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산에서 한 가르침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보시는 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선한 일을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얼핏 당연하게 들립니다. 남에게 칭찬받으려고 구제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기도한다면 진정성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을 자세히 읽으면 조금 더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하시고, 금식할 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행하라고 하시더니, 뒤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경계하십니다. 「너희를 위해 땅에 보물을 쌓지 마라」고 하시고, 「너희는 하나님과 마몬에게 함께 노예 노릇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관한 말씀에서 시작하여 재물과 생계의 염려로 이어지는 이 가르침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건이 문제였습니다. 나중에는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고 내일을 걱정하는 삶이 문제입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자리에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십니다.

우리는 누구의 시선 아래에서 살고 있으며, 누구에게 우리의 삶을 맡기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인정을 얻기 위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자신의 삶을 맡깁니다. 재물에 매여 사는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미래를 맡깁니다. 내일의 먹을 것을 끊임없이 걱정하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삶의 한가운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소개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보십니다. 자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 들풀을 입히십니다.

읽는 시간 33분소단락 126장 본문 읽기 →

선한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잊을 수 있다

마태복음 6:1–4 본문 →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에게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받을 삯이 없다.」마태복음 6: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5:16에서 제자들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6:1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보이려고’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5장에서는 사람들이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6장에서는 사람들이 보도록 하는 것이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 자신의 목적이 됩니다.

문제는 선한 일이 공개되느냐 숨겨지느냐 자체가 아닙니다. 누구의 영광을 위해 그 일을 하느냐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 모두 필요한 돈을 건네고,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는 두 행동이 모두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관대함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돈을 줍니다. 행위의 외형이 같더라도 그 행위를 통해 얻으려는 것이 다릅니다.

이미 삯을 다 받은 사람들

「그러므로 네가 구제할 때에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골목에서 하듯이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마라.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 삯을 다 받았다.」마태복음 6: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얻으려던 것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구제했다면, 그 칭찬이 그들의 삯입니다. ‘다 받았다’는 더 받을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유익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의가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보상으로 끝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구제할 때에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네 왼손이 알아서는 안 된다.」마태복음 6:3 · 본디새김

왼손과 오른손은 한 사람의 몸에 속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왼손조차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마저 자신의 선행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를 도왔는지 실제로 기억하지 말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자신의 구제를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스스로를 칭찬하거나 자기 정체성의 자랑거리로 삼지 말라는 과장된 가르침입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면, 도움받는 사람조차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선한 일의 목적은 다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로 돌아갑니다.

「네 구제가 숨은 데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숨은 데서 보시는 네 아버지가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4 · 본디새김

‘숨은 데’라는 표현은 이 장의 열쇠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 일을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늘의 아버지입니다.

아무도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그 선한 일이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상의 방식이나 시기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의 중심은 무엇을 얼마나 되돌려 받느냐보다, 누구 앞에서 그 일을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든 선한 일을 자신의 명예로 바꾸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6:1의 ‘의’는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 ‘구제’로 되어 있지만, 다른 여러 사본에는 ‘의’로 되어 있습니다. ‘의’를 따르면 6:1은 구제뿐 아니라 이어지는 기도와 금식까지 포괄하는 원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당시 사람들이 구제할 때마다 나팔을 불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어서, 6:2의 나팔은 자신의 선행을 널리 알리는 모습을 과장해서 나타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아버지는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신다

마태복음 6:5–8 본문 →

구제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되지 마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려고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 삯을 다 받았다.」마태복음 6:5 · 본디새김

여기서도 문제는 기도 자체나 회당에서 함께 기도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드러나려고’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기도는 본래 하나님을 향한 행동인데, 경건한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기도한다면 기도의 실제 청중이 달라집니다. 입으로는 하나님께 말하지만 마음은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은 데 계신 네 아버지에게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데서 보시는 네 아버지가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6 · 본디새김

골방은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소 규정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구제에 관한 말씀에서는 ‘숨은 데서 보시는 아버지’가 강조되었다면, 기도에 관한 말씀에서는 먼저 ‘숨은 데 계신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만 숨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자리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자리는 아닙니다.

