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12장 · 가나안 성읍과의 싸움
무너진 성벽과 여호와야훼께 속한 성
여리고는 외부와의 왕래를 끊었습니다. 아무도 나가지 않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접근에 대응하여 성 전체가 방어 태세에 들어간 것입니다.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하나님은 이미 성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리고는 문을 닫았습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문을 닫고 굳게 잠근 상태였다. 나가는 사람도 없고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다.여호수아 6:1 · 본디새김
이 장의 첫 문장은 성벽보다 먼저 성문을 보여 줍니다.
앞 장에서 여리고와 가나안의 왕들은 요단강이 말랐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제 그 두려움은 구체적인 방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가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힘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여호수아 6:2 · 본디새김
여리고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왕도 살아 있고, 용사들도 성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눈앞의 현실 사이에는 아직 간격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보는 것은 닫힌 성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넘겨주신 성입니다.
이스라엘이 앞으로 이 성을 차지한다면, 그 승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스라엘의 군사적 능력이 여리고의 방어력을 압도했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을 이루셨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이어지는 독특한 전투 명령은 바로 이 질문과 연결됩니다.
이 장은 승리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매우 무거운 파괴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깊이
같은 어근의 표현을 겹쳐 사용하여 성이 단단히 폐쇄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뒤이어 나가는 사람도 없고 들어오는 사람도 없다고 덧붙여 그 상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넘겨주었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나타티는 ‘주다’라는 동사의 완료형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앞으로 이루어질 승리를 이미 확정된 일처럼 선언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한가운데 놓인 것은 무기가 아니라 언약궤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점령할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 모든 전사는 성을 돌되, 성을 한 번 둘러 돌아라. 너는 엿새 동안 이렇게 하여라.」여호수아 6:3 · 본디새김
성벽을 부수기 위한 장비를 사용하라는 명령도 없고, 성문에 불을 지르거나 성 안으로 침투하라는 지시도 없습니다. 다음 절에서 이 행진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제사장 일곱은 궤 앞에서 숫양 뿔 나팔 일곱을 들어야 한다. 일곱째 날에는 너희가 성을 일곱 번 돌아라.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어야 한다.」여호수아 6:4 · 본디새김
7–9절은 실제 행진의 순서를 묘사합니다. 무장한 병사들이 앞서고,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이 그 뒤를 따르며, 언약궤가 이어집니다. 궤 뒤에는 후위대가 있습니다.
무장한 사람들이 참여하지만, 행진을 특징짓는 것은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와 언약궤의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 전쟁의 중심에 여호와야훼의 언약을 나타내는 궤가 놓여 있습니다.
왜 일곱이라는 숫자가 반복됩니까?
히브리어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창조의 일곱째 날을 비롯하여 온전함과 완결된 시간의 구조를 나타내는 장면에 자주 사용됩니다(창세기 2:2–3). 레위기 8장의 제사장 위임 의식에서도 이레라는 기간이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레위기 23장에는 이레를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절기 규정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6장에서 일곱이라는 숫자가 반복되는 것은 이 행진이 철저하게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다만 일곱이라는 숫자 자체에 성벽을 무너뜨리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숫자의 반복이 창조의 일곱째 날이나 특정한 절기를 직접 재현한다고 본문이 말하지도 않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에 한 번 성을 돕니다.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 돕니다.
그리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릴 때 온 백성이 함성을 질러야 합니다. 이처럼 행동의 순서와 횟수가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점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판단대로 공격 시점과 방법을 결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나팔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무기입니까?
본문은 특별히 ‘숫양 뿔 나팔’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나팔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됩니다.
시나이산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알리는 소리와 연결되고(출애굽기 19:16, 19), 전쟁을 알리거나 백성을 모으는 신호로도 사용됩니다. 또한 절기와 예배의 장면에서도 등장합니다(레위기 25:9; 시편 81:3). 여호수아 6장에서는 그 소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행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나팔 소리와 함성 이후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나팔과 함성이 어떤 물리적 힘을 발생시켜 성벽을 파괴한다고 설명하지는 않으십니다.
나팔을 부는 일은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성을 넘겨주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본문은 이 둘을 연결하지만, 동일한 행동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나팔은 계속 울리지만 백성은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함성을 지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지 말고, 입에서 말 한마디도 나오게 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함성을 지르십시오』라고 말하는 날까지 그렇게 하다가, 그때 함성을 지르십시오.」여호수아 6:10 · 본디새김
9절과 13절은 행진하는 동안 나팔 소리가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모든 소리가 사라진 침묵이 아닙니다.
