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6–12장 · 가나안 성읍과의 싸움

무너진 성벽과 여호와야훼께 속한 성

여리고는 성 밖과 오가는 일을 끊었습니다. 나가는 사람도 들어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다가오자 성 전체가 방어에 나선 것입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106장 본문 읽기 →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하나님은 이미 성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6:1–2 본문 →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성문을 굳게 닫아 잠그고 있었습니다. 나가는 사람도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여호수아 6:1 · 두루새김

이 장의 첫 문장은 성벽보다 먼저 성문을 보여 줍니다.

앞 장에서 아모리와 가나안의 왕들은 요단강이 말랐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제 그 두려움은 구체적인 방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힘센 전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여호수아 6:2 · 두루새김

여리고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왕도 살아 있고, 힘센 전사들도 성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넘겨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넘겨주었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나타티(⁨נָתַן⁩)는 ‘주다’라는 동사의 완료형입니다. 이 문맥에서는 앞으로 이루어질 승리를 이미 확정된 일처럼 선언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눈앞의 현실 사이에는 아직 간격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보는 것은 닫힌 성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넘겨주신 성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능력이 여리고의 방어력을 압도했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을 이루셨다고 이해해야 할까요? 이어지는 독특한 전투 명령은 바로 이 질문과 연결됩니다.

이 장은 승리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매우 무거운 파괴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의 한가운데 놓인 것은 무기가 아니라 언약궤입니다

여호수아 6:3–9 본문 →

하나님은 여리고를 점령할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 전사들은 모두 성을 한 바퀴 돌아라. 엿새 동안 이렇게 하여라.」여호수아 6:3 · 두루새김

성벽을 부수기 위한 장비를 사용하라는 명령도 없고, 성문에 불을 지르거나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라는 지시도 없습니다.

「제사장 일곱 명은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일곱 개를 들고 궤 앞에서 가야 한다.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돌아라.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어라.」여호수아 6:4 · 두루새김

7–9절은 실제 행진의 순서를 보여 줍니다. 무기를 갖춘 군사들이 앞서고,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이 그 뒤를 따르며, 언약궤가 이어집니다. 궤 뒤에는 뒤를 지키는 군사들이 있습니다.

무기를 갖춘 사람들이 참여하지만, 행진을 특징짓는 것은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와 언약궤의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지만, 그 전쟁의 중심에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내는 궤가 놓여 있습니다.

왜 일곱이라는 숫자가 반복됩니까?

이 명령에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제사장 일곱 명, 나팔 일곱 개, 일곱째 날, 성을 일곱 바퀴 도는 행동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창조의 일곱째 날을 비롯하여 온전함과 완결된 시간의 짜임을 나타내는 장면에 자주 사용됩니다(창세기 2:2–3). 레위기 8장의 제사장 위임 의식에서도 이레라는 기간이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레위기 23장에는 이레를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절기 규정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6장에서 일곱이라는 숫자가 반복되는 것은 이 행진이 철저하게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다만 일곱이라는 숫자 자체에 성벽을 무너뜨리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숫자의 반복이 창조의 일곱째 날이나 특정한 절기를 직접 재현한다고 본문이 말하지도 않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에 한 바퀴 성을 돕니다.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 돕니다. 그리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릴 때 온 백성이 함성을 질러야 합니다.

이처럼 행동의 순서와 횟수가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점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판단대로 공격 시점과 방법을 결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주어진 명령을 따르고 있습니다.

나팔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무기입니까?

본문은 특별히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나팔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됩니다. 시나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심을 알리는 소리와 연결되고(출애굽기 19:16, 19), 전쟁을 알리거나 백성을 모으는 신호로도 사용됩니다. 또한 절기와 예배의 장면에서도 등장합니다(레위기 25:9; 시편 81:3).

하나님은 나팔 소리와 함성 이후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나팔과 함성이 어떤 물리적 힘을 일으켜 성벽을 파괴한다고 설명하지는 않으십니다.

