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탄생과 활동의 시작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왕이 되시는가

마태복음 4장은 뜻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굶주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는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제안이 주어지고, 천사들의 보호를 확인해 보라는 요구가 이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 가지 제안을 모두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광야를 떠나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예루살렘의 왕궁도, 성전도 아닙니다. 갈릴리의 작은 마을입니다. 그곳에서 어부들을 부르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널리 전하십니다.

이 두 장면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것과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함께 읽을 때, 마태가 보여 주려는 왕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왕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십니까?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의 아들이 광야로 가시다

마태복음 4:1–2 본문 →

그때 예수께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성령께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마태복음 4:1 · 두루새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신 분은 마귀가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사랑받는 아들이시라는 선언이 들렸습니다(3:16–17).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 영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 뒤에 마태가 보여 주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굶주림과 시험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시험의 장소로 이끄시지만, 그곳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이는 마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다는 사실이 마귀의 제안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사십 일 밤낮을 먹지 않고 지내신 뒤 배가 고프셨습니다.마태복음 4:2 · 두루새김

「사십 일 밤낮」이라는 표현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 머물렀던 기간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34:28; 신명기 9:9). 그러나 이 대목에서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낸 사십 년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광야에서 배고픔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보호를 의심했으며, 다른 신들을 섬기려는 유혹에도 넘어갔습니다.

마태는 이미 2:15에서 본래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부르던 호세아의 말(호세아 11:1)을 예수님에게 적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이스라엘이 걸었던 길을 예수님께서 다시 걸으시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길을 어떻게 걸으실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시험하는 마귀가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험을 받도록」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페이라조에서 나온 말로, 문맥에 따라 시험하거나 유혹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같은 사건 안에서도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까닭입니다.

첫 번째 시험 —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제안

마태복음 4:3–4 본문 →

시험하는 마귀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라.」마태복음 4:3 · 두루새김

이 말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 증명해 보라는 도전으로도, 그 신분에 걸맞게 능력을 사용해 보라는 제안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험의 핵심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자신의 필요를 해결하는 능력 행사와 연결시키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빵을 먹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뒤에 실제로 많은 사람에게 빵을 먹이십니다(마태복음 14:13–21; 15:32–39). 핵심은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누구의 제안에 따라, 무엇을 위해 능력을 사용하시느냐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복음 4:4 · 두루새김

이 문장을 흔히 몸의 양식보다 영적인 양식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8:2–3에서 모세는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배고프게 하셨다가 만나를 먹이신 까닭이 바로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빵보다 자신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빵을 주신 일입니다.

신명기의 가르침은 음식과 말씀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마련할 수 없는 만나를 받으면서, 자기 생명이 한결같이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배가 고프십니다. 마태는 그 사실을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자신의 필요를 위해 혼자 마음대로 행사할 특권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배고픔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배고픔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보다 앞서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으로 응답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자신도 성경을 인용합니다.

두 번째 시험 —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마태복음 4:5–7 본문 →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웁니다. 어떤 위치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지만, 장소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과 예배를 상징하는 성전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귀가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아래로 몸을 던져라.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를 위해 자기 천사들에게 명령하실 것이다.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마태복음 4:6 · 두루새김

마귀가 인용한 시편 91:11–12는 성경에 있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 약속을 믿고 뛰어내리지 않으실까요?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피난처와 요새로 삼는 사람의 신뢰를 노래합니다. 보호의 약속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마귀는 그 약속을 근거로, 보호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믿음과 시험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복음 4:7 · 두루새김

신명기 6:16에는 원래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처럼 시험하지 말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출애굽기 17:1–7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이 없어 괴로워합니다. 그 목마름은 실제 문제였지만, 백성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들 가운데 계시는지 아닌지를 묻기 시작했고, 모세는 그것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첫 번째 시험은 배고픔에서, 두 번째 시험은 위험에서 보호받고 싶은 필요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먹이실 수 있고,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예수님께서 자기 뜻대로 움직이실 수 있는 수단으로 바꾸려 합니다.

