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그리스도를 알아보고도 그 길을 막은 사람

마태복음 16장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고백을 한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는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불과 다섯 절 뒤에는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전에는 교회를 세울 바위와 연결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베드로의 고백이 거짓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고백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아는 것과,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가셔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당하셔야 한다는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마태복음 16장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이 장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빵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러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진 듯합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시작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막아서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뒤를 따르려는 사람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는 문제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의 후반부에 이르면 그리스도를 알아본 사람이 예수님의 길을 따를 수 있는가가 중심이 됩니다.

마태복음 16장은 이 두 질문 사이에서 전개됩니다.

읽는 시간 40분소단락 816장 본문 읽기 →

하늘의 낯빛은 알면서 때의 표징은 알아보지 못하다

마태복음 16:1–4 본문 →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함께 찾아왔다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다가와 그를 떠보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그에게 요청했다.마태복음 16:1 · 본디새김

이 두 집단은 유대 사회 안에서도 여러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해석과 전승을 중요하게 여겼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전 제사장 계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8은 특히 죽은 사람의 부활과 천사와 영에 관한 두 집단의 견해 차이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표징을 요구합니다. 신학적인 차이를 논의하는 대신 예수님을 떠보는 일에 함께 참여합니다.

표징을 구한다는 행동 자체가 언제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 표징이 주어지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번 요청의 목적을 처음부터 밝힙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관해 진지하게 배우려고 표징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고, 귀신을 내쫓으셨으며, 적은 양의 빵으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충분한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요구하는 방식의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을 읽는 능력과 하나님의 때를 읽는 능력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저녁이 되면 너희는 말한다. 『하늘이 붉으니 날이 맑겠다.』」마태복음 16:2 · 본디새김
「그리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찌푸려 있으니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한다. 너희는 하늘의 낯빛은 가려 볼 줄 알면서 때의 표징들은 가려 보지 못한다.」마태복음 16:3 · 본디새김

여기서 핵심은 그 기상 관찰이 언제나 정확한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하늘을 보더라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무엇을 뜻하는지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늘의 낯빛을 읽을 줄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요구하는 특별한 증거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에서 관찰하는 하늘입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의미를 판단할 줄 알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떤 때를 알리는지는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때의 표징들」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문맥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대상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마태복음 4:17), 그 나라가 이르렀다는 증거로 귀신을 내쫓는 일을 설명하셨습니다(12:28).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일어난 일들을 자신들의 기대와 기준에 따라 거부한 뒤, 새로운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들이 신앙에 관해 질문하거나 증거를 구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증거만 인정하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요나의 표징만 남겨 두셨을까?

「악하고 간음하는 세대가 표징을 구한다. 그러나 요나의 표징 말고는 그 세대에게 표징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났다.마태복음 16:4 · 본디새김

요나의 표징은 앞서 12:39–40에서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바다 짐승의 배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 있었던 일과 사람의 아들이 땅의 심장부에 머무르실 일을 연결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즉시 입증할 만한 하늘의 표징, 위에서 내려오는 압도적인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가리키는 표징을 말씀하십니다. 이 긴장은 장의 후반부, 베드로의 고백 직후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죽임을 당하시고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밝히실 때 직접적인 말씀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청한 표징을 그 자리에서 보여 주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떠난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6:2 후반부터 16:3의 날씨 말씀에는 중요한 사본 문제가 있습니다.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 등 일부 중요한 고대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고, 다른 사본들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시된 본문에는 이 부분이 실려 있으므로 이 대목을 해설할 수 있지만, 사본 전승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빵을 잊은 제자들 — 기억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16:5–12 본문 →

누룩을 조심하라는데 왜 빵을 걱정할까?

제자들이 건너편에 이르렀을 때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살펴라.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복음 16:6 · 본디새김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의논했다. 「우리가 빵을 가져오지 않았다.」마태복음 16: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험한 영향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빵이 없다는 사실만 생각합니다.

