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까지

마태복음 15장에는 빵을 둘러싼 세 장면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문제는 빵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먹는 사람의 정결함입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한 가나안 여자가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빵을 먹는 방법이 아니라 그 빵을 누가 받을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에게 빵을 나누어 주십니다. 모두 먹고 배불렀고, 남은 빵 조각만 큰 광주리 일곱 개를 가득 채웠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더럽히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얼마나 풍성한가?

이 세 장면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구별하는 경계가 어디에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 경계를 어떻게 다루시는가라는 질문을 점점 깊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따지고, 하나님의 백성 밖에 있는 여자는 예수님의 자비를 붙듭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마침내 수많은 사람을 먹이는 식탁에서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이 장을 이스라엘과 이방 사람들의 구별이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내지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의 깊이는 그 긴장을 지워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긴장을 끝까지 따라갈 때 드러납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615장 본문 읽기 →

손을 씻지 않은 제자들보다 더 큰 문제

마태복음 15:1–9 본문 →

그들은 왜 손을 씻지 않는다고 문제 삼았을까?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다가와 말했다.마태복음 15:1 · 본디새김

마태는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힙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며 유대인의 예배와 종교 생활에서 중심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들에게 공식적인 조사 권한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들의 출신지는 이 논쟁이 예루살렘의 종교적 전통과도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뜻밖에도 손 씻기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빵을 먹을 때에 자기 손을 씻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어른들의 전통을 어깁니까?」마태복음 15:2 · 본디새김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위생이 아니라 의례적 정결함입니다. 구약에는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봉사할 때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고(출애굽기 30:17–21), 레위기에는 정결함과 부정함을 구별하는 여러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이 매번 빵을 먹기 전에 특정한 방식으로 손을 씻어야 한다는 명령이 모세오경에 직접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바리새파 사람들의 관심을 사소한 형식주의라고 치부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살아가려는 목적을 가지고 전통을 중요하게 여겼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전통이 어떤 권위를 가지며, 하나님의 계명과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셨는가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도 너희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마태복음 15:3 · 본디새김

두 질문에서 「어기다」(παραβαίνω)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로, 규범이나 경계를 넘어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전통을 어겼다고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통을 전부 없애자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이 물려받은 전통이 충돌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마태복음 15:4 · 본디새김

첫 번째는 출애굽기 20:12와 신명기 5:16에 나오는 십계명의 명령이고, 두 번째는 출애굽기 21:17의 법규입니다. 둘 다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너희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게서 받으실 도움은 무엇이든 하나님께 바친 예물입니다』 하면,」 「그는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들었다.」마태복음 15:5–6 · 본디새김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재산이나 도움을 하나님께 바친 예물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재산을 부모를 위해 사용할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책임을 회피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일에만 머물지 않고, 부모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실제적인 책임도 포함합니다. 다만 이 논쟁이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관행이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정한 전통의 적용이 하나님의 계명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계십니다.

입술은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위선자들아」라고 부르신 뒤 이사야 29:13을 인용하십니다.

「『이 백성은 입술로 나를 공경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마태복음 15:8 · 본디새김

