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탄생과 활동의 시작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왕이 되시는가

마태복음 4장은 뜻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굶주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는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제안이 주어지고, 천사들의 보호를 확인해 보라는 요구가 이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 가지 제안을 모두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광야를 떠나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예루살렘의 왕궁도, 성전도 아닙니다. 갈릴리의 작은 마을입니다. 그곳에서 어부들을 부르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이 두 장면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것과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함께 읽을 때, 마태가 보여 주려는 왕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왕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십니까?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의 아들이 광야로 가시다

마태복음 4:1–2 본문 →

그때에 예수는 마귀에게 시험받도록 그 영에게 이끌려 광야로 올라갔다.마태복음 4:1 · 본디새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신 분은 마귀가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사랑받는 아들이시라는 선언이 들렸습니다(3:16–17).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 영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 뒤에 우리는 능력의 과시나 영광스러운 즉위를 예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태가 보여 주는 것은 굶주림과 시험입니다.

‘시험받다(πειράζω)’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문맥에 따라 시험하거나 유혹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같은 사건 안에서도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집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시험의 장소로 이끄시지만, 그곳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이는 마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다는 사실이 마귀의 제안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사십 일과 사십 밤을 금식한 뒤에 배가 고팠다.마태복음 4:2 · 본디새김

사십 일과 사십 밤이라는 표현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야훼 앞에 머물렀던 기간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34:28; 신명기 9:9). 그러나 이 대목에서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낸 사십 년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온 뒤 광야에서 시험받았습니다. 그들은 배고픔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보호를 의심했으며, 다른 신들을 섬기려는 유혹에도 넘어갔습니다. 마태는 이미 2:15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호세아 11:1의 ‘아들’을 예수님에게 적용하며,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님의 생애를 겹쳐 읽도록 독자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은 한 개인이 유혹을 물리치는 이야기를 넘어, 이스라엘이 걸었던 길을 예수님께서 다시 걸으시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길을 어떻게 걸으실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다가옵니다.

첫 번째 시험 —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제안

마태복음 4:3–4 본문 →

시험하는 자가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빵이 되도록 말하여라.」마태복음 4:3 · 본디새김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어떤 행동을 요구합니다. 이 말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 증명해 보라는 도전으로도,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 신분에 걸맞게 능력을 사용해 보라는 제안으로도 읽힐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험의 핵심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자신의 필요를 해결하는 능력 행사와 연결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을 빵으로 만드는 일 자체가 왜 잘못일까요?

배고픈 사람이 빵을 먹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뒤에 실제로 많은 사람에게 빵을 먹이십니다(마태복음 14:13–21; 15:32–39). 핵심은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누구의 제안에 따라, 무엇을 위해 능력을 사용하시느냐에 있습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말했다.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을 통해 나오는 모든 말로 산다.』」마태복음 4:4 · 본디새김

이 문장을 흔히 육체의 양식보다 영적인 양식이 중요하다는 교훈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8:3의 문맥을 살펴보면 훨씬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납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배고프게 하셨다가 만나를 먹이신 까닭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산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신명기 8:2–3).

하나님께서 빵보다 자신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빵을 주신 일입니다.

신명기의 가르침은 음식과 말씀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마련할 수 없는 만나를 받으면서, 자기 생명이 여호와야훼의 신실한 공급에 달려 있음을 배웠습니다. 빵은 생명을 유지하지만, 빵을 주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의 생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가 고프십니다. 그러나 마귀가 제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자신의 필요를 위해 독자적으로 행사할 특권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배고픔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배고픔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보다 앞서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으로 응답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자신도 성경을 인용합니다.

두 번째 시험 —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마태복음 4:5–7 본문 →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도성, 곧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웁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를 상징하는 중심 장소였습니다.

그에게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아래로 몸을 던져라. 이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너에 관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너를 손 위에 받쳐 올려 네가 발을 돌에 부딪지 않게 할 것이다.』」마태복음 4:6 · 본디새김

이번에는 마귀가 시편 91:11–12를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명하셔서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신다는, 성경에 있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 약속을 믿고 뛰어내리지 않으실까요?

시편 91편은 하나님을 피난처와 요새로 삼는 사람의 신뢰를 노래합니다. 시편에서 보호의 약속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마귀는 그 약속을 근거로, 보호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믿음과 시험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이유로 불필요한 위험을 만들어 내고, 반드시 구해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또 이렇게 적혀 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복음 4:7 · 본디새김

신명기 6:16의 이 말씀에는 원래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처럼’이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출애굽기 17:1–7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이 없어 괴로워합니다. 그들의 목마름은 실제 문제였지만, 백성은 결국 여호와야훼께서 자기들 가운데 계시는지 아닌지를 묻기 시작했고, 모세는 그 행동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은 모두 인간의 실제 필요에서 시작합니다. 첫 번째는 배고픔이고, 두 번째는 위험에서 보호받고 싶은 필요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먹이실 수 있고,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예수님께서 자기 뜻대로 작동시키실 수 있는 수단으로 바꾸려 합니다. 성경의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그 약속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시고, 하나님의 보호를 증명하도록 아들의 신분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마귀는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도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뛰어내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험이 모두 끝난 뒤, 실제로 천사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옵니다.

