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기적과 제자 파송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기운을 내라, 얘야. 네 죄가 용서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마비된 사람을 고쳐 달라고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걷게 되는 일보다 먼저 죄의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조금 뒤에는 더욱 이상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고 계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왜 그런 사람들과 함께 먹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고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고 대답하시고 호세아의 예언을 인용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마태복음 9장을 읽으면 새로운 사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마비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자신의 식탁에 받아들이십니다. 오랫동안 피를 흘려 온 여자를 고치시고, 죽은 소녀를 일으키십니다. 눈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주시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의 입을 열어 주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뒤, 마지막에 예수님은 무리를 바라보십니다. 마태는 그때 예수님이 무리를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겼다」고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칠 능력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할 권위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를 행사하시는 분의 마음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깊은 자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의 권위는,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의 삶에 실제로 나타나는 권위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고 따라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하신다고 생각하고, 나중에는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힘입어 기적을 행하신다고 비난합니다. 똑같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도 사람들의 판단은 갈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마태복음 9장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도 보여 줍니다.
병을 고치러 오신 줄 알았는데 죄를 용서하시다
그는 배에 올라 건너가서 자기 도시로 갔다.마태복음 9: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던 예수님이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오십니다. ‘자기 도시’는 마태복음 4:13에서 예수님이 자리를 잡으셨다고 기록한 가버나움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보아라, 사람들이 침상에 눕혀진 마비된 사람 하나를 그에게 데려왔다.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보고 마비된 사람에게 말했다. 「기운을 내라, 얘야. 네 죄가 용서된다.」마태복음 9:2 · 본디새김
마태는 예수님이 마비된 사람의 믿음을 보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이 복수 표현에 환자 자신까지 포함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이 중요하게 묘사된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누군가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말씀은 예상 밖입니다.
마비된 사람이 겪는 눈에 보이는 문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를 다루십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비되었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병과 죄를 다루시지만, 그 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지 않으십니다.
이야기는 더 근본적인 문제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는 병든 몸을 회복시키는 권위뿐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위도 있으십니까? 바로 이 질문 때문에 서기관들과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왜 서기관들은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을까
보아라, 서기관 몇 사람이 속으로 말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한다.」마태복음 9:3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이사야 43:25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백성의 허물을 지워 버리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제사장들은 정해진 제사와 속죄 절차를 담당했으며,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죄의 용서를 말하는 행위 자체가 언제나 신성 모독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어떤 권위로 그 말씀을 하시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에서 제사 의식을 행하지 않으셨고, 자신이 단순히 용서의 가능성을 알려 주는 전달자라고 설명하지도 않으십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죄의 용서에 대한 권위 있는 선언으로 제시합니다. 서기관들의 판단은 아직 입 밖에 내놓지도 않은 마음속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십니다.
예수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 마음속에서 악한 것을 생각하느냐?」마태복음 9:4 · 본디새김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고, 이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십니다. 한쪽에는 예수님을 신뢰하여 사람을 데려온 사람들이, 다른 한쪽에는 예수님의 행동을 신성 모독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사건 앞에서 마음의 방향이 갈라집니다.
어느 말이 더 쉬운가
「그도 그럴 것이, 『네 죄가 용서된다』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라』 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쉬우냐?」마태복음 9:5 · 본디새김
죄를 용서하는 일과 마비된 사람을 걷게 하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요?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면 예수님이 무엇을 드러내려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두 선언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하기 쉬울까요?
‘네 죄가 용서된다’라는 말은 그 결과를 즉시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비된 사람이 일어나 걷는다면 ‘일어나 걸어라’라는 말의 권위는 눈앞에서 확인됩니다. 예수님은 이 차이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죄의 용서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눈에 보이는 치유로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 있도록—」 그때에 그가 마비된 사람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마태복음 9:6 · 본디새김
문장이 갑자기 끊기고,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하시던 말씀을 마비된 사람에게로 돌리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나 자기 집으로 갑니다.
