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7장 · 쉰두 날의 성벽 공사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사람들의 이름

느헤미야 3장은 성경에서 가장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가 어느 문을 세웠고, 누구 옆에서 누가 보수했으며, 어느 구간에서 다음 구간까지 공사가 이어졌는지를 길게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명단에서 가장 먼저 눈여겨볼 것은 뜻밖에도 느헤미야 자신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16절에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는 아스북의 아들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이므로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왕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에 왔고, 백성에게 재건을 제안한 주인공이 정작 공사 담당자 명단에는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은 것입니다.

대신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이름으로 시작하여 제사장들, 여러 지방의 주민들, 관리들, 금세공인들, 향 제조인들, 상인들, 심지어 한 관리의 딸들까지 등장합니다. 그가 전체 사업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앞뒤 문맥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나 3장은 그를 중심에 세우지 않고, 실제 성벽을 보수한 사람들의 이름을 중심에 놓습니다.

이 장의 문장들은 마치 성벽의 돌들처럼 이어집니다.

「그 옆에서는」, 「그다음은」, 「그 옆에서는」.

한 사람이 맡은 구간이 끝나는 곳에서 다른 사람이 맡은 구간이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면 처음 등장했던 양 문으로 돌아옵니다. 기록된 이름들이 예루살렘을 둘러싸는 것입니다.

성벽은 돌을 연결하여 세우지만, 느헤미야 3장은 사람들의 이름을 연결하여 그 성벽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이름들 사이에는 아름다운 협력뿐 아니라 참여를 거부한 사람들의 모습도 들어 있습니다. 이 명단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꾸며 낸 기록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3장 본문 읽기 →

대제사장이 양 문을 세우다

느헤미야 3:1–5 본문 →

성벽 공사의 첫 장면이 제사장들인 이유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이 일어나 양 문을 세웠다. 그들은 그 문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문짝들을 달았다. 또 메아 망대까지, 하나넬 망대까지 이르는 구간을 거룩하게 구별했다.느헤미야 3:1 · 본디새김

양 문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가까운 북쪽 또는 북동쪽 구역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 이름이 양의 출입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본문은 그 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종교적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성전을 섬긴다는 이유로 도시의 성벽을 남의 일처럼 여기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맡은 구간을 세웁니다.

동시에 그들의 작업에는 다른 구간과 구별되는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했다.」

여기서 이 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모든 공사 구간이 똑같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히 방어 시설을 갖춘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기로 택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런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일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참여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적인 일과 일상적인 노동이 두 세계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제사장들도 문짝을 달고 성벽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 옆에서는」이라는 작은 표현

그 옆에서는 여리고 사람들이 세웠고, 그 옆에서는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세웠다.느헤미야 3:2 · 본디새김

「그 옆에서는」은 문자적으로는 「그의 손 곁에」라는 공간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성벽의 어느 구간이 끝나는 곳에서 다음 구간이 시작됩니다. 기록은 그 구간을 맡은 사람의 이름을 따라 이동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세우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주민만이 아닙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뒤에 등장하는 드고아, 사노아, 기브온, 미스바, 그일라 등의 사람들에게서도 반복됩니다.

성벽은 예루살렘에 있지만, 그 회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주변 지역까지 넓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장에서 사람들은 좋은 일을 위해 자신들의 손을 강하게 했습니다. 이제 3장에서는 바로 그 사람들이 성벽을 강하게 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결심을 표현하던 말이 실제 노동을 묘사하는 말로 이어집니다.

모두가 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옆에서는 드고아 사람들이 보수했다. 그러나 그들의 유력자들은 자기 주인들의 일을 위해 목을 숙이지 않았다.느헤미야 3:5 · 본디새김

계속해서 이름과 작업이 이어지던 명단에 갑자기 「그러나」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목을 숙이지 않았다」(⁨צַוָּאר⁩)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목을 일에 가져오지 않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노동이나 복종의 요구에 자신을 내어놓지 않았다는 생생한 비유입니다.

원문의 아도네헴(⁨אָדוֹן⁩)은 「그들의 주인들」로 읽을 수도 있고, 권위자를 높이는 표현이나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공사 감독자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뜻인지,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뜻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재건 작업에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동기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교만해서였는지,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는지, 공사 자체에 반대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시의 공동체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재건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드고아 사람들 전체가 거부한 것도 아닙니다. 유력자들이 참여하지 않았을 뿐, 드고아 사람들은 공사를 맡았습니다.