나팔 소리는 계속 울리는데, 백성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나팔을 불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백성에게는 정해진 때까지 함성을 지르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서로 다른 역할이 하나의 행진 속에 놓여 있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함성을 지르는 시점을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르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여섯 날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11절에서 이스라엘은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와 밤을 보냅니다. 다음 날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제사장들이 다시 언약궤를 메고, 나팔을 불며 성을 돕니다. 그리고 다시 진영으로 돌아옵니다.
14절은 이런 행동을 엿새 동안 계속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성벽에 변화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을 돌고 돌아옵니다.
다시 성을 돌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같은 일을 합니다.
독자는 처음부터 일곱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 백성은 정해진 과정을 끝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단 한 번의 극적인 결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같은 명령을 반복하여 수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이 장면을 모든 신앙적 행동을 무조건 오랫동안 반복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만든 의식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구체적으로 받은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침묵의 끝은 백성이 정하지 않습니다
일곱째 날이 됩니다.
일곱째 날, 그들은 동이 틀 무렵 일찍 일어나 같은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돌았다. 그날만 성을 일곱 번 돌았다.여호수아 6:15 · 본디새김
평소처럼 성을 돌지만, 이날은 횟수가 다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여호수아가 명령합니다.
일곱 번째로 성을 돌 때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했다. 「함성을 지르십시오. 여호와야훼께서 여러분에게 이 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여호수아 6:16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 함성을 질러야 할 근거는 하나님의 수여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성을 넘겨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6:2). 이제 여호수아는 같은 사실을 백성에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은 이스라엘에게 넘겨졌지만,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약탈하고 소유할 수 있는 성으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여호수아 6장의 가장 어렵고 무거운 명령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왜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침묵을 요구했을까요? 적이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는 전술이었다고 보기에는 나팔 소리가 계속 울렸다는 사실이 걸립니다. 백성의 불평과 불신앙을 방지하기 위한 명령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 구절 자체는 그런 목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바친다'는 말이 실제로 뜻하는 것
여호수아는 성을 점령하기 전에 그 성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명령합니다.
「이 성 자체와 그 안의 모든 것은 여호와야훼께 온전히 바칠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성매매 여성 라합과 집 안에서 그 여자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살려 두어야 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숨겨 주었기 때문입니다.」여호수아 6:17 · 본디새김
‘온전히 바칠 대상’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헤렘(חֵרֶם)입니다. 이 낱말은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일반적인 사용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하나님께 돌리거나,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지정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보존하거나 성소에 귀속시킵니다. 다른 경우에는 완전히 파괴하거나 죽이는 일을 뜻합니다. 여호수아 6장에는 이 두 모습이 모두 등장합니다.
사람과 동물은 죽임을 당합니다(6:21). 성은 불에 탑니다(6:24). 그러나 은과 금, 구리와 철로 만든 기물은 하나님의 보물 창고에 들어갑니다(6:19, 24).
따라서 이 장의 ‘온전히 바친다’는 말을 단순히 예배를 위해 헌물을 드린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실제적인 파괴와 죽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헤렘을 언제나 파괴만을 뜻하는 낱말로 설명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금속 기물들은 파괴되지 않고 여호와야훼께 속한 것으로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 헤렘은 여리고가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소유물로 넘어오지 않고, 여호와야훼께 속한 것으로 특별하게 처리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처리에는 죽임과 파괴가 포함됩니다.
왜 이스라엘은 여리고의 재물을 차지할 수 없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온전히 바친 것에 손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온전히 바치고서도 그 바친 것 가운데서 가져가, 이스라엘 진영을 온전히 바칠 대상으로 만들고 그 진영에 재앙을 끼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여호수아 6:18 · 본디새김
전쟁에서 이긴 군대라면 패배한 성의 재물을 가져가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모든 은과 금과 구리 기물과 철 기물은 여호와야훼께 속한 거룩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여호와야훼의 보물 창고로 들어가야 합니다.」여호수아 6:19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병사들은 승리의 대가로 이 재물들을 개인적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명령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승리의 수혜자라는 사실이 그 승리의 결과를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까지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헤렘에 속한 물건을 부당하게 가져가면 그 결과는 개인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영 전체에 재앙이 닥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이어 나올 여호수아 7장의 사건을 준비합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특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온전히 바치다’에 해당하는 동사와 ‘온전히 바쳐진 것’이라는 명사가 반복되는데, 무엇을 헤렘으로 만들거나 취하는 행위를 정확히 어떻게 연결할지에 문장상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경고의 전체적인 방향은 분명합니다.
