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산에서 한 가르침
하늘의 아버지를 닮은 사람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왔고, 예수님은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첫마디부터 예상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애통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더 넘치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당시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하던 사람들보다 더 넘치는 의를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너희 하늘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시더니, 마지막에는 하나님처럼 온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두 말씀은 어떻게 함께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사이에 마태복음 5장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율법보다 어려운 규칙을 새로 제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의 삶에서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의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닮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 실마리는 마지막에 나오는 하늘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분은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 모두에게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과 의롭지 않은 사람들 모두에게 비를 내리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의는, 결국 하늘의 아버지를 닮아 가는 삶으로 향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산에 앉으신 선생님
앞 장의 마지막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무리를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마태는 산의 이름이나 정확한 위치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앉으시자 제자들이 다가왔다고 기록합니다.
이 장면은 모세가 산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받았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 백성에게 전달했고, 여기서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율법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뒤에 반복될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선언이 그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만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 다가왔지만, 이 가르침이 그들만을 위한 비밀 강의는 아닙니다. 산 위의 긴 설교가 끝나는 7:28에서는 무리도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고 기록합니다.
복은 무엇을 근거로 선언되는가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3 · 본디새김
‘복이 있다’는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복된 처지에 있음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이나 슬픔이 즐거운 감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여길 법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이 주어진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복이 있습니까? 답은 뒤에 나옵니다.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거는 그들이 가난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모든 복 선언을 읽는 열쇠가 됩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시지만, 애통함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위로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시지만, 결핍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 복 선언은 특별히 어렵습니다.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마태는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말하면서 ‘영’이라는 표현으로 그 가난을 한정합니다. ‘가난한’에 해당하는 말은 단순히 조금 부족한 상태보다 궁핍한 상태를 가리킬 수 있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종종 사회적·경제적으로 힘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 그려집니다. 이사야 61:1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이 하나님의 구원 활동과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자랑할 만한 영적 성취가 없음을 아는 사람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실제로 낮고 궁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들을 가리킬까요?
두 방향 모두 해석의 근거가 있습니다. 마태가 ‘영’이라는 한정을 붙였기 때문에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현실의 가난과 억압이라는 구약의 배경을 모두 지우고 순전히 내면의 겸손으로만 설명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자기 능력과 지위로 하나님 나라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하늘의 나라가 속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애통하는 사람들과 온유한 사람들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61:2–3과 연결됩니다. 이사야에서 여호와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이는 애통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슬픔 대신 기쁨을 주는 일을 맡습니다. 원래 문맥은 상처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의 애통함을 죄에 대한 회개로 이해할 수도 있고, 개인적 슬픔과 세상의 불의로 인한 탄식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애통함의 원인을 하나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위로받을 것입니다. 원문에서 ‘위로받을 것이다’는 수동형으로, 누가 위로할 것인지 직접 밝히지 않지만 문맥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5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시편 37:11과 직접 연결됩니다. 시편 37편에는 악한 사람들이 번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성공 때문에 분노하거나 그들과 경쟁하여 힘으로 빼앗으려 하지 말고,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며 기다리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은 단순히 성격이 조용하거나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의 문맥에서는 악인의 성공 앞에서도 여호와야훼를 신뢰하며 자신의 길을 지키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왜 하필 ‘땅’을 물려받는다고 할까요? 시편 37편의 원래 배경에서 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받은 삶의 터전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약속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과 연결되어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땅의 약속이라는 구체성을 여전히 중요하게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리스어의 ‘땅’은 두 의미를 모두 나타낼 수 있으므로 한쪽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역전이 있습니다.