왜 기도를 길게 하면 안 되는가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뜻 없는 말을 늘어놓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면 기도에 응답받을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7 · 본디새김

그렇다면 긴 기도는 잘못일까요? 그렇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26:44에서는 예수님 자신께서도 겟세마네에서 같은 말씀으로 다시 기도하십니다. 기도문을 되풀이하는 행위 자체가 언제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말의 양이나 반복 횟수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 곧 기도의 효력을 일종의 기술처럼 이해하는 것입니다. 말을 충분히 많이 하거나 올바른 표현을 반복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같아지지 마라. 너희 아버지는 너희가 그분에게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8 · 본디새김

우리는 무언가를 부탁할 때 상대방이 모르는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기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기도는 하나님께 필요한 정보를 알려 드리는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며, 자신의 필요와 연약함을 그분께 맡기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을 알려 드리는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아시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조금 더 깊이

6:7에서 ‘뜻 없는 말을 늘어놓다’로 옮긴 그리스어 바탈로게오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타나는 드문 단어입니다. 정확한 뜻을 확정하기 어렵지만, 말의 반복이나 장황한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9–15 본문 →

이제 산상 설교의 중심에 놓인 기도가 시작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기도문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익숙한 기도일수록 한 문장씩 새롭게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빕니다.』」마태복음 6:9 · 본디새김

골방에서는 혼자 기도하지만,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이시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문을 가르치실 때는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골방에 혼자 들어간 사람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존재로 남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아버지께 속한 사람으로 기도합니다.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빵을, ‘우리의’ 빚의 탕감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기를 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인적인 기도를 가르치시면서도 그 기도의 언어 안에 공동체를 담아 놓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빵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의 굶주림에는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빚을 탕감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용서를 거부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먼저 세 가지 간구가 이어집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빕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빕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기도는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필요를 구하지 않고, 먼저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지금 거룩하지 않으니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이 누구신지, 그분의 거룩함과 명예가 어떻게 드러나는지와 연결됩니다. 이 배경에서 이 간구는 하나님을 향한 찬사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온 세상에 드러내시기를 바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빕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마태복음 6:10 · 본디새김

이 기도는 우리가 언젠가 하늘나라에 가게 해 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현실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도 나타나기를 구합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도피하고 싶은 소망에 머물지 않고,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로워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기도 다음에 뜻밖에도 빵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나라 다음에 나오는 빵

「『우리에게 필요한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십시오.』」마태복음 6:11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한 뒤, 예수님께서는 가장 평범한 인간의 필요인 먹을거리를 기도에 담으십니다. ‘필요한’으로 옮긴 그리스어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는 드물게 쓰여 뜻을 확정하기 어려운 단어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빵, 그날의 빵, 다가오는 날의 빵이라는 방향으로 해석이 나뉩니다. 어느 하나를 확정적인 원뜻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우며, ‘필요한 빵’은 그 가운데 생존에 필요한 양식이라는 의미를 택한 번역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예수님께서는 실제 먹을거리를 기도의 대상에 포함시키셨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빵이 더 넓은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 기도에서는 우선 일상의 먹을거리라는 의미를 존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거리를 하나님께 구해야 할 만큼 중요한 필요로 인정하십니다.

뒤에서 예수님께서는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 구하는 기도와, 내일을 향한 염려에 삶 전체를 빼앗기지 말라는 가르침은 서로 어울립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 안에는 바로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식탁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빚진 이들의 빚을 우리도 탕감한 것처럼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십시오.』」마태복음 6:12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익숙한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보다 구체적인 이미지인 ‘빚’을 사용합니다. 원문의 낱말은 실제 채무를 가리킬 수 있으며, 마태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일을 빚을 탕감받는 관계로 표현합니다. 빚은 마땅히 갚아야 하는 의무이고,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할 수 없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그 빚을 스스로 모두 갚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탕감해 달라고, 갚을 의무를 지워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빚진 이들의 빚을 우리도 탕감한 것처럼’이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돈으로 사듯이 우리의 선행으로 획득한다는 계산법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두 용서를 매우 엄격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6:14–15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를 직접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14 · 본디새김
「그런데 너희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복음 6:1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을 선택적인 미덕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태도를 정면으로 다루십니다.

