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3–12장 · 일어서는 재판관들

승리 앞에서 딸을 잃은 입다

입다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쫓아냈던 길르앗의 장로들이 도움을 청하러 왔을 때, 그는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얻어 냈습니다. 암몬 왕이 영토 반환을 요구했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길게 설명하며 그 요구를 반박했습니다. 그는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시는 분이 여호와야훼라고 고백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가장 위험한 말은 적국의 왕에게 한 말도, 자신을 버렸던 장로들에게 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한 말이었습니다.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한 사람은 하나뿐인 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서원은 왜 필요했습니까? 그가 딸에게 행한 일은 정확히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까?

사사기 11장은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 지도자의 판단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매우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1011장 본문 읽기 →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난 용맹한 전사

사사기 11:1–3 본문 →

이야기는 입다의 출생과 가족관계에서 시작됩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용맹한 전사였다. 그는 성매매 여성의 아들이었고, 길르앗이 입다를 낳았다.사사기 11:1 · 본디새김

기드온이 처음 부름받았을 때에도 비슷한 칭호가 사용되었습니다(6:12).

그러나 입다의 용맹함은 아버지의 집에서 그의 지위를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길르앗의 아내도 그에게 아들들을 낳아 주었다. 그 아내의 아들들은 자라서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말했다. 「너는 우리 아버지 집에서 상속받지 못한다. 너는 다른 여자의 아들이기 때문이다.」사사기 11:2 · 본디새김

이 장면의 핵심은 입다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그의 출생 조건입니다.

형제들은 입다가 무능하다거나 아버지를 배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집에서 받을 몫을 부정합니다.

입다는 아버지의 집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그 집에서 자기 자리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형제들을 피해 톱 땅으로 도망칩니다.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건달들」로 묘사됩니다.

9장에서 아비멜렉이 고용했던 사람들을 설명할 때에도 이 표현이 등장했습니다(9:4). 아비멜렉의 사람들은 실제 학살에 가담했지만, 입다와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에게는 사람들을 이끌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곧 길르앗의 장로들이 그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쫓겨난 사람이 이제 그 집안이 속한 지역 전체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곤경에 처한 지금 저를 찾아왔습니까?」

사사기 11:4–11 본문 →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자 길르앗의 장로들은 톱 땅으로 입다를 찾아갑니다.

그들이 입다에게 말했다. 「와서 우리의 지휘관이 되어 주십시오. 함께 암몬 자손과 싸웁시다.」사사기 11:6 · 본디새김

하지만 입다는 곧바로 응하지 않습니다.

입다가 길르앗의 장로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저를 미워하여 제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곤경에 처한 지금 저를 찾아왔습니까?」사사기 11:7 · 본디새김

2절에서 입다를 쫓아낸 사람들은 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입다는 장로들에게 그 책임을 묻습니다.

장로들이 실제로 추방에 직접 관여했을 수도 있고, 그 일을 방치하거나 공동체적으로 승인한 책임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경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앞 장에서 보았던 이스라엘의 모습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평소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다가 위기에 처해서야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었습니다(10:10–14). 물론 입다와 여호와야훼를 같은 위치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곤경에 처했을 때 비로소 자신들이 외면했던 존재를 찾는다는 이야기의 형태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

입다는 장로들의 부탁을 듣고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 합니다.

지휘관에서 우두머리로

처음에 장로들이 제안한 자리는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입다의 항의를 듣고 그들은 제안을 확대합니다.

길르앗의 장로들이 입다에게 말했다. 「그 때문에 지금 우리가 당신에게 돌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워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우리, 곧 길르앗의 모든 주민의 우두머리가 될 것입니다.」사사기 11:8 · 본디새김

장로들은 이제 단순히 전쟁에서 군대를 이끌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길르앗 전체를 다스릴 권한까지 제안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상속받을 자격조차 부정당했던 사람이 이제 자신을 쫓아낸 지역의 우두머리가 될 기회를 얻었습니다.

입다가 길르앗의 장로들에게 말했다. 「만일 당신들이 암몬 자손과 싸우도록 저를 다시 데려가고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제 앞에 넘겨주시면, 제가 당신들의 우두머리가 될 것입니다.」사사기 11:9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의 지도권을 여호와야훼께서 주실 승리와 연결합니다. 장로들은 여호와야훼를 증인으로 세워 그의 말을 따르겠다고 맹세합니다.