땅을 얻는 사람들은 힘으로 차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6 · 본디새김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것을 선호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존에 필요한 것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대상이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5:10에서는 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을 말씀하시고, 5:20에서는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더 넘쳐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의를 단순히 개인적인 죄책감이 없는 상태나 도덕적인 흠 없음으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 하나님과 다른 사람 사이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올바른 관계, 하나님의 다스림에 걸맞은 삶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의가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목마릅니다. 이들을 배부르게 하시는 분도 문장에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갈망을 채우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를 이미 완전히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선언하시지 않았습니다. 의를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이제 복 선언은 사람들의 처지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옮겨갑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7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의 위로와 공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일과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8 · 본디새김
여기서는 앞의 ‘영’과 달리 ‘마음’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시편 24:3–4에서는 누가 여호와야훼의 산에 오르고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 답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순결한 사람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내면의 진실함이 함께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이 전통을 이어받으시면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의 봄인지 여기서 설명되지는 않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과 가까이하는 복을 말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9 · 본디새김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평화는 단순히 다투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갈라진 관계를 바로잡고, 적대와 폭력 대신 화해를 이루는 행동을 포함합니다.
왜 평화를 이루는 일이 하나님의 아들 됨과 연결될까요? 이 질문의 답은 5장 마지막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원수에게까지 선을 베푸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아버지를 닮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부터 복 선언은 단순히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넘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를 가리키기 시작합니다.
복 선언의 마지막에서 예수님 자신이 등장하시다
여덟 번째 복 선언은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의 때문에 박해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10 · 본디새김
첫 번째와 똑같은 이 약속이 여덟 가지 복을 하나로 묶습니다. 의를 갈망하고,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반드시 세상에서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박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현실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말하는 방식을 바꾸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고 너희를 두고 거짓으로 온갖 나쁜 말을 할 때에 너희는 복이 있다.」마태복음 5:11 · 본디새김
앞의 여덟 선언은 모두 ‘그들’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너희’라고 말씀하시고, 처음으로 ‘나 때문에’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셨다면, 이제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박해받는 제자들을 직접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삶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긴밀하게 연결하십니다. 여기서부터 산 위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인간의 행복론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향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길을 걷고 있으며, 하늘에서 그들의 삯이 크기 때문입니다. 복 선언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의 평가가 최종적인 평가가 아님을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모욕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복되다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소금과 빛 — 제자들의 삶은 누구를 드러내는가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그런데 소금이 싱거워지면 무엇으로 짜게 되겠느냐? 더는 아무 쓸모도 없고, 다만 밖에 던져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마태복음 5:13 · 본디새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마태복음 5:14 · 본디새김
이 두 선언은 명령이 아니라 먼저 정체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소금이나 빛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그들을 소금과 빛이라고 부르십니다.
소금과 빛은 둘 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작용합니다. 소금은 다른 것에 맛을 더합니다. 등불은 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춥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금이 싱거워지는 일과 등불을 그릇 아래에 두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싱거워진다는 것은 일상적인 화학적 설명이라기보다, 소금이 소금으로서의 구실을 잃는 상황을 가정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소금의 성분이 아니라 그 쓸모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등불을 켜서 곡식의 양을 재는 그릇 아래 두지 않고 오히려 등잔대 위에 둔다. 그러면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두에게 비친다.」마태복음 5:15 · 본디새김
등불을 켜 놓고 그 위에 그릇을 덮는다면, 빛이 있다는 사실과 그 빛이 사람들에게 비친다는 사실은 서로 달라집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바로 그런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보게 하려고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자신의 선한 일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게 너희 빛이 사람들 앞에서 빛나야 한다.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마태복음 5:16 · 본디새김
제자들의 선한 일을 보는 사람들이 영광을 돌리는 대상은 제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제자들의 선한 삶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따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빛 자체를 바라보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빛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삶의 기준을 설명하십니다.
율법을 폐하지 않고 이룬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폐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러 왔다.」마태복음 5:17 · 본디새김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앞으로 이어질 가르침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인과 분노를 연결하시고, 간음과 마음의 욕망을 연결하십니다. 이혼과 맹세, 보복과 원수 사랑에 대해서도 당시 사람들이 익숙하게 이해하던 방식에 도전하십니다.
그런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기존 율법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그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루다’는 충족하다, 완성하다, 실현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예언자들을 이룬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크게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의 약속과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은 이미 여러 차례 예수님의 사건들이 예언을 이루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이 지향하던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께서 온전히 드러내시고 실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 예수님은 기존의 계명에 몇 가지를 추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 권위 있게 밝혀 주시는 분입니다.
