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3–21장 · 지파별로 나눈 땅
경계 안에 남겨진 사람들
여호수아 16장은 열 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요셉 자손에게 주어진 땅의 경계를 설명합니다. 요단에서 시작한 경계는 벧엘과 벳 호론을 지나 서쪽 바다에 이릅니다. 이어 에브라임 지파의 몫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 성격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브라임은 게제르 주민들을 몰아내지 않았지만, 그들을 노동에 동원할 만큼의 지배력은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에브라임은 하나님께서 주신 상속 재산을 어떤 방식으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여호수아 16장은 땅의 소유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 그 땅에서 누가 누구를 지배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에 이릅니다.
요셉에게 두 지파가 생긴 이유
경계는 요셉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요셉 자손이 제비뽑아 받은 몫은 여리고 쪽 요단에서 시작해 여리고 동쪽 물가로 이어지고, 여리고에서 산지를 거쳐 벧엘로 올라가는 광야로 이어졌다.여호수아 16:1 · 본디새김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이스라엘의 땅 분배에서는 그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지파의 몫을 받습니다.
요셉 자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상속 재산을 받았다.여호수아 16:4 · 본디새김
왜 요셉에게는 이러한 두 몫이 주어졌을까요?
그 배경은 창세기 48장에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생애의 마지막을 보내던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창세기 48:5에서 야곱은 요셉에게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48:22에서는 요셉에게 형제들보다 한 몫을 더 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48장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장자인 므낫세보다 동생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요셉이 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야곱은 자신이 그렇게 한 줄 알고 있다고 대답하며 에브라임이 더 크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창세기 48:13–20).
이제 여호수아 16장을 보면 4절에서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순서로 이름을 부르지만, 5절부터는 에브라임의 상속 재산을 먼저 설명합니다. 므낫세의 본격적인 분배 기록은 17장에 나옵니다.
에브라임이 먼저 소개되는 이유를 오직 야곱의 축복 때문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48장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이러한 배열은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창세기의 가족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지파와 영토를 설명하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속한 두 지파
1–3절은 요셉 자손 전체의 경계를 소개하고, 4절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상속 재산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5절부터 에브라임의 경계가 따로 나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각각 독립된 상속 재산을 가진 지파이지만, 동시에 요셉이라는 공동의 조상 아래 묶여 있습니다. 이미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요단 동쪽에서 땅을 받았습니다(여호수아 13:29–31). 이제 요셉 자손의 나머지 상속 재산이 요단 서쪽에서 분배됩니다.
따라서 16장 1–3절의 경계 설명과 5–8절의 에브라임 경계 설명은 단순한 중복이 아닙니다. 먼저 요셉 자손에게 배정된 영역의 한쪽 경계를 제시하고, 그 안에서 에브라임의 몫을 더 구체적으로 밝히는 흐름입니다.
여리고에서 벧엘로 — 조상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땅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요셉 자손의 경계는 여리고 쪽 요단에서 출발합니다.
경계는 여리고 동쪽 물가를 지나 광야로 이어지고, 산지를 거쳐 벧엘로 올라갑니다. 이어 아르키 사람들과 야플레티 사람들의 경계를 지나 아래 벳 호론과 게제르를 거쳐 서쪽 바다에 이릅니다.
여리고는 요단 계곡의 낮은 지역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벧엘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중앙 산지로 올라가야 합니다. 본문이 「올라가는 광야」라고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관용어가 아니라 실제 지형의 높낮이와도 연결됩니다.
서쪽에서는 다시 벳 호론을 거쳐 게제르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벳 호론에는 위 벳 호론과 아래 벳 호론이라는 두 지명이 있습니다.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서로 다른 고도에 놓인 성읍들입니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길은 중앙 산지와 서쪽 평야를 연결하는 통로였습니다.
여호수아 10:10–11에서는 기브온 전투에서 패배한 적들이 벳 호론의 내리막길로 도망하다가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벧엘과 루즈는 같은 곳인가?
그 경계는 벧엘에서 루즈로 나아가, 아타롯에 있는 아르키 사람들의 경계로 지나갔다.여호수아 16:2 · 본디새김
창세기 28:19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장소를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성읍의 옛 이름은 루즈였다고 설명합니다. 여호수아 18:13에서도 루즈를 벧엘과 연결하여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수아 16:2는 「벧엘에서 루즈로 나아가」라고 표현할까요? 같은 장소라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떠나는 길에 벧엘에서 꿈을 꾸고 하나님의 약속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그의 자손에게 그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창세기 28:13).