마침내 백성은 입다를 「우두머리와 지휘관」으로 세웁니다(11:11). 앞서 따로 등장했던 두 직함이 이제 함께 주어집니다.

입다는 미스바에서 여호와야훼 앞에 자기의 모든 말을 아룁니다. 그 말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 사이의 협상이 하나님 앞에서 확인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입다는 자신을 쫓아낸 공동체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이유는 그 공동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관계를 회복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입다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입다의 귀환은 가족과 공동체의 관계가 온전히 치유되었다는 이야기라기보다, 위기 속에서 서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잃었던 자리를 되찾았지만, 아직 자신의 집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칼을 들기 전에 역사를 말하다

사사기 11:12–22 본문 →

입다는 지휘관이 되었지만 곧바로 전쟁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말했다. 「당신과 저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기에 제 땅에서 싸우려고 제게 왔습니까?」사사기 11:12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전쟁의 원인을 확인하려는 외교적 접근입니다. 암몬 왕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올라올 때 아르논에서 얍복까지, 또 요단까지 이르는 자신의 땅을 빼앗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땅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요구합니다.

암몬 왕은 「제 땅」이라고 말하고, 입다 역시 「제 땅」이라고 말합니다. 양쪽 모두 자신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입다는 다시 사자들을 보내 긴 답변을 전합니다. 이 답변은 사사기에서 드물게 길고 체계적인 외교 연설입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후 역사를 근거로 암몬의 영토 요구를 반박합니다.

아르논강과 얍복강 사이의 요단 동쪽 지역은 입다와 암몬 왕이 다투는 영토의 중심입니다. 고대 국경선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으므로 지도는 지리적 관계를 이해하는 참고로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모압 땅을 돌아서 지나갔다

입다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에돔 왕에게 통행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말합니다. 모압 왕에게도 요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 에돔 땅과 모압 땅을 돌아서 모압 땅의 해 뜨는 쪽에 이르렀고, 그들은 아르논 건너편에 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모압의 영토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아르논이 모압의 경계였기 때문입니다.」사사기 11:18 · 본디새김

아르논은 오늘날 요르단 지역에서 사해 동쪽으로 흘러드는 하천과 그 골짜기를 가리킵니다. 고대에 모압과 그 북쪽 지역을 구분하는 주요 지리적 경계로 등장합니다.

이어 사건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은 헤스본을 다스리던 아모리 왕 시혼에게 통행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시혼은 이스라엘을 믿지 않고 군대를 모아 먼저 전쟁을 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쳤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에 살던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모두 차지했습니다.」사사기 11:21 · 본디새김

이 사건의 기본적인 흐름은 민수기 21:21–31과 신명기 2:26–36에서도 확인됩니다.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은 암몬 왕이 지금 주장하는 것처럼 암몬에게서 빼앗은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쟁을 일으킨 아모리 왕 시혼의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입다는 무조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땅을 주셨으니 당신들은 물러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상대방의 역사적 주장 자체를 반박합니다. 그 땅이 이전에 누구의 지배 아래 있었는지, 이스라엘이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입다는 자신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력보다 먼저 기억과 역사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입다의 외교적 주장이라는 점을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그의 말이 모두 완전하고 중립적인 역사 서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권리를 변호하는 당사자입니다.

「판결하시는 여호와야훼께서 판결하시기를」

사사기 11:23–28 본문 →

입다는 앞서 설명한 역사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아모리 사람들을 쫓아내셨는데, 당신이 그 땅을 차지하려 합니까?」사사기 11:23 · 본디새김

입다에게 시혼과의 전쟁은 단순히 군사력의 우열로 결정된 사건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사건입니다.

