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탄생과 활동의 시작
죄인들 사이에 서신 하나님의 아들
요단 강가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으며,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베어져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뜻밖의 사람이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오십니다. 요한은 당황합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째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시는 걸까요?
독자 역시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회개하셔야 할 죄가 있어서 오신 것일까요? 아니면 그 세례에는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요한에게 「지금은 그대로 두어라. 우리가 이렇게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첫 말씀부터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왜 그것을 위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셔야 할까요?
마태복음 3장은 이 질문을 향해 움직입니다. 먼저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그가 어떤 분을 기다리고 있는지 밝힙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등장하시자, 예수님 자신이 선택하시는 길을 보여 줍니다.
장의 시작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가 있고, 마지막에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두 목소리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가 드러납니다.
광야에서 시작된 새로운 소식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며 나섰다.마태복음 3:1 · 본디새김
마태는 시간의 흐름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셨지만, 3장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활동하는 시대로 넘어갑니다. 그 사이에 몇 년이 지났는지, 예수님께서 어떤 성장 과정을 거치셨는지는 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가 활동하는 곳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성전도 아닙니다. 유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단순히 사람이 적게 사는 황량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그분의 인도를 받았던 장소이면서, 동시에 불순종과 시험을 경험했던 장소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기억을 가진 광야에서 요한이 외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회개하여라.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마태복음 3:2 · 본디새김
요한의 첫마디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나라」는 다른 복음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통치와 그 통치가 나타나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이를 단순히 죽은 뒤에 들어가는 하늘의 장소로 이해하면 요한의 선포가 가진 긴박함을 놓치게 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가 먼 훗날에야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선포는 단순한 미래 예측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가까이 이르렀으므로 지금 삶의 방향을 돌이키라는 요청입니다.
「회개하여라」는 생각과 태도,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을 가리킵니다. 잘못을 슬퍼하는 마음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지만, 단순히 후회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뒤에서 요한이 「회개에 걸맞은 열매」를 요구한다는 사실이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해 줍니다.
그런데 왜 이 선포가 광야에서 시작되어야 할까요? 마태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언급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주의 길을 마련하라. 그분의 오솔길을 곧게 하라.』」마태복음 3: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40:3에서 왔습니다. 이사야 40장은 바벨론 유배의 고통을 겪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와 회복을 선포하는 장입니다. 원래 문맥에서 그 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돌아오게 하시는 길입니다. 광야에 길을 낸다는 이미지는 단순한 도로 공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회복을 위해 친히 행동하신다는 선언입니다(이사야 40:1–5).
마태는 이 말씀을 요한에게 적용합니다. 이사야에서는 여호와야훼의 길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의 이야기에서 요한은 누구의 길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곧 등장하실 예수님의 길입니다.
마태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곧 여호와야훼이시라는 명제를 직접 논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사야의 말씀을 예수님의 등장에 적용함으로써,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 자신의 구원 행동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위대한 선생을 맞이할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새로운 사건을 맞이할 준비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곧게 하는 일은 돌을 치우거나 땅을 고르는 일이 아닙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가 왜 「하늘」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지에는 논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피하는 유대적 표현 방식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하늘의 권위와 땅의 통치를 대조하는 마태의 신학적 언어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가까이 왔다」는 그리스어에서 가까워졌음을 나타내는 완료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와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엘리야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
요한 자신은 낙타 털옷을 가지고 있었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의 먹을거리는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복음 3:4 · 본디새김
마태는 요한의 옷과 띠, 먹을거리만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짧은 묘사에는 구약성경을 아는 독자가 알아볼 만한 특징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에서 엘리야는 털과 관련된 특징적인 차림과 허리에 두른 가죽 띠로 묘사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왕의 잘못을 꾸짖으며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던 예언자였습니다. 요한 역시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뒤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에게까지 날카로운 경고를 합니다. 그의 옷차림은 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문학적 신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말라기 4:5–6에는 여호와야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엘리야와 연결하여 설명하시는 장면도 기록합니다(11:14, 17:12–13). 따라서 여기서 엘리야를 떠올리는 것은 후대 독자가 만들어 낸 막연한 연상이 아니라, 마태복음 자체가 발전시키는 연결입니다.