기적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비된 사람을 걷게 하신 이유를 직접 밝히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앞 장의 치유 이야기들과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이제 그 권위가 죄의 용서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마태는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면의 변화는 분명합니다.
처음에 그는 침상에 눕혀져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 왔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 침상을 들고 자신의 발로 집으로 갑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를 ‘얘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부름에는 꾸짖음보다 위로와 격려가 먼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죄가 있다고 정죄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시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 뒤 일어나 집으로 가게 하십니다.
무리는 이 일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런 권위를 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마태복음 9:8 · 본디새김
무리는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이런 권위를 준’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복수형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에게 주어진 권위가 인간 세계에 나타났다는 경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태 공동체가 이해한 죄의 용서와 권위라는 주제까지 연결하여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인간에게 예수님과 동일한 죄 용서의 권위가 주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의 직접적인 초점은 사람의 아들이 가지신 권위입니다.
같은 사건이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다른 쪽에서는 신성 모독이라는 판단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갈림은 다음 이야기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2:1–12에서는 사람들이 지붕을 열고 마비된 사람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는 과정까지 자세히 나옵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 장면을 모두 생략하고 그들이 마비된 사람을 데려왔다는 사실만 기록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는 어떻게 데려왔느냐보다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무엇을 하셨느냐에 관심이 집중됩니다.
세금 징수소에서 식탁으로
예수는 그곳을 떠나 지나가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금 징수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마태는 일어나 예수를 따라갔다.마태복음 9:9 · 본디새김
이 장면은 놀라울 만큼 짧습니다. 그가 이전에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어떤 고민 끝에 결심했는지, 세금 징수 업무를 어떻게 정리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의 직업과 예수님의 부르심, 그리고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만 보여 줍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이나 통행료, 관세 등을 징수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런 일은 지배 권력의 조세 체계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부정한 징수나 착취가 발생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모든 세리가 실제로 부당한 돈을 거두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복음서에서 세리들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죄인들과 함께 언급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마태가 먼저 자신의 자격을 증명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부르시고, 마태는 그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앞의 마비된 사람과 마태에게는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비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집으로 갔고,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침상에서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은 세금 징수소에서 일어납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는 몸의 회복이 눈에 보이고, 두 번째 장면에서는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마태는 이 두 사건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예수님의 권위가 사람의 몸뿐 아니라 삶의 방향에도 작용한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누운 식탁
예수가 집에서 식사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을 때에, 보아라,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누워 있었다.마태복음 9:10 · 본디새김
마태는 식사가 이루어진 집이 누구의 집인지 명시하지 않는 대신, 누가 식탁에 함께 있었는지를 강조합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식탁은 교제와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장소였고, 누구와 함께 식사하는지는 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마태복음 9:11 · 본디새김
이 질문을 단순히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던졌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에 충실한 삶과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키려는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문제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실제로 논의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계시는지를 묻자, 예수님은 왜 자신이 그들과 함께 계셔야 하는지를 설명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고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마태복음 9:12 · 본디새김
의사가 병든 사람 곁에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의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당연한 사실을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에 적용하십니다.
