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기적과 제자 파송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아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마태복음 8장에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백부장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집으로 와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병든 종을 직접 만져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듣고 놀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누구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발견하지 못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같은 장의 마지막에는 정반대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린 두 사람을 해방시키십니다. 아무도 지나갈 수 없었던 길을 막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들은 도시의 주민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들의 지역을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시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권위를 눈앞에서 확인하고도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앞 장에서 무리는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것에 놀랐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 권위가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를 넘어, 병든 몸과 무너진 삶, 거센 바람과 바다, 귀신들의 세계에까지 미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의 능력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능력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백부장은 말씀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살려 달라고 외치면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아봅니다. 도시 주민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알아보는 것과 그 권위를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고치시고, 어떤 권위를 행사하시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아니면 깨끗하게 하시겠습니까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앞에 첫 번째로 등장한 사람은 나병 환자입니다.
보아라, 한 나병 환자가 다가와 그에게 절하며 말했다.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8:2 · 본디새김
그는 「저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지 묻지 않고, 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뜻에 자신의 요청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왜 ‘고치다’가 아니라 ‘깨끗하게 하다’일까요?
병을 고치는 것과 깨끗하게 되는 것
레위기 13장은 특정한 피부 질환을 앓는 사람을 제사장이 검사하여 정결과 부정의 상태를 판별하도록 규정합니다. 부정한 상태로 판정된 사람은 공동체와의 생활에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4장은 그 질환이 나은 사람에게 정결 의식을 행하도록 규정합니다.
따라서 나병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신체적인 회복만이 아닙니다. 그는 정결함을 인정받고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폭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가장 놀라운 행동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일어납니다.
예수가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며 말했다. 「내가 원한다. 깨끗해져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다.마태복음 8:3 · 본디새김
왜 굳이 만지셨을까요?
뒤에 나오는 백부장의 종은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지 않으셔도 나음을 얻습니다. 같은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내쫓으십니다. 예수님께는 말씀만으로도 고치실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만지십니다.
일반적으로 부정한 상태와의 접촉은 정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묘사하는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접촉으로 부정함이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깨끗해집니다. 본문은 이 일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위반하셨다거나 부정해지셨다는 판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환자는 「원하시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한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환자는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끗해져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환자가 예수님께 맡겼던 가능성이 예수님의 뜻과 말씀 안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권위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시고, 그가 간절히 바라는 회복을 이루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왜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을까
그런데 이야기는 병이 나은 순간에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조심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대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라. 그리고 모세가 명한 그 예물을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바쳐라.」마태복음 8:4 · 본디새김
레위기 14장에 따라 정결 상태를 확인하고 예물과 의식을 처리하는 역할은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지만, 그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회복을 인정받는 데 필요한 절차도 따르도록 하십니다.
여기서 산상 설교의 한 말씀이 실제 사건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5:17). 예수님의 치유는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라는 요구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정결을 확인받고 회복된 삶으로 돌아가는 절차를 존중하십니다.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이 누구를 향한 증거인지,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병만 고치시고 관심을 거두시지 않으십니다. 그가 회복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곧이어 등장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의 권위를 이해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직접 만지실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 ‘나병’이라고 번역되는 말은 오늘날 한센병이라는 특정 질환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3–14장에서 다루는 피부 질환은 여러 종류의 피부 이상을 포함하는 넓은 범주여서, 이 사람이 정확히 어떤 현대 의학적 질환을 앓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에 대해서는 제사장들에게 그의 정결함을 입증하는 증거라는 이해와, 더 넓게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의 치유를 증언하는 의미라는 이해가 있으며, 이 구절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풀어 주지 않으므로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섣부른 대중적 소문을 경계하신 것인지, 정결 확인 절차를 우선하시려는 것인지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본문 자체는 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 권위를 알아본 백부장
