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산에서 한 가르침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보시는 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선한 일을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얼핏 당연하게 들립니다. 남에게 칭찬받으려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경건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기도한다면 진정성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을 자세히 읽으면 조금 더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하십니다. 금식할 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행하라고 하시더니, 뒤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경계하십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마라」 하시고,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과 기도와 금식에 관한 말씀에서 시작하여 재물과 생계의 걱정으로 이어지는 이 가르침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건이 문제였습니다. 나중에는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고 내일을 걱정하는 삶이 문제입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자리에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십니다.

우리는 누구의 시선 아래에서 살고 있으며, 누구에게 우리의 삶을 맡기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자신의 삶을 맡깁니다. 재물에 매여 사는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미래를 맡깁니다. 내일의 먹을 것을 끊임없이 걱정하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삶의 한가운데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소개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보십니다. 자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 들풀을 입히십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126장 본문 읽기 →

선한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다

마태복음 6:1–4 본문 →

「옳은 일을 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복음 6: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5:16에서 제자들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6:1에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두 말씀이 모순되는 것일까요?

결정적인 차이는 「보이려고」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5장에서는 사람들이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6장에서는 사람들이 보도록 하는 것이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 자신의 목적이 됩니다.

문제는 선한 일이 공개되느냐 숨겨지느냐 자체가 아닙니다. 누구의 영광을 위해 그 일을 하느냐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 모두 필요한 돈을 건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너그러움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돈을 줍니다. 행동의 겉모습이 같더라도 그 행동을 통해 얻으려는 것이 다릅니다.

여기서 「옳은 일」은 원문에서 「의」(δικαιοσύνη)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6:1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뿐 아니라 이어지는 기도와 금식까지 아우르는 원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상을 다 받은 사람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마라.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회당과 골목에서 그렇게 한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다 받았다.」마태복음 6: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얻으려던 것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면, 그 칭찬이 그들의 상입니다.

「다 받았다」는 더 받을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유익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옳은 일이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보상으로 끝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마태복음 6:3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재미있을 만큼 과감합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한 사람의 몸에 속합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마저 자신의 선행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는 모습을 그리신 것입니다.

자신이 남을 도운 일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스스로를 칭찬하거나,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지 말라는 과장된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면, 도움받는 사람조차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네가 돕는 일을 남몰래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네가 남몰래 하는 일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4 · 두루새김

「남몰래」라는 표현은 이 장의 열쇠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 일을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늘의 아버지입니다.

아무도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그 선한 일이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상의 방식이나 시기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의 중심은 무엇을 얼마나 되돌려 받느냐보다, 누구 앞에서 그 일을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든 선한 일을 자신의 명예로 바꾸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6:1의 「옳은 일」 자리에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는 「구제」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지만, 더 오래된 여러 사본은 「의」로 읽습니다. 또 당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마다 실제로 나팔을 불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선행을 널리 알리는 모습을 과장해서 나타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아버지는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신다

마태복음 6:5–8 본문 →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다 받았다.」마태복음 6:5 · 두루새김

여기서도 문제는 기도 자체가 아닙니다. 회당에서 기도하는 일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일이 잘못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기도는 본래 하나님을 향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경건한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기도한다면, 입으로는 하나님께 말하지만 마음은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기도할 때 안쪽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숨은 곳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해라. 그러면 네가 남몰래 하는 일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6 · 두루새김

안쪽 방은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소 규정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서는 「네가 남몰래 하는 일을 보시는 네 아버지」가 강조되었습니다. 기도에서는 먼저 「숨은 곳에 계신 네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숨은 곳에 들어가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자리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는 아닙니다.

왜 기도를 길게 하면 안 되는가

「기도할 때 이방 사람들처럼 뜻 없이 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면 기도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마태복음 6:7 · 두루새김

「뜻 없이 말을 되풀이하다」(βατταλογέω)로 옮긴 그리스어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타나는 드문 단어로, 말의 반복이나 장황한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긴 기도는 잘못일까요? 마태복음 26:44에서는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같은 말씀으로 다시 기도하십니다.

