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1–13장 ·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속한 것을 누가 차지하는가
마가복음 12장은 포도원을 빼앗으려는 소작인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가진 것을 모두 헌금궤에 넣는 가난한 과부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이 이야기들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물음이 흐릅니다.
우리는 무엇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정말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있습니까?
이 물음이 특별히 날카로운 이유는 논쟁이 벌어지는 장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하고 예배하는 중심 장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앞선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모습을 비판하셨고,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시는지 물었습니다(11:15-18, 27-33). 그 질문에 대한 긴 대답이 12장에서 이어집니다. 다만 예수님의 대답은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질문하는 사람들의 권위가 어디에서 왔으며,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드러내십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심문하지만, 이야기가 끝나갈수록 오히려 예수님 앞에서 그들의 신앙과 삶이 드러납니다.
포도원은 누구의 것인가 — 사랑하는 아들을 거절한 사람들
잘 가꾸어진 포도원에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하나를 이야기하십니다.
그는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즙 받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세로 내주고 멀리 떠났다.」마가복음 12:1 · 본디새김
울타리는 포도원을 보호하고, 포도즙 받는 확은 수확한 포도를 가공하는 데 쓰이며, 망대는 포도원을 살피는 시설입니다.
이사야 5:1-7에서도 하나님은 포도원을 가꾸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정성껏 마련하시고 좋은 열매를 기대하시지만, 그곳에서 기대와 다른 열매가 나옵니다. 이사야는 그 포도원이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이 바라신 열매가 정의와 의로움이었다고 밝힙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울타리와 포도즙 시설, 망대라는 세부사항까지 이사야의 포도원 노래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전개하십니다.
이사야에서는 포도원이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포도원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포도원을 맡은 소작인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 자체를 무가치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 받은 것을 자기 소유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가꾸도록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포도원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수확할 때가 되자 주인이 보낸 노예를 붙잡아 매질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다시 보낸 노예도 모욕하고, 그다음 노예는 죽입니다. 폭력은 반복되고 점점 심해집니다.
이 비유를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하면, 주인이 보낸 노예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다가 거절당한 예언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레미야 7:25-26에서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냈지만 백성이 듣지 않았다는 고발이 나옵니다.
소작인들의 폭력이 반복되는 만큼, 주인이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주는 행동도 반복됩니다.
이야기는 하나님의 인내를 보여 주지만, 그것은 악을 가볍게 여기는 인내가 아닙니다. 마침내 주인은 마지막 남은 사람을 보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마지막 선택
「그는 아직 사랑하는 아들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그들에게 보내며 말했다. 『내 아들은 그들이 어려워하겠지.』」마가복음 12:6 · 본디새김
앞서 보낸 사람들은 모두 노예였습니다. 마지막에 보내는 사람은 아들입니다. 마가는 그를 단순히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복음서 앞부분에서 이미 독자에게 익숙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의 음성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했고(1:11), 변화산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이 들렸습니다(9:7).
「그 소작인들은 서로 말했다. 『이 사람이 상속자다. 자, 그를 죽이자. 그러면 상속 재산이 우리 것이 된다.』」마가복음 12:7 · 본디새김
주인의 권위를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는 아들의 신분이, 소작인들에게는 그를 죽여야 할 이유가 됩니다.
그들은 아들이 사라지면 상속 재산이 자기들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여전히 살아 있고 포도원의 소유권도 그대로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계산은 터무니없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법적 상속 절차가 아니라 반역자들의 욕망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들은 아들을 죽여 주인의 권리를 부정하려 합니다.
마가는 아들의 죽음을 특별한 순서로 서술합니다.
「그들은 그를 붙잡아 죽이고 포도원 밖으로 내쫓았다.」마가복음 12:8 · 본디새김
살아 있는 침입자를 내쫓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던집니다. 이것은 단순한 살해를 넘어 철저한 배척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읽힙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이 아들의 운명은 예수님께 다가오는 수난을 예고합니다.
