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7장 · 산에서 한 가르침

하늘의 아버지를 닮은 사람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왔고, 예수님은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첫마디부터 예상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고, 이어서 깊이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를 넘어서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해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시더니, 마지막에는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두 말씀은 어떻게 함께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사이에 마태복음 5장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보다 어려운 규칙을 새로 제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의 삶에서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의가 결국 누구를 닮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의는, 결국 하늘의 아버지를 닮아 가는 삶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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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마태복음 5:1–12 본문 →

산에 앉으신 선생님

앞 장의 마지막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무리를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마태는 산의 이름이나 위치를 알려 주지 않고, 예수님께서 앉으시자 제자들이 다가왔다고만 기록합니다.

이 장면은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 백성에게 전달했고, 여기서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율법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뒤에 반복될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선언이 그 차이를 분명하게 만듭니다.

이 가르침이 제자들만을 위한 비밀 강의는 아닙니다. 산 위의 긴 설교가 끝나는 7:28에서는 무리도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고 기록합니다. 제자들이 가까이에서 듣고, 무리도 함께 듣는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복은 무엇을 근거로 선언되는가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3 · 두루새김

「복이 있다」는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고, 누군가가 복된 처지에 있음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이나 슬픔이 즐거운 감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여길 법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이 주어진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복이 있습니까?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거는 그들이 가난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모든 복 선언을 읽는 열쇠가 됩니다. 깊이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는 것은 슬픔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위로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복이 있는 것도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복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루실 일을 근거로 복을 선언하십니다.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 복 선언은 특별히 어렵습니다. 마태는 여기서 「마음」이 아니라 「영」이라는 표현으로 가난을 한정합니다. 「가난한」(πτωχός)에 해당하는 말은 몹시 가난한 상태를 가리킬 수 있는 단어이고, 구약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종종 힘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 그려집니다.

그렇다면 「영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안에 자랑할 만한 영적 성취가 없음을 아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낮고 가난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들일까요? 마태가 「영」이라는 한정을 붙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현실의 가난과 억압이라는 구약의 배경을 지우고 마음의 겸손으로만 설명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자기 능력과 지위로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하늘의 나라가 속한다고 선언하십니다.

깊이 슬퍼하는 사람들과 온유한 사람들

「깊이 슬퍼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61:2–3과 연결됩니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는 깊이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슬픔 대신 기쁨을 주는 일을 맡습니다.

이 슬픔을 죄에 대한 회개로 이해할 수도 있고, 개인적 슬픔과 세상의 불의로 인한 탄식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슬픔의 원인을 하나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위로받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5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시편 37:11과 직접 연결됩니다. 시편 37편은 악한 사람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분노하거나 힘으로 빼앗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은 성격이 조용하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의 성공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자신의 길을 지키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땅」은 두 방향으로 읽힙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약속이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는 일과 연결되어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삶의 터전이라는 구체적인 의미를 여전히 중요하게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리스어의 「땅」은 두 의미를 모두 나타낼 수 있으므로 한쪽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땅을 얻는 사람들은 힘으로 차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6 · 두루새김

굶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무엇을 좋아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대상이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에서 의는 5:10에서는 박해의 이유로, 5:20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를 넘어서야 할 의로 다시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의는 도덕적인 흠 없음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 하나님과 다른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의 다스림에 걸맞은 삶을 함께 가리킵니다. 그런 의가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하나님께서 그 간절한 바람을 채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를 이미 완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선언하시지 않았습니다. 의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이제 복 선언은 사람들의 처지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옮겨갑니다.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도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7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의 위로와 채워 주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이제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일과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일이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8 · 두루새김

시편 24:3–4는 누가 하나님의 산에 오를 수 있는지 묻고,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순결한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마음속의 진실함이 함께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이 전통을 이어받으시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과 가까이하는 복을 약속하십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9 · 두루새김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평화는 다투지 않는 상태에 그치지 않고, 갈라진 관계를 바로잡고 미움과 폭력 대신 화해를 이루는 행동을 포함합니다.