메뚜기와 들꿀이라는 식사는 광야에서 생활하는 요한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마태는 요한이 왜 그런 식사를 선택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특정한 금욕 규칙이나 종교적 서약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광야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둘레의 온 지역이 그에게 나아가고 있었다.마태복음 3:5 · 본디새김
이 표현을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찾아왔다는 통계적 진술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마태는 요한의 활동이 광범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선포했고, 동시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던 곳을 떠나 광야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물을 사용하는 여러 정결 의식이 있었지만, 요한의 세례를 그 가운데 하나와 그대로 동일시하기는 어렵습니다. 마태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돌아서겠다는 의미를 담아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요단 강이라는 장소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여호수아 3–4장). 요한의 세례를 그 사건의 직접적인 재현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요단 강가에서 사람들이 회개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장면은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실만으로 그 새로운 시작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메뚜기는 레위기 11:21–22에서 먹을 수 있는 곤충으로 구분되는 종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이 메뚜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율법을 어기는 기이한 행동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요한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 가운데 많은 이가 자기가 주는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올 진노를 피해 달아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었느냐?」마태복음 3:7 · 본디새김
이 두 집단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의 해석과 일상생활에서의 준수, 조상들의 전통을 중시했습니다. 반면 사두개파는 특히 성전과 제사장 계층에 연결된 사람들이었으며, 부활을 비롯한 여러 신학적 문제에서 바리새파와 견해가 달랐습니다(사도행전 23:6–8).
그런 사람들이 왜 왔을까요? 정말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려 했을까요? 아니면 요한의 활동을 관찰하거나 평가하려 했을까요? 원문은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향해 왔다고 표현합니다. 세례를 받으려 했다는 읽기가 자연스럽지만, 세례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왔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고, 적어도 본문은 그들이 실제로 세례를 받았다고까지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보자마자 매우 강한 말로 꾸짖습니다. 그들이 위험을 피하려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지만, 7절만으로 그들 개개인의 속마음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요한의 말이 그가 무엇을 문제 삼는지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걸맞은 열매를 맺어라.」마태복음 3:8 · 본디새김
요한은 세례를 받은 적이 있는지,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지, 얼마나 많은 종교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회개의 열매가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 표현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요한은 열매를 맺어서 회개를 얻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에 걸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회개가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라면, 그 변화는 실제 행동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잘못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같은 잘못을 계속 정당화하거나,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삶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 회개는 무엇으로 확인될 수 있을까요?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열매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삶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는지도 실제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은 이 돌들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일으키실 수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3:9 · 본디새김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의 후손에게 특별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헛된 것이 아니며, 요한도 아브라함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어 주는 보증으로 사용하는 태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있다고 해서, 그의 후손이 어떤 삶을 살아도 하나님의 심판과 무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돌은 생명을 낳을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이 그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일으키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혈통적 자격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표현의 대비가 있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사실에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장의 마지막에서 하늘의 소리는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3장에는 이렇게 서로 다른 자녀의 이미지가 놓여 있습니다.
이 대비를 너무 단순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의 말이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에 대한 거부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을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선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라고 요구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베어져서 불에 던져진다.」마태복음 3:10 · 본디새김
아직 도끼가 나무를 찍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뿌리에 놓여 있습니다.
심판은 막연히 먼 미래에만 있을 일이 아니라, 이미 눈앞에 다가온 현실로 선포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회개를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일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다가올 심판을 실제로 집행하실 분은 누구일까요?
요한은 곧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소개합니다.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과 영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
「나는 회개에 이르도록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강한 분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다. 그분은 너희에게 거룩한 영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3:11 · 본디새김
지금까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했고,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었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11절에 이르면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밝힙니다.
자신은 앞으로 오시는 분보다 작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미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모인 사람들을 자기 영향력 아래 붙들어 두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시선을 다른 분에게 돌립니다. 신발을 가지고 다니는 일은 다른 사람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낮은 일인데, 요한은 그 정도의 일조차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겸손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아무리 위대한 예언자라 해도, 지금 준비하고 있는 분의 사역과 자신의 사역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세례의 내용에서 드러납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앞으로 오시는 분은 거룩한 영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새 생명과 새롭게 된 삶의 약속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36:25–27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며, 자신의 영을 그들 안에 두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엘 2:28–29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백성에게 부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약속을 배경으로 보면 요한이 말하는 거룩한 영의 세례는 외적인 정결 의식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행동, 곧 하나님이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불은 정결하게 하는가, 심판하는가?