심판받는 것은 포도원이 아니라 소작인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물으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무엇을 하겠느냐? 와서 소작인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마가복음 12:9 · 본디새김
포도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맡겨집니다.
이것을 곧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를 버리고 다른 민족으로 대체하신다는 선언으로 읽는 것은 본문의 초점을 지나치게 넓히는 것입니다. 비유의 직접적인 공격 대상은 예수님의 권위를 거부하는 지도자들이며, 12절에서도 그들이 비유가 자신들을 겨냥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뜻밖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십니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 그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마가복음 12:10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시편 118:22-23의 직접 인용입니다. 시편 118편은 위협과 고난 가운데 있던 이가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경험하고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그 안에서 버림받은 돌이 중요한 돌이 되었다는 이미지는 사람들의 평가가 하나님의 행동으로 뒤집히는 일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자신을 거절하는 지도자들 앞에 가져오십니다.
포도원 비유에서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이고 밖으로 내쫓습니다. 그것만 보면 아들은 완전히 패배한 듯합니다. 그러나 시편의 말씀은 사람들의 거절이 하나님의 마지막 판단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그 말씀을 들은 지도자들은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지만 무리를 두려워하여 물러납니다. 그러나 그 이해가 회개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과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바꾸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붙잡는 대신, 말로 넘어뜨릴 계획을 세웁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의 그 돌이 원래 역사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왕을 중심으로 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본래 시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절당한 이를 높이신다는 역전입니다. 또 비유의 모든 세부사항을 예수님의 수난 과정과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아들의 죽음 장면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포도원에서까지 배제했다는 사실입니다.
카이사르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 하나님께 속한 것은 무엇인가
정답을 골라도 위험한 질문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이 두 집단이 한자리에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마가는 이미 3:6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의논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다시 협력하여 예수님의 말씀에서 공격할 구실을 찾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그들이 와서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참되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신분에 좌우되지 않고 참되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에게 인두세를 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낼까요, 내지 말까요?」마가복음 12:14 · 본디새김
이 말은 그들의 의도와 별개로 예수님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사람들의 지위에 따라 진리를 바꾸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 사실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카이사르에게 내는 이 인두세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세금 납부의 편리함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지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정치적·종교적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로마 권력에 저항하도록 선동한다는 혐의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라고 말씀하시면 로마 지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 공격받으실 여지가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두 가지 답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으십니다. 대신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누구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가
그들이 가져왔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 초상과 새겨진 글은 누구의 것이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마가복음 12:16 · 본디새김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주어라.」 그러자 그들이 그를 몹시 놀라워하고 있었다.마가복음 12:1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흔히 정치와 종교를 서로 간섭하지 않는 두 영역으로 나누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예수님께서 던지신 질문의 날카로움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르에게 무엇이 속하는지를 묻기 전에 동전의 초상과 글을 보게 하셨습니다. 동전에는 카이사르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통치 체제 안에서 발생하는 세금의 문제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말씀을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목록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중요한 연결이 떠오릅니다. 창세기 1:26-27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동전에 카이사르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이 직접 설명하는 논증은 아니지만, 창세기와 나란히 읽을 때 가능한 정경적 연결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깊어집니다.
