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3–12장 · 일어서는 재판관들

말 한마디가 죽음의 이유가 되다

한 사람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그는 패배한 군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강 건너편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나루를 지키는 사람들이 길을 막습니다.

사사기 12장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입니다. 어떤 사람이 적에게 칼을 겨누었기 때문에 죽임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평소 사용하던 말소리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기 때문에 죽임당합니다.

이 장의 가장 아픈 역설은 이스라엘이 외부의 적에게서 구원을 받은 직후, 서로를 적으로 구별하고 죽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단순히 입다가 잔혹한 지도자였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를 위협했고, 입다는 자신이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주장합니다. 양쪽 모두 자신에게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들의 갈등은 말로 해결되지 못하고, 말소리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엄청난 학살 뒤에 이어지는 세 사사의 짧은 기록은 이 이야기에 어떤 의미를 더할까요?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812장 본문 읽기 →

승리한 지도자의 집을 불태우겠다는 사람들

사사기 12:1–3 본문 →

사사기 12장은 전쟁이 끝난 뒤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소집되어 북쪽으로 건너갔다. 그들이 입다에게 말했다.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 어째서 우리를 함께 가자고 부르지 않았느냐? 네가 안에 있는 채로 우리가 네 집을 불태우겠다.」사사기 12:1 · 본디새김

이들의 불만에는 익숙한 면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웠을 때도 에브라임 사람들은 자신들을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다며 항의했습니다(8:1–3).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더 위험합니다.

특히 바로 앞 장에서 입다가 딸과 관련하여 겪은 비극을 생각하면, 그가 돌아온 집이 다시 폭력의 대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12장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의 딸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일부러 입다의 상처를 건드리려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입다의 대답은 왜 중요한가?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합니다.

입다가 그들에게 말했다. 「저와 제 백성은 암몬 자손과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들을 불렀지만, 당신들은 저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 주지 않았습니다.」사사기 12:2 · 본디새김

따라서 이 장에서는 양쪽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당신들이 저를 구해 주지 않는 것을 보고, 저는 제 목숨을 걸고 암몬 자손 쪽으로 건너갔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 저와 싸우려고 제게 올라오셨습니까?」사사기 12:3 · 본디새김

이것은 앞 장에서 그가 암몬 왕에게 했던 외교적 설명과도 일치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전쟁을 판결하시고 승리를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입다의 말에는 한 가지 긴장이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 에브라임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대해서는 그 고백이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의 항의에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실제로 그의 집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항의와 그다음에 내리는 결정은 구별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부당한 위협을 했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모든 보복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곧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이 문제를 독립적으로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11장의 암몬 전쟁 이야기에는 입다가 에브라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요청이 없었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앞 장의 서술은 전쟁 준비 과정의 모든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 목숨을 걸고」는 히브리어에서 ‘내 목숨을 내 손바닥에 두었다’는 관용 표현을 옮긴 것입니다. 목숨을 손바닥에 올려놓는다는 이미지는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노출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너희는 에브라임에서 달아난 자들이다」 — 누가 이스라엘에 속하는가?

사사기 12:4 본문 →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모아 에브라임과 싸웁니다.

입다는 길르앗의 모든 사람을 모아 에브라임과 싸웠다.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쳤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에브라임 가운데, 므낫세 가운데 있는 너희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에서 달아난 자들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사사기 12:4 · 본디새김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이스라엘의 구성원으로 존중하지 않습니다. 길르앗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은 그들을 마치 자신들에게서 떨어져 나간 열등한 집단처럼 부릅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에 있고, 에브라임의 주요 영토는 서쪽 산지에 있습니다. 므낫세는 요단 양쪽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여호수아 13:29–31; 17:7–10). 이런 지리적 관계 속에서 길르앗 주민들의 지위를 낮추어 말하는 것은 단순한 지역적 놀림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중심적인 이스라엘이며, 누가 주변적인 존재인지를 구분하려는 말이 됩니다.

