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기적과 제자 파송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분
마태복음 12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은 귀신을 내쫓는 사건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말씀도 아닐지 모릅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사람의 손을 고쳐 주십니다. 그 사람은 말라 오그라든 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손을 뻗자, 다른 손처럼 건강하게 회복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의논합니다.
한 사람은 손을 되찾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손을 고쳐 주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까지 갈라놓았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지킬 것인지, 조금 느슨하게 적용할 것인지에 관한 논쟁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판단의 문제입니다.
누가 죄가 있는 사람이며, 누가 죄가 없는 사람입니까? 무엇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무엇이 악한 일입니까?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을 판단합니까? 그리고 마지막에는 누가 참으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입니까?
마태는 이 질문들을 서로 다른 사건 속에 배치합니다. 곡식밭과 회당에서 시작된 논쟁은 하나님의 종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으로 이어지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둘러싼 충돌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가 뒤따른 후,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 자기 가족을 가리키시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 모든 장면의 한가운데에는 「그는 정의가 승리하게 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부러뜨리지 않고, 연기 나는 등불의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12:20)라는 선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함부로 죄가 있다고 판결하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악을 모른 척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하는 길과 함께 갑니다.
마태복음 12장은 바로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보여 줍니다.
배고픈 제자들이 죄인이 된 이유
문제는 이삭을 뜯은 것이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이다
장면은 곡식밭에서 시작됩니다.
그 무렵 안식일에 예수께서 곡식밭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했습니다.마태복음 12:1 · 두루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께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2:2 · 두루새김
신명기 23:25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갔을 때 손으로 이삭을 뜯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다만 낫을 대어 곡식을 거두어 가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다른 사람의 곡식을 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닙니다.
쟁점은 안식일입니다.
출애굽기 34:21은 밭을 갈거나 거두는 때에도 안식일에는 쉬라고 명령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제자들이 이삭을 뜯는 행위가 안식일에 금지된 노동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사건을 소개하면서 사실 하나를 앞에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규정을 무시하려고 이삭을 뜯은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고팠을 때 다윗이 무엇을 했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마태복음 12: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과 다윗 일행의 배고픔을 바로 그 자리에서 연결하십니다.
다윗은 왜 제사장만 먹는 빵을 먹었을까?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사건은 사무엘상 21: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위협을 피해 도망하던 중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지만 일반적인 빵은 없고, 거룩한 빵만 있었습니다.
이 빵은 하나님 앞에 차려 놓는 빵으로, 레위기 24:5–9에 따르면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먹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다윗에게 그 빵을 내어 줍니다. 사무엘상에는 제사장이 어떤 조건을 확인하고 빵을 내어 주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사건은 다윗이 율법을 무시하고 성소의 빵을 빼앗아 먹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윗의 절박한 필요 앞에서 거룩한 빵이 제공된 이야기입니다.
왜 하필 다윗일까요?
다윗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으로 기억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빵을 먹었던 때에는 왕궁에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에게 쫓기며 배고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지금 사람들의 눈에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배고픔을 다윗의 배고픔과 나란히 놓으시고, 성경 안에 이미 기록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적용할 때 인간의 절박한 필요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묻게 하십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왜 죄가 없는가
「또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기고도 죄가 없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보지 않았느냐?」마태복음 12:5 · 두루새김
이것은 첫 번째 사례와 성격이 다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특별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필요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율법이 정한 정상적인 성전 봉사를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8:9–10에는 안식일에 드리는 추가 제사가 규정되어 있고, 레위기 24:8은 안식일마다 하나님 앞에 빵을 차려 놓도록 명령합니다. 제사장들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성전 봉사에 속하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안다고 해서, 같은 율법 안에 있는 성전 봉사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다.」마태복음 12:6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는 설명을 제시하신 뒤, 바로 그 성전보다 더 큰 것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더 큰 것」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예수님을 통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8절에서 예수님께서 인자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을 보면, 이 비교가 예수님 자신의 권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는 일을 판단하려면, 먼저 그들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를 모르면 죄 없는 사람을 정죄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라는 말의 뜻을 알았더라면, 너희는 죄 없는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복음 12:7 · 두루새김
여기에는 앞의 두 사례를 하나로 묶는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호세아 6:6은 제사 제도 자체를 폐지하라는 선언이 아닙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충실함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호세아 6:4는 그들의 사랑과 신실함을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에 빗댑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제사보다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일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자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감정만이 아니라 사랑과 신실함, 관계에 대한 충실함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충실함을 잃어버렸다면, 제사 행위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 9:13에서도 인용하셨습니다. 그때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의 의미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알았더라면 죄 없는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층 날카롭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쳤고, 그 결과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판결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에서 처음 등장한 잘못된 판결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하찮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그날이 하나님의 뜻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히십니다.