성경의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그 약속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뛰어내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시험이 모두 끝난 뒤, 실제로 천사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91:11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의 모든 길에서 지키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마태복음에 기록된 마귀의 인용에서는 이 표현이 빠져 있습니다. 그 생략이 일부러 뜻을 비튼 것인지까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인용된 말씀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입니다.

세 번째 시험 —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

마태복음 4:8–11 본문 →

이제 마귀는 예수님을 아주 높은 산으로 데려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나라들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인지 확인해 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거래를 제안합니다.

마귀가 말했습니다. 「네가 엎드려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마태복음 4:9 · 두루새김

마태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했습니다(1:1).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을 찾았습니다(2:2). 그런 분에게 주어진 이 제안은 앞선 두 시험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사명에 닿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마귀의 주장입니다. 마태복음 4장은 세상의 모든 나라가 실제로 마귀의 정당한 소유라고 설명하거나, 그가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다고 보증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나라들을 얻는 대가로 자신 앞에 엎드려 절하라는, 곧 예배를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러가라, 사탄아.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절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복음 4:10 · 두루새김

예수님은 처음으로 시험하는 이를 직접 꾸짖으십니다. 「마귀」와 「사탄」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적대자를 다른 말로 가리킨 것입니다. 이 대답이 뿌리를 둔 신명기 6:13–15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서 풍요를 누리더라도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여기서 세 번째 시험이 앞의 두 시험과 하나로 모입니다.

빵도, 보호도, 나라도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느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뒤바꾸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는 일 자체를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닌 존재에게 굴복하여 나라를 얻는 길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를 떠났습니다. 천사들이 다가와 예수를 돌보았습니다.마태복음 4:11 · 두루새김

마귀는 예수님에게 자기 앞에 엎드려 절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셨고, 마지막에는 천사들이 예수님을 돌봅니다. 원문에서는 이 돌봄을 섬긴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가 내세웠던 천사의 도움도 여기서 실제로 나타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뛰어내려 그것을 강제로 확인하신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높은 산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시작됩니다.

어둠의 땅에 빛이 솟아오르다

마태복음 4:12–17 본문 →

예수께서는 요한이 붙잡혔다는 말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마태복음 4:12 · 두루새김

마태는 요한에게 일어난 일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배경은 14장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서는 요한의 활동이 가로막힌 시점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말씀을 널리 전하기 시작하신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숫가 도시 가버나움에 자리를 잡으십니다. 마태는 그 위치를 스불론과 납달리라는 오래된 지명으로 설명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독자에게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단강 건너편,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마태복음 4:15 · 두루새김
「그곳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땅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복음 4:16 · 두루새김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북이스라엘에 속했고, 앗시리아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열왕기하 15:29는 앗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이 갈릴리와 납달리 땅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사로잡아 갔다고 기록합니다. 이사야는 그런 고난을 경험한 땅을 향해 어둠이 끝나고 빛이 비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어지는 이사야 9:6–7은 한 아이의 탄생과 다윗의 왕좌,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다스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빛은 마음의 위로만이 아니라, 억압과 고난을 경험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져올 회복의 소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찾아 나섰다고 하지 않습니다. 빛이 그들에게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들이 있는 땅에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이렇게 널리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라.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마태복음 4:17 · 두루새김

마태는 이사야의 빛이 떠올랐다는 선언 바로 다음에 이 말씀을 놓았습니다. 마태의 이야기 안에서 그 빛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한 일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3:2에서 전한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다가오는 나라를 알리며 사람들을 준비시켰고,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으로 그 나라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오는지도 보여 주기 시작하십니다.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라」는 요구도 단순히 잘못을 반성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아닙니다.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삶의 방향을 돌이키라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태는 그 나라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들어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가 인용한 말씀은 히브리어 성경의 이사야 8:23–9:1에 해당하며, 현대의 많은 성경에서는 이사야 9:1–2로 구분합니다.