다만 실제 삶에서 용서와 화해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과, 상대방을 즉시 신뢰하거나 위험한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피해자에게 위험한 상황을 감수하도록 명령하는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용서란 단순히 나쁜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관계에서 그 빚을 놓아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하나님께 구하도록 가르치시면서, 제자들의 삶에서도 같은 자비가 나타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악한 자에게서 우리를 건져 주십시오.』」마태복음 6:13 · 본디새김

‘시험’은 시험이나 유혹을 가리킬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을 죄로 유혹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 1:13은 하나님께서 아무도 악으로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문장의 해석에는 갈림이 있습니다. 시험의 상황 자체를 피하게 해 달라는 간구로 읽을 수도 있고, 시험 속에서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달라는 간구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악한 자’도 문법적으로 ‘악’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악의 위협을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다는 점은 같습니다.

이 간구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던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보호를 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그다음에는 우리의 빵과 빚의 탕감과 시험에서의 보호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식탁,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 사이의 관계, 하나님의 보호와 인간의 연약함이 하나의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36:22–23에서 이스라엘은 열방 가운데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더럽혔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큰 이름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며 그분이 거룩함을 드러내실 때 여러 나라가 그분이 여호와야훼이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사야와 에스겔의 예언 전통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자신의 거룩함을 세상에 나타내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6:11은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양식을 날마다 거두도록 하셨고, 주기도문이 이 이야기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의지한다는 주제는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널리 알려진 주기도문 끝의 나라와 권능과 영광에 관한 송영은 일부 사본 전통에 포함되어 있지만 본문에는 없습니다. 후대 예배 전통에서 널리 사용된 이 송영은 역대상 29:11–13의 찬양과도 연결됩니다.

금식하는 사람의 얼굴

마태복음 6:16–18 본문 →

주기도문과 용서에 관한 말씀을 마치신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오십니다.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울한 얼굴을 하지 마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금식하는 이로 드러나려고 자기 얼굴을 흉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 삯을 다 받았다.」마태복음 6:16 · 본디새김

구제와 기도에 이어 세 번째 경건 행위인 금식입니다.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거나, 슬퍼하거나, 기도에 전념하는 행위로, 단순히 배고픔을 참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금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으면서 그 금식을 통해 사람들의 존경을 얻으려 한다면, 하나의 욕망을 내려놓으면서 다른 욕망을 만족시키는 셈입니다.

「그러나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마태복음 6:17 · 본디새김

이것은 금식할 때 반드시 머리에 기름을 발라야 한다는 의식 규정이 아니라, 평소처럼 단정하게 생활하라는 뜻입니다. 금식한다는 사실을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관한 세 가르침이 하나로 모입니다.

구제할 때도 아버지가 보십니다.

기도할 때도 아버지가 보십니다.

금식할 때도 아버지가 보십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경건한 삶을 평가하는 최종 기준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경건하다고 생각하도록 애쓸 필요가 없다면, 사람들의 평가를 관리하느라 낭비하는 수고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과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도하면서도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금식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 사람인지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늘의 아버지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경건 행위에서 재물의 문제로 옮겨 가십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인정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사람이 무엇을 보물로 여기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금식은 회개와 애통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요엘 2:12–13에서는 금식과 울음과 애통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요청이 나오며, 이사야 58장에서는 금식의 의미를 사회적 불의와 연결하여 비판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마태복음 6:19–21 본문 →

「너희를 위해 땅에 보물을 쌓지 마라. 거기서는 좀과 삭음이 보물을 상하게 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친다.」마태복음 6:19 · 본디새김

좀은 옷감을 상하게 합니다. 삭음은 보관된 물건을 훼손합니다. 도둑은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 쌓아 둔 것을 훔쳐 갑니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오래 보관하려고 애쓰지만, 그것이 언제나 자신의 통제 안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재물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를 위해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서는 좀도 삭음도 보물을 상하게 하지 않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훔치지도 않는다.」마태복음 6:20 · 본디새김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구체적인 방법을 목록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종교 활동을 할 때마다 하늘에 일정한 액수의 보상이 적립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이해입니다.

