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두 식탁과 하나님의 아들
마태복음 14장에는 두 번의 식사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 식사는 헤롯의 생일 잔치입니다. 권력자의 궁정에 사람들이 모였고, 춤과 맹세가 오갑니다. 먹을 것은 풍성했겠지만, 그 잔치의 끝에서 쟁반에 담겨 나온 것은 음식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머리였습니다.
두 번째 식사는 한적한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왕궁도 없고, 잔치를 준비한 사람도 없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인데, 먹어야 할 사람은 남자만 오천 명쯤입니다. 그런데 그 식사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모두 배불렀고, 남은 빵 조각은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두 이야기의 차이는 단순히 한쪽은 나쁘고 다른 쪽은 좋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헤롯은 사람들을 자기 식탁에 초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한 말을 되돌릴 용기가 없어 의로운 사람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먹일 만한 음식조차 충분하지 않은 곳에 계시지만, 굶주린 무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빼앗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내어 주십니다.
누가 참으로 사람을 살리는 왕입니까?
마태는 이 질문에 직접 답하는 대신 두 식탁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시고, 밤이 깊어지자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오십니다.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시고, 물속에 가라앉는 베드로를 붙잡아 주십니다. 마지막에는 배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절하며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14장은 예수님에 관한 잘못된 소문으로 시작합니다. 헤롯은 예수님께서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밤중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전혀 다른 고백에 이릅니다.
이 장은 예수님을 누구로 알아보는가라는 질문을, 권력자의 궁정에서 시작하여 광야의 식탁과 흔들리는 배 위를 지나며 풀어 갑니다.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기기까지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왜 죽은 요한을 떠올렸을까?
14장은 분봉왕 헤롯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자기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그 안에서 능력들이 일한다.」마태복음 14:2 · 본디새김
여기서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로마의 지배 아래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렸습니다.
마태는 헤롯이 왜 예수님을 요한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헤롯은 자신이 죽인 요한을 잊지 못할 만한 상황에 놓여 있었고, 예수님의 능력에 관한 소문을 듣자 그 일을 요한과 연결합니다.
마태는 여기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요한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의 죽음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헤롯의 말은 그 죽음 이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의 반응입니다. 이렇게 배열한 결과, 독자는 예수님의 능력에 관한 소문에서 시작하여 그 소문을 들은 통치자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보게 됩니다.
요한이 문제 삼은 것은 왕의 사생활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그에게 이렇게 말해 왔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마태복음 14:4 · 본디새김
문제의 여자는 헤로디아입니다. 마태는 그녀를 「자기 형제 빌립의 아내」라고 소개합니다. 역사 자료 사이에 이름의 차이가 있더라도 요한이 문제 삼은 관계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헤롯은 자기 형제의 아내였던 여자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레위기 18:16과 20:21에는 형제의 아내와 관계를 맺는 일을 금지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신명기 25:5–10에는 자녀 없이 죽은 형제의 가문을 잇기 위한 특별한 혼인 규정도 있지만, 헤로디아와 헤롯 안티파스의 관계를 그 규정에 따른 혼인으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요한은 통치자라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벗어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요한의 말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지 않았습니다.
요한을 붙잡아 묶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마태는 헤롯이 요한을 죽이고 싶어 했지만 무리가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요한이 옳은 말을 했는지를 먼저 판단하지 않고, 그를 죽였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걱정합니다.
요한의 생명은 한 통치자의 두려움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권력자는 왜 자기 맹세에 갇혔을까?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춥니다. 그 춤이 헤롯을 기쁘게 하자 그는 무엇이든 구하면 주겠다고 맹세합니다.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자 그 아이는 말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 자리에서 나에게 주십시오.」마태복음 14:8 · 본디새김
잔치의 기쁨이 갑자기 끔찍한 요청으로 바뀝니다.
마태는 소녀가 왜 그 요청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고, 어머니가 부추겼다는 사실만 밝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헤롯의 반응입니다.