그가 가버나움에 들어가자 한 백부장이 그에게 다가와 간청했다.마태복음 8:5 · 본디새김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던 중심 지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평범한 주민이 아니라 백부장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백부장은 군사 조직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교입니다. 이야기의 흐름과 이어지는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온다는 말씀을 고려하면, 이 백부장을 이방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님, 제 종이 몸이 마비된 채 집에 눕혀져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마태복음 8:6 · 본디새김
여기서 ‘종’으로 옮긴 그리스어 파이스(παῖς)는 아이나 아들을 가리킬 수도 있어서, 병든 사람이 백부장의 종인지 아들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분명한 것은 백부장이 자신의 집에 누워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치겠다.」마태복음 8:7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 고치시겠다고 제안하신 평서문으로도, 자신이 가서 고쳐야 하느냐고 물으신 의문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평서문을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대답을 살펴보면 어느 쪽이든 이야기의 핵심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말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제 지붕 아래로 들어오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못 됩니다.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복음 8:8 · 본디새김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는 다음 문장이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 권위를 알아보다
「저도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고 제 밑에 병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다른 사람에게 『오너라』 하면 오고, 제 노예에게 『이것을 해라』 하면 합니다.」마태복음 8:9 · 본디새김
그는 명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군대에서 그의 명령은 단순히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지휘 체계 안에서 권위를 지닌 말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경험하는 이 권위의 원리를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자신의 명령이 병사들에게 효력을 갖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더 큰 효력을 갖겠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9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진 이처럼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8:9에서 백부장은 ‘권위’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신뢰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산 위에서 무리가 놀랐던 바로 그 권위를, 이 백부장은 병든 종을 고치는 일에도 적용한 것입니다.
보통 병을 고쳐 달라는 사람은 치유자가 병든 사람에게 찾아오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직접 오실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위가 예수님께서 직접 손을 뻗으실 수 있는 거리보다 훨씬 멀리까지 미친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번에는 병든 사람을 만나지 않으시고도 고치십니다.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예수님의 능력은 특정한 치유 방식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신 이유
예수는 그 말을 듣고 놀랐다. 그리고 따르는 이들에게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스라엘의 누구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발견하지 못했다.」마태복음 8:10 · 본디새김
지금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말을 듣고 놀라십니다.
여기서 믿음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기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어떤 권위를 가지고 계신지를 인정했고, 그 권위를 통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으로 오셔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특정한 방법으로 치유하셔야 한다고 지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한 사람의 믿음에 관해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시야를 넓히십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오는 사람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하늘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기대어 누워 식사할 것이다.」마태복음 8:11 · 본디새김
당시 식사 자리에서 기대어 눕는 것은 식탁에 참여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이 함께 식탁에 앉는 잔치로 묘사하십니다. 조상들과 함께하는 잔치,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 여러 민족을 향해 열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장면 다음에 엄중한 경고를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둠으로 내쫓길 것이다. 거기에 울부짖음과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8:12 · 본디새김
‘그 나라의 아들들’은 그 나라에 속한다고 기대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이어지는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경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버리셨다는 선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믿음을 발견하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민족 전체에 대한 일괄적인 판정보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는 신분적 확신이 참된 믿음 없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멀리서 왔지만 잔치에 참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잔치에 속한다고 생각했지만 바깥으로 내쫓깁니다.
누가 가까이 있고 누가 멀리 있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뒤바뀝니다.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혈통적 관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예수가 백부장에게 말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너에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자 그 종이 그 시각에 나았다.마태복음 8:1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믿음의 양이 치유의 결과를 자동으로 만들어 낸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병든 종을 고치는 방법을 알려 드린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이 신뢰를 두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시며 종을 고치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백부장이 정확히 어느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마태가 밝히지 않습니다. 파이스는 문맥에 따라 아이나 아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집안의 종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마태는 뒤에서 백부장이 자신의 노예에게 명령한다고 말한 사실을 기록하므로 이를 근거로 8:6의 사람도 종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아들의 가능성까지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8:7은 고대 그리스어 필사본의 문장부호만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의문문으로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시는 문제를 제기하신 것으로, 평서문으로 이해하면 먼저 치유 의사를 밝히신 것으로 읽을 수 있으며, 양쪽 해석 모두 논의되어 왔습니다. 8:11의 잔치 장면은 여호와야훼께서 모든 민족을 위하여 풍성한 잔치를 마련하시는 이사야 25:6을 떠올리게 하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창세기 12:3의 약속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마태복음 8:11은 이 두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열이 떠나고 여자가 일어나다
백부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장소가 다시 바뀝니다.