카이사르에게 동전을 돌려주는 일과 하나님께 자기 존재와 충성을 돌려드리는 일은 같은 무게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것이 어디까지인지에 관해 카이사르가 최종 결정권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세금에 관한 의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책임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앞선 비유에서 소작인들은 포도원이 주인의 것임을 거부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는 이들에게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돌려드리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얼굴은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서 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나님 — 부활에 관한 논쟁
일곱 형제와 한 여자,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
다음으로 사두개파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마가는 이들이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먼저 알려 줍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한 가지 기묘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어떤 남자가 자식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 죽은 형제의 가문을 이어 주어야 합니다. 이는 신명기 25:5-6에 나오는 이른바 형사취수 제도입니다. 그 규정은 죽은 형제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 규정을 극단적인 상황에 적용합니다. 일곱 형제가 차례로 한 여자와 결혼했지만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죽습니다. 여자도 결국 죽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질문은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곱 번의 결혼에도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을 후손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곱 명이 모두 죽었으므로 부활이 있다면 일곱 남자가 한 여자와 동시에 혼인 관계를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것을 부활의 모순으로 제시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현재의 혼인 제도가 부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가정을 전제로 합니다. 부활이란 지금의 삶이 단지 다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의 질문은 난처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정 자체를 문제 삼으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서 그렇게 어긋나 있는 것이 아니냐?」마가복음 12:2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모른다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인용할 만큼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현재 자신들이 경험하는 질서 안에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부활은 지금의 삶을 단순히 연장하는 일이 아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날 때에는 장가들지도 시집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마가복음 12:25 · 본디새김
여기서 「천사들과 같다」는 표현을 인간이 천사로 변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비교하시는 것은 부활 이후의 존재 방식이며,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혼인 관계가 더 이상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혼인 제도에는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세대의 계승이라는 조건이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사두개파 사람들이 인용한 율법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가문을 자손을 통해 보존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삶을 그러한 제도의 연속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신다면, 그 새로운 삶을 지금 세상의 조건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부활이 단순한 소생이나 이전 생활로의 복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만으로 부활 이후의 모든 인간관계가 어떤 모습일지 상세히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개파의 질문에 필요한 만큼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혼인 제도가 달라진다는 설명만으로는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이 먼저 인용했던 모세의 책으로 돌아가십니다.
하나님은 왜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셨을까
「그런데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에 대해서는 모세의 책 가운데 가시덤불 대목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다.』」마가복음 12:2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출애굽기 3:6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세보다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당시 그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논증의 핵심은 동사의 시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신 직후,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 소리를 들었고 그들을 구원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출애굽기 3:7-10). 하나님이 오래전에 조상들과 맺으신 관계는 그들이 죽었다고 해서 무의미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관계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그들의 후손을 돌보시고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언약의 지속성에서 부활을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부르신다면, 아브라함과의 관계는 죽음으로 완전히 끊어진 과거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음 때문에 자신의 약속을 포기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나님이다. 너희가 크게 어긋나 있다.」마가복음 12:27 · 본디새김
사두개파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한 여자가 누구에게 속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죽음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주장보다 큽니다. 예수님의 주제는 분명히 죽은 자들의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끝내 버리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그 부활 논증의 바탕에 놓여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의 한계보다 큽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그리스어 문장에는 한국어의 「이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셨다는 문법적 사실만으로 부활을 증명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물론 출애굽기 3:6 자체가 죽은 사람의 몸이 어떻게 부활하는지 설명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정체와 언약의 성격에서 부활의 가능성과 당위성을 이끌어 내십니다.
가장 큰 계명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왜 함께 가는가
논쟁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들은 사람
앞선 논쟁들과 달리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서기관 가운데 하나가 다가와 그들이 논쟁하는 것을 듣고, 예수가 잘 대답한 것을 보고 그에게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는 무엇입니까?」마가복음 12:28 · 본디새김
마가는 이 서기관을 적대적인 인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논쟁에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셨다는 이유로 다가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잘 대답하셨다는 것을 보고 질문합니다.
그가 던진 질문도 앞선 질문들과 다릅니다. 앞에서는 세금을 내도 되는지,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부활 신앙의 모순을 드러내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번 질문은 율법 전체의 중심을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4-5의 말씀으로 답하십니다.
