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기적과 제자 파송
오시는 그분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사람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자신보다 능력이 크며, 그분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심지어 그분이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여 알곡은 모으고 쭉정이는 불태우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 3:11–12).
그런데 마태복음 11장에서 바로 그 요한이 예수님께 「당신이 바로 오시는 그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립니까?」 하고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식탁을 나누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악한 통치자는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고, 하나님의 길을 준비했던 요한 자신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질문했는지는 본문에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앞서 요한이 선포한 심판의 모습과 지금 그가 듣는 예수님의 활동 사이에 긴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태는 요한의 질문을 소개하기 직전에, 그가 감옥에서 들은 소식을 이미 「그리스도의 일들」이라고 부릅니다(11:2). 독자는 그 일들이 그리스도의 일임을 알고 있지만, 요한은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 정말 자신이 기다리던 그분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하시는 일이 우리의 기대와 다를 때,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1장은 이 질문을 따라 전개됩니다. 감옥에 있는 요한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요한을 평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대와 도시들에 대한 책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뜻밖에도 수고하고 짐이 지워진 사람들을 향한 초대로 끝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평가하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말씀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들려온 질문 — 무엇을 보고 그리스도를 알아볼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설명보다 먼저 자신이 하시는 일을 가리키십니다
11장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지시하시는 일을 마치고 다시 가르치며 선포하러 떠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병든 사람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일으키고, 나병을 앓는 사람을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내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10:8). 이제 예수님 자신이 계속 그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 소식을 감옥에서 듣게 된 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질문을 보냅니다.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바로 오시는 그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립니까?」마태복음 11:3 · 본디새김
「오시는 그분」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앞으로 도착할 어떤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 자신이 마태복음 3:11에서 이미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때 자신이 가리켰던 분이 예수님이신지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전하여라.」마태복음 11: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직접 선언하시는 대신 여섯 가지를 열거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다시 보고 다리가 불편한 이들이 걷는다. 나병을 앓는 이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는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마태복음 11:5 · 본디새김
이 목록을 그저 기적의 종류를 나열한 것으로 읽으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을 기억하도록 만드는 대답입니다.
이사야 35:5–6은 눈먼 사람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며 다리를 저는 사람이 사슴처럼 뛰게 될 날을 묘사합니다. 그 본문에서 이런 변화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사건의 일부입니다. 또한 이사야 61:1은 가난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말하고,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은 이사야 26:19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 말씀들을 그대로 이어 붙인 직접 인용은 아닙니다. 여러 예언의 이미지들을 모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밝히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러 오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까지 이야기한 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놀라운 능력이 드러나는 것과 함께, 그 능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질 만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알아보는 표지가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초인적인 힘을 과시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다가가며 생명을 일으키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여전히 감옥에 있을까요?
이사야 61:1에는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수를 풀어 주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 생략이 의도적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가 그려 주는 장면에서는 분명한 긴장이 생깁니다. 요한은 다른 사람들이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지만, 자기 자신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석방을 약속하지도, 그가 기대한 심판이 언제 이루어질지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그리고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복이 있다.」마태복음 11:6 · 본디새김
「걸려 넘어지다」는 길에 놓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이미지에서, 어떤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믿음에서 이탈하는 의미로 발전한 말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 자신이 걸림돌이 되실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기대했던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으신다는 이유로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그의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요한의 모든 기대를 만족시키는 답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실제로 하시는 일을 바라보게 하시고,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믿음은 모든 의문이 풀린 상태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 있어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보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무리를 향해 요한에 관해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가장 큰 예언자와 가장 작은 사람 — 시대의 경계에 선 요한
광야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세 번에 걸쳐 비슷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는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무엇을 보러 광야로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나 너희가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보아라, 부드러운 옷을 걸치고 다니는 이들은 왕들의 집에 있다.」 「그러나 너희가 무엇하러 나갔느냐? 예언자를 보려던 것이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한 이다.」마태복음 11:7–9 · 본디새김
질문이 반복될수록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뚜렷해집니다.