조금 더 깊이

성전 꼭대기가 어떤 위치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또 마귀가 인용한 시편 91:11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의 모든 길에서’ 지키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마태복음에 기록된 마귀의 인용에서는 이 표현이 빠져 있습니다. 그 생략이 의도적인 왜곡인지까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인용된 말씀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입니다.

세 번째 시험 —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

마태복음 4:8–11 본문 →

이제 마귀는 예수님을 아주 높은 산으로 데려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나라들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인지 확인해 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거래를 제안합니다.

그에게 말했다. 「네가 엎드려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마태복음 4:9 · 본디새김

첫 번째 제안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나라들을 얻는 것으로, 앞선 두 시험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사명에 닿아 있습니다. 마태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했고(1:1),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을 찾았습니다(2:2). 그리고 곧 예수님은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실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마귀의 주장입니다. 마태복음 4장은 세상의 모든 나라가 실제로 마귀의 정당한 소유라고 설명하거나, 그가 약속을 이행할 능력이 있다고 보증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나라들을 얻는 대가로 예수님에게 예배를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한 존경이나 외교적 예절이 아니라, 자신 앞에 엎드려 절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처음으로 시험하는 자를 직접 꾸짖으십니다.

그때에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물러가라, 사탄아. 이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 절하고 그분만을 예배하여라.』」마태복음 4:10 · 본디새김

예수님의 대답은 신명기 6:13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문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를 경외하고 섬기며 다른 신들을 따르지 말라고 명합니다(신명기 6:13–15). 약속의 땅에서 풍요를 누리더라도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경고입니다.

여기서 세 번째 시험이 앞의 두 시험과 하나로 모입니다.

빵을 얻는 일도, 보호를 받는 일도, 나라를 얻는 일도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느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뒤바꾸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왕이 되실 기회를 거절하신 것일까요? 그렇게 단정하기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왕이 되시는 것을 거절하셨는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실 분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를 얻기 위해 하나님 아닌 존재에게 굴복하는 길은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때에 마귀가 그를 두고 떠났다. 보아라, 천사들이 다가와 그를 섬기고 있었다.마태복음 4:11 · 본디새김

마귀는 예수님에게 자기 자신을 섬기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천사들이 예수님을 섬깁니다.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가 내세웠던 천사의 도움도 여기서 실제로 나타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뛰어내려 그것을 강제로 확인하신 결과가 아닙니다. 마태는 천사들이 음식을 가져왔는지, 다른 도움을 제공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세상의 나라들이나 높은 산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앞서 마태는 시험하는 자를 ‘마귀’라고 불렀지만, 4:10에서 예수님은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같은 대적자를 다른 말로 지칭한 것입니다.

어둠의 땅에 빛이 솟아오르다

마태복음 4:12–17 본문 →

마태는 세례자 요한에게 일어난 사건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넘겨졌다는 말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갔다」고만 기록합니다(4:12). 요한의 활동에 제약이 생긴 시점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자신의 선포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숫가의 마을 가버나움에 자리를 잡으십니다. 마태는 그 위치를 설명하면서 스불론과 납달리라는 오래된 지명을 사용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독자에게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단 강 건너편,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마태복음 4:15 · 본디새김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땅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이들에게 빛이 솟아올랐다.」마태복음 4:16 · 본디새김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북이스라엘에 속했고, 앗시리아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열왕기하 15:29는 앗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이 갈릴리와 납달리 땅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사로잡아 갔다고 기록합니다. 이사야는 그런 고난을 경험한 땅을 향해 어둠이 끝나고 빛이 비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어지는 이사야 9:6–7은 한 아이의 탄생과 다윗의 왕좌,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통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빛은 마음의 위로나 개인적인 깨달음만이 아니라, 압제와 고난을 경험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져올 회복의 소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자리 잡으신 일을 바로 이 예언의 성취로 해석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찾아 나섰다고 하지 않습니다. 빛이 그들에게 솟아올랐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예수는 이렇게 말하며 선포하기 시작했다. 「회개하여라.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마태복음 4:17 · 본디새김

마태는 이사야의 빛이 솟아올랐다는 선언 다음에 예수님의 첫 선포를 놓았습니다. 마태의 이야기 안에서 그 빛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시작하시는 일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선포는 세례자 요한이 3:2에서 선포한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말이지만 이야기 안에서 놓인 위치는 달라졌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며 사람들을 준비시켰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나라를 선포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 그 나라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오는지도 보여 주기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반성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새로운 현실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삶의 방향을 돌이키라는 요청입니다.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태는 그 나라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들어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4:15–16에 인용된 말씀은 이사야 8:23–9:1에 해당합니다. 현대의 많은 성경에서는 이사야 9:1–2로 구분합니다. 요한이 헤롯에 의해 갇혔다는 사실과 그 배경은 마태복음 14장에서 알게 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마태복음 4:18–22 본문 →

갈릴리 바닷가를 거닐다가 그는 두 형제, 곧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투망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부였던 것이다.마태복음 4:18 · 본디새김

