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씨앗은 이미 뿌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이 세상에 왔다면, 세상은 왜 여전히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이후 병든 사람들이 회복되었고, 귀신들이 쫓겨났으며, 죄인들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했습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일을 목격한 사람들조차 그 의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추상적인 설명을 늘어놓지 않으십니다. 대신 씨를 뿌리는 농부, 밀밭에 자라는 가라지, 작은 겨자씨, 밀가루 속의 누룩, 밭에 묻힌 보물, 값진 진주, 바다에 던진 그물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너무나 평범한 것들입니다.
위대한 왕의 즉위식도, 강력한 군대도, 눈부신 궁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씨앗이 말라 버리고, 원수가 밭을 망쳐 놓고, 사람들이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시작의 모습만으로는 그 나라가 어떤 결말에 이를지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씨앗은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지금 함께 자라고 있지만 추수 때에는 구별될 것입니다. 밭에 묻힌 보물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것을 발견한 사람에게는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마태는 이 긴 가르침을 공간의 변화 속에 배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오셔서 바닷가에 앉으시고, 많은 무리가 모여들자 배에 올라타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설명하십니다. 마지막에는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시지만, 그곳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집니다.
바닷가의 많은 무리, 집 안의 제자들, 고향 회당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듣는다고 해서 모두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듭니까?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깨닫다」라는 말을 거듭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단순히 비유의 숨겨진 정답을 알아맞히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13:51)라는 질문이 이 장의 긴 가르침을 하나로 모읍니다.
씨앗은 똑같이 뿌려졌는데 왜 결과가 다른가
농부는 실패한 씨앗부터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는 배에 앉으셔서 무리를 향해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는 여러 비유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말했다.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복음 13:3 · 본디새김
그런데 이야기는 풍성한 수확이 아니라 연이은 실패로 시작됩니다.
어떤 씨들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 치웁니다. 다른 씨들은 돌밭에 떨어져 곧바로 싹을 틔웠지만, 해가 뜨자 말라 버립니다. 또 다른 씨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싹이 나오지만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버립니다.
실패는 모두 같은 모습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길가의 씨는 싹을 틔워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돌밭의 씨는 시작은 좋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가시덤불의 씨는 어느 정도 자란 후에 다른 식물에 눌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세 장면이 이어진 뒤에야 좋은 땅이 등장합니다.
「다른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내었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를 내었다.」마태복음 13: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씨앗이 어떻게 사라지고 말라 버리는지가 자세히 묘사되었지만, 마지막에는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 언제나 즉각적인 성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현실을 설명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떠났고, 한때 기뻐하다가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그 거부가 말씀 자체에 열매 맺는 능력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가 실패하고 얼마가 성공할지 통계를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서로 다른 네 장면을 통해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이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지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비유를 마친 뒤 말씀하십니다.