왜 평화를 이루는 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연결될까요? 그 답은 5장 마지막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원수에게까지 선을 베푸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아버지를 닮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 선언의 마지막에서 예수님 자신이 등장하시다

「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10 · 두루새김

첫 번째 선언과 같은 약속이 되풀이되면서 여덟 가지 복이 하나로 묶입니다. 의를 간절히 바라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언제나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현실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말하는 방식을 바꾸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두고 거짓으로 온갖 나쁜 말을 할 때, 너희는 복이 있다.」마태복음 5:11 · 두루새김

앞의 여덟 선언은 모두 「그들」에 관한 말씀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은 「너희」라고 부르시고 처음으로 「나 때문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박해받는 제자들로 좁혀집니다. 여기서부터 산 위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향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됩니다.

예수님은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고통을 좋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언자들의 길을 걷고 있으며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복 선언은 현실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현실의 평가가 마지막 평가가 아님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조금 더 깊이

5:3의 원문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가까운 표현이고, 이사야 61:1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이 하나님의 구원 활동과 연결됩니다. 5:4의 「위로받을 것」은 원문에서 수동형으로, 누가 위로하는지 밝히지 않지만 문맥상 하나님의 위로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5:6의 「배부르게 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61장의 원래 문맥은 상처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소금과 빛 — 제자들의 삶은 누구를 드러내는가

마태복음 5:13–16 본문 →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소금을 다시 짜게 하겠느냐? 더는 아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마태복음 5:13 · 두루새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마태복음 5:14 · 두루새김

예수님은 소금이나 빛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그들을 소금과 빛이라고 부르십니다.

소금과 빛은 둘 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에 영향을 주기 위해 있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는 것은 화학적 설명이라기보다, 소금이 소금으로서의 구실을 잃는 상황을 가정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소금의 성분이 아니라 그 쓸모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등불을 켜서 곡식을 재는 그릇 아래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둔다. 그러면 집 안의 모든 사람에게 빛이 비친다.」마태복음 5:15 · 두루새김

등불을 켜 놓고 그 위에 그릇을 덮는다면, 빛이 있다는 사실과 그 빛이 사람들에게 비친다는 사실은 서로 달라집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평화를 이루는 삶이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보게 하려고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자신의 선한 일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다릅니다.

「이처럼 너희 빛이 사람들 앞에서 빛나게 해라.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다.」마태복음 5:16 · 두루새김

찬양을 받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제자들의 선한 삶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따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빛 자체를 바라보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빛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삶의 기준을 설명하십니다.

율법을 폐하지 않고 이룬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5:17–20 본문 →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러 왔다.」마태복음 5:17 · 두루새김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앞으로 예수님은 살인과 분노를, 간음과 마음의 욕망을 연결하시고, 이혼과 맹세, 보복과 원수 사랑에 대해서도 익숙한 이해에 도전하십니다. 그런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부정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예수님은 먼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루다」(πληρόω)로 옮긴 말은 채우다, 완성하다, 실현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구약의 약속과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마태복음은 이미 여러 차례 예수님께 일어난 일들이 예언을 이루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이 향하던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께서 온전히 드러내고 실현하신다는 의미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율법 해설이 그 근거가 됩니다.

두 의미 가운데 하나만 골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구약의 모든 명령이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까지 이 한 구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까지,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의 가장 작은 글자 하나나 획 하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5:18 · 두루새김

「가장 작은 글자」(ἰῶτα)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작은 글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작은 획까지 언급하시는 것은 율법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 다음에 더욱 어려운 선언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를 넘어서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복음 5:20 · 두루새김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었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에 충실한 삶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모두 겉으로만 경건한 위선자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모든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의 마음속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경건한 삶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던 사람들이었기에 이 말씀이 더욱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더 많이 지키고, 규칙을 더 자세하게 만들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그런 방향과 다릅니다.