예수는 베드로의 집에 와서 베드로의 장모가 눕혀져 있고 열이 나는 것을 보았다.마태복음 8:14 · 본디새김
이번에는 나병도, 마비도 아닙니다. 열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특별한 직위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도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간청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행동하십니다.
그가 그 여자의 손을 만졌다. 그러자 열이 그 여자에게서 떠났고, 그 여자는 일어나 그를 섬겼다.마태복음 8:1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손을 만지십니다.
열이 떠납니다.
여자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섬깁니다.
여기서 ‘섬기다’는 다른 사람을 돌보거나 필요한 일을 하며 섬기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복종한다는 뜻보다 실제적인 도움과 봉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이 여자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만 고침받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 때문에 누워 있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 움직이고 행동한다는 변화가 분명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 누군가를 섬길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됩니다.
치유는 그녀의 몸에 일어난 변화이면서, 그녀가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사건입니다.
병든 사람들을 모두 고치시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귀신 들린 많은 사람들을 그에게 데려왔다. 그는 말씀으로 그 영들을 내쫓고 병든 사람들을 모두 고쳤다.마태복음 8:16 · 본디새김
이제 이야기의 범위가 크게 넓어집니다.
한 사람의 나병 환자에서 시작하여, 한 사람의 병든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거쳐, 수많은 병든 사람과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 이릅니다. 마태는 치유하신 질병의 종류를 모두 기록하지 않지만, ‘모두’라는 말로 예수님의 권위가 한두 가지 특별한 질병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영들을 내쫓으십니다. 앞에서 백부장이 이해했던 바로 그 권위가 다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군인의 명령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에서 효력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마태는 여기서 예상 밖의 구약 말씀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병을 짊어진 사람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전해진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우리의 약함을 떠맡고 우리의 병을 짊어졌다.」마태복음 8:17 · 본디새김
마태는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일을 보면서 이사야 53:4를 떠올립니다. 이사야 53장은 여호와야훼의 종이 고난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그 종은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버림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죄악을 짊어지며, 그의 고난이 많은 사람들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말씀을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음을 묘사하는 장면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장면에서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사야가 말한 ‘우리의 병’
이사야 53:4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병과 고통을 가리키는 구체적인 낱말들이 사용됩니다. 마태가 사용하는 표현은 고대 그리스어 구약보다 히브리어 본문의 질병과 고통이라는 구체적인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마태는 이사야의 종이 우리의 약함과 병을 짊어졌다는 말씀을 예수님의 실제 치유 활동에 적용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사야 53장을 오직 죄의 용서에 관한 예언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이사야 53장 전체에서는 죄와 고난의 문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 예언을 읽으면서 인간의 육체적인 고통도 함께 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질병을 자신의 몸으로 옮겨 앓으셨다는 뜻일까요? 마태복음 8장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떠맡다’와 ‘짊어지다’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여 그 부담을 담당하는 행동을 표현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지는지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문맥에서는 예수님의 치유 활동 자체가 그 말씀의 성취로 제시됩니다.
마태는 이사야의 종이라는 신학적 배경을 가져와 예수님의 치유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그들의 문제를 지배하는 능력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약함과 병을 떠맡고 짊어지는 사역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처음 세 번의 치유 사건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미신 분.
백부장의 간청을 들으시고 말씀으로 종을 고치신 분.
