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산에서 한 가르침
말씀을 듣고도 무너지는 집
예수님은 산 위에서 긴 가르침을 마무리하시며 두 채의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두 사람 모두 집을 지었습니다. 한 사람은 바위 위에, 다른 사람은 모래 위에 지었습니다. 그리고 두 집에 똑같이 비가 내리고,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닥칩니다.
한 집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집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집을 지은 장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십니다.
한 사람은 듣고 행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듣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지 않은 사람과 들은 사람을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똑같이 들었지만 서로 다르게 살아간 두 사람을 비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복을 선언하시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설명하시고, 하늘의 아버지를 믿으며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그 모든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계십니다.
그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곧바로 실천하라는 명령부터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태도를 경계하십니다. 그러고는 분별력을 요구하시고, 아버지께 구하라고 하시며, 좁은 길과 거짓 예언자들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그분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내쫓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안 적이 없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누가 참으로 자신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인지, 그리고 그분의 권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마지막까지 드러내십니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려는 사람
「너희가 심판받지 않도록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복음 7:1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매우 유명하지만, 동시에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는 것일까요?
그렇게 이해하면 같은 장의 다른 말씀들과 맞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뒤에서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시고,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7:1을 모든 종류의 도덕적 판단이나 분별을 금지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경계하시는 것일까요? 다음 절이 단서를 줍니다.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며, 너희가 쓰는 잣대로 너희에게도 재어 줄 것이다.」마태복음 7:2 · 두루새김
「잣대」는 어떤 것을 재고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그 기준이 우리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장에는 누가 마지막으로 심판하는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상 설교 전체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보상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포함하는 경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기준을 세우는 행동 자체보다, 자신은 그 기준 밖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지만 다른 사람의 분노는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실수는 특별한 상황 때문이지만 다른 사람의 실수는 그 사람의 인격 때문이라고 단정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균형을 문제 삼으시고, 이 문제를 잊기 어려운 그림으로 보여 주십니다.
눈에 들어간 티와 들보
「너는 왜 네 형제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는 알아채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3 · 두루새김
「작은 티」는 눈에 들어간 작은 나뭇조각이나 부스러기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반면 「들보」는 건물의 틀을 지탱하는 커다란 나무입니다. 자기 눈에는 거대한 들보가 들어가 있어서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들어간 작은 티를 빼 주겠다고 나서는 장면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형제의 눈에 티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티는 실제로 있습니다. 문제는 그 티를 발견한 사람의 눈에 있습니다. 그는 형제의 문제를 아주 잘 보면서 자신의 문제는 알아채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서 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도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7:5 · 두루새김
예수님은 들보를 빼낸 다음에는 형제의 티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야 눈이 잘 보여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도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 자체가 목적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일에 앞서 자신이 제대로 볼 수 있는 상태인지 살펴야 합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도움을 주려다가 오히려 더 아프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눈의 문제를 먼저 다룬 사람은 상대방의 문제를 더 분명하게 보고, 더 알맞게 도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심판과 도움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심판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잘못을 근거로 그를 낮추거나 죄인으로 몰아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다시 잘 볼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비유에서 티를 빼내는 일이 성공한다면 도움을 얻는 사람은 티가 빠진 형제입니다.
상대방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를 돕고 싶은 것인지.
그리고 이제 이 가르침에 예상 밖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랬다가는 그것들이 진주를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복음 7:6 · 두루새김
앞에서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의 가르침과 어떻게 이어질까요?
비유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결합입니다. 거룩한 것과 개, 진주와 돼지. 진주는 귀한 것이지만 돼지에게는 그것을 귀하게 여길 이유가 없습니다. 귀중한 것을 아무렇게나 내던지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것」과 「진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아, 해석이 셋으로 갈립니다. 받아들일 뜻이 없는 사람에게 귀중한 가르침을 억지로 강요하지 말라는 읽기, 형제를 바로잡는 데에도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읽기,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함부로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위험까지 포함한 경고라는 읽기입니다. 비유의 구체적인 대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한 해석을 확정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드러나는 한 가지 원칙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붙이지 말라는 명령은 상황을 분별하지 말라는 명령과 같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 말이 실제로 도움이 될지, 오히려 더 큰 적대와 위험을 일으킬지는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근거로 특정한 민족이나 사회적 집단을 개나 돼지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절에서 그런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지 않으십니다. 자신은 언제나 진주를 가진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언제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앞에서 경고하신 위선에 다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형제를 죄인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겸손과,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분별력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의 잘못도 인정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면서도 상대방을 함부로 죄인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는 「거룩한 것」과 「진주」를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으로 보는, 널리 알려진 해석입니다. 둘째 읽기는 바로 앞의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장면과 연결해,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충고조차 적대적인 반응을 불러올 수 있다고 봅니다. 셋째 읽기는 이 말씀을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함부로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위험까지 포함하는 경고로 읽습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라
「구해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 · 두루새김
「구해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행동입니다. 찾는다는 것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발견하려는 행동입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열어 주기를 바라는 행동입니다. 세 장면은 모두 자신에게 아직 없는 것을 향해 움직이는 사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사람의 자격부터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무엇을 얼마나 잘해야 구할 자격이 생기는지 말씀하지 않고, 먼저 구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고, 찾는 사람은 찾으며,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8 · 두루새김
이 말씀을 모든 기도가 요청한 내용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으로 읽을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비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너희 가운데 자기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태복음 7:9 · 두루새김
「또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겠느냐?」마태복음 7:10 · 두루새김
질문 자체가 대답을 요구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빵과 생선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돌과 뱀은 그 요청에 맞는 선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좋은 아버지가 자녀의 요청을 일부러 나쁘게 비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탕에 두십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뜻밖입니다.