「귀를 가진 사람은 들어라.」마태복음 13:9 · 본디새김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미 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야기를 귀로 듣는 것과, 그 이야기가 가리키는 뜻을 알아듣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차이가 다음 장면의 주제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팔레스타인의 농업 환경에서 씨를 흩뿌리는 방식은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밭에는 사람들이 오가며 단단해진 부분, 겉보기에는 흙이 있어도 아래에 암반층이 놓인 곳, 잡초가 자라는 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농부가 부주의하게 씨앗을 낭비하는 이야기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는 뿌린 양과 거둔 양을 비교한 표현입니다. 당시 평균 수확은 지역과 작물, 토양에 따라 달라 단정하기 어렵지만, 세 수치가 모두 풍성한 열매를 강조한다는 것은 문맥에서 분명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비유는 이해를 돕는 이야기인가, 이해를 가로막는 이야기인가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제자들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합니까?」마태복음 13:10 · 본디새김
이 질문은 비유의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왜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시는지를 묻습니다. 보통 우리는 비유를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생각을 흔듭니다.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하늘의 나라에 관한 비밀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주어졌지만 저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3:11 · 본디새김
비유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이해되는 설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밀들」은 특별한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만 아는 암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셔야 알 수 있는 내용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의 나라가 주어졌다고 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나라에 관한 비밀들을 아는 것」이 주어졌다고 하십니다. 비밀이 있다는 사실보다 그 비밀을 알게 되는 일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어려운 질문을 남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어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도록 정하셨다는 뜻일까요?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그들이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3:13 · 본디새김
여기서 「때문이다」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미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설명하십니다. 마가복음 4:12의 평행 본문은 그들이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듣고도 깨닫지 못하도록 한다는 목적을 나타내는 구조를 씁니다. 그러나 마태는 「왜냐하면」에 해당하는 접속사 호티(ὅτι)로 이유를 설명합니다. 두 복음서의 표현을 하나로 합쳐 버리면 마태가 강조한 점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는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11절은 그 깨달음이 주어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동시에 사람들은 실제로 보고 듣는 것에 올바르게 응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를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하나의 교리 체계로 완전히 정리하려면 본문을 넘어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마태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보다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고 있어도,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말씀은 왜 다시 등장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을 이사야 6:9–10과 연결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너희가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3:14 · 본디새김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여호와야훼의 거룩하심을 목격하고 예언자로 부름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는 뜻밖에도 백성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지만, 그 말씀이 백성의 완고함을 드러내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졌고 그들은 귀로는 둔하게 들었으며 자기 눈을 감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서서 내가 그들을 고치는 일이 혹시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마태복음 13:15 · 본디새김
마음은 무디어졌고 귀는 둔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대해서는 「자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책임이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은 돌이킨 사람을 고치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이 인용의 목적을 사람들을 영원히 배제하는 데서만 찾는다면, 인용문 끝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치유라는 주제를 놓치게 됩니다.
비유는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제자들도 모든 것을 즉시 이해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와 묻고, 예수님의 설명을 듣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보니 복되고, 너희 귀도 들으니 복되다.」마태복음 13:16 · 본디새김
그들의 복은 남들보다 이해력이 뛰어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일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간절히 바랐지만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새롭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풀어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6:11–13까지 읽으면 이 경고가 심판과 황폐함의 전망으로 이어지면서도, 마지막에는 남아 있는 그루터기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들의 이해를 막으신다는 선언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 백성의 상태와, 그 상태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나타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말씀을 듣는 네 가지 모습
좋은 씨앗이 왜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씨앗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려 주십니다.
「누구든지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사람의 마음에 뿌려진 것을 낚아챈다. 이런 사람이 길가에 뿌려진 사람이다.」마태복음 13:19 · 본디새김
씨앗은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각 경우를 「길가에 뿌려진 사람」, 「돌밭에 뿌려진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씨앗이 어느 땅에 떨어졌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이제 말씀을 듣는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바뀝니다.
첫 번째 경우의 핵심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마음에 뿌려지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악한 자가 그 말씀을 낚아챕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와 정확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돌밭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사람,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곧 기쁘게 그것을 받는 사람이다.」마태복음 13:20 · 본디새김
첫 번째와 정반대로, 말씀을 듣자마자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는 자기 속에 뿌리를 지니지 않고 오히려 한때뿐이다. 말씀 때문에 고난이나 박해가 닥치면 곧 걸려 넘어진다.」마태복음 13:21 · 본디새김
문제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기쁨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싹이 빨리 올라왔다는 사실만으로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 말씀 때문에 어려움이 생겨도 계속 붙드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고난과 박해가 「말씀 때문에」 닥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삶의 모든 불행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이 직접적인 배경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박해를 떠올리게 합니다.