성이 무너졌을 때, 그 안의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
이제 성벽이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백성이 함성을 질렀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자 큰 함성을 질렀고, 성벽이 제자리에서 무너졌다. 백성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성에 올라가 성을 점령했다.여호수아 6:20 · 본디새김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신 일들이 이제 차례대로 일어납니다.
성벽의 붕괴가 그들이 바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성벽을 허무는 일반적인 공성 작업을 수행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독자는 여기서 승리의 장면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 안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쳐 없앴다. 남자에서 여자까지, 어린아이에서 노인까지, 소와 양과 나귀까지 칼날로 죽였다.여호수아 6:21 · 본디새김
이것을 단순히 악한 세력이 무너졌다는 상징적 표현으로만 바꾸어 읽으면 본문이 실제로 기록하는 내용을 지워 버리게 됩니다. 서술자가 전하는 것은 성의 파괴와 주민들의 죽음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을 오늘날 모든 전쟁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허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호수아 6장은 특정한 시대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서술되는 사건입니다. 독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다른 집단의 사람들을 죽일 권리를 얻는다는 일반 명령은 이 본문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구별한다고 해서 윤리적 어려움이 모두 해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어린아이와 노인까지 죽임당하는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정당합니다.
신명기의 심판 언어를 살펴보는 것은 본문의 신학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모든 개별적인 죽음에 관한 도덕적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고대 전쟁의 문학적 표현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주민들의 죽음에 대한 모든 질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 6장은 이 어려움을 오늘날 독자가 만족할 만한 방식으로 해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안의 폭력을 아름다운 상징으로 바꾸는 것도 아니고, 본문이 설명하지 않는 것을 대신 설명하여 모든 어려움을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여호수아 6장이 전하는 죽음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성경 전체가 하나님과 생명, 심판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지 계속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무거운 파괴의 이야기 한가운데에서 서술자는 전혀 다른 행동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라합과 그의 가족을 구출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성벽이 무너지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성문 하나를 뚫고 좁은 통로로 들어가는 장면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발견되는 특정한 파괴층을 곧바로 이 사건과 동일시할 수 있는지도 별도의 문제입니다. 여리고의 고대 성벽과 파괴 시기를 성경의 정복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할지에는 역사적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이 사건을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욕심으로 벌인 전쟁으로 서술하지 않습니다. 여리고를 하나님이 넘겨주셨다는 선언이 먼저 나오고, 성의 헤렘도 여호와야훼께 속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신명기 7:1–5와 20:16–18에는 가나안의 여러 민족에 관한 헤렘 규정이 나옵니다. 특히 신명기 20:18은 그들의 종교적 관습을 따라 이스라엘이 죄를 짓게 되는 위험을 이유로 제시합니다. 신명기 9:4–5는 이스라엘이 자기 의로움 때문에 땅을 얻는 것이 아니며, 가나안 민족들의 악함과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관련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본문이 제시하는 설명입니다. 여리고의 각 주민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개인들에게 어떤 책임이 있었는지를 여호수아 6장은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주민이 개인적으로 죽임당할 만한 죄를 지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내용을 보태는 것입니다. 고대 전쟁 서술에는 승리를 강조하면서 적을 완전히 없앴다고 표현하는 방식이 나타납니다. 성경 안에서도 여호수아 10:40은 남은 사람 없이 모두 없앴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여호수아 13:1은 여전히 차지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았다고 말합니다. 사사기 1장에도 여러 지역에 가나안 주민들이 계속 살아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 6:21을 고대 전쟁 서술의 총체적인 승리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본문은 남녀노소와 가축을 열거하며 죽임을 기록합니다. 이것이 단순히 성의 군사적 저항이 끝났다는 뜻으로 축소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여호수아서 전체에 가나안 사람들이 계속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특정 사건에서 실제로 몇 명이 죽었는지를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죽는 성에서 한 집안은 살아남는다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이 점령된 뒤 여호수아는 두 사람을 부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 성매매 여성의 집으로 들어가십시오. 그 여자에게 맹세한 대로, 그 여자와 그녀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거기서 데리고 나오십시오.」여호수아 6:22 · 본디새김
이 명령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맹세한 대로’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살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이 그 일을 누설하지 않고 가족을 집 안에 모아 두며 약속된 표지를 창문에 달면,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그 약속이 실제로 지켜져야 할 순간입니다.