요한은 여론이 바뀔 때마다 자기 말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 나가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했고, 통치자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마태복음 14:3–4).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단지 광야의 흔한 식물을 가리키는지, 쉽게 흔들리는 사람을 빗댄 것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들과 함께 읽으면,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보러 나갔던 사람들이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했으며 실제로 누구를 만났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두 번째 질문의 「부드러운 옷을 걸치고 다니는 이들은 왕들의 집에 있다」는 요한의 현재 처지와 대조를 이룹니다. 요한은 왕들의 집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왕의 권력 때문에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권력에 가까이 있으면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 앞에서도 자신이 맡은 말을 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질문에 「그는 예언자보다 더한 이다」라고 직접 대답하십니다. 요한의 특별함은 그가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다는 데 있지 않고, 그가 맡은 역할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라기 3:1의 말씀을 가져오십니다.
「이 사람을 두고 이렇게 적혀 있다. 『보아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마태복음 11:10 · 본디새김
말라기 3:1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사자를 보내어 자기 앞에 길을 준비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는 문장은 사자가 「네 앞에」 보내져 「네 길」을 닦는 형태입니다. 원래 여호와야훼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던 예언이, 이제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요한에게 적용됩니다.
이전의 예언자들이 장차 오실 하나님의 구원을 멀리서 바라보며 선포했다면, 요한은 그 구원의 길을 직접 준비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작은 이가 요한보다 큽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난 적이 없다. 그러나 하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그보다 크다.」마태복음 11:11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 요한을 높이 평가하셨는데, 이제는 하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조차 그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큰」과 「작은」을 개인의 경건함이나 도덕적 수준으로 이해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요한은 누구보다 충실한 예언자로 소개되었는데, 왜 다른 사람들보다 작다는 말일까요?
열쇠는 이어지는 13절에 있습니다.
「모든 예언자와 율법이 요한의 때까지 예언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1:13 · 본디새김
율법과 예언자들이 기다리고 가리켰던 일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그 전환을 알리는 마지막 문턱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장 작은 이도 그보다 크다」는 말씀은 개인의 우열보다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위치와 특권이 달라졌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해석의 여지가 남습니다. 「하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를 새 시대에 참여하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특별한 비교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습니다. 문맥에서는 요한의 시대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대가 대조된다는 점이 가장 뚜렷하지만,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되었다는 뜻까지 본문이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지만, 이제 예언자들이 기다렸던 일이 그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힘으로 나아가는 나라입니까, 폭력을 당하는 나라입니까
12절은 마태복음 전체에서도 해석이 매우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나라는 힘을 쓰며 나아가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자들이 그것을 낚아챈다.」마태복음 11:12 · 본디새김
문제는 「힘을 쓰며 나아가고」에 해당하는 비아제타이(βιάζω)입니다. 이 형태는 중간태와 수동태로 모두 읽을 수 있습니다. 중간태로 읽으면 하나님 나라가 강력하게 밀고 나아간다는 의미가 되고, 뒤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라를 적극적으로 붙잡으려는 사람들인지 폭력적으로 차지하려는 사람들인지 다시 판단해야 합니다. 수동태로 읽으면 하나님 나라가 폭력을 당하고 있으며 폭력적인 사람들이 그것을 낚아채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데, 요한이 감옥에 갇힌 현재 상황과 연결하면 이 해석이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자들」과 「낚아챈다」라는 표현을 부정적인 폭력의 언어로 읽어 수동태 해석을 지지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법 형태만으로 한쪽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아무런 저항도 없는 평온한 사건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요한을 「장차 올 엘리야」라고 부르십니다(11:14). 말라기 4:5–6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예언은 심판에 앞서 백성의 마음이 돌이켜지는 일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약속이 요한의 사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요한이 옛 예언자 엘리야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반드시 읽어야 하는 말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17은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앞서 간다고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7:10–13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왔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말씀이 「귀를 가진 사람은 들어라」입니다.