이제 이야기는 곡식밭에서 회당으로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더 큰 것」은 그리스어에서 중성 비교급이 쓰였기 때문에, 두루새김은 「더 큰 분」이 아니라 「성전보다 더 큰 것」이라고 옮겼습니다.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문법 형태만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신 사람과 사람을 죽이려는 사람들
회당에 말라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한쪽 손이 말라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고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됩니까?」마태복음 12:10 · 두루새김
마태는 이 질문의 의도를 숨기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 위해 질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진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붙잡아 끌어올리지 않겠느냐?」마태복음 12:11 · 두루새김
양을 구하는 행위가 안식일 규정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당시에도 논의될 수 있는 문제였으므로, 모든 유대인이 예외 없이 같은 행동을 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이 겨냥하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양을 구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에는 왜 반대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양보다 훨씬 더 귀하다. 그러니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도 된다.」마태복음 12:1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무엇을 해도 되는지에 대한 기준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날이 아닙니다.
여기서 손이 불편한 사람은 당장 생명이 위태롭다고 소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행동을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만 허용되는 응급 처치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일 자체를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선한 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뻗어라.」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른 손처럼 건강하게 회복되었습니다.마태복음 12:13 · 두루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예수를 어떻게 죽일지 의논했습니다.마태복음 12:14 · 두루새김
마태는 긴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회복된 사건과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논을 바로 이어 놓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일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의논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르신 제자들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한 사람들이, 이제 정말로 죄가 되는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독자가 그 차이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두 행동을 나란히 놓습니다.
여기서 다음 질문이 생깁니다. 성전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고,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면,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맞서지 않고 물러가실까요? 마태는 그 이유를 이사야의 오래된 예언에서 찾아 보여 줍니다.
다투지 않는 종이 어떻게 판결을 이기게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물러가셨지만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알고 그곳에서 물러가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따라갔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치셨습니다.마태복음 12:1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과 계속 논쟁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사역을 중단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물러가시는 동안에도 병든 사람들은 회복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알리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단단히 이르십니다. 마태는 이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42:1–4의 말씀을 길게 인용합니다.