살인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형제와의 관계가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간음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말이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금지한 행동을 피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이루는 것 사이의 틈을 드러내십니다. 이제 여섯 차례에 걸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선언하시는데, 다른 율법 교사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직접 율법의 의미를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지 않으시면서, 율법이 요구하는 삶을 예수님의 권위로 가르치십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보다 깊은 의

마태복음 5:21–26 본문 →

「너희는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한다』라고 옛사람들에게 전해진 말을 들었다.」마태복음 5:21 · 두루새김

십계명에 나오는 살인 금지의 계명입니다(출애굽기 20:13; 신명기 5:17). 그런데 예수님은 살인이라는 행위에서 그 행위가 자라나는 관계의 문제로 시선을 옮기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한다. 자기 형제에게 『멍청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의회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 『어리석은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게헨나의 불로 벌을 받아야 한다.」마태복음 5:22 · 두루새김

이것을 모든 분노가 법적으로 살인과 똑같은 범죄라는 선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강조되는 것은 분노가 사람을 깔보는 태도로 자라나고, 그 태도가 상대방의 존엄을 부정하는 말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깔보고 관계를 파괴하는 마음과 말도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훨씬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복음 5:23 · 두루새김
「그것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해라. 그런 다음 돌아와 바쳐라.」마태복음 5:24 · 두루새김

예수님은 네가 형제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거든 화해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거든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의 모든 원망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나와의 관계에서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예물을 바치기 위해 제단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예물을 잠시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형제와의 관계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고소한 사람과의 합의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함께 길을 가는 동안에는 화해할 기회가 있지만, 그 기회를 지나치면 재판과 감옥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살인하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의에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멍청한 놈」으로 옮긴 말은 아람어에서 온 모욕적인 표현으로, 상대방을 머저리나 빈 사람처럼 낮추어 부르는 말로 이해됩니다. 「재판」, 「의회의 재판」, 「게헨나의 불」을 실제 재판 절차의 단계와 정확히 맞추려 하기보다는, 경고가 점점 무거워지는 말의 흐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 힌놈 골짜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구약에서 우상숭배와 심판의 기억을 지닌 장소였고 이후 심판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였습니다(열왕기하 23:10; 예레미야 7:31–32).

간음하지 않는 것보다 깊은 의

마태복음 5:27–30 본문 →

「너희는 『간음하지 마라』라고 전해진 말을 들었다.」마태복음 5:27 · 두루새김

간음 금지 역시 십계명의 말씀입니다(출애굽기 20:14). 예수님은 이번에도 행위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탐내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속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복음 5:28 · 두루새김

열쇠는 「탐내는 마음으로 바라보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모든 시선이나 뜻하지 않게 떠오르는 모든 감정을 간음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원문의 표현은 여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바라보는 의도와 연결됩니다.

간음이라는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도 사람을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마음을 다루십니다.

「네 오른쪽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내어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너에게 낫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29 · 두루새김

예수님은 이어서 오른손도 잘라 내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실제로 몸을 다치게 하라는 지시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앞서 문제 삼으신 것은 눈이나 손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과 의도이고, 몸의 일부를 없앤다고 욕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는 죄를 가볍게 다루지 말라는 뜻을 과감하게 과장하여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눈과 손처럼 아무리 중요하고 익숙한 것이라도 사람을 죄로 이끈다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간음에 대한 말씀은 바로 이혼 문제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결혼 관계를 깨뜨리는 문제를 개인의 욕망뿐 아니라 배우자에 대한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십니다.

이혼 증서가 있다고 모든 것이 정당한가

마태복음 5:31–32 본문 →

「또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아내에게 이혼했다는 문서를 주어야 한다』라고 전해졌다.」마태복음 5:31 · 두루새김

이 말씀의 배경은 신명기 24:1–4입니다. 그 본문이 법적으로 직접 다루는 것은 이혼을 명령하는 일이 아니라, 이혼과 재혼이 이루어진 뒤 처음 남편에게 돌아가는 일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서를 써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이혼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 때문인 경우를 제외하고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아내를 간음하는 처지에 놓이게 한다. 또 이혼당한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다.」마태복음 5:32 · 두루새김

여기서는 남편의 책임이 강조됩니다. 남자는 문서를 주는 절차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 행동이 아내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물으십니다. 「그 아내를 간음하는 처지에 놓이게 한다」라는 번역은 그 책임이 남자의 행동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다만 「음행 때문인 경우를 제외하고」라는 예외 규정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원문의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는 문맥에 따라 다양한 성적 부정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일부 해석은 이를 결혼 생활 중의 성적 부정으로 보아 이혼 금지의 예외로 이해하고, 다른 해석은 레위기 18장에 비추어 처음부터 율법상 허용되지 않는 결혼 관계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 두 이해는 마태복음 19:9과도 연결되며, 아직 해석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만으로 모든 이혼 상황에 적용할 완성된 법적·목회적 원칙을 끌어내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특히 폭력과 학대가 있는 관계에서 피해자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관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은 이 본문에서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문제 삼으시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책임을 가볍게 여기면서 법적 절차만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관계 속에서 책임과 신실함을 요구합니다.

