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기적과 제자 파송

그저 말씀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아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마태복음 8장에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백부장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집으로 와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병든 종을 직접 만져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듣고 놀라시며, 이스라엘의 누구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같은 장의 마지막에는 정반대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지나갈 수 없도록 길을 막고 있던 귀신 들린 두 사람을 풀어 주십니다. 하지만 그 일을 들은 도시의 주민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들의 지역을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시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권위를 눈앞에서 확인하고도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앞 장에서 무리는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것에 놀랐습니다. 이제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그 권위가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를 넘어, 병든 몸과 무너진 삶, 거센 바람과 바다, 귀신들의 세계에까지 미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의 능력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능력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예수님 앞에 절합니다. 백부장은 말씀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구해 달라고 외치면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아봅니다. 도시 주민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알아보는 것과 그 권위를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고치시고, 어떤 권위를 행사하시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산 아래에서 시작하여 바다 건너편에 이르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98장 본문 읽기 →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아니면 깨끗하게 하시겠습니까

마태복음 8:1–4 본문 →

나병에 걸린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절하며 말했습니다.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8:2 · 두루새김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앞에 첫 번째로 등장한 사람은 나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그는 「저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지 묻지 않고, 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뜻에 자신의 요청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능력을 자신에게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고치다」가 아니라 「깨끗하게 하다」일까요?

병을 고치는 것과 깨끗하게 되는 것

성경에서 「나병」이라고 번역되는 말은 오늘날 한센병이라는 특정 질환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3–14장에서 다루는 피부 질환은 여러 종류의 피부 이상을 포함하므로, 이 사람이 정확히 어떤 병을 앓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태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율법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3장은 특정한 피부 질환을 앓는 사람을 제사장이 검사하여 정결한지 부정한지 판별하도록 정하고, 부정한 상태로 판정된 사람은 공동체와 함께 생활하는 데 제한을 받았습니다. 레위기 14장은 그 질환이 나은 사람에게 정결 의식을 행하도록 정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몸이 낫는 것만이 아니라, 정결함을 인정받고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가장 놀라운 행동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일어납니다.

예수께서는 손을 뻗어 그 사람을 만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겠다. 깨끗해져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마태복음 8:3 · 두루새김

왜 굳이 만지셨을까요? 뒤에 나오는 백부장의 종은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지 않으셔도 낫고, 같은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말로 귀신들을 내쫓으십니다. 예수님께는 말씀만으로도 고치실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만지십니다.

일반적으로 부정한 상태와의 접촉은 정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그리는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접촉으로 부정함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깨끗해집니다. 다만 이 사건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다거나 정결 의식상 부정해지셨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런 판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환자는 「원하시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 그렇게 하겠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환자는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끗해져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환자가 예수님께 맡겼던 가능성이 예수님의 뜻과 말씀 안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권위는 자신의 힘을 뽐내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시고, 그가 간절히 바라는 회복을 이루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왜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을까

그런데 이야기는 병이 나은 순간에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조심해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다만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제물을 바쳐라.」마태복음 8:4 · 두루새김

레위기 14장에 따라 정결 상태를 확인하고 제물과 의식을 다루는 역할은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지만, 그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회복을 인정받는 데 필요한 절차도 따르도록 하십니다.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러 오셨다는 산상 설교의 말씀(5:17)이 여기서 실제 사건과 연결됩니다.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이 누구를 향한 증거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제사장들에게 그의 정결함을 입증하는 증거라는 이해가 있고, 더 넓게 이스라엘에게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일을 증언하는 의미라는 이해도 있는데, 이 구절은 그 대상을 풀어 주지 않으므로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섣부른 소문을 경계하신 것인지, 정결 확인 절차를 먼저 따르게 하시려는 것인지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병만 고치시고 관심을 거두지 않으시고, 그가 회복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곧이어 등장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직접 만지실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만 해 주십시오 — 권위를 알아본 백부장

