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기적과 제자 파송
늑대 떼 한가운데로 양들을 보내시는 목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을 권한을 주십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들을 일으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양처럼 늑대 떼 한가운데로 보낸다.」
늑대와 양이 맞서면 어느 쪽이 더 강하겠습니까? 양에게는 늑대를 물리칠 발톱이나 날카로운 이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늑대보다 강한 짐승으로 만들어 보내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양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실제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일을 할 권한을 주셨지만, 그 권한이 세상에서 안전한 삶을 보장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권한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왜 그토록 큰 권한을 주시면서도 제자들에게 가장 약한 존재인 양의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하실까요?
마태복음 10장은 이 역설을 풀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앞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는 무리를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추수의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청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직접 보내십니다.
처음에는 죽은 사람을 일으키고 귀신을 내쫓으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긴 가르침의 마지막에는 찬물 한 잔이 등장합니다.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일에서 찬물 한 잔을 건네는 일까지.
그 사이에 마태복음 10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제자들에게 주어지다
예수께서는 자기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영들을 내쫓고 온갖 병과 온갖 몸의 약함을 고칠 권한을 주셨습니다.마태복음 10:1 · 두루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맡기십니다. 마태는 제자들이 특별한 훈련을 통해 스스로 그 능력을 얻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수행한 끝에 영적인 단계에 도달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권한을 주셨습니다.
「권한」(ἐξουσία)으로 옮긴 낱말은 단순한 힘이나 능력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권한까지 포함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죄를 용서하실 때 사용되었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이제 그 권한이 제자들에게 주어지지만, 그들이 예수님과 별개로 능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예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 권한이 향하는 곳은 더러운 영들을 내쫓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는 일입니다. 제자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권한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권한입니다.
열두 제자가 열두 사도가 되다
마태는 10:1에서 「제자」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10:2에서는 「사도」라고 부릅니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는 보냄받은 사람, 사명을 맡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마태복음 전체에서 이 명사가 등장하는 곳은 바로 이 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배우며 따르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자이기를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따라 배우면서, 예수님의 일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집니다.
열두 명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곧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실 것이므로, 열두 사람을 세우신 일은 이스라엘을 향한 사명과 연결하여 이해할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각 제자를 특정한 지파의 대표로 정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라고 불리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앞에 등장합니다. 이들은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명단에는 두 가지 특별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마태복음 10:3 · 두루새김
마태에게는 「세리」라는 직업이 함께 기록됩니다.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은 세금 징수소에 앉아 있던 마태를 부르셨는데, 열두 사도의 명단에도 그 직업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마태가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겨 일부러 기록했다고까지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셨는지 기억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열성적인 사람이라 불린 시몬, 그리고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나중에 예수를 넘겨준 사람입니다.마태복음 10:4 · 두루새김
「열성적인 사람」에 해당하는 원문의 가나나이오스(Καναναῖος)는 가나안 출신이라는 지리적 표현이 아니라, 열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아람어 표현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됩니다. 누가복음 6:15에서는 같은 인물을 「열심당원 시몬」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소개합니다. 다만 그가 조직화된 특정 정치 집단의 정식 구성원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유다가 나중에 예수님을 넘겨줄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단에서부터 밝혀 둡니다. 마태는 유다만 권한을 받지 못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사명을 맡았다는 사실과 그 사명을 끝까지 충실하게 감당한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뒤에서 예수님께서 끝까지 견디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가라고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이 열두 사람을 보내며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마태복음 10:5 · 두루새김
「오히려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복음 10:6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오늘날 독자에게 당혹스럽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이방 사람으로 이해되는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고, 동쪽과 서쪽에서 많은 사람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사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지금 제자들에게 맡기시는 사명의 범위와, 마태복음 전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식이 결국 누구에게 전해지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은 사명을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로 제한하십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마지막 28:19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기록합니다.