「악한 너희도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11 · 두루새김
예수님은 사람들을 완전한 존재로 그리지 않으십니다.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사람도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압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이 설명은, 하늘의 아버지의 선하심이 더욱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하는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자녀가 구하는 것과 자녀에게 실제로 좋은 것이 언제나 같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심은 자녀의 모든 요구를 기계적으로 들어주는 데 있지 않고,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응답되지 않은 기도와 인간의 고통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왜 어떤 기도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믿음의 근거를 기도하는 사람의 말솜씨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의 선하심에 두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과 이어 읽으면 또 하나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도 아버지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의 아버지가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씀을 마치신 뒤,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야 할 선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그러므로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너희도 그들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다.」마태복음 7:12 · 두루새김
흔히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거짓말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남에게 상처 주지 말라는 금지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런 금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넘어, 적극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기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 도와주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있을 때 먼저 도울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공정하게 대해 주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이 잘못했을 때도 공정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너희도」라는 표현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기다리는 자리에서, 내가 그 사람에게 행하는 자리로 움직이게 합니다. 좋은 대우를 받기 원하는 사람에서 좋은 대우를 베푸는 사람으로 시선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다른 사람의 상황과 바람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해도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실제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고, 내가 같은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대우받기를 원할지 생각해 보는 것이 이 명령의 출발점입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이 다시 등장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말씀의 끝에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언급하셨을까요?
앞서 5:17에서 예수님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로 오랜 가르침이 이어졌고, 이제 7:12에서 다시 율법과 예언자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 반복은 두 구절 사이의 말씀들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황금률이 구약의 모든 율법을 세부 조항까지 대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과 예언자들이 가리키는 삶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씀으로 제시됩니다. 7:12는 산상 설교에서 제시하신 의가 어떤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짧게 모아 보여 줍니다.
자신에게 좋은 대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악하게 행동하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이 바라는 선을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제 산상 설교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가르치신 길에 관해 마지막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씀은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 명령과도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뒤에 마태복음 22:37–40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달려 있다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과 비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며,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마태복음 7:13 · 두루새김
앞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넓은 문에는 널찍한 길이 이어지고, 좁은 문에는 비좁은 길이 이어집니다. 두 길의 차이는 단순히 편리함과 불편함이 아니라, 그 길이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하나는 멸망으로 이끕니다. 다른 하나는 생명으로 이끕니다.
왜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은가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길도 비좁으며, 그 길을 찾는 사람은 적다.」마태복음 7:14 · 두루새김
문은 「좁고」, 길은 「비좁으며」라고 표현됩니다. 길을 묘사하는 말은 단순히 폭이 좁다는 뜻을 넘어, 좁혀지고 압박받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은 널찍한 반면, 다른 쪽은 압박과 어려움을 떠올리게 하는 길입니다. 다만 누가 그 길을 좁혔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어려움을 뜻하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좁은 길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앞의 가르침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잘못을 먼저 돌아보라고 하셨고, 원수를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지 않으며, 재물을 주인으로 삼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삶이 언제나 편안하고 사람들이 환영하는 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기에, 비좁은 길을 이 삶의 어려움과 연결하는 것은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좁은 길을 고통이 많은 인생 자체와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좁은 길을 걷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은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며, 그 방향이 중요합니다.
적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것은
앞서 7:7에서는 찾으면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생명으로 이끄는 길을 「찾는 사람은 적다」고 하십니다. 앞에서는 찾는 사람을 향한 약속이 주어졌고, 여기서는 생명의 길을 발견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반복만으로 두 절이 의도적으로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적다」는 말을 근거로 마지막에 구원받을 사람의 비율을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두 길의 성격과 결말을 대조하시면서 생명의 길을 선택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런데 길이 좁다는 사실만으로 누가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지 판단할 수 있을까요? 어려움을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참된 지도자일까요?