왕은 슬퍼했지만 맹세 때문에, 또 함께 기대어 누워 식사하던 사람들 때문에 주라고 분부했다.마태복음 14:9 · 본디새김
이것이 그가 요한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의 5절에서 헤롯이 요한을 죽이고 싶어 했다고 이미 말했기 때문입니다. 두 절은 그가 요한을 없애고 싶어 했지만 그 일을 공개적으로 실행하는 상황에서는 슬퍼했다는, 단순하지 않은 태도를 보여 줍니다. 왜 그런 반응이 나타났는지는 본문이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처형 명령을 내리게 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맹세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하던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헤롯은 공개적으로 말한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려 했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그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에게는 명령을 내릴 권력이 있었지만, 그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말과 손님들의 시선에 사로잡혔습니다.
요한은 헤롯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반면 헤롯은 자신이 한 말이라는 이유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실행합니다.
요한은 통치자의 권력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헤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요한은 감옥에서 목이 베이고, 그의 머리는 쟁반에 담겨 잔치 자리로 옮겨집니다. 마태는 이 장면에 극적인 감정을 덧붙이지 않고, 몇 개의 짧은 문장으로 사건의 진행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돌아갑니다.
그의 제자들이 다가와 주검을 거두고 그를 묻었다. 가서 예수에게 알렸다.마태복음 14:12 · 본디새김
잔치에서 요한의 머리는 사람들 앞에 내놓는 물건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남겨진 주검을 거두고 장사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요한의 죽음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기록하지 않고,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는 안티파스를 정확한 통치 칭호인 「분봉왕」으로 소개하지만, 9절에서는 「왕」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서에서 왕이라는 호칭은 실제 정치적 지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도 사용되므로, 안티파스가 독립된 왕국의 왕이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1세기 유대 역사가는 『유대 고대사』 18권 109–119절에서 헤롯 안티파스가 기존 아내와의 혼인 관계를 정리하고 헤로디아와 결혼하려 했던 일을 전합니다. 헤로디아의 이전 남편은 안티파스의 이복형제 헤롯이었습니다. 복음서의 「빌립」이라는 이름과 기록을 조화시키기 위해 그 인물을 헤롯 빌립이라고 부르는 설명이 있지만, 그가 실제로 두 이름을 사용했는지는 완전히 확정된 사실로 다루기 어렵습니다. 같은 역사가는 헤롯이 요한의 대중적 영향력을 두려워하여 정치적 소요를 예방하려 했다고 설명하며, 요한이 마카이로스 요새에서 처형되었다고 기록합니다(『유대 고대사』 18.116–119). 마태는 그보다 헤롯의 혼인에 대한 요한의 비판과 궁정 잔치에서 벌어진 사건에 초점을 맞춥니다. 두 자료의 동기를 하나로 합쳐 실제로 무슨 생각이 결정적이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헤롯의 잔치 다음에 펼쳐진 또 하나의 식탁
예수님께서는 혼자 있고자 하셨지만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예수는 그 말을 듣고 거기서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다. 무리는 예수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도시에서 걸어서 그를 따라갔다.마태복음 14:1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왜 물러가셨는지 마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헤롯의 관심과 위협을 피해 움직이셨을 수도 있으며, 따로 시간을 보내려는 목적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심정을 확정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예수님께서 무슨 행동을 하셨는지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움직이신 것처럼, 무리도 예수님께서 물러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움직입니다. 두 소식의 내용은 다르지만, 들은 것이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셨지만 결국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십니다.
그는 배에서 내려 큰 무리를 보고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겼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병든 이들을 고쳤다.마태복음 14:14 · 본디새김
예수님의 행동을 이끄는 것은 무리의 요구 자체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겼다」(σπλαγχνίζομαι)라고 옮긴 그리스어 동사는 본래 내장이나 몸속 깊은 곳을 가리키는 낱말과 관련되어 있어, 다른 사람의 처지가 마음 깊이 와닿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9:36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고 같은 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곳에서는 무리가 목자 없는 양처럼 지쳐 있었다는 설명이 뒤따랐지만, 여기서 마태가 직접 기록하는 행동은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먼저 잔치를 기획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앞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다음 식사 이야기의 출발점입니다.