「보아라. 내가 택한 내 종이다. 내가 사랑하며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두겠다.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정의를 알릴 것이다.」마태복음 12:18 · 두루새김
이사야 40장 이후에는 바벨론 유배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큰 주제가 전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들과 여러 민족의 권력을 넘어 자신의 통치를 드러내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종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41:8–9에서는 이스라엘과 야곱이 하나님의 종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42:1–4에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시고 자신의 영을 주시는 종이 나타나며, 그가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알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종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명과 연결할지, 그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은 개인으로 이해할지는 해석이 갈리지만, 이 종이 여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마태는 이 예언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18절의 「내가 사랑하며 기뻐하는 사람이다」는 마태복음 3:17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들린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랑받는 아들로 선언되셨고,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 위에 내려왔습니다. 이제 마태는 이사야의 종에 관한 예언을 통해 그 아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역하시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일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라고 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방식으로 사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상한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
「그는 다투지도 않고 고함치지도 않을 것이다. 큰길에서 아무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2:19 · 두루새김
「그는 정의가 승리하게 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부러뜨리지 않고, 연기 나는 등불의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12:20 · 두루새김
상한 갈대는 이미 손상된 갈대입니다. 연기 나는 등불의 심지는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지만 불꽃이 약해진 심지입니다. 둘 다 조금만 힘을 가해도 쉽게 부러지거나 꺼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은 그것들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물러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정의가 승리하게 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계속합니다. 여기서 「정의」는 단순히 사람에게 형벌을 선고하는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민족들 가운데 세우시는 올바른 질서와 공정한 판결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언의 핵심은 하나님의 종이 약하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사명을 맡았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식이 약한 것을 짓밟는 폭력이나 소란스럽게 자신을 과시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앞 장면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의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그들과 힘을 겨루지 않고 물러가셨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마태는 이 장면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상한 갈대와 심지는 이사야가 시적인 말로 그려 낸 모습이므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나 특정한 제자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려는 계획과 사람을 회복시키는 사역이 대조되는 자리에서, 마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방 사람들의 이름이 왜 여기서 등장하는가
이사야 인용의 처음(18절)과 끝에는 이방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방 사람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마태복음 12:21 · 두루새김
지금까지 사건은 유대 지역의 안식일 논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사건을 설명하는 말씀에서 이방 사람들을 언급하며 시야를 크게 넓힙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일이 여러 민족에게까지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여기서 제시되고, 이 전망은 마태복음 마지막 장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28:19)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먼 곳으로 떠나라는 명령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물러나 병든 이들을 고치고 계십니다. 마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상한 갈대를 부러뜨리지 않는 종의 이름에 여러 민족이 희망을 걸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정의」로 옮긴 그리스어는 이사야 42장의 배경에서 올바른 질서와 공정한 판결의 의미를 지닙니다. 21절에는 번역 전통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 42:4의 히브리어 본문은 섬들이 종의 가르침을 기다린다는 내용인데, 그리스어 구약성경은 이를 이방 사람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건다는 방향으로 표현했고, 마태는 이 표현을 따릅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의 종이 이스라엘을 넘어 여러 민족과 관계된다는 점에서는 이어지지만, 기다리는 대상이 가르침인지 이름인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르렀다는 증거
같은 기적을 보고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다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 앞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치셨고, 그 사람은 말하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리가 모두 크게 놀라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닐까?」마태복음 12:23 · 두루새김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왕과 관련된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은 이미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했고, 9:27에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자비를 구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귀신을 내쫓는 것은 귀신들의 우두머리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기 때문이야.」마태복음 12:24 · 두루새김
같은 사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셨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능력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지 못해서 갈등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의미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를 놓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든 편이 갈려 서로 싸우면 망한다. 어느 도시나 집안이든 편이 갈려 서로 싸우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2:25 · 두루새김
사탄이 자기 세력에 속한 귀신들을 계속 내쫓는다면, 자기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셈이 됩니다.
「내가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 쪽 사람들은 누구의 힘으로 내쫓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를 판단하는 재판관이 될 것이다.」마태복음 12:27 · 두루새김
「너희 쪽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는 너희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의 친아들들이라기보다 그들 가운데서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던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편 사람들이 귀신을 내쫓는 일은 인정하면서 예수님의 일만 사탄의 힘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 가운데 귀신을 내쫓는 사람들 자신이 그 판단의 부당함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논리적 반박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이른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을 내쫓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온 것이다.」마태복음 12:28 · 두루새김
마태는 평소 자주 사용하는 하늘의 나라라는 표현 대신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씁니다. 25절의 편이 갈려 서로 싸우는 나라, 26절의 사탄의 나라에 이어 28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하며, 예수님께서는 두 나라의 충돌을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동사 에프타센(φθάνω)은 여기서 이미 도달했음을 나타내며, 두루새김은 이를 「이미 너희에게 온 것이다」라고 옮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젠가 먼 미래에 올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자신이 행하고 계신 일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도달했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은 무엇으로 드러납니까?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자유를 얻습니다.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말하고, 보지 못하던 사람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힘을 발휘하던 자리에서 사람을 해방시키고 계십니다.
