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기적과 제자 파송
이리 떼 가운데로 양들을 보내시는 목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을 권위를 주십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들을 일으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양처럼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양에게는 이리를 물리칠 발톱이나 날카로운 이빨이 없습니다. 이리의 공격을 받으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리보다 강한 짐승으로 만들어 보내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양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몸은 죽이지만 목숨은 죽일 수 없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실제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일을 행할 권위를 주셨지만, 그 권위가 세상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권위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왜 그토록 큰 권위를 주시면서도 제자들에게 가장 취약한 존재인 양의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하실까요?
마태복음 10장은 이 역설을 풀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앞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는 무리를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추수의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직접 보내십니다.
그리고 긴 가르침의 마지막에 이르면 또 하나의 뜻밖의 장면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죽은 사람을 일으키고 귀신을 내쫓으라는 명령이 주어졌는데, 마지막에는 찬물 한 잔이 등장합니다.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일에서 찬물 한 잔을 건네는 일까지.
그 사이에 마태복음 10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제자들에게 주어지다
예수는 자기 열두 제자를 불러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다스릴 권위를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것들을 내쫓고 온갖 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칠 수 있게 되었다.마태복음 10:1 · 본디새김
첫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위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특별한 훈련을 통해 스스로 그 능력을 얻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수행한 끝에 영적인 단계에 도달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권위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권위’라는 말은 단순한 힘이나 능력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권한까지 포함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죄를 용서하실 때 사용되었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권위가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독립적으로 능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위로 예수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 권위가 향하는 곳도 분명합니다. 더러운 영들을 내쫓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는 일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권위는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권한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권위입니다.
열두 제자가 열두 사도가 되다
10:1에서는 ‘제자’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10:2에서는 ‘사도’라고 부릅니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는 보냄받은 사람, 사명을 맡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고, 마태복음 전체에서 이 명사가 등장하는 곳은 바로 이 한 구절입니다.
배우는 사람의 자리에서 사명을 맡은 사람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가 되기를 멈추고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따라 배우는 사람들이지만, 이제 예수님의 일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집니다.
열두 명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곧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실 것이므로, 열두 사람을 세우신 일을 이스라엘을 향한 사명과 연결하여 이해할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각 제자를 특정한 지파의 대표로 지정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앞에 등장합니다. 이들은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이 명단에는 두 가지 특별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마태복음 10:3 · 본디새김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은 세금 징수소에 앉아 있던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이제 열두 사도의 명단에도 그 직업이 남아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가 지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가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겨 일부러 기록했다고까지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셨는지 기억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또 다른 이름은 가나나이오스 시몬입니다. ‘가나나이오스’는 가나안 출신이라는 지리적 표현이 아니라, 열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아람어 표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누가복음 6:15에서는 같은 인물을 ‘열심당원 시몬’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소개하지만, 그가 조직화된 특정 정치 집단의 정식 구성원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가나나이오스 시몬과 예수를 넘긴 이스가리옷 사람 유다다.마태복음 10:4 · 본디새김
마태는 명단에서부터 그가 장차 예수님을 넘길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혀 둡니다. 그러면서도 유다만 권위를 받지 못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사명을 맡았다는 사실과 그 사명을 끝까지 신실하게 감당한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뒤에서 예수님께서 끝까지 견디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가라고 하셨을까
예수는 이 열둘을 보내며 그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는 길에 나서지 마라.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 들어가지 마라.」마태복음 10:5 · 본디새김
「도리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복음 10:6 · 본디새김
예수님은 앞서 이방인으로 이해되는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던 분입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많은 사람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사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열두 제자에게는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의 지역으로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지금 제자들에게 맡기시는 사명의 범위와, 마태복음 전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식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전해지는가 하는 문제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 장에서 사명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로 분명하게 제한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마지막 28:19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기록합니다.