드고아 사람들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참여가 반드시 지도층의 모범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유력자들이 목을 숙이지 않았지만, 주민들은 성벽을 세웠습니다.

금세공인과 향 제조인, 관리와 딸들이 같은 성벽을 세우다

느헤미야 3:6–12 본문 →

성벽을 세우는 데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 옆에서는 할해야의 아들이자 금세공인 가운데 하나인 웃시엘이 보수했다. 그 옆에서는 향 제조인 가운데 하나인 하나냐가 보수했다. 그들은 넓은 성벽까지 예루살렘을 복구했다.느헤미야 3:8 · 본디새김

이들은 돌을 쌓는 전문 건축공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금속을 다루거나 향을 제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작업을 한 종류의 전문 기술자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여러 직업과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구간을 책임졌습니다.

물론 이들이 직접 모든 돌을 쌓았는지, 일꾼들을 조직하거나 비용을 부담했는지까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공사에 참여하고 해당 구간을 맡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바야아즈부(⁨עָזַב⁩)는 일반적으로 「버려두다」라는 뜻의 동사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해당 구간을 손대지 않고 남겨 두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반면 이 문맥에서는 「복구했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전통도 있습니다.

복구했다고 읽으면 금세공인과 향 제조인들이 넓은 성벽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보수했다는 뜻이 됩니다. 남겨 두었다고 읽으면 그 구간은 특별한 사정으로 보수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본문은 어느 쪽인지 결정할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8절 앞뒤에서 이 사람들이 성벽 보수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합니다.

이어서 기록은 예루살렘의 관리들을 소개합니다.

그들 옆에서는 예루살렘 구역 절반의 관리인 훌의 아들 르바야가 보수했다.느헤미야 3:9 · 본디새김
그 옆에서는 예루살렘 구역 절반의 관리인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보수했다.느헤미야 3:12 · 본디새김

두 사람 모두 예루살렘 구역 절반의 관리라고 소개됩니다. 이 표현은 당시 행정 구역이 여러 단위로 나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어느 범위까지 권한을 행사했는지, 오늘날의 어떤 행정직과 정확히 대응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관리라는 지위가 성벽 공사에서 면제받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일을 거부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행정적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실제로 재건에 참여했습니다. 본문은 높은 지위 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공동체의 필요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살룸의 딸들이 명단에 남은 이유

12절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딸들」입니다.

그들이 직접 돌을 운반하고 쌓았는지, 인력과 물자를 제공했는지, 다른 방식으로 작업에 참여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참여가 아버지의 이름 속에 묻히지 않고 별도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는 성벽 재건을 책임진 사람들이 남성 관리나 전문 기술자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사회적으로 더 큰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반드시 더 많이 기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명단에서 쉽게 빠질 수 있었던 사람들의 참여가 명시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벽은 무명의 집단이 막연하게 세운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이름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힘을 보탠 결과였습니다.

성문에서 못과 집 앞까지, 도시의 삶을 따라 이어지는 공사

느헤미야 3:13–19 본문 →

반복되는 문짝과 잠금쇠는 무엇을 말하는가

13–15절에서는 골짜기 문, 쓰레기 문, 샘 문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골짜기 문은 하눈과 사노아 주민들이 보수했다. 그들은 그 문을 세우고 문짝들과 잠금쇠들과 빗장들을 달았다. 또 쓰레기 문까지 성벽 천 큐빗을 보수했다.느헤미야 3:13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서 물고기 문과 옛 문을 보수할 때 사용된 표현과 닮아 있습니다.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어도 성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방어가 불완전합니다.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으면서도 필요한 때에는 출입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짝과 잠금쇠와 빗장은 장식이 아니라 도시의 안전을 위한 실제 시설입니다.

더욱이 13절에서는 골짜기 문에서 쓰레기 문까지 천 큐빗의 성벽을 보수했다고 기록합니다. 여러 구간 중 일부는 상당히 긴 범위를 맡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성벽 재건은 단순히 무너진 돌을 다시 쌓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읍의 출입, 방어, 이동이 다시 가능하도록 도시의 기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왕의 정원과 다윗의 무덤들

샘 문은 미스바 구역의 관리인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보수했다. 그는 그 문을 세우고 지붕을 덮고 문짝들과 잠금쇠들과 빗장들을 달았다. 또 왕의 정원 곁에 있는 셀라 못의 성벽을 다윗 성에서 내려오는 계단까지 보수했다.느헤미야 3:15 · 본디새김

이 구간은 예루살렘 남쪽의 수원과 관계된 장소들로 이해됩니다. 셀라 못은 물 공급과 관련된 시설이었고, 그 주변의 성벽과 계단 역시 도시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확한 지형 복원에는 불확실성이 있지만, 목록이 도시의 다양한 시설을 따라 이동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다음은 벧술 구역 절반의 관리인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가 보수했다. 그는 다윗의 무덤들 맞은편까지, 만들어 놓은 못까지, 용사들의 집까지 보수했다.느헤미야 3:16 · 본디새김

열왕기상 2:10에 따르면 다윗은 다윗 성에 장사되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이 오래된 왕실의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를 지나며 성벽 공사를 기록합니다. 그 장소는 공사 구간을 설명하는 지리적 기준점으로 등장합니다.

