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1–5장 · 강을 건널 준비

전쟁에 앞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앞에는 여리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왔지만,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85장 본문 읽기 →

적들은 두려워하는데, 이스라엘은 칼을 들고 싸우지 않는다

여호수아 5:1 본문 →

그런데 여호수아 5장은 뜻밖의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요단 건너 서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들의 모든 왕과 바닷가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의 모든 왕은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 자손이 다 건널 때까지 그들 앞에서 요단 물을 말렸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녹아내렸다.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그들에게는 더 이상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여호수아 5:1 · 본디새김

‘마음이 녹아내렸다’는 말은 2:9, 11, 24에서도 등장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라합이나 정탐꾼들의 말이 아니라 서술자가 직접 그들의 상태를 전합니다.

적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방금 놀라운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만약 군사적 기회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면, 지금이야말로 공격할 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다른 명령을 내리십니다.

적들의 두려움으로 전쟁의 가능성을 보여 준 직후,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몸에 새겨야 할 언약의 표지로 방향을 바꿉니다. 더구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회복될 때까지 진영에 머물러야 합니다(5:8).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전투 가능한 남성들이 한동안 몸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격보다 할례를 먼저 명령하십니다.

이 장에서는 전쟁을 앞두고 두 종류의 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언약의 표지를 새기는 돌칼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야훼 군대의 지휘관이 들고 있는 칼입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강한 군대인지보다 누구에게 속한 백성인지를 먼저 확인하게 하십니다.

약속의 땅에서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언약의 표지다

여호수아 5:2–8 본문 →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두 번째로’ 할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때 여호와야훼가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네가 쓸 돌칼들을 만들어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두 번째로 할례를 베풀어라.」여호수아 5:2 · 본디새김

할례는 같은 사람에게 두 번 베푸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두 번째로 할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실까요?

나온 백성은 모두 할례를 받은 상태였지만, 이집트에서 나와 가던 길에 광야에서 태어난 백성은 모두 할례를 받지 않았다.여호수아 5:5 · 본디새김

두 번째라는 말은 한 사람에게 할례를 다시 베푼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할례를 받은 출애굽 세대가 있었고, 이제 광야에서 태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세대에게 그 의식을 시행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세대를 이어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할례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할례는 여호수아 시대에 갑자기 만들어진 의식이 아닙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그 언약에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 그리고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창세기 17:7–8).

그다음 하나님은 할례를 언약의 표지로 정하셨습니다(창세기 17:10–14). 이스라엘의 성경 안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속한다는 사실을 몸에 표시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에 들어온 사람들이 아직 그 언약의 표지를 받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확인하는 일이 먼저 필요합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할례를 받습니다.

땅을 차지하는 능력이 언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언약이 그들이 땅에 들어와 살아갈 근거가 됩니다.

광야에서는 왜 할례를 베풀지 않았을까?

본문은 그동안 광야에서 태어난 남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든 사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아들들을 그들 대신 세웠다. 여호수아가 할례를 베푼 사람들은 바로 그 아들들이었다.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들이었는데, 길에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여호수아 5:7 · 본디새김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이 광야의 길에서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상황을 다시 확인합니다. 광야의 이동 생활 때문에 시행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또한 앞선 세대의 불순종과 심판이라는 상황이 언약의 표지가 중단된 배경과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동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할례를 베풀 수 없었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는 할례를 금지하셨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할례가 시행되지 않은 구체적인 이유를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한 세대가 사라지고 다른 세대가 그 자리에 서다

4–7절은 할례가 시행되지 않았던 사정을 설명하면서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이는 이집트에서 나왔으나 여호와야훼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은 그 민족의 전사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마흔 해 동안 광야를 걸어 다녔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에게 그 땅을 보여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땅은 여호와야훼가 우리에게 주겠다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여호수아 5:6 · 본디새김

민수기 13–14장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살피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땅이 좋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 불순종한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민수기 14:20–35).

다만 출애굽 세대의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죽었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특별히 남기신 사람들입니다(민수기 14:30).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불순종했던 전사 세대에 내려진 심판입니다.

그런데 7절의 표현은 단순한 세대교체를 넘어섭니다.

불순종했던 세대가 사라졌지만 이스라엘 자체가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들들을 그들 대신 세우셨습니다.

