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기적과 제자 파송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분
마태복음 12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은 귀신을 내쫓는 사건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말씀도 아닐지 모릅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사람의 손을 고쳐 주십니다. 말라 오그라든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손을 내밀자, 다른 손처럼 성하게 회복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까지 갈라놓았을까요?
이것은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지킬 것인지 느슨하게 적용할 것인지에 관한 논쟁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손이 불편한 사람을 고치시며,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일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사탄의 능력이라고 비난합니다.
이 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판단의 문제입니다.
누가 죄가 있는 사람이며, 누가 죄가 없는 사람입니까? 무엇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무엇이 악한 일입니까?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을 판단합니까? 그리고 마지막에는 누가 참으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입니까?
마태는 이 질문들을 서로 다른 사건 속에 배치합니다. 곡식밭과 회당에서 시작된 논쟁은 하나님의 종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으로 이어지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둘러싼 충돌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뒤따른 후,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자기 가족을 가리키시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 모든 장면의 한가운데에는 「그는 판결을 내보내어 이기게 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부러뜨리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12:20)라는 선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악을 모른 척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하나님의 판결이 이기는 길과 함께 갑니다.
마태복음 12장은 바로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보여 줍니다.
배고픈 제자들이 죄인이 된 이유
문제는 이삭을 뜯은 것이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이다
장면은 곡식밭에서 시작됩니다.
그 무렵에 예수가 안식일에 곡식밭 사이로 갔다. 그의 제자들이 굶주려서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마태복음 12:1 · 본디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라고 말합니다(12:2).
신명기 23:25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곡식밭에서 손으로 이삭을 뜯는 것은 허용되었고, 낫을 대어 거두어 가는 것만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곡식을 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닙니다.
쟁점은 안식일입니다.
출애굽기 34:21은 밭을 갈거나 거두는 때에도 안식일에는 쉬라고 명령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삭을 뜯는 행위가 안식일에 금지된 노동의 범주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사건 앞에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를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굶주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규정을 무시하려고 이삭을 뜯은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배고픔이 언제나 모든 규정을 무효로 만든다는 뜻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이어서 꺼내시는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다윗이 그의 일행과 함께 굶주렸을 때 무엇을 했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태복음 12:3 · 본디새김
제자들이 굶주렸고, 다윗과 그의 일행도 굶주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건을 바로 그 자리에서 연결하십니다.
다윗은 왜 제사장만 먹는 빵을 먹었을까?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사건은 사무엘상 21: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위협을 피해 도망하던 중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빵은 없고, 거룩한 빵만 있었습니다. 이 빵은 여호와야훼 앞에 차려 놓는 빵으로, 레위기 24:5–9에 따르면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먹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다윗에게 그 빵을 내어 줍니다.
사무엘상에는 제사장이 어떤 조건을 확인하고 빵을 내어 주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다윗이 율법을 무시하고 성소의 빵을 빼앗아 먹은 이야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의 절박한 필요 앞에서 거룩한 빵이 제공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다윗일까요? 다윗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으로 기억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빵을 먹었던 때에는 왕궁에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며 배고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지금 사람들의 눈에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배고픔을 다윗의 배고픔과 나란히 놓으십니다. 성경 안에 이미 기록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적용할 때 인간의 절박한 필요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묻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논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왜 죄가 없는가
「아니면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더럽히고도 죄가 없다는 것을 너희는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태복음 12:5 · 본디새김
다윗의 이야기는 특별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필요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율법이 정한 정상적인 성전 봉사를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8:9–10에는 안식일에 드리는 추가 제사가 규정되어 있고, 레위기 24:8은 안식일마다 여호와야훼 앞에 빵을 차려 놓도록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들은 왜 죄가 없습니까? 그들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성전 봉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안다고 해서, 같은 율법 안에 있는 성전 봉사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논증의 중심이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큰 것이 여기 있다.」마태복음 12: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는 논증을 제시하신 뒤, 바로 그 성전보다 큰 것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성전보다 큰 것」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예수님을 통해 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8절에서 사람의 아들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을 보면, 이 비교가 예수님 자신의 권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는 일을 판단하려면, 먼저 그들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를 모르면 죄 없는 사람을 정죄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죄 있다고 판결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복음 12:7 · 본디새김
여기에는 앞의 두 사례를 하나로 묶는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호세아 6:6은 제사 제도 자체를 폐지하라는 선언이 아닙니다. 호세아 시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충실함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호세아 6:4는 그들의 사랑과 신실함을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에 빗댑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야훼는 형식적인 제사보다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일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불쌍히 여기는 감정만이 아니라 사랑과 신실함, 관계에 대한 충실함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충실함을 잃어버렸다면, 제사 행위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 9:13에서도 인용하셨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때는 이 말씀의 의미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알았더라면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쳤고, 그 결과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판결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에서 처음 등장한 잘못된 판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까지 이어질 문제를 예고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하찮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그날이 하나님의 뜻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히십니다.