조금 더 깊이

「간음하는 처지에 놓이게 한다」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적·법적 상황을 가리키는지는 논의가 있지만, 이혼당한 여자에게 생길 수 있는 결과를 남편의 책임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맹세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사람

마태복음 5:33–37 본문 →

「또 너희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주님께 한 맹세는 지켜라』라고 옛사람들에게 전해진 말을 들었다.」마태복음 5:33 · 두루새김

구약은 거짓 맹세를 금하고,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지키도록 가르칩니다(레위기 19:12; 민수기 30:2). 그런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나님의 왕좌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34 · 두루새김

예수님은 사람들이 맹세할 때 내세우는 대상을 하나씩 짚으십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은 하나님의 왕좌입니다.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마십시오. 땅은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하지 마십시오. 예루살렘은 위대한 왕의 도시입니다.

자기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머리카락 한 올조차 자기 뜻대로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증하려고 더 큰 권위를 끌어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삶조차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없습니다.

「너희는 『예』 할 때는 『예』, 『아니요』 할 때는 『아니요』라고 해라. 그보다 더하는 말은 악한 자에게서 나온다.」마태복음 5:37 · 두루새김

말 자체가 믿을 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맹세를 붙여야 진실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하게 하는 말도 진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악한 자」(πονηρός)로 옮긴 표현은 문법상 「악」으로도 읽힐 수 있어서, 그 이상의 말이 사탄에게서 나온다는 뜻인지 인간의 악한 현실에서 비롯된다는 뜻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맹세 금지에 대해서도 모든 맹세를 문자 그대로 금지한다고 읽는 견해와, 진실성을 보증하려고 맹세를 함부로 쓰는 관행을 겨냥한다고 보는 견해가 전통적으로 갈려 왔습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맹세를 경계하고 진실한 말을 요구한다는 핵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형제를 모욕하는 말을 경계하셨고, 이제는 자신의 말을 보증하려고 과장된 권위를 끌어오는 태도를 경계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그 말 자체가 신실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보복을 넘어서는 삶

마태복음 5:38–42 본문 →

「너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전해진 말을 들었다.」마태복음 5:3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24, 레위기 24:20, 신명기 19:21에 나타납니다. 오늘날에는 잔인한 복수의 원칙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구약의 법적 문맥에서는 지나친 보복을 제한하고 피해에 맞는 공정한 처벌과 배상을 정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도 돌려 대라.」마태복음 5:39 · 두루새김

산상 설교에서 가장 어렵고 논쟁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해석은 폭력적인 저항 자체를 포기하라는 급진적인 비폭력의 요청으로 읽고, 다른 해석은 개인적 모욕과 피해에 똑같은 방식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이어지는 사례들 — 뺨을 맞는 일, 소송에서 옷을 빼앗기는 일, 강제로 길을 가야 하는 일 — 은 모두 다른 사람이 자기 권한이나 힘을 행사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두 번째 해석의 측면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너를 고소해서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복음 5:40 · 두루새김

구약에는 가난한 사람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 때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는 규정이 있습니다(출애굽기 22:26–27). 겉옷은 밤에 몸을 덮는 데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도 보복과 적대의 논리를 넘어서는 행동을 제시하십니다.