이어지는 9절은 그들이 「사람의 계명을 가르침이라고 가르치면서 헛되이」 하나님을 받든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29장에서도 사람들은 종교적인 행위를 계속하지만 여호와야훼께서 행하시는 일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곧이어 여호와야훼는 인간의 지혜와 총명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십니다(29:14). 이사야의 경고는 하나님을 입으로 부르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공경한다고 말하면서 그분의 뜻에서 멀어져 있는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여기에는 놓치기 쉬운 낱말의 반복이 있습니다. 4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6절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통, 8절의 하나님을 「입술로 공경한다」는 말씀에서 「공경하다」(τιμάω)는 모두 같은 그리스어 동사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정작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로 만들었다는 점이 같은 낱말의 반복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손에서 시작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말씀하시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일상적 손 씻기 관행은 율법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려는 유대인의 전승과 연결됩니다. 후대의 미슈나 『야다임』에는 손의 정결과 관련된 세부 규정들이 보존되어 있지만, 후대에 편집된 그 규정들이 모두 예수님 시대에 동일한 형태로 시행되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5절의 서원 관행에 관해 마가복음 7:11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관련된 아람어 「고르반」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런 선언이 언제나 재산을 즉시 성전에 넘겼다는 의미는 아니며, 특정한 재산을 다른 사람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서원의 형태로도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재산이 실제로 성전에 전달되었는지보다, 하나님께 바쳤다는 선언을 부모에 대한 책임을 피하는 근거로 삼는 일입니다. 집회서 3:12–16에서도 부모가 나이 들어 약해졌을 때 돌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마태복음 15:10–20 본문 →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입에서 나오는 것

그리고 무리를 불러 그들에게 말했다. 「듣고 깨달아라.」마태복음 15:10 · 본디새김

짧은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는 것과 깨닫는 것이 다르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무리에게 직접 깨달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복음 15:11 · 본디새김

여기서 「더럽히다」는 신체가 지저분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정결한 것과 구별되는 부정한 상태가 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정결 관념에서 모든 의례적 부정함이 곧 죄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십니다.

사람은 입으로 음식을 먹고, 그 음식은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사람이 입으로 내뱉는 말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나옵니다. 이 두 방향의 차이가 예수님의 설명을 이룹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걸려 넘어진 이유

그때에 제자들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걸려 넘어진 것을 알고 계십니까?」마태복음 15:12 · 본디새김

「걸려 넘어지다」는 조금 불쾌하게 여겼다는 정도로 축소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 반응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뿌리째 뽑힐 것이다.」마태복음 15:13 · 본디새김

여기서 「초목」이 바리새파 사람들 자신인지, 그들이 가르치는 전통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14절에서 눈먼 길잡이들이 등장하므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읽을 근거가 있지만, 그들의 가르침과 분리하기도 어렵습니다.

중심은 분명합니다.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사람들을 이끄는 눈먼 길잡이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이끌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복음 15:14 · 본디새김

이 비유의 날카로운 부분은 길잡이 자신이 눈멀었다는 사실입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은 길잡이를 의지하는데, 길잡이마저 앞을 보지 못한다면 두 사람 모두 위험합니다. 지식이나 가르침 자체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씀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이 그것을 따르는 사람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조금 뒤에 대조를 낳습니다. 30–31절에서는 실제로 눈먼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와지고, 그들은 보게 됩니다.

베드로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이 비유를 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그가 말했다. 「너희도 여태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15:16 · 본디새김

「너희도」라는 말은 앞에서 눈먼 길잡이라 부르신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있습니다. 물론 두 집단의 태도가 같지는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졌고, 베드로는 그 말씀을 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있는 제자들의 이해 부족도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배로 내려가고 뒷간으로 내보내진다」고 일상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17절). 먹은 음식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악한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복음 15:1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먹는 행위에서 말하는 행위로, 그리고 말하는 행위에서 마음으로 시선을 옮기십니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이 나오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5:19 · 본디새김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은 입으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따라서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표현은 이제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모든 악한 행동을 포함하는 설명으로 확장됩니다. 성경의 언어에서 마음은 생각과 의지, 판단과 욕망이 일어나는 인간 내면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19절의 목록에는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처럼 십계명과 겹치는 항목들이 있습니다(출애굽기 20:13–1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만들지 않으시고, 그 계명이 금지하는 행동들이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손을 씻는 행위만으로는 살인과 거짓 증언을 만들어 내는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구약의 모든 음식 규정을 폐지한다는 뜻일까요? 마가복음 7:19에는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하셨다는 서술자의 풀이가 있지만, 마태복음에는 그 문장이 없습니다. 마태는 오히려 논쟁을 시작했던 구체적인 문제로 되돌아갑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마태복음 15:20 · 본디새김

마태복음 15장 자체에서 분명한 결론은 의례적 손 씻기를 하지 않은 채 먹는 일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1절의 원리는 그보다 넓은 신학적 함의를 가질 수 있지만, 이 본문만으로 예수님께서 모든 음식법을 어떤 방식으로 폐지하셨는지까지 확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마태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공동체 바깥에 있는 한 여자를 등장시킵니다.