두 명령 사이의 관계에는 해석상의 논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활동하실 때 이스라엘을 우선하던 사명이 부활 이후 모든 민족으로 넓어진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두 명령이 마태 공동체의 서로 다른 선교 상황과 전승을 반영한다고 보는 역사비평적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지금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사명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을 「길 잃은 양들」이라고 부르셨을까요? 바로 앞 장에서 양은 목자 없이 시달리는 무리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이 찾아가야 할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이유는 새로운 세력을 넓히거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목자를 필요로 하는 양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도 행하다
「가면서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전해라.」마태복음 10:7 · 두루새김
이 선포는 앞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셨던 선포와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소식을 만들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던 나라의 소식을 전합니다.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죽은 사람들을 일으키고, 나병에 걸린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고, 귀신들을 내쫓아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복음 10:8 · 두루새김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다만 이 장 자체에는 열두 제자가 실제로 죽은 사람을 일으킨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들이 이 파송에서 각각 어떤 기적을 행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회복의 일을 이어 가야 한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받은 것을 자기 소유처럼 팔 수 있는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짧은 말씀은 제자들의 사역 전체를 이해하는 원칙입니다. 그들은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자신들의 힘으로 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권한을 자기 재산처럼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병을 고치는 권한을 받았다고 해서 병든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며 그 능력을 판매할 수 없고, 그 힘을 자기 성공의 수단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그들이 받은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모든 종교 사역자가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규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다음에 일꾼이 먹을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역을 돈을 받고 판매하는 것과, 사역자가 필요한 먹을 것을 제공받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마련하지 말고 가라
「허리띠에 넣을 금화나 은화나 구리 동전을 마련하지 마라.」마태복음 10:9 · 두루새김
「여행용 자루나 속옷 두 벌, 신발이나 지팡이도 마련하지 마라. 일꾼은 먹을 것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10 · 두루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무모하게 길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마련하지 마라」는 말은 길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을 새로 장만하거나 확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령의 핵심은 바로 다음 문장, 「일꾼은 먹을 것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에서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사역을 돈으로 팔아 생계를 마련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먹을 것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지만, 정작 자신들의 먹을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맞이와 도움에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큰 권한을 주시면서도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강자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명은 한쪽이 모든 것을 가진 채 다른 쪽에게 베푸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평화가 집에 들어가다
「어느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맞아들일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아라.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 사람의 집에 머물러라.」마태복음 10:11 · 두루새김
「너희를 맞아들일 만한 사람」이란 재산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뜻한다고 볼 근거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문맥에서는 제자들을 맞아들이고 그들의 말을 듣는 일이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 집이 맞아들일 만한 집인지는 제자들의 사명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집에 들어갈 때 평화를 빌며 인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집이 너희를 맞아들일 만하면 너희가 빌어 준 평화가 그 집에 이르도록 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오도록 두어라.」마태복음 10:13 · 두루새김
평화를 마치 움직이는 존재처럼 표현하셨지만, 어떤 신비한 물질이나 에너지가 집으로 들어갔다가 되돌아오는 현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인사에서 평화는 단순히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방이 평안하고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중요한 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금화와 은화도, 군사적인 힘도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전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맞아들이지도 않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않으면, 그 집이나 도시를 떠날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복음 10:14 · 두루새김
발에 묻은 먼지를 터는 행위는 관계의 단절이나 책임의 구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마쳤으나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거절하는 사람에게 보복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떠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심판의 날에는 그 도시가 받을 심판보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받을 심판이 더 견딜 만할 것이다.」마태복음 10:15 · 두루새김
소돔과 고모라는 창세기 19장에서 나그네에 대한 폭력과 악행 끝에 심판을 받은 도시들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제자들을 맞아들이지 않을 때 그 거절에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강력한 권한을 주셨지만, 거절한 사람을 마음대로 벌할 권한까지 주신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책임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응답을 강제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발과 지팡이에 관한 말씀은 마가복음 6:8–9의 같은 장면과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가는 것이 허용되고 신발을 신으라고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신발과 지팡이도 마련하지 말라는 목록 안에 들어 있습니다. 두 복음서가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마태의 원문은 가지고 가지 말라는 표현보다 마련하지 말라는 표현을 사용하므로, 이미 가지고 있는 신발과 지팡이까지 반드시 버리라는 뜻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늑대 떼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양
「보아라, 내가 너희를 양처럼 늑대 떼 한가운데로 보낸다. 그러니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해라.」마태복음 10:16 · 두루새김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는 무리를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그들 자신도 양이라고 부르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을 찾아가라고 보내시는 사람들이, 스스로도 늑대 떼 앞에서 약한 양인 것입니다.