방금 전 예수님께서 누룩을 언급하셨으니, 그들이 왜 그렇게 이해했는지는 짐작할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라는 분명한 대상이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보다 자신들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예수는 그것을 알고 말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에게 빵이 없다고 너희끼리 의논하느냐?」마태복음 16: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잊고 온 책임부터 묻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왜 빵이 없다는 문제에 붙잡혀 있는지 물으시고, 두 사건을 상기시키십니다.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하느냐? 오천 명이 먹은 빵 다섯 개도, 너희가 광주리를 몇 개 거두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느냐?」마태복음 16:9 · 본디새김
「사천 명이 먹은 빵 일곱 개도, 너희가 큰 광주리를 몇 개 거두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느냐?」마태복음 16:10 · 본디새김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부족한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기적을 보여 주지 않으십니다.

이미 경험한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빵이 몇 개였는지, 그리고 남은 광주리를 몇 개 거두었는지 물으십니다. 처음에는 부족했던 빵이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으며, 남은 음식이 광주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의 빵 다섯 개와 광주리들, 사천 명을 먹인 사건의 빵 일곱 개와 큰 광주리들이 구별되어 언급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숫자들의 숨겨진 상징을 풀어 주지 않으십니다. 지금의 문제는 제자들에게 빵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빵의 문제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빵을 공급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누룩을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이 빵을 가져오지 않은 실수를 지적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빵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님을 어떻게 알아차리지 못하느냐?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복음 16:11 · 본디새김
그때에 그들은 그가 빵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말했음을 깨달았다.마태복음 16:12 · 본디새김

마태는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채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그들이 깨달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 장의 후반부에서 베드로가 보일 반응이 보여 주듯, 제자들은 한 가지를 깨달았지만 여전히 더 배워야 합니다.

누룩은 왜 가르침을 가리키는가

누룩은 반죽 속에 들어가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이미지가 앞서 13:33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경고에 사용됩니다. 누룩이라는 사물 자체가 언제나 악이나 선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문맥에서 그 사물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어떤 가르침을 조심해야 합니까? 두 집단의 모든 신학적 견해가 같았던 것은 아니지만, 마태는 이 자리에서 두 집단을 하나로 묶어 경고합니다. 직전 사건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던 태도가 중요한 배경입니다.

이 경고는 단순히 다른 종교 집단의 주장을 듣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어떤 가르침이 사람의 판단을 형성하고, 결국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말씀하시는 뜻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곳에서 질문은 빵에서 예수님 자신에게로 옮겨 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행하신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복음 16:13–17 본문 →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던져진 질문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이르십니다. 갈릴리 북쪽, 헤르몬산 기슭과 요단강 수원지 근처에 있던 지역으로, 이 지명에는 로마 황제의 권력과 헬라·로마 종교문화의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이르러 자기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마태복음 16:1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은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지니셨고(9:6), 안식일의 주인이시며(12:8), 자기 나라에서 마지막 추수를 이루실 분이십니다(13:41).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 칭호의 뜻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로 여기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그들이 말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마태복음 16:14 · 본디새김

이 대답들은 모두 예수님을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특별한 인물로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했던 예언자입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야훼의 권능을 보여 주었던 예언자이며, 말라기 4:5–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날에 앞서 올 인물로 언급됩니다. 예레미야는 심판과 회복을 선포하면서 백성의 거부와 고난을 겪었던 예언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답이 모두 예언자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평범한 사람을 넘어서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서로 다른 설명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복음 16:15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사람들이 누구라고 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누구라고 하는지를 물으십니다. 그리스어 본문은 동사의 형태만으로도 주어를 알 수 있는데도 「너희는」(σύ)을 따로 놓아, 앞의 사람들과 제자들을 대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더 정확하게 정리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는지 말하도록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했다. 「당신은 바로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태복음 16:16 · 본디새김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이름이 아닙니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하며, 히브리어의 메시아에 대응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에게 기름을 붓는 일이 있었고, 다윗 왕조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에 관한 약속이 발전하면서 장차 하나님께서 세우실 기름부음 받은 왕에 대한 기대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특별한 사명을 맡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은 생명 없는 우상과 달리 실제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여호와야훼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예레미야 10:10 등). 베드로가 우상과의 대비를 직접 의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한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아들로 고백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도 성경의 배경이 있습니다. 시편 2:7에서 기름부음 받은 왕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고, 사무엘하 7:14에서도 하나님이 왕의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본문에서 아들이라는 표현은 왕권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아들 되심은 왕의 칭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3:17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셨고, 11:27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특별한 앎과 계시의 관계가 드러났습니다. 14:33에서 바다 위의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이 모든 흐름을 더욱 분명하게 모아 줍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통찰력을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보았는가