나팔을 부는 일은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성을 넘겨주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본문은 이 둘을 연결하지만, 같은 행동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나팔은 계속 울리지만 백성은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6:10–16 본문 →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함성을 질러라』 하고 말하는 날까지 함성을 지르거나 목소리를 내지 마라. 말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마라. 내가 외치라고 하면 그때 함성을 질러라.」여호수아 6:10 · 두루새김

9절과 13절은 행진하는 동안 나팔 소리가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모든 소리가 사라진 침묵이 아닙니다.

나팔 소리는 계속 울리는데, 백성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나팔을 불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백성에게는 정해진 때까지 함성을 지르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서로 다른 역할이 하나의 행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왜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침묵을 요구했을까요? 적이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는 전술이었다고 보기에는 나팔 소리가 계속 울렸다는 사실이 걸립니다. 백성의 불평과 믿지 못하는 마음을 막기 위한 명령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 구절 자체는 그런 목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함성을 지르는 시점을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르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백성은 자신들이 원할 때 소리칠 수 없습니다.

정해진 날, 정해진 순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여섯 날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11절에서 이스라엘은 성을 한 바퀴 돌고 머물던 곳으로 돌아와 밤을 보냅니다. 다음 날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제사장들이 다시 언약궤를 메고, 나팔을 불며 성을 돕니다. 그리고 다시 머물던 곳으로 돌아옵니다.

14절은 이런 행동을 엿새 동안 계속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성벽에 변화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을 돌고 돌아옵니다.

다시 성을 돌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같은 일을 합니다.

독자는 처음부터 일곱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 백성은 정해진 과정을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단 한 번의 극적인 결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같은 명령을 반복하여 따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이 장면을 모든 신앙적 행동을 무조건 오랫동안 반복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만든 의식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구체적으로 받은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침묵의 끝은 백성이 정하지 않습니다

일곱째 날이 됩니다.

일곱째 날에는 동이 틀 무렵 일찍 일어나, 같은 방식으로 성을 일곱 바퀴 돌았습니다. 성을 일곱 바퀴 돈 것은 그날뿐이었습니다.여호수아 6:15 · 두루새김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여호수아가 명령합니다.

일곱 번째로 성을 돌 때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함성을 질러라! 여호와야훼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다.」여호수아 6:16 · 두루새김

이스라엘이 함성을 질러야 할 근거는 하나님이 성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성을 넘겨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6:2). 이제 여호수아는 같은 사실을 백성에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승리한 뒤, 그 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앞서 하나님이 성을 넘겨주셨다고 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이 그 안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차지해도 되는 것일까요?

본문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온전히 바쳐라」는 말이 실제로 뜻하는 것

여호수아 6:17–19 본문 →

여호수아는 성을 점령하기 전에 그 성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명령합니다.

「이 성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여호와야훼께 온전히 바쳐라. 다만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 라합과 그 집에서 라합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살려 두어라. 라합이 우리가 보낸 사람들을 숨겨 주었기 때문이다.」여호수아 6:17 · 두루새김

「온전히 바쳐라」로 옮긴 자리에 쓰인 히브리어 낱말은 헤렘(⁨חֵרֶם⁩)입니다. 이 낱말은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일반적인 사용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하나님께 돌리거나,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정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처리 방식은 문맥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보존하거나 성소에 속하게 합니다. 다른 경우에는 완전히 파괴하거나 죽이는 일을 뜻합니다. 여호수아 6장에는 이 두 모습이 모두 등장합니다.

사람과 동물은 죽임을 당합니다(6:21). 성은 불에 탑니다(6:24). 그러나 은과 금, 구리와 철로 만든 물건은 하나님의 보물 창고에 들어갑니다(6:19, 24).

따라서 이 장의 「온전히 바쳐라」는 말을 단순히 예배를 위해 예물을 드린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실제적인 파괴와 죽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헤렘을 언제나 파괴만을 뜻하는 낱말로 설명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금속으로 만든 물건들은 파괴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 헤렘은 여리고가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소유물로 넘어오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특별하게 처리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처리에는 죽임과 파괴가 포함됩니다.