세 번째는 가시덤불입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사람, 이 사람은 말씀을 듣지만 이 시대의 걱정과 재물의 홀림이 말씀을 숨 막히게 해서 그는 열매 없는 사람이 된다.」마태복음 13:22 · 본디새김
이번에는 박해가 아니라 일상에서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걱정과 재물이 나타납니다. 재물 자체가 아니라 「재물의 홀림」이 문제입니다. 재물이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 안전과 만족, 그것을 얻거나 지키려는 마음이 말씀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25–34에서 걱정과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일이 대조되었다면, 이제 13장에서는 걱정이 어떻게 나라의 말씀을 숨 막히게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돌밭의 씨앗을 말라 죽게 한 것은 밖에서 내리쬐는 햇볕이었고, 가시덤불의 씨앗을 막아 버린 것은 같은 땅에서 함께 자라던 식물이었습니다. 말씀의 열매를 막는 것이 언제나 외부의 박해인 것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자라나는 것들도 그 열매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땅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다. 그는 참으로 열매를 맺어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복음 13:23 · 본디새김
첫 번째는 말씀을 듣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고, 네 번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은 처음에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이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모든 좋은 땅이 같은 수확을 내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차이를 실패의 정도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모든 신자가 반드시 똑같은 양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요구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은 타고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좋은 땅이고,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길가나 돌밭으로 정해져 있다는 뜻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토양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으시므로, 비유에 없는 경작 과정을 끌어와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비유가 사람들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네 부류로 나눈다고 단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은 반복해서 「말씀을 듣는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집중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다른 사람을 어느 토양에 속하는지 판정하는 도구라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는 일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사람에게는 주어질 것이고 넉넉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12). 이 말씀도 재산이나 능력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일반적인 성공 법칙이 아닙니다. 받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이해가 더욱 풍성해지지만,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이미 받은 기회마저 잃을 수 있다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의 밭에는 좋은 씨앗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것들은 왜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일과 함께 존재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제 두 번째 밭의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밀과 가라지 — 왜 주인은 당장 뽑아 버리지 않는가
좋은 씨를 뿌렸는데 가라지가 자랐다
이번에는 씨를 뿌리는 사람의 행동이 처음부터 분명하게 평가됩니다. 그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는 동안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떠납니다. 밀이 자라 열매를 맺을 무렵 가라지도 드러납니다.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는 행위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주인의 밭에 해를 끼치려는 행동입니다. 가장 먼저 당황하는 사람들은 주인의 노예들입니다.
「집주인의 노예들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주님, 당신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그 밭은 어디서 생긴 가라지를 가지고 있습니까?』」마태복음 13:27 · 본디새김
주인이 좋은 씨를 뿌렸다면 밭에는 좋은 곡식이 자라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원수인 사람이 이 일을 했다.』 노예들이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모으기를 바라십니까?』」마태복음 13:28 · 본디새김
주인의 씨앗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다른 씨앗을 덧뿌린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좋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이 서로 달랐다면, 두 번째 비유에서는 좋은 씨를 뿌린 밭에 원수가 악한 것을 집어넣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 나라에 대항하는 악의 활동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입니다.
주인은 왜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는가
노예들은 문제를 발견했으니 해결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런데 주인은 뜻밖의 명령을 내립니다.
「그가 말했다. 『안 된다. 혹시라도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모으다가 그것들과 함께 밀까지 뿌리째 뽑을까 걱정이다.』」마태복음 13:29 · 본디새김
그는 가라지가 좋은 식물이기 때문에, 원수와 화해했기 때문에 남겨 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밀입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모으고 태워 버리도록 단으로 묶어라. 그러나 밀은 내 곳간에 모아들여라.」』」마태복음 13:30 · 본디새김
「두어라」는 가라지가 영원히 밀과 함께 있어도 된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바로 뒤에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태우고 밀은 곳간에 모으라는 명령이 이어집니다.