제자들도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얻는 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슬기로움과 순수함은 함께 가야 한다
뱀은 성경에서 항상 좋은 이미지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이 교활한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뱀의 모든 특성이 아니라 슬기로움, 곧 위험을 알아보고 상황을 판단하고 알맞게 행동하는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순수해라」(ἀκέραιος)로 옮긴 원문의 낱말은 섞이지 않은, 해로운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으며, 여기서는 속임수나 악한 뜻에 물들지 않은 태도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슬기로움만 있다면 위험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과 속임수, 부당한 수단까지 사용하려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함만 강조한다면 실제 위험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불필요한 위험 속에 놓이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둘 다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박해받는 상황에서 무조건 정면충돌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뒤에서 예수님은 박해받으면 다른 도시로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악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늑대 떼 한가운데로 들어간다고 해서 제자들까지 늑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늑대 떼는 단순한 비유로만 남지 않습니다.
넘겨지는 제자들, 그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영
「사람들을 조심해라. 그들이 너희를 지역 재판정에 넘기고 자기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마태복음 10:17 · 두루새김
이제 예수님의 말씀이 훨씬 구체적으로 바뀝니다. 처음에 맡기신 사명은 이스라엘의 도시와 마을을 찾아가는 일이었는데, 이제는 총독과 왕들 앞에 서는 일까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장의 짧은 파송 여행을 넘어,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더 넓은 박해의 상황을 바라보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그들과 이방 사람들에게 증언하기 위해서다.」마태복음 10:18 · 두루새김
「나 때문에」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단순히 사회적으로 불운한 일을 겪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박해는 총독과 왕들, 이방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는 기회가 됩니다. 처음에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장 안에서 이미 사명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앞의 제한 명령을 그 자리에서 바로 취소한 것은 아니지만, 마태는 제자들의 증언이 이방 세계에까지 이르게 될 미래를 함께 내다보게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겨줄 때 어떻게 말할지, 무엇을 말할지 걱정하지 마라. 그때 너희가 할 말이 주어질 것이다.」마태복음 10:19 · 두루새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20 · 두루새김
예수님은 그들이 권력자들에게 끌려가지 않도록, 매를 맞지 않도록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위험을 없애는 것보다 위험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강조하는 약속입니다. 다만 이 말씀을 모든 설교나 연설에서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박해받아 권력자들 앞에 넘겨지는 특별한 상황에서, 자신의 말솜씨와 능력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을 보내시는 분은 예수님이고, 그들이 위험 속에서 증언할 때는 아버지의 영이 그들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족도 등을 돌릴 수 있다
그런데 박해는 지역 재판정과 총독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는 형제를, 아버지는 자녀를 넘겨주어 죽게 할 것이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맞서 일어나 부모를 죽게 할 것이다.」마태복음 10:21 · 두루새김
이 장 처음에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제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의 권한 아래 넘겨주는 일이 등장합니다. 공적인 기관에서의 박해도 두렵지만, 가족에게서 넘겨지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능성까지 감추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10:22 · 두루새김
「모든 사람」은 세상의 모든 개인이 예외 없이 미워한다는 통계적 진술이 아니라, 박해와 적대가 여러 방향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견디라고 하십니다. 견딘다는 것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향한 충실함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까지 — 어려운 약속
「한 도시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박해하면 다른 도시로 피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인자가 올 때까지 너희가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다 돌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23 · 두루새김
앞부분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위험을 일부러 찾아가거나 반드시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버티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피하는 것도 허용하십니다. 이는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는 말씀과 잘 어울립니다.