왜 이스라엘은 여리고의 재물을 차지할 수 없습니까?

「너희는 온전히 바칠 것에 손대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너희가 온전히 바친 것 가운데서 무엇이든 가져가면, 이스라엘이 머무는 곳 전체도 온전히 바쳐 없앨 대상이 된다. 너희가 그곳에 재앙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여호수아 6:18 · 두루새김

전쟁에서 이긴 군대라면 패배한 성의 재물을 가져가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모든 은과 금, 구리와 철로 만든 물건은 여호와야훼께 속한 거룩한 것이다. 그것들은 여호와야훼의 보물 창고에 넣어야 한다.」여호수아 6:19 · 두루새김

여기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승리가 개인적인 이익을 얻을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 명령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승리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 승리의 결과를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까지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헤렘에 속한 물건을 부당하게 가져가면 그 결과는 개인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머무는 곳 전체에 재앙이 닥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이어 나올 여호수아 7장의 사건을 준비합니다.

성이 무너졌을 때, 그 안의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

여호수아 6:20–21 본문 →

이제 성벽이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백성이 함성을 질렀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고 큰 함성을 지르자 성벽이 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백성은 저마다 자기 앞쪽으로 곧장 성에 올라가 성을 점령했습니다.여호수아 6:20 · 두루새김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신 일들이 이제 차례대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독자는 여기서 승리의 장면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 안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쳐 없앴습니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소와 양과 나귀까지 모두 칼로 죽였습니다.여호수아 6:21 · 두루새김

이것을 단순히 악한 세력이 무너졌다는 상징적 표현으로만 바꾸어 읽으면 본문이 실제로 기록하는 내용을 지워 버리게 됩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말하는 것은 성의 파괴와 주민들의 죽음입니다.

가나안 주민들의 죽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여호수아서는 이 사건을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욕심으로 벌인 전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리고를 하나님이 넘겨주셨다는 선언이 먼저 나오고, 성의 헤렘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본문이 제시하는 설명입니다. 여리고의 각 주민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개인들에게 어떤 책임이 있었는지를 여호수아 6장은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주민이 개인적으로 죽임당할 만한 죄를 지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내용을 보태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을 오늘날 모든 전쟁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허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독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다른 집단의 사람들을 죽일 권리를 얻는다는 일반 명령은 이 본문에 없습니다. 오늘날 누군가 자신의 전쟁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그 주장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구별한다고 해서 윤리적 어려움이 모두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어린아이와 노인까지 죽임당하는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정당합니다.

여호수아 6장은 이 어려움을 오늘날 독자가 만족할 만한 방식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본문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안의 폭력을 아름다운 상징으로 바꾸는 것도 아니고, 본문이 설명하지 않는 것을 대신 설명하여 모든 어려움을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무거운 파괴의 이야기 한가운데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전혀 다른 행동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라합과 그의 가족을 구출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성벽이 「그 자리에서」 무너졌으며 그 결과 백성이 저마다 자기 앞쪽으로 곧장 성에 올라갈 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성벽이 정확히 어떤 방향으로 쓰러졌는지, 도시의 모든 벽이 동시에 완전히 무너졌는지까지 세밀하게 설명하는 공학적 기록은 아닙니다. 여리고의 고대 성벽과 파괴 시기를 성경의 정복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할지에는 역사적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신명기 7:1–5와 20:16–18에는 가나안의 여러 민족에 관한 헤렘 규정이 나옵니다. 특히 신명기 20:18은 그들의 종교적 관습을 따라 이스라엘이 죄를 짓게 되는 위험을 이유로 제시합니다. 신명기 9:4–5는 이스라엘이 자기 의로움 때문에 땅을 얻는 것이 아니며, 가나안 민족들의 악함과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관련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고대 전쟁 이야기에는 승리를 강조하면서 적을 완전히 없앴다고 표현하는 방식이 나타납니다. 성경 안에서도 여호수아 10:40은 남은 사람 없이 모두 없앴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여호수아 13:1은 여전히 차지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 6:21을 고대 전쟁 이야기의 완전한 승리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노인, 가축을 하나씩 들며 죽임을 기록합니다. 이것이 단순히 성의 군사적 저항이 끝났다는 뜻으로 줄어들 수는 없습니다. 또한 여호수아서 전체에 가나안 사람들이 계속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특정 사건에서 실제로 몇 명이 죽었는지를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죽는 성에서 한 집안은 살아남는다