앞의 문맥과 연결하면 방향이 보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구제하는 사람과 하늘의 아버지를 향해 구제하는 사람은 둘 다 구제하지만, 기대하는 삯이 달랐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보물의 비유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에 삶의 궁극적인 가치를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가치를 지니는 것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순서가 조금 다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21 · 본디새김

우리는 보통 마음이 향하는 곳에 보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을 쏟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것을 계속 쌓아 두는 동안 마음도 그곳에 붙잡힐 수 있습니다.

시간과 돈과 수고를 투자하는 행위는 마음의 방향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 방향을 더욱 굳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보물로 삼고 있느냐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눈이 맑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6:22–23 본문 →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다.」마태복음 6:22 · 본디새김

앞에서는 보물에 관해, 뒤에서는 하나님과 마몬이라는 두 주인에 관해 말씀하시는데, 그 사이에 갑자기 눈과 몸의 빛이 등장합니다. 단순히 시력이 좋으면 세상이 밝게 보인다는 말로 읽으면 주변 문맥과 연결하기 어렵습니다.

열쇠는 ‘맑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하플루스(ἁπλοῦς)에 있습니다. 이 말에는 단순한, 나뉘지 않은, 온전한이라는 의미가 있고, 문맥에 따라 순전함이나 너그러움과 연결하여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는 ‘악한 눈’이 등장합니다.

「네 눈이 악하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안의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복음 6:23 · 본디새김

고대 유대적 표현에서 악한 눈은 때때로 탐욕이나 인색함을 나타냈습니다. 신명기 15:9는 가난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않는 상황을 경계하고, 잠언 28:22도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이 재물을 얻으려고 서두르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 배경을 고려하여 6:22–23을 너그러움과 인색함의 대조로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맑은 눈’을 나뉘지 않은 시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지향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보물에 관한 말씀과 두 주인에 관한 말씀 사이에 놓인 위치가 이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두 방향을 모두 고려할 수 있으며, 어느 하나만이 본문의 확정적인 의미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뒤 문맥과 연결하면, 우리의 시선, 곧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무엇을 추구하는지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재물을 궁극적인 보물로 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아도 먼저 자신의 손해를 걱정하고,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 점점 더 인색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 재물은 더 이상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최종 기준이 아닙니다.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라는 비유 끝의 물음은 나쁜 것을 좋아하면 삶이 나빠진다는 수준의 경고가 아닙니다. 더 무서운 문제는 스스로 빛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어둠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귀한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면, 삶의 여러 선택도 그 기준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결국 어디에서 결정됩니까?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마몬 — 누구의 노예인가

마태복음 6:24 본문 →

「아무도 두 주인에게 노예 노릇을 할 수 없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붙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마몬에게 함께 노예 노릇을 할 수 없다.」마태복음 6:2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앞의 보물 비유보다 훨씬 강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두 주인을 좋아할 수 없다가 아니라, 두 주인에게 노예 노릇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노예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나누어 여러 주인에게 충성하는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권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좋아할 수 있느냐는 감정의 문제를 넘어, 누구의 지배 아래 살아가느냐는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마몬’은 아람어에서 온 말로 재물이나 소유물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립하는 존재로 우상이나 악한 영을 떠올리기 쉽지만,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나님과 나란히 놓으십니다. 재물은 먹을 것을 마련하고, 옷을 사고, 가족을 돌보는 데 사용되는 삶의 수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재물이 하나님과 경쟁하는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재물이 삶의 수단이라는 자리를 넘어 삶 전체를 지배하는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재물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도, 재물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삶 전체를 붙잡힌 사람도 그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유의 양만이 아니라 그 소유가 사람에게 행사하는 권한입니다.

재물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재물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다릅니다.