예수가 그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살과 피가 이것을 너에게 드러내 보인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6:17 · 본디새김

「살과 피」는 인간을 가리키는 셈어적 표현으로, 인간의 연약함이나 제한된 능력을 강조할 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무리를 먹이시며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경험을 해석하여 참된 고백에 이르게 된 일을 아버지의 드러내심과 연결하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관찰이나 배움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치셨고, 자신이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알아보게 된 일을 그의 뛰어난 지식이나 통찰의 성과로만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과거 판 신과 관련된 숭배 장소가 있었고, 헤롯 대왕은 그 지역에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신전을 세웠습니다. 이후 분봉왕 빌립이 도시를 정비하고 로마 황제를 기리는 가이사랴라는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께서 신전 앞에 서 계셨다거나 특정한 동굴을 배경으로 말씀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으므로, 이교 신앙과 황제 숭배를 역사적 배경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께서 일부러 신전 앞에서 고백을 받으셨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 마태만 이 목록에 예레미야를 명시적으로 포함합니다. 그 이유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예레미야가 겪었던 거부와 고난은 이 장 후반부의 수난 예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레미야라고 생각한 이유가 그와 같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마태복음 16:18–19 본문 →

예수님께서는 왜 시몬에게 새 이름을 말씀하셨을까?

「그리고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바로 베드로다. 그리고 나는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하데스의 문이 그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1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많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나 교황직에 관한 논쟁으로 곧바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야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당신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예수님의 정체를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도 「너는 바로 베드로다」라고 베드로의 정체와 앞으로 맡게 될 역할을 밝히십니다. 두 선언은 서로 마주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한국어 번역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말놀이가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베드로의 이름은 페트로스(Πέτρος), 바위는 페트라(πέτρα)입니다. 그리스어를 읽는 사람은 이름과 바위가 겹치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바위」는 무엇입니까?

바위는 베드로인가, 베드로의 고백인가?

첫째는 베드로 자신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방금 시몬을 베드로라고 부르시고 곧이어 이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가장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베드로를 가리킨다는 것이며 이름과 바위의 말놀이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둘째는 베드로가 고백한 믿음, 곧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베드로가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를 고백했기 때문이라는 데 주목합니다.

셋째는 그 고백의 대상인 예수님 자신을 바위로 보는 해석입니다.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터와 반석으로 묘사되신다는 사실이 근거가 됩니다(고린도전서 3:11; 10:4).

이 견해들은 본문 안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무엇을 「이 바위」의 직접적인 지시 대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차이가 남습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과 권위의 근거로 읽고, 그 직무의 계승을 로마 주교의 수위권과 연결합니다. 정교회와 개신교의 여러 전통에서는 베드로의 고백 또는 그리스도를 토대로 하는 교회의 믿음을 강조하며, 베드로의 역할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로마 주교의 보편적 관할권으로 계승된다는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베드로 자신이 바위라는 읽기를 받아들이면서도 후대 교황직의 계승 주장은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보는 개신교의 해석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사실과 이후의 교회론적 판단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그의 이름을 바위와 연결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후대의 구체적인 교회 조직, 직무 계승의 범위와 방식까지 이 한 구절에서 직접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의 흐름에서 먼저 볼 것은 교회를 세우시는 주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는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속합니다. 베드로에게 중요한 역할이 주어지지만, 교회의 궁극적인 주인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교회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교회」(ἐκκλησία)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마태복음에서 여기서 처음 등장하며, 복음서 전체를 놓고 보아도 마태복음 16:18과 18:17에만 나타납니다. 본래 모임이나 회중,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의 회중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실 교회를 하데스의 문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죽음의 세계를 가리키는 하데스가 서로 마주 놓입니다.