성벽 재건은 역사와 단절된 새로운 도시를 처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다윗의 무덤들이 있고, 왕의 정원과 못과 계단이 있는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도시는 단순한 건축물의 집합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과 기억이 쌓여 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의 지명들은 바로 그 삶의 공간을 따라 우리를 인도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루살렘의 폐허가 다시 세워지는 모습은 포로 생활 이후의 회복에 관한 구약의 약속들과도 연결됩니다. 이사야 58:12에는 오래된 폐허를 다시 세우고, 무너진 기초를 다시 놓으며, 사람들이 다닐 길을 회복시키는 일이 묘사됩니다. 이사야 61:4에도 오래된 폐허를 다시 세우고 황폐해진 성읍들을 복구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말씀들을 느헤미야 3장의 각 공사 구간에 직접 대응하는 예언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 집 맞은편에서 시작되는 책임

느헤미야 3:20–32 본문 →

같은 이름들이 다시 나타나다

20절부터는 성벽이 꺾이는 곳, 엘리아십의 집, 여러 개인의 집 앞을 지나며 작업이 이어집니다.

그다음은 삭개의 아들 바룩이 열성을 다해 둘째 구간을 보수했다. 성벽이 꺾이는 곳에서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입구까지였다.느헤미야 3:20 · 본디새김

바룩에게는 「열성을 다해」라는 특별한 표현이 붙습니다. 원문의 해당 낱말은 일반적인 보수 기록과 달리 해석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강한 열심을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그 뜻을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다음은 학고스의 손자이며 우리야의 아들인 므레못이 둘째 구간을 보수했다. 엘리아십의 집 입구에서 엘리아십의 집 끝까지였다.느헤미야 3:21 · 본디새김

므레못은 이미 4절에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이처럼 같은 사람이나 집단이 여러 구간에 등장하는 것은 이번 장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드고아 사람들은 5절과 27절에 등장합니다.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 역시 4절과 30절에 나옵니다.

사람마다 맡은 작업의 범위가 달랐고, 어떤 이들은 둘 이상의 구간을 보수했습니다. 또한 같은 이름이 반복된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조상의 이름까지 일치하는 경우에는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상세한 족보와 구간 정보는 명단이 단순한 상징적 인물 목록이 아니라, 실제 참여자와 담당 구간을 구체적으로 구분하려는 기록임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집 앞을 보수하는 사람들

그다음은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들의 집 맞은편을 보수했다. 그다음은 아나냐의 손자이며 마아세야의 아들인 아사랴가 자기 집 옆을 보수했다.느헤미야 3:23 · 본디새김

여기서 성벽의 위치를 설명하는 기준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성문과 망대, 못과 계단 같은 공공시설이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들의 집 맞은편」, 「자기 집 옆」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28절에서도 제사장들이 저마다 자기 집 맞은편을 보수했다고 기록합니다. 29절에서는 사독이 자기 집 맞은편을 보수하고, 30절에서는 므술람이 자기 방 맞은편을 보수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공동체 전체를 위한 방어 시설이지만, 동시에 개별 주민의 생활 공간과 직접 맞닿아 있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도시 전체가 위험해집니다. 그러나 그 위험은 각자가 사는 집의 안전과도 연결됩니다.

물론 본문은 왜 그렇게 작업을 배분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기 집과 가까워 일하기 편리했기 때문인지, 그곳을 보호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인지, 다른 조직상의 이유가 있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재건이라는 큰일이 각자가 살아가는 장소에서 맡은 구체적인 책임으로 나뉩니다.

한 사람이 자기 집 앞을 완벽하게 보수했더라도 옆 구간이 허물어진 채 남아 있다면 도시 전체의 방어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책임은 다른 사람의 책임과 분리되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성벽을 따라 다시 양 문으로

25–32절에서는 왕궁에 딸린 시설과 경비대 뜰, 오벨, 말 문, 동쪽 문, 밉갓 문,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거주하는 장소를 지나면서 공사 기록이 계속됩니다.