신명기 17:15에서는 왕을 세울 경우에도 자기 형제들 가운데서 세우라고 명령합니다. 같은 장 20절은 왕이 자기 마음을 형제들 위에 높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규정은 왕에 관한 것이지만, 그 속에 담긴 공동체적 원리는 사사기 12장과도 관련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할 권리를 얻는 일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문장은 히브리어에서도 구조가 까다롭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이에 있다는 표현이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하여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을 향해 한 모욕으로 읽으면 이야기의 흐름이 분명해집니다. 「달아난 자들」은 재난이나 전쟁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사람들, 곧 피난민이나 도망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이 본문에서 단순히 길르앗 사람들이 과거에 에브라임 땅에서 이주했다는 역사적 설명으로 사용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강을 건너려면 한 단어를 말해야 한다

사사기 12:5–6 본문 →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쪽으로 건너가는 요단강의 나루들을 점령합니다.

나루는 강을 건널 수 있는 장소입니다. 다리가 흔하지 않았던 시대에 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을 장악한다는 것은 사람과 군대의 이동을 통제하는 일이었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쪽으로 가는 요단의 나루들을 점령했다. 에브라임의 도망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건너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할 때마다 길르앗 사람들이 그에게 「너는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고 물었다. 그가 「아닙니다.」라고 하면,사사기 12:5 · 본디새김
그들은 그에게 「『쉽볼렛』이라고 좀 말해 보아라.」 하고 말하곤 했다. 그가 그렇게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여 「십볼렛.」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를 붙잡아 요단의 나루들에서 목을 그어 죽이곤 했다. 그때 에브라임 사람 사만 이천 명이 죽었다.사사기 12:6 · 본디새김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특정한 단어에서 두 집단 사이에 식별 가능한 발음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질문에 대답했지만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는 재판이나 개별적인 죄의 확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전투에 참여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이미 무기를 버렸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에브라임 사람으로 식별되는 것만으로 죽임당합니다.

특히 본문은 「할 때마다」라는 반복적인 상황을 묘사합니다. 한 사람만 우연히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질문과 같은 시험과 같은 처형이 거듭 이루어집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이제 자신들의 백성 가운데 사만 이천 명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살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수많은 시체의 묘사가 아니라 단 한 단어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지보다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 평범한 말소리까지 죽음의 판결을 내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모욕으로 사용된 말이 실제 도망자를 가리키게 되다

4절에서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들을 「달아난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똑같은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전쟁에서 패하여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의 소속과 지위를 깎아내리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 자신들의 패배를 묘사하는 말로 되돌아옵니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여호와야훼께서 암몬 자손을 자신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합니다(12:3). 그 고백은 앞 장의 전쟁 결과와 일치합니다.

그러나 이후의 내전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께서 입다에게 에브라임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영이 다시 입다 위에 임하여 이 전쟁을 이끌었다고 기록하지도 않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무찌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라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다음에 벌어진 내전까지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전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사기 12장에는 입다의 내전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평가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침묵을 특정한 의도로 확정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지도자의 책임과 공동체의 책임

이때 입다가 각 처형을 직접 명령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루에서 벌어진 모든 개별 행위가 그의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길르앗 사람들을 모아 전쟁을 이끈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입다는 외국 왕에게는 땅의 역사와 정당성을 설명하는 긴 말을 건넸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내부의 갈등은 짧은 비난과 반박 뒤에 전쟁으로 넘어갑니다. 상대방이 협상에 응했을지, 다른 선택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모든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단강의 이야기

여호수아 22장에도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 지파들이 갈등하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요단 동쪽으로 돌아간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큰 제단을 쌓자, 요단 서쪽 지파들은 그것을 여호와야훼께 대한 반역으로 오해합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벌일 준비까지 합니다(여호수아 22:10–12).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대표자들을 보내 이유를 묻습니다. 동쪽 지파들은 자신들이 다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단을 만든 것이 아니라, 요단강 양편의 사람들이 모두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한 증거로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22:21–29). 그 설명을 들은 대표자들은 전쟁을 중단합니다.

여호수아 22장에서 요단강은 양쪽이 같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됩니다. 사사기 12장에서 요단강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여 죽이는 경계가 됩니다. 물론 갈등의 원인은 다릅니다. 여호수아 22장은 제단의 목적을 둘러싼 오해이고, 사사기 12장은 군사적 참여와 지파의 명예를 둘러싼 분쟁입니다.