나를 따라와라

마태복음 4:18–22 본문 →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라고 불리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보십니다. 두 사람은 어부여서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두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와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태복음 4:19 · 두루새김

예수님은 어떤 가르침이나 제도를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제자 됨의 중심은 무엇보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일을 맡는 일인 동시에,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빚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매일 하던 일을 가져와 앞으로의 사명을 설명하십니다. 다만 그 대상이 물고기에서 사람들로 달라집니다. 이 표현을 사람들을 강제로 붙잡는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널리 전하시고 사람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제자들의 역할도 그 사명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두 사람은 곧 그물을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마태복음 4:20 · 두루새김

마태는 그들이 얼마나 고민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부르심과 응답 사이에 지체가 묘사되지 않습니다. 마태는 이 「곧」을 다음 두 형제의 이야기에서도 반복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두 사람은 곧 배와 아버지를 남겨 두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마태복음 4:22 · 두루새김

이 장면을 가족을 버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명령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마태는 그들의 이후 가족 관계를 이 대목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생계의 도구인 그물과 배, 가족인 아버지에게까지 깊이 들어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지닌 무게에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어둠 속의 백성에게 빛이 찾아왔듯,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올 사람들을 기다리고만 계시지 않고 바닷가를 거니시며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렇게 네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떤 모습인가

마태복음 4:23–25 본문 →

예수께서는 갈릴리 온 지방을 다니며 그곳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셨습니다. 또 백성의 온갖 병과 온갖 몸의 약함을 고치셨습니다.마태복음 4:23 · 두루새김

가르치시고, 널리 전하시고, 고치십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는 좋은 소식을 알리는 일입니다. 병을 고치시는 것은 그 나라가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보여 주는 일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고, 두루새김은 이 자리에서 「기쁜 소식」이라고 옮겼습니다. 마태는 나라를 널리 전하셨다는 말 바로 뒤에 병을 고치셨다는 사실을 놓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막연한 권력이나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사람들을 고통에서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행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수에 관한 소문이 시리아 온 지방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그중에는 귀신 들린 사람들, 뇌전증을 앓는 사람들, 몸이 마비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치셨습니다.마태복음 4:24 · 두루새김

마태는 모든 질병을 귀신의 활동으로 설명하지 않고, 병과 고통, 귀신 들림, 뇌전증, 몸의 마비를 구별하여 적습니다. 누가 그 병을 얻을 만한 잘못을 했는지, 이들이 도덕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는 말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 있고, 다른 이들이 그들을 데려오며, 예수님은 그들을 고치십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대, 요단강 건너편에서 온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마태복음 4:25 · 두루새김

처음에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갈릴리 바닷가의 네 어부였습니다. 이제는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이 무리에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두가 네 어부와 같은 수준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면서 시작된 움직임이 갈릴리를 넘어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4:23의 설명은 9:35에서 거의 같은 형태로 반복됩니다. 그 사이에 산 위에서 가르치시는 말씀(5–7장)과 여러 치유 사건(8–9장)이 들어 있습니다. 마태는 4:23에서 먼저 전체 모습을 제시하고, 다음 장들에서 그 내용을 자세히 펼쳐 보입니다.

광야의 아들과 갈릴리의 왕

마태복음 4:1–25 본문 →

광야에서 마귀는 예수님께서 어떤 아들이 되셔야 하는지를 제안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능력을 쓰고, 하나님의 보호를 눈에 보이도록 증명하고, 나라들을 얻기 위해 예배의 대상을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두 거절하시고, 갈릴리로 오셔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과 행동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아들 됨은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순종으로 드러나고, 예수님의 왕 되심은 기쁜 소식과 병을 고치시는 행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대로 행동하시는지 시험하여 확인하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한결같이 믿을 만한 분이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기는 관계입니다. 동시에 그런 신뢰는 배고픔이나 병이나 고통에 무관심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마태는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충실함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실제적인 돌봄을 한 분의 예수님 안에 놓습니다.

높은 산에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바라보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갈릴리의 마을들을 두루 다니십니다. 나라들을 차지하기 위해 절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그들의 고통을 고치십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놓아두고 따라가고, 갈릴리와 데가볼리에서,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요단강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은 그렇게 갈릴리의 길 위에서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