두 명령 사이의 관계에는 해석상의 논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이스라엘을 우선하던 사명이 부활 이후 모든 민족으로 확장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두 명령이 마태 공동체의 서로 다른 선교적 상황과 전승을 반영한다고 보는 역사비평적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지금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사명이 분명하게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을 ‘길 잃은 양들’이라고 부르셨을까요?
바로 앞 장에서 그 표현은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는 무리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이 찾아가야 할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이유는 새로운 세력을 확장하거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목자를 필요로 하는 양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도 행하다
「가면서 이렇게 선포하여라.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10:7 · 본디새김
이 선포는 앞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셨던 선포와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던 나라의 소식을 전합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라. 죽은 이들을 일으켜라. 나병 든 이들을 깨끗하게 해라. 귀신들을 내쫓아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복음 10:8 · 본디새김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다만 이 장 자체에는 열두 제자가 실제로 죽은 사람을 일으킨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들이 이 파송에서 각각 어떤 기적을 행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회복의 사역을 이어 가야 한다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받은 것을 자기 소유처럼 팔 수 있는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짧은 말씀은 제자들의 사역 전체를 이해하는 원칙입니다. 그들이 받은 권위는 스스로 만들어 낸 것도, 자신들의 힘으로 획득한 권리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병을 고치는 권위를 받았다고 해서 병든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며 그 능력을 판매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는 권위를 자기 성공의 수단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먼저 주어졌고, 제자들은 그 선물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모든 종교 사역자가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규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다음에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을 만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역을 돈을 받고 판매하는 것과, 사역자가 필요한 먹을 것을 제공받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마련하지 말고 가라
「너희 띠에 넣을 금도 은도 구리도 마련하지 마라.」마태복음 10:9 · 본디새김
「길 갈 때 쓸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마련하지 마라. 일꾼은 자기 먹을 것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10 · 본디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무모하게 길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마련하지 마라’는 말은 길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을 새로 장만하거나 확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의 핵심은 바로 다음 문장, ‘일꾼은 자기 먹을 것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에서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돈으로 팔아 생계를 마련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환대하고 먹을 것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지만, 정작 자신들의 먹을 것은 다른 사람들의 환대에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큰 권위를 주시면서도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강자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사명은 한쪽이 모든 것을 가진 채 다른 쪽에게 베푸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평화가 집에 들어가다
「어느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아라. 그리고 너희가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물러라.」마태복음 10:11 · 본디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머물 집을 찾고, 집에 들어갈 때 인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인사는 단순한 예절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 집이 합당하면 너희 평화가 그 집에 와야 한다. 그러나 합당하지 않으면 너희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와야 한다.」마태복음 10:13 · 본디새김
평화를 마치 움직이는 존재처럼 표현하십니다. 당시 유대인의 인사에서 평화는 단순히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방의 안녕과 복을 바라는 중요한 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금과 은을 많이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군사적인 힘을 가지고 가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전합니다.
‘합당한 사람’이란 재산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뜻한다고 볼 근거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문맥에서는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을 듣는 일이 중요하게 나타나므로, 그 집의 합당함은 제자들의 사명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에서 나오면서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복음 10:14 · 본디새김
발의 먼지를 터는 행위는 관계의 단절이나 책임의 구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마쳤으나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거절하는 사람에게 보복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떠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거절을 가볍게 다루시지도 않습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의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에 내릴 심판이 그 도시에 내릴 심판보다 더 견딜 만할 것이다.」마태복음 10:15 · 본디새김
소돔과 고모라는 창세기 19장에서 나그네에 대한 폭력과 악행 끝에 심판을 받은 도시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도시가 예수님께서 보내신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 거절에 엄중한 책임이 따른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책임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응답을 강제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발과 지팡이에 관한 말씀은 마가복음 6:8–9의 병행 본문과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가는 것이 허용되고 신발을 신으라고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신발과 지팡이도 마련하지 말라는 목록 안에 들어 있습니다. 두 복음서가 파송 준비에 관해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마태는 ‘가지고 가지 마라’보다 ‘마련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용하므로, 이미 가지고 있는 신발과 지팡이까지 반드시 버리라는 뜻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는 양
「보아라, 내가 너희를 양처럼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해져라.」마태복음 10:16 · 본디새김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는 무리를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그들 자신도 양이라고 부르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을 찾아가라고 보내시는 사람들이, 스스로도 이리 떼 앞에서 취약한 양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사람들보다 본질적으로 강한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도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슬기로움과 순수함은 함께 가야 한다
뱀은 창세기 3장에서 간교한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뱀의 모든 특성을 본받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슬기로움을 말씀하십니다. 위험을 알아보고,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지혜입니다.