여기에는 심판과 신실하심이 함께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불순종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까지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그 세대에게 할례를 베풉니다.

그들은 아버지들의 실패를 물려받아 같은 길을 반복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시 세우신 백성으로서 언약에 응답하도록 부름받습니다.

할례 뒤에 찾아온 뜻밖의 정지

할례가 끝나자 이스라엘은 곧바로 진군하지 않습니다.

온 민족이 할례를 다 받고 나서, 그들은 회복될 때까지 진영 안 자기 자리에 머물렀다.여호수아 5:8 · 본디새김

이 순서는 전쟁을 준비하는 이스라엘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합니다. 그들이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공격할 준비가 되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자신들이 어떤 백성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땅을 소유한다는 사실보다 먼저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굴려 치우신 '이집트의 수치'

여호수아 5:9 본문 →

할례가 끝나고 백성이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오늘 내가 이집트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려 치웠다.」 그래서 그곳은 오늘까지 길갈이라 불린다.여호수아 5:9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이미 오래전에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에서 지낸 시간이 사십 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야 ‘이집트의 수치’를 굴려 치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집트의 수치’에는 여러 읽기가 가능하다

첫째,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과거의 치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비웃거나 비난할 수 있었던 상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와 관련된 수치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집트의 수치’를 한 가지 의미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만을 유일한 뜻으로 확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만 이 수치가 제거되었다는 선언은 이스라엘이 이제 새로운 상태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이집트의 종살이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끝없이 떠도는 백성으로만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왔고, 언약의 표지를 받은 백성으로 그곳에 서 있습니다.

길갈이라는 이름에 새겨진 선언

이 말씀은 장소의 이름과 연결됩니다.

본문은 길갈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하나님이 수치를 굴려 치우셨다는 말씀을 떠올리도록 합니다. 이스라엘은 길갈에 강에서 가져온 돌을 세웠습니다. 이제 길갈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이 이집트의 수치를 굴려 치우셨다는 의미가 연결됩니다.

한 장소에 두 종류의 기억이 쌓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수치를 제거하셨다는 선언입니다.

길갈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강을 건너 도착한 장소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과거를 지나 어떤 백성으로 서게 되었는지를 기억하는 장소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억압받으며 살았습니다. 출애굽은 그 압제에서 벗어나는 사건이었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까지 그들은 오랫동안 광야를 떠돌아야 했습니다. 이제 그 땅에 들어와 언약의 표지를 회복하면서, 이집트의 노예였던 과거와 이어진 수치가 끝났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비웃거나 비난할 수 있었던 상황을 가리킨다는 해석에는 성경 안의 근거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2:12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신다면 이집트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을 해치려고 데리고 나오셨다고 말할 것을 염려합니다. 민수기 14:13–16에서도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멸망하면 다른 민족들이 여호와야훼께서 그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능력이 없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고 간구합니다. 그런 비난의 가능성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반박됩니다.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와 관련된 수치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할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표지가 다시 시행된 뒤 수치가 제거되었다고 선언하므로, 두 사건은 분명히 연결됩니다. 다만 이것을 이집트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할례가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할례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표지였다는 점입니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 지킨 절기를 가나안에서 지키다

여호수아 5:10 본문 →

이스라엘 자손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여리고 평원에서 유월절을 지켰다.여호수아 5:10 · 본디새김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명령하신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이스라엘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하나님이 이집트를 심판하시는 밤에 이스라엘의 집들은 보호받았고, 그들은 마침내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유월절은 그 구원을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처음 유월절이 이집트에서 나오기 직전의 사건이었다면, 이번 유월절은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직후의 사건입니다. 같은 절기가 이스라엘 역사의 서로 다른 두 자리를 연결합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구원하셨고, 이제 그들을 약속의 땅까지 데려오셨습니다.

왜 할례 다음에 유월절이 오는가?

여호수아 5장은 할례와 유월절을 이어서 배치합니다.

이 순서는 출애굽기 12장의 규정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2:43–49에는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특히 48절에서는 유월절을 지키려는 외국인 가정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이 규정은 유월절 참여가 단순히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가 아니라 언약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자신들이 언약에 속한 백성임을 몸에 새깁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절기를 지킵니다.