마태가 간단히 덧붙인 이들의 직업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들에게 말했다. 「내 뒤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복음 4:19 · 본디새김

부르심에는 ‘내 뒤를 따라오너라’라는 초대와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교훈을 따르거나 특정한 제도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제자 됨의 중심은 무엇보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지금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그렇게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 일인 동시에,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빚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매일 하던 일을 가져와 앞으로의 사명을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달라집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물고기를 낚으며 살아왔고, 이제 사람들을 향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됩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표현을 사람들을 강제로 붙잡거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돌보십니다. 제자들의 장차 역할도 그 사명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그를 따라갔다.마태복음 4:20 · 본디새김

마태는 그들이 얼마나 오래 고민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부르심과 응답 사이에 지체가 묘사되지 않습니다. 마태는 이 ‘곧’을 다음 두 형제의 이야기에서도 반복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를 따라갔다.마태복음 4:22 · 본디새김

첫 번째 형제는 그물을 버려둡니다. 두 번째 형제는 배와 아버지를 버려둡니다.

이 장면을 가족을 버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명령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서술의 초점은 예수님의 부르심이 지닌 무게에 있습니다. 그물과 배는 생업의 도구이고, 아버지는 가족 관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삶의 질서에 깊이 들어옵니다.

두 장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먼저 찾아가 제자가 되겠다고 요청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빛이 어둠 속의 백성에게 찾아왔다는 장면과도 어울립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올 사람들을 기다리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며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러나 마태는 여기서 제자들의 이야기를 길게 이어가지 않습니다. 시선을 더 넓은 갈릴리로 돌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어떤 모습인가

마태복음 4:23–25 본문 →

그는 갈릴리 주민들의 회당에서 가르치고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백성 가운데 있는 온갖 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며 온 갈릴리를 두루 다녔다.마태복음 4:23 · 본디새김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고치십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독립된 활동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사역을 함께 보여 주는 행동들입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는 좋은 소식을 알리는 일입니다. 병과 허약함을 고치시는 것은 그 나라의 도래가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보여 주는 일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는 말 바로 뒤에 병과 허약함을 고치셨다는 사실을 놓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추상적인 권력이나 정치적 구호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병과 고통에서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행동이 그 나라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그에 관한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병을 앓고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 귀신 들린 이들과 뇌전증을 앓는 이들과 마비된 사람들을 모두 그에게 데려왔다. 그는 그들을 고쳤다.마태복음 4:24 · 본디새김

마태는 모든 질병을 귀신의 활동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병과 고통, 귀신 들림, 뇌전증, 마비를 구별하여 적습니다. 또 누가 그 병을 얻을 만한 잘못을 했는지, 왜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고, 이들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말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 있고, 다른 이들이 그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치십니다.

이 장면은 광야에서의 첫 번째 시험을 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오셔서는 다른 사람들의 육체적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요단 강 건너편에서 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갔다.마태복음 4:25 · 본디새김

처음에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갈릴리 바닷가의 네 어부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큰 무리입니다. 다만 이 무리에 이방인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었는지, 그들이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알 수 없고, 네 어부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른 일과 같은 수준의 제자 됨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면서 시작된 움직임이 이제 갈릴리 전체를 넘어 확장되고 있음이 보입니다.

조금 더 깊이

4:23의 설명은 9:35에서 거의 같은 형태로 반복됩니다. 두 구절 모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과 허약함을 고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 사이에는 산 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5–7장)과 다양한 치유 사건들(8–9장)이 들어 있습니다. 4:23은 앞으로 펼쳐질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보여 주는 문장으로 기능하며, 마태는 먼저 전체 모습을 제시하고 다음 장들에서 그 내용을 자세히 펼쳐 보입니다.

광야의 아들과 갈릴리의 왕

마태복음 4:1–25 본문 →

광야에서 마귀는 예수님께서 어떤 아들이 되셔야 하는지를 제안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눈에 보이도록 증명하고, 세상의 나라들을 얻기 위해 예배의 대상을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두 거절하셨고, 갈릴리로 오신 뒤에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아들이시기 때문에 능력을 행사할 권리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안에서 그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아들 됨은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순종으로 드러나고, 예수님의 왕 되심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좋은 소식과 치유의 행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면 당장의 필요를 해결해 주시거나, 위험으로부터 반드시 건져 주시거나, 원하는 결과를 이루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시면서도, 그것을 자신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갈릴리의 예수님은 그런 신뢰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종교적 태도가 아님을 보여 주십니다.

광야의 순종만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필요를 무시하는 엄격한 순종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의 치유만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이 원하는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는 능력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두 모습을 한 분의 예수님 안에 놓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충실함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실제적인 돌봄입니다.

높은 산에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바라보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갈릴리의 한 호숫가를 거닐고 계십니다. 그곳에는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이 있고, 배에서 그물을 손보는 형제들이 있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라들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절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그들의 고통을 고치십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백성이 큰 빛을 보리라는 이사야의 말은, 마태의 이야기 속에서 이렇게 구체적인 모습을 얻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에서,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요단강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을 따라 모여듭니다.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은 그렇게 갈릴리의 길 위에서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