마태복음 8:5–13 본문 →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평범한 주민이 아니라 한 백부장이 다가와 간청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던 중심 지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백부장은 군대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교입니다. 마태는 그가 어느 군대에 속해 있었는지 밝히지 않지만, 이야기의 흐름과 이어지는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온다는 말씀을 고려하면 이 백부장을 이방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주님, 제 종이 몸이 마비된 채 집에 누워 몹시 고통받고 있습니다.」마태복음 8:6 · 두루새김

「종」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파이스(παῖς)는 문맥에 따라 아이나 아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집안의 종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이 백부장의 아들인지 종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뒤에서 백부장이 자신의 종에게 명령한다고 말하므로 종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아들일 가능성까지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겠다.」마태복음 8:7 · 두루새김

이 문장은 평서문으로도 의문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평서문으로 읽으면 예수님께서 먼저 고쳐 주실 뜻을 밝히신 것이고, 의문문으로 읽으면 자신이 가서 고쳐야 하느냐고 물으시며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시는 문제를 꺼내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어 필사본의 문장부호만으로 결정하기 어려워 두 읽기 모두 논의되어 왔으며, 두루새김은 평서문으로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백부장의 대답을 보면 이야기의 핵심이 선명해집니다.

백부장이 대답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복음 8:8 · 두루새김

왜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는 다음 문장이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 권위를 알아보다

「저도 윗사람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고, 제 아래에는 병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병사에게 『가라』 하면 가고, 다른 병사에게 『오너라』 하면 옵니다. 제 종에게 『이 일을 해라』 하면 그대로 합니다.」마태복음 8:9 · 두루새김

그는 명령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윗사람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속한 지휘 체계 안에서 그의 명령은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 권위를 지닌 말이고, 그래서 부하들은 그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자신의 명령이 병사들을 움직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더 큰 힘을 갖겠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9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진 이처럼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원문에서는 8:9의 백부장도 같은 「권위」(ἐξουσία)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신뢰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윗사람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산 위에서 무리가 놀랐던 바로 그 권위를, 이 백부장은 병든 종을 고치는 일에도 적용한 것입니다.

보통 병을 고쳐 달라는 사람은 고쳐 줄 사람이 찾아와 직접 상태를 확인하고 손을 대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가 예수님께서 직접 손을 뻗으실 수 있는 거리보다 훨씬 멀리까지 미친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나병에 걸린 사람에게 손을 뻗으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병든 사람을 만나지 않으시고도 고치십니다.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예수님의 능력은 특정한 치유 방식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신 이유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듣고 놀라, 따라오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이스라엘에서 누구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마태복음 8:10 · 두루새김

지금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말을 듣고 놀라십니다.

여기서 믿음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기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어떤 권위를 가지고 계신지 인정했고, 그 권위를 마음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으로 오셔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특정한 방법으로 고치셔야 한다고 지시하지도 않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한 사람의 믿음에 관해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시야를 넓히십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오는 사람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동쪽과 서쪽에서 많은 사람이 와서, 하늘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기대어 누워 식사할 것이다.」마태복음 8:11 · 두루새김

당시 식사 자리에서 기대어 눕는 것은 식탁에 참여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이 함께 식탁에 앉는 잔치로 그리십니다. 그런데 이 장면 다음에 엄중한 경고를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자녀들은 바깥 어둠으로 쫓겨날 것이다.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복음 8:12 · 두루새김

「그 나라의 자녀들」은 그 나라에 속한다고 기대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이어지는 신분만으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경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버리셨다는 선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믿음을 발견하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민족 전체를 한꺼번에 판단하기보다, 참된 믿음 없이 신분만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멀리서 왔지만 잔치에 참여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잔치에 속한다고 생각했지만 바깥으로 쫓겨납니다. 누가 가까이 있고 누가 멀리 있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뒤바뀝니다. 백부장은 혈통 관계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고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이루어져라.」 그 종은 바로 그때 나았습니다.마태복음 8:13 · 두루새김