주인이 구별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그 구별을 끝낼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악을 모르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밀을 지키기 위해 추수 때까지 기다립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는데도 악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다만 이 말씀을 현실의 모든 악행이나 범죄를 방치하라는 명령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모든 사회적 책임이나 공동체의 질서를 폐지하는 법칙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악한 자와 의인을 최종적으로 구별하는 일이 언제, 누구에 의해 이루어지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그 기다림은 언제까지 이어집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설명을 조금 뒤로 미루시고, 먼저 겨자씨와 누룩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가라지(그리스어 지자니아)는 당시 밀밭에 자라던 독보리류의 잡초, 특히 Lolium temulentum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자라는 초기 모습이 밀과 비슷하여 구별하기 어렵고, 자란 뒤에도 밀과 섞여 있으면 골칫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독성을 지닌 잡초로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뿌리가 얽혀 있을 수 있고 다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는 구별도 어려웠으므로, 주인의 판단은 농사의 현실을 고려한 판단입니다.
겨자씨와 누룩 —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자라는가
가장 작은 씨앗에서 새들이 깃드는 나무까지
어떤 사람이 겨자씨 한 알을 가져다 자기 밭에 뿌렸습니다.
「그것은 모든 씨보다 작은데, 자라고 나면 채소보다 커지고 나무가 된다. 그래서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복음 13:32 · 본디새김
이 비유는 흔히 작은 시작이 큰 결과를 낳는다는 교훈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크기의 변화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씨보다 작다」는 식물학적 순위가 아니라, 사람들이 잘 아는 작은 씨앗을 사용하여 크기의 대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 작은 씨앗이 채소보다 커지고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구약에서는 큰 나무와 그 가지에 깃드는 새들이 왕국의 크기와 그 아래 살아가는 여러 존재들을 나타냅니다. 에스겔 17:22–24에서 여호와야훼는 백향목의 가지를 심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나무에 온갖 새가 깃들게 됩니다. 구약의 왕국 비유에서는 웅장한 나무가 등장하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에서 시작되는 나무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강대한 왕국의 모습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자라나면 다른 이들이 그 안에서 자리를 얻는 일이 일어납니다.
13장의 앞부분에서 새들은 씨앗을 먹어 치우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새들을 악한 존재의 상징으로 해석하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새들은 나무를 해치지 않고 그 가지에 깃들며, 구약의 큰 나무 이미지와 연결하면 그 나라가 넓어지고 여러 존재를 품게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비유는 사물마다 고정된 암호를 부여한 체계가 아닙니다. 각 이야기에서 그 사물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누룩을 밀가루 속에 숨겨 넣은 여자
바로 다음에는 누룩 비유가 나옵니다.
그는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했다. 「하늘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 밀가루 세 사톤 속에 숨겨 넣었고, 마침내 밀가루가 다 부풀었다.」마태복음 13:33 · 본디새김
겨자씨와 누룩은 모두 작은 것으로 시작해 큰 변화를 낳습니다. 그러나 겨자씨는 자라서 눈에 보이는 크기와 형태가 달라지는 반면, 누룩은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체 반죽을 변화시킵니다. 「숨겨 넣었고」는 안에 감추거나 섞어 넣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작용이 드러납니다. 밀가루가 「다」 부풀었습니다. 누룩이 일부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전체가 변화되었습니다. 「세 사톤」은 상당히 많은 양의 밀가루입니다.
성경에서 누룩이 항상 좋은 의미로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6:6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누룩이 전체 밀가루를 부풀리는 작용이 중심이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작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시작하여 넓게 영향을 미치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왜 아직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과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과정을 보여 주십니다. 그 변화에는 시간이 있고, 그 방식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눈부신 권력의 행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크기와 모습만으로 그 나라의 능력이나 장래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17장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왕권과 그 회복에 관한 약속을 담고 있으며, 높아진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시는 분이 여호와야훼라는 사실도 강조합니다. 에스겔 31:6과 다니엘 4:12에서도 큰 나무와 그 나무에 의지하는 새와 짐승들이 나라의 크기와 영향력을 나타내지만, 그 본문들에서는 강대한 나라와 왕의 교만에 대한 심판이라는 맥락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한 사톤은 고대의 곡식 용량 단위입니다. 정확한 현대식 환산은 고대 도량형의 기준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세 사톤은 한 가정이 한 끼 먹을 정도의 소량으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오래된 이야기가 어떻게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가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비유 없이는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전해진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비유로 내 입을 열겠다. 창세 이래 숨겨진 것들을 쏟아 내겠다.」마태복음 13:35 · 본디새김
마태가 인용한 말씀은 예언서가 아니라 시편 78:2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아삽의 시인 시편 78편은 출애굽과 광야의 사건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백성의 반역, 그리고 다윗의 선택까지 이스라엘의 과거를 돌아봅니다.