「가서 이것이 무슨 말인지 배워라.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이다.」마태복음 9:13 · 본디새김
‘의인’이 실제로 의로운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반어적인 표현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다만 예수님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실제로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들이므로 자신이 필요 없다고 선언하신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비유 속의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은 예수님이 왜 죄인들과 함께하시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대조이고, 이야기의 직접적인 초점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비이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은 호세아 6:6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야훼와 맺은 관계에서 신실하지 못한 모습을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종교적인 의식을 행할 수 있었지만, 삶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이웃을 향한 올바른 관계가 무너져 있었습니다. 호세아 6:4에서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사랑이 아침 구름이나 금방 사라지는 이슬과 같다고 말씀하시고, 6:6에서 원하시는 것을 밝히십니다.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의 말씀은 제사 제도 자체를 전면적으로 폐지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실함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는 제사만으로는 여호와야훼의 뜻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는 경고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잘 맞습니다. 제사와 자비를 단순히 서로 배제하는 것으로 보기보다, 참된 예배와 언약적 신실함이 함께해야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있는 식탁에 적용하십니다. 자신이 죄인들을 부르시는 일을 여호와야훼께서 원하시는 자비의 실현으로 제시하십니다. 사람들이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의사가 병든 사람에게 간다는 사실이 그 병을 좋은 것이라고 인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병을 고치기 위해 그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죄를 없던 일로 하시지 않고, 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다가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앞에서 마비된 사람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 장면과 이 식탁이 여기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판정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부르시며, 회복의 관계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에서 마비된 사람과 마태가 일어나는 일을 표현하는 동사는 어근이 다르지만 모두 일어남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2:14와 누가복음 5:27은 병행되는 부르심 이야기에서 그 사람을 ‘레위’라고 부르는 반면, 마태복음은 ‘마태’라고 기록하며 10:3에서는 열두 제자 중 마태를 세리로 소개합니다. 전통적으로 마태와 레위를 같은 인물로 이해해 왔고 병행 사건의 유사성도 그 이해를 뒷받침하지만, 복음서 자체가 두 이름을 명시적으로 동일 인물의 이름이라고 설명하지는 않으며 두 이름의 관계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5:29에서는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마련했다고 기록하지만, 마태복음은 그 세부 사항을 생략합니다. 호세아 6:6의 ‘자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단순한 동정심만을 뜻하지 않고, 문맥에 따라 신실한 사랑, 인애, 관계를 지키는 충실함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왜 슬퍼하는가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어찌하여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마태복음 9:14 · 본디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지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두 질문은 같은 장면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금식은 당시 유대인의 경건 생활에서 회개와 애통을 나타내기도 했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행위와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회개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그들의 신앙적 관심과도 어울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금식에 관한 규칙이 아니라 혼인 잔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혼인집 손님들이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신랑이 그들에게서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금식할 것이다.」마태복음 9:15 · 본디새김
혼인 잔치는 기쁨의 자리입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손님들이 슬퍼한다면, 그것은 잔치가 열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행동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하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 말씀하지 않으시고, 금식이 적절한 때와 기뻐하는 것이 적절한 때를 구별하십니다.
지금이 기뻐할 때인 이유는 신랑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문맥상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가 제자들에게 혼인 잔치의 신랑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은 기쁨을 가져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랑이 빼앗기는 날
여기서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신랑이 여행을 떠난다고 하지 않으시고 ‘빼앗긴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말씀은 앞으로 예수님께 닥칠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그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신랑이 함께 계셔서 제자들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빼앗기시는 날에는 슬퍼하며 금식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금식이라는 경건 행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계시다는 사실이 제자들의 경건 생활을 이해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전통적으로 행해 온 경건한 행동이라도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낡은 옷과 새 천 조각
「손질하지 않은 천 조각을 낡은 옷에 대는 사람은 없다. 기운 조각이 그 옷에서 천을 뜯어내어 옷이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마태복음 9:16 · 본디새김
아직 줄어들지 않은 새 천 조각은 나중에 줄어들면서 낡은 옷을 당겨, 수선하려던 곳을 오히려 더 크게 찢어지게 만듭니다. 문제는 새 천이 나쁘다는 것도, 낡은 옷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두 재료의 상태가 서로 맞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지고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된다. 도리어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담는다. 그러면 포도주와 부대가 둘 다 보존된다.」마태복음 9:17 · 본디새김
새 포도주는 발효하면서 가스를 만들어 내고 부피가 팽창할 수 있습니다. 새 가죽 부대는 그런 변화를 견딜 유연성이 있지만, 이미 굳어진 낡은 가죽 부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질 수 있습니다.