이 두 의미는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전체의 성취 주제와 바로 뒤에 이어지는 율법 해설을 함께 읽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두 방향 모두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구약의 모든 명령이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까지 이 한 구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까지 율법에서 이오타 하나나 획 하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말이다.」마태복음 5:18 · 본디새김
이오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작은 글자입니다. 작은 획까지 언급하시는 것은 율법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 다음에 더욱 어려운 선언이 나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더 넘치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복음 5:20 · 본디새김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에 충실한 삶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들보다 더 넘치는 의를 요구하실까요?
여기서 그들이 모두 겉으로만 경건하고 실제로는 위선적인 사람들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모든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내면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율법과 경건의 실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던 사람들이었기에 이 말씀이 더욱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더 많이 지키고, 규칙을 더 자세하게 만들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곧바로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그런 방향과 다릅니다.
살인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형제와의 관계가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간음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말이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금지한 행동을 피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이루는 것 사이에는 더 살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분을 드러내십니다. 이제 여섯 차례에 걸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반복의 중심은 ‘나는’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율법 교사의 이름을 빌려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직접 율법의 의미를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으시면서, 율법이 요구하는 삶을 예수님의 권위로 가르치십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보다 깊은 의
「너희는 옛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 전해진 것을 들었다.」마태복음 5:21 · 본디새김
십계명에 나오는 살인 금지의 계명입니다(출애굽기 20:13; 신명기 5:17).
그런데 예수님은 살인이라는 행위에서 그 행위가 자라나는 관계의 문제로 시선을 옮기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자기 형제에게 『라카』라고 말하는 사람은 공회의 재판을 면치 못할 것이고, 『어리석은 자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불타는 게헨나를 면치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5:22 · 본디새김
‘라카’는 아람어에서 온 모욕적인 표현으로, 상대방을 머저리나 빈 사람처럼 낮추어 부르는 말로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분노와 모욕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위와 연결하십니다.
이것을 모든 분노가 법적으로 살인과 똑같은 범죄라는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분노가 사람을 경멸하는 태도로 자라나고, 경멸이 상대방의 존엄을 부정하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직접 죽이는 행위만이 아니라, 형제를 멸시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마음과 말도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재판’, ‘공회’, ‘불타는 게헨나’로 이어지며 경고는 점점 엄중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훨씬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네 예물을 바치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너에게 무슨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복음 5:23 · 본디새김
「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두고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 돌아와 네 예물을 바쳐라.」마태복음 5:24 · 본디새김
예수님은 네가 형제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거든 화해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거든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만 있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와의 관계에서 어떤 상처와 원망을 가지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이것이 상대방의 모든 원망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관계를 돌아보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사람은 지금 예물을 바치기 위해 제단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물을 잠시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형제와의 관계를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소송 상대와의 합의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상대방과 함께 길에 있는 동안 화해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지나치면 재판과 감옥이라는 결과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관계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화해를 이루라고 촉구하십니다.
살인하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의에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재판’, ‘공회’, ‘불타는 게헨나’를 실제 사법 절차의 단계와 정확히 대응시키려 하기보다는, 경멸하는 말과 태도에 대한 경고가 점점 엄중해지는 수사적 전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 힌놈 골짜기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구약에서는 우상숭배와 심판의 기억을 지닌 장소였고, 이후 심판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열왕기하 23:10; 예레미야 7:31–32).
간음하지 않는 것보다 깊은 의
「너희는 『간음하지 마라』 하고 전해진 것을 들었다.」마태복음 5:27 · 본디새김
간음 금지 역시 십계명의 말씀입니다(출애굽기 20:14). 예수님은 이번에도 행위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탐하려고 보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자기 마음속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복음 5:28 · 본디새김
열쇠는 ‘탐하려고 보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모든 시선이나, 뜻하지 않게 떠오르는 모든 감정을 간음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원문의 표현은 여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바라보는 의도와 연결됩니다.
관심은 단순히 눈으로 무엇을 보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욕망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바라보느냐에 있습니다. 간음이라는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도 사람을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마음을 다루십니다.