제자들의 계획은 왜 충분하지 않았을까?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기는 한적한 곳이고 때도 이미 늦었습니다. 마을로 가서 자기들이 먹을 음식을 사도록 무리를 보내십시오.」마태복음 14:15 · 본디새김
제자들의 제안은 얼핏 보아 합리적입니다. 사람들은 배가 고플 것이고, 이곳에서는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우며, 시간도 늦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의 필요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복음 14:16 · 본디새김
제자들에게는 그토록 많은 사람을 먹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가지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4:17 · 본디새김
제자들은 가지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필요와 그들을 먹일 일을 기준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에서 음식을 만들어 내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가 말했다. 「그것들을 이리 나에게 가져오너라.」마태복음 14:18 · 본디새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진 것을 무의미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부족한 양식이 이제 예수님의 손에 놓입니다.
빵은 누구의 손을 거쳐 무리에게 전해졌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풀 위에 기대어 앉으라고 분부하십니다. 마태는 그다음 과정을 주의 깊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드십니다.
축복의 기도를 하십니다.
빵을 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은 무리에게 줍니다.
당시 유대인의 식사에서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축복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알려진 관습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늘리는 능력을 과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마태는 빵이 어떤 순간에 얼마나 늘어났는지, 제자들이 어떤 광경을 보았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기적의 원리를 설명하기보다 그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과 사람들이 받는 음식에 시선을 모읍니다. 그리고 결과를 한 문장으로 알려 줍니다.
모두 먹고 배불렀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을 열두 광주리 가득 거두었다.마태복음 14:20 · 본디새김
어떤 사람들만 조금씩 먹은 것이 아닙니다. 모두 먹었고, 배불렀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빵이 다섯 개뿐이라고 말했지만, 마지막에는 남은 것만 열두 광주리입니다. 부족함이 풍성함으로 바뀐 사건입니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들을 셈에 넣지 않고 남자만 오천 명쯤이었다.마태복음 14:21 · 본디새김
남자만 오천 명쯤이었다는 말은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실제 식사 인원이 그보다 많았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여자와 아이들이 식사에서 제외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20절은 「모두 먹고 배불렀다」고 기록합니다. 여자와 아이들이 빠진 것은 식사 자체가 아니라 21절의 인원 계산입니다.
광야에서 먹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
이 사건은 구약의 두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먼저 출애굽기 16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했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백성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광야는 인간의 힘만으로 먹을 것을 마련하기 어려운 장소였지만, 바로 그곳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도 사람들은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한적한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내지 않으시고 먹이십니다.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먹이신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마태는 이 사건을 출애굽기 16장의 직접적인 성취라고 선언하지 않으며, 만나와 빵의 사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더 직접적으로 닮은 이야기는 열왕기하 4:42–44입니다. 한 사람이 엘리사에게 보리빵 스무 개를 가져오자, 엘리사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사환이 이것으로 어떻게 백 명을 먹일 수 있겠느냐고 묻지만, 엘리사는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합니다. 결국 백 명이 먹고도 음식이 남았습니다.
음식이 부족합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을 먹이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먹고도 남습니다. 구조가 놀랄 만큼 비슷합니다.
그러나 차이도 있습니다. 엘리사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전하며 음식이 충분할 것이라고 선언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빵을 들어 축복의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엘리사의 이야기에서는 스무 개의 빵으로 백 명이 먹고, 여기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쯤 되는 무리가 먹습니다.
마태가 열왕기하를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두 사건을 나란히 읽으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증언하는 예언자일 뿐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헤롯의 식탁과 예수님의 식탁
헤롯의 식탁에서는 소녀가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 식탁에서 주어진 것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얻은 머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서는 제자들이 가진 것이 너무 부족해서 사람들을 먹일 수 없었지만, 그 식탁에서는 모두가 배불리 먹었습니다.
헤롯은 자기의 권위를 지키려다가 요한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을 왕이라고 직접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헤롯의 통치를 보여 준 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장면을 배치함으로써 두 사람의 행동을 비교하게 하고, 예수님의 왕권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16절에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신 명령은 결국 실현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빵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빵은 그들의 손을 거쳐 무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만으로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장면을 모든 부족한 자원이 언제나 초자연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약속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스스로 능력을 만들어 내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해결할 능력을 갖춘 뒤에야 예수님의 일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그 제자들 자신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 놓입니다.