백부장은 예수님께 병든 종을 고치는 방법을 알려 드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이 신뢰를 두고 있음을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시며 종을 고치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인 사람들이 조상들과 함께하는 잔치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위하여 풍성한 잔치를 마련하시는 이사야 25:6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창세기 12:3의 약속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8:11은 이 두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 여러 민족을 향해 열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이 내리고 여자가 일어나다

마태복음 8:14–16 본문 →

백부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장소가 다시 바뀝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 베드로의 장모가 열이 나서 누워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마태복음 8:14 · 두루새김

이번에는 나병도, 마비도 아닌 열병이고, 그 사람은 특별한 직위나 사회적 지위로 소개되지 않는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이번에는 누구도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간청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행동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의 손을 만지시자 열이 내렸습니다. 그 여자는 일어나 예수를 섬겼습니다.마태복음 8:15 · 두루새김

마태는 이 일을 놀라울 만큼 간결하게 기록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는 다른 사람을 돌보거나 필요한 일을 하며 섬기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단순히 복종한다는 뜻보다 실제적인 도움과 봉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병 때문에 누워 있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 자신의 몸을 움직여 누군가를 섬길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됩니다. 마태는 그녀의 회복을 열이 내렸다는 말로 끝내지 않고 그 행동까지 기록합니다. 치유는 그녀의 몸에 일어난 변화이면서, 그녀가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사건입니다.

병든 사람들을 모두 고치시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들을 많이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께서는 말로 그 영들을 내쫓고 병든 사람들을 모두 고치셨습니다.마태복음 8:16 · 두루새김

나병에 걸린 한 사람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한 사람의 병든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거쳐, 수많은 병든 사람과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 이릅니다. 마태는 고치신 질병의 종류를 모두 기록하지 않지만, 「모두」라는 말로 예수님의 권위가 한두 가지 특별한 질병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말로 영들을 내쫓으시는 모습에서는 앞에서 백부장이 이해했던 바로 그 권위가 다시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태는 여기서 예상 밖의 구약 말씀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병을 짊어진 사람

마태복음 8:17 본문 →

이 일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전해진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우리의 약함을 떠맡고 우리의 병을 짊어졌다.」마태복음 8:17 · 두루새김

마태는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일을 보면서 이사야 53:4를 떠올립니다.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종이 고난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그 종은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버림받으며,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죄악을 짊어지고, 그의 고난이 많은 사람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말씀을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음을 그리는 장면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장면에서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사야가 말한 「우리의 병」

마태는 이사야의 종이 우리의 약함과 병을 짊어졌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실제로 병을 고치신 일에 적용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사야 53장을 오직 죄의 용서에 관한 예언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이사야 53장 전체에서 죄와 고난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지만, 마태는 그 예언을 읽으면서 인간의 몸이 겪는 고통도 함께 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질병을 자신의 몸으로 옮겨 앓으셨다는 뜻일까요? 마태복음 8장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의 질병에 감염되거나 같은 증상을 겪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떠맡고」와 「짊어졌다」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여 그 부담을 감당하는 행동을 표현하며,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일 자체가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제시됩니다.

마태는 이사야의 종이라는 신학적 배경을 가져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일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그들의 문제를 지배하는 능력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그들의 약함과 병을 떠맡고 짊어지는 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처음 세 번의 치유 사건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에게 손을 뻗으신 분.

백부장의 간청을 들으시고 말씀으로 종을 고치신 분.

베드로의 장모에게 다가가 손을 만지신 분.