그런데 다음 말씀은 매우 격렬합니다.
「그런데 네 오른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빼내어 네게서 멀리 던져 버려라. 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온몸이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너에게 낫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29 · 본디새김
이어서 오른손도 찍어 내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실제로 신체를 훼손하라는 지시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앞서 문제 삼으신 것은 눈이나 손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욕망과 의도입니다. 신체의 일부를 제거한다고 마음속 욕망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죄를 가볍게 다루지 말라는 과감한 과장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눈과 손은 사람이 행동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지체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중요하고 익숙한 것이라도 그것이 사람을 죄로 이끈다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을 자기 욕망의 수단으로 대하는 마음을 방치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간음에 대한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바로 다음에는 이혼 문제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혼인 관계를 깨뜨리는 문제를 개인의 욕망뿐 아니라 배우자에 대한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십니다.
이혼 증서가 있다고 모든 것이 정당한가
「그런데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면 그 여자에게 갈라섬 증서를 주어야 한다』 하고 전해졌다.」마태복음 5:31 · 본디새김
이 말씀의 배경은 신명기 24:1–4입니다. 신명기는 남자가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내보내는 상황을 다룹니다. 그러나 그 본문의 직접적인 법적 초점은 이혼을 적극적으로 명령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혼과 재혼이 이루어진 뒤 처음 남편에게 돌아가는 일을 금지하는 규정입니다.
예수님은 그 법적 절차를 언급하시면서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증서를 써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배우자를 버리는 행동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경우가 아닌데도 자기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에 내몰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버려진 여자와 혼인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다.」마태복음 5:32 · 본디새김
여기서는 특히 남편의 책임이 강조됩니다. 아내를 버리는 남자는 자신의 행위를 이혼 증서라는 절차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행동이 아내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물으십니다.
「그 여자가 간음에 내몰리게 하는 것이다」라는 번역은 그 책임이 남자의 행동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간음에 내몰린다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적·법적 상황을 가리키는지는 논의가 있지만, 이혼당한 여자에게 생길 수 있는 결과를 남편의 책임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음행한 경우가 아닌데도’라는 예외 규정에서 해석이 갈립니다. 원문의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는 문맥에 따라 다양한 성적 부정이나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일부 해석은 이를 혼인 중의 성적 부정을 가리키는 말로 보아, 그러한 경우를 이혼 금지의 예외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레위기 18장에 비추어 처음부터 율법상 허용되지 않는 혼인 관계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 두 이해는 마태복음 19:9의 병행 구절과도 연결되며, 현재까지 해석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만으로 모든 이혼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완성된 법적·목회적 원칙을 끌어내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특히 폭력과 학대가 있는 관계에서 피해자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관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은 이 본문에서 직접 도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분명하게 문제 삼으시는 것은 혼인 관계를 맺은 사람이 상대방에 대한 책임을 가볍게 여기면서 법적 절차만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허용되는 절차를 찾아내는 일보다 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관계 속에서 책임과 신실함을 요구합니다.
맹세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사람
「또 너희는 옛사람들에게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네가 주님께 한 맹세를 지켜라』 하고 전해진 것을 들었다.」마태복음 5:33 · 본디새김
구약은 거짓 맹세를 금하고,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지키도록 가르칩니다(레위기 19:12; 민수기 30:2).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나님의 왕좌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34 · 본디새김
왜 맹세 자체를 문제 삼으실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맹세할 때 내세우는 대상을 하나씩 언급하십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은 하나님의 왕좌입니다.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마십시오. 땅은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하지 마십시오.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도시입니다.