시편 기자가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비유라는 표현을 쓴 것은, 지나간 사건을 연대기처럼 나열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에는 지금의 백성이 배워야 할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마태는 바로 그 시편의 표현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다만 마태복음의 인용문은 시편 78:2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히브리어 표현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들을 이야기하지만, 마태는 「창세 이래 숨겨진 것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시편 78편 자체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씨앗 비유를 말씀하실 사건을 직접 예고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마태가 강조하는 것은 오래된 말씀의 방식과 예수님께서 지금 행하시는 일 사이의 깊은 연결입니다.
시편 기자는 오래된 역사 속에 담긴 의미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익숙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통해 지금 그들 가운데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비유는 숨겨진 것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 드러난 것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무리를 떠나셔서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가라지는 언제 밀과 갈라지는가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다가와 청합니다.
그때에 그는 무리를 남겨 두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밭의 가라지 비유를 우리에게 낱낱이 밝혀 주십시오.」마태복음 13:36 · 본디새김
좋은 씨를 뿌린 밭에 악한 것이 함께 자라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당장 뽑지 말라는 주인의 명령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주요 요소들을 직접 설명하십니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다.」마태복음 13:37 · 본디새김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나라에 속한 아들들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에게 속한 아들들이다.」마태복음 13:38 · 본디새김
「그것들을 뿌린 원수는 마귀다. 추수는 시대의 끝맺음이고 추수하는 이들은 천사들이다.」마태복음 13:39 · 본디새김
이 비유는 교회 안에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가 함께 존재하므로 교회가 아무런 판단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급하게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경계하는 신중함을 여기서 배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직접적인 설명에서 밭은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교회 공동체 내부의 징계나 권징 문제에 관한 규정으로 곧바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세상에 좋은 씨를 뿌리고 계시지만, 그 세상에는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들도 함께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앞의 비유에서는 씨앗이 나라에 관한 말씀이었지만, 여기서는 좋은 씨가 「나라에 속한 아들들」입니다. 첫 번째 비유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두 번째 비유는 사람의 아들이 일하시는 동안 왜 악한 것들이 함께 남아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같은 밭과 씨앗의 이미지로 서로 다른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악을 없애려는 열심이 밀을 뽑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추수 때에 일어날 일을 설명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그의 나라에서 모든 걸림돌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모아」 「그들을 불가마에 던질 것이다. 거기에 울부짖음과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13:41–42 · 본디새김
시대의 끝맺음에는 밀과 가라지가 섞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시대의 끝맺음」은 단순히 시간이 끊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지금의 시대가 마무리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결말에 이르는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그 최종적인 결말까지 모두 실현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나는 때입니다. 추수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설명을 듣고 처음 비유를 다시 읽으면 주인의 기다림이 달리 보입니다. 주인은 악한 것을 구별할 능력이 없어서도, 가라지를 처리할 계획이 없어서도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추수할 때와 추수할 사람을 정해 두고 있었습니다.
최종적인 심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지금 인간의 성급한 판단으로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씨를 뿌리는 이도 사람의 아들이고, 추수 때에 천사들을 보내시는 분도 사람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현재 사역과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서로 분리된 두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 씨를 뿌리시는 예수님께서 그 씨앗의 마지막 결말까지 책임지십니다.