여호수아 6:22–23 본문 →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지고 성이 점령된 뒤 여호수아는 두 사람을 부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땅을 살펴보았던 두 정탐꾼에게 말했습니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그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라. 그 여자에게 맹세한 대로, 그 여자와 그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데리고 나와라.」여호수아 6:22 · 두루새김

이 명령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맹세한 대로」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살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이 그 일을 누설하지 않고 가족을 집 안에 모아 두며 약속된 표지를 창문에 달면,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그 약속이 실제로 지켜져야 할 순간입니다.

그녀가 살아남은 것은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진 예외적인 탈출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직접 명령하고, 이전에 맹세한 사람들이 그 명령을 따르는 이야기로 서술됩니다.

라합을 구하러 간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라합에게 생명을 빚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왕의 사람들에게 그들을 내주지 않았고, 지붕에 숨겨 주었으며,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라합을 구하러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겼습니다.

이제 정탐꾼들이 라합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처음에는 라합이 그들의 목숨을 보호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라합과 가족의 목숨을 보호합니다.

여호수아 2:14에서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호의를 베풀고 약속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신실함은 약속할 때의 말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이 머무는 곳 밖에 머문 라합의 가족

젊은 정탐꾼들이 집에 들어가 라합과 그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 그리고 라합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라합의 친척 집안들도 모두 데리고 나와, 이스라엘이 머무는 곳 밖에 있게 했습니다.여호수아 6:23 · 두루새김
여호수아는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 라합과 그 아버지의 집안과 라합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살려 두었습니다. 라합은 오늘까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살펴보라고 보낸 사람들을 숨겨 주었기 때문입니다.여호수아 6:25 · 두루새김

이 두 설명은 반드시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여리고에서 구출된 직후의 상황을, 다른 하나는 그 이후에도 이어진 삶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라합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왜 본문은 라합을 계속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라고 부르는가?

그녀가 정탐꾼들을 보호했고, 살아남을 것을 약속받았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게 되었는데도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그 호칭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그녀가 원래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는지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녀를 처음 등장했던 바로 그 인물로 계속 알아보게 합니다.

본문은 라합의 과거를 지워서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대로 말하면서도, 그녀가 한 일과 맺은 관계를 통해 새로운 자리에 이르게 되었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착한 사람은 반드시 살아남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죽임당한 주민 각자의 행동과 사정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까지」라는 표현의 의미

25절의 「오늘까지」는 여호수아서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의 시점에서 라합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이야기의 결말을 단순히 살아남은 일에서 계속 이어지는 삶으로 넓힌다는 점입니다.

여리고 성이 사라진 뒤에도 라합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후의 성경에도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1:5은 예수님의 족보에서 라합을 언급합니다. 히브리서 11:31은 라합이 정탐꾼들을 받아들인 일을 믿음과 연결하고, 야고보서 2:25는 그들을 보호하고 다른 길로 보낸 행동을 언급합니다.

이 연결들은 여호수아 6장을 후대에 다시 읽은 사례입니다. 본문 자체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한 가나안 여성이 맹세에 따라 구출되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들이 가나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한 절차나 정결의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밖에 머물게 한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결 의식이나 일정한 대기 기간을 거쳤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은 불타고, 보물은 여호와야훼께 돌아간다

여호수아 6:24–25 본문 →

라합과 가족의 구출을 기록한 뒤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다시 여리고로 시선을 돌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불태웠습니다. 다만 은과 금, 구리와 철로 만든 물건은 여호와야훼의 집에 있는 보물 창고에 넣었습니다.여호수아 6:24 · 두루새김

여기서 17–19절의 명령이 실행됩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를 차지했지만, 그 성에 들어가 살고 재산을 나누어 갖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여리고는 파괴됩니다.