흔히 새 포도주는 기독교이고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이므로, 예수님이 유대교 전체를 버리라고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문맥을 지나치게 단순화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이시며, 이 장에서도 호세아의 말씀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셨고, 5:17에서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새것과 옛것의 대조는 무엇보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로운 현실을 기존의 관습에 무리하게 맞추려 할 때 생기는 문제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신랑으로 함께 계신 때인데도 그 사실과 무관하게 이전의 금식 관행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은, 혼인 잔치에서 슬퍼하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두 번째 비유의 마지막에 ‘포도주와 부대가 둘 다 보존된다’는 문장을 덧붙입니다. 새 포도주만 보존하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적어도 새 포도주라는 새로운 현실을 보존하려면 그것에 맞는 부대도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표현을 구약의 계시를 폐기하지 않으면서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태는 아주 극적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2:19의 병행 본문에서는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금식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슬퍼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차이 때문에 마태의 비유에서는 금식과 슬픔의 관계가 더욱 뚜렷해집니다. 구약에서도 혼인 관계는 여호와야훼와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호세아 2:19–20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과 다시 관계를 맺으시는 약속이 혼인의 언어로 나타나고, 이사야 62:5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기뻐하시는 모습이 신랑의 기쁨에 비유됩니다. 마태복음 9장이 이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랑과 혼인 잔치라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과 기쁨이 찾아오는 구약의 약속들과 주제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빼앗긴다’는 원문에서 수동형이며, 누가 신랑을 빼앗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죽은 딸과 열두 해 동안 피를 흘린 여자
그가 그들에게 이런 것들을 말하고 있을 때에, 보아라, 한 지도자가 와서 그에게 절하며 말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복음 9:18 · 본디새김
예수님이 신랑과 새 포도주에 관해 말씀하고 계실 때, 한 지도자가 찾아옵니다. 그는 딸이 심하게 아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이 오셔서 손을 얹으시면 자신의 딸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 그렇게 믿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지만, 그의 요청은 분명합니다.
예수는 일어나서 그를 따라갔고 그의 제자들도 따라갔다.마태복음 9:19 · 본디새김
앞서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어나 따라갔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딸을 잃은 아버지가 청하는 곳으로 함께 가십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이야기가 잠시 중단됩니다.
열두 해 동안 피를 흘린 여자
보아라, 열두 해 동안 피를 흘려 온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 그의 옷단 술에 손을 댔다.마태복음 9:20 · 본디새김
마태는 이 여자의 이름도, 가족도, 병명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열두 해라는 세월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지만, 그 병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매우 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 직접 말을 걸지 않습니다. 뒤에서 다가와, 여호와야훼의 계명을 기억하게 하는 율법적 관습과 연결되는 장식인 예수님의 옷단 술에 손을 댑니다.
그 여자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나는 나을 것이다.」마태복음 9:21 · 본디새김
그녀는 길게 기도하지도,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자가 조용히 손을 대고 지나가도록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는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고 말했다. 「기운을 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그러자 그 여자가 그때부터 나았다.마태복음 9:22 · 본디새김
같은 위로, 다른 사람
예수님은 앞서 마비된 사람에게도 「기운을 내라, 얘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마비되어 침상에 누워 있었고, 다른 사람은 열두 해 동안 출혈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기운을 내라고 말씀하시고, 각각을 친근하게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하나의 치료 대상으로만 대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행위 자체를 치유의 원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녀의 행동은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행동이었고, 예수님은 그 신뢰를 인정하십니다.
여기서 믿음을 질병을 고치는 보편적인 기술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특정한 치유 사건을 기록하며, 믿음의 크기에 따라 모든 병이 반드시 낫는다는 공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향해 어떤 호칭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한 아버지의 딸을 살리기 위해 가시는 길이고, 그 길에서 오랫동안 고통받던 여자를 딸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두 장면이 서로를 비추고 있습니다.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는 그 지도자의 집에 와서 피리 부는 이들과 떠들썩한 무리를 보고마태복음 9:23 · 본디새김
이렇게 말했다. 「물러가라.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이 그를 비웃어 댔다.마태복음 9:24 · 본디새김
피리 부는 이들과 떠들썩한 무리는 집안에 죽음이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아버지는 딸이 방금 죽었다고 분명히 말했고, 집 안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소녀의 죽음이 오진이었다는 단순한 의학적 설명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소녀를 일으키실 것을 염두에 두고, 죽음을 잠에 비유하신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무리가 내쫓긴 뒤에 그는 들어가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복음 9:25 · 본디새김
마태는 장엄한 선언이나 긴 의식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는 행동과, 소녀가 일어나는 결과만 남깁니다.