의인들은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
가라지의 결말이 설명된 뒤 예수님께서 의인들의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의인들이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환히 빛날 것이다. 귀를 가진 사람은 들어라.」마태복음 13:43 · 본디새김
이 비유는 악한 자들이 불가마에 던져지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인들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빛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처음에 노예들은 가라지를 보고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를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처음부터 밀을 걱정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마지막 설명에서도 밀에 해당하는 의인들의 미래가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만나는 특정한 사람들이 마지막에 어느 쪽으로 구별될지를 판정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직 추수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귀를 가진 사람은 들어라」는 첫 비유가 끝날 때와 같은 말씀입니다. 이번에도 비유를 이해하는 일은 결말을 아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좋은 씨앗을 뿌리시는 분이 누구인지, 그분이 왜 기다리시는지, 그리고 그분이 어떤 결말을 이루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귀하다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조금 더 깊이
「시대의 끝맺음」(쉰텔레이아 투 아이오노스)은 마태가 13:39, 40, 49뿐 아니라 24:3과 28:20에서도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43절은 다니엘 12:3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 12장은 큰 환난과 구원,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을 다루며, 지혜로운 이들이 하늘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의로 이끈 이들이 별처럼 빛난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에서는 별과 하늘의 광채가, 마태에서는 해가 등장하여 두 표현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마지막에 의인들에게 나타날 영광을 빛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값진 진주 — 발견한 사람의 기쁨
보물을 발견했는데 왜 가진 것을 모두 팔까요?
예수님께서 이제 아주 짧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하늘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찾아내고 숨겼다. 그리고 기쁜 나머지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복음 13:44 · 본디새김
밭의 겉모습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한 사람에게 그 밭은 더 이상 평범한 땅이 아닙니다.
흔히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를 얻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기쁜 나머지」라는 말을 놓치면 비유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마지못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보물이 그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기뻐하며 가진 것을 모두 팔았습니다.
먼저 발견이 있고, 그다음 기쁨이 있고, 그리고 가진 것을 모두 팔아 밭을 사는 행동이 이어집니다.
이전에는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발견한 보물과 비교하면 다른 자리에 놓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조금 불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기고, 밭 주인에게 알리지 않은 채 밭을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매매 관행이나 발견자가 정직했는지에 대한 평가를 덧붙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숨겨진 재산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거래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지침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 속의 모든 행동이 곧바로 본받아야 할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주를 찾아다니던 상인이 마침내 발견한 것
이어지는 비유는 앞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합니다.
「또 하늘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복음 13:45 · 본디새김
「값진 진주 하나를 찾아내고는 가서 가진 것을 모두 내다 팔아 그것을 샀다.」마태복음 13:46 · 본디새김
밭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처음부터 보물을 찾고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반면 진주 상인은 처음부터 좋은 진주를 찾고 있었고,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출발점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같습니다. 둘 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발견의 경로보다 발견한 것의 가치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팔았다」는 사실을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재산이나 인간의 희생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앞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작게 시작되지만 크게 자란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다면, 이제는 그 나라가 겉으로 드러난 크기와 관계없이 얼마나 귀한지를 보여 주십니다.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보물이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발견한 사람에게는 그의 모든 것을 내놓게 할 만큼 기쁜 일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는 그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는 어떻게 될까요?
조금 더 깊이
진주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귀한 장신구의 재료로 여겨졌습니다. 보물은 밭속에 숨겨져 있어 발견하기 전에는 그 존재조차 알기 어렵고, 진주는 상인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선택하는 물건입니다. 서로 다른 종류의 귀중품이지만, 두 비유에서 발견한 것은 모두 다른 소유물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작게 만듭니다.
바다에 던진 후릿그물 — 모든 것을 모으지만 끝까지 섞어 두지는 않는다
그물은 물고기를 먼저 골라서 잡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바다의 이야기로 돌아가십니다.
「다시 하늘의 나라는 바다에 던져져 온갖 종류의 것을 모아들인 후릿그물과 같다.」마태복음 13:47 · 본디새김
바다에 넓게 펼치는 이 그물은 어떤 물고기를 잡을지 하나하나 골라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은 그것을 바닷가로 끌어올려 좋은 것은 그릇에 모으고 못 쓸 것은 밖으로 던집니다. 처음에는 모으는 일이고, 나중에는 구별하는 일입니다.