사사기 12장에서 무너진 것은 단지 지파 사이의 평화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아도 같은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공동체적 인식이 무너진 것입니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두 가지 운명

이 장에는 「건너가다」라는 행동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처음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소집되어 건너옵니다(12:1). 입다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암몬 자손 쪽으로 건너갔다고 말합니다(12:3). 이어서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쪽으로 돌아가는 요단의 나루를 점령합니다(12:5). 그리고 도망자들은 「건너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처음에 강을 건너는 일은 전쟁에 참여하거나 적을 공격하러 가는 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목숨을 건 탈출이 됩니다.

여기서 지리적 경계가 인간관계의 경계로 바뀝니다.

여호수아 3–4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 아래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강을 건너는 일은 한 백성이 함께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12장에서는 같은 강을 건너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합니다.

한때 약속의 땅으로 함께 들어갔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서로에게 길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분열

훗날 사무엘하 19:41–43에서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이 다윗 왕을 맞이하는 일을 두고 다툽니다. 그들은 왕을 향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어서 사무엘하 20장에서는 그 갈등이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사사기 12장의 상황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공동체 안의 명예와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 어떻게 정치적 분열을 낳는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또한 에스겔 37:15–23에서는 하나님께서 유다와 에브라임으로 대표되는 분열된 백성을 하나로 모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환상에서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는 장면은 이스라엘의 분열이 단순히 인간의 정치적 기술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회복하셔야 할 깊은 상처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사사기 12장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의 성취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분열과 회복이라는 주제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고 발전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연결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은 두 발음을 서로 다른 자음으로 적습니다. 전통적인 히브리어 발음에서는 각각 ‘sh’ 계열과 ‘s’ 계열의 소리로 구별됩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곡식의 이삭이며, 다른 문맥에서는 물결이나 흐르는 물과 관련된 뜻으로도 사용됩니다(창세기 41:5; 시편 69:2). 그러나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의 뜻이 아닙니다. 그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입니다. 다만 이 이야기만으로 당시 에브라임 방언 전체의 발음 체계를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든 ‘sh’ 소리를 발음하지 못했다거나, 당시의 발음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히브리어와 정확히 같았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만 이천 명은 본문이 보고하는 사망자 수입니다. 전투 현장에서 죽은 사람과 나루에서 살해된 사람을 각각 몇 명으로 나눌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수치를 독립적인 자료로 검증할 수는 없습니다.

여섯 해 동안 다스린 입다의 죽음

사사기 12:7 본문 →

에브라임과의 전쟁 이야기가 끝난 뒤 입다의 생애는 한 절로 마무리됩니다.

입다는 여섯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었고, 길르앗의 성읍들 가운데 한 곳에 묻혔다.사사기 12:7 · 본디새김

사사기는 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이 얼마 동안 평온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가 이룬 구원을 다시 칭찬하거나, 내전을 이유로 그를 직접 책망하는 평가를 덧붙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다스렸고, 죽었고, 묻혔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 쫓겨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길르앗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입다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구원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과 권력으로 인해 한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깊은 상처를 남긴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사사들은 언제나 완전한 지도자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지만, 그들에게 맡겨진 구원의 사명이 그들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입다가 죽고 세 명의 다른 사사가 이어서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매장 장소를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특이하게도 ‘길르앗의 성읍들’이라는 복수 형태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여러 성읍에 나뉘어 묻혔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확한 매장지를 확정하기 어려우므로 본디새김처럼 길르앗의 성읍들 가운데 한 곳으로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입찬 — 밖으로 보내고 밖에서 데려오는 집안

사사기 12:8–10 본문 →

입다 다음에는 베들레헴 출신 입찬이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다윗의 고향인 유다의 베들레헴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19:15에는 스불론 지파의 성읍 가운데에도 베들레헴이 등장합니다. 사사기 12장은 입찬이 어느 베들레헴 출신인지 명시하지 않으므로, 그의 고향을 유다의 베들레헴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입찬에게는 아들 서른 명과 딸 서른 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딸 서른 명을 밖으로 시집보내고, 아들들을 위해 밖에서 여자 서른 명을 데려왔습니다.

이 기록은 앞선 입다의 이야기와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입다에게는 외동딸 하나뿐이었습니다. 입다의 딸은 결혼하지 못한 채 자신의 처녀성을 슬퍼했습니다. 반면 입찬의 딸들은 모두 밖으로 시집갔고, 그의 아들들도 밖에서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이것을 입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입찬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상급으로 설명할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렇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 집안에서는 유일한 딸의 미래가 사라졌고, 다음 집안에서는 많은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새로운 관계들이 형성됩니다.