이스라엘 밖의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조금 더 깊이

13절은 13장의 밀과 가라지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는 가라지를 당장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두라고 하셨는데(13:29–30), 여기서는 뿌리째 뽑힐 것이라고 하십니다. 두 말씀이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13장은 종들이 성급히 뽑을 경우 밀까지 뽑힐 위험을 말하고, 여기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이 결국 뿌리째 뽑힐 것이라는 결과를 선언합니다. 두 말씀 모두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끝까지 같은 운명을 갖지는 않을 것임을 보여 줍니다.

가나안 여자 — 이스라엘의 식탁 밖에서 온 간청

마태복음 15:21–28 본문 →

왜 마태는 그녀를 「가나안 여자」라고 부르는가

그리고 예수는 거기서 나와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물러갔다.마태복음 15:21 · 본디새김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서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로, 고대 페니키아 지역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한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마태는 그녀를 「가나안 여자」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 7:26은 같은 여자를 그리스 사람이며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지리적·문화적 설명 대신 오래된 성경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 땅에 살던 여러 민족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구약에서 그들의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에 미칠 위험이 반복해서 경고되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여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오래된 역사에서 여러 갈등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첫마디가 뜻밖입니다.

보아라, 가나안 여자가 그 지역에서 나와 계속 소리쳐 말했다. 「주님,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제 딸이 심하게 귀신 들려 있습니다.」마태복음 15:22 · 본디새김

「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의 왕권과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담은 칭호입니다. 그런데 이 칭호를 사용하는 사람이 이스라엘 밖에서 온 여자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정체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자신을 도우실 능력이 있는 분으로 믿고 간청합니다.

딸이 고통받고 있는데 어머니는 「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딸의 고통이 어머니 자신의 고통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딸을 고쳐 달라는 간청은 곧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간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는가

그는 그 여자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다가와 그에게 계속 청했다. 「그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치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5:23 · 본디새김

딸의 고통을 호소하는 이 여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흔히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침묵하셨다고 설명하고, 그런 해석은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신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런 의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그 침묵이 여자에게 실제로 하나의 장벽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여자의 딸을 고쳐 주신 다음 돌려보내 달라는 뜻이었는지, 단순히 그녀를 떠나게 해 달라는 요청이었는지는 문장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여자의 소리가 계속 들린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는 점입니다. 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관한 말은 그들의 요청에 없습니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나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내지지 않았다.」마태복음 15:24 · 본디새김

마태복음 10:6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사명을 같은 표현으로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으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8:5–13에서 이미 이방인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15:24를 믿음을 시험하려고 하신 말씀일 뿐 실제 사명과는 관계없는 표현이라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약속 속에서 오신 메시아이시며, 마태복음은 마지막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으로 나아갑니다(28:19).

그 사이에 놓인 이 장면이 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긴장입니다.

자녀들의 빵과 강아지들

여자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여자가 와서 그에게 절하며 말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마태복음 15:25 · 본디새김

그녀의 간청이 더 짧아졌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딸의 사정을 설명했지만, 이제는 그저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자녀들의 빵을 가져다가 강아지들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복음 15:26 · 본디새김

비유 속의 자녀들은 바로 앞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빵은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몫이고, 강아지들은 그 자녀들과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이 말씀이 여자의 입장에서 매우 어렵고 배제적으로 들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됩니다.