같은 성에 속했던 사람과 물건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처리됩니다. 본문은 이 과정을 통해 여리고의 운명이 단순히 승리한 군대가 자기 소유를 처리하듯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파괴를 끝내고 곧바로 라합이 살아남았음을 다시 확인합니다(6:25).

파괴가 마지막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은 불탔지만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무너진 성을 다시 세우려는 사람에게 내려진 저주

여호수아 6:26 본문 →

여리고의 파괴가 끝난 뒤 여호수아는 또 하나의 선언을 합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사람들에게 맹세하게 하며 말했습니다. 「이 성, 곧 여리고를 다시 세우려 나서는 사람은 여호와야훼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을 잃고, 성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을 잃을 것이다.」여호수아 6:26 · 두루새김

이 말은 여리고 지역 전체에 영원히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이 성, 곧 여리고를 다시 세우려 나서는」 행동입니다. 특히 기초를 놓고 성문을 세우는 일이 언급됩니다.

여호수아 6장 안에서 이 선언이 하는 일은 분명합니다. 여리고의 파괴가 단지 그날의 군사적 승리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성의 미래까지 하나님의 말씀 아래 놓입니다.

닫힌 성문에서 시작하여 무너진 성문으로 끝나는 이야기

처음에 성문은 여리고의 방어를 나타냈습니다. 마지막에는 성문을 다시 세우는 일이 금지된 미래의 행동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을 글쓴이가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맞춘 결과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독자가 두 장면을 연결하여 읽을 만한 분명한 특징입니다.

여리고가 의지했던 방어 시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결과를 막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한 가지 가능한 이해는 여리고가 온전히 바쳐 없앤 성이므로, 그 성을 다시 세우는 행위가 하나님께 바쳐진 파괴의 결과를 뒤집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해는 이스라엘이 처음 점령한 여리고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진 장소로 남아야 하며, 그 성을 다시 세우는 일을 금지하는 선언이라는 것입니다. 두 읽기는 서로 연결될 수 있지만, 어느 쪽도 26절에서 분명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저주가 선언된 정확한 동기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에서는 문맥상 그의 맏아들을 대가로, 그의 막내아들을 대가로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을 세우는 과정에서 아들들이 죽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성을 세우는 사람이 자기 아들들을 의도적으로 희생시키는 행위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해석을 확정하기에는 본문이 제공하는 정보가 부족합니다. 여호수아 6장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명령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들들이 어떤 방식으로 죽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저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후대의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6:34입니다. 그곳에서는 아합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설했다고 기록합니다. 그가 성의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다는 내용이 여호수아를 통해 전해진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은 이 사건을 여호수아의 저주가 이루어진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아들들이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에 퍼지는 것은 여호수아의 명성이다

여호수아 6:27 본문 →

여호수아 6장은 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 대한 소문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여호수아 6:27 · 두루새김

이 결말은 앞서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약속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5, 9). 또한 이스라엘 앞에서 그를 높이겠다고 하셨습니다(3:7).

여호수아가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는 순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고, 그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는 군대를 이끄는 사람이고, 여호와야훼의 명령을 받는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는 그가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루어 낸 영웅이라는 방식으로 이 사건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이루시는 행동이 먼저입니다.

여리고는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막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에 관한 소식은 그 성읍의 경계를 넘어 퍼져 나갑니다. 성문을 닫는 것만으로 그 소식까지 가둘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성벽이 사라진 자리에서

여호수아 6:1–27 본문 →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만, 성을 넘겨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승리 후에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미 맺은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켜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말이 자신의 성공을 확신하는 태도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살아남은 일이 다른 주민들의 죽음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기록된 파괴의 현실은 여전히 무겁게 남아 있습니다.

처음에 여리고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그 성벽이 무너진 날, 라합과 그녀의 가족은 그 성 밖으로 나왔습니다.

성의 문은 닫혔고, 마침내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한때 낯선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던 여자는 살아남았습니다.

여리고는 무너졌지만, 그곳에서 맺어진 생명의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