문제는 소식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의 의미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요한도, 예수님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 —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사람들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 다른 아이들에게 불평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그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었는데 너희는 춤추지 않았다. 우리가 애곡했는데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복음 11:17 · 본디새김
혼인잔치처럼 즐거운 놀이를 하자고 해도, 장례식처럼 슬퍼하는 놀이를 하자고 해도 상대는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어느 쪽 아이들이 이 세대에 대응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이 세대를 어떤 놀이에도 응하지 않는 아이들로 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장단에 맞춰 주기를 요구하며 불평하는 아이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요한과 예수님을 모두 거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비유의 중심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요한이 왔습니다.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금욕적인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보와 술꾼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왔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똑같았습니다.
서로 정반대인 두 모습이 모두 거부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그들의 생활 방식에만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이 각각 비난의 구실이 된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먹고 마시는 모습으로 왔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이 사람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다.』 그리고 지혜는 자기 일들로 의롭게 되었다.」마태복음 11:19 · 본디새김
「먹보」와 「술꾼」은 적대적인 비난입니다. 그러나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10–13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사람들과 함께 먹느냐는 질문을 들으셨고, 자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죄인을 멀리함으로써 자신의 거룩함을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인에게 가까이 가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의 비난 속에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는 말이 들어 있는 셈입니다.
지혜는 자기 일들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19절 끝의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지혜가 이전에는 죄인이었다가 의로워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혜가 옳았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입증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지혜가 옳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까?
바로 지혜가 행한 일들입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들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일들」이었습니다(11:2). 두 곳의 「일들」(ἔργον)은 같은 그리스어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그분에 대한 비난에 맞서는 증거로 제시되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식탁을 보고 방탕하다고 비난하지만,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면 그 식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드러납니다. 병든 사람이 회복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죄인이 부름을 받습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판단할 때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사람들이 붙인 이름입니까, 아니면 그분이 하시는 일입니까?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가장 많이 보았던 사람들조차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에는 사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일들」이 있지만, 다른 사본들에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35의 평행 본문은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두 읽기는 지혜의 정당성이 드러난다는 공통된 뜻을 지니지만, 그 정당성을 보여 주는 대상이 달라집니다. 「일들」을 따라 읽으면, 11장 앞부분에서 시작한 질문이 여기서 한층 선명해집니다.
기적을 가장 많이 본 도시들 — 보고도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
왜 예수님께서는 기적이 일어난 도시들을 꾸짖으십니까
20절은 예수님의 책망을 소개하면서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때에 그는 자기 기적들이 가장 많이 일어난 도시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그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1:2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기적이 부족했던 도시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신의 기적이 가장 많이 일어난 도시들을 꾸짖으십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된 도시들이며, 특히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머무르며 활동하신 중심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마태복음 4:13; 9: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도시들을 두로와 시돈, 심지어 소돔과 비교하십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밖의 도시들로, 구약의 예언서에서도 심판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이사야 23장; 에스겔 26–28장). 소돔은 창세기 19장에서 멸망한 도시입니다.
「너에게 화가 있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희 가운데서 일어난 기적들이 두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굵은 베옷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을 것이다.」마태복음 11:2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십니다. 두로와 시돈, 소돔에서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 것인가 하는 비교입니다. 이것은 이방 도시들이 본래 더 의롭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비교의 기준은 그들에게 얼마나 분명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났으며, 그 일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들이 어떤 도시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도시들이 자신들보다 심판을 더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익숙한 종교적 구분을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그분의 능력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올바른 응답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반응을 돌아볼 책임도 커집니다.