이 대화는 몇 갈래로 읽힙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우선적인 위치를 실제로 말씀하시면서 여자의 믿음을 드러내도록 하셨다는 읽기, 예수님의 사역이 이방 사람들에게도 열리는 전환이 극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읽기, 여자의 응답이 예수님의 사명 이해에 변화를 일으키는 장면이라는 읽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그녀를 시험하려는 계획을 세우셨는지, 이 대화를 통해 생각을 실제로 바꾸셨는지는 마태가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어느 한쪽을 본문에서 확인된 사실처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긴장을 부드럽게 지워 버리지 않은 채, 여자가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듣는 것입니다.

여자는 왜 「예, 주님」이라고 대답했을까?

그 여자가 말했다. 「예, 주님. 강아지들도 자기 주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5:27 · 본디새김

그녀는 예수님의 비유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빵이 주어진다는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냅니다.

여자는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 달라고 하지도, 자녀들의 몫을 없애 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주인들의 상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해서 자녀들의 몫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앞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고, 이제 강아지들에게도 「주인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어에서는 「주님」과 「주인」으로 갈라지지만 두 표현은 같은 그리스어 퀴리오스(κύριος)에서 나왔습니다. 그녀가 「주님」이라고 부른 분이 비유 속에서 식탁의 「주인」이라는 이미지와 겹칩니다.

그녀의 말은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절박한 호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이시라면, 그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도 자신과 딸을 살릴 만큼의 자비가 있다고 믿는 고백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가 그 여자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아, 여인이여, 네 믿음이 크다. 네가 바라는 대로 너에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자 그 여자의 딸이 그때부터 나았다.마태복음 15:28 · 본디새김

무엇이 그녀의 믿음을 크게 만드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간청이 집요했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네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녀는 처음에 아무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보내지셨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의 빵에 관한 말씀을 들었을 때에도, 예수님의 자비가 자기 딸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지위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의 식탁에서 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비유를 받아들이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자비를 더욱 깊이 신뢰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자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자비에 기대를 겁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굴욕적인 대우를 감수하도록 요구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권력자가 약한 사람을 모욕해도 좋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특별한 만남에서 예수님과 여자가 나누신 대화와 그 결말을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 딸을 고치십니다. 이것이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결론입니다.

정결함을 논하던 사람들과 자비를 구한 여자

앞부분의 예루살렘에서 온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이 정결한지 판단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로 만들고 있으며,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리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등장한 가나안 여자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도 아니고, 이스라엘과 구별되는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절하며 도움을 청하고, 예수님께서 베푸실 자비를 신뢰합니다. 하나님에 관해 올바른 말을 많이 아는 것과 하나님께 실제로 자신을 맡기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의 특별한 위치가 무의미해졌다고 말하면 본문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내지셨다고 하신 말씀은 철회되었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자의 딸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어진 구원의 은혜가, 그 경계 밖에서 예수님을 믿고 간청하는 사람에게도 미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 가나안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언제나 적대적이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여호수아 2장과 6장에서는 여리고의 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보호를 받습니다. 마태가 이 명칭을 선택한 이유에 관해서는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사이의 긴장을 강조하려는 서술로 보는 해석도 있고, 라합과 같은 구약의 이방인 여성 전통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특정한 연결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마태가 그녀의 출신을 신학적으로 의미 있게 제시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26절의 「강아지들」은 그리스어로 퀴나리아인데, 일반적인 개를 가리키는 퀴온과 형태가 다르며 작은 개나 집 안에서 기르는 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욕적인 의미가 약하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자녀와 강아지가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비유 속 불평등한 관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26절에서 갈리는 세 읽기 가운데 첫째는 바로 앞 24절의 사명 선언을 근거로 하고, 둘째와 셋째는 대화가 여자의 응답을 거쳐 딸의 치유로 끝난다는 흐름을 근거로 합니다.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의 관계에 관해서는, 창세기 12:3에서 여호와야훼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합니다(1:1).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우선적으로 보내지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구원이 여러 민족에게까지 미친다는 전망을 반드시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만으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마태복음은 이후에도 이 문제를 여러 방식으로 다룹니다.