예수가 대답했다. 「첫째는 이것이다. 『들어라, 이스라엘아. 주 우리 하나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가복음 12:2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사랑하여라」라는 명령부터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언하십니다. 신명기 6장의 이 선언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의 중심이며, 하나님의 유일성과 그분을 향한 전적인 충성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러한 하나님 이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을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사랑하여라.』」마가복음 12:30 · 본디새김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은 인간을 네 부분으로 정확히 나누려는 표현이 아닙니다. 반복되는 「다하고」에 무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특정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 생각과 욕망, 생명의 방향, 판단과 행동까지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그분을 향한 사랑도 다른 절대적인 충성과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다른 계명은 없다.」마가복음 12:3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레위기 19:18에서 온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막연한 친절이나 좋은 감정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 장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추수 때 남겨진 곡식을 거둘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노동자의 품삯을 부당하게 붙들어서는 안 되며, 재판에서도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같은 장 34절에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사는 외국인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즉, 이웃 사랑은 구체적인 삶의 관계에서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계명을 나란히 놓으십니다. 하나님 사랑이 첫째이고 이웃 사랑이 둘째지만, 둘째가 첫째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생략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이웃 사랑이 보여 줍니다.
바로 앞의 포도원 비유를 생각하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합니다. 하나님에게서 권한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사람을 보호하기는커녕 해칩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종교적 지식만이 아닙니다. 그 지식이 가리키는 사랑이 삶에서 사라져 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보다 사랑이 낫다고 말하다
서기관은 예수님의 대답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신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이해력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제사보다 낫습니다.」마가복음 12:33 · 본디새김
이 말이 나온 장소를 생각해 봅니다.
성전입니다.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 장소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와 제사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사를 무조건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종교 의식을 통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 중심을 짚어 낸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미 강조했던 내용입니다. 사무엘상 15:22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호세아 6:6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제사보다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선포합니다. 미가 6:6-8에서도 많은 제물을 바치는 문제보다 정의와 인애와 겸손한 동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이 말씀들은 제사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신실함 없이 제사만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예수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 그리고 아무도 더는 그에게 감히 묻지 못했다.마가복음 12:34 · 본디새김
앞선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위선과 오류를 지적하셨지만, 이 서기관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마가복음을 읽을 때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모든 서기관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 가운데에서도 그 말씀의 중심을 깨닫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다고 하지 않으시고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어떤 부족함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표현은 율법의 중심을 바르게 이해한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 구별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던 질문들이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더는 묻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질문을 던지십니다.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르는데 —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보다 더 큰 분
지금까지 사람들은 예수님께 여러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세금에 관한 판단, 부활의 가능성, 율법의 중심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누구십니까?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며 대답하여 말했다. 「서기관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마가복음 12:35 · 본디새김
그리스도(Χριστός)는 그리스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하며, 히브리어의 메시아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왕을 다윗의 후손으로 이해하는 것은 구약의 왕권 약속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는 다윗의 뒤를 이을 왕조에 관한 약속이 주어지고, 예언자들은 다윗의 계보에서 회복을 가져올 왕을 기대했습니다(이사야 11:1-5, 예레미야 23:5-6). 마가복음에서도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10:47-48).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것을 문제 삼으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1을 인용하십니다.
「다윗 자신이 거룩한 영 안에서 말했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마가복음 12:36 · 본디새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시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시면서 질문하십니다.
「다윗 자신이 그를 주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 큰 무리가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마가복음 12:37 · 본디새김
고대의 가족 관계에서 조상은 후손보다 높은 지위를 가집니다. 그런데 다윗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라고 부른다면, 그리스도를 단순히 다윗의 후손이라는 범주만으로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메시아 전통을 전면 부정하신다는 뜻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에 관한 통상적인 기대가 예수님의 정체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사람들은 다윗처럼 강한 왕이 나타나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메시아의 길은 단순히 다윗 왕조의 정치적 영광을 되풀이하는 길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사랑하는 아들이 거절당하고 죽임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버려진 돌처럼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중요한 돌로 세우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다윗보다도 높은 권위를 가진 분으로 소개됩니다.