하데스의 문은 왜 교회를 이기지 못하는가

하데스(ᾅδης)는 그리스어로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히브리어 성경의 스올과 대응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구약에서도 죽음의 세계에 문이 있다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욥기 38:17에서 여호와야훼는 욥에게 죽음의 문들이 그에게 드러난 적이 있느냐고 물으시고, 이사야 38:10에서도 죽음의 세계의 문이라는 이미지가 사용됩니다.

고대 도시에서 성문은 도시를 지키고 출입을 통제하는 중요한 구조물이었습니다. 죽음의 세계를 성벽으로 둘러싸인 영역처럼 묘사한다면, 그 문은 죽음의 지배력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데스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은 죽음의 권세가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공동체를 최종적으로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죽음의 권세가 교회를 공격하더라도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성문이 방어 시설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죽음의 세계가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 앞에서 끝까지 버티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해석은 갈리지만, 죽음의 권세가 예수님의 교회를 궁극적으로 이기지 못한다는 선언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약속하신 분이, 바로 뒤에서 자신은 죽임당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모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의 이야기는 바로 그 긴장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그리스도이신지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피하시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교회를 향한 약속과 예수님 자신의 죽음은 서로 분리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늘의 나라 열쇠는 어떤 권위인가

「나는 너에게 하늘의 나라 열쇠를 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무엇을 묶든지 그것이 하늘에서 묶여 있을 것이고, 네가 땅에서 무엇을 풀든지 그것이 하늘에서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16:19 · 본디새김

열쇠를 맡은 사람은 문을 열고 닫을 권한을 갖고, 누구를 들여보낼지 결정하는 책임을 집니다. 이사야 22:15–25에서 여호와야훼는 왕궁을 관리하던 셉나를 대신하여 엘리아김을 세우시고, 그에게 다윗 집안의 열쇠를 맡기시며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22:22). 본래 이 말씀은 다윗 왕궁의 관리 권한에 관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왕궁 열쇠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열쇠 사이에는 권위를 위임한다는 중요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다만 마태가 이사야 22장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묶다」와 「풀다」는 당시 유대인의 율법 해석과 공동체 생활에서 어떤 일을 금지하거나 허용하는 판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징계나 관계 회복에 관한 권위와 연결해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18:18에서도 묶고 푸는 말씀이 반복되는데, 그곳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죄를 범한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직접적인 문맥입니다.

따라서 16:19의 권위를 어떤 영적인 힘을 묶거나 초자연적인 문제를 마음대로 해결하는 능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에게 맡겨지는 권위는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판단과 책임에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땅에서 무엇이든 결정하면 하늘이 무조건 그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뜻일까요? 「하늘에서 묶여 있을 것이고」와 「풀려 있을 것이다」는 미래에 어떤 상태가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이어서, 하늘에서 이미 정해진 일이 땅에서 선언되는 관계를 강조하는 번역도 가능합니다. 분명한 것은 베드로의 권위가 하늘과 분리된 독립적인 권위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대단한 특권이면서 동시에 무거운 책임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판단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강하게 꾸짖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역할을 맡기셨다는 사실이 그 사람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판단한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아버지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를 고백했지만, 아직 그 진리가 어떤 길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바로 그 길을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베드로는 작은 돌이고 페트라는 거대한 바위이므로 완전히 다른 대상을 뜻한다는 설명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을 1세기 그리스어의 확고한 규칙으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낱말은 의미가 겹쳐 사용될 수 있었고, 남성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위해 남성형이 선택되었다는 설명에도 충분한 언어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아람어 이름은 케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는 이 이름을 소개하고 베드로라는 뜻으로 풀어 주며, 바울도 베드로를 게바라고 부릅니다(갈라디아서 1:18 등).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아람어로 하셨다면 이름과 바위에 같은 낱말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실제로 발화된 정확한 아람어 문장은 보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편 가이사랴 빌립보의 동굴이나 이교 신전 자체를 곧바로 「하데스의 문」이라고 단정하는 설명도 있으나, 마태는 예수님께서 특정 동굴을 가리키며 이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으므로 그 지형을 확정적인 해석 근거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하늘에서 묶여 있을 것이고」는 그리스어로 에스타이 데데메논, 곧 미래형 계사와 완료 수동 분사가 결합된 표현이며 「풀려 있을 것이다」도 같은 구조입니다. 그러나 이 문법 구조만으로 하나님과 베드로의 행동 사이에 정확히 어떤 시간적 선후관계가 있는지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부터 — 그리스도는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마태복음 16:20–23 본문 →

왜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십니다(16:20). 베드로의 고백은 아버지께서 드러내 주신 참된 고백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침묵을 명령하십니다.