문제는 말의 양이나 반복 횟수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말을 충분히 많이 하거나 올바른 표현을 반복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기술이 됩니다.

「그러니 그들을 따라 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복음 6:8 · 두루새김

우리는 무언가를 부탁할 때 상대방이 모르는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다면, 왜 기도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기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며, 자신의 필요와 연약함을 그분께 맡기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을 알려 드리는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아시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9–15 본문 →

이제 산상 설교의 중심에 놓인 기도가 시작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기도문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해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기를 빕니다.』」마태복음 6:9 · 두루새김

안쪽 방에서는 혼자 기도하지만,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이시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문을 가르치실 때는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안쪽 방에 혼자 들어간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아버지께 속한 사람으로 기도합니다.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빵을, 「우리의」 빚을, 「우리를」 시험에서 지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인적인 기도를 가르치시면서도 그 기도의 언어 안에 공동체를 담아 놓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빵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의 굶주림에는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빚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용서를 거부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기를

먼저 세 가지 간구가 이어집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기를,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기도는 자신의 필요보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기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지금 거룩하지 않으니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이 누구신지, 그분의 거룩함과 명예가 어떻게 드러나는지와 연결됩니다.

에스겔 36:22–23에서 이스라엘은 여러 나라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큰 이름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며, 그때 여러 나라가 그분이 여호와야훼이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배경에서 읽으면 이 간구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온 세상에 드러내시기를 바라는 요청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빕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마태복음 6:10 · 두루새김

이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언젠가 하늘나라에 가게 해 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방향이 반대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현실이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도 나타나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기도 다음에 빵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나라 다음에 나오는 빵

「『우리에게 필요한 빵을 오늘 주십시오.』」마태복음 6:11 · 두루새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한 뒤, 예수님께서는 가장 평범한 사람의 필요인 먹을거리를 기도에 담으십니다.

「필요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는 드물게 쓰이는 단어여서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해석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빵, 그날의 빵, 다가오는 날의 빵으로 나뉘며, 두루새김의 「필요한 빵」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먹을거리라는 의미를 택한 번역입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서 실제 먹을거리를 기도의 대상에 포함시키셨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이 기도를 영적인 양식만 달라는 요청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 전체에서는 빵이 더 넓은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 기도에서는 우선 일상의 먹을거리라는 의미를 존중해야 합니다.

왜 오늘 필요한 빵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뒤에서 예수님께서는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 구하는 기도와, 내일을 향한 걱정에 삶 전체를 빼앗기지 말라는 가르침은 서로 어울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는 일상의 빵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 안에는 바로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탁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빚도 없애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우리가 없애 주었듯이, 우리의 빚도 없애 주십시오.』」마태복음 6:12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익숙한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보다 구체적인 이미지인 「빚」을 사용합니다. 원문의 단어도 실제로 갚아야 할 빚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면 그 관계 안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그 빚을 스스로 모두 갚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없애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빚을 없애 달라고 요청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빚도 없애 주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의 선행으로 사는 계산법으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두 용서를 매우 엄격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마태복음 6:14 · 두루새김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복음 6:1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을 선택해도 그만인 미덕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태도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다만 실제 삶에서 용서와 화해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과, 상대방을 즉시 신뢰하거나 위험한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피해자에게 위험한 상황을 감수하도록 명령하는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용서란 단순히 나쁜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관계에서 그 빚을 놓아주는 일입니다.

시험에서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지 마시고, 악한 자에게서 구해 주십시오.』」마태복음 6:13 · 두루새김

「시험」(πειρασμός)으로 옮긴 말은 시험이나 유혹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을 죄로 유혹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 1:13은 하나님께서 아무도 악으로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문장의 해석에는 갈림이 있습니다. 시험의 상황 자체를 피하게 해 달라는 간구로 읽을 수도 있고, 시험 속에서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달라는 간구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악한 자」(πονηρός)로 옮겨진 그리스어 표현도 문법적으로 「악」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악의 위협을 이겨 낼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다는 점은 같습니다.