여기서 「밖」이라는 표현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킬까요?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집안 밖일 수도 있고, 씨족이나 더 넓은 친족 집단 밖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다른 민족과 혼인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근거는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유력한 가문의 혼인은 개인적 결합만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 사이의 관계를 맺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입찬의 많은 혼인 관계는 그의 집안이 광범위한 사회적 연결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어떤 정치적 동맹을 만들어 냈는지, 이스라엘의 지파 사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일곱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어떤 전쟁을 했는지,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어떤 위기를 해결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의 집안과 혼인 관계, 그리고 매장이 기억됩니다.

어떤 사사들의 이야기는 전투를 중심으로 남아 있지만, 다른 사사들은 가문과 지역적 관계를 중심으로 기억됩니다.

엘론 — 특별한 업적이 기록되지 않은 열 해

사사기 12:11–12 본문 →

입찬 다음에는 스불론 사람 엘론이 등장합니다.

그 뒤에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열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사사기 12:11 · 본디새김

그리고 죽어 스불론 땅 아얄론에 묻힙니다. 그에게 몇 명의 자녀가 있었는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전쟁을 했는지, 특별한 업적을 이루었는지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독자는 기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실패의 증거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무능했다거나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가 뛰어난 통치를 하여 완전한 평화를 이루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사사기에는 긴 이야기를 가진 인물들과 아주 짧게 소개되는 인물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긴 이야기를 가진 인물이 반드시 더 훌륭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입다의 경우가 그것을 잘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에는 이름과 통치 기간만 기록된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자세한 행동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들 역시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사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압돈 — 일흔 마리의 나귀를 타는 자손들

사사기 12:13–15 본문 →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사는 피르아톤 사람 압돈입니다.

그에게는 아들 사십 명과 친손자 삼십 명이 있었고, 그들은 수나귀 칠십 마리를 타고 다녔습니다. 이 기록은 압돈의 집안이 상당한 규모와 재산을 가진 가문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귀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일정한 지위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사사기 5:10에서도 나귀를 타는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앞서 야이르에게는 아들 서른 명과 어린 수나귀 서른 마리가 있었습니다(10:4). 압돈의 집안은 그보다 더 큰 규모로 소개됩니다.

사사기의 서술은 어떤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개인의 전투 능력뿐 아니라 집안의 크기와 사회적 지위에서도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정치적 지도력이 점차 유력한 가문과 결합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고 압돈이 세습 왕조를 세우려 했다거나, 자기 자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부당하게 지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행동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압돈은 여덟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죽어 에브라임 땅 피르아톤에 묻힙니다.

마지막 절에는 「아말렉 사람들의 산지」라는 지리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이 왜 에브라임 땅의 특정 지역에 붙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압돈 시대에 아말렉 사람들이 그 지역을 지배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입다의 집안은 그의 서원 때문에 유일한 자녀의 미래가 위태로워지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반면 입찬과 압돈의 기록에서는 많은 자녀들과 이어지는 세대가 강조됩니다. 본문이 이 숫자들을 의도적으로 입다의 비극과 대비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연속해서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가정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앞에서는 같은 백성 사이에서 생명이 대규모로 사라졌습니다.

뒤에서는 가문이 이어지고, 다음 세대가 자라나며, 사람들의 삶이 계속됩니다.

사사기는 그 두 현실을 한 장 안에 나란히 놓습니다.

길을 막는 사람들과 길을 건너려는 사람들

사사기 12:1–15 본문 →

사사기 12장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서로를 구원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아픈 사실을 보여 줍니다. 입다는 암몬 자손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그의 군대는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강을 건너 살아 돌아가는 일을 막았습니다. 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보다 지파의 명예와 지역적 소속이 더 중요해질 때, 이스라엘은 자기 안에 또 다른 적을 만들어 냅니다.

요단강의 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루에서는 길을 묻는 말에 길을 알려 주는 대신, 사람의 출신을 판별하는 단어가 되돌아왔습니다.

「『쉽볼렛』이라고 좀 말해 보아라.」

그들은 말소리의 차이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소리를 내는 사람이 자신들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그를 살려 줄 이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