「당신의 신 크모쉬가 당신에게 차지하게 해 주는 것을 당신이 차지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우리 앞에서 쫓아내신 이들의 땅은 모두 우리가 차지할 것입니다.」사사기 11:24 · 본디새김

크모쉬는 구약에서 주로 모압의 신으로 등장합니다(민수기 21:29; 열왕기상 11:7). 암몬과 관련하여서는 밀곰이나 몰렉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열왕기상 11:5, 7). 그런데 입다는 암몬 왕에게 크모쉬를 「당신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입다가 암몬과 모압의 종교적 전통을 함께 묶어 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는 그의 연설이 모압과 관련된 역사적 논증을 강하게 반영하면서 크모쉬라는 이름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만으로 어느 설명이 정확한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상대방이 이해할 만한 종교적 논리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이 발언을 크모쉬가 실제로 땅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신이라는 성경 서술자의 인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입다가 암몬 왕을 설득하려고 사용한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치포르의 아들인 모압 왕 발락보다 정말 더 낫습니까? 그가 이스라엘과 정말 다투었습니까? 아니면 그들과 실제로 싸웠습니까?」사사기 11:25 · 본디새김

발락은 민수기 22–24장에 등장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발람을 불러 저주하게 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발락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아무런 적대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질문은 발락이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과 직접 전쟁을 벌였느냐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삼백 년이라는 시간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딸린 마을들, 아로에르와 그 딸린 마을들, 아르논 강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삼백 해 동안 사는 사이에, 어째서 당신들은 그때 그곳들을 되찾지 않았습니까?」사사기 11:26 · 본디새김

여기서 삼백 년이라는 숫자는 입다의 외교 연설에 등장하는 시간입니다. 이 숫자를 가지고 출애굽부터 입다까지의 전체 연대를 반드시 정확히 삼백 년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사기의 각 시대가 서로 어떻게 중첩되었는지에 대한 문제도 별도로 남습니다.

입다에게 중요한 것은 그 땅이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의 연설은 마지막에 하나의 선언으로 모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저와 싸우려 하여 제게 악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판결하시는 여호와야훼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를 판결하시기를 바랍니다.」사사기 11:27 · 본디새김

사람들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는 분은 여호와야훼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암몬 왕은 입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입다는 길고 치밀한 설명을 했지만, 상대방이 그 설명을 받아들이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말에 능숙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하나님께 어떤 말을 할 것인지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여호와야훼의 영이 임한 뒤에 나온 서원

사사기 11:29–33 본문 →

29절은 전쟁의 전환점입니다.

여호와야훼의 영이 입다 위에 임했다. 그는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갔다. 또 길르앗의 미스베를 지나갔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 암몬 자손 쪽으로 건너갔다.사사기 11:29 · 본디새김

사사기에서 여호와야훼의 영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능력 있게 하여 특정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시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옷니엘에게도 여호와야훼의 영이 임했고(3:10), 기드온에게도 여호와야훼의 영이 임했습니다(6:34). 삼손의 활동 역시 여호와야훼의 영과 관련됩니다(14:6, 19).

그런데 그다음에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입다가 여호와야훼에게 서원하며 말했다. 「만일 당신께서 암몬 자손을 제 손에 확실히 넘겨주시면,」 「제가 암몬 자손에게서 무사히 돌아올 때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으러 나오는 자는 여호와야훼의 것이 될 것이며, 제가 그를 번제로 바치겠습니다.」사사기 11:30–31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의 영이 임한 뒤에 입다가 서원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승리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 더 강한 헌신을 표현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서원을 통해 승리를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을 특정한 한 가지 동기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으러 나오는 자」

단순히 집에서 무언가 밖으로 나오는 장면이 아니라, 전쟁에서 돌아온 입다를 맞이하러 나오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입다가 누구를 예상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짐승을 생각했는지, 사람도 포함될 수 있다고 여겼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미래의 사건을 약속의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여호와야훼의 것이 될 것이며, 번제로 바치겠습니다」

직접적인 문장 흐름은 「그는 여호와야훼의 것이 될 것이며, 내가 그를 번제로 올리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서원을 요구하셨는가?