자기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머리카락 한 올조차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보증하기 위해 더 큰 권위를 끌어오려 합니다. 그런데 그 권위는 결국 자신이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삶조차 궁극적으로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너희 말은 『예』면 『예』, 『아니요』면 『아니요』여야 한다. 이를 넘어서는 말은 악한 자에게서 나온다.」마태복음 5:3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말 자체가 신뢰할 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맹세를 붙여야만 그 말이 진실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하게 하는 말도 진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악한 자’로 옮긴 그리스어 표현은 문법상 ‘악’ 또는 ‘악한 자’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말이 사탄에게서 직접 나온 것이라는 뜻인지, 인간의 악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뜻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맹세를 경계하고 진실한 말을 요구한다는 핵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맹세 금지가 법정의 모든 선서나 일상적인 약속에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도 전통적으로 견해가 갈려 왔습니다. 일부는 문자 그대로 모든 맹세를 금지하는 것으로 읽고, 다른 일부는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맹세를 남용하는 관행을 겨냥한다고 이해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언어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 하신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는 형제를 모욕하는 말을 경계하셨고, 이제는 자신의 말을 보증하기 위해 과장된 권위를 끌어오는 태도를 경계하십니다.
말은 사람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관계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그 말 자체가 신실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보복을 넘어서는 삶
「너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고 전해진 것을 들었다.」마태복음 5:3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24, 레위기 24:20, 신명기 19:21에 나타납니다. 오늘날에는 이 표현을 잔인한 복수의 원칙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구약의 법적 문맥에서 이 원칙에는 보복을 제한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가해서는 안 됩니다. 처벌과 배상은 발생한 피해에 상응해야 합니다. 본래의 법적 취지는 끝없는 보복을 부추기는 것이라기보다, 과도한 보복을 제한하고 정의로운 비례성을 세우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자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 대라.」마태복음 5:39 · 본디새김
폭력을 당할 때 아무런 저항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까요?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도 금지되는 것일까요?
어떤 해석은 이 말씀을 폭력적인 저항 자체를 포기하라는 급진적인 비폭력의 요청으로 읽습니다. 다른 해석은 특히 개인적 모욕과 피해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사례들은 후자의 측면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뺨을 맞는 일, 소송에서 옷을 빼앗기는 일, 강제로 길을 가야 하는 일은 모두 다른 사람이 자신의 권한이나 힘을 행사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과 똑같은 방식으로 맞서는 것 이외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오른뺨’이라는 표현은 모욕적인 뺨 때리기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너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복음 5:40 · 본디새김
구약에는 가난한 사람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 때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는 규정이 있습니다(출애굽기 22:26–27). 겉옷은 밤에 몸을 덮는 데도 필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겉옷까지 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누구든지 부당하게 소송을 제기하면 반드시 원하는 대로 다 내주어야 한다는 법률 조항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보복과 적대의 논리를 넘어서는 행동을 제시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더욱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누구든지 너를 강제로 한 밀리온을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두 밀리온을 가라.」마태복음 5:41 · 본디새김
‘강제로 가게 하다’에 해당하는 말은 공적인 강제 노역이나 운송 징발과 연결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는 주민이 군인이나 관리의 요구에 따라 물건을 나르거나 길을 안내하도록 동원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친구가 부탁하면 한 번 더 친절을 베풀라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강제적인 요구를 받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대응을 보복과 증오에만 맡기지 말라는 급진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당한 폭력이나 강압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해자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힐 기회를 주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일반 원칙으로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악을 되갚는 방식만이 유일한 선택이 아님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앞서 살펴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평화는 단순히 분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의 관계를 다르게 만들어 가는 행동입니다.
마지막 말씀인 「너에게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라. 너에게서 빌리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마라」(5:42)는 이 태도를 다른 사람의 필요로 확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것을 지키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문제에만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잊지 않도록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39절의 ‘오른뺨’을 오른손 손등으로 때리는 특정한 행위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본문은 공격자의 손이나 때리는 방식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 하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너희는 『네 이웃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전해진 것을 들었다.」마태복음 5:43 · 본디새김
‘네 이웃을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레위기 19:18에 나옵니다. 그러나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라는 문장은 구약 율법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에는 악인에 대한 적대나 심판을 구하는 표현들이 있지만, 이웃 사랑의 계명 자체가 원수를 미워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레위기 19:18 앞부분에는 이웃에게 원수를 갚거나 원망을 품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고, 레위기 19:34에서는 함께 거주하는 외국인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웃 사랑을 처음으로 발명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랑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적대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복음 5:44 · 본디새김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따뜻한 감정을 가지라는 뜻으로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감정보다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원수의 악을 선이라고 인정하라는 뜻도, 그 사람이 행하는 불의를 없던 일로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자신의 증오만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인간의 도덕적 의무를 먼저 설명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 위에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과 의롭지 않은 사람들 위에 비를 내리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45 · 본디새김
예수님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 부류를 분명히 구별하십니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않은 사람.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두에게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리십니다.