비둘기는 순수함의 이미지입니다. ‘순수하다(ἀκέραιος)’로 옮긴 원문의 낱말은 섞이지 않은, 순전한, 해로운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고, 여기서는 속임수나 악한 의도에 물들지 않은 태도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슬기로움만 있다면 위험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과 속임수, 부당한 수단까지 사용하려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함만 강조한다면 실제 위험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불필요한 위험 속에 놓이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둘 다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박해받는 상황에서 무조건 정면충돌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뒤에서 예수님은 박해받으면 다른 도시로 달아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악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리 떼 가운데 들어간다고 해서 제자들까지 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리 떼는 단순한 비유로만 남지 않습니다.
넘겨지는 제자들, 그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영
「그런데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기고 자기들의 회당에서 너희를 채찍질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17 · 본디새김
공회가 등장합니다. 회당에서의 채찍질이 등장합니다. 총독과 왕들 앞에 끌려가는 일도 등장합니다.
처음에 맡기신 사명은 이스라엘의 도시와 마을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총독과 왕들 앞에 서는 일까지 말씀하십니다. 당장의 짧은 파송 여행을 넘어, 제자들이 장차 겪게 될 더 넓은 박해의 상황을 바라보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그들과 이방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마태복음 10:18 · 본디새김
‘나 때문에’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단순히 사회적으로 불운한 일을 겪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박해는 총독과 왕들, 이방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는 기회가 됩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길로 나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이 이방 사람들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의 제한 명령을 그 자리에서 바로 취소한 것은 아니지만, 마태는 이스라엘을 향한 첫 파송을 기록하면서도 제자들의 증언이 이방 세계에까지 이르게 될 미래를 함께 내다보게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에 어떻게 말할지 무엇을 말할지 걱정하지 마라. 그때에 너희에게 말할 것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19 · 본디새김
권력자들 앞에 끌려간 제자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잘못 말하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하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20 · 본디새김
예수님은 그들이 권력자들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매를 맞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위험의 제거보다 위험 속에서의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약속하십니다.
다만 이 말씀을 모든 설교나 연설에서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박해받아 권력자들 앞에 넘겨지는 특별한 상황에서, 자신의 말솜씨와 능력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시고, 아버지의 영이 그들을 도우십니다.
가족도 등을 돌릴 수 있다
그런데 박해는 공회와 총독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기고 아버지가 자식을 넘길 것이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맞서 일어나 그들을 죽일 것이다.」마태복음 10:21 · 본디새김
이 장 처음에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제는 형제가 형제를 넘기고, 아버지가 자식을 넘깁니다.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의 권한 아래 넘겨주는 행동이 반복되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이 그 행동의 주체가 됩니다.
공적인 기관에서의 박해는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에게서 넘겨지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능성까지 감추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딘 바로 그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다.」마태복음 10:22 · 본디새김
‘모든 사람’은 세상의 모든 개인이 예외 없이 제자들을 미워한다는 통계적 진술이 아니라, 박해와 적대가 여러 방향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처음부터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견디라고 하십니다.