본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다는 것과 입다가 서원했다는 것은 서로 이어서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그 서원을 명령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또한 서원을 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입다는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그들에게 건너갔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겼다.사사기 11:32 · 본디새김

입다는 스무 성읍에 걸쳐 암몬 자손을 크게 무찌르고, 암몬 자손은 이스라엘 앞에 굴복합니다. 그러나 서술자는 그 승리의 원인을 입다의 약속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이 먼저 임했고, 하나님이 적들을 그의 손에 넘기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순서는 입다의 서원을 하나님이 원하셨던 필수적인 행동으로 읽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여 그가 맡은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모든 판단과 행동을 하나님께서 승인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사람을 노래와 춤으로 맞이하는 일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8:6에서 여자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돌아오는 사울 왕을 맞이합니다. 그러므로 집 문에서 자신을 맞으러 나올 존재가 사람일 가능성을 입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입다의 말에 사용된 ‘그리고’를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한쪽은 이 문장을 하나의 대상에게 적용되는 두 가지 진술로 읽습니다. 곧 여호와야훼께 속한 것으로 바치고, 실제 번제로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다른 쪽은 접속사를 문맥상 선택의 의미로 이해할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대상이면 하나님께 봉헌하고, 번제로 바칠 수 있는 대상이면 번제로 드린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사람이 나오면’과 ‘짐승이 나오면’을 구별하는 조건이 명시되지 않습니다. 또한 두 절을 별도의 선택지로 나누는 뚜렷한 표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에서는 하나의 대상이 여호와야훼께 속하게 되고 번제로 드려진다고 읽는 편이 더 직접적입니다. 레위기 1장은 번제에 관해 설명하면서 제물이 제단에서 불살라지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를 평생 여호와야훼께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사무엘상 1:11). 그러나 한나의 서원은 아들의 생명을 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서 여호와야훼를 섬기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사무엘상 1:24–28). 따라서 한나의 이야기로 입다의 서원을 자동으로 평생 봉사에 관한 서원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11:32는 입다를 믿음의 인물들 가운데 언급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믿음으로 행동한 측면을 인정하는 것이지, 사사기 11장에 기록된 서원과 딸에게 행한 일을 모두 승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집 문에서 나온 단 한 사람

사사기 11:34–35 본문 →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제 그는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서술자는 누가 먼저 나올지 미리 알려 주지 않습니다. 입다가 집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그 존재를 보여 줍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르렀다. 그때 그의 딸이 손북을 치고 춤을 추며 그를 맞으러 나오고 있었다. 그 딸은 외동이었다. 그에게는 그 딸 말고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사사기 11:34 · 본디새김

손북과 춤은 출애굽기 15장에서 미리암과 여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입다의 서원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딸에게는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온 기쁜 순간이지만, 독자에게는 끔찍한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상속받지 못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이끌 사람이 필요해지자 공동체는 그에게 돌아왔고, 그는 길르앗 전체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승리의 순간에, 자신의 집안에서 유일한 다음 세대인 딸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난 입다는 마침내 자기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서원은 그 집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자녀를 위협합니다.

「네가 나를 아주 무너뜨렸구나」

그는 딸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아주 무너뜨렸구나. 네가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구나. 나는 여호와야훼께 입을 열었으니 돌이킬 수가 없다.」사사기 11:35 · 본디새김

옷을 찢는 행동은 깊은 슬픔과 충격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절규이지만, 사건의 책임을 정확히 표현한 말은 아닙니다.

딸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전쟁에서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맞이했을 뿐입니다. 입다가 어떤 서원을 했는지도 딸이 알고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마치 딸이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사람인 것처럼 말합니다.

실제로 그를 곤경에 빠뜨린 것은 자신이 한 서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신 것을 약속했고, 그 약속의 대상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미래의 사건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를 딸이 감당해야 할 상황에 놓였습니다.

입다는 자신이 입을 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딸을 자신을 무너뜨린 존재라고 부릅니다.

그의 슬픔이 진실하다고 해서 그 말이 공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입다는 정말 서원을 돌이킬 수 없었는가?

사사기 11:36 본문 →

입다가 자신은 돌이킬 수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에도 그 서원을 그대로 이행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주장은 같지 않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 한 서원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이 분명히 있습니다. 민수기 30:2는 사람이 여호와야훼께 서원하거나 맹세했다면 자기 말을 깨뜨리지 말고 입에서 나온 대로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23:21–23도 하나님께 한 서원을 지체하지 말고 이행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 규정들을 사람을 번제로 바치는 행위까지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신명기 12:31은 다른 민족들이 자신들의 신들에게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행위를 여호와야훼께서 미워하시는 일로 명시합니다. 신명기 18:10도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행위를 금합니다. 레위기 18:21 역시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는 것을 금지합니다.