베드로의 장모에게 다가가 손을 만지신 분.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말한 고난받는 종의 사명과 연결되는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사람이 반드시 질병에서 즉시 치유된다는 약속과는 다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을 고치신 사건과 그 신학적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께 다음 장면에서는 뜻밖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3:4의 히브리어 홀라예누는 ‘우리의 병들’을, 마크오베누는 ‘우리의 고통들’을 가리킵니다. 고대 그리스어 구약은 이 대목을 죄와 고통의 의미가 강조되는 방식으로 옮겼습니다. 이사야 53장의 더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 이 치유 사건들은 이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해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가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자리는 지금 벌어지는 치유 사역입니다.
사람의 아들에게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둘레의 무리를 보고」(8:18) 그곳에 계속 머무르지 않으시고 건너편으로 떠나라고 분부하십니다. 바로 이때 한 서기관이 다가옵니다.
서기관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선생님을 따라가겠습니다.」마태복음 8:19 · 본디새김
그는 서기관입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과 관련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어디로 가시든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를 환영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여우들에게는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에게는 깃들일 곳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에게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20 · 본디새김
앞에서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의 몸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심지어 멀리 떨어져 있는 병든 종을 말씀만으로 고치셨습니다. 그렇게 큰 권위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정작 자기 머리를 둘 안정된 장소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머물 곳을 갖지 못하신 모든 사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활동이 한곳에 정착하여 안정적인 삶을 꾸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능력 있는 선생님 곁에서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안정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권위 있는 분이 왜 머리 둘 곳도 없으실까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라는 의미와 연결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자신을 지칭하시는 독특한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마태복음은 나중에 예수님의 권위와 다시 오심을 설명하면서 다니엘 7장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사용합니다(24:30; 26:64).
장차 큰 권위를 행사하실 예수님께서 지금은 안정된 거처조차 보장되지 않는 길을 걷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예수님께서 감당하시는 낮은 처지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서기관은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먼저 보여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서기관은 결국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마태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그의 결심을 기록하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그 침묵 때문에 독자는 예수님의 말씀 자체에 더 오래 머물게 됩니다.
아버지를 먼저 묻게 해 주십시오
제자들 가운데 다른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주님, 제가 먼저 가서 제 아버지를 묻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마태복음 8:21 · 본디새김
이번 사람은 이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매우 중요한 가족적·종교적 의무였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도 연결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고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묻도록 두어라.」마태복음 8:2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여러 갈래로 읽힙니다. 앞의 ‘죽은 자들’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보는 읽기,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어 그 죽음과 장례까지 기다리겠다는 요청으로 보는 읽기,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뼈를 다시 수습하던 이차 장례 관습과 잇는 읽기, 그리고 우선성을 강조하는 강한 역설로 보는 읽기입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느냐에 따라 제자의 요청이 얼마나 긴 미룸이었는지가 달라집니다. 본문은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는지, 장례가 어느 단계에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하나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해석이 갈리는 가운데서도 분명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일을 다른 모든 일이 정리된 다음에야 시작할 수 있는 선택적인 활동으로 두지 않으십니다. ‘먼저’라는 제자의 요청에,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명령으로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을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일이 언제나 잘못이라거나,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포기해야 참된 제자가 된다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특정한 부르심의 자리에서 충성의 우선순위를 극단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놀라운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선택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는 권위이면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삶 전체에 요구를 제기하는 권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의 이 부르심은 실제 위험 속으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다니엘 7:13–14에서 다니엘은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나아와 사라지지 않는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를 받는 환상을 봅니다. 다니엘 7장과의 직접적인 연결이 8:20 한 구절에서 확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태복음 전체에서 ‘사람의 아들’이 가지는 의미를 고려하면 이 대조는 깊어집니다. 8:22의 첫 번째 읽기를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도록 두고, 제자는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기한 없이 미루어질 수 있는 제자 됨을 경고하십니다. 세 번째 읽기에서는 제자가 이차 장례 절차를 마치려 한다면 상당한 기다림이 필요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특정한 장례 관습을 이 사건의 확정적인 배경으로 단정하기는 어렵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일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문자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충격적인 과장 표현을 사용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랐는데
그가 배에 오르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따라 올랐다.마태복음 8:23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한 제자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마태는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배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전혀 평온하지 않습니다.