예수님은 곧바로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길을 묘사하는 그리스어는 누르거나 압박한다는 의미의 동사에서 나온 완료 수동 분사이고, 두루새김은 이를 「비좁으며」로 옮겼습니다. 7:14의 첫머리에는 판본에 따른 차이도 있습니다. 일부 사본의 읽기는 앞 절과 연결되는 이유 설명이고, 다른 사본의 읽기는 좁음을 강조하는 감탄형으로 이해됩니다. 이 차이가 길의 좁음과 생명이라는 목적지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 두 길의 대조에는 구약의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신명기 30:15–20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앞에 생명과 복, 죽음과 재앙을 놓고 생명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시편 1편에서도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서로 다른 결말로 향합니다. 직접적인 구약 인용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삶의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는 물음이 이어집니다.
양의 옷을 입은 늑대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해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사납게 먹이를 잡아먹는 늑대다.」마태복음 7:15 · 두루새김
겉으로는 양처럼 보이지만, 속은 다른 존재를 해치고 빼앗는 늑대입니다. 밖에서 공격하는 늑대는 쉽게 경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의 모습을 하고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늑대는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로 그들을 알아볼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거나 가시풀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태복음 7:16 · 두루새김
예수님은 그들의 말솜씨로 알아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얼마나 종교적인 옷을 입었는지, 얼마나 경건하게 보이는지 확인하라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열매로 알아보라고 하십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있을까
포도와 무화과는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열매이지만, 가시나무와 가시풀은 그런 열매를 맺는 식물이 아닙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나무가 겉으로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실제로 무엇을 만들어 내느냐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예언자들의 열매란 무엇일까요? 본문은 구체적인 점검 목록을 제시하지 않으므로, 열매를 하나의 기준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전하는 가르침의 내용, 그들의 삶과 행동,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영향을 모두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장의 뒤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일을 강조하신다는 점을 고려하면, 열매를 실제 삶과 분리해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거짓 예언자에 대한 경고와도 연결됩니다. 신명기 13:1–3에서 모세는, 어떤 예언자가 말한 표징이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더라도 그가 다른 신들을 따르자고 한다면 그 말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표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참된 예언자라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경고는 곧 이어질,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장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열매는 순간적인 인상과 다르다
양의 옷은 입었다가 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원하는 열매를 아무렇게나 골라 맺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비유를 어떤 사람의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 그 사람을 영원히 확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라는 그림을 통해, 사람이 주장하는 신분과 실제 삶이 어긋날 수 있고 그 실제 모습이 결국 드러난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맺는 열매로 그들을 알아볼 것이다」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그 사이에는 엄중한 경고가 놓여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베어져 불에 던져진다.」마태복음 7:19 · 두루새김
이 장면은 판단 기술을 가르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함께 바라보게 합니다. 7장 첫머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앞에서 실제 삶의 열매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분명히 하십니다.
성급하게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과,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지 않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문제는 잘못된 지도자를 알아보는 데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도 심각하게 자신을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 하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이다.」마태복음 7:21 · 두루새김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경고하십니다. 그것도 같은 호칭을 되풀이하는, 간절함이나 강한 확신으로 들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잘못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그 고백과 실제 삶이 서로 분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놀랍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할 것이다.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마태복음 7:22 · 두루새김
「주님의 이름으로」가 세 번 나옵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을 근거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평가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안 적이 없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복음 7:23 · 두루새김
「안 적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존재를 모르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계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관계의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누가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는지를 말씀하시는 분
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언을 하시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정보를 전달하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사람들에게 판정을 선언하실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한 기적들은 모두 거짓이었을까요? 그들이 실제로 예언하고 귀신을 내쫓고 기적을 행했는지, 아니면 그렇게 했다고 주장할 뿐인지 본문은 판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핵심은 같습니다. 놀라운 종교적 활동을 했다는 주장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삶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거짓 예언자의 열매를 보라고 하셨던 말씀이 여기서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이름이 얼마나 알려졌는지, 얼마나 큰 능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하는지보다, 실제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으로 옮긴 그리스어는 아노미아(ἀνομία)입니다. 법이 없는 상태, 법을 어기거나 무시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산상 설교를 시작하면서 율법을 이루러 오셨다고 하신(5:17) 예수님께서, 7:12에서는 받기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것을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라 하시고, 설교의 마지막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들을 거절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이끄는 삶을 무시해도 된다는 허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성취를 쌓아 구원을 얻는다는 공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마태복음 전체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와 용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일 역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이유로 이 경고를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입술의 고백과 실제 삶이 갈라지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또한 이 경고는 남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쉽습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가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인지, 누가 마지막에 받아들여질지를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다른 사람을 성급하게 심판하지 말라는 경고로 시작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의 마지막 운명을 우리 마음대로 판정하라는 초대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긴 설교를 하나의 비유로 마무리하십니다.