힘센 자의 집을 턴다는 말의 뜻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야 누가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빼앗을 수 있겠느냐? 묶어 놓은 다음에야 그 집을 털 것이다.」마태복음 12:29 · 두루새김
누군가가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빼앗고 있다면, 그 사람의 지배력이 더 강한 힘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문맥에서 힘센 사람은 사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것은 사탄의 영역에 들어가 그가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로 묘사됩니다.
이 비유가 강조하는 것은 모든 악의 활동이 그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는 시간표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가 사탄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의 지배가 무너지는 것은 사탄이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강한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고,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흩어 버리는 사람이다.」마태복음 12:30 · 두루새김
이 말씀을 모든 상황에서 자신에게 분명히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곧 적이라는 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사탄의 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모으시는 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으지 않는」과 「흩어 버리는」의 대비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 이야기와도 어울립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악한 영의 일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엄중한 경고를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유대 사회에도 귀신을 내쫓는 행위가 알려져 있었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세기 유대 역사가는 『유대 고대사』 8권 42–49절에서 그러한 사례를 기록합니다.
왜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은 용서받지 못하는가
무서운 말씀 앞에 먼저 놓인 넓은 용서의 선언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모든 죄와 모독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2:31 · 두루새김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죄일까요? 혹시 실수로 그런 죄를 지을 수도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죄의 목록을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이 행하신 해방의 일을 바알세불의 힘이라고 비난한 직후에, 「그러므로」라는 말로 이 경고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먼저 「모든 죄와 모독을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용서의 넓이를 말씀하신 다음, 그 용서와 구별되는 특별히 심각한 모독을 경고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람을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일을 보았고, 그것을 악한 영의 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의 영을 통한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문맥상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은 하나님의 영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행위와 밀접하게 연결되며, 단순한 무지나 순간적인 의심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면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시대에도 오는 시대에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2:32 · 두루새김
왜 인자를 거스르는 말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스르는 말은 그렇지 않을까요?
한 가지 해석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모습이나 행동을 오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이 이루시는 분명한 구원의 일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더욱 근본적인 거부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을 회개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거부하는 태도로 이해합니다. 용서를 받아들이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거부하기 때문에 용서에 이르지 못한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어떤 사람이 어느 시점에 돌이킬 가능성을 영원히 잃는지, 혹은 한 차례의 발언만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지를 자세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의문이나 실수로 내뱉은 모든 불경스러운 말에 똑같은 판정을 내리고 계시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가장 심각하게 거부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실까?
「나무도 좋고 그 열매도 좋다고 하든지, 나무도 나쁘고 그 열매도 나쁘다고 해라. 나무는 그 열매로 알아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33 · 두루새김
언뜻 보면 갑자기 도덕적 교훈으로 옮겨 간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씀은 바로 앞의 논쟁과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열매는 귀신이 들렸던 사람이 자유를 얻고,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말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일을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나쁜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회복이라는 열매를 인정하면서 그 능력의 근원은 악하다고 주장하는 판단의 모순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비판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열매였다면, 이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내뱉은 말이 열매가 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34 · 두루새김
그들의 말은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을 드러냅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은 세례자 요한이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향해 사용했던 말이기도 합니다(마태복음 3:7). 이것은 7:16–20에서 나무를 열매로 알아본다는 가르침과도 연결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말이 중심에 놓입니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과 분리된 단순한 소리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한 쓸모없는 말 하나하나에 대해 심판 날에 해명해야 할 것이다.」마태복음 12:36 · 두루새김
「쓸모없는 말」로 옮긴 원어(ἀργός)는 일하지 않는, 쓸모없는, 효과가 없는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을 가볍게 나눈 모든 일상 대화라고만 이해하면 본문의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일을 왜곡하여 비난한 말들이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한 말은 진실을 뒤집고 사람들을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네가 옳다는 판결을 받을지 죄가 있다는 판결을 받을지는 네 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37 · 두루새김