예수님께서는 이사야가 말한 고난받는 종의 사명과 연결되는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53장의 더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 이 치유 사건들은 이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해로도 이어질 수 있지만, 마태가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자리는 지금 벌어지는 치유 활동입니다. 다만 이것은 모든 믿는 사람이 반드시 질병에서 즉시 낫는다는 약속과는 다릅니다. 백부장에게 하신 「네가 믿은 대로 이루어져라」(8:13)라는 말씀도 믿음의 양이 치유의 결과를 자동으로 만들어 낸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본문은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을 고치신 사건과 그 신학적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께 다음 장면에서는 뜻밖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는 머리를 누일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3:4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우리의 병들」과 「우리의 고통들」을 가리키는 구체적인 낱말들이 사용됩니다. 고대 그리스어 구약은 이 대목을 죄와 고통의 의미가 강조되는 방식으로 옮겼는데, 마태가 사용하는 표현은 이 그리스어 번역보다 히브리어 본문의 질병과 고통이라는 구체적인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인자에게는 머리를 누일 곳이 없다

마태복음 8:18–22 본문 →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고치신 뒤에도 무리가 모여 있는 곳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고 지시하십니다. 바로 이때 한 율법학자가 다가옵니다.

한 율법학자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습니다.」마태복음 8:19 · 두루새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과 관련된 사람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어디로 가시든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를 환영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에게는 굴이 있고 하늘의 새에게는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에게는 머리를 누일 곳이 없다.」마태복음 8:20 · 두루새김

멀리 떨어져 있는 병든 종을 말씀만으로 고치실 만큼 큰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정작 자기 머리를 누일 안정된 장소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는 그 모든 사정을 설명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활동이 한곳에 자리 잡고 안정적인 삶을 꾸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능력 있는 선생님 곁에서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안정되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권위 있는 분이 왜 머리 둘 곳도 없으실까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십니다. 글자 그대로 옮기면 「사람의 아들」인 이 표현은 인간이라는 의미와 연결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자신을 가리키시는 독특한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다니엘 7:13–14에서 다니엘은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나아와 다스릴 권한과 영광과 나라를 받는 환상을 보며, 그의 다스릴 권한은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마태복음은 나중에 예수님의 권위와 다시 오심을 설명하면서 다니엘의 이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사용합니다(24:30; 26:64). 이 한 구절에서 다니엘 7장과의 직접적인 연결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장차 큰 권위를 행사하실 예수님께서 지금은 안정된 거처조차 보장되지 않는 길을 걷고 계신다는 대조가 깊어집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예수님께서 감당하시는 낮은 처지는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말한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먼저 보여 주십니다. 그가 결국 예수님을 따랐는지 마태는 알려 주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그 침묵 때문에 독자는 예수님의 말씀 자체에 더 오래 머물게 됩니다.

아버지를 먼저 묻게 해 주십시오

제자들 가운데 다른 한 사람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먼저 가서 아버지를 묻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마태복음 8:21 · 두루새김

이번 사람은 이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지 않고, 다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도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가족적·종교적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죽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죽은 사람들을 묻게 두어라.」마태복음 8:22 · 두루새김

이 말씀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앞의 「죽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보는 읽기,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어 그의 장례까지 기다리겠다는 요청으로 보는 읽기, 당시의 이차 장례 관습과 연결하는 읽기, 강한 역설로 보는 읽기가 있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느냐에 따라 제자가 미루려던 일이 곧바로 치러야 할 장례인지, 기한 없이 미루어질 수 있는 일인지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본문은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는지, 장례가 어느 단계에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하나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해석이 갈리는 가운데서도 분명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일을 다른 모든 일이 정리된 다음에야 시작할 수 있는 선택적인 활동으로 두지 않으십니다. 「먼저」라는 제자의 요청에, 「나를 따라라」라는 명령으로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을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일이 언제나 잘못이라거나,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포기해야 참된 제자가 된다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특정한 부르심의 자리에서 누구에게 충성하는 일을 앞세워야 하는지 극단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놀라운 치유가 일어났고, 이제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선택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는 권위이면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삶 전체에 요구를 제기하는 권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의 이 부르심은 실제 위험 속으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는 앞의 「죽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뒤의 「죽은 사람들」을 실제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로 보아,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도록 두고 제자는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둘째 읽기는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으며 그가 죽고 장례를 마칠 때까지 기다린 뒤 따르겠다는 요청으로 보아, 기한 없이 미루어질 수 있는 제자 됨에 대한 경고로 읽습니다. 셋째 읽기는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뼈를 다시 거두어 모시던 이차 장례 관습과 연결하여, 그 절차를 마치려면 상당한 기다림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넷째 읽기는 문자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강한 역설, 곧 충격적인 과장 표현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셨다고 봅니다. 본문이 장례의 사정을 밝히지 않으므로 특정한 장례 관습을 이 사건의 확정적인 배경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랐는데