구약의 여러 규정은 서원과 제물에 관한 다양한 상황을 다루지만, 사사기 11장은 입다가 자신의 서원을 철회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법적 논의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입다가 어떤 절차를 통해 서원을 무효화할 수 있었다고 쉽게 단정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딸을 번제로 바치는 것 외에는 아무 선택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을 넘어섭니다.

입다의 서원은 입다 자신의 말이었습니다.

딸은 왜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이는가?

딸이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 여호와야훼께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대로 제게 행하십시오. 여호와야훼께서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원수들인 암몬 자손에게 복수해 주셨으니 말입니다.」사사기 11:36 · 본디새김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일을 하나님의 승리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그러나 딸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그 서원을 승인하셨다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녀가 아버지의 권위와 서원의 무게를 인정했다는 것과, 그 서원이 하나님 앞에서 옳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고, 아버지에게 대답하며, 이어서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

본문은 그녀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려줍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있다는 이유로 그녀가 자유롭고 동등한 조건에서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녀에게 이 상황을 만든 사람은 아버지였고, 딸은 그 결정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비대칭적인 관계를 놓치면 이야기의 비극이 지나치게 아름다운 자기희생의 이야기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삶과 미래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시험의 명령을 주셨으며,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막으십니다(창세기 22:1–2, 11–12). 입다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딸을 바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입다 스스로 서원했고, 그 서원이 딸에게 닥쳤을 때 그를 막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사건을 단순히 하나님께 자녀를 바친 신앙의 모범이라는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7:31에서도 하나님은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행위를 명령하지 않으셨으며 자신의 마음에 두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레미야는 입다보다 후대의 역사적 상황을 다룹니다. 그러나 구약 전체의 정경적 관점에서 보면, 자녀를 제물로 불살라 바치는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헌신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딸은 왜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처녀인 것을 슬퍼하는가?

사사기 11:37–39 본문 →

입다의 딸은 아버지에게 두 달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딸이 자기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게 이 일을 허락해 주십시오. 두 달 동안 저를 놓아주십시오. 제가 떠나 산들로 내려가서, 제 여자 친구들과 함께 제가 처녀인 것을 두고 울겠습니다.」사사기 11:37 · 본디새김

입다는 허락합니다. 딸은 여자 친구들과 함께 산들로 가서 두 달 동안 자신이 처녀인 것을 두고 웁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녀를 낳고 가계를 이어 가는 일은 한 사람의 삶과 집안의 미래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후손을 통해 가족의 이름과 상속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녀가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생을 마친다면, 입다의 집안은 그를 이을 후손을 남기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딸이 처녀인 것을 슬퍼한다는 말은 단순히 결혼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누리지 못한다는 아쉬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졌을 미래, 가정을 이루고 다음 세대를 낳을 가능성 전체를 잃는 슬픔일 수 있습니다.

입다가 딸의 운명을 결정할 말을 했지만, 그 딸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같은 세대의 여자들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남자들이 전쟁과 정치적 지도권을 협상했습니다. 이제 그 결정의 결과를 감당하는 딸은 다른 여자들과 산으로 떠납니다.

그들은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지 않습니다.

한 젊은 여자가 누리지 못할 미래를 함께 슬퍼합니다.

실제 죽음인가, 평생의 봉헌인가?

두 달이 끝나자 딸은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했다. 딸은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에는 다음과 같은 관습이 생겼다.사사기 11:3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입다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딸을 죽이는 장면도 나오지 않고, 번제를 드리는 절차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입다가 실제로 딸을 번제로 바쳤다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는 입다가 딸을 평생 하나님께 봉헌하여 결혼하지 않고 살게 했다는 해석입니다. 따라서 두 읽기 가운데 문장의 직접적인 흐름과 더 자연스럽게 맞는 것은 실제 번제로 바쳤다는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이행 장면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까지 지워서는 안 됩니다.

왜 서술자는 그 순간을 보여 주지 않는가?