이 구절에는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한 가지 해석은 거룩한 영과 불을 함께 정결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합니다. 성경에서 불은 정결하게 하는 일에도 사용되는 이미지이며, 말라기 3:2–3에서는 하나님이 정련하는 불처럼 자기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 관점에서 영과 불의 세례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그 안의 불순한 것을 제거하시는 일입니다.
다른 해석은 회개하여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영이 주어지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임한다고 봅니다. 이 읽기는 앞뒤 문맥에서 강한 근거를 얻습니다. 10절에서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가 불에 던져지고, 12절에서는 겨가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지므로, 그 사이에 있는 11절의 불 역시 심판과 연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두 해석에는 각각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과 불을 함께 묶은 문장의 형태와 구약의 정결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하나는 앞뒤에 반복되는 심판의 불과 밀과 겨의 구분을 강조합니다.
이 논쟁을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더라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오실 분은 단지 회개하라고 권면하시는 분에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롭게 하시는 일을 이루실 분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과도 연결된 분입니다.
「그분은 손에 곡식을 까부르는 삽을 들고 계신다. 그분은 자기 타작마당을 말끔히 깨끗하게 하시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겨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태복음 3:12 · 본디새김
타작한 것을 삽으로 공중에 던지면 상대적으로 무거운 곡식은 아래로 떨어지고, 가벼운 겨는 바람에 날려 분리됩니다. 그분은 겨를 불태우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밀을 곳간에 모아들이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심판의 이미지 안에 구별과 보존의 이미지가 함께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앞으로 오시는 분은 얼마나 압도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실지 기대하게 됩니다. 요한보다 강한 분, 거룩한 영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 손에 곡식을 까부르는 삽을 들고 심판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그분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십니다.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물로 들어가시는 분
그때에 예수가 갈릴리에서 요단 강으로 와서 요한 앞에 나섰다.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는 것이었다.마태복음 3:13 · 본디새김
이 장에서 가장 뜻밖의 문장입니다.
요한이 오실 것이라고 선포했던 분이 마침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선언하거나 거룩한 영과 불로 세례를 주시기 전에, 먼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십니다. 마태는 1절에서 요한이 광야에 나설 때와 같은 동사로 예수님께서 요한 앞에 나서시는 모습을 씁니다. 요한이 선포하던 바로 그분이 등장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며 그를 말리려 했다. 「나야말로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나에게 오십니까?」마태복음 3:14 · 본디새김
자신보다 강한 분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으니, 그 관계가 거꾸로 되었다고 느낀 것입니다.
요한은 회개해야 할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으시고, 마태도 예수님께서 회개해야 할 어떤 죄를 지으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는 이유를 요한의 세례가 요구하는 죄의 고백과 동일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도 이 차이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지금은 그대로 두어라. 우리가 이렇게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요한이 예수가 하려는 대로 두었다.마태복음 3:15 · 본디새김
마태는 예수님의 첫 말씀을 통해 그분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시거나 능력을 과시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왜 세례를 받으셔야 하는지 설명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의」는 문맥에 따라 정의, 올바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관계와 행동 등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에서 의는 단지 법정에서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삶과 행동이라는 의미로도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한 가지 해석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일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회개의 세례가 선포되는 자리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므로, 그것을 행하는 것이 의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세례자 요한이 「의의 길」로 왔다고 말씀하시므로(21:32),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일은 하나님이 맡기신 요한의 사역을 인정하고 그 길에 참여하시는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자리로 들어가시는 일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다른 자리에 서지 않으시고, 그들이 세례를 받는 바로 그 물로 들어가십니다. 이를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장차 그들의 죄를 담당하실 사명의 길로 들어가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와 연결될 때 의미가 깊어집니다. 그러나 15절 자체가 예수님의 세례를 죄의 대속이라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그것을 본문이 명시한 유일한 뜻으로 제시하는 데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해석은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방식이 바로 죄인들 가운데로 들어가시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모든 의를 이루어야 한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요한이 함께 이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이라는 말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이해가 완전히 틀렸다고 선언하지 않으시고, 요한이 예수님보다 작은 사람이라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에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들어 예수님의 행동을 말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요한에게 자신에게 세례를 주도록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요한의 봉사를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방식이 아니라, 요한이 맡은 사역 안으로 들어가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요한은 더 이상 예수님을 말리지 않습니다.