이번에는 굶주린 무리 앞이 아닙니다.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열두 광주리라는 숫자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큰 주제를 고려하면 가능한 연결이지만, 마태는 이 자리에서 열두 광주리의 상징적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장 분명한 의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공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 여자와 아이들이 몇 명이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전체 인원을 정확한 숫자로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헤롯의 잔치와 예수님의 식사를 나란히 놓는 문학적 대비는 마태복음 14장을 해석하는 데 오래전부터 주목되어 온 특징입니다.
바다 위로 오시는 분 — 「안심하여라. 나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먼저 보내셨을까?
그는 곧 제자들을 다그쳐 배에 오르게 하고,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했다.마태복음 14:2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가라고 가볍게 권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배에 오르게 하고 먼저 건너가도록 재촉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마태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요한복음 6:15에 나오지만,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마태의 이 행동에 대한 확정적인 이유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마태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자들과 떨어지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리를 보낸 뒤 기도하러 혼자 산에 올라갔다. 저녁이 되자 그는 홀로 거기 있었다.마태복음 14:23 · 본디새김
이 장에는 예수님께서 혼자 계시려는 모습이 두 번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지만, 무리가 따라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치시고 먹이셨습니다. 이번에는 무리를 보내고 제자들까지 먼저 떠나게 하신 뒤 산에 올라가십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기도하셨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축복의 기도를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산에 올라 홀로 기도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분리된 독립적인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바다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길에서 제자들은 왜 어려움을 겪습니까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고 물결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 불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4:24 · 본디새김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건너가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길에서 거센 바람을 만납니다.
우리는 때로 어려움을 겪으면 자신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어려움은 실제로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다는 사실은 바람을 만나지 않게 해 주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어려움을 겪는다는 일반적인 법칙을 선언하지는 않지만, 이 사건에서 제자들이 지시를 따라 움직였는데도 바람 때문에 고생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합니다.
상황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녁에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은 밤의 마지막 구간인 밤 사경에 이르러서야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이 겪은 어려움은 순간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밤 사경에 그는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갔다.마태복음 14:2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다른 배를 타고 오시지 않습니다.
물결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시지도 않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바다 위를 걷는 일은 왜 특별합니까
이 장면을 단순히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으로만 이해하면 구약의 배경을 놓치게 됩니다. 욥기 9:8은 하나님을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 장에서 욥은 산을 옮기고 땅을 흔들며 하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구원을 기억하는 시편 77:19도 하나님의 길이 바다에 있고 그분의 길이 큰 물속에 있지만 발자취는 보이지 않는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다 가운데 길을 내어 자기 백성을 인도하셨다는 사실이 찬양됩니다.
구약에서 바다를 다스리고 그 위에 길을 내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그런데 마태는 지금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다고 기록합니다. 마태가 욥기나 시편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므로 이 사건을 그 말씀들의 문자적인 성취라고 선언할 수는 없지만, 구약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표현하던 이미지가 예수님의 행동 속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능력을 과시하시지 않고, 바다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시는 일에 쓰십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의 반응은 예상과 다릅니다.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를 걷는 것을 보고 마음이 뒤흔들렸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유령이다.」 그리고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다.마태복음 14:2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그들을 도우러 오셨지만, 그 오심이 오히려 두려움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다 위를 걸어오는 일을 그들이 알던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들의 정확한 심리 과정은 본문에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태가 기록하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보았지만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곧 그들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복음 14:2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의 잘못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들이 왜 자신을 유령이라고 생각했는지 따져 묻지도 않으십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말을 거시고, 자신이 누구신지 알려 주십니다.