이제 이야기는 곡식밭에서 회당으로 옮겨 갑니다. 이번에는 배고픈 사람이 아니라, 손이 말라 오그라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성전보다 큰 것」에서 그리스어 표현은 중성 비교급을 사용하기 때문에 본디새김은 「큰 것」이라고 옮겼습니다.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문법 형태만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성전의 규정 밖에서 활동하는 예외적인 사람으로만 소개하지 않으시고, 성전보다 큰 현실이 자신과 함께 이 자리에 와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신 사람과 사람을 죽이려는 사람들
회당에 말라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아라, 말라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그에게 물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됩니까?」 그를 고발하려는 것이었다.마태복음 12:10 · 본디새김
마태는 이 질문의 의도를 숨기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한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붙잡아 끌어올리지 않겠느냐?」마태복음 12:11 · 본디새김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는 행위가 안식일 규정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당시에도 논의될 수 있는 문제였으므로, 모든 유대인이 예외 없이 같은 행동을 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이 겨냥하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양을 구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에는 왜 반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한가.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도 된다.」마태복음 12:1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동물보다 인간이 더 가치 있다는 일반적인 윤리적 선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무엇을 해도 되는지를 논쟁하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그 기준을 명확히 드러내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날이 아닙니다.
여기서 손이 불편한 사람은 당장 생명이 위태롭다고 소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행동을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만 허용되는 응급 처치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일 자체를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선한 일로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그가 그 사람에게 말했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내밀었고, 그 손이 다른 손처럼 성하게 회복되었다.마태복음 12:13 · 본디새김
그리고 바로 다음 절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나가서 그에게 맞서 모의했다. 그를 없애려는 것이었다.마태복음 12:14 · 본디새김
마태는 긴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회복된 사건과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를 바로 이어 놓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일을 문제 삼았지만,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죄 없는 이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죄 있다고 판결한 사람들은 이제 정말로 죄가 되는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음 질문이 생깁니다. 성전보다 큰 것이 여기 있고,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면,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맞서지 않고 물러가실까요?
마태는 그 이유를 이사야의 오래된 예언에서 찾아 보여 줍니다.
다투지 않는 종이 어떻게 판결을 이기게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물러가셨지만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그들의 모의를 알고 거기서 물러갔다. 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갔고 그는 그들을 모두 고쳤다.마태복음 12:1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과 계속 논쟁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사역을 중단하지도 않으십니다. 물러가시는 동안에도 병든 사람들은 회복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마태는 이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42:1–4를 길게 인용합니다.
「보아라, 내가 고른 내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이 기뻐한 이다.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방 사람들에게 판결을 알릴 것이다.」마태복음 12:18 · 본디새김
이사야 40장 이후에는 바벨론 유배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큰 주제가 전개됩니다. 여호와야훼는 우상들과 열방의 권력을 넘어 자신의 통치를 드러내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종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41:8–9에서는 이스라엘과 야곱이 하나님의 종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42:1–4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특별히 선택하시고 자신의 영을 주시는 종이 나타나며, 그가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판결을 알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종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명과 연결할 것인지, 그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은 개인으로 이해할 것인지는 이사야의 종 본문들을 해석할 때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만 이사야 42장의 종이 여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마태는 이 예언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18절의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이 기뻐한 이」는 마태복음 3:17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들린 말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두고 기뻐했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세례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받는 아들로 선언되셨고,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 위에 내려왔습니다. 이제 마태는 그 아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역하시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일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라고 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방식으로 사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상한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
「그는 다투지도 않고 고함치지도 않을 것이다. 넓은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2:19 · 본디새김
「그는 판결을 내보내어 이기게 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부러뜨리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12:20 · 본디새김
상한 갈대는 이미 손상된 갈대입니다. 연기 나는 심지는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지만 불꽃이 약해진 심지입니다. 둘 다 조금만 힘을 가해도 쉽게 부러지거나 꺼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은 그것들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종의 부드러운 태도와 그가 이루려는 목적은 함께 묘사됩니다. 그는 다투거나 고함치지 않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물러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판결을 이기게 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계속합니다.