제자들은 마태복음 4장에서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보호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식탁,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 사이의 관계, 하나님의 보호와 사람의 연약함이 하나의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주기도문은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이야기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날마다 필요한 먹을거리를 의지한다는 주제가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이 필요한 먹을거리를 날마다 거두도록 하셨습니다. 또 이사야와 에스겔의 예언 전통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자신의 거룩함을 세상에 나타내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널리 알려진 주기도문의 끝부분인 나라와 권능과 영광에 관한 송영은 일부 사본 전통에 포함되어 있지만, 본문에는 없습니다. 후대 예배 전통에서 널리 사용된 이 송영은 역대상 29:11–13의 찬양과도 연결됩니다.

금식하는 사람의 얼굴

마태복음 6:16–18 본문 →

주기도문과 용서에 관한 말씀을 마치신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오십니다.

「금식할 때에는 위선자들처럼 어두운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금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얼굴을 지쳐 보이게 한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다 받았다.」마태복음 6:16 · 두루새김

구약에서 금식은 회개와 깊은 슬픔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요엘 2:12–13에서는 금식과 울음과 깊은 슬픔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요청이 나오며, 이사야 58장에서는 금식의 의미를 사회의 불의와 연결하여 비판합니다. 금식은 단순히 배고픔을 참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행동입니다.

여기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금식은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금식을 통해 사람들의 존경을 얻으려 한다면, 하나의 욕망을 내려놓으면서 다른 욕망을 만족시키는 셈입니다.

「그러나 너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마태복음 6:17 · 두루새김

이것은 의식 규정이 아니라 평소처럼 단정하게 생활하라는 뜻입니다. 금식한다는 사실을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도 아버지가 보십니다.

기도할 때도 아버지가 보십니다.

금식할 때도 아버지가 보십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에는 또 하나의 자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경건하다고 생각하도록 애쓸 필요가 없다면, 사람들의 평가를 관리하느라 낭비하는 수고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도하면서도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금식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 사람인지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경건한 행동에서 재물의 문제로 옮겨 가십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인정이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무엇을 보물로 여기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마태복음 6:19–21 본문 →

「너희를 위해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벌레가 갉아먹고 녹이 슬어 보물이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친다.」마태복음 6:19 · 두루새김

사람은 소중한 것을 오래 보관하려고 애쓰지만, 그것이 언제나 자신의 손안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재물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를 위해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어라. 하늘에서는 좀벌레가 갉아먹지도 않고 녹이 슬지도 않아 보물이 망가지지 않는다.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않고 훔치지도 않는다.」마태복음 6:20 · 두루새김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방법을 목록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종교 활동을 할 때마다 하늘에 일정한 액수의 보상이 쌓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앞의 문맥과 연결하면 방향이 보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해 돕는 사람이 기대하는 상은 달랐습니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에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가치를 지니는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6:21 · 두루새김

우리는 보통 마음이 향하는 곳에 보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설명도 어느 정도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자신의 것을 계속 쌓아 두는 동안 마음도 그곳에 붙잡힐 수 있습니다. 시간과 돈과 수고를 들이는 행위는 마음의 방향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 방향을 더욱 굳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보물로 삼고 있느냐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눈이 맑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6:22–23 본문 →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다.」마태복음 6:22 · 두루새김

앞에서는 보물에 관해, 뒤에서는 두 주인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갑자기 눈과 몸의 빛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시력이 좋으면 세상이 밝게 보인다는 말로 읽으면 주변 문맥과 연결하기 어렵습니다.

열쇠는 「맑으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하플루스(ἁπλοῦς)에 있습니다. 이 말에는 단순한, 나뉘지 않은, 온전한이라는 의미가 있고, 문맥에 따라 너그러움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바로 다음 절의 「나쁜 눈」은 원문에서 「악한 눈」입니다.