앞에서는 여자가 예수님께 손을 뻗었고, 이번에는 예수님이 소녀에게 손을 뻗으십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의 가장 큰 공통점은 접촉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회복을 가져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열두 해의 출혈과 죽음은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선명하게 드러내지만, 예수님은 그 한계 앞에서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죄의 용서와 질병의 치유를 넘어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효력을 나타냅니다.
마태는 「그 소문이 그 지역 전역에 퍼졌다」(9:26)는 한 문장으로 이 사건을 맺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게 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사실이 모두가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다음 장면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5장에서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죽어 가는 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도중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만, 마태는 처음부터 딸이 이미 죽은 상황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장면을 압축하여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곧바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레위기 15:25–30은 정상적인 월경 기간 밖에서 출혈이 이어지는 여성의 정결 상태를 다루며, 그러한 출혈을 의식적인 부정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말은 그 여자가 도덕적으로 악하거나 죄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의식적인 정결 규정에 따른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 상태가 장기간 이어졌다면 종교적 생활과 일상의 접촉에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여자가 실제로 공동체에서 쫓겨났거나 모든 사람과 단절되어 살았다고 본문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옷단 술은 민수기 15:38–40(옷자락에 술을 달고 여호와야훼의 계명을 기억하라는 규정)과 신명기 22:12(옷 네 귀퉁이에 술을 만들라는 명령)와 연결되는 장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여자가 특별히 민수기의 규정을 떠올렸거나 그 술 자체에 기적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할 때 곡하는 사람들과 음악을 사용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잠에 비유하는 표현이 사용되며, 다니엘 12:2에서도 죽은 사람들이 먼지 속에서 자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눈먼 사람들이 먼저 알아본 이름
예수가 그곳을 떠나 지나갈 때에 눈먼 사람 둘이 그를 따라오며 소리쳐 말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여.」마태복음 9:27 · 본디새김
마태복음은 첫 장 첫 절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했습니다(1:1). 이제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을 바로 그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마태는 이들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 경위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에게 자비를 구하다
구약에서 다윗의 왕위에 관한 약속은 사무엘하 7:12–16에 중요한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 왕위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이후 이사야 11장과 예레미야 23장 같은 예언서에서는 다윗의 계보에서 나올 의로운 왕에 대한 소망이 발전합니다. 그런데 눈먼 사람들이 그 다윗의 자손에게 구하는 것은 왕국의 정복도, 정치적 승리도 아닙니다.
자비입니다.
그들이 부르는 이름은 왕의 계보를 가리키지만, 그 왕에게 요청하는 것은 자신들의 고통을 돌보아 달라는 자비입니다. 마태복음이 보여 주는 다윗의 자손은 단순히 강력한 통치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일로 나타납니다.
믿느냐는 질문
그가 집에 들어가자 눈먼 이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예, 주님.」마태복음 9:28 · 본디새김
앞 장의 백부장은 예수님께 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눈먼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두 이야기에서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입니다.
그때에 그가 이렇게 말하며 그들의 눈에 손을 댔다. 「너희 믿음대로 너희에게 이루어져야 한다.」마태복음 9:29 · 본디새김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엄하게 경고했다. 「조심해라.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된다.」마태복음 9:30 · 본디새김
그들이 믿는다고 말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은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그 지역 전역에 그를 널리 알렸다.마태복음 9:31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믿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앞서 산상 설교 마지막에 나온 두 집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과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의 치유를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그들이 명령을 어긴 행동을 모범적인 순종으로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이야기는 그 불일치를 그대로 남겨 둡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35:5–6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 눈먼 사람들의 눈이 열리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혀가 노래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은 이사야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눈먼 사람들이 보게 되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는 사건은 이사야가 묘사한 회복의 소망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적에 대한 소문이 예수님의 사명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해석 등이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그 이유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눈먼 사람들이 기쁨과 감사 때문에 그 일을 알렸다고 추측할 수는 있지만, 마태는 그들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말을 되찾은 사람과 서로 다른 두 반응
그들이 나갈 때에, 보아라, 사람들이 귀신 들려 말 못 하는 사람 하나를 그에게 데려왔다.마태복음 9:32 · 본디새김
마태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상태였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께 데려왔다고 말합니다.