마태복음 8:23–27 본문 →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따라 올랐습니다.마태복음 8:23 · 두루새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한 제자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마태는 실제로 예수님을 따라 같은 배에 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전혀 평온하지 않습니다.

바다가 거세게 출렁이고 물결이 배를 덮쳤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고 계셨습니다.마태복음 8:24 · 두루새김

물결이 배를 덮치고 제자들은 위험에 처했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인자에게는 머리를 누일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흔들리는 배 안에서 잠들어 계십니다. 마태가 두 장면의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나란히 놓인 모습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삶이 늘 편안한 생활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 느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를 깨우며 말했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복음 8:25 · 두루새김

백부장은 예수님께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했고, 제자들은 구해 달라고 외칩니다.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왜 그렇게 겁을 내느냐?」 그러고 나서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습니다.마태복음 8:26 · 두루새김

예수님을 찾았는데 왜 믿음이 적다고 하실까

제자들이 아무 믿음도 없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았고, 도움을 요청할 대상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에서 누구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지만, 자신과 함께 배에 오른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적다고 하십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시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했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같은 배에 계시는데도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를 깊이 신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물결이 배를 덮치고 있었으니, 제자들이 위험을 느낀 데에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책망을 위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모든 감정이 죄라는 뜻으로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위험 속에서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지적하셨지만, 그들을 위험에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적다고 책망받은 제자들도 예수님께 구해 달라고 외쳤고, 예수님은 그들을 구하셨습니다. 이 장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종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 앞에 바람과 바다까지 잠잠해집니다.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시편 107:23–30에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큰 폭풍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통에서 건지시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이 시편 107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배와 폭풍, 위험에 빠진 사람들의 부르짖음, 바다가 잠잠해지는 장면은 주제 면에서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시편 89:9에서도 하나님께서 거친 바다를 다스리고 파도를 잠잠하게 하신다고 찬양합니다.

구약에서 바다의 거센 힘을 다스리는 권위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마태는 구약에서 하나님께 속한 권위가 예수님의 행동 안에서 나타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지막 질문은 단순한 감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도 바다도 그의 말을 따르는가?」마태복음 8:27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바람도 바다도 예수님의 말을 따르는 것을 보았지만, 그런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신 것은 한 사람의 믿음이었고, 사람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의 권위였습니다.

이 두 놀라움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지만,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바다 건너편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아보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왜 여기 오셨습니까

마태복음 8:28–32 본문 →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에 이르시자, 귀신 들린 두 사람이 무덤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몹시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마태복음 8:28 · 두루새김

마태는 그들의 이름이나 지난 삶을 설명하지 않고, 그들의 상태를 아주 짧게 말합니다. 그들 때문에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두 사람 자신의 삶뿐 아니라 그 지역을 오가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자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에게 고통을 주려고 여기 오셨습니까?」마태복음 8:29 · 두루새김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다

바다에서 사람들은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질문하지 않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경험하고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묻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귀신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귀신들에게 믿음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기 위해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고통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라는 말에서, 귀신들은 자기들에게 고통이나 심판이 닥칠 정해진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도착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셨는데, 이제 귀신들은 자신들이 고통받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누구에게는 회복의 소식이고, 누구에게는 심판의 위협이 되는 것입니다.