해와 비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람은 해와 비를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고, 그것들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선물을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주시지 않고, 악한 사람들에게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악에 무관심하시거나 악과 선을 같게 여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장에도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엄중한 경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만 선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들도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나온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복 선언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은 단순히 어떤 특권을 가진다는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너희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한다면 무슨 삯을 가지겠느냐? 세리들도 똑같이 하지 않느냐?」마태복음 5:46 · 본디새김
「그리고 너희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무엇을 더 하는 것이냐? 이방 사람들도 똑같이 하지 않느냐?」마태복음 5:47 · 본디새김
세리와 이방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돌려주는 일은 특별한 신앙이 없어도 가능한 인간의 일반적인 행동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문에서 5:20의 ‘더 넘치다’와 5:47의 ‘더 하다’는 같은 어근에 속하는 표현입니다. 앞에서 제자들의 의가 더 넘쳐야 한다고 하신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르러 그 넘침이 어떤 모습인지 구체적으로 묻고 계십니다. 더 넘치는 의는 단순히 더 많은 종교적 행위를 수행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멈추는 경계를 넘어서는 삶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왜 더 나아가야 합니까? 도덕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선언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하늘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여라.」마태복음 5:48 · 본디새김
온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말씀은 읽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하나님처럼 온전하라니, 인간에게 가능한 일입니까?
‘온전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완전한, 온전한, 목적에 이른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구약에서 이 말씀과 연결되는 중요한 본문은 레위기 19:2와 신명기 18:13입니다. 레위기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거룩하시니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신명기에서는 여호와야훼 앞에서 온전해야 한다고 명합니다.
그러나 5:48이 정확히 어떤 의미의 온전함을 요구하는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도덕적 완전함을 기준으로 강조하는 해석, 사랑을 제한하지 않는 나뉘지 않은 충실함에 무게를 두는 해석, 하나님 자신의 온전함과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온전함을 구분하는 해석으로 갈립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이 명령이 제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가 달라집니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열쇠는 48절의 ‘그러므로’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맥 없이 갑자기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하늘의 아버지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해와 비를 주신다고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신 다음 온전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자리에서 온전함의 핵심적인 모습은 사랑의 범위를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들에게만 한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하늘의 아버지가 베푸시는 선하심을 닮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온전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이며, 신명기 18:13의 그리스어 번역에도 마태가 사용한 것과 같은 이 단어가 나옵니다. 세 해석 가운데 나뉘지 않은 충실함, 곧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을 구별하여 사랑을 제한하지 않는 온전한 사랑으로 보는 해석은 바로 앞의 문맥에 근거를 둡니다.
해가 떠오르고 비가 내리는 세상에서
마태복음 5장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5장의 시작과 끝이 다시 만납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자기 힘과 능력을 내세울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하늘의 아버지를 닮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시면서,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의는 자신의 완전함을 자랑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을 닮아 가는 삶입니다.
이 장에서 그 의가 실제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는 장면들, 곧 형제와의 화해, 욕망 속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배우자에 대한 책임, 진실한 말, 피해를 입었을 때의 반응, 원수를 대하는 사랑은 모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의를 사람과의 관계에서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그 가르침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형제와 화해하는 일도, 자기 욕망을 다스리는 일도,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에 제자들의 노력을 바라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아버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오늘도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 위에 해를 떠오르게 하십니다.
의로운 사람들과 의롭지 않은 사람들 위에 비를 내리십니다.
해가 뜰 때, 그 빛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만 골라 비추지 않습니다.
비가 내릴 때, 그 비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의 밭에만 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모습을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아버지를 닮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하늘 아래에서, 해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에게 떠오르고, 비는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내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