「나다」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
「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일상적인 문맥에서는 「내가 그 사람이다」, 「나다」라는 자기 확인의 말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로 묘사된 바다 위를 걷는 행동과, 자신을 밝히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단순한 신원 확인 이상의 신학적 의미를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일부 해석자들은 이 장면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떠올리게 하는 사건으로 읽습니다. 다른 해석자들은 「나다」라는 말 자체에 별도의 신적 이름을 부여하기보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마지막에 제자들이 드리는 고백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가 드러난다고 봅니다. 두 해석을 구분할 필요는 있지만, 본문에서 분명한 사실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상황 속으로 오셔서 자신을 알려 주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베드로가 그 말씀에 응답합니다. 그의 행동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특별한 장면입니다.
물 위를 걸은 베드로는 왜 가라앉았습니까
베드로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구했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주님, 당신이라면 내가 물 위로 당신에게 가도록 분부해 주십시오.」마태복음 14:28 · 본디새김
베드로는 자기도 물 위를 걸을 능력이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명령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께 가는 것입니다.
「당신이라면」은 조건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정체를 여전히 의심하고 있었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그 형태 자체가 반드시 불신을 뜻하지는 않으며 「정말 당신이시라면 명령해 주십시오」라는 확인과 요청이 함께 담긴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더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자기 행동의 근거를 예수님의 명령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말했다. 「오너라.」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다. 그리고 예수에게 갔다.마태복음 14:29 · 본디새김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려고 시도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걸었습니다. 마태는 베드로가 어떤 초인적인 능력을 새롭게 소유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배라는 익숙한 자리에서 나와 예수님께로 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람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는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가라앉기 시작하자 이렇게 소리쳤다. 「주님, 나를 구해 주십시오.」마태복음 14:30 · 본디새김
우리는 바람 자체를 눈으로 볼 수 없고, 바람에 움직이는 물결이나 사물을 통해 그 세기를 알아봅니다. 마태가 베드로가 거센 바람을 「보았다」고 기록한 것은, 베드로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위험을 의식하고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흔히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었기 때문에 가라앉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한 설명은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본문은 베드로의 시선이 정확히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갔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마태가 직접 알려 주는 것은 그가 거센 바람을 보았고 두려워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느낀 위험은 상상 속의 위험이 아닙니다. 바람은 실제로 불고 있었고, 물결은 실제로 배를 시달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조금 전까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바람이 잠잠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과 두려움이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함께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었기에 배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람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를 붙잡은 것은 그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이었습니다
가라앉으면서 외친 베드로의 「주님, 나를 구해 주십시오」는 마태복음 8:25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에도 제자들은 바다에서 큰 위험을 만나 예수님을 깨우며 구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자들 전체가 아니라 베드로 한 사람이 물속에서 외칩니다.
예수는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어찌하여 마음이 흔들렸느냐?」마태복음 14:3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붙잡으셨습니다.
그다음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충분한 수준으로 회복된 뒤에 그를 건져 올리지 않으십니다. 가라앉는 그를 먼저 붙잡으십니다. 이것이 이 장면을 단순한 믿음의 시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적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베드로의 믿음이 충분하다는 평가 뒤에 주어진 보상이 아닙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전혀 없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께 명령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 말씀에 따라 물 위를 걸었으며, 가라앉는 순간에도 예수님께 구원을 청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믿음은 충분히 견고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짚으십니다.
「마음이 흔들렸느냐」(διστάζω)로 옮긴 동사는 망설이거나 주저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가려고 걸음을 내디뎠지만, 거센 바람 앞에서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가 물 위를 걸었다는 사실과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둘 다 일어났습니다.
믿음을 단순히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고 강하게 확신하는 정신력으로 설명하면 본문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베드로의 행동에서 믿음의 대상은 일관되게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그를 붙잡아 주신 분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는 베드로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했는지 자랑하는 이야기로 이 장면을 끝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신 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들이 배에 올라가자 바람이 잦아들었다.마태복음 14:32 · 본디새김
바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도, 베드로가 두려움을 느끼기 전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붙잡아 주신 뒤, 그들이 함께 배에 올라가자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배에 있던 이들이 그에게 절하며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태복음 14:33 · 본디새김
마태복음 8:23–27에도 바다에서 일어난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모든 것이 잠잠해졌고, 그 일을 본 사람들은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 그에게 순종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을 목격했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질문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 위를 걸어오셨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부르셨고, 가라앉는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 절하며 고백합니다.