가버나움은 왜 하데스까지 내려갑니까
「너도, 가버나움아, 설마 하늘까지 높여지겠느냐? 너는 하데스까지 내려갈 것이다. 네 가운데서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소돔은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마태복음 11:23 · 본디새김
하늘과 하데스를 대조하는 표현은 이사야 14:13–15에서 바벨론 왕의 교만과 몰락을 묘사하는 말과 닮아 있습니다. 그곳에서 바벨론 왕은 하늘에 올라 자신의 자리를 높이려 하지만, 결국 죽은 자들의 세계인 스올로 내려가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본래 이 말씀은 교만한 제국의 권력을 조롱하는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그 본문과 연결해 읽으면, 가버나움은 하나님의 일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안전한 자리에 있다고 여길 수 없다는 예언자적 경고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데스는 형벌의 장소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말이 아닙니다. 하늘까지 높아지는 것과 하데스까지 내려가는 것이 대조를 이루면서,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여긴 도시가 낮아질 것을 선언합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한 가지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라신이나 벳새다에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회개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도시를 하나의 대상으로 부르시며 그 도시들이 전체적으로 보여 준 반응을 책망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개별 주민의 최종 운명에 대한 판정처럼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는 일들이 그들 가운데 많이 일어났지만, 도시들은 그 일에 걸맞은 회개의 응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일을 보고도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들을 향한 말씀을 멈추고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숨겨지고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나다
책망 다음에 감사가 나오는 이유
앞에서는 도시들을 향한 무거운 책망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2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아버지를 기리십니다.
그 무렵에 예수가 대답하여 말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나는 당신을 기립니다. 당신이 이것들을 지혜로운 이들과 깨달을 줄 아는 이들에게서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1:25 · 본디새김
요한은 예수님께 질문했고, 무리는 요한과 예수님을 모두 비난했으며, 도시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때문에 자신의 사명이 실패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분을 기리십니다.
이 말씀은 쉽게 오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롭고 많이 배운 사람은 싫어하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만 좋아하신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은 나이가 어리거나 아직 충분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지혜로운 이들과 깨달을 줄 아는 이들」과 대조되어 등장합니다. 앞부분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했습니다. 요한의 생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를 거부했고, 예수님의 생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분도 거부했으며, 기적을 보면서도 그것이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반면 어린아이는 자신의 지식과 지위에 의존해 모든 것을 판단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어린아이의 모습은 지능이나 학식의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드러내심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처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지혜로운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숨기셨는지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모든 지적인 탐구나 성경 연구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인간이 스스로 얻어 내는 지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 주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 드러내심의 중심에 자신이 계심을 밝히십니다.
아버지를 아는 길은 아들을 통합니다
27절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밝히시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내 아버지가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아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복음 11:27 · 본디새김
25–26절은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2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포함하는지는 본문이 세세하게 열거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아버지를 드러내는 일에서 예수님께서 가지시는 유일한 권위가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아버지만 아들을 아십니다.
아들과 아들이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만 아버지를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아는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아버지를 드러내는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앞서 요한은 「당신이 바로 오시는 그분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 자신이 그 질문에 훨씬 깊은 차원의 대답을 주고 계십니다. 그분이 병든 사람을 고치고 죄인을 부르시는 일이 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냅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넘겨주신 아들이시며,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 이제 그 길로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 쉼을 주시는 분의 초대
쉼을 주겠다고 하시면서 왜 멍에를 메라고 하실까요?
마태복음 11장의 마지막 말씀은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그 안의 대조를 놓치기 쉽습니다.
「수고하고 짐이 지워진 모든 이들아, 나에게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태복음 11:28 · 본디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희가 너희 목숨을 위한 쉼을 찾을 것이다.」마태복음 11:29 · 본디새김
멍에는 본래 짐을 끌거나 밭을 가는 짐승의 목에 얹는 도구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아무런 의무 없이 자유롭게 쉬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멍에를 벗어 버리라고 하시지 않고, 자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쉼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분에게서 배우며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가운데 발견하는 쉼입니다.