보아라, 바다에 큰 흔들림이 일었다. 그래서 배가 물결에 덮이고 있었다. 그는 자고 있었다.마태복음 8:24 · 본디새김
배는 물에 덮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에게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흔들리는 배 안에서 잠들어 계십니다. 마태가 두 장면의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나란히 놓인 모습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일정한 안락함과 거리가 먼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다가와 그를 깨우며 말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생겼습니다.」마태복음 8:25 · 본디새김
이 짧은 간청은 앞서 백부장이 했던 말과 비교해 볼 만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구해 달라고 외칩니다.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왜 겁을 내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때에 그는 일어나 바람들과 바다를 꾸짖었다. 그러자 아주 잔잔해졌다.마태복음 8:26 · 본디새김
예수님을 찾았는데 왜 믿음이 적다고 하실까
제자들이 아무 믿음도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았고, 도움을 요청할 대상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믿음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듣고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발견하지 못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배에 오른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적다고 하십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시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같은 배에 계시는데도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대조는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를 깊이 신뢰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물론 배가 물결에 덮이고 있었으니, 그들이 위험을 느낀 데에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책망을 위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모든 감정이 죄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위험 속에서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지적하셨지만, 그들을 위험에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종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말씀 앞에 바람들과 바다까지 잠잠해집니다.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시편 107:23–30에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큰 폭풍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여호와야훼께 부르짖고,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고통에서 건지시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이 시편 107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배와 폭풍, 위험에 빠진 사람들의 부르짖음, 바다가 잠잠해지는 장면은 분명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시편 89:9에서도 여호와야훼께서 거친 바다를 다스리고 파도를 잠잠하게 하신다고 찬양합니다.
구약에서 바다의 거센 힘을 다스리는 권위는 하나님의 통치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바람들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자연 현상에 관해 특별한 지식을 가지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태는 구약에서 하나님께 속한 권위가 예수님의 행동 안에서 나타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지막 질문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놀랐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들과 바다까지 그에게 복종하는가?」마태복음 8:27 · 본디새김
이 질문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바람들과 바다가 복종한다는 사실을 보았지만, 그런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듣고 놀라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지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신 것은 한 사람의 믿음이었고, 사람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의 권위였습니다.
이 두 놀라움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다 건너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8:24의 ‘큰 흔들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세이스모스는 지진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바다에 큰 동요가 일어난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것을 실제 지진이 발생했다는 지질학적 기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왜 여기 오셨습니까
그가 건너편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으로 가자 귀신 들린 두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와 마주쳤다. 그들은 몹시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다.마태복음 8:28 · 본디새김
예수님은 바다를 건너 새로운 지역에 도착하십니다. 이곳의 이름과 정확한 장소는 사본마다 차이가 있지만, 마태가 묘사하는 현장은 분명합니다.
무덤이 있습니다.
귀신 들린 두 사람이 그곳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마태는 그들의 이름이나 지난 삶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는 두 사람 자신의 삶뿐 아니라 그 지역을 오가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보아라, 그들이 소리쳐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에게 고통을 주려고 여기 오셨습니까?」마태복음 8:29 · 본디새김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다
바다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이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들과 바다까지 그에게 복종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경험하고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묻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귀신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귀신들에게 믿음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기 위해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고통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그들이 덧붙인 ‘때가 되기도 전에’라는 말에서, 귀신들은 자기들에게 고통이나 심판이 임할 정해진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도착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귀신들은 자신들이 고통받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누구에게는 회복의 소식이고, 누구에게는 심판의 위협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한마디의 명령
귀신들이 그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우리를 내쫓으시면 저 돼지 떼로 보내 주십시오.」마태복음 8:31 · 본디새김
그 지역에는 많은 돼지가 먹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이 왜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는지 자세한 이유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마디로 대답하십니다.