눈먼 길잡이들과 눈을 뜬 사람들

마태복음 15:29–31 본문 →

예수님께서는 왜 다시 산에 앉으셨을까?

가나안 여자의 딸이 고침을 받은 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곁으로 가셔서 산에 올라가 앉으십니다. 마태복음 5:1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러나 5장에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여기서는 사람들이 병든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많은 무리가 말 못 하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과 팔다리가 성치 않은 이들을, 또 그 밖에 많은 이들을 데리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을 그의 발 앞에 던져 놓았다. 그러자 그가 그들을 고쳤다.마태복음 15:30 · 본디새김

「던져 놓았다」는 표현은 많은 사람이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데리고 와 예수님의 발 앞에 놓는 급박한 장면을 그립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 필요한 특별한 자격이나 의례적 준비를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병든 사람들을 데려왔고, 예수님께서 고치셨다고 기록할 뿐입니다.

여기서 앞의 눈먼 길잡이 비유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다고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먼 길잡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반면 실제로 눈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왔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 대조가 마태의 의도적인 구성인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장 안에서 두 장면을 나란히 읽으면, 눈멀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누구에게 나아가는지가 중요한 차이로 드러납니다.

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을까?

그래서 무리는 말 못 하는 이들이 말하고 팔다리가 성치 않은 이들이 낫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눈먼 이들이 보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마태복음 15:31 · 본디새김

9:8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이방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5:29–31 자체는 무리의 민족적 구성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이 무리가 전부 이방인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보여 준 이야기와 함께 읽으면, 이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알려지는 전망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대목은 이사야 35:5–6의 회복 약속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눈먼 사람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며 다리를 저는 사람이 뛰게 될 것을 말씀하고, 이러한 회복은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마태복음에서 그 회복을 예수님께서 행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은 뒤,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30절의 「던져 놓았다」는 그리스어 립토로, 던지거나 내던진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사람들이 병든 이들을 함부로 대했다는 뜻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리를 이방인으로 보는 견해의 배경에는 마가복음 7:31이 이 일대의 사역을 데가볼리 지역과 연결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사흘을 함께 머문 무리와 일곱 광주리

마태복음 15:32–39 본문 →

이번에는 제자들이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기 제자들을 불러 말했다. 「무리를 보니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다. 그들이 벌써 사흘째 나와 함께 머물러 있고 먹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굶주린 채로 보내고 싶지 않다. 길에서 지쳐 쓰러질까 염려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5:32 · 본디새김

14장에서는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리를 보내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실제로 길에서 쓰러진 뒤가 아니라, 그렇게 될 가능성을 미리 염려하십니다. 그들의 현재 상태뿐 아니라 돌아가는 길에서 겪을 어려움까지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막연한 호의가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상황을 살피는 데서 나타납니다.

14장과 같은 「불쌍히 여기다」 동사가 쓰이지만, 이번에는 마태가 그 마음을 서술자의 설명으로 대신하지 않고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들려줍니다.

제자들은 왜 또 빵이 없다고 했을까?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외딴곳에서 이만한 무리를 배부르게 할 만큼 많은 빵이 우리에게 어디서 나겠습니까?」마태복음 15:33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쯤 되는 무리를 먹이셨고, 제자들은 그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기적을 잊어버린 것일까요? 가능한 해석이지만, 마태는 그렇게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충분한 음식을 구할 수 있을지 현실적으로 묻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그들 앞에 이전에도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마태복음 16:9–10에서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따로 상기시키시며, 제자들이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으십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다시 무리를 먹이시는 장면을 따라가면 됩니다.