「그러나 네 눈이 나쁘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네 안에 있는 빛마저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크겠느냐!」마태복음 6:23 · 두루새김

이 비유는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하나는 너그러움과 인색함의 대조로 읽는 해석입니다. 고대 유대적 표현에서 악한 눈은 때때로 탐욕이나 인색함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맑은 눈을 나뉘지 않은 시선,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읽는 해석입니다. 보물에 관한 말씀과 두 주인에 관한 말씀 사이에 놓인 위치가 이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어느 하나만이 본문의 확정적인 의미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의 시선, 곧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무엇을 구하는지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재물을 가장 중요한 보물로 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아도 먼저 자신의 손해를 걱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 재물은 더 이상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최종 기준이 아닙니다.

더 무서운 문제는 스스로 빛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어둠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귀한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면, 삶의 여러 선택도 그 기준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결국 어디에서 결정됩니까?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5:9에서는 가난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상황을 경계합니다. 잠언 28:22도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이 재물을 얻으려고 서두르는 모습을 그립니다. 너그러움과 인색함의 대조로 읽는 해석은 이런 배경을 근거로 합니다.

하나님과 재물 — 누구의 종인가

마태복음 6:24 본문 →

「아무도 두 주인의 종으로 살 수 없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에게 충실하고 다른 쪽을 업신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 · 두루새김

「종」(δουλεύω)은 원문에서 노예로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노예는 시간을 나누어 여러 주인에게 충성하는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권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좋아할 수 있느냐는 감정의 문제를 넘어, 누구의 지배 아래 살아가느냐는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재물」은 아람어에서 온 말로 재물이나 소유물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맞서는 존재로 우상이나 악한 영을 떠올리기 쉽지만,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나님과 나란히 놓으십니다. 재물은 먹을 것을 마련하고 가족을 돌보는 데 필요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수단이라는 자리를 넘어 삶 전체를 지배하는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만 이 위험에 놓이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도, 재물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삶 전체를 붙잡힌 사람도 그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재물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재물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래서 다음 절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걱정하지 마라」로 시작합니다. 재물에 관한 이야기와 걱정에 관한 이야기는 별개의 교훈이 아닙니다. 재물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사람의 삶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새들을 보아라

마태복음 6:25–27 본문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지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몸이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으냐?」마태복음 6:2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음식과 옷은 목숨과 몸을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람이 그 수단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동안 정작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잊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보아라. 새들은 씨를 뿌리지도, 곡식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 두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먹이신다.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복음 6:26 · 두루새김

새들은 가만히 앉아서 먹이가 입에 들어오기만 기다리지 않습니다.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둥지를 만들고 새끼를 기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저절로 생긴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새의 생명은 인간이 마련하는 방식의 경제적 보장 없이도 하나님이 돌보시는 창조 세계 안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들을 돌보시는 아버지를 가리키시며, 그 아버지 앞에서 제자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굶주리고 내일의 생활을 걱정하며, 성경도 그런 현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바꾸려 하시는 것은 삶을 지탱하는 가장 깊은 근거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재물의 양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걱정한다고 살 시간이 늘어날까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가 살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복음 6:27 · 두루새김

이 문장은 걱정한다고 키를 더할 수 있느냐는 뜻으로도, 삶의 길이를 늘릴 수 있느냐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걱정이 인간의 능력을 늘려 주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걱정과 실제적인 준비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일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거나 필요한 일을 계획하는 것은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마음속에서 반복하면서도, 그 일을 해결할 능력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자기가 살 시간」으로 옮긴 원문의 단어는 키와 나이를 모두 가리킬 수 있습니다. 원문에 나오는 「한 규빗」은 본래 길이를 재는 단위이므로 키를 가리키는 것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인간의 생명과 걱정을 다루는 문맥에 맞추어 「자기가 살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로 옮겼습니다.