여기서 「판결」은 사람에게 형벌을 선고하는 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42장의 배경에서 이 말은 하나님이 민족들 가운데 세우시는 올바른 질서와 공정한 판결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종은 약하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결을 이루는 사명을 맡았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식이 약한 것을 짓밟는 폭력이나 소란스러운 자기 과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힘을 겨루지 않고 물러가셨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마태는 이 장면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상한 갈대가 곧 손이 오그라든 사람만을 뜻한다거나, 연기 나는 심지가 특정한 제자를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이사야의 시적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없애려는 모의와 사람을 회복시키는 사역이 대조되는 자리에서, 마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방 사람들의 이름이 왜 여기서 등장하는가
이사야 인용의 처음과 끝에는 이방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8절은 종이 「이방 사람들에게 판결을 알릴 것」이라 말하고, 21절은 이렇게 맺습니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이 그의 이름에 기대를 걸 것이다.」마태복음 12:21 · 본디새김
지금까지 사건은 유대 지역의 안식일 논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사건을 설명하는 말씀에서 이방 사람들을 언급하며 시야를 크게 넓힙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일이 여러 민족에게까지 미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먼 곳으로 떠나라는 명령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물러나 병든 이들을 고치고 계십니다. 마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종의 이름에 여러 민족이 기대를 걸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마태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격렬하게 다투는 사건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르렀다는 증거
같은 기적을 보고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다
사람들이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치시자, 그 사람은 말하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무리가 크게 놀랐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설마 다윗의 자손이겠느냐?」마태복음 12:23 · 본디새김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왕과 관련된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은 이미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했고, 9:27에서는 눈먼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귀신들을 내쫓는 것은 오직 귀신들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을 힘입어서이다.」마태복음 12:24 · 본디새김
같은 사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행동을 보지 못해서 갈등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의미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를 놓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에게 말했다. 「자기에게 맞서 갈라진 나라는 모두 황폐해진다. 자기에게 맞서 갈라진 도시나 집은 모두 서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2:25 · 본디새김
나라든 도시든 집이든 내부에서 서로 싸우면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사탄이 자기 세력에 속한 귀신들을 계속 내쫓는다면, 자기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셈이 됩니다.
「내가 베엘제불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는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내쫓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마태복음 12:27 · 본디새김
「너희 아들들」은 문자 그대로 바리새파 사람들의 친아들들이라기보다 그들 가운데서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던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대방의 판단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자기 편 사람들이 귀신을 내쫓는 일은 인정하면서 예수님의 일만 사탄의 힘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 가운데 귀신을 내쫓는 사람들 자신이 그 판단의 부당함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논리적 반박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이른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이른 것이다.」마태복음 12:28 · 본디새김
여기서 마태는 평소 자주 사용하는 「하늘의 나라」 대신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씁니다. 두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긴밀하게 연결되며, 여기서는 바로 앞의 「사탄의 나라」와 대비되는 효과를 냅니다. 25절에는 갈라진 나라가, 26절에는 사탄의 나라가, 28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나라의 충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른 것이다」(φθάνω)로 옮긴 동사는 여기서 이미 도달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먼 미래에 올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지금 자신이 행하고 계신 일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도달했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건은 한 사람이 초자연적인 병 고침을 경험했다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자유를 얻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말하고, 보지 못하던 사람이 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사탄의 지배를 물리치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힘센 자의 집을 턴다는 말의 뜻
「아니면 먼저 힘센 자를 묶지 않고서는 누가 어떻게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세간을 빼앗을 수 있겠느냐? 묶은 다음에야 그의 집을 털 것이다.」마태복음 12:29 · 본디새김
누군가가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빼앗고 있다면, 힘센 자의 지배력이 더 강한 힘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문맥에서 힘센 자는 사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것은 사탄의 영역에 들어가 그가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로 묘사됩니다.