귀신이 내쫓기자 말 못 하던 사람이 말을 했다. 무리는 놀랐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에서 이런 일이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마태복음 9:33 · 본디새김
마태는 치유받은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합니다. 무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매우 특별한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는다.」마태복음 9:34 · 본디새김
이제 갈등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앞에서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신성을 모독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의 출처를 악한 세력으로 돌립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귀신이 내쫓겼다는 사실 자체를 직접 부정하지 않고, 그 일이 어떤 힘으로 이루어졌느냐를 문제 삼습니다.
왜 그들이 이런 판단에 이르렀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치유를 두고 예수님의 권위와 정체성을 둘러싼 대립이 더욱 격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본격적인 논박은 뒤에 마태복음 12:22–32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이곳에서는 논쟁이 더 이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마태는 예수님께서 계속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하나로 묶는 문장
예수는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고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온갖 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며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녔다.마태복음 9:35 · 본디새김
마태복음 4:23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온갖 병과 허약함을 고치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두 문장 사이에는 5–7장의 산상 설교와 8–9장의 여러 치유와 권위 있는 행동이 들어 있습니다. 마태는 가르침과 선포와 치유라는 같은 표현으로 이 두 부분을 앞뒤에서 감싸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과 병든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은 서로 다른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고, 그 나라가 사람들의 삶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나라의 복음은 죄를 용서받고, 병에서 회복되고, 죄인으로 취급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건들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나라를 육체적 치유나 사회적 회복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가르침과 선포와 치유를 함께 놓습니다.
달라진 부분도 있습니다. 4:23에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고 했지만, 이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 반복은 앞의 사건들을 정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시는지가 드러납니다.
무리를 보시고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기시다
그는 무리를 보고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겼다. 그들이 목자를 가지지 않은 양처럼 시달리고 내버려져 있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9:36 · 본디새김
마태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원문의 동사는 사람의 내장이나 깊은 속을 가리키는 표현과 연결되어 있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연민을 나타냅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어떤 상태인가
목자가 없는 양이라는 표현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지만, 마태가 묘사하는 상태는 그보다 더 심각합니다. ‘시달리고 내버려져 있다’는 원문의 두 표현은 괴롭힘을 당하고 지쳐 있거나, 쓰러지고 내던져진 상태를 연상시킵니다. 단순히 방향을 몰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민수기 27:15–17에서 모세는 여호와야훼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자신이 죽은 뒤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를 세워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후 여호와야훼께서는 여호수아를 세우도록 하십니다. 이 문맥에서 목자는 백성을 이끌고 보호하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도자입니다.
에스겔 34장 — 양을 돌보지 않는 목자들
에스겔 34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자신들만 먹인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약한 양을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양을 고치지 않았으며, 상처 입은 양을 싸매지 않았습니다. 쫓겨난 양을 돌아오게 하지 않았고, 길 잃은 양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양들은 흩어지고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있어도 양들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사실상 목자 없는 양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백성을 두고 여호와야훼께서는 직접 자신의 양들을 찾고 돌보시겠다고 선언하시고(에스겔 34:11–16), 다윗과 연결되는 한 목자를 세워 양들을 돌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34:23–24).
마태복음 9:36은 에스겔 34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목자 없는 양이라는 표현과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함께 고려하면 중요한 주제적 연결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의 목자 이미지를 에스겔 34장의 다윗 계열 목자에 대한 기대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민수기 27:17과 열왕기상 22:17 역시 이 표현의 중요한 구약 배경입니다.