「누가 너에게 약 1.5킬로미터를 함께 가라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약 3킬로미터를 가라.」마태복음 5:41 · 두루새김

「함께 가라고 강요하거든」(ἀγγαρεύω)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공적인 일을 위해 강제로 운송에 동원하는 일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는 주민이 군인이나 관리의 요구로 물건을 나르거나 길을 안내하도록 동원될 수 있었습니다. 강제적인 요구를 받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대응을 보복과 증오에만 맡기지 말라는 급진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당한 폭력이나 강압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해자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힐 기회를 주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일반 원칙으로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악을 되갚는 방식만이 유일한 선택이 아님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앞서 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처럼, 적대의 관계를 다르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너에게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라. 너에게 빌리려는 사람을 거절하지 마라.」마태복음 5:42 · 두루새김

마지막 말씀은 이 태도를 다른 사람의 필요로 넓힙니다. 제자들은 자기 것과 자기 권리를 지키는 문제에만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제 보복하지 말라는 말씀을 넘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오른뺨」을 오른손 손등으로 때리는 모욕적인 행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본문은 공격자의 손이나 때리는 방식을 밝히지 않으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 하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마태복음 5:43–48 본문 →

「너희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해라』라고 전해진 말을 들었다.」마태복음 5:43 · 두루새김

이웃 사랑의 말씀은 레위기 19:18에 나오지만, 「네 원수를 미워해라」라는 문장은 구약 율법의 명령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레위기 19:18 앞부분에는 이웃에게 원수를 갚거나 원망을 품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고, 19:34에서는 함께 사는 외국인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 사랑을 처음으로 발명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랑의 범위입니다. 가까운 사람, 잘해 주는 사람, 같은 공동체의 사람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적대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라.」마태복음 5:44 · 두루새김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감정보다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원수의 악을 선이라고 인정하거나 불의를 없던 일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신의 증오만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인간의 의무보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도록 그렇게 해라.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자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45 · 두루새김

예수님은 두 부류를 분명히 구별하십니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않은 사람.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두에게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리십니다. 사람은 해와 비를 자기 힘으로 만들 수 없고,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 선물을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악에 무관심하시거나 악과 선을 같게 여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장에도 심판에 관한 엄중한 경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분께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그래서 그분의 자녀들도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복 선언도 여기서 풀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은 특권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마태복음 5:46 · 두루새김
「너희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무엇을 더 하는 것이냐?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마태복음 5:47 · 두루새김

세리와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돌려주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5:20에서 요구하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를 「넘어서는」 삶이 여기서 다시 나타납니다. 그 넘어서는 의는 더 많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사랑이 멈추는 경계를 넘어서는 삶입니다. 도덕적으로 남보다 뛰어남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선언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해져라.」마태복음 5:48 · 두루새김

온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처럼 온전하라니, 인간에게 가능한 일입니까? 「온전해져라」에 해당하는 원문의 단어는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로, 문맥에 따라 완전한, 온전한, 목적에 이른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5:48이 어떤 온전함을 요구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과 같은 도덕적 완전함으로 보는 읽기, 사랑을 가려 제한하지 않는 나뉘지 않은 사랑으로 보는 읽기, 하나님 자신의 온전함과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온전함을 구분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느냐에 따라 이 명령이 넘을 수 없는 기준으로 들리기도 하고, 지금 걸어갈 수 있는 길로 들리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48절의 「그러므로」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에서 아버지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해와 비를 주신다고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신 다음 온전해지라고 명하십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온전함의 핵심은 사랑의 범위를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들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하늘의 아버지가 베푸시는 선하심을 닮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레위기 19:2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야 한다는 신명기 18:13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18:13의 그리스어 번역에는 마태가 사용한 것과 같은 「온전한」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또 원문에서 5:20의 「넘어서」와 5:47의 「더 하는」은 같은 어근에 속하는 표현입니다.

해가 떠오르고 비가 내리는 세상에서

마태복음 5:1–48 본문 →

마태복음 5장의 시작과 끝은 여기서 만납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자기 힘을 내세울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셨고, 마지막에는 그들에게 하늘의 아버지를 닮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시면서, 그들이 형제와의 화해, 진실한 말, 원수를 향한 사랑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자신의 완전함을 자랑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을 닮아 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형제와 화해하는 일도, 자기 욕망을 다스리는 일도,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에 제자들의 노력을 바라보게 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아버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해가 뜰 때, 그 빛은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만 골라 비추지 않습니다. 비가 내릴 때, 그 비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의 밭에만 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모습을 가리키시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해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하늘 아래에서, 해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에게 떠오르고, 비는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내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