다섯 개가 아니라 일곱 개입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빵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느냐?」 그들이 말했다.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입니다.」마태복음 15:3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땅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모두 먹고 배불렀다. 그리고 떼어 낸 조각 가운데 남은 것을 큰 광주리 일곱 개에 가득 거두었다.마태복음 15:37 · 본디새김

마태는 오천 명을 먹인 사건과 사천 명을 먹인 사건에서 이 문장을 거의 같은 형태로 사용합니다. 차이보다 공통점을 먼저 보게 하는 반복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 | 오천 명을 먹인 사건 | 사천 명을 먹인 사건 | |---|---|---| | 본문 | 14:13–21 | 15:29–39 | | 빵 | 다섯 개 | 일곱 개 | | 물고기 | 두 마리 | 작은 물고기 몇 마리 | | 무리가 앉은 곳 | 풀 위 | 땅 | | 빵을 떼기 전 | 축복의 기도 | 감사 | | 남은 것 | 광주리 열두 개 | 큰 광주리 일곱 개 | | 남자 수 | 약 오천 명 | 사천 명 | | 여자와 아이 | 계산에서 제외 | 계산에서 제외 |

분명한 것은 두 사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를 충분히 먹이셨고 음식이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빵을 떼는 손과 받아 나누어 주는 손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들고 감사한 뒤 떼어 제자들에게 계속 나누어 주었다. 제자들은 무리에게 주었다.마태복음 15:36 · 본디새김

「계속 나누어 주었다」는 미완료형으로, 빵을 주는 동작이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태는 빵이 늘어나는 순간을 묘사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계속 나누어 주시고 제자들이 무리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충분한 빵도, 그 많은 사람을 먹일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받아 무리에게 전달했고, 모두가 배불리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공급하시고 제자들은 나누어 줍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먹였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능력을 작게 만들지 않습니다.

부스러기를 구하던 여자와 남아도는 빵

가나안 여자는 「주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으로도 자기 딸이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먹이시고, 남은 빵 조각만 큰 광주리 일곱 개를 가득 채웁니다.

이것을 사천 명을 먹인 사건도 이방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음식이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사천 명이 모두 이방인이었다고 기록하지 않으며, 두 사건의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이 연결은 이야기의 배치와 반복되는 빵의 이미지를 따라 읽은 문학적·신학적 해석입니다.

그럼에도 이 두 장면은 서로를 비추어 줍니다.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묻게 하고, 사천 명을 먹인 이야기는 그 자비가 얼마나 풍성하게 나타나는지 보여 줍니다. 자녀들의 빵이 이스라엘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질 때 이스라엘의 몫이 반드시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광주리를 나타내는 단어도 다릅니다. 14장에서는 코피노스, 15장에서는 스퓌리스가 사용되는데, 후자는 비교적 큰 광주리를 뜻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25에서 바울을 성벽 아래로 내려보내는 데 사용된 바구니가 이 단어로 불립니다. 따라서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라는 숫자만으로 어느 사건에서 남은 음식이 더 많았는지 단순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열둘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일곱을 완전함이나 이방 민족들과 연결하는 상징적 해석이 있습니다. 가능성으로 검토할 수는 있지만, 마태는 이 숫자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두 수치로 이스라엘과 이방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정확한 구분을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남겨진 빵 조각들

마태복음 15:1–39 본문 →

마태복음 15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자비가 만나는 자리들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은 손 씻는 문제를 제기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입술로만 공경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며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는 것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밝히셨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보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붙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크게 평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다른 민족으로 옮겨 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예수님을 통해 얼마나 넓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때 문제는 빵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그 빵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주시는가가 중심에 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음식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하나하나 심사하지 않으십니다. 사흘째 함께 머물며 먹을 것이 없어진 사람들을 굶주린 채로 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신 분이, 이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드시고, 감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무리에게 주었습니다. 무리는 배불리 먹었고, 남은 빵 조각들만으로도 일곱 개의 큰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돌려보내신 뒤 배에 올라 마가단 지역으로 떠나십니다.

앞서 한 여자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손에서 떼어 나누어진 빵은 수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였고, 그들이 먹고 난 뒤에도 큰 광주리 일곱 개를 가득 채웠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