26절에 등장하는 느디님은 성전 봉사와 관련된 집단입니다. 다만 이 절은 그들이 오벨에 살았다는 사실을 기록할 뿐, 해당 절 자체에서 느디님이 특정 성벽 구간을 직접 보수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튀어나온 큰 망대 맞은편에서 오벨 성벽까지 둘째 구간을 보수했다.느헤미야 3:27 · 본디새김

5절에서 그들의 유력자들이 공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이 목록은 거부한 유력자들에 대한 평가로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력자들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일했던 드고아 주민들의 추가 작업을 기록합니다.

말 문을 지나고, 동쪽 문을 지나며, 느디님과 상인들의 집에 이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모퉁이 위층 방과 양 문 사이에서는 금세공인들과 상인들이 보수했다.느헤미야 3:32 · 본디새김

3장의 첫 절에서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제사장들이 세웠던 바로 그 문이 다시 등장합니다. 첫 절이 양 문에서 시작했고 마지막 절이 다시 양 문으로 돌아왔으므로, 기록은 성벽을 따라 예루살렘을 한 바퀴 둘러본 듯한 형태를 이룹니다. 각 지명의 정확한 위치를 모두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 문학적 구조는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제사장들이 등장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금세공인들과 상인들이 등장합니다. 그 사이에는 관리와 주민, 레위 사람들과 여러 가족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사회적 역할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성벽의 다른 부분을 맡았습니다.

산발랏이 조롱한 것은 돌뿐이 아니었다

느헤미야 3:33–35 본문 →

조롱이 시작되다

32절까지의 명단은 성벽을 다시 세우는 사람들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33절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산발랏은 우리가 성벽을 세우고 있다는 말을 듣자 화가 치밀었고 몹시 격분하여 유다 사람들을 조롱했다.느헤미야 3:33 · 본디새김

앞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도 산발랏은 그 소식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2:10). 이제 실제로 성벽이 세워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더욱 강하게 반응합니다.

32절까지는 「누가 보수했다」는 문장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성벽을 세우고 있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명단 속에서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분산되어 있던 작업이 다시 하나의 「우리」라는 공동체의 행동으로 묶입니다.

다섯 가지 비웃음

그는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을 꺼내 이렇게 말했다. 「이 무력한 유다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가? 자기들을 위해 복구할 것인가? 제물을 바칠 것인가? 하루 만에 끝낼 것인가? 불에 탄 돌들을 흙더미에서 되살려 낼 것인가?」느헤미야 3:34 · 본디새김

이 말은 질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 답을 구하는 질문들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강조하려는 조롱입니다. 산발랏은 유다 사람들이 가진 힘이나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비웃고 있습니다.

「하루 만에 끝낼 것인가?」

이 말에는 공사의 규모와 소요되는 시간이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불에 탄 돌들을 흙더미에서 되살려 낼 것인가?」 여기서는 돌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산발랏은 무너진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그 도시의 회복 가능성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앞서 느헤미야가 직접 확인했던 현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벽은 실제로 허물어져 있었고, 성문들은 불에 탔으며, 돌과 잔해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산발랏은 없는 문제를 꾸며 낸 것이 아닙니다.

실제 어려움을 근거로 그 일이 불가능하다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불가능하다고 비웃는 사람은 반드시 사실이 아닌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실제 어려움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합니다.

산발랏은 무너진 돌들을 보고 재건의 불가능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바로 그 돌들이 있는 자리에서 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우 한 마리면 무너질 성벽

도비야는 산발랏의 말을 이어받습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가 그 곁에 있다가 말했다. 「게다가 그들이 짓는 것쯤은, 여우가 올라가기만 해도 그들의 돌 성벽을 무너뜨릴 것이오.」느헤미야 3:35 · 본디새김

완공되지 않은 공사를 두고 과장하여 비웃는 말입니다. 도비야는 사람들이 들인 노력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인상을 주려 합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성벽 전체가 절반 높이까지 이어졌다고 보고합니다. 따라서 산발랏과 도비야는 완성된 성벽을 보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상태를 비웃고 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패의 증거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사가 미완성이라는 사실과 공사가 실패했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은 히브리어 본문의 절 구분을 따라 3:33–38까지를 3장에 포함합니다. 일부 다른 성경 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4:1–6으로 구분합니다. 「자기들을 위해 복구할 것인가?」라는 부분은 원문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복구할 수 있겠느냐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그들이 일하도록 내버려 두겠느냐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제물을 바칠 것인가?」는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식의 빈정거림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질문의 정확한 뉘앙스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조롱 앞에서 느헤미야가 드린 거친 기도

느헤미야 3:36–37 본문 →

「저희가 멸시거리가 되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 다음에 느헤미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저희 하나님, 들어 주십시오. 저희가 멸시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욕을 그들의 머리 위로 돌려주시고, 포로살이하는 땅에서 그들을 약탈거리로 넘겨주십시오.」느헤미야 3:36 · 본디새김

이 기도는 앞선 장들의 기도보다 훨씬 거칩니다.