지금 성전에서는 큰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질문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시편에서 첫 번째 「주」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훼이고, 두 번째 「내 주」는 높임을 받는 왕적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리스어에서는 둘 다 같은 단어인 ‘주’로 표현됩니다. 원래 시편 110편은 왕에게 부여되는 하나님의 권위와 승리를 선언하는 왕권 시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오른편에 앉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이라기보다, 그분에게서 특별한 지위와 권위를 받는다는 왕권의 언어입니다. 마가복음은 여기서 그 질문에 대한 모든 신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그 이후 예수님의 권위에 관한 증언을 통해 이 질문을 더 발전시킵니다. 특히 14:62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하나님 오른편에 앉는 인물에 관한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긴 옷을 입은 사람들과 삼켜지는 과부의 집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정체를 가르치신 뒤, 서기관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가르치며 말했다. 「서기관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 윗자리에 앉고 잔치에서 상석에 앉기를 좋아한다.」마가복음 12:38–39 · 본디새김
여기에는 한 가지 반복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긴 옷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지위를 드러낼 수 있는 수단입니다. 장터에서 받는 인사는 사회적 존경을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회당과 잔치의 좋은 자리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인정받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단순히 좋은 옷을 입거나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사실을 비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러한 인정과 명예를 좋아한다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비판은 훨씬 심각해집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한다. 이들이 더 무거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가복음 12:40 · 본디새김
「과부들의 집을 삼킨다」는 표현은 대단히 강합니다.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생활의 기반입니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과부의 재산과 생계가 탐욕에 의해 사라지는 모습을 집을 삼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종교적 지위를 이용하여 약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고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긴 기도는 그러한 행위를 가리는 겉치레가 됩니다. 기도가 길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가 참된 경건의 표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기 위한 가면이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장면에는 앞서 등장한 슬기로운 서기관과의 대조가 있습니다. 한 서기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제사보다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서기관들은 종교적 명예를 누리면서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있습니다.
같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율법이 삶에서 맺는 열매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들에게 조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권위가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해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율법에서 여호와야훼는 과부와 고아와 외국인의 권리를 특별히 보호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22:22-24에서는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하고, 신명기 10:18에서는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바로 그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의 집을 삼키고 있습니다.
이제 마가는 그 말씀을 설명하거나 논증하지 않습니다. 대신 카메라의 방향을 바꾸듯 예수님의 시선을 한 장소에 고정합니다.
헌금궤입니다.
그리고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서기관들이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과부의 재산을 빼앗았는지는 본문에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법률적 지위를 악용했을 가능성이나 종교적 권위를 이용했을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지만, 어느 한 방식으로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헌금궤 앞의 두 렙돈 —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계셨는가
예수님은 헌금의 액수만 보고 계시지 않으셨다
그는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 무리가 헌금궤에 동전을 어떻게 넣는지 보고 있었다. 많은 부자들이 돈을 많이 넣었다.마가복음 12:41 · 본디새김
본문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헌금의 총액을 확인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넣는지」 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 「어떻게」라는 말 하나만으로 예수님께서 모든 헌금자의 속마음을 직접 관찰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설명은 예수님의 평가가 단순한 금액의 비교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마가는 그들이 잘못된 돈을 넣었다거나 위선적으로 헌금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헌금 액수가 많았다는 사실만 기록합니다.
그런데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돈 두 닢을 넣었다. 고드란테 한 닢에 해당하는 것이다.마가복음 12:42 · 본디새김
렙돈은 매우 작은 단위의 동전이었습니다. 마가는 그 두 닢이 로마 화폐 단위인 고드란테 하나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많은 부자들의 헌금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금액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왜 굳이 제자들을 부르셨을까요? 이 여자의 행동이 무엇을 보여 주는지 제자들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궤에 넣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이 가난한 과부가 많이 넣었다.」마가복음 12:43 · 본디새김
여기서 예수님의 판단은 일반적인 계산과 반대입니다. 많은 돈을 넣은 사람이 더 많이 헌금했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모두 자기에게 남아도는 것에서 넣었지만, 이 여자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진 것을 다, 자기가 살아갈 밑천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2:44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자기가 살아갈 밑천」은 여자가 실제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 수단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단지 「마음으로는 전부를 드렸다」는 비유적인 뜻만이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재산을 실제로 모두 내놓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절대적인 금액이 아니라, 그 헌금이 각 사람의 삶에서 차지하는 무게를 보십니다.