그가 귀신들에게 말했다. 「가라.」 그들은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보아라, 온 떼가 벼랑을 내리달아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물속에서 죽었다.마태복음 8:32 · 본디새김
예수님은 귀신들을 내쫓기 위해 길고 복잡한 의식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귀신들과 힘겨운 협상을 벌이시는 모습도 없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명령 앞에서 물러납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종을 고치셨습니다.
말씀으로 영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바람들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귀신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 모든 사건에서 예수님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이토록 큰 권위를 보이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의 여러 사본에는 가다라, 거라사, 게르게사에 해당하는 서로 다른 이름이 나타나며, 이 본문은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을 따랐습니다. 가다라는 갈릴리 호수 동남쪽에 있던 도시였고,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은 반드시 도시 중심부 자체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사본들의 지명 차이를 고려하면 이 사건의 정확한 장소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마가복음 5:1–20은 이와 대응되는 사건을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데, 이 차이를 억지로 하나로 합치기보다 마태가 두 사람이라고 기록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는 악한 영들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을 기대하던 유대 묵시문학적 전통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고, 성경 밖의 유대 문헌들에도 그런 기대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만으로 귀신들이 정확히 어떤 종말론적 시간표를 알고 있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돼지는 레위기 11:7–8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정한 동물로 규정됩니다. 돼지 떼가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이방 문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그것만으로 지역 주민의 민족적 구성을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돼지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귀신들이 그 결과를 의도했는지, 돼지의 죽음이 가져온 경제적 손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도 이 장면에서 직접 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간청한 사람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달아나 도시로 갑니다. 그들은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 있었던 일을」(8:33) 알립니다. 돼지 떼에 일어난 일뿐 아니라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도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시의 주민들이 나옵니다.
보아라, 온 도시 사람들이 예수를 맞으러 나왔다. 그리고 그를 보고 자기들의 지역에서 옮겨 가 달라고 간청했다.마태복음 8:34 · 본디새김
그 지역에는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게 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이것은 그 두 사람에게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예수님께 머물러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돼지 떼를 잃은 경제적 손실 때문이라는 해석과,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예수님의 권위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8장은 주민들이 왜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요청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결말 자체는 분명합니다. 주민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5장은 고침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장면과 그가 자신의 지역에 돌아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리는 장면을 계속 기록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 대신 온 도시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에서 멈춥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고 해서 누구나 예수님의 가까이 계심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눈앞에 드러났는데도 사람들은 왜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본문은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습니다.
한 분의 권위, 서로 다른 반응
마태는 여러 기적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 주면서, 그 권위를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함께 보여 줍니다. 세 번의 치유 뒤에 제자 됨에 관한 두 이야기가 놓인 것도, 예수님의 큰 능력을 경험하는 일과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나병 환자에게 깨끗해짐을, 백부장의 종에게 고통에서의 회복을, 베드로의 장모에게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삶을, 폭풍 속의 제자들에게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을,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요구하지 않는 편안한 권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하게 의지하던 안정과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하도록 요구하시고, 그 앞에서 거짓된 세력은 물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예수님께서 가장 크게 칭찬하신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백부장입니다. 그는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직접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오시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권위를 믿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관해 많이 아는 것과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반드시 같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적다고 책망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예수님께 구해 달라고 외쳤고, 예수님은 그들을 구하셨습니다. 이 장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크기만을 끊임없이 측정하면서 스스로를 판단하기보다, 믿음이 향해야 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보아야 합니다.
마태는 마지막 사람들의 요청을 자세히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저 온 도시 사람들이 나왔고,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간청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침묵은 앞서 백부장이 했던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라는 말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같은 예수님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랐습니다. 마태복음 8장은 그 두 반응을 한 장 안에 남겨 둡니다.
바다 건너편의 길에는 이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억압하던 세력이 물러나 있습니다. 돼지 떼는 사라졌고, 도시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앞에 계신 예수님께, 자기들의 지역에서 옮겨 가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8–9장의 기적 이야기들이 세 사건씩 묶이고, 그 사이에 제자 됨에 관한 가르침이 배치되어 있다는 문학적 구조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기적과, 그 권위 앞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제자 됨의 이야기가 서로를 해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