어려운 것은 「인자가 올 때까지」입니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서 해석이 가장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의 부활과 높여지심,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예수님의 마지막 재림 가운데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두고 해석이 나뉩니다. 이 차이에 따라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다 돌기 전이라는 시간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지가 달라집니다. 어느 한 해석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박해 속에서도 계속되고, 한 도시에서 거절당하면 다른 도시로 갈 수 있으며, 그 사명은 인자의 권위와 앞으로 일어날 하나님의 일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에서는 이와 비슷한 박해의 경고가 13장의 마지막 때에 관한 가르침에 놓여 있지만, 마태는 그것을 제자들을 보내시는 말씀 안에 배치합니다. 제자들의 사명이 한 번의 여행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계속될 증언과 고난의 길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10:23의 세 해석은 각각 이런 근거를 가집니다. 첫째는 다니엘 7:13–14에서 인자가 하나님께 나아가 다스릴 권한을 받는 장면과 연결하여, 예수님께서 왕의 권위를 받으시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둘째는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사건을 인자의 심판과 권위가 역사 속에서 나타난 일로 이해합니다. 셋째는 마태복음 다른 곳에서 인자가 오시는 일이 마지막 때의 사건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마지막 재림으로 이해하면 시간 표현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첫 세기 안의 사건으로 이해하면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 인자가 오시는 장면이 최종 심판과 연결되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특정한 연도를 약속하셨다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아무런 시간적 뜻이 없는 표현이라고 쉽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않고, 종이 자기 주인보다 높지 않다.」마태복음 10:24 · 두루새김
예수님은 분명한 위아래가 있는 두 관계를 나란히 놓으십니다.
「제자는 자기 선생처럼, 종은 자기 주인처럼 되면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마저 바알세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사람들을 얼마나 더 그렇게 부르겠느냐?」마태복음 10:25 · 두루새김
앞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이어받아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다른 측면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닮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비난받는 일입니다.
「바알세불」은 복음서에서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와 연결되는 이름입니다. 정확한 어원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을 악한 세력과 연결하여 모욕하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앞 장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의 우두머리의 힘으로 귀신들을 내쫓으신다고 주장했는데, 이제 그런 비난이 제자들에게도 향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반드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불행한 상황이 아니라 제자가 선생처럼 되는 일과 연결하십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 참새와 머리카락의 이야기
「그러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덮여 있는 것은 모두 드러나고, 숨겨진 것은 모두 알려질 것이다.」마태복음 10:26 · 두루새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뜻밖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숨겨진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거짓된 비난을 받고, 그들의 말과 행동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감추어져 있는 진실이 영원히 감추어진 채 남지는 않으며, 사람들의 평가가 최종적인 진실을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둠 속에서 말하는 것을 빛 가운데서 말해라.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널리 전해라.」마태복음 10:27 · 두루새김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집에는 평평한 지붕이 흔했으며, 지붕은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조용한 자리에서 들은 말씀을 감추지 않고 널리 알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진실을 영원히 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니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게헨나에서 영혼과 몸을 함께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라.」마태복음 10:28 · 두루새김
몸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작은 위협이 아니며, 예수님은 그 위협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사람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과 최종적인 심판의 권한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최종적인 운명까지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혼」으로 옮긴 그리스어 프쉬케(ψυχή)는 문맥에 따라 생명, 목숨,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언제나 몸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죽지 않는 영혼이라는 의미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영혼과 몸이 함께 멸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중심은 사람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철학적 설명보다, 사람의 권한과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대조하는 데 있다고 보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영혼과 몸을 함께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은 문맥에서 최종적인 심판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으므로 악한 존재를 가리킨다고 이해해 온 소수의 해석도 있지만, 게헨나에서 최종적인 심판을 행할 권한이라는 맥락을 고려하면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뒤, 부드러운 모습으로 돌아오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와 상관없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아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런데 그중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와 상관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복음 10:29 · 두루새김