견딘다는 것은 견뎌야 할 어려움이 있다는 뜻이고,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향한 충실함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 — 어려운 약속
「그런데 이 도시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도시로 달아나라.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 너희가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결코 다 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23 · 본디새김
앞부분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험을 일부러 찾아가거나, 반드시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버티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달아나는 것도 허용하십니다. 앞에서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고 하신 말씀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는 마태복음에서 해석이 가장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표적인 해석은 예수님의 부활과 높여지심,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예수님의 마지막 재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으로 나뉩니다. 어느 한 해석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특정한 연도를 약속하셨다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아무런 시간적 의미가 없는 표현이라고 쉽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박해 속에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들은 한 도시에서 거절당하면 다른 도시로 갈 수 있고, 그들의 사명은 사람의 아들의 권위와 앞으로 일어날 하나님의 일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에서는 이와 비슷한 박해의 경고가 13장의 종말 담화에 놓여 있지만, 마태는 그것을 제자들을 보내시는 말씀 안에 배치합니다. 제자들의 사명이 한 번의 여행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증언과 고난의 길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배열입니다. 23절의 세 해석은 각각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니엘 7:13–14에서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통치권을 받는 장면과 연결하여, 예수님께서 왕적 권위를 받으시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둘째는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사건을 사람의 아들의 심판과 권위가 역사 속에서 나타난 일로 봅니다. 셋째는 마태복음 다른 곳에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일이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근거로 마지막 재림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마지막 재림으로 이해하면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다 돌기 전이라는 시간 표현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첫 세기 안의 사건으로 이해하면 마태복음 다른 곳에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장면이 최종적인 심판과 연결되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문제로 남습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않고 노예가 자기 주인보다 높지 않다.」마태복음 10:24 · 본디새김
제자와 선생.
노예와 주인.
두 관계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제자가 선생을 닮아 간다고 말합니다.
「제자는 자기 선생처럼 되면 충분하고, 노예는 자기 주인처럼 되면 충분하다. 집안의 주인을 베엘제불이라 불렀다면 그 집안 사람들을 얼마나 더 그렇게 부르겠느냐?」마태복음 10:25 · 본디새김
앞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이어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으므로 제자들도 고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으므로 제자들도 그 나라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다른 측면에서도 예수님을 닮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비난받는 일입니다.
‘베엘제불’은 복음서에서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와 연결되는 이름입니다. 정확한 어원과 역사적 사용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을 악한 세력과 연결하여 모욕하는 호칭입니다. 앞 장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신다고 주장했고, 이제 예수님은 그런 비난이 제자들에게도 향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만을 닮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 놓일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 참새와 머리카락의 이야기
「그러므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덮여 있는 것 가운데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 가운데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26 · 본디새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조금 뜻밖입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숨겨진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거짓된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왜곡되고, 그들의 행동이 악한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감추어져 있는 진실이 영원히 감추어진 채 남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최종적인 진실을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둠 속에서 말하는 것을 빛 가운데서 말하여라. 그리고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복음 10:27 · 본디새김
어둠과 빛.
귓속말과 지붕 위의 선포.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집에는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는 평평한 지붕이 흔했으므로, 지붕 위에서 선포한다는 표현은 감추지 않고 널리 알리는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자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진실을 영원히 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니
「몸은 죽이지만 목숨은 죽일 수 없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도리어 게헨나에서 목숨과 몸을 함께 없앨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여라.」마태복음 10:28 · 본디새김
몸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작은 위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위협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과 궁극적인 심판의 권한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최종적인 운명까지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목숨’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프쉬케(ψυχή)는 문맥에 따라 생명, 목숨,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단어를 언제나 몸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불멸의 영혼이라는 의미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목숨과 몸이 함께 없어질 수 있다고 말하므로, 중심은 인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철학적 설명보다 인간의 권한과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을 대조하는 데 있다고 보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목숨과 몸을 함께 없앨 수 있는 이는 문맥에서 궁극적인 심판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직접 명시되지 않으므로 악한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 온 소수의 해석도 있지만, 게헨나에서 최종적인 심판을 행할 권위라는 맥락을 고려하면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뒤, 부드러운 이미지로 돌아오십니다.