이 과부는 헌신의 본보기인가, 잘못된 종교 제도의 피해자인가
전통적으로 이 장면은 가난한 과부의 놀라운 헌신을 보여 주는 본문으로 읽혀 왔습니다. 그는 가진 돈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부 내놓았습니다. 부자들이 남아도는 것에서 헌금할 때, 그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이 해석은 예수님께서 그의 헌금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다고 평가하셨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본문을 바로 앞의 말씀과 연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서기관들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자신이 살아갈 밑천을 모두 성전 헌금궤에 넣습니다. 이 배치는 우연한 이웃 장면으로 넘기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성전은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에게서까지 생계비 전부를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두 번째 주요 해석입니다. 과부의 헌금을 단순히 칭찬하는 장면이 아니라, 약한 사람의 자산을 소모시키는 성전 중심 종교 질서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헌신을 가르치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녀가 처한 비극적인 현실을 제자들에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실제로 이 대목은 해석이 갈립니다. 성전 체제의 문제를 비판하는 장면으로 읽는 해석이 있고, 과부를 긍정적인 제자도의 본보기로 읽는 해석이 있으며, 두 관점이 함께 성립할 수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먼저 과부가 실제로 서기관들에게 속아 헌금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마가는 그녀가 어떤 경위로 돈을 갖게 되었는지, 왜 전부 헌금하기로 결심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여자가 잘못된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여자를 본받아 가진 재산을 모두 성전에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 여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선언하시고,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은 함께 붙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헌금이 지닌 특별한 무게를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장면이 과부들의 집을 삼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 바로 뒤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자의 행동은 귀하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생계 전부를 내놓았다는 사실이 곧 그가 속한 종교 제도의 올바름까지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두 의미가 함께 놓일 때 이야기는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행동과, 그 사람을 보호해야 할 공동체의 책임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말없이 지나가는 여자가 가장 중요한 장면이 되다
이 과부에게는 이름도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질문하지도 않고, 믿음을 고백하지도 않고,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와서 동전 두 닢을 넣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이것은 앞선 장면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성전에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율법을 깊이 연구한 서기관들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지도자들이 있으며, 큰돈을 헌금하는 부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특별히 보라고 하시는 사람은 이름 없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그의 작은 헌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눈에 띄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헌금의 실제 무게를 알고 계십니다.
여기에 마가복음이 보여 주는 예수님의 독특한 권위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지위나 겉모습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앞서 적대자들이 아첨하는 말로 표현했던 바로 그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긴 옷과 명예를 보고 그의 경건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부자들의 큰 헌금 액수만 보고 그들이 가장 많이 드렸다고 판단하지도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평가 아래 가려진 삶의 실상을 보십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가난한 사람의 전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행동을 드러내시지만, 그녀의 궁핍을 해결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서도 바로 앞에서 엄중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헌금이 귀하다는 사실과 과부들의 집을 삼키는 불의가 심판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자기가 살아갈 밑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표현은 홀론 톤 비온입니다. 여기서 비오스는 문맥에 따라 삶이나 생활, 생계를 위한 재산을 뜻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
이 모든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권위를 자기 것으로 차지하는 삶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의 차이입니다. 그 차이는 종교적 지식의 양이나 공적인 지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겨 받은 권한을 자기 소유로 여기는 순간, 포도원을 돌보아야 할 소작인은 포도원을 빼앗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은 여기서 끝납니다.
성전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있고, 부자들은 많은 돈을 넣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서기관들도 그곳에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과부가 와서 작은 동전 두 닢을 넣었습니다. 그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했을 그 헌금의 무게를 말씀해 주십니다.
성전에서 가장 크게 보였던 사람들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특별히 보라고 하신 사람은 달랐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