마태는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한 가지 가능성이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리스도가 어떤 길을 가셔야 하는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칭호의 의미를 자신들이 기대한 방식으로만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곧 베드로가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마태복음의 방향이 바뀌는 문장

그때부터 예수는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밝히기 시작했다.마태복음 16:21 · 본디새김

4:17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때부터 회개하라고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16:21에서는 그때부터 자기의 고난과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밝히기 시작하십니다. 4:17 이후에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사역이 펼쳐졌다면, 16:21 이후에는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고난과 죽음이 명확하게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옵니다.

12장에서 이미 요나의 표징을 말씀하셨지만, 이제 예수님께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밝히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일, 많은 고난을 받으시는 일, 죽임당하시는 일,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는 일이 하나의 문장 안에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만 예고하신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다시 살아나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시 살아나신다는 약속이 포함된 전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음에 관한 말씀에 반응합니다.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무엇을 뜻하는가

「해야 한다」(δέω)로 옮긴 그리스어는 문맥에 따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필요나 당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복음서의 수난 예고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히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사고였다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사건이라는 뜻을 담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행동이 옳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이후에도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의 책임을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뜻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문제와, 그 고난을 일으킨 사람들의 행동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는 구별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꾸짖었을까?

베드로가 그를 따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하며 꾸짖기 시작했다.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복음 16:22 · 본디새김

그는 예수님께 질문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해 달라고 청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꾸짖습니다.

조금 전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제자가, 이제 그분이 가셔야 할 길을 바로잡으려 합니다. 마태는 베드로가 어떤 감정으로 이 말을 했는지 상세히 기록하지 않으므로, 이 반응을 단순히 그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는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실 분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당하셔야 한다는 말씀은 베드로가 이해하던 메시아의 모습과 충돌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베드로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메시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로마를 무너뜨리는 왕을 기대했는지는 이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반응을 단순한 오해로만 다루지 않으십니다.

방금 전의 바위가 왜 걸림돌이 되었는가

그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했다.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마음에 두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6:23 · 본디새김

조금 전 베드로는 하늘 아버지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를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마음에 두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문자적으로 사탄이라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을 가로막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탄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 능력을 사용하여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시험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명을 보호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을 막고 있습니다.

「걸림돌」은 사람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가리킵니다. 바위와 걸림돌은 그리스어에서 같은 낱말이 아니므로 엄밀한 의미의 언어유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분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교회를 세울 바위와 연결된 사람이 이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놓인 걸림돌로 불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신 약속을 여기서 취소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중요한 역할이 그를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판단했다는 비판에서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올바르게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길을 잘못 판단했습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의 뜻밖의 의미

「내 뒤로 물러가라」의 「내 뒤에」는 바로 다음 절 「누구든지 내 뒤에 오려거든」에도 똑같이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단순히 자기 앞에서 사라지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읽을 수도 있지만, 다음 절의 제자도에 관한 말씀과 연결하면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앞에 서서 그분이 가시는 길을 막으려 합니다. 그러나 제자의 자리는 스승의 앞에서 길을 정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스승의 뒤에서 따라가는 자리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실 길을 정해 주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자신의 뒤에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본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길로 그분을 이끌려고 한다면, 그는 더 이상 제자의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한 사람을 꾸짖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분을 따르려는 모든 제자에게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밝히십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16:21은 이사야 52:13–53:12의 고난받는 종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종은 고난을 겪고 버림받지만, 그의 고난은 많은 사람의 죄와 구원이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 구절 하나만으로 고난받는 종의 모든 표현이 어떻게 예수님께 적용되는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마태복음 20:28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가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고난과 많은 사람의 구원이 더욱 명확하게 연결됩니다. 「해야 한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데이이고, 「걸림돌」은 스칸달론이며, 「내 뒤로」와 「내 뒤에」는 모두 오피소 무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에 오너라