이것을 사람이 어떤 말을 잘 골라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옳다는 판결을 받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은 그 사람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고, 나무와 열매의 관계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판단과 비난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말이 오히려 자신들이 누구인지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33절은 원문에서 나무를 좋게 만들거나 나쁘게 만들라는 명령형이 쓰입니다. 이것을 실제로 나무의 본성을 바꾸라는 명령보다는, 나무와 열매를 일관되게 판단하라는 요구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두루새김은 「…좋다고 하든지, …나쁘다고 해라」로 옮겨 이 판단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이미 보고도 또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
도대체 어떤 표징을 더 보여 달라는 것인가
그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보여 주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마태복음 12:38 · 두루새김
그들은 바로 앞에서 귀신이 들린 사람이 회복되는 사건을 둘러싸고 예수님과 논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아무 증거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본 일을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만한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표징을 구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요청하는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일을 보고도 그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악하고 간음하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예언자 요나의 표징 말고는 이 세대에게 아무 표징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12:39 · 두루새김
「간음하는 세대」는 문자적인 성적 부도덕에 대한 비난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혼인에 비유하곤 했고, 호세아 2장과 예레미야 3장에서는 다른 신들을 따르는 불충실함이 혼인 관계의 불충실함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자적 언어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거부하는 세대의 불충실함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하나 남기십니다. 요나의 표징입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요나가 큰 바다 짐승의 배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땅속 깊은 곳에 사흘 낮과 사흘 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40 · 두루새김
요나는 처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폭풍 가운데 바다에 던져졌고, 큰 바다 짐승에게 삼켜져 그 배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 머뭅니다(요나 1:17).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버려두지 않으셨고, 결국 그는 다시 육지로 나오게 됩니다(요나 2:10).
「땅속 깊은 곳」(καρδία)은 원문에서 땅의 심장부라고 표현한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죽음과 무덤에 머무는 일을 미리 가리키시는 것으로 이해되며, 마태복음 16:21에서는 자신의 죽음과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더 직접적으로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요나의 표징은 이 한 가지 대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 때에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가 죄 있다고 선언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다.」마태복음 12:41 · 두루새김
요나가 선포하자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했으며, 왕까지도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회개했습니다(요나 3:5–9). 그들은 놀라운 기적을 여러 차례 목격해야만 회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요나의 선포를 듣고 돌이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요나보다 더 큰 것」의 중심은 문맥상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뛰어나다는 것을 자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일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다
「남쪽 나라의 여왕이 심판 때에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가 죄 있다고 선언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다.」마태복음 12:42 · 두루새김
이 여왕은 열왕기상 10:1–13에 등장하는 스바의 여왕입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어려운 질문들을 가지고 멀리서 찾아왔고, 솔로몬의 지혜와 왕국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스바의 여왕은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곳에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계십니다. 먼 곳까지 찾아갈 필요도, 소문에만 의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니느웨와 스바가 이방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에 응답한 사례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하나의 반복이 완성됩니다.
「성전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다」(12:6).
「요나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다」(12:41).
「솔로몬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다」(12:42).
성전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곳이자 예배의 중심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이름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예배하며, 예언자의 말을 듣고, 지혜로운 왕을 통해 기대했던 하나님의 일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제 조금 불편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요나의 사건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하는 것은 구약의 사건이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일을 미리 보여 주는 것으로 새롭게 읽히는 관계입니다. 요나서 자체가 처음부터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언으로 작성되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이 반드시 정확히 72시간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습니다. 일부는 고대의 날짜 계산에서 하루의 일부도 하루로 계산하는 말씨에 주목하고, 다른 해석들은 복음서의 시간 표현을 조화시키는 별도의 설명을 제시합니다. 12:40만으로 그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41절의 「더 큰 것」도 6절처럼 그리스어 중성 비교급이어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난 구원의 현실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여지를 줍니다.
깨끗하게 정돈되었지만 비어 있는 집
더러운 영은 왜 다시 돌아오는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이 나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 영은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며 쉴 곳을 찾지만 찾지 못하고, 자신이 나온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돌아와서 보니 그 집은 비어 있고, 깨끗이 청소되고,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전보다 좋은 상태입니다.