이 말을 모든 악의 활동이 그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비유가 강조하는 것은 사탄의 활동이 종결되었다는 시간표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가 사탄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의 지배가 무너지는 것은 사탄이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강한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역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생깁니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은 나를 거스르는 사람이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흩어 버린다.」마태복음 12:30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자신에게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곧 적이라는 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사탄의 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모으시는 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으다」와 「흩어 버리다」의 대비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 이야기와도 어울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모으시는 분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단순한 반대 의견을 넘어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악한 영의 일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엄중한 경고를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유대 사회에도 귀신을 내쫓는 행위가 알려져 있었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8권 42–49절에서 그러한 사례를 기록합니다.
왜 거룩한 영을 거스르는 모독은 용서받지 못하는가
무서운 말씀 앞에 먼저 놓인 넓은 용서의 선언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모든 죄와 모독이 용서될 것이다. 그러나 영을 거스르는 모독은 용서되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12:31 · 본디새김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죄일까요? 혹시 실수로 그런 죄를 지을 수도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죄의 목록을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해방의 일을 베엘제불의 능력이라고 비난한 직후에, 「그러므로」라는 말로 이 경고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첫마디는 「모든 죄와 모독이 용서될 것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용서의 넓이를 말씀하시고, 그 용서와 구별되는 특별히 심각한 모독을 경고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죄는 예수님의 신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일을 보았고, 그것을 악한 영의 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의 영을 통한 것이라고 밝히셨으므로, 영을 거스르는 모독은 하나님의 영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행위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단순한 무지나 순간적인 의심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면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거룩한 영을 거슬러 말하면 이 시대에도 올 시대에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2:32 · 본디새김
왜 사람의 아들을 거스르는 말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거룩한 영을 거스르는 말은 그렇지 않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한 가지 해석은 예수님의 정체가 아직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이나 행동을 오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이 이루시는 명백한 구원의 일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더욱 근본적인 거부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이 모독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회개로 이끄시는 역사를 끝까지 거부하는 태도로 이해합니다. 용서를 받아들이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거부하기 때문에 용서에 이르지 못한다는 설명입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의 엄중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어떤 사람이 어느 시점에 돌이킬 가능성을 영원히 잃는지, 한 차례의 발언만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지를 상세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한 의문이나 실수로 내뱉은 모든 불경스러운 말에 대해 일률적인 판정을 내리고 계시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가장 심각하게 거부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실까?
「나무를 좋게 만들고 그 열매도 좋게 만들어라. 아니면 나무를 썩게 만들고 그 열매도 썩게 만들어라. 나무는 그 열매로 알려지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33 · 본디새김
언뜻 보면 귀신을 내쫓는 문제에서 갑자기 도덕적 교훈으로 옮겨 간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논쟁과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열매는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자유를 얻고, 눈멀었던 사람이 보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말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일을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나쁜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까?
33절의 명령형은 다소 특이합니다. 나무를 「좋게 만들어라」(ποιέω) 또는 「썩게 만들어라」라고 읽는 것이 그리스어 동사의 형태를 드러냅니다. 다만 이것을 나무의 본성을 바꾸라는 명령보다는, 나무와 열매를 일관되게 판단하라는 요구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문맥을 고려하면 핵심은 분명합니다. 회복이라는 열매를 인정하면서 그 능력의 근원은 악하다고 주장하는 판단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비판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열매였다면, 이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내뱉은 말이 열매가 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느냐? 입은 마음에 넘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34 · 본디새김
그들의 말은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독사의 자식들」은 세례자 요한이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향해 사용했던 말이기도 합니다(마태복음 3: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신분이나 성경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내놓는 말과 그 말의 근원을 문제 삼으십니다. 이것은 7:16–20에서 나무를 열매로 알아본다는 가르침과도 연결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말이 중심에 놓입니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과 분리된 단순한 소리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말할 쓸데없는 말마다 심판의 날에 해명해야 할 것이다.」마태복음 12:36 · 본디새김
「쓸데없는 말」을 가볍게 나눈 모든 일상 대화라고만 이해하면 본문의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원어는 일하지 않는, 무익한, 효력이 없는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일을 왜곡하여 비난한 말들이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한 말은 진실을 뒤집고 사람들을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네 말로 네가 의롭게 되고 네 말로 네가 죄 있다고 판결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37 · 본디새김
이것을 어떤 말을 잘 골라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은 그 사람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고, 앞의 나무와 열매의 관계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죄인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판단과 비난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말이 오히려 자신들이 누구인지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 새로운 증거를 요구합니다.