참새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와 무관하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아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리고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와 무관하게 땅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마태복음 10:29 · 본디새김
아사리온은 로마의 작은 동전 단위였습니다. 참새는 값이 비싸지 않은 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참새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참새는 실제로 땅에 떨어질 수 있지만, 그 일이 아버지와 무관하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이 표현은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작은 새의 운명까지 하나님의 돌보심과 지식 밖에 있지 않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은 ‘너희 아버지 없이’라는 간결한 표현을 사용하므로, 하나님의 뜻과 지식, 돌보심 가운데 어느 측면을 더 강조할 것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명도 아버지께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너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져 있다.」마태복음 10:30 · 본디새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머리카락 수를 관리하신다는 사실 자체를 설명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세밀하게 알고 계신지를 보여 주는 과장된 이미지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와 무관하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낫다.」마태복음 10:31 · 본디새김
아버지가 돌보신다면 왜 박해를 당합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제로 죽임을 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께서 그들을 돌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반드시 막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새와 머리카락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바꾸면, 박해와 죽음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앞의 말씀과 충돌하게 됩니다.
세상은 제자들을 하찮게 여기고, 미워하고 박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을 의지력으로 이겨 내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의 힘만 바라보지 말고 자신들을 알고 계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고난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그들의 생명이 아버지께 잊히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는 사람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다.」마태복음 10:32 · 본디새김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다.」마태복음 10:33 · 본디새김
사람들 앞에 서 있는 제자와, 하늘의 아버지 앞에 서 계신 예수님. 두 장면에서 시인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이 대칭으로 되풀이됩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종교적인 자기소개를 공개적으로 했는지 여부만을 판정하는 규칙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앞의 문맥에는 박해와 죽음의 위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이 미워하고, 가족이 등을 돌리고, 권력자들에게 끌려갈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숨기거나 부인하고 싶은 유혹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상황에서 자신을 시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 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의 아버지 앞에서 그들의 관계를 인정하거나 부인하실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관한 매우 높은 선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험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말라고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담대한 성격을 가진 사람만이 참된 제자라는 뜻이 아니라, 위험 속에서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버리지 않는 충실함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그 충실함이 때로 가장 가까운 관계와 충돌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평화가 아니라 검을 가져왔다니
「내가 땅에 평화를 가져오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를 가져오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가져오러 왔다.」마태복음 10:34 · 본디새김
예수님은 앞에서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든 평화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산상 설교에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평화가 아니라 검을 가져오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두 구절의 ‘평화’는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평화는 좋은 것이고 다른 평화는 나쁜 것이라고 단어를 나누어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는 사람을 자기 아버지와, 딸을 자기 어머니와, 며느리를 자기 시어머니와 갈라놓아 맞서게 하려고 왔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35 · 본디새김
「그리고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사람들이다.」마태복음 10:36 · 본디새김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전쟁터가 아닙니다.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제 칼을 들고 가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 때문에 가족 안에서도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미가 7:6과 직접 연결됩니다. 미가는 사회의 도덕적 붕괴로 가족 관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탄식했고, 예수님은 그 표현을 자신을 따르는 일이 가족 안에서 서로 다른 반응을 일으켜 생기는 갈등에 적용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족 간의 적대감을 좋은 것으로 여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일부러 가족을 분열시켜야 한다는 명령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선택이 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그 결과 가장 가까운 관계도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왜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걸맞지 않다. 그리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걸맞지 않다.」마태복음 10:37 · 본디새김
이 말씀을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으면,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부모 공경을 중요하게 다루신 말씀과 충돌합니다(마태복음 15:4–6; 19:19).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일이 다른 관계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존경하는 교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우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라고만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권위가 매우 높게 제시되는 자리입니다.