그때 야곱은 혼자 길을 떠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직 자신의 땅에 정착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 자손들이 하나의 민족을 이룬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6장에서는 그 야곱의 자손들이 벧엘을 포함하는 지역의 경계를 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벧엘이라는 이름이 본문에서 특별한 상징을 의도적으로 담고 있다는 단정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가 발견할 수 있는 정경적 연결입니다.
야곱이 나그네로 지나가던 땅이 이제 그의 자손들이 상속 재산으로 받는 땅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벧엘이 성읍 자체만이 아니라 그 일대의 장소를 가리키고, 루즈는 더 구체적인 거주지를 가리켰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는 서로 다른 시대와 지리적 전승에서 사용하던 지명들이 경계 기록에 함께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고대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의 일부 본문 전승에는 벧엘과 루즈의 관계를 달리 읽게 하는 형태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어느 설명이 정확한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에브라임의 경계 — 한 줄로 그릴 수 없는 땅
5절부터는 에브라임 지파의 몫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에브라임 자손의 씨족별 경계는 이러했다. 그들이 상속 재산으로 받은 땅의 동쪽 경계는 아트롯 아다르에서 위 벳 호론까지였다.여호수아 16:5 · 본디새김
이어서 경계는 미크므탓, 타아낫 실로, 야노아, 아타롯, 나아라, 여리고와 요단으로 이어집니다. 8절에서는 타푸아에서 카나 개천을 따라 서쪽 바다에 이르는 경계를 기록합니다.
경계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다
5절은 동쪽 경계를 설명한다고 하면서 아트롯 아다르에서 위 벳 호론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제시합니다. 6절은 경계가 서쪽으로 나아간다고 하다가, 미크므탓에서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문제의 일부는 고대 지명들의 정확한 위치가 모두 확인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 기록은 오늘날의 측량도가 아니라, 특정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어지는 경계와 지형을 말로 설명한 문서입니다. 따라서 각 지명의 위치를 가정한 뒤 본문의 방향 표현을 모두 일치시키려 하면, 오히려 본문에 없는 경로를 만들어 낼 위험이 있습니다.
다만 전체적으로는 에브라임의 상속 재산이 가나안 중앙 산지에 놓여 있고, 남쪽으로는 뒤에 베냐민에게 분배될 지역과 접하며, 북쪽으로는 므낫세의 영역과 이어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여호수아 17:7–10; 18:12–14).
타푸아에서 그 경계는 서쪽으로 나아가 카나 개천에 이르렀고, 그 끝은 바다에 이르렀다. 이것이 에브라임 자손의 지파가 씨족별로 받은 상속 재산이었다.여호수아 16:8 · 본디새김
여호수아 17:8–9에 따르면 타푸아 지역은 므낫세에 속했지만, 경계에 있는 타푸아 성읍 자체는 에브라임에 속했습니다. 카나 개천 부근에서도 에브라임의 성읍들이 므낫세의 성읍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잡성이 바로 다음 절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므낫세의 땅 안에 있는 에브라임의 성읍들
또 므낫세 자손의 상속 재산 가운데 에브라임 자손을 위해 따로 구별된 성읍들, 곧 그 모든 성읍과 거기에 딸린 마을들이 있었다.여호수아 16:9 · 본디새김
앞에서는 두 지파의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경계를 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경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성읍들이 등장합니다.
경계 안의 모든 성읍이 같은 지파의 것은 아니었다
한 지파의 영역 안에 다른 지파에게 구별된 성읍들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성읍과 주변 마을들의 소속을 모두 포함하면 분배의 모습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가까운 두 지파의 복잡한 관계
두 지파는 각각 자기 몫을 받았지만, 그들의 상속 재산은 완전히 분리된 두 영역으로만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17장에서는 이와 비슷한 복잡성이 계속 나타납니다. 므낫세에게 속한 땅 안에 에브라임의 성읍들이 있고, 므낫세의 땅은 다시 다른 지파들의 영역과 접하거나 그 안에 성읍들을 갖습니다(여호수아 17:9–11).
이러한 기록은 상속 재산을 받는 일이 추상적인 선언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누가 어떤 성읍을 소유하고, 그 성읍에 어떤 마을들이 속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구별해야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절은 토지의 소속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 땅에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게제르 — 쫓아내지 않고 노동에 동원하다
이미 등장했던 게제르
게제르는 이 장의 마지막에 처음 나타나는 성읍이 아닙니다.