같은 말씀을 듣고 다른 집을 지은 사람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바위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복음 7:24 · 두루새김
「그러므로」는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 앞서 하신 말씀들을 바탕으로 한 마지막 결론을 알립니다. 「나의 이 말」은 산 위에서 지금까지 가르치신 말씀을 가리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집을 잘 꾸미거나 값비싼 재료를 사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바위 위에 집을 지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에 비유됩니다.
슬기로움은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대로 행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비와 강물과 바람이 몰아치다
「비가 내리고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다. 그러나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바위 위에 기초를 놓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7:25 · 두루새김
비가 조금 내려 집이 젖는 정도가 아닙니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집을 때리는 심각한 위협입니다. 집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비와 강물과 바람이 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본문은 폭풍의 강도를 낮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복음 7:26 · 두루새김
이번에도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듣는 경험에서는 두 사람이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는 그다음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똑같은 폭풍이 찾아옵니다.
「비가 내리고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다. 그러자 집은 엄청나게 무너져 내렸다.」마태복음 7:27 · 두루새김
두 장면의 문장은 거의 똑같습니다. 마태는 비와 강물과 바람을 반복하면서 두 집이 같은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과가 달라집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폭풍을 피했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어디에 기초를 놓았느냐입니다.
폭풍이 오기 전에는 무엇이 달랐을까
예수님은 두 집이 겉으로 어떻게 달랐는지, 어느 집이 더 크고 아름다웠는지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설명하시는 차이는 기초뿐입니다. 그 차이는 폭풍이 찾아왔을 때 결정적인 의미를 드러냅니다.
이것은 앞서 열매에 관해 말씀하신 내용과도 연결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나지만 열매가 그들의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집도 마찬가지로, 겉으로 세워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초가 든든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폭풍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난과 어려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7:21–23에서 「그날」의 심판이 언급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지막 심판을 떠올리게 하는 비유로 읽을 근거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반드시 서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비와 강물과 바람을 특정한 사건과 하나씩 짝짓지 않습니다. 폭풍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보다, 폭풍 앞에서 두 집의 결말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강조됩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더 많은 지식을 가지거나 더 열정적으로 반응한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사람입니다.
왜 「나의 이 말」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의 이 말」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사람의 삶이 무너질지 무너지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제시하십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말씀하셨고, 자신에게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직접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사람에 비유하십니다. 이 세 장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설득하시는 교사만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을 사람의 삶을 세우는 기준으로 제시하시는 분임을 점점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여기서 끝내지 않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까지 기록합니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는가
예수께서 이 말을 마치시자 무리는 그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마태복음 7:28 · 두루새김
그들의 율법학자들과 달리, 예수께서는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7:29 · 두루새김
산상 설교는 사람들의 놀라움으로 끝납니다.
「권위 있게」로 옮긴 표현에서 권위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입니다. 문맥에 따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이나 권위,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한 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당시 율법학자들이 아무런 권위가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그들의 가르침은 전해 내려온 율법과 그 해석에 근거했습니다. 예수님도 구약의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은 반복해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자신의 권위로 선언하셨고, 설교의 끝에서는 자신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가 강조하는 차이는 율법학자들이 언제나 틀렸고 예수님만 옳으셨다는 단순한 대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권위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구별이 남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러나 놀랐다는 사실과 말씀대로 행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마태는 무리가 예수님의 권위에 놀랐다고만 기록할 뿐, 그들이 그 말씀대로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바로 이 침묵이 마지막 두 집의 비유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서
마태복음 7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실제 삶의 차이를 점점 더 분명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발견할 만큼 예리한 사람이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양의 옷을 입은 늑대가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정작 그분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명령을 인간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라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눈에 들보가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하늘의 아버지께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아버지께 구하며, 그분의 말씀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말씀하시는 분은 지혜로운 가르침을 전하는 교사로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생명의 길로 제시하시고, 자신이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감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말씀 위에 삶을 세우는 것입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끝났습니다.
무리는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들은 이야기는 두 채의 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두 집 모두 비와 강물과 바람을 피하지 못했고, 마태는 그 무너짐을 「집은 엄청나게 무너져 내렸다」고 간단히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별한 종교적 성취도, 사람들의 칭찬도, 입술로 부르는 「주님」이라는 호칭도 마지막 비유의 기준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같은 비가 내리고, 같은 강물이 밀려오고, 같은 바람이 불어닥친 자리에서 한 집은 남아 있고, 다른 집은 무너져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