마태복음 16:24–26 본문 →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때에 예수가 자기 제자들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내 뒤에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태복음 16:24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태가 이 두 말씀을 연이어 배치한 결과, 베드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와 제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막으려 했지만, 제자는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인생의 고생을 뜻하는가

우리는 흔히 가족을 돌보는 일, 경제적인 어려움, 질병, 직장에서 겪는 고생 등을 자신의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앙적인 인내와 헌신의 의미를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의 본래 의미를 일상의 모든 어려움으로 넓혀 버리면 중요한 부분을 놓칩니다.

당시 십자가는 공개적인 수치와 고통을 동반하는 로마의 처형 도구였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표현은 죽음의 위험과 수치를 감수하는 일을 떠올리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은 그분을 따르는 일 때문에 자신의 안전과 지위,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죽임당하셔야 한다고 밝히신 직후에 나옵니다.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고난 자체를 좋은 것으로 찬양하시지 않습니다. 고통을 찾아 나서거나 자기 생명을 해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중심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며, 그분을 따르기 위해 어떤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자신에 대한 모든 존중을 버리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인하다」(ἀπαρνέομαι)로 옮긴 그리스어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부인하거나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되며, 26:34–35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실 때도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자기 삶의 최종적인 주인이라는 주장을 내려놓는 의미가 담길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생각한 옳은 길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이 충돌하자 자신의 판단을 붙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그 반대의 태도를 요구하십니다. 자신의 판단과 기대를 언제나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따르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자신이 먼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실 것이라고 밝히신 예수님이십니다.

제자에게 요구되는 자기 부인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과 자기 욕망이 충돌할 때, 자신의 뜻보다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이 오히려 잃는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6:25 · 본디새김

예수님을 따르는 일 때문에 죽음의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자기 목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 예수님을 버리고 안전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경우의 최종적인 결과가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숨」(ψυχή)으로 옮긴 낱말은 문맥에 따라 생명, 목숨, 자기 자신 또는 영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육체의 생명을 잃어도 영혼만은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나누어 이해하면 본문이 가진 긴장이 약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 전체를 문제 삼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인간이 자기 생명을 일부러 위험에 빠뜨려야 한다는 명령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조건은 「나 때문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 자체에 어떤 구원의 효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일과 연결하여 목숨을 잃고 찾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온 세상을 얻는 것과 자기 목숨을 잃는 것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을 얻겠느냐? 또 사람이 자기 목숨의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마태복음 16:26 · 본디새김

이번에는 한쪽에 세상 전체가, 다른 한쪽에 한 사람의 목숨이 놓입니다. 첫 질문은 온 세상을 얻더라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둘째 질문은 목숨을 잃은 사람이 그것을 되찾기 위해 내놓을 만한 대가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돈보다 생명이 중요하다는 교훈으로만 읽기에는 문맥이 너무 무겁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길을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그 길이 왜 무의미한 손실이 아닌지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도 손실과 수치를 겪을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공과 실패가 최종적인 판결은 아닙니다.

그 이유가 다음 절에 나옵니다.

마지막에 드러날 영광 —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가

마태복음 16:27–28 본문 →

사람의 아들은 고난받으시지만 영광 가운데 오신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오게 되어 있고, 그때에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6:27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당하셔야 한다고 밝히신 분이, 이제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둘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이시면서 동시에 영광 가운데 오실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이 대목에는 다니엘 7:13–14의 중요한 배경이 있습니다. 다니엘은 밤의 환상 가운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 구름과 함께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 앞에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모습을 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시며 영광과 심판의 권위를 말씀하시는 것은, 다니엘의 환상에 나오는 왕권과 영광의 이미지가 예수님께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강한 연결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영광을 서로 배제되는 것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가 가셔야 할 길에는 둘 다 놓여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갚다」(ἀποδίδωμι)로 옮긴 동사는 마태복음 6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은밀한 행동을 보시고 갚아 주신다는 말씀에도 사용됩니다. 그런데 16:27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각 사람에게 갚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대한 마지막 판단과 보상이 연결된 분이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행실이 언급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인간의 행위로 구매할 수 있다는 의미로 곧바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나무는 열매로 알려지고(7:16–20),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12:50).