앞에서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배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예수님의 권능을 경험한 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같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판단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용감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하며 소리를 질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워하며 가라앉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려 주셨고 가라앉는 베드로를 붙잡으셨습니다.
제자들의 고백은 그들이 두려움을 완벽하게 이겨 냈다는 사실이 아니라, 두려움 속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이 고백이 이루어진 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바다를 건너갑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예수님께 다가오는 사람들은 길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대신 병든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조금 더 깊이
「마음이 흔들렸느냐」로 옮긴 동사는 마태복음에서 이곳과 28:17, 두 곳에만 등장합니다. 「절하다」로 옮긴 동사는 상대에게 엎드려 경의를 표하거나 경배하는 행동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동사 하나만으로 그 행동이 어떤 수준의 경배였는지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과 함께 나타나므로 예수님께 대한 특별한 인정과 경배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옷단 술에 손을 댄 사람들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 서쪽 지역과 연결된 지명인 게네사렛 땅에 이릅니다. 마태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느 집이나 마을에 머무르셨는지 설명하지 않고,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기록합니다.
그곳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 일대 전체로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병든 사람들을 모두 그에게 데려왔다.마태복음 14:35 · 본디새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그들의 신앙 고백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예수님께 병든 사람들을 데려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했고, 그 기대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13장 마지막 장면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족의 이름과 생활 배경까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졌습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으므로, 두 집단을 믿음이 있고 없음으로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이유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왜 하필 옷단 술을 만지려고 했을까?
그의 옷단 술에만이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그에게 간청했다. 손을 댄 사람마다 온전히 나았다.마태복음 14:36 · 본디새김
옷단 술은 옷의 가장자리를 가리키는 장식적인 표현만이 아닙니다. 민수기 15:38–40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옷자락에 술을 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2:12에도 옷의 네 귀퉁이에 술을 달라는 규정이 나옵니다.
이러한 술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게 하는 표지였고, 마태복음의 기록에서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에도 이러한 술이 달려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20에서도 오랫동안 피가 흐르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단 술에 손을 대면 낫겠다고 생각하고 손을 댔고,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이 그 옷단 술에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마태는 그들이 왜 특별히 옷단 술을 만지려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옷단 술 자체가 특별한 치유 능력을 지닌 물건이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온전히 나았다」는 말은 증상이 조금 줄어들었다는 뜻보다 강한 표현입니다. 마태는 그들에게 일어난 회복을 분명하게 기록하지만, 그 능력이 옷감이나 술 자체에 있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에서 치유의 중심에 있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앞서 베드로가 경험했던 사건과도 어울립니다. 베드로는 가라앉으면서 예수님께 구원을 청했고,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게네사렛에서는 병든 사람들이 옷단 술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했고, 손을 댄 사람마다 온전히 나았습니다. 하나는 바다에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신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병든 사람들을 고치신 사건이지만, 두 장면 모두 예수님과의 만남이 사람에게 회복을 가져옵니다.
두려움보다 큰 권위, 부족함보다 큰 공급
마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는 여러 사람의 반응을 통해 드러납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무리는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고 예수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하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게네사렛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이들이 모두 같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하지는 않지만, 마태는 이 사건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계속 밝혀 갑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능력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사람들의 필요에 다가가 그들을 살리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권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 위를 걸으셨고,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시자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멈추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베드로를 구하실 때에는 그를 향해 손을 내미십니다. 하나는 자연의 힘을 다스리는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위험에 빠진 사람에게 다가가는 자비입니다.
마태는 이 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헤롯은 궁정 안에서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수 있는 권력자였지만, 그의 결정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 게네사렛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옵니다. 그들은 특별한 지위를 요구하거나 대단한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고, 그저 옷단 술에만이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마다 온전히 나았습니다.
권력자의 잔치에서 생명이 빼앗겼던 이야기로 시작한 장이, 예수님의 옷단 술에 손을 댄 사람들이 온전히 회복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배웠습니다. 바다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고백했던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말이 이 모든 장면 속에 울려 퍼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