정체성과 기억이 함께 회복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모든 성읍을 정복한 후에 지키는 감사 행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적의 땅에 들어와 있지만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유월절을 지킵니다. 이미 하나님에게서 받은 구원을 기억하며 앞으로의 일을 준비합니다.

이번 유월절은 처음이 아니다

민수기 9:1–5에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킨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후 사십 년 동안 유월절을 몇 차례 더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모든 해의 기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5장의 유월절이 사십 년 만의 첫 유월절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 장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횟수가 아니라 장소와 시점입니다.

한때 이집트에서 나오는 백성이었던 그들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온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 먹는 가나안 땅의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곧바로 이어집니다.

만나가 그친 날에도 하나님은 먹이시는 분이다

여호수아 5:11–12 본문 →

여호수아 5장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유월절 다음 날, 바로 그날에 그 땅의 소산, 곧 누룩 없는 빵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여호수아 5:1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 들어갔을 때, 백성은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매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양식을 거두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양식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그 땅의 소산을 먹을 때 만나가 그쳤다.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더 이상 만나가 없었고,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의 수확물을 먹었다.여호수아 5:12 · 본디새김

출애굽기 16:35에서는 이스라엘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고, 가나안 땅의 경계에 이를 때까지 그것을 먹었다고 설명합니다. 여호수아 5장은 그 말의 종착점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던 음식이 사라진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만나가 그쳤을 때 그들은 이미 그 땅의 소산을 먹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나가 사라진 것은 공급의 중단이 아니라 공급 방식의 변화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이제는 약속의 땅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합니다. 가나안 땅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7–10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들어갈 땅을 물이 흐르고 밀과 보리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있는 좋은 땅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먹어 배부르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이스라엘이 들어와 먹을 수 있는 땅을 주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좋은 땅에 들어가 먹어 배부르고 풍요롭게 살게 될 때, 그 모든 것을 자기 능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며 여호와야훼를 잊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신명기 8:11–18). 이스라엘이 이제 배워야 할 것은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약속이 식탁에 놓이다

6절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표현은 풍요롭고 먹을 것이 있는 땅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제 11–12절에서 그 약속이 아주 일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누룩 없는 빵과 볶은 곡식입니다.

화려한 잔치가 묘사되지 않습니다. 거대한 식탁이나 진귀한 음식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난 곡식을 먹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거주할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본문은 이스라엘이 그 곡식을 직접 경작하여 수확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 전쟁도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땅은 이제 바라보는 약속의 대상만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먹고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과 12절에는 날짜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11절은 유월절 다음 날에 그 땅의 소산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12절은 이튿날 만나가 그쳤다고 말합니다. 12절에도 ‘다음 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어지는 구문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만나가 그친 시점을 조금 다르게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나안의 곡식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과 만나가 그친 일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읽기입니다. 본디새김은 두 사건을 순차적으로 옮겼습니다. 이 번역은 충분히 가능한 읽기지만, 정확한 날짜를 계산하는 데에는 해석상의 여지가 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하면서 만나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칼을 뽑아 든 사람은 누구 편인가?

여호수아 5:13–14 본문 →

여호수아 5장의 마지막 장면은 갑작스럽게 시작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있을 때 눈을 들어 보니, 한 남자가 칼을 뽑아 손에 든 채 그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여호수아가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당신은 우리 편이오, 아니면 우리 적들의 편이오?」여호수아 5:13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여호수아의 처지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군대를 이끄는 지도자입니다. 여리고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전쟁이 곧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입니다.

그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여호와야훼 군대의 지휘관이다. 지금 왔다.」 여호수아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한 뒤 그에게 말했다. 「제 주인께서는 이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여호수아 5:14 · 본디새김

이 장면에서 여호수아는 자신보다 높은 권위와 마주합니다.

여호수아의 질문이 바뀐다

조금 전까지 여호수아는 상대방이 누구 편인지 묻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묻습니다.