이미 보고도 또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
도대체 어떤 표징을 더 보여 달라는 것인가
그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이 그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보여 주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마태복음 12:38 · 본디새김
그들은 바로 앞에서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회복되는 사건을 둘러싸고 예수님과 논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표징을 요구합니다. 아무 증거도 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본 일을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만한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표징을 구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요청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일을 보고도 그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악하고 간음하는 세대가 표징을 구한다. 그러나 예언자 요나의 표징 말고는 그 세대에게 표징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12:39 · 본디새김
「간음하는 세대」를 문자적인 성적 부도덕에 대한 비난으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혼인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호세아 2장과 예레미야 3장에서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여호와야훼께 신실하지 않은 태도가 혼인 관계의 불충실함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자적 언어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거부하는 세대의 불충실함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전혀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를 남기십니다.
요나의 표징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요나가 바다 짐승의 배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땅의 심장부에 사흘 낮과 사흘 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40 · 본디새김
요나는 처음에 여호와야훼의 명령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폭풍 가운데 바다에 던져졌고, 큰 바다 생물에게 삼켜져 그 배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 머뭅니다(요나 1:17).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그를 버려두지 않으셨고, 그는 다시 육지로 나오게 됩니다(요나 2:10).
「땅의 심장부」는 땅의 깊숙한 곳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죽음과 무덤에 머무는 일을 미리 가리키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마태복음 16:21에서는 자신의 죽음과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더 직접적으로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요나의 표징은 이 한 가지 대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 때에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아라, 요나보다 더한 것이 여기 있다.」마태복음 12:41 · 본디새김
요나가 선포하자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했으며, 왕까지도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회개했습니다(요나 3:5–9). 그들은 놀라운 기적을 여러 차례 목격해야만 회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요나의 선포를 듣고 돌이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요나보다 더한 것」도 중성 비교급으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난 구원의 현실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여지를 줍니다. 물론 문맥상 그 중심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일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솔로몬보다 더한 것이 여기 있다
「남쪽의 여왕이 심판 때에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의 맨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한 것이 여기 있다.」마태복음 12:42 · 본디새김
이 여왕은 열왕기상 10:1–13에 등장하는 스바의 여왕입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와 어려운 질문들을 가져왔고, 솔로몬의 지혜와 왕국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스바의 여왕은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곳에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대 가운데 계십니다. 먼 곳까지 찾아갈 필요도, 소문에만 의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니느웨와 스바가 이방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에 응답한 사례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하나의 반복이 완성됩니다.
「성전보다 큰 것이 여기 있다」(12:6).
「요나보다 더한 것이 여기 있다.」
「솔로몬보다 더한 것이 여기 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의 중심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이름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예배하며, 예언자의 말을 듣고, 지혜로운 왕을 통해 기대했던 하나님의 일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제 조금 불편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요나의 사건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하는 것은 구약이 마태복음에서 새롭게 읽히는 유형론적 관계입니다. 요나서 자체가 처음부터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언으로 작성되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사흘 낮과 사흘 밤」이 반드시 정확히 72시간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습니다. 일부는 고대의 날짜 계산에서 하루의 일부도 하루로 계산하는 어법에 주목하고, 다른 해석들은 복음서의 시간 표현을 조화시키는 별도의 설명을 제시합니다. 12:40만으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요나의 경험을 자신의 장차 있을 일과 대응시키고 계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깨끗하게 정돈되었지만 비어 있는 집
더러운 영은 왜 다시 돌아오는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이 나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 영은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며 쉴 곳을 찾지만 찾지 못하고, 자신이 나온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돌아와서 보니 그 집은 비어 있고, 비질되어 있고, 꾸며져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전보다 좋은 상태입니다. 더러운 영도 나갔고 집도 깨끗해졌습니다.