아사리온은 로마의 작은 동전 단위였으니, 참새는 값이 비싸지 않은 새입니다. 예수님은 참새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참새는 실제로 땅에 떨어질 수 있지만, 그 일이 아버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작은 새의 운명까지 하나님의 돌보심과 아심 밖에 있지 않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원문이 「너희 아버지 없이」라는 짧은 표현을 사용하므로 어느 쪽을 더 강조할 것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명도 아버지께서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하나하나 다 세어져 있다.」마태복음 10:30 · 두루새김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머리카락 수를 관리하신다는 사실 자체를 설명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세밀하게 알고 계신지를 보여 주는 과장된 그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아버지가 돌보신다면 왜 박해를 당합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제로 죽임을 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께서 그들을 돌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반드시 막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새와 머리카락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으로 바꾸면 앞의 말씀과 충돌하게 됩니다. 세상은 제자들을 하찮게 여기고 미워할 수 있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위로는 고난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그들의 생명이 아버지께 잊히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인정하는 사람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인정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인정할 것이다.」마태복음 10:32 · 두루새김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복음 10:33 · 두루새김
사람들 앞에 서 있는 제자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 서 계신 예수님, 두 장면에서 인정하는 것과 모른다고 하는 것이 되풀이됩니다. 이 대칭은 매우 엄중합니다.
이 말씀을 종교적인 자기소개를 공개적으로 했는지만 판정하는 규칙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앞의 문맥에는 박해와 죽음의 위협이 있습니다. 미움을 받고, 가족이 등을 돌리고, 권력자들에게 끌려갈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숨기고 싶은 유혹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상황에서 자신을 인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인정하거나 모른다고 하실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에 관한 매우 높은 선언입니다.
그렇다고 용감한 성격을 가진 사람만이 참된 제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두려움 속에서도 아버지가 돌보신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위험 속에서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버리지 않는 충실함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그 충실함이 때로 가장 가까운 관계와 충돌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져왔다니
「내가 땅에 평화를 가져오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져오러 왔다.」마태복음 10:34 · 두루새김
예수님은 앞에서 어떤 집에 들어가든 평화를 빌며 인사하라고 하셨고, 산상 설교에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구절의 「평화」는 같은 단어이므로, 하나의 평화는 좋고 다른 평화는 나쁘다고 단어를 나누어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칼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온 것은 아들을 아버지와, 딸을 어머니와, 며느리를 시어머니와 갈라놓아 서로 맞서게 하려는 것이다.」마태복음 10:35 · 두루새김
「사람의 원수는 바로 자기 집안사람들이다.」마태복음 10:36 · 두루새김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전쟁터가 아닙니다.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제 칼을 들고 가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 때문에 가족 안에서도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누가복음 12:51–53의 같은 장면에서는 같은 주제가 분열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미가가 본 무너진 가족 관계
이 말씀은 미가 7:6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미가 7장에서는 신실한 사람이 사라지고, 지도자들이 뇌물을 받고, 마침내 아들이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며 집안사람들이 서로 원수가 됩니다. 미가의 본래 문맥에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공동체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미가는 사회의 도덕이 무너져 가족 관계까지 무너지는 모습을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표현을 가져와, 자신을 따르는 일이 가족 안에서 서로 다른 반응을 일으켜 갈등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족이 서로 적대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신다는 뜻도, 제자들이 일부러 가족을 갈라놓아야 한다는 명령도 아닙니다.