그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을 듣는 사람이 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온 백성 앞에서 높이셨습니다. 백성도 그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을 이끄는 최종적인 권위자는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먼저 물었던 것은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였지만, 그가 마지막에 묻는 것은 ‘제가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낯선 존재를 자신의 전쟁에 어떻게 배치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자신이 그 존재의 권위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여리고에 있을 때’라는 표현만으로 여호수아가 이미 성벽 안에 들어갔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6장에서 여리고는 굳게 닫혀 있는 성읍으로 묘사됩니다. 이 장면은 여리고 지역에서 여호수아가 마주한 사건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흔히 이 장면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편도 아니고 가나안의 편도 아니시라는 뜻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 읽기는 여호수아가 제시한 두 선택지가 거절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나님이 양쪽 전쟁에 아무런 관계도 없으시거나, 이스라엘과 가나안을 동일한 방식으로 대하신다는 선언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수아 1–5장은 이미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앞에서 가나안 주민들을 쫓아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0). 따라서 이 대답은 여호수아가 제시한 아군과 적군이라는 구분을 넘어서는 더 높은 권위를 드러낸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원문의 ‘아니다’가 두 선택지 모두를 직접 부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호수아가 자신을 통상적인 군사적 범주에 넣으려는 질문 자체를 바로잡는 것인지 세부적으로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 지휘관의 정체에 대한 한 읽기는 그를 하나님에게 속한 천상의 군대를 지휘하는 존재, 곧 하나님의 사자로 이해합니다. 열왕기상 22:19에서는 하늘의 군대가 하나님 곁에 서 있는 모습이 등장하고, 열왕기하 6:17에서는 엘리사의 종이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됩니다. 또한 민수기 22:23, 31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사자가 칼을 빼어 들고 발람의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런 본문들은 여호수아가 만난 존재를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초월적인 사자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른 읽기는 이 존재를 단순한 사자보다 더 직접적인 하나님의 현현으로 이해합니다. 이 해석이 주목하는 근거는 그가 여호수아의 절을 받으며, 그가 선 장소를 거룩하다고 선언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바로 다음 절에서 출애굽기 3장의 모세와 유사한 명령을 내린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5장은 이 존재가 여호와야훼 자신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가 단지 평범한 인간 지휘관이라는 해석도 15절의 거룩한 장소에 관한 선언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상의 정체를 확정하는 데에는 해석의 여지가 남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존재를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와 연결해 읽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 장의 직접적인 진술이라기보다 후대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모세가 신을 벗었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신을 벗는다

여호수아 5:15 본문 →

여호수아는 여호와야훼 군대의 지휘관 앞에 엎드려 자신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 묻습니다.

이제 곧 여리고를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 알려 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다음 장에서는 여리고를 둘러 행진하는 명령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5장에서 여호수아가 처음 듣는 말씀은 전투 지시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 군대의 지휘관이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그렇게 했다.여호수아 5:15 · 본디새김

출애굽기 3:5에서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들었던 명령과 거의 같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말고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서 있는 땅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지도자로 부르시는 자리에서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여리고 전투를 앞둔 자리에서 신을 벗습니다. 두 사람의 상황은 다릅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거룩한 임재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무엇이 그 장소를 거룩하게 만드는가?

여호수아는 지금 가나안 땅에 있습니다. 그는 특별히 성막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서 있는 장소가 거룩하다고 선언됩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선 장소가 거룩했던 이유도 그곳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선 장소 역시 하나님의 권위와 임재가 특별하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신을 벗는 행위는 거룩한 존재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 장소가 자신의 일상적인 활동 공간과 같지 않음을 인정하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뒤를 잇지만 모세보다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을 이끌도록 세워졌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독립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요단강이 마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는 것을 이끌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지도자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이 그를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는 다시 엎드려야 합니다.

다시 들어야 합니다.

다시 순종해야 합니다.

칼을 든 존재 앞에서 신을 벗은 여호수아

여호수아 5:1–15 본문 →

이스라엘은 적을 향해 칼을 들기 전에 자기 몸에 언약의 표지를 새깁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전쟁을 앞둔 마지막 장면에서 자기보다 높은 권위를 지닌 존재를 만납니다. 그들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과 구원, 공급과 명령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 전체에 대한 단순한 정당화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호수아서에는 실제 전쟁과 죽음, 가나안 주민들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 장은 그 모든 폭력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그 말씀 아래에 놓는 일이 먼저입니다.

이제 여리고를 향해 나아갈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5장은 아직 그 전투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칼을 뽑아 든 여호와야훼 군대의 지휘관이 서 있습니다. 그 앞에 여호수아가 엎드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이 거룩하다는 말씀을 듣고, 신을 벗습니다.

여리고의 성벽 앞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먼저 하나님 앞에 서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