지혜의 멍에와 예수님의 멍에
집회서, 곧 벤 시라의 지혜서 51:23–27에서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지혜의 가르침으로 초대하고, 지혜의 멍에 아래 목을 두어 교훈을 받으라고 권합니다. 집회서 6:23–31에서도 지혜의 가르침이 멍에에 비유됩니다. 처음에는 속박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지혜를 얻은 사람에게는 평안과 기쁨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들은 유대 지혜문학 안에서 멍에가 단순히 억압의 상징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승에게 배우고 지혜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도 멍에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떤 지혜로운 가르침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오너라」, 「나에게서 배워라」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배움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앞에서 「지혜는 자기 일들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분이, 이제 자신에게 와서 배우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인격화된 하나님의 지혜와 연결하는 신학적 읽기가 발전할 수 있지만, 본문이 직접 「나는 지혜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께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라, 그분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일입니다.
왜 예수님의 멍에는 가볍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 뒤, 그것을 메어야 할 이유로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제시하십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쉽다는 이유만이 아닙니다. 그분에게 배우는 사람이 어떤 분의 지도 아래 놓이는가가 중요합니다.
「온유하다」는 표현은 마태복음 5:5의 온유한 사람들과도 연결됩니다. 온유함은 능력이 부족하거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 장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도시들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실 만큼 권위를 지니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수고하고 짐이 지워진 사람들을 부르시며 자신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모습은 모순이 아닙니다.
「내 멍에는 쓰기 좋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1:30 · 본디새김
「쓰기 좋고」(χρηστός)로 옮긴 그리스어는 좋고 유익하며 알맞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아무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쉽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와 고난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16–25).
그렇다면 어떻게 그분의 짐은 가벼울 수 있을까요? 이 구절만으로 그 가벼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경험되는지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멍에를 메도록 부르시는 분 자신이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십니다.
누구의 가르침 아래 살아가는가가 그 짐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수고하고 짐이 지워진 사람들의 짐을 종교 지도자들이 부과한 율법적 부담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3:4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는 비판이 나오므로, 두 본문을 연결해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11:28 자체는 그 짐을 종교적 의무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짐이 지워진 모든 이들」이라는 표현은 더 넓게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지쳐 있는지 하나하나 구분하기 전에 그들을 자신에게 부르십니다.
오래전부터 약속되었던 쉼
29절의 「너희 목숨을 위한 쉼을 찾을 것이다」는 예레미야 6:16과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에서 여호와야훼는 백성에게 오래된 길을 살피고 좋은 길이 어디인지 물으며 그 길로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위한 쉼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은 그 길로 가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쉼을 약속하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좋은 길을 찾아가라는 말씀이 「나에게 오너라」라는 초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쉼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선생님이시면서, 동시에 그 쉼을 자신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에서 사람들은 좋은 길로 걸어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도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거부했고, 예수님의 일을 거부했습니다. 가장 많은 기적을 경험한 도시들조차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거절당한 길이지만, 여전히 초대가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는 뜻밖의 자리
마태복음 11장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예수님 자신이 보여 주시는 모습 사이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 속에서도 일관된 방향이 보입니다. 병든 이들의 회복,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지는 복음, 죄인들과의 식탁,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나는 아버지, 수고하는 사람들을 향한 부르심까지, 그분의 사역은 한결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위가 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예언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시고, 도시들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시며,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넘겨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이 자기 자신을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한 분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 장의 놀라움은 능력과 온유함이 서로 다른 두 모습이 아니라, 같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난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요한이 틀렸다는 단순한 결론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오심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더 풍성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심판의 선언만이 아니라 회복과 용서와 복음의 선포가 그분의 사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지식과 경험이 예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일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기준으로 굳어질 때 생깁니다.
11장의 처음에 요한은 감옥에서 「당신이 바로 오시는 그분입니까」라는 질문을 보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넘겨주신 아들이시며,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토록 큰 권위를 지니신 분이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첫 행동은 위대한 일을 이루거나 특별한 자격을 증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오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은 감옥에 갇힌 예언자의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받으신 분이 모든 수고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에게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멍에를 메라고 하시면서도, 그들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자신의 마음에서 찾게 하십니다. 「내 멍에는 쓰기 좋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