행실은 단순히 보상을 계산하는 점수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손실을 겪고 자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은 그런 손실이 최종적인 패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지금 내리는 판단이 마지막 판단은 아닙니다. 동시에 그들의 삶이 예수님께서 장차 이루실 마지막 판단과 연결되어 있기에, 자신의 행동을 가볍게 여길 수 없게 합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을 이들이 있다」는 무슨 뜻일까?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 안에서 오는 것을 보기 전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이들이 있다.」마태복음 16:28 · 본디새김

「죽음을 맛보다」는 죽음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죽기 전에 무엇을 보게 되는지를 두고 해석은 넷으로 갈립니다. 바로 다음 장의 변모 사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및 그분의 통치가 드러나는 사건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을 통한 심판,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마지막에 영광 가운데 오시는 일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라는 시간적 조건과 27절의 영광 가운데 오심이 어떻게 이어지는지가 달라집니다. 변모 사건을 장차 이루어질 영광의 예고로 보는 견해와 부활 이후 예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일로 보는 견해가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어느 사건 하나만으로 16:28의 모든 표현이 어려움 없이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장의 문맥에서 무엇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고난을 예고하시고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뒤,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 안에서 오시는 모습을 보게 될 사람들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고난과 죽음이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 관한 마지막 이야기가 아니라는 전망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건너뛸 수도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니엘 7장 전체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장면은 폭력적인 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앞의 짐승들과 대조됩니다. 또한 다니엘 7:18, 22, 2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 나라를 받게 된다고 설명하므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와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는 중요한 해석 문제입니다. 따라서 다니엘 7장의 본래 문맥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예수님의 재림 장면만을 직접 묘사한 예언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16:28의 네 해석에는 각각 강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변모 사건 해석은 마태복음 17:1이 엿새 뒤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기록한다는 점이 강점이지만, 불과 엿새 뒤의 사건을 두고 「죽음을 맛보지 않을 이들이 있다」고 하신 것이 자연스러운지, 변모가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 안에서 오시는 일과 같은 사건인지가 문제로 남습니다. 부활과 승천의 해석은 바로 앞의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 그리고 28:18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선언하시는 장면과 잘 어울리지만, 「오는 것」이 부활인지 승천인지 그 뒤의 하나님 나라의 권능인지 다시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해석은 일부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시간적 조건과 연결될 수 있으나, 16장에서는 아직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 말씀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으므로 주로 24장과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마지막 영광 가운데 오심의 해석은 27절과 28절을 하나의 연속된 사건으로 읽는다는 강점이 있지만, 그때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에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심각한 긴장을 낳으므로, 당연한 해석이라고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입술과 그분을 따르는 발걸음

마태복음 16:1–28 본문 →

마태복음 16장의 여러 장면을 하나로 이어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고백이 어디까지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처음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하늘의 표징을 요구했고, 제자들은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을 빵의 문제로 들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아버지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를 고백했지만, 그 고백 이후에 더욱 어려운 가르침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예수님을 믿겠느냐는 질문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질문으로 옮겨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올바르게 고백한 사람이, 그분이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는 잘못 판단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버리시면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사명을 이루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고난을 받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길을 가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에 관한 약속도 같은 자리에 놓입니다. 열쇠를 약속받은 베드로조차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권위는 예수님의 길과 분리된 독립적인 힘이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공동체가 그분을 자신의 기대와 목적에 맞추어 움직이게 하려 한다면 베드로가 범했던 오류를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밝히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길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에게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향한 엄중한 책망이었지만, 그 안에는 제자가 있어야 할 자리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뒤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그리스도의 길을 앞에서 정해 주는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모든 제자에게 「누구든지 내 뒤에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가로막으려 했던 바로 그 길이, 이제 제자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