입다가 암몬 자손을 쳐서 크게 승리했다는 설명은 두 절에 불과합니다(11:32–33). 반면 딸과의 만남, 아버지의 절규, 딸의 대답, 두 달 동안의 슬픔은 훨씬 세밀하게 서술합니다. 그런데 정작 서원 이행의 마지막 순간은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했다」는 한 문장으로 지나갑니다.

본문이 왜 이렇게 서술했는지 저자의 의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독자는 딸의 죽음이나 봉헌을 둘러싼 의식을 자세히 바라보는 대신,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녀가 무슨 말을 했고 무엇을 슬퍼했는지를 오래 기억하게 됩니다.

본문은 서원의 마지막 순간보다 그 서원이 한 사람의 삶과 미래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더 길게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실제 번제로 바쳤다는 읽기는 31절의 서원을 가장 직접적으로 따릅니다. 입다는 번제로 바치겠다고 약속했고, 39절은 그가 그 서원대로 행했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옷을 찢는 행동, 딸이 두 달 동안 슬퍼하는 장면, 딸을 기리는 연례 관습도 실제 죽음의 비극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또한 39절에서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었다고 특별히 기록한 것은, 딸이 자녀를 낳을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의 어려움은 본문이 실제 처형이나 제사의 과정을 직접 서술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평생 하나님께 봉헌했다는 읽기는 딸이 자신의 처녀성을 슬퍼하고, 39절이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었다고 강조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또한 31절의 「여호와야훼의 것이 될 것이며, 번제로 바치겠습니다」라는 문장을 두 가지 가능한 헌신 방식으로 구분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앞서 살펴본 언어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31절에서 입다는 명시적으로 번제를 약속합니다. 39절은 그 서원을 그대로 행했다고 말합니다. 또한 본문은 딸이 성소에서 평생 봉사하게 되었다거나 다른 곳에 머물며 살았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딸을 해마다 기억하다

사사기 11:40 본문 →

이야기는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관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자들이 입다의 딸을 기억하는 관습으로 끝납니다.

해마다 이스라엘의 딸들이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의 이야기를 되새기러 갔다. 한 해에 나흘 동안 그렇게 했다.사사기 11:40 · 본디새김

아버지의 이름은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길르앗의 우두머리였고, 용맹한 전사였으며, 암몬 자손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러나 딸에게는 개인의 이름이 없습니다. 서술자는 그녀를 계속 「입다의 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바로 그 딸이 기억의 중심에 남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공동체 전체가 누렸지만, 그 승리와 연결된 아버지의 서원 때문에 한 사람의 미래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잊히지 않도록 기억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이 관습이 입다의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졌는지, 딸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는지, 혹은 애도와 기억이 함께 담긴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은 그녀의 이야기를 승리한 아버지의 업적 뒤로 밀어 넣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되새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탄노트(⁨תָּנָה⁩)는 해석이 쉽지 않은 단어입니다. 이 말은 슬퍼하거나 애도한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어떤 일을 이야기하거나 기리는 행위를 뜻한다고 이해되기도 합니다. 같은 어근과 관련된 표현이 사사기 5:11에도 등장하지만, 두 문맥이 정확히 같은 활동을 가리킨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의 「이야기를 되새기러 갔다」는 번역은 구체적인 의식을 확정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손북 소리가 멈춘 자리에서

사사기 11:1–40 본문 →

입다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수 있음을 믿었지만, 그 믿음이 무엇을 하나님께 약속해야 하는지에 관한 올바른 판단까지 보장하지는 못했습니다. 믿음과 판단이 언제나 자동으로 함께 성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 이야기의 아픔입니다. 따라서 이 비극을 하나님이 더 큰 목적을 위해 반드시 요구하셨던 희생이라고 설명할 근거는 없습니다.

두 달 동안 그녀는 여자 친구들과 함께 자신이 누리지 못할 미래를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서술자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을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딸은 아버지의 서원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잃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입다는 길르앗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집 문으로 돌아왔을 때 들렸던 손북 소리는 그 승리의 노래로 계속 남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을 앗아 갔는지를, 이스라엘의 여자들은 해마다 나흘 동안 되새겼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