이 배경에서 보면,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죄인들을 부르시고 사람들이 외면할 수 있는 이들과 함께 식사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에스겔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돌보겠다고 하셨던 양들의 처지를 깊이 가엾게 여기고 계십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되시고 이 장에서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신 예수님께서, 다윗과 연결된 목자의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에서 목자 없는 양들을 돌보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백성에게 종교적 가르침을 전하시는 선생님으로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백성을 보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며,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목자의 역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마태복음은 그동안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처지에 있었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마비된 사람, 세리와 죄인들, 열두 해 동안 출혈하던 여자, 죽은 딸을 위해 간청하는 아버지, 눈먼 사람들과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무리를 바라보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경건한지,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는지, 얼마나 사회적으로 존중받는지를 기준으로 묘사하지 않으십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고 내버려져 있다고 보십니다.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그들의 죄를 먼저 떠올리고, 누군가는 그들을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로 보거나 그들의 부족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돌봄을 필요로 하는지를 보십니다. 자비는 상대방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알아보고, 그의 고통을 자신의 관심 안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그가 자기 제자들에게 말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복음 9:37 · 본디새김
여기서 이미지가 갑자기 바뀝니다.
앞에서는 양 떼였고, 이제는 추수할 곡식입니다. 양 떼에게는 목자가, 곡식에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두 비유는 서로 다른 그림을 사용하지만, 돌봄과 수고가 필요한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이 말씀을 앞으로 기독교 신자가 엄청나게 많아질 것이라는 예측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추수는 문맥에 따라 심판과 구원, 모으는 일과 완성의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요엘 3:13에서는 추수의 이미지가 심판과 연결되고, 다른 본문에서는 결실을 거두는 기쁨과 풍성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추수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길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를 목자 없는 양처럼 가엾이 여기셨으므로, 여기서 추수는 그 무리를 향해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연결하여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일꾼이 부족하니 더 열심히 일하라고 하셨을까
이런 말씀을 들으면 먼저 자신이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은 이후의 사역과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적용입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명령하시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그러므로 추수의 주인에게 자기 추수 일에 일꾼들을 내보내 달라고 간청하여라.」마태복음 9:3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추수의 주인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추수는 제자들이 소유한 사업이 아닙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일에 필요한 일꾼을 내보내시는 권한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일꾼이 필요하다는 말씀은 무리를 가엾이 여기셨다는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이 순서를 바꾸어 일꾼이 부족하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면 사람들을 노동력이 필요한 사업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시달리고 내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보시고, 깊이 가엾게 여기신 뒤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마지막 요청은 조직을 확대하거나 더 많은 사람을 동원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보시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꾼들을 보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예수님 혼자 행하시는 치유와 선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많은 일꾼이 참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을 암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내보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에크발로는 앞에서 귀신을 내쫓는 일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밖으로 내보내거나 몰아낸다는 의미의 폭을 가지며, 문맥에 따라 강한 동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귀신이 아니라 일꾼들을 추수 일에 내보내는 행동을 가리키므로 ‘내쫓다’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일꾼들을 내보내시는 일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현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길
마태복음 9장의 장면들은 처음에는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근거로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라는 호세아의 말씀을 사용하시고, 장의 마지막에서 마태는 그 자비가 예수님의 내면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원하신다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종교적 지침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의 행동 안에서 나타납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의 권위는 매우 높게 묘사됩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데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할 권위가 있으시면서도 죄인을 정죄하는 데 머무르지 않으시고 그들을 부르시며, 무리를 이끄실 권위를 가지셨지만 그들을 자신의 성공을 증명할 군중으로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똑같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마태와 딸을 잃은 아버지와 출혈하던 여자와 눈먼 사람들의 판단과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 장의 끝에서 마태는 사람들의 판단을 오래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았는가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보셨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태복음 9장은 사람들에게 들려 예수님 앞에 온 한 사람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모두가 예수님께 직접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닌 훨씬 많은 무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더 많은 기적을 보여 주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추수의 주인께 간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환호도, 기적에 대한 감탄도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는 무리와, 그들을 깊이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무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에서 나온 기도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습니다. 일꾼은 적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