왜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걸맞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걸맞지 않다.」마태복음 10:37 · 두루새김
이 말씀을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으면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부모 공경을 중요하게 다루신 말씀과 충돌합니다(마태복음 15:4–6; 19:19).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일이 다른 관계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권위가 매우 높게 드러납니다.
다만 이 말씀을 가족에게 가혹하게 행동하거나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피할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생기는 경우에도 예수님을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걸맞지 않다.」마태복음 10:38 · 두루새김
오늘날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표현은 흔히 개인적인 어려움을 뜻하지만, 당시 로마 지배 아래에서 십자가는 훨씬 끔찍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십자가형은 반역자나 노예 등에게 가해지던 잔혹하고 공개적인 처형으로, 죽음뿐 아니라 공개적인 수치와 굴욕을 함께 겪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생명과 사회적 지위, 명예까지 잃을 수 있는 길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으므로, 처음 듣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우선 로마의 처형과 굴욕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끝까지 읽는 독자는 이 말씀을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와 다시 연결하게 됩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사람은 그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복음 10:39 · 두루새김
이 말씀을 자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 잘못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박해받으면 다른 도시로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자기 목숨을 지키는 일을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더 높은 가치로 삼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 당장은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반대로 예수님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감당하는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목숨은 살아 있는 시간의 길이만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와 운명 전체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현재의 삶을 지켜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누구에게 맡기느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토록 무거운 말씀을 하신 뒤, 다시 일상의 아주 작은 자리로 돌아오십니다.
찬물 한 잔을 건네는 사람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마태복음 10:40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행동이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제자들 자신의 지위가 본래 높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보내신 분이 누구신가 하는 사실 때문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는 이유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의로운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10:41 · 두루새김
「예언자라는 이유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물이나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맡은 사명과 그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존중하여 반갑게 맞아들이는 행동입니다. 「예언자가 받을 상」은 그들과 같은 보상을 함께 받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고, 그들을 맞아들인 사람에게 알맞은 보상이 주어진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도 잊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제자라는 이유로 찬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해 주면, 결코 자기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10:42 · 두루새김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작은 사람들이 어린아이의 모습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문맥에서는 「제자라는 이유로」라는 표현을 근거로, 보냄받은 제자들 가운데 낮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에게 주는 것은 찬물 한 잔입니다. 많은 돈이 드는 일도, 특별한 종교적 능력이 필요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행동이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일이 훨씬 더 놀라운 일로 보일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일과 물을 주는 일이 언제나 같은 행동은 아니지만, 하늘의 나라의 사명에 참여하는 길은 특별한 권한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찬물 한 잔
찬물 한 잔의 약속은 이 장 처음의 물음을 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권한은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힘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고치고 더러운 영들을 내쫓고 하늘의 나라를 전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정작 다른 사람에게서 먹을 것을 제공받고, 맞아들이는 집에 머물고, 거절당하면 떠나고, 박해를 피해 다른 도시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연약함을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늘 예수님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매여 있는 사람들로서 살아가게 될 정상적인 현실로 말씀하십니다.
다만 박해가 사명의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사명의 증거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무책임 때문에 겪는 어려움까지 예수님 때문에 받는 박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 때문에」, 「내 이름 때문에」 받는 박해를 말씀하시며, 그 속에서도 슬기로움과 순수함을 함께 요구하십니다.
열두 제자는 더러운 영들을 내쫓을 권한을 받았고, 늑대 떼 한가운데 들어가는 양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와 함께,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는 아버지께서 자신들의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신다는 약속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는 큰 군중도, 병이 기적적으로 낫는 모습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진 작은 제자 하나가 있고, 그를 맞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물을 가져와 그에게 마시게 합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세상을 향해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들은 누군가에게 맞아들여져야 하는 작은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그들의 권한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권한은 그들을 다른 사람의 도움조차 필요 없는 강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길을 떠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맞아들일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누군가 내어 줄 찬물 한 잔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한 잔의 물도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