「시대의 끝맺음에도 그러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서 의인들 가운데서 악한 자들을 갈라 놓고」 「그들을 불가마에 던질 것이다. 거기에 울부짖음과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13:49–50 · 본디새김
밀과 가라지 비유와 비슷하지만 강조점은 다릅니다. 밀과 가라지 비유에서는 왜 지금 악한 것들을 뽑아 버리지 않는지가 중심이었다면, 후릿그물 비유에서는 지금 여러 종류의 것이 함께 모이지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구별되는 때가 온다는 사실이 중심입니다. 그리고 그 구별은 천사들이 행할 일입니다.
결정적인 구별은 마지막에 이루어집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앉아 바닷가의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긴 비유는 바다에 던진 그물의 이야기입니다. 같은 말씀을 들었지만 깨닫고 받아들이는지는 서로 달랐던 그 무리의 모습을, 온갖 종류의 것을 모아들이는 그물이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마태가 이 배경과 비유 사이에 의도적인 상징적 대응을 설정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야기의 배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학적 연결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질문하십니다.
새것과 옛것을 내보내는 서기관 —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제자들은 정말 모든 것을 깨달았을까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예.」마태복음 13:51 · 본디새김
13장 내내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셨고, 깨닫는 사람들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으며, 제자들에게 비유들을 설명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실제로 깨달았는지 물으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든 비유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다는 뜻일까요? 마태복음의 이후 이야기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16:5–12에서는 누룩에 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그 뜻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예」라는 대답을 완전한 이해에 대한 최종적인 인증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거짓이나 허세라고 단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다음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하늘의 나라의 제자가 된 서기관은 누구나 자기 보물 창고에서 새것과 옛것을 내보내는 집주인 같은 사람이다.」마태복음 13:52 · 본디새김
지금까지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보물 창고에서 무엇인가를 내보내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받는 사람에서 내어 주는 사람으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서기관이 하늘의 나라의 제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
앞에서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논쟁하거나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경과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서기관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사용하십니다. 「제자가 된」(μαθητεύω)은 앞에서 반복해서 등장한 제자라는 말과 같은 계열의 동사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배운 서기관이라는 뜻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 아래 제자가 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집주인은 자신의 보물 창고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그것을 쌓아 놓고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필요할 때 내보냅니다. 11절에서 「비밀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주어졌다」고 하셨지만, 그것을 자신들만 아는 비밀로 영원히 간직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새것과 옛것을 함께 내보내는가
집주인이 내보내는 것은 새것과 옛것, 두 종류입니다.
흔히 옛것은 구약성경이고 새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이루러 오셨다고 선언하셨고(5:17), 마태는 오래된 성경의 말씀들이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다만 본문은 새것과 옛것을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책의 구분으로 직접 정의하지 않으며, 당시 신약성경이라는 문서 모음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더 넓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말씀과 지금 새롭게 드러내시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함께 내어 놓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구체적으로 새것과 옛것으로 구분할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둘 다 보물 창고에서 나온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옛것과 새것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집주인은 둘 다 내보냅니다.
바로 앞의 사람은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었고, 이번 사람은 보물을 내어 주는 사람입니다. 두 비유의 「보물」을 하나의 상징으로 고정할 수는 없지만, 이 배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이어 줍니다. 예수님 자신도 일상의 사물들로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고, 오래된 성경의 말씀으로 자신이 행하시는 일의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태는 이야기를 뜻밖의 방향으로 바꿉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자, 예수님을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목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걸려 넘어진 사람들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이 비유들을 마쳤을 때에 그곳을 떠났다.마태복음 13:53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긴 가르침을 마무리할 때 반복됩니다. 산상설교가 끝난 7:28에서도, 열두 제자를 파송하는 가르침이 끝난 11:1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곳은 자신의 고향입니다.