3절에서 요셉 자손의 경계를 설명할 때 이미 등장했습니다.
그 경계는 서쪽으로 야플레티 사람들의 경계로 내려가 아래 벳 호론의 경계까지, 또 게제르까지 이어졌으며, 그 끝은 바다에 이르렀다.여호수아 16:3 · 본디새김
게제르는 중앙 산지에서 서쪽 평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따라서 에브라임의 서쪽 경계를 이해할 때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게제르는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10:33에서 게제르 왕 호람은 라기스를 도우러 왔다가 여호수아에게 패배합니다. 왕과 그의 군대를 격파하는 일과 그 왕이 다스리던 성읍을 차지하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쫓아내지 않았다」는 표현
본문은 에브라임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쫓아내지 않았지만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게제르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았다. 가나안 사람들은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살았다. 그들은 강제 노역을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여호수아 16:10 · 본디새김
따라서 가나안 사람들이 에브라임 가운데 함께 살았다는 말을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존의 기록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 사이에는 지배하는 사람들과 강제로 노동하는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강제 노역을 부과할 정도의 권력을 행사했다면, 그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권력이 게제르 주민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특정한 노동을 강제할 능력과 성읍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고 주민들을 추방할 능력은 같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과 실제로 일어난 일
신명기 7:1–5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들과 언약을 맺거나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길로 들어서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 배경에는 그들의 신앙이 이스라엘을 여호와야훼에게서 돌아서게 할 수 있다는 경고가 있습니다.
신명기 20장에서도 전쟁에 관한 명령이 주어집니다. 20:10–15는 멀리 떨어진 성읍들과의 전쟁에서 주민들이 항복하면 노동에 복무하도록 하는 경우를 규정합니다. 그러나 20:16–18은 상속 재산으로 받을 땅의 가나안 민족들을 별도로 다룹니다.
따라서 에브라임이 게제르의 가나안 사람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한 일을 신명기 20장의 명령을 그대로 충실히 이행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여호수아 16:10이 그들의 행동을 명시적으로 정죄하는 문장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평가나 심판의 선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셨는지와, 이스라엘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는 같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행동을 기록한다고 해서 그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뜻으로 승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한때 강제 노역을 했다
출애굽기 1:11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역을 부과하기 위해 감독들을 세웁니다.
이집트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이스라엘이 이제 약속의 땅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 노역을 부과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압제받았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신명기 24:17–18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이었던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그네와 약한 이들의 권리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 명령과 게제르의 상황을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신명기의 나그네 보호 규정과 가나안 정복 규정은 각각의 문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0:18–19에서 여호와야훼는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나그네였던 사실을 기억하며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명령은 여호수아 16:10의 전쟁과 정착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는 단순한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의 권력 행사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게제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게제르는 사사기에서도 다시 등장합니다.
사사기 1:29는 에브라임이 게제르의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았으며,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살았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게제르의 문제가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착 과정에 남아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훨씬 뒤의 기록인 열왕기상 9:16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나타납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게제르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불태운 뒤, 그 성읍을 자기 딸, 곧 솔로몬의 아내에게 혼인 선물로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어 솔로몬이 게제르를 재건합니다(열왕기상 9:17). 이는 게제르가 에브라임의 분배 목록에 포함되었다고 해서 이후의 정치적 지배가 언제나 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열왕기상 9:20–21에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여러 민족의 후손들을 솔로몬이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본문이 허용하는 연결은 정착 과정에서 남은 가나안 주민들과 강제 노동의 문제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계속 나타난다는 정도입니다.
특히 사사기 2:1–3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사자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주민들과 맺은 관계와 그들의 제단을 헐지 않은 일을 책망합니다. 그 대목에 이르면 가나안 주민들을 남겨 둔 일이 단순한 행정적 선택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명령과 관련된 문제였음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쫓아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록할 뿐, 그들의 동기나 군사적 능력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에브라임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고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이런 방식을 선택했는지까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맺음말 — 경계선 끝의 게제르
에브라임은 자기 몫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 안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받았지만,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3절에서 게제르는 바다로 이어지는 경계의 한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10절에 이르면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후손들은 약속받은 상속 재산을 차지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하고 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의 땅은 경계선으로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은 경계선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요단에서 바다까지 이어진 긴 경계의 설명은 그렇게 게제르의 한 장면에서 멈춥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땅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강제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