바로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시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의 염려를 다루십니다. 이 ‘그러므로’는 재물에 관한 이야기와 걱정에 관한 이야기가 별개의 교훈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재물을 향한 욕망뿐 아니라 재물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사람의 삶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시선을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것들, 하늘을 나는 새와 들에서 자라는 꽃으로 돌리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마태복음 6:25–27 본문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목숨을 두고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걱정하지 말고, 너희 몸을 두고 무엇을 입을지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먹을거리보다, 몸이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으냐?」마태복음 6:2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먹을거리와 옷은 생명과 몸을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수단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동안 정작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선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데 하늘의 너희 아버지가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복음 6:26 · 본디새김

새들은 가만히 앉아서 먹이가 입에 들어오기만 기다리지 않습니다.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둥지를 만들고 새끼를 기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자동으로 생긴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새의 생명은 인간이 구축하는 방식의 경제적 보장 없이도 하나님이 돌보시는 피조 세계 안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새들을 돌보시는 아버지를 가리키시며, 그 아버지 앞에서 제자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경제적 어려움을 결코 겪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성경도 그런 현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바꾸려 하시는 것은 삶을 지탱하는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이해, 곧 사람의 생명이 재물의 양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생각입니다.

걱정한다고 키가 자랄까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에 한 규빗을 더할 수 있느냐?」마태복음 6:27 · 본디새김

이 물음은 걱정한다고 키를 한 규빗 더할 수 있느냐는 뜻으로도, 걱정한다고 삶의 길이를 늘릴 수 있느냐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예수님의 질문은 분명합니다.

걱정이 인간의 능력을 늘려 주지는 않습니다.

걱정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마음속에서 반복하면서도, 그 일을 해결할 능력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이 우리 삶을 지배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갖지만, 정작 우리의 생명을 마음대로 늘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제 예수님께서는 들의 꽃을 가리키십니다.

조금 더 깊이

‘키’라고 옮긴 그리스어 헬리키아는 키와 나이를 모두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한 규빗은 본래 길이를 재는 단위이므로 ‘키’라는 번역은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반면 인간의 생명과 걱정을 다루는 문맥을 고려하여 수명을 늘리는 것으로 읽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영광보다 아름다운 들풀

마태복음 6:28–30 본문 →

「그리고 옷을 두고 왜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잘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하지도 않고 실을 잣지도 않는다.」마태복음 6:28 · 본디새김

하늘의 새를 말씀하실 때는 먹을거리가, 들의 백합을 말씀하실 때는 옷이 문제입니다. 두 비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하나씩 다룹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교 대상이 뜻밖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모든 영광을 누리면서 이것들 가운데 하나만큼도 차려입지 않았다.」마태복음 6:29 · 본디새김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부와 영광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열왕기상 10장은 그의 재물과 왕궁의 화려함을 길게 기록합니다. 솔로몬의 옷이 실제로 어떤 모양이었는지 마태복음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누렸던 왕의 영광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부를 드러내기 위해 화려한 옷을 마련하고, 왕의 옷은 그 권위와 영광을 보여 주는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아무런 부와 권력을 가지지 않은 들의 꽃도 아름답게 자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돌보심과 연결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화덕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신다면, 너희를 얼마나 더 입히시겠느냐?」마태복음 6:3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들풀이 영원히 보존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화덕에 던져지는,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짧은 생명을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피조물이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사실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짧고 덧없는 존재도 하나님이 아름답게 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라는 부름은 그들이 아무 믿음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는 동안 아버지의 돌보심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염려를 책망하시면서도,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 다시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하늘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을 입히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겠습니까?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찾아라

마태복음 6:31–33 본문 →

이제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모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복음 6:31 · 본디새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질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하시지 않고, 그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염려가 되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이방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애써 찾기 때문이며, 하늘의 너희 아버지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한 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32 · 본디새김

기도에 관해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먹을 것과 입을 것에 관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기도의 자리에서도, 생계를 걱정하는 자리에서도 제자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은 같습니다.

아버지는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걱정하지 않는 대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치십니다.