그는 자기 고향으로 가서 그들의 회당에서 그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은 몹시 놀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에게 이 지혜와 기적들이 어디서 났느냐?」마태복음 13:54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를 부인하지 않고,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식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 하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태복음 13:55 · 본디새김
그들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 가운데 살고 있지 않으냐?」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분명히 무언가를 보고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깨닫지 못합니다.
「이 사람에게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왔느냐」는 본래 좋은 질문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끝까지 따라갔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더 깊이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답을 찾기보다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늘어놓습니다. 그 정보는 예수님의 정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아니라, 예수님께 더 특별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낯선 사람이라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 익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목수이십니까, 목수의 아들이십니까
마가복음 6:3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목수」라고 부르지만, 마태복음 13:55에서는 「목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을 현대적으로 정확히 분류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를 평범한 가정의 배경과 연결하여 이해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는 독자에게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예수님의 탄생은 성령의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1:18–25).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 곁에서 살아오신 가정의 한 사람으로만 바라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해서는 정작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가족을 두시고 고향 사람들 가운데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익숙한 사실만으로 예수님의 정체가 모두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놀라움이 어떻게 걸림돌로 바뀌는가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걸려 넘어졌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예언자가 존경받지 못하는 곳은 자기 고향과 자기 집뿐이다.」마태복음 13:57 · 본디새김
「걸려 넘어지다」(σκανδαλίζω)는 13:21에서 돌밭에 뿌려진 사람에게 쓰인 동사와 같습니다. 그 사람은 말씀 때문에 고난이나 박해가 닥치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가족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걸려 넘어집니다. 말씀을 받아들였다가 어려움 때문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기존 지식과 기대 때문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언자가 언제나 낯선 곳에서는 존경받는다는 문자적인 통계가 아닙니다. 가까운 관계와 익숙함이 예언자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이 나옵니다.
그는 그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거기서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았다.마태복음 13:58 · 본디새김
마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능력이 없으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많이 행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만을 놓고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능력이 작동하지 못한다는 규칙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믿지 않음과 그 결과는 연결되어 있지만,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그런 결과가 일어났는지를 본문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13장의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좋은 땅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고향은 많은 기적이 일어나는 자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목수」로 번역된 텍톤은 나무를 다루는 장인으로 자주 이해되지만, 더 넓게 건축이나 제작에 종사하는 기술자를 가리킬 수도 있어 오늘날의 가구 제작 전문 목수로만 좁히기는 어렵습니다. 58절의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 6:5는 예수님께서 몇몇 병자를 고치신 것 말고는 아무 기적도 행할 수 없으셨다고 기록하지만, 마태는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는 방식으로 기록합니다. 그곳에서 기적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감추어져 있지만 드러날 나라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은 서로 다른 지식들을 아무 관계 없이 모아 놓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씨앗과 가라지, 겨자씨와 누룩, 보물과 진주, 그물은 하나의 현실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아직 그 나라의 모든 모습과 마지막 결말이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눈에 보이는 상태가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 긴 가르침의 중심에 예수님을 세웁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시는 사람의 아들이시고, 시대의 끝맺음에 천사들을 보내실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성장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나라를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알아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깨달음은 지식의 양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을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우고 가르치는 서기관을 하늘의 나라의 제자로 말씀하셨습니다. 차이는 자신이 아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미리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께 배우면서 이미 알고 있던 것의 의미까지 새롭게 깨달을 것인가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가와 비유의 의미를 물었고,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지혜가 어디서 왔는지 물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이 향하는 방향은 달랐습니다. 한쪽에서는 질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듣는 자리로 이어졌고, 다른 쪽에서는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는 자리로 이어졌습니다.
고향 회당에는 예수님을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을 알았고 형제들의 이름도 알고 있었습니다. 누이들이 자기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놀라움은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 이 지혜와 기적들이 어디서 났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가족의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예수님께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예수님께서, 이제 자신의 고향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서 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놀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목수의 아들 앞에서, 하늘의 나라에 관한 비밀은 여전히 깨달아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