그가 앞서 선언한 것처럼, 자신보다 강한 분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강함은 자신보다 낮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는 태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왕으로 태어나셨다고 소개된 분, 요한보다 강한 분이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물가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는 첫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요?
마태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 답을 들려줍니다.
열린 하늘과 내려오는 영, 그리고 한 사람을 가리키는 목소리
예수는 세례를 받고 곧 물에서 올라왔다. 보아라, 하늘이 예수에게 열렸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고 자기 위로 오는 것을 보았다.마태복음 3:16 · 본디새김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을 단순히 구름이 갈라졌다는 자연 현상의 묘사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열리는 장면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거나 특별한 계시가 주어지는 사건과 연결될 때가 있습니다(에스겔 1:1). 마태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분 위에 내려오시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왜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는 일이 중요할까요? 이사야 42:1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붙들어 주는 종, 자신이 기뻐하는 선택된 사람을 소개하시며 자신의 영을 그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종은 민족들에게 정의를 가져올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마태는 이사야 42:1을 여기서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의 표현과 이미지 사이에는 분명한 주제적 연결이 있고, 마태는 나중에 이사야 42장의 말씀을 예수님께 직접 적용합니다(마태복음 12:17–21).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께 내려오시는 장면은 그분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수행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보아라,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났다.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두고 기뻐했다.」마태복음 3:17 · 본디새김
이제는 요한이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직접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밝힙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
이 말씀에는 구약의 두 가지 이미지가 함께 울려 퍼집니다. 하나는 시편 2편의 왕입니다. 시편 2:7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왕에게 아들이라고 선언하시는데, 이는 그 왕이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 다스리는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영을 주시는 이사야 42장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이며, 그 위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십니다. 이러한 연결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뿐 아니라 어떤 사명을 수행하실 분인지도 보여 줍니다.
왕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종이십니다.
물론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만으로 구약의 모든 왕권과 종의 이미지가 하나의 고정된 공식처럼 결합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편 2편의 아들, 이사야 42장의 영을 받은 종과 마태복음의 장면을 나란히 읽으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연결이 드러납니다.
이 선언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그때 처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까요? 마태는 이미 예수님의 탄생이 거룩한 영에게서 왔다고 설명했고, 그분을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을 이루실 분으로 소개했습니다. 따라서 3장의 선언은 그분의 정체성이 하늘로부터 공개적으로 밝혀지는 사건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지금까지 요한의 선포를 듣고, 그의 경고를 따라가며,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을 지켜보던 독자가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기뻐하시는가?
하나님의 기쁨이 선언되는 순간,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사람들에게 위대한 기적을 보여 주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여 그들을 굴복시키신 것도,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자신의 왕권을 선언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막 물에서 올라오신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예수님의 세례라는 한 행동에 의해서만 생겨났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소리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관한 선언이며, 그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 선언을, 요한이 말리던 바로 그 일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이라고 말씀하시며 행하신 자리에 놓았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왕권을 이해하는 방식을 새롭게 만듭니다. 우리는 흔히 강한 사람이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높은 사람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예수님은 그것이 지금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보다 낮은 사람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강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데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는 성령이 비둘기라고 말하지 않고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모습이 비둘기와 같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고, 내려오시는 방식이 비둘기의 움직임과 같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 본문은 그 모습을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16절의 「그는」은 문맥상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 마태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가 아니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형태로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에게만 직접 건네는 형태가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 음성을 들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누가 이 소리를 들었는지를 일일이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에서 올라오신 한 사람
마태복음 3장은 큰 소리로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요한이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가 이어졌고, 도끼와 불, 타작마당의 이미지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강한 분이 등장하시자, 그분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그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일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요한에게 나아온 사람들은 자기 죄를 고백하며 회개해야 했지만, 예수님은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두 장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여기에서 마태복음이 앞으로 펼쳐 갈 의의 의미가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의는 자기 지위나 종교적 자격을 내세우는 것으로 확인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삶에서 드러납니다. 다만 이 장의 중심은 우리도 순종해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보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아들이 자기의 지위를 내세우기보다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의를 위해 요단 강의 물속으로 들어가셨다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요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쳤습니다. 자신보다 강한 분이 오신다고 선포했고, 그분이 찾아오셨을 때 처음에는 말렸지만, 결국 그분의 말씀에 따라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십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예수님 위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외쳤던 길 위에 마침내 그분이 서 계십니다.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막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열린 하늘이 그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