이스라엘은 포로 생활을 경험한 백성입니다. 나라를 잃고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신들을 모욕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처지에 놓이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기도의 거친 면을 약화시키거나, 단순히 정의를 위한 아름다운 기도라고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상대방이 겪게 될 고통을 구체적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을 덮지 마시고, 그들의 죄가 당신 앞에서 지워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성벽을 세우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노엽게 했기 때문입니다.」느헤미야 3:37 · 본디새김

느헤미야에게 이 재건은 단순한 건축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살아갈 도시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비웃고 방해하는 것은 그에게 개인적인 불쾌감을 넘어서는 문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말은 사람들의 능력을 비난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일하려는 의지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공격 앞에서 직접 보복에 나서는 대신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가져갑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이 느헤미야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기도의 모든 표현을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드린 기도 가운데 분노와 두려움, 복수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기도도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요구가 모든 시대의 신앙인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행동 지침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께 가져간다는 사실과, 그 분노의 표현이 우리에게 윤리적 질문을 남긴다는 사실은 함께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 거친 기도를 들려준 뒤, 의외로 조용한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79:12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한 이웃들에게 그 모욕을 되돌려 달라는 기도가 나타납니다. 시편 137:7–9에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품었던 훨씬 더 격렬한 분노가 담겨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복음 5:44). 이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직접 인용하거나 해설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읽을 때 함께 고려해야 할 후대의 윤리적 가르침입니다.

성벽은 절반 높이까지 이어졌다

느헤미야 3:38 본문 →

우리는 성벽을 세웠고, 성벽 전체가 절반 높이까지 하나로 이어졌다. 백성에게는 일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느헤미야 3:38 · 본디새김

성벽 공사의 구조와 그 공사를 묘사하는 문장의 구조가 서로 맞닿습니다. 명단에서는 사람들이 나란히 이어졌고, 공사 현장에서는 성벽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마음(⁨לֵב⁩)은 생각과 의지, 결단을 포함하는 사람의 내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백성에게는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이 표현을 앞서 드고아의 유력자들이 「목을 숙이지 않았다」는 말과 비교해 보면 뜻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들은 몸을 일에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백성에게는 일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목을 숙이지 않았고, 다른 쪽에서는 마음을 내어놓았습니다.

산발랏은 그들이 하루 만에 끝낼 수 있겠느냐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하루 만에 끝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조롱에 맞서 기도했고, 백성은 성벽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즉각적인 완성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아직 절반밖에 올라가지 않았지만, 흩어져 있던 것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데서 회복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의 표현은 성벽이 그 절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데, 문맥상 대체로 성벽의 높이가 절반까지 올라간 것으로 이해됩니다. 정확한 수치나 구간별 완성 상태까지 본문이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1–32절은 여러 구간의 보수 작업을 완성된 것처럼 기술하는 부분도 있지만, 38절은 전체 공사가 아직 진행 중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앞의 명단을 모든 작업이 시간 순서대로 완공되는 모습을 기록한 일지로 읽기보다는, 누가 어느 구간을 담당했는지를 성벽 전체에 걸쳐 보여 주는 공사 기록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맺음 — 절반 높이의 성벽

느헤미야 3:1–38 본문 →

성벽은 아직 절반 높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절반 높이의 성벽은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이 하나의 일을 위해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회복을 이루어 가시는 일은 특별한 한 사람의 행동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구간을 맡고, 그 구간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구체적인 형태를 얻습니다.

그럼에도 이 성벽이 완성된다고 공동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예루살렘 주민들은 경제적 불의와 내부 갈등, 언약에 대한 불순종을 마주하게 됩니다. 따라서 3장의 성벽 재건은 공동체 회복의 전부가 아니라 그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완성된 성벽이 아닙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성벽을 따라,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벽 위로 여전히 바람이 통하고, 곳곳에는 아직 쌓아 올려야 할 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맡은 구간에서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