 장면은 열왕기상 8:37–40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 기도와도 연결됩니다. 솔로몬은 기근이나 메뚜기 재앙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기를 구했습니다. 요엘은 바로 그런 재난 앞에서 실제로 공동체를 하나님의 집으로 불러 모읍니다.

요엘 1장은 아직 어떤 죄를 회개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금식하면 재난이 곧바로 사라진다는 약속도 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가장 먼저 요청되는 것은 상황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같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상실을 안고 같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에 하나가 됩니다.

재난은 왜 「여호와야훼의 날」을 생각하게 하는가

요엘 1:15–18 본문 →

「아, 그날이여. 참으로 여호와야훼의 날이 가깝다. 샤다이에게서 오는 파괴처럼 닥칠 것이다.」요엘 1:15 · 본디새김

여기서 요엘 1장의 시야가 다시 넓어집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야훼의 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과 심판을 드러내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동으로 승리와 안전을 보장하는 날이 아닙니다. 아모스 5:18–20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날을 무조건적인 구원의 날로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자기편이라고 여기는 것만으로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재난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사건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지금의 재난을 앞으로 닥칠 더 큰 여호와야훼의 날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요엘 1장의 표현은 두 측면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백성은 이미 파괴를 경험하고 있지만, 15절은 여호와야훼의 날이 다가온다는 미래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어서 요엘은 다시 눈앞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먹을 것이 우리 눈앞에서 끊어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집에서 끊어지지 않았느냐?」요엘 1:16 · 본디새김

하나님의 날이라는 말을 듣고 먼 미래의 사건만 생각하지 말라는 듯, 요엘은 「우리 눈앞」을 가리킵니다. 특히 여기서는 「우리」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요엘은 멀리서 재난을 관찰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 고통을 겪는 공동체 안에 서서 말합니다.

「씨앗들이 그들의 삽 아래에서 쪼그라들었다. 창고들이 황폐해졌고, 곡간들이 허물어졌다. 곡식이 말라 버렸기 때문이다.」요엘 1:17 · 본디새김

창고는 수확한 것을 보관하고 다음 시기를 준비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안에 채워 넣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난은 단지 현재의 배고픔에 그치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생산과 저장, 생활의 지속성까지 위협합니다.

「가축들이 어찌 이리 신음하는가. 소 떼가 풀 뜯을 곳이 없어 어쩔 줄 몰라 한다. 양과 염소 떼도 벌을 받고 있다.」요엘 1:18 · 본디새김

여기서 양과 염소 떼가 「벌을 받고 있다」는 표현을 동물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처벌받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이유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겪는 재난이 다른 생명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신명기 28:38–42 같은 본문에서 메뚜기는 언약을 어긴 백성이 겪게 될 재앙의 하나로 언급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엘의 청중이 이 재난을 언약적 심판의 가능성과 연결해 생각할 근거는 있습니다. 그러나 요엘 1장은 특정한 사람들의 잘못과 각각의 피해를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람과 가축, 들판과 성전이 함께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재난의 신학적 의미를 생각하는 것과 고통받는 존재들에게 곧바로 죄책을 돌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3:6에도 요엘 1:15와 매우 가까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어느 본문이 다른 본문을 사용했는지는 이 표현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두 본문 모두 여호와야훼의 날을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과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17절 첫 행의 히브리어는 여러 낱말의 뜻이 불확실하여 정확한 장면을 재구성하기 어렵습니다. 씨앗이 흙 속에서 상한 모습인지, 다른 종류의 농업적 황폐함을 묘사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들짐승들까지 하나님을 찾는다

요엘 1:19–20 본문 →

「여호와야훼, 제가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불이 광야의 풀밭을 먹어 치웠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태웠기 때문입니다.」요엘 1:19 · 본디새김

지금까지 그는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하고, 울라고 하고, 모이라고 하고, 부르짖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그 명령을 자신이 실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던 사람이 이제 사람들의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부터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불에 타 버린 풀밭과 나무들을 이야기합니다.

4절에서는 메뚜기가 남은 것을 차례로 「먹어 치웠다」.

19–20절에서는 불이 풀밭을 「먹어 치웠다」.

그러는 동안 정작 먹어야 할 사람과 짐승들은 먹을 것을 잃었습니다.

「들의 짐승들도 당신을 갈망합니다. 물길들이 말라 버렸고, 불이 광야의 풀밭을 먹어 치웠기 때문입니다.」요엘 1:20 · 본디새김

요엘은 들짐승들이 말로 기도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마름을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표현합니다. 본문은 인간의 생존뿐 아니라 다른 생명들의 생존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부를 수 없는 짐승들도 그분의 돌보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땅과 식물과 동물과 인간을 모두 창조하신다는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또한 시편 104편에서 하나님께서 땅에 물을 공급하시고 짐승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모습과도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광야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모래사막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가축들이 풀을 뜯을 수 있는 초지와 목초지가 포함되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광야의 풀밭이 불에 탔다는 말은 사람이 살기 힘들다는 뜻을 넘어, 가축과 야생동물이 먹고살 수 있는 영역까지 파괴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불이 실제 화재를 가리키는지, 극심한 가뭄과 열기로 땅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물길들이 말랐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물의 부족과 식생의 파괴가 함께 나타난 것은 분명합니다. 시편에서는 사슴이 물을 찾는 모습이 시인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심정을 표현하는 비유가 됩니다. 요엘에서는 재난 속의 들짐승들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마르지 않은 하나의 방향

요엘 1:1–20 본문 →

요엘의 답은 먼저 하나님께 돌아서서 그분께 말하라는 것입니다. 탄식은 모든 의문이 풀린 뒤에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상황을 바꿀 힘도 없을 때, 바로 그 현실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말입니다.

요엘 1장은 회복의 장면 없이 끝납니다.

하늘이 다시 비를 내리기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메뚜기가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백성에게 밝은 미래가 보장되었다는 선언도 아직 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한 예언자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서는 물을 잃은 들짐승들이 마른 물길 앞에 서 있습니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하나님께 바칠 제물도 남지 않은 땅에서, 예언자는 여전히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의 기도와 짐승들의 갈망은 이제 같은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요엘 1장은 그 부르짖음이 아직 응답받지 않은 자리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