그녀의 생존은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진 예외적인 탈출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직접 명령하고, 이전에 맹세한 사람들이 수행하는 구조로 서술됩니다.
라합을 구하러 간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라합에게 생명을 빚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왕의 사람들에게 그들을 내주지 않았고, 지붕에 숨겨 주었으며,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라합을 구하러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겼습니다.
이제 정탐꾼들이 라합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처음에는 라합이 그들의 목숨을 보호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라합과 가족의 목숨을 보호합니다.
여호수아 2:14에서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호의와 신의’를 베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신실함은 약속할 때의 말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진영 밖에 머문 라합의 가족
정탐꾼인 젊은이들이 들어가 라합과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그녀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그녀의 친족 집안들도 모두 데리고 나와 이스라엘 진영 밖에 머물게 했다.여호수아 6:23 · 본디새김
본문은 진영 밖에 머물게 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성매매 여성 라합과 그녀의 아버지 집안과 그녀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살려 두었다. 라합은 오늘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살고 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러 보낸 사자들을 그녀가 숨겨 주었기 때문이다.여호수아 6:25 · 본디새김
이 두 진술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여리고에서 구출된 직후의 상황을, 다른 하나는 그 이후 이어진 거주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라합은 원래 여리고 성 안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에게 속하지 않았고, 가나안 성읍의 주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일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보호했으며, 그들과 맺은 약속을 통해 구출되었습니다.
여기서 라합은 민족적 경계를 넘어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왜 본문은 라합을 계속 ‘성매매 여성’이라고 부르는가?
17절에서도 라합은 성매매 여성으로 소개됩니다. 22절에서도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25절에서도 다시 성매매 여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녀가 정탐꾼들을 보호했고, 생존을 약속받았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게 되었는데도 서술자는 그 호칭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서술자는 그녀가 원래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는지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녀를 처음 등장했던 바로 그 인물로 계속 식별하게 합니다.
본문은 라합의 과거를 지워서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대로 말하면서도, 그녀가 행한 일과 맺은 관계를 통해 새로운 자리에 이르게 되었음을 기록합니다. 라합의 생존은 구체적인 한 사람의 고백과 행동, 그리고 맹세의 성취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착한 사람은 반드시 살아남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보편적인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죽임당한 주민 각자의 행위와 사정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까지’라는 표현의 의미
25절의 ‘오늘까지’는 여호수아서의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의 시점에서 라합이 이스라엘 가운데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이야기의 결말을 단순한 생존에서 지속적인 삶으로 확장한다는 점입니다.
여리고 성이 사라진 뒤에도 라합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들이 가나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한 절차나 정결의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진영 밖에 머물게 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결 의식이나 일정한 대기 기간을 거쳤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5은 예수의 족보에서 라합을 언급합니다. 히브리서 11:31은 라합이 정탐꾼들을 받아들인 일을 믿음과 연결하고, 야고보서 2:25는 그들을 보호하고 다른 길로 보낸 행동을 언급합니다. 이 연결들은 여호수아 6장을 후대에 다시 읽은 사례입니다. 본문 자체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한 가나안 여성이 맹세에 따라 구출되어 이스라엘 가운데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은 불타고, 보물은 여호와야훼께 돌아간다
라합과 가족의 구출을 기록한 뒤 서술자는 다시 여리고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들은 성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불로 태웠다. 다만 은과 금과 구리 기물과 철 기물은 여호와야훼의 집에 있는 보물 창고에 넣었다.여호수아 6:24 · 본디새김
여기서 17–19절의 명령이 실행됩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를 차지했지만, 그 성에 들어가 거주하고 재산을 나누어 갖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같은 성에 속했던 사람과 물건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처리됩니다. 본문은 이 과정을 통해 여리고의 운명이 단순히 승리한 군대의 소유권 행사로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서술자는 파괴를 끝내고 곧바로 라합의 생존을 다시 확인합니다(6:25). 24절에서 성과 그 안의 모든 것이 불타는 동안, 25절에서는 라합과 가족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재차 강조됩니다.