「그러자 그 영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온다. 그 영들은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산다. 그래서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복음 12:45 · 두루새김
흔히 이 말씀을 나쁜 습관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좋은 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교훈으로 설명합니다. 그러한 적용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로 비유를 끝맺으십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거부해 온 세대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내쫓으시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그들 가운데 나타났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대의 위험을 설명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 집은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어 있었습니다.
이전의 악한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변화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상태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형편이 처음보다 나빠진다는 말의 초점은 악한 영의 수가 늘어난다는 계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거부가 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한 가지 서늘한 역설이 있습니다.
더러운 영은 그 집을 여전히 「내 집」이라고 부릅니다. 집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지만, 그곳을 자기 집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영혼의 상태에 관한 자세한 교리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 이 표현은 정돈된 겉모습과 실제 지배 관계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누가 그 집의 주인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이미 왔는데도, 그들은 누구의 지배 아래 살아갈 것인지를 놓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마태는 한 집과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번에는 예수님 자신의 가족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가족인가
바깥에 서 있는 가족들
예수님께서 아직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밖에 서 있고,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 있습니다」라고 알립니다.
마태는 그들이 왜 찾아왔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걱정했는지, 집으로 데려가려 했는지, 단순히 할 말이 있었는지는 여기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는 예수님의 가족과 관련된 다른 설명이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마태의 장면에 적혀 있지 않은 동기까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복음 12:4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족이 누구인지 모르셔서가 아니라,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밝히기 위해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 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마태복음 12:49 · 두루새김
마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제자들을 바라보셨다고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뻗으셨습니다.
이 장의 처음에 한쪽 손이 말라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뻗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손은 건강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두 장면에는 「뻗다, 내밀다」(ἐκτείνω)를 뜻하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쓰였습니다. 이 반복만으로 마태가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대응시켰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 장을 따라 읽어 온 독자에게 두 장면은 의미 있게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한 사람이 손을 뻗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쪽으로 손을 뻗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을 부정하신 것일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 내 형제이며 자매이며 어머니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2:50 · 두루새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버리거나 가족 관계를 부정하셨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족들과 만나기를 거절하셨는지, 그 후에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하시는 일은 혈연관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사람의 범위를 혈연 밖으로 넓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을 설명하면서 형제뿐 아니라 자매도 분명히 언급하십니다. 실제로 제자들의 무리 가운데 누가 있었는지를 이 장면에서 모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 속한 관계는 남성 제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신분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이 기준은 마태복음 7:21과 이어집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기준이 예수님 자신의 가족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말씀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 선언은 선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는 일반적인 윤리 선언과는 다릅니다. 이 장에서 아버지의 뜻은 이미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배고픈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 것,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올바르게 알아보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언제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완벽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이후에도 그들의 오해와 실패를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의 중심은 제자들의 완전한 순종보다, 예수님께서 어떤 관계를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하시는가에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기준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을 자신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면서 악을 이기시는 분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성전과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큰 것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의 영으로 사탄의 지배를 무너뜨리십니다. 그런데 그토록 큰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시는 일은 배고픈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오그라든 손을 회복시키시며, 귀신이 들린 사람을 해방시키시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물러나 사람들을 계속 고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는 일과 사람을 무너뜨리는 일을 구별하십니다.
상한 갈대는 부러뜨리지 않으시지만, 사람을 억압하는 악한 지배는 무너뜨리십니다. 그리고 함부로 죄가 있다고 판결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한 사람들을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악하다고 부른 사람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무관심과 다릅니다.
처음에 던진 물음, 무엇이 그들을 갈라놓았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12:7)라는 말의 뜻을 알지 못했기에, 그들의 판단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을 죄라고 선언하고 마침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논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것과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장은 무조건 더 관대한 사람이 되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예수님께서 실제로 행하신 일을 통해 다시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배움은 더 정확한 판단을 얻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고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시며,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에 맞서셨습니다.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왔다고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 앞에 있는 바로 그 제자들 쪽으로 손을 뻗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마태복음 12장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고발받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가족으로 불리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뻗으신 손은 이제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