솔로몬의 영광보다 아름다운 들풀

마태복음 6:28–30 본문 →

「또 옷 때문에 왜 걱정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잘 살펴보아라. 들꽃은 힘들게 일하지도, 실을 만들지도 않는다.」마태복음 6:28 · 두루새김

하늘의 새를 말씀하실 때는 음식이 문제였습니다. 이제 들꽃을 말씀하실 때는 옷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교 대상이 뜻밖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아름답게 차려입지 못했다.」마태복음 6:29 · 두루새김

열왕기상 10장은 솔로몬의 재물과 왕궁의 화려함을 길게 기록합니다. 왕의 옷은 그 권위와 영광을 보여 주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부와 권력을 가지지 않은 들꽃도 아름답게 자랍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화덕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마태복음 6:30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들풀이 영원히 보존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짧은 생명을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라는 부름은 그들이 아무 믿음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는 동안 아버지의 돌보심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새를 먹이시고 들꽃을 입히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겠습니까?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해라

마태복음 6:31–33 본문 →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복음 6:31 · 두루새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질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걱정이 되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애써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32 · 두루새김

기도에 관해 말씀하실 때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도, 생계를 걱정하는 자리에서도 제자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이 같습니다.

아버지는 알고 계십니다.

「오히려 너희는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해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마태복음 6:33 · 두루새김

여기서 「구해라」는 이방 사람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애써 구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행위 자체를 중단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해야 할 대상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먼저」는 하루를 시작할 때 기도부터 하라는 시간 순서가 아니라,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지를 정하는 문제입니다.

왜 나라와 의를 함께 말씀하셨을까

이 장 앞부분에서 두루새김은 사람들이 행하는 의를 6:1에서 「옳은 일」로 풀어 옮겼습니다. 이제 의는 구해야 하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옳은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고, 마지막에는 무엇을 구하며 살아갈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미래를 기대하는 일에 머물지 않고, 그 나라에 걸맞은 의를 구하는 삶도 포함합니다. 그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칭찬을 최고의 보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재물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을 마련하면서도 걱정이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 모든 것도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라는 약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라는 실제 필요를 말씀하고 계시므로, 이 약속을 순전히 영적인 만족감으로만 바꾸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열심히 구하면 반드시 풍족한 재산과 안정된 생활을 얻게 된다는 보장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6:4에서 아버지께서 갚아 주신다는 약속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성공을 보장하는 계약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의 괴로움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에게도 괴로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괴로움이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내일은 내일의 몫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6:34 본문 →

「그러니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은 내일이 걱정할 것이다.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마태복음 6:34 · 두루새김

긴 가르침의 끝에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말은 의외로 담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일은 내일의 괴로움을 가지고 올 수 있고, 오늘도 오늘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괴로움까지 오늘 모두 끌어안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일은 내일이 걱정할 것이다」는 내일을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그리며, 미래의 문제를 오늘 미리 살아내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준비와 걱정은 같지 않습니다.

준비는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오늘 할 수 없는 일까지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붙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빵을 오늘 주십시오」라고 구하도록 배웠습니다. 오늘은 오늘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 구하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내일의 필요는 내일에도 아버지 앞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하늘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

마태복음 6:1–34 본문 →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과 기도와 금식, 재물과 걱정을 잇는 것은 경건한 행동에 관한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사람의 삶입니다. 아버지가 보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돕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 기도는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숨기지 않고 그분께 나아가는 일이 됩니다. 하늘의 새와 들풀을 돌보시는 아버지를 신뢰하는 사람은 재물을 사용하면서도 그 지배 아래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몰래 하는 일을 보시는 아버지에 관한 가르침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혼자 경건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매이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 근거는 제자들 자신의 강한 의지가 아니라, 그들을 보고 계시고 그들의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입니다.

긴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고 나라가 오기를 구한 사람들은, 결국 다시 일상의 식탁 앞에 서게 됩니다. 사람은 내일도 먹어야 하고, 내일도 입어야 합니다. 또 어떤 괴로움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미래를 오늘 미리 짊어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들꽃을 잘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이라는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오십니다.

오늘 필요한 빵이 있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감당할 괴로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담담한 말씀으로 끝납니다. 오늘도 하늘의 새들은 먹이를 찾고, 들꽃들은 자라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모든 것을 돌보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