단 한마디의 명령

그 지역에는 큰 돼지 떼가 먹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께 간청했습니다. 「우리를 내쫓으신다면 저 돼지 떼 속으로 보내 주십시오.」마태복음 8:31 · 두루새김

왜 그런 요청을 했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마디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귀신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귀신들은 두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돼지 떼 전체가 벼랑을 내달려 바다로 뛰어들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마태복음 8:32 · 두루새김

예수님은 귀신들을 내쫓기 위해 길고 복잡한 의식을 행하지도, 귀신들과 힘겨운 협상을 벌이지도 않으십니다. 마태는 돼지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귀신들이 그 결과를 의도했는지, 돼지의 죽음이 가져온 경제적 손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직접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예수님의 명령 앞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이 장의 여러 사건이 하나의 흐름으로 모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병에 걸린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종을 고치셨습니다.

말로 영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귀신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 모든 사건에서 예수님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이토록 큰 권위를 보이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을 구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깊이

이곳의 이름은 마태복음의 여러 사본에 가다라, 거라사, 게르게사로 서로 다르게 나타나며, 두루새김은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으로 옮겼습니다. 가다라는 갈릴리 호수 동남쪽에 있던 도시였고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이 반드시 도시 중심부 자체를 가리키지는 않지만, 다른 복음서와 사본들의 지명 차이를 고려하면 정확한 장소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마가복음 5:1–20은 이와 대응되는 사건을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데, 이 차이를 억지로 하나로 합치기보다 마태가 두 사람이라고 기록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는 악한 영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을 기대하던 유대 묵시문학의 전통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고, 성경 밖의 유대 문헌들에도 악한 영들의 활동이 제한되거나 심판을 받는 때에 관한 기대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만으로 귀신들이 세상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의 시간표를 정확히 알고 있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돼지는 레위기 11:7–8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정한 동물로 규정되며, 돼지 떼가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이방 문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그것만으로 지역 주민들이 모두 어느 민족에 속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간청한 사람들

마태복음 8:33–34 본문 →

돼지를 돌보던 사람들이 달아나 도시로 가서, 돼지 떼에 일어난 일뿐 아니라 귀신 들렸던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도 알립니다. 그러자 도시의 주민들이 나옵니다.

온 도시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러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보고 자기들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마태복음 8:34 · 두루새김

그 지역에는 몹시 사나운 귀신 들린 두 사람 때문에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귀신들을 내쫓으시자 그 두 사람에게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예수님께 머물러 달라고 하지 않고, 자기들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많은 돼지가 한꺼번에 죽은 경제적 손실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고,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예수님의 권위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설명은 같은 사건을 다루는 마가복음 5:15과 누가복음 8:37이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기록하는 데서 근거를 얻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8장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경제적 손실을 사람의 회복보다 중요하게 여겼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마가복음 5장은 고침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장면과 자신의 지역에 돌아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리는 장면을 계속 기록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온 도시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에서 멈춥니다. 이 선택 때문에 독자는 불편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눈앞에 드러났는데도 사람들은 왜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한 분의 권위, 서로 다른 반응

마태복음 8:1–34 본문 →

마태는 여러 기적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한 분의 권위를 만난 사람들의 서로 다른 반응을 이어 놓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과 백부장은 예수님께 회복을 구했고 예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그 뒤에 놓인 두 제자 이야기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익숙하게 의지하던 안정과 먼저 해야 한다고 여기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는 길임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에 있으면서도 두려워했고, 귀신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알아보고 두려워했으며, 도시 주민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요청했습니다.

이 가운데 예수님께서 가장 크게 칭찬하신 사람은 백부장입니다. 그는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직접 보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오시기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이 칭찬받은 것은 자신의 믿음을 자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위를 알아보았기 때문이고, 예수님은 그 권위를 고통받는 종을 고치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들을 살리고 회복시키지만, 모든 존재에게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태는 주민들의 요청을 자세히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저 온 도시 사람들이 나왔고,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간청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침묵은 「그저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던 백부장의 말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바랐습니다.

바다 건너편의 길에는 이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억누르던 세력이 물러나 있습니다. 돼지 떼는 사라졌고, 도시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앞에 계신 예수님께, 자기들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