다만 이 말씀을 가족에게 가혹하게 행동하거나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회피할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생기는 경우에도 예수님을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걸맞지 않다.」마태복음 10:38 · 본디새김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표현을 흔히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오래 감당해야 하는 고생을 뜻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십자가형은 로마가 반역자나 노예 등에게 가하던 잔혹하고 공개적인 처형 방식으로, 죽음뿐 아니라 공개적인 수치와 굴욕을 동반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말은 자신의 생명과 사회적 지위, 명예까지 잃을 수 있는 길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목숨을 찾은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은 그것을 찾을 것이다.」마태복음 10:39 · 본디새김
‘찾다’와 ‘잃다’가 서로 뒤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에서 박해받으면 다른 도시로 달아나라고 하셨으므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일을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더 높은 가치로 삼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면 당장은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반대로 예수님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감당하는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가 참된 생명을 찾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목숨은 살아 있는 시간의 길이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운명 전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현재의 삶을 지켜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누구에게 맡기느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12:51–53의 병행 본문에서는 같은 주제가 ‘분열’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미가 7장은 신실한 사람이 사라지고, 지도자들이 뇌물을 받고,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려 하다가 마침내 아들이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는 사회를 묘사합니다. 미가의 본래 문맥에서 이것은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공동체의 비참한 현실이며, 예수님은 그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둘러싼 갈등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십니다. 또 마태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으므로, 이 말씀을 처음 듣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우선 로마의 처형과 굴욕을 떠올리게 하는 현실적인 이미지였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끝까지 읽는 독자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나중에 실제로 걸으시는 십자가의 길과 다시 연결하게 되는데, 이것은 후대 독자가 마태복음 전체를 통해 발견하는 정경적 연결입니다.
찬물 한 잔을 건네는 사람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복음 10:40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사람들은 그 제자들을 받아들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행동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행동과 연결되는 것은 제자들 자신의 지위가 본래 높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보내신 분이 누구신가 하는 사실 때문입니다. 파송받은 사람은 자신만의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낸 사람을 대표하여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는 이유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의 삯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의인을 의인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의 삯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10:41 · 본디새김
‘예언자라는 이유로’는 단순히 물이나 잠자리를 제공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가 맡은 사명과 그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존중하여 환대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예언자의 삯’이나 ‘의인의 삯’이 정확히 어떤 보상인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들과 같은 보상에 참여한다는 의미로도, 그들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행동 역시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제자라는 이유로 찬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면—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그가 자기 삯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10:42 · 본디새김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작은 이들이 어린아이의 이미지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문맥에서는 ‘제자라는 이유로’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파송받은 제자들 가운데 낮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에게 주는 것은 찬물 한 잔입니다. 많은 돈이 드는 일도, 특별한 종교적 능력이 필요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행동이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적을 행하는 일과 물을 주는 일이 언제나 같은 행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명에 참여하는 길은 특별한 권위를 받은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를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먹을 것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찬물 한 잔을 건넵니다.
찬물 한 잔
찬물 한 잔은 이 장의 처음 물음에 답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다스릴 권위를 주셨지만, 그 권위는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힘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고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작 먹을 것을 제공받아야 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집에서는 떠나야 하고, 박해를 피해 달아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연약함을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양처럼 보내진 제자들이 살아가게 될 정상적인 현실로 말씀하십니다.
다만 이 장을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사명의 증거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무책임 때문에 겪는 어려움까지 모두 예수님 때문에 받는 박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 때문에’, ‘내 이름 때문에’ 받는 박해를 말씀하시고, 그 속에서도 슬기로움과 순수함을 함께 요구하십니다.
그 장면에는 큰 군중도 없습니다. 병이 기적적으로 낫는 모습도 없습니다. 귀신들이 물러가는 소리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진 작은 제자 하나가 있고,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물을 가져와 그에게 마시게 합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세상을 향해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들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작은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그들의 권위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권위는 그들을 다른 사람의 도움조차 필요 없는 강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길을 떠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받아들일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누군가 내어 줄 찬물 한 잔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한 잔의 물도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