파괴가 마지막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은 불탔지만 라합은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무너진 성을 다시 세우려는 사람에게 내려진 저주
여리고의 파괴가 끝난 뒤 여호수아는 또 하나의 선언을 합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맹세하게 하며 말했다. 「일어나 이 성, 곧 여리고를 세우는 사람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는 맏아들을 대가로 그 기초를 놓고, 막내아들을 대가로 그 성문을 세울 것입니다.」여호수아 6:26 · 본디새김
이 말은 여리고 지역 전체에 영원히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이 성, 곧 여리고를 세우는’ 행동입니다. 특히 기초를 놓고 성문을 세우는 일이 언급됩니다. 따라서 무너진 성읍을 다시 건설하고 성문을 갖춘 도시로 만드는 행위가 저주의 대상이라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리고의 파괴가 단지 그날의 군사적 승리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성의 미래까지 하나님의 말씀 아래 놓입니다.
닫힌 성문에서 시작하여 무너진 성문으로 끝나는 이야기
이야기의 시작에서 여리고는 문을 닫고 굳게 잠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성을 다시 세우며 성문을 설치하는 일이 저주와 연결됩니다.
처음에 성문은 여리고의 방어를 나타냈습니다. 마지막에는 성문을 다시 세우는 일이 금지된 미래의 행동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을 완전히 의도된 문학적 대응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독자가 두 장면을 연결하여 읽을 만한 분명한 특징입니다.
여리고가 의지했던 방어 시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결과를 막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렇다면 왜 그런 저주가 내려졌을까요? 본문은 직접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가능한 이해는 여리고가 헤렘으로 처리된 성이므로, 그 성을 다시 세우는 행위가 하나님께 바쳐진 파괴의 결과를 뒤집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해는 이스라엘이 처음 점령한 여리고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진 장소로 남아야 하며, 그 성을 다시 세우는 일을 금지하는 선언이라는 것입니다. 두 읽기는 서로 연결될 수 있지만, 어느 쪽도 26절에서 명시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저주가 선언된 정확한 동기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어에는 베라는 전치사가 사용됩니다. 문맥상 ‘그의 맏아들을 대가로’, ‘그의 막내아들을 대가로’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의 건설 과정에서 아들들이 죽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는 건설자가 자기 아들들을 의도적으로 희생시키는 행위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해석을 확정하기에는 본문이 제공하는 정보가 부족합니다. 여호수아 6장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명령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들들이 어떤 방식으로 죽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저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후대의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6:34입니다. 그곳에서는 아합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설했다고 기록합니다. 그가 성의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다는 내용이 여호수아를 통해 전해진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은 이 사건을 여호수아의 저주가 성취된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아들들이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에 퍼지는 것은 여호수아의 명성이다
여호수아 6장은 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여호와야훼가 여호수아와 함께했고, 여호수아의 명성이 온 땅에 퍼졌다.여호수아 6:27 · 본디새김
이 결말은 앞서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약속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5, 9). 또한 이스라엘 앞에서 그를 높이겠다고 하셨습니다(3:7).
먼저 여호와야훼가 여호수아와 함께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다음 여호수아의 명성이 온 땅에 퍼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군대를 이끄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는 그가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루어 낸 영웅이라는 방식으로 이 사건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이루시는 행동이 먼저입니다.
여리고는 사람들의 왕래를 차단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에 관한 소식은 그 성읍의 경계를 넘어 퍼져 나갑니다. 물리적인 성문을 닫는 것만으로 그 소식까지 가둘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성벽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지만, 성을 넘겨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승리 후에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미 맺은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켜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말이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는 태도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절대화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한 약속을 가볍게 여길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생존이 다른 주민들의 죽음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기록된 파괴의 현실은 여전히 무겁게 남아 있습니다.
처음에 여리고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그 성벽이 무너진 날, 라합과 그녀의 가족은 그 성 밖으로 나왔습니다.
성의 문은 닫혔고, 마침내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한때 낯선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던 여자는 살아남았습니다.
여리고는 무너졌지만, 그곳에서 맺어진 생명의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