흔히 이 말씀을 마음에서 나쁜 습관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교훈으로 설명합니다. 그러한 적용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비유를 끝맺으시는 말씀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때에 그것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영 일곱을 데리고 온다. 그리고 그것들이 들어가 거기 자리를 잡고 산다. 그래서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 형편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에게도 그러할 것이다.」마태복음 12:45 · 본디새김
이 비유는 개인의 내면 관리에 대한 일반적인 조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자신을 거부해 온 세대에 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귀신을 내쫓으시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달했다는 증거라고 설명하신 뒤이므로, 이 비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그들 가운데 나타났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의 위험을 설명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 집은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어 있었습니다.
이전의 악한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 장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변화가 일어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상태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형편이 처음보다 나빠진다는 것은 악한 영의 수가 늘어난다는 계산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거부가 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한 가지 서늘한 역설이 있습니다. 더러운 영은 그 집을 여전히 「내 집」이라고 부릅니다. 집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지만, 그곳을 자기 집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영혼의 상태에 관한 정교한 교리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 이 표현은 정돈된 외형과 실제 지배 관계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누가 그 집의 주인입니까?
귀신을 내쫓으시는 사건이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의 충돌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질문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이르렀는데도, 그들은 누구의 지배 아래 살아갈 것인지를 놓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마태는 한 집과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번에는 예수님 자신의 가족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가족인가
바깥에 서 있는 가족들
예수님께서 아직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말하려고 하지만 바깥에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에게 말하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마태복음 12:47 · 본디새김
마태는 가족들이 왜 찾아왔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걱정했는지, 집으로 데려가려 했는지, 단순히 할 말이 있었는지는 여기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는 다른 설명이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마태의 장면에 적혀 있지 않은 동기까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마태가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바깥에 서 있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자기에게 말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은 누구냐?」마태복음 12:48 · 본디새김
자신의 가족이 누구인지 모르셔서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밝히기 위해 하시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제자들 쪽으로 손을 내밀고 말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마태복음 12:49 · 본디새김
마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셨다고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 장의 처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고, 그 손은 성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두 장면에 쓰인 동사는 같은 낱말, 뻗다·내밀다입니다. 이 반복만으로 마태가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대칭 구조로 만들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 장을 따라 읽어 온 독자에게 두 장면은 의미 있게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한 사람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쪽으로 손을 내미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시는 자리에서 새로운 관계가 선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을 부정하신 것일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50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버리거나 가족 관계를 부정하셨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족들과 만나기를 거절하셨는지, 그 후에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혈연관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사람의 범위를 혈연 밖으로 넓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형제뿐 아니라 자매도 분명히 언급하십니다. 제자들의 무리 가운데 누구누구가 있었는지를 이 장면에서 모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 속한 관계는 남성 제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신분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이 가족 관계를 규정하는 기준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7:21). 이번에는 그 기준이 예수님 자신의 가족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이 선언은 선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일반적인 윤리 선언과는 다릅니다. 이 장에서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배고픈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 것,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올바르게 알아보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런 예수님께 부름받아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완벽하게 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이후에도 그들의 오해와 실패를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의 중심은 제자들의 완전한 순종보다, 예수님께서 어떤 관계를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하시는가에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기준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죄인이라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을 자신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선언하십니다.
누가 참으로 하나님께 가까운 사람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면서 악을 이기시는 분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성전과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한 것이 함께 있는 분,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사탄의 지배를 무너뜨리시는 분께서 이 장에서 실제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배고픈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회복시키시고,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을 해방시키시고, 자신을 없애려는 사람들을 피해 물러나 사람들을 계속 고치십니다. 마태는 그 모습을 「그는 판결을 내보내어 이기게 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부러뜨리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판결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이들을 죄인이라 판결한 사람들을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악하다고 부른 사람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자비가 모든 것을 허용하는 무관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장은 무조건 더 관대한 사람이 되라고만 말하지 않고,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라는 말씀의 뜻을 예수님께서 실제로 행하신 일을 통해 다시 배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한 갈대는 꺾지 않으시지만, 사람을 억압하는 악한 지배는 무너뜨리십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고발을 받았습니다.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바깥에 서서 예수님과 말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가족들이 찾아왔다고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 앞에 있는 바로 그 제자들 쪽으로 손을 내미시며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고발받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가족으로 불리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내미신 손은 이제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