「오히려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마태복음 6:33 · 본디새김

이 말씀을 흔히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면 다른 모든 일도 잘 풀린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본문은 그런 단순한 성공의 공식과 다릅니다. 여기서 ‘찾다(ζητέω)’는 앞에서 이방 사람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애써 찾는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와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찾는 행위 자체를 중단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할 대상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먼저’는 하루를 시작할 때 기도부터 하라는 시간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지를 정하는 문제입니다. 먹을 것을 마련하고 옷을 입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하나님 나라보다 앞서는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나라와 의를 함께 말씀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나라만 찾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이 장 앞부분에서 ‘의’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6:1)처럼 사람들이 행하는 것으로 등장했습니다.

이제 의는 찾아야 하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의를 어떻게 행할 것인가가 문제였고, 마지막에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두 말씀을 연결하면 하나님 나라를 찾는다는 것은 종교적인 미래를 기대하는 일에 머물지 않고, 그 나라에 합당한 의를 추구하는 삶도 포함합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재물에 관한 앞의 가르침이 이제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 모입니다.

그 나라를 찾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칭찬을 최고의 보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재물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을 마련하면서도 염려가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라는 마지막 약속은 모든 신자에게 경제적 안정을 보장한다는 뜻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라는 실제 필요를 말씀하고 계시므로, 이 약속을 순전히 영적인 만족감으로만 바꾸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열심히 추구하면 반드시 풍족한 재산과 안정된 생활을 얻게 된다는 보장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돌보심을 신뢰하도록 초대하는 약속입니다. 그 돌보심이 각 사람의 삶에서 언제나 풍요와 고난 없는 생활로 나타난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의 괴로움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사람에게도 괴로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이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할 일이 전혀 없는 삶이 아니라, 걱정할 일이 있는 삶 속에서도 아버지를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가르치십니다.

내일은 내일의 몫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6:34 본문 →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이 스스로를 걱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는 그날의 괴로움만으로도 충분하다.」마태복음 6:34 · 본디새김

마태복음 6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긴 가르침의 끝에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말은 의외로 담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도, 오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도 하시지 않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괴로움을 가지고 올 수 있고, 오늘도 오늘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괴로움까지 오늘 모두 끌어안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일이 스스로를 걱정할 것이다’라는 표현은 내일을 마치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그리는 말로, 미래의 문제를 오늘 미리 살아내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준비와 걱정은 같지 않습니다.

준비는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오늘 할 수 없는 일까지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붙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빵을 구한다는 것도 미래를 위한 계획이나 준비가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기도문의 「우리에게 필요한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십시오」와 다시 연결됩니다. 오늘은 오늘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 구하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내일의 필요는 내일에도 아버지 앞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신뢰의 모습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

마태복음 6:1–34 본문 →

이 장의 여러 가르침을 연결하는 것은 경건한 행동에 관한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사람의 삶입니다. 아버지가 보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 기도는 자신의 필요를 숨기지 않고 그분께 나아가는 일이 되고, 하늘의 새와 들풀을 돌보시는 아버지를 신뢰하는 사람은 재물을 사용하면서도 그 지배 아래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숨은 데서 보시는 아버지에 관한 가르침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혼자 경건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하고, 사람들의 평가에 매이지 않고 세상 속에서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는 제자들 자신의 강한 의지가 아니라, 그들을 보고 계시고 그들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돌보고 계시는 아버지입니다.

마태복음 6장은 일상의 아주 작은 자리로 돌아와 끝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나라가 오기를,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빌었던 사람들은 결국 다시 일상의 식탁 앞에 서게 됩니다. 사람은 내일도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며, 또 어떤 괴로움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미래를 오늘 미리 짊어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보라고, 들의 백합을 살펴보라고 하시며, 그것들을 돌보시는 분이 하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이라는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오십니다.

오늘 필요한 빵이 있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감당할 괴로움이 있습니다.

내일의 괴로움까지 오늘 모두 짊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날에는 그날의 괴로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담담한 말씀으로 끝납니다. 오늘도 하늘의 새들은 먹이를 찾고, 들의 꽃들